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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 문장[1] |
러시아 제국 체사레비치 Цесаревич России Tsesarevich of Russi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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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마지막 체사레비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 |
<colbgcolor=#ffce00> 초대 | <colbgcolor=#fff,#1f2023>파벨 페트로비치 (1762년–1796년) |
말대 |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1904년–1917년) |
시행 | 1762년 1월 7일 |
폐지 | 1917년 3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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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를 이르는 말. 차르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1721년에 표트르 1세가 차르라는 칭호를 버리고 임페라토르를 쓰기 시작하면서[2] 체사레비치라는 단어도 쓰지 않게 되었다. 이후 1762년에 장남 파벨 1세를 얻은 표트르 3세가 파벨을 체사레비치로 선포하기는 했으나, 이것이 황위 계승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이후 1796년에 즉위한 파벨 1세는 곧바로 아들인 알렉산드르 1세에게 체사레비치라는 칭호를 주었으며, 이것은 황태자를 뜻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이듬해인 1797년에 법으로 제정되어, 러시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된다.
2. 목록
군주제에서는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왕위(제위)가 옮겨지는 것이 보편적인 만큼, 체사레비치였다가 차르로 즉위한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체사레비치까지 올랐지만 차르는 되지 못한 인물들만 열거한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 (1690 ~ 1718)[3]: 표트르 1세의 장남. 반역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했으며, 따라서 표트르 1세 사후 황위는 황후 예카테리나 1세에게 전해졌다가 표트르의 손자로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로마노프의 아들인 표트르 2세에게 넘어갔다.
-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1843 ~ 1865): 알렉산드르 2세의 장남. 부황보다 먼저 병사하여, 황위는 동생인 알렉산드르 3세에게 넘어갔다.
-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1904 ~ 1918): 니콜라이 2세의 외아들.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 자체가 멸망하면서 황제에 오르지 못했고, 얼마 뒤 처형되었다.
[1] 러시아 제국의 중형 국장. 1883년부터 1917년까지 체사레비치의 문장으로 사용되었다.[2] 다만 관습적으로 남아서 이후로도 러시아의 황제를 차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기는 했으나,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도 마찬가지.[3] 체사레비치가 황태자를 가리키는 칭호가 되기 이전 사람이므로 엄밀히 말해 체사레비치가 아니었으나, 러시아 황위 계승자로서 황제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은 같기에 함께 열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