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차르국 Русское царство Tsardom of Russi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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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차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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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군함기[1] |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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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7년 ~ 1721년 | |||||
성립 이전 | 칭제 이후 | ||||
모스크바 대공국 | 러시아 제국 | ||||
시비르 칸국 | |||||
사하 연맹 | |||||
위치 | 동유럽 | ||||
수도 | 모스크바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2] | ||||
국가원수 | 차르 | ||||
주요 차르 | 이반 4세 표트르 대제 | ||||
언어 | 러시아어 | ||||
종족 | 러시아인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주요사건 | 1547년 이반 4세의 대관식 → 건국 1721년 표트르 대제의 제국선언 | ||||
통화 | 루블 |
언어별 명칭 | |||
러시아어 | Русское царство / Росси́я / Русь (Russkoje carstvo / Rosíja / Ru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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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반 뇌제가 차르의 호칭을 쓰면서 자신이 통치하던 모스크바 대공국을 개편한 나라. 루스 차르국이라는 국호는 표트르 대제의 시대가 되면서 러시아 제국으로 바뀐다.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러시아 제국은 어떠한 단절 없는 동일한 국가로서 사실상 시대적 구분에 가깝다.[3] 조선과 대한제국 관계와 비슷하다.[4]제정 시대부터 러시아 학자들은 각각 수도였던 키예프,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시대를 구분하여 모스크바 대공국과 루스 차르국 기간을 합해서 모스크바 루스(Московская Русь)[5]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한편 이반 3세부터 표트르 1세까지의 기간을 루스 국가(Русское государство)로 명명하기도 한다. 모스크바 차르국(Московское царство)이라는 명칭도 자주 쓰인다.
이렇게 후대에까지 명칭이 엄격하게 정리되지 않은 것은 키예프 루스 시대의 한 류리코비치 구성원이 여러 크냐지 작위를 동시에 차지하는 전통과 관념이 이어져서 당대에 이미 혼동되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정식 국가 명칭은 키예프 루스와 똑같은 루스/러시아였고, 당대인들에게 루스는 한 군주가 모스크바 대공국을 비롯한 여러 공국과 민족들을 통치하는 일종의 동군연합 혹은 여러 제후국들의 연합체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손자이자 2대 모스크바 크냐지인 유리 다닐로비치는 블라디미르의 대크냐지이자, 노브고로드의 크냐지였다. 이반 3세의 최상위 작위는 '전 루스의 군주(Государь Всея Руси)'였다. 즉 이들에게 있어서 모스크바 크냐지는 자신들의 가진 여러 하위 작위 중 하나에 불과했다.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국명은 루스이며, 모스크바 대공국은 루스를 구성하는 제후국 혹은 지방 중 하나에 불과했다.[6]
2. 역사
2.1. 류리코비치 왕조 시대
루스 차르국의 시초는 키예프 루스의 일파인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시작된다. 15세기 이반 3세는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인근에 널려있던 수많은 소국들을 통합하여 연합체적인 모습으로 러시아를 키워나갔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이반 3세의 뒤를 이은 이반 뇌제는 기존의 크냐지라는 명칭 대신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나름대로 통합적인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중앙집권적인 루스 차르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차르의 권력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모스크바 대공국 말기에는 바실리 3세 사후 섭정을 맡은 엘레나 글린스카야가 사망[7]한 후로 사실상 귀족의회인 보야린 두마(Боярская дума)에 의해 통치되는 귀족정 국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반 4세는 권력 구도에서 이탈한 상태였다. 그러나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해 비귀족 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데 성공하고 일시적으로 전제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이반 4세가 죽은 후 러시아 내부는 혼란 시대라고 불리는 동란의 시기에 빠져들게 된다. 강대국이었던 스웨덴이 개입해서 차르를 갈아치우는가 하면 가짜 드미트리와 같은 인물들이 제위를 찬탈하려고 하거나,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의해 수도인 모스크바가 함락되고 차르가 바르샤바로 끌려나와 폴란드 군주 앞에서 무릎을 꿇고, 폴란드 왕태자가 차르에 즉위하는 등 제대로 굴욕을 당했으나 로마노프 가문을 중심으로 결성된 국민군이 모스크바를 탈환하자 동란시대의 역사는 끝나게 된다.
2.2.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
이후 류리크 왕조의 외척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되면서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러니 초기 로마노프 왕가의 차르들은 권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알렉세이 3세와 표도르 3세 시대에는 차르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나기도 했다.이 시기에 러시아는 동유럽을 벗어나 시베리아와 극동을 대대적으로 탐험하고 정복하게 되며, 러시아의 탐험대 겸 군대가 청-조선 연합군과 두 차례 충돌한 나선정벌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후 제정시대에 본격적으로 이 지역을 개척하게 된다.
이후 표트르 대제의 제정 선포로 러시아 제국으로 국호가 변경된다.
3. 정치
루스 차르국의 주요 정치 기구는 귀족 의회인 보야르 두마(Боярская дума), 신분 대표 의회인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 성직자 회의인 오스뱌셴니 소보르(Освященный собор)[8]였고 여기에서 국가 중대사와 정책의 기본적인 방향을 결정하였다. 두마는 현대 러시아에서 의회의 명칭으로 사용하는데, 당시의 두마는 동시대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게 귀족과 엘리트 중심의 자문기구에 가까웠다. 두마는 15세기까지 전통적인 봉건 귀족인 보야르(Боя́ре)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보야르들 사이의 계급에 따라 군주가 임의로 임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초 개혁되어 보야르 이외의 구성원들도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이후 두마는 총 네 개의 계급으로 정착한다.첫번째는 아까 설명한 전통적 지주 귀족인 보야르이고, 그 다음가는 두번째 계급인 오콜니치(Окольничий), 세번째 계급인 드볼랴닌(дворянин)과 마지막 계급인 두마 서기(Думный дьяк)로 이루어져 있었다.
드볼랴닌은 전통적 봉건 귀족인 보야르와는 구별되어 오스만 제국처럼 봉작영지를 가지고 이 영지에서 봉작을 수행하는 ‘봉작 귀족‘이라고 볼 수 있다. 몰락한 보야르, 농민, 카자크, 군인, 노예 등등 다양한 출신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야르이더라도 따로 봉직을 수행하면 드볼랴닌이 될 수 있다. 이들은 봉작이 수행되는 기간 동안에는 땅과 소작농, 그리고 각종 귀족으로서의 권리를 부여받지만 봉작이 끝나면 이를 모두 반환해야 했다. 따라서 이들이 두마에서 수행하는 역할 역시 주로 두마가 결정한 사항을 ’집행‘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다만 이 드볼랴닌들은 혼란 시대 이후 정부의 통제력과 행정력이 극도로 취약해지면서 규정과는 달리 실질적으로는 보야린들처럼 지위를 세습해 해당 지방에 눌러앉는 경우도 많아진다. 여러모로 조선의 양반과 같지는 않으나 원칙적으로는 세습되지 않는 특권계급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두마 서기는 사회적 계급도 두마에서의 지위도 가장 낮다. 이들은 행정 문서를 작성하는 등 실무적 역할을 주로 도맡아 했으며, 일부 보야르와 오콜니치들이 경력을 쌓기 위해 서기 역할을 맡는 경우도 있었다.
두마는 기본적으로 국가 최고의 행정, 입법 조직 역할을 했지만, 정작 그 정원이나 역할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정된 것이 없었고 관습과 군주의 성향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이를테면, 차르의 권한이 강력했던 이반 4세까지 두마의 정원은 30명 안쪽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후 수가 점점 늘더니 혼란 시대를 맞이해 정원이 크게 증대되어 표도르 3세 때에는 무려 167명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명예직으로 작위를 뿌리다시피 한 것에 가까웠고, 실제로는 점점 갈수록 두마의 지위는 쇠퇴했다.
두마 의장은 관례적으로 차르가 맡았지만, 차르가 회의에 직접 참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경우 보야르, 그리고 오콜니치들이 회의를 주도했고 사안이 결정되면 서기들이 결정된 사안에 대한 행정 문서의 초안을 작성해 차르에게 가져간다. 차르가 이를 승인하면 중앙 행정 부처로 넘겨지며 봉작을 수행하는 드볼랴닌들이 주도적으로 지방에 이를 집행하는 식이었다.
두마가 하는 역할은 다른 나라들에서 의회가 하는 역할과 다르지 않았다. 두마는 세금 문제를 논의하고, 차르와 외교 정책을 집행했으며, 전쟁을 선포하거나 평화 조약을 승인하고, 법을 바꾸거나 폐기했다. 또 지방 관리들을 감독하는 역할도 맡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순전히 관습에 의한 것이었고 정작 두마는 존재 자체가 법에 규정되지 않은 기관이라, 차르가 누가 되냐에 따라서 그 위상이 천차만별이었다.
결국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던 두마는 1700년 서구화 개혁을 추진하던 표트르 1세에 의해 폐지된다. 1711년에 정부 상원(Правительствующий сенат)이라는 것을 설치하긴 하는데 이 기구는 의회는 전혀 아니었고, 차르가 수도에 부재할 때 역할을 대신 하는 측근 모임에 가까워서 결국 러시아에 중앙 의회 기구는 수백년간 설치되지 못한다.
또한 모스크바 루스 시대 전체에 걸쳐서 모스크바 대주교(1589년 이후에는 총대주교)가 섭정이나 공동 통치자였던 경우가 상당히 많다.[9] 국가 기관이랑 교회 기관이 제대로 구별 안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때의 흔적으로 추측된다.
4. 행정
4.1. 중앙 행정
고위 정치기구에서 정책의 기본적인 방향을 결정하면 아래에서 각 담당 분야가 있는 프리카즈(Приказ)가 실무를 담당했다. 다른 유럽 국가 행정부의 발전 양상과 마찬가지로 원래 분령시기 모스크바 크냐지 궁의 서기(Дворецкий)가 행정 및 재정 업무를 처리하다가 점차 전문화되고 비대해지면서 각자 부서가 생긴 결과였다. 혹은 보야르 두마의 하위 실무 조직이 확장된 결과라는 설도 있다. 프리카즈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시기는 모스크바 대공국 말기이던 바실리 3세 시대로, 두마가 개혁된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프리카즈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각 프리카즈에는 한명 혹은 그 이상의 수디야(судья)[10]가 있고, 그 밑에 서기와 부서기가 있다. 수디야는 대부분의 경우 보야르나 드볼랴닌이 임명되었는데 가끔 스톨니크(Стольник)라는 궁정 하위 관리가 임명되기도 했다. 수디야가 여러명일 경우 최소 한명은 행정 처리를 담당하는 두마 서기나 그냥 일반 서기가 임명되었다.
프리카즈의 수장이 ‘재판관’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각 프리카즈들은 행정부이면서 동시에 사법부의 역할도 수행했다. 수디야들은 자신이 관할하는 영역에 해당하는 사법 사건의 재판을 맡아, 각 수디야들의 합의에 따라 판결을 내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점점 후기로 갈수록 수석 재판관이 합의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결정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러한 폐단은 1718년 표트르 1세의 개혁으로 비로소 종식되었다.
루스 차르국은 비슷한 시기의 다른 국가에 비해 매우 관료화된 국가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다른 국가가 중요한 공문서에 국왕이 직접 인장이나 서명을 넣어 승인을 받았지만, 루스 차르국은 아래의 관료가 정해진 형식에 따라 차르의 이름을 적었고 실제 발행 주체가 누구인지는 따로 기입되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공문서 발행에 차르의 참여가 필수적이지 않았다. 이는 러시아 전제정이 차르 개인의 일인 독재정이 아니라 정반대로 탈개인화된 관료주의적 체제에 가깝다는 점을 보여준다.[11] 실제로 중세 러시아사 연구도 90년대까지만 해도 무소불위한 권력을 휘두르는 차르 개인에 중점을 맞췄다면, 2000년대부터는 사적 지배가 아닌 시스템에 의한 지배를 강조하면 편이다.
문제는 모스크바 루스 시대의 행정의 구체적인 이행과 처리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사료가 부족하다.[12] 게다가 동란시대로 인해 류리코비치조 국가가 붕괴된 이후 서구화 개혁을 통해 로마노프조 국가가 형성되는 격변의 시대에서 정황상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거나[13] 서류상으로만 남은 걸로 의심되는 부서들이 존재하며 또한 필요에 따라 임시 프리카즈가 창설되거나, 프리카즈들끼리 통폐합되거나 분할되거나, 기능과 담당 영역이 겹치는 프리카즈들이 존재하거나, 상위 및 하위 프리카즈들을 두거나, 중앙과 별개로 지방당국 및 자치단체들이 자체 프리카즈들을 두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때문에 프리카즈들에 대해 현대 학자들도 논란이 있고 완전히 파악하는건 불가능하다는 점에 유의해야한다.
아래는 주요 프리카즈들 목록이다. 초기에는 이즈바(Изба), 드볼(Двор), 드보레츠(Дворец), 팔라타(Палат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이 중에서 볼쇼이(Большой)라는 이름이 붙은 부서는 대게 모스크바의 중앙정부 관할이며, 지역적 속성의 부서는 체트베르티(Четверть)로 부르기도 한다.
- 프리카즈 볼쇼고 드보르차(Приказ Большого дворца): 사실상의 중앙 행정부 및 실무 조직. 주로 왕실의 수입 및 지출과 차르 직할령 관리를 담당했다. 드볼초비 프리카즈(Дворцовый приказ)라고 불리기도 한다.
- 프리카즈 볼쇼고 프리호다(Приказа Большого прихода): 중앙 봉직자들에 대한 급여를 지급했다.
- 젬스키 프리카즈(Земский приказ): 수도 모스크바의 방위, 조세, 재판 담당 부서이다.
- 페차트니 프리카즈(Печатный приказ): 출판 및 인쇄 관리 부서이다. 정부 기관들의 공문서 발행이나 민간 인쇄업자들에게서 수수료를 징세했다.
- 카존니 프리카즈(Казённый приказ): 원래 재무부로 여겨졌는데 최근 학자들은 일종의 왕실 보물고 관리국이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전자를 뒷받침하는 가장 큰 근거는 당시 러시아에 있었던 영국 외교관, 의원인 자일스 플레처의 기록이었는데, 그가 카죤니를 중앙 재무부 정도로 묘사했으나 자국의 영국 재무부의 모습을 투영한 오해라는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 수준으로 화폐 경제가 발전하지 못했고, 의회에 재정 보고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었기에 영국 수준으로 중앙집권화된 단일의 재무기관은 없었고 실제 재무부의 기능은 볼쇼고 드보르차와 볼쇼고 프리호다가 담당했다는데 중점을 맞춘다.
- 포솔스키 프리카즈(Посольский приказ): 외교부로써 프리카즈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료가 남아있다. 타국과의 관계와 외국 대사들 접대, 외국인 상인들 관리 및 해외 자본 투자 유치, 자국 엘리트들의 해외 유학, 신규 점령지 관리[14] 등을 담당했다. 1부는 교황청,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주요 열강들과의 외교 담당, 2부는 스웨덴, 폴란드, 오스만, 크림 칸국 등 주변국들 담당, 3부는 덴마크, 브란덴부르크 등 일부 북유럽과 중부유럽 국가 담당, 4부는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칼미크 등 동방 국가들 담당, 5부는 중국, 시베리아 국가들 등 극동 담당이었다.
- 첼로비티 프리카즈(Челобитный приказ): 일종의 민원실 및 신문고. 이러한 기구 혹은 최소 관습이 키예프 루스 시대에 존재했던 걸로 보이며 이반 4세가 이를 공식화해서 평민들의 귀족에 대한 고발장을 받아 그걸 구실로 귀족들을 처벌하여 차르권력을 강화하려했다. 이는 훗날 차르권력이 약화되면서 폐지되지만 관행화되어 러시아의 전통으로 여겨졌다.[15] 이것을 안 좋은 방향으로 실현하려고 했던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바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 라즈랴드니 프리카즈(Разрядный приказ): 국방부+육군본부에 해당된다. 대부분의 봉직귀족들, 국경 및 거점 방위부대, 방어시설 관리, 변경지역 인구 및 토지 관리, 봉직자들에 대한 급여, 시베리아 개척, 지방 총독 및 군 직책에 대한 인사권과 감사권 등등 종합적인 군정권을 행사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다른 전문화된 부서들이 창설되어 그쪽으로 담당분야가 이전하여 권한이 대폭 축소되긴 했지만[16] 전시에는 다시 가져와서 사령부로써 군령권을 행사 하는 등 최상위 군사 부서였다. 모스크바 외에도 블라디미르, 노브고로드, 셉스크, 스몰렌스크, 랴잔, 벨고로드, 탐보프 등 주요 도시에 하위 프리카즈들을 두었다. 1680년대 군사 개혁으로 라즈랴드니, 이노젬스키, 레이타르스키가 루스 차르국 대부분의 군사 관련 업무를 삼분할했다.
- 이노젬스키 프리카즈(Иноземский приказ): 외국인 거주지와 외국인 장교 및 용병부대에 지급하는 급여를 관리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을 통해 외국 용병대의 비중이 점차 늘어나고 러시아의 서구화 개혁이 가속화되면서 점차 확장되었다. 1680년대의 군 개혁으로 대부분의 중앙군 소속 상비 보병부대를 관리하는 핵심 군 부서가 되었다.
- 레이타르스키 프리카즈(Рейтарский приказ): 흑기병(Reiter) 및 여러 서구식 기병 관리 담당이었고 이는 원래 위의 이노젬스키의 담당 영역이었지만 서구화 개혁이 가속화되면서 1649년에 따로 형성되었다. 1680년대의 군 개혁으로 라즈랴드니, 이노젬스키, 레이타르스키가 루스 차르국 대부분의 군사 관련 업무를 삼분할했다.
- 프리카즈 스보라 라트니흐 이 다토치니흐 류데이(Приказ сбора ратных и даточных людей)[17]: 주로 군역이 있는 평민들의 징세와 전시 소집 및 부대 조직을 담당했다. 일부 카자크나 귀족 기병대 소집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 스트렐츠키 프리카즈(Стрелецкий приказ): 스트렐치와 도시 카자크 부대 관리를 담당했다. 원래 카자크 부대도 담당했으나 1613년 아래의 카자치가 창설되면서 권한이 이전되었다. 모스크바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서 스트렐치, 카자크가 치안부대의 역할도 했던지라 경찰청 및 사법기관도 겸했다. 다만 스트렐치도 '사수'라는 의미를 가진 애매한 존재이다보니 극초창기를 제외하면 카자크랑 마찬가지로 애매하고 광범위한 부대 혹은 병종이라 이쪽 관할 아닌 경우가 더 많았다.[18]
- 카자치 프리카즈(Казачий приказ): 카자크 부대의 조직과 관리, 급여와 보상 지급, 카자크들이 차르에게 보내는 청원서들을 담당했다. 다만 중앙군 소속이 아니면 카자크가 워낙 광범위한 존재인데다가[19] 자포로제나 돈 카자크 같은 자체 세력이 있었던 존재들은 그냥 자기들 이익이 될 때만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 압테카르스키 프리카즈(Аптекарский приказ): 의료 분야 담당. 원래는 왕실 주치의와 보조의사들, 약사들 및 의약 조달에 관한 부서였다. 그러나 점차 확장되어 국가 전체의 의료시설, 방역, 해외 의사들 초청, 의사 양성, 약초 수집, 의약품 공급 및 무역, 의약서 관리, 군부대에 의약품 공급, 의사 자격 및 수준 시험 등의 광범위한 기능을 수행했다. 당시 러시아 의학 수준이 높지 않았기에 유난히 외국에서 초빙된 전문가들이 많은 부서였다.
- 파트리아르시 프리카즈(Патриарший приказ):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직속 영지와 그곳 사람들에 대한 재판, 조세, 종교 재판 및 이단 심문 등을 담당했고 성직자들이 임명되었다.[20] 반쯤 교회 기구 혹은 교회 행정부인 셈인데 때문에 다른 프리카즈들과는 맥락이 다르다. 실제로도 차르가 아닌 총대주교 직속 기관이었다. 때문에 모스크바 주교들이 국가 통치자나 섭정을 맡았을 때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 라즈보이니 프리카즈(Разбойный приказ): 강도, 살인 등의 중범죄를 수사하고 처벌하는 부서이다.
- 포메스트니 프리카즈(Поместный приказ): 귀족들에게 수여한 봉토의 증명서, 인구조사, 토지대장 등을 담당했다.
- 브론니 프리카즈(Бронный приказ): 갑옷, 석궁, 검, 활 등의 냉병기 생산과 그것의 장인들을 관리를 담당했다.
- 얌스코이 프리카즈(Ямской приказ): 우편 및 통신과 일부 교통 분야를 담당했다.
- 카멘니 프리카즈(Каменный приказ): 성벽을 포함한 석조 건물 건설과 그 장인 관리 및 양성, 교육을 담당했다.
- 시빌스키 프리카즈(Сибирский приказ): 시베리아 개척과 관리 및 동방 국가들과의 외교를 담당했다.
- 이콘니 프리카즈(Иконный приказ): 차르나 총대주교의 요청에 따른 이콘 제작 및 예술가들의 초빙을 담당했다.
- 소콜니치 프리카즈(Сокольничий приказ): 차르 및 고위 귀족들의 매 사냥 준비 및 조직을 담당했다.
- 파니히드니 프리카스(Панихидный приказ): 차르를 포함한 황족들의 장례식 등을 담당했다.
프리카즈들은 표트르 1세 시대에 콜레기야(Коллегия)[21]로 점진적으로 명칭이 바뀌고 알렉산드르 1세 시대에 미니스테르스트보(Министерство)[22]로 바뀐다.
4.2. 지방 행정
루스의 지방 행정관은 크게 ‘총독‘(наместники)과 ’행정 관리‘(Волостель)로 나누어진다. 총독은 주로 포드고로드니예 스타니라고 불리는 도시와 교외 지역을 담당하고, 행정 관리는 주로 볼로스트라고 불리는 시골과 농촌을 담당한다. 그 밑에 티운(Тиун)[단어] , 도보드치키(Доводчик) 등 하위 관리들이 있었다. 다만 이런 하위 관리는 정부 공무원은 아니었고, 조선시대의 아전 같은 존재들이었다.이러한 지방 관리직은 ‘코름레니예(кормление)[24]’라고 불렸으며, 관리들은 ‘코름렌시키(кормленщики)’라 불렸다. 관리들은 통치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관리들의 수입은 국가가 월급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제공하는 식량(кормы)과 관리들이 집행하는 행정 서비스에 대한 수수료로 이루어졌다. 이 식량은 공동체 단위로 정해진 기한에 맞춰 제공되었고, 사람들은 자신이 요청한 정부 문서와 행정 절차에 대해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다.
정부는 코름렌시키의 횡포를 막기 위해 우스타브나야 흐라모타(уставная грамота, 법령 문서) 및 잘로반나야 흐라모타(жалованная грамота, 특허장)을 지급했다. 이 문서들에는 그들의 수입과 세금, 수수료 등이 상세하게 규정되었으며 이 금액 이상으로 수입을 얻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후, 식량(빵, 버터, 고기, 가금류 등)으로 제공되던 급여는 16세기가 되자 금전으로 대체되었으며, 각 지방 공동체에서 선출된 대표(스타로스타, 소츠키 등)가 세금 징수를 담당하게 되었다.
코름렌시키들은 조선시대 지방 관리들처럼 사법권도 행사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 역시 사법권 남용을 막기 위해 도클라드(доклад)라는 상위 감찰 시스템을 마련했다. 코름렌시키들은 이에 따라 자신이 1차적으로 판결한 사건을 최종 판결을 위해 중앙으로 넘겨야 했다. 동시에 정부의 시스템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지역 공동체에서 자체적으로 관리들이 사법권을 부당하게 행사하지 않는지 감시하도록 했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각 지방들과 도시들에는 자체적으로 선출한 스타로스타나 소츠키 같은 선출 관리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16세기 이후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나중에는 세금 징수권까지 얻었다. 이외에 지역의 여러 유력자들과 귀족들도 코름렌시키들의 법정에 참관했다.
이런 과도기가 잠시 지속되다, 뇌제 이반 4세의 시대에 코름레니예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고, 스타로스타 등 선출 관리들이 그 자리를 메꾸게 된다. 이에 따라 주민들이 관리에게 납부되던 급여는 폐지되었고, 대신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는 것으로 바뀐다. 지방세력에게 통치를 맡기되, 정부가 직접 조세를 거둘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일부 지역에서는 중앙의 명령이 먹히지 않아 16세기 후반까지 자체적으로 코름레니예 제도가 유지되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에 혼란 시대가 닥치자, 루스의 지방 통치제도는 크나큰 위기를 맞이한다. 중앙 정부가 제위 다툼으로 인해 마비되자, 지방을 감시하고 통제할 만한 여력이 사실상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다 로마노프 왕조가 집권하며 혼란 시대가 끝나자, 루스의 지방행정 제도는 다시 한번 변곡점을 맞이한다.
본래 군사적으로 중요한 국경지대에는 보이보드라고 불리는 군사 귀족들이 지방관으로서 군 업무 뿐 아니라 행정과 사법도 담당했다. 로마노프 시대 이후 중앙 정부의 역량이 마비되며 지방세력에서 자체적으로 선출된 유력자들을 감시하기 힘들게 되자, 정부는 대신 이 보이보드들을 군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후방에도 임명했다. 이들은 군사, 행정, 사법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기존의 자치기관들을 감시했다. 정부의 지방 통제력은 다시 강화되기 시작했고, 지방 유력자들이 구성한 기존의 젬스키 기구는 점점 자율성을 잃기 시작했다.
5. 종교
키예프 루스 때부터 그랬긴 하지만[25] 종교적으로는 상당히 폐쇄적인 정교회 국가였다. 러시아 정교회 내부에서도 치열한 교파적 충돌이 있었고, 패배한 이단들에 대한 박해와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고문, 화형 등)이 기록되어진다. 물론 중근세에 안 이런 국가가 얼마나 있겠냐만은 바로 이웃에 명시적으로 자유를 보장하고 유대교도들부터 무슬림 타타르인들까지 광범위한 종교, 민족적 성격을 지녔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있어서 더 강조된다.그러나 어차피 전근대 국가가 정치적으로 공인하는 국교가 있더라도 그걸 신민 모두에게 강요하는건 불가능했고 다양한 이교도들이 공존했다. 게다가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모스크바의 독일인 거주구(Немецкая слобода)[26]와 러시아에 편입된 타타르인 엘리트층의 무슬림 신앙도 묵인[27], 이반 4세 말기부터 서구화 개혁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면 상당한 융통성을 보였다.
6. 역대 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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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룔(Орёл, 수리)이라는 군함의 깃발. 1668년부터 표트르 1세가 기를 바꾼 1693년까지 사용됐다. 현 러시아 국기의 원안이다.[2] 다만 귀족회의인 보야르 두마(Боряская дума)나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차르를 넘어서는 권력을 휘두른 기간이 상당히 길다. 공식적으로 전제군주정을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 내부사정에 따라 그때그때 달랐다고 봐야 정확하다.[3] 엄밀히 말하자면 모스크바 대공국~러시아 제국 기간은 단절없는 단일국가고 군주의 명칭에 따른(대공-차르-황제) 시대상 분류에 가까우며, 소련(정확히는 러시아 민족의 RSFSR)과 러시아 연방으로의 변화도 어디까지나 정치 체제와 주된 이념이 교체되었을 뿐이지 민족 국가로서의 러시아는 모스크바 대공국 이래로 한 번도 멸망한 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4] '임페라토르' 칭호는 표트르 1세 이전에 이미 공문서에서 쓰이고 있었다. 차르-임페라토르를 왕-황제 같은 상하관계로 보는 경향이 강한데 표트르 1세가 임페라토르를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옛 모스크바 군주들이 (비잔틴 황제와 대등한) 차르로 불렸다는 것이었다. 고로 사실상 단어가 바뀌었을 뿐 의미는 똑같았던 것.[5] 영어로는 Muscovite Rus'[6]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본거지로 삼아 다른 제후국들을 병합하여 황제위까지 올랐으나 당대에도 그 둘은 구분되었고, 후대 학자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용어를 따로 만들어서 쓰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7] 귀족들에게 독살당한 것이 유력시된다[8] 엄밀히 말하자면 교회 기구지만 당시 특성상 교회가 정치에 관여할 수 있었으므로 사실상의 정치 기구로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종종 세속적 일에 대한 의제가 올라왔다.[9]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미하일 로마노프의 아버지인 총대주교 필라렛(세속명은 표도르 로마노프-유리예프)인데, 사실상 차르를 넘어서는 통치자였고 이게 단순히 섭정, 권신이나 흥선대원군 같은게 아니라 대군주(Великий Государь)라는 칭호로 공식화된 지위였다.[10] 단어 자체는 우리말로 하면 재판관, 법관이란 뜻이다[11] 당대 외국인의 기록을 보면 무소불위한 차르권력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는 러시아 국가 속성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념에 의거한 내용이다. 분령시기에는 관료들이 군주에게 충성하는 개인적인 가신이었지만 국가조직이 비대해지고 전문화됨에 따라 시스템에 복종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차르는 왕권신수설적인 의미에서 지상에 있는 신의 대리인으로 여겨졌지만 그 개인이 중심이 아니라 종교적, 국가적 이념과 체제의 상징에 더 가까웠다. 이는 전통 시대 중국의 북송과 남송, 명나라, 그리고 청나라와 유사하다. 또한 관료제에 관한 막스 베버의 관점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12] 특히 동란시대 이전이 그렇다. 다만 이는 중근세 국가들 모두 어느 정도 해당되는 문제이긴 하다.[13] 반대로 비슷한 시기 타 왕정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탈개인화된 관료주의적 체제 덕분에 차르와 귀족들을 비롯한 최상층부의 권력 투쟁과 별개로 어떻게든 기능해서 살아남았다는 주장도 있다.[14] 이를 위해 스몰렌스크 프리카즈(Смоленский приказ), 말로로씨야 프리카즈( Малороссийский приказ), 리투아니아 대공국 프리카즈(Приказ Великого княжества Литовского) 등 다양한 하위 프리카즈들이 생기거나 통폐합되었다.[15] 대게 농민공동체에서 돈을 모아 대표자를 수도로 보내 청원했다. 아니면 황제가 지방 순방을 하거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감독관들이 시찰을 할 때 농민들로부터 청원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살티코바 사건이 있는데 농노들이 자신들을 학대하고 죽인 대지주를 지방당국과 경찰에 고발했으나 뇌물을 받은 관리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직접 고발하였고, 결국 여제의 명령으로 조사가 이루어져서 살티코바는 귀족 작위를 박탈당하고 종신형에 처해졌다.[16] 스트렐레츠키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군사 프리카즈들은 원래 라즈랴드니의 권한이었다.[17] 일부 사료에서는 프리카스 스보라 라트니흐 류데이(Приказ сбора ратных людей)와 프리카스 스보라 다토치니흐 류데이(Приказ сбора даточных людей)가 따로 거론되는 걸로 보아 중간에 분할했다가 다시 합친 것으 추정된다.[18] 심지어 모스크바 총대주교 직속 스트렐치 친위부대도 있었는데, 이들은 일종의 이단심문관 역할을 했다.[19] 보병 카자크도 많이 존재했는데다가, 그냥 무장해서 말 탄 농민병이있으면 그게 카자크다.[20] 다만 교회와 관련된 부서라서 그런건 아니었고 당시 성직자들은 초엘리트 계층이었기에 다른 프리카즈들에도 상당수 있었다.[21] 영어의 콜레기움(Collegium)과 같은 어원이다.[22] 영어의 미니스트리(Ministry)와 같은 어원이다.[단어] 자체는 고대 노르드어의 하인이란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세시대에는 보야르에게 종속된 농노 혹은 하인을 의미하던 단어다[24] 단어 자체는 (밥을) 먹인다는 뜻으로, 즉 급식을 뜻하는 단어다[25] 애당초 왕권 강화하려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었지만 기독교를 공인한 블라디미르 1세부터가 기독교 개종을 구실로 거부하는 귀족들을 이교도로 몰아서 제거했다. 기록에 따르면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학살, 숙청, 내란 등등 온갖 수단이 동원되었다. 물론 아래 평민들 사이에서는 슬라브 다신교가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이후로도 이중신앙, 기독교화된 이교 전통 등이 남아있었다.[26] 이름과 달리 이교도, 이민족 거주지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비정교도, 비슬라브권 외국인들을 독일인이라고 통칭했다.[27] 다만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타타르인들은 얄짤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