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차카 반도의 최대 도시인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의 모습.[1] |
캄차카 반도 | |
1. 개요
러시아어: полуо́стров Камча́тка([pəlʊˈostrəf kɐmˈt͡ɕætkə], 폴루오스트로프 캄찻카)영어: Kamchatka Peninsula
태평양과 오호츠크해에 접한 러시아 극동 지역의 반도. 미국의 최서단 지역인 알류샨 열도와 가깝다.
면적은 약 27만 km²로 한반도보다 조금 넓은 수준이다.[2] 지도상으로 보면 한반도보다 훨씬 커 보이지만 이 동네가 워낙 북쪽이라 세계지도에 주로 쓰이는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보았을 때 왜곡이 되는 것이다.
최남단인 로팟카 곶(мыс Лопатка)에서 최북단인 셸리호프 만(залив Шелихова)까지는 1,000km 조금 넘는 정도이다. 동쪽에는 코만도르스키예 제도(Командо́рские острова)가 위치하고 있다.
러시아어 표기법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캄찻카가 맞으나 관용적 표기를 인정하여 캄차카를 표준으로 정하였다.
러시아의 행정구역으로는 극동 연방관구 캄차카 지방에 속한다.
2. 지리
해발 4,750m의 클류체프스키 산(Ключевская сопка)이나 크로노츠키 산(Кроноцкая сопка) 같은 대규모의 화산들이 많이 위치하고 있으며 화산 수는 160여 개에 달해서 옛날에는 탐험가들이 '불의 땅'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활화산은 29개나 되고, 그 중에서 19개는 캄차카 화산군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화산지형 답게 당연히 유황온천이 곳곳에 널려 있다.러시아 국토의 모양을 곰으로 비유해 본다면, 곰의 턱수염 부분에 해당하는 위치다.
3. 기후
러시아 극동에선 그나마 따뜻한 곳 중 하나로 겨울 평균기온은 -10℃ 정도로 비교적 온화하다.참고로 러시아 극동에서 가장 따뜻한 곳은 쿠릴 열도로 강원도 산간 지대 정도의 겨울 날씨를 보인다. 물론 이 쪽은 냉대 습윤 기후라 강원도와는 특성이 다르다. 냉대 동계 건조 기후를 보이는 곳은 내륙인 하바롭스크나 우수리 강 일대이다. 쿠릴 열도나 캄차카 등은 오호츠크 해에 맞닿아서 바다 영향을 많이 받는지라 습윤해지는 반면 하바로프스크 등 내륙은 대륙도가 높다. 애초 하바로스프크 일대는 외만주라 불리는 만주의 일부로 당연히 식생 등이 만주와 유사하다.
주도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의 1월 기온은 평균 -7.6℃[3] 정도이며 가장 더운 8월 기온은 평균 12.5도[4] 정도이다. 블라디보스토크가 8월 평균이 19도 정도, 하바롭스크가 평균 22도 정도라 여름에는 꽤 더워지는 것과 다르다. 역시 고위도 지방이기 때문이다.
현지시각 기준으로 1952년 11월 4일 새벽에 캄차카 반도 동남쪽 지역에서 규모 9.0의 세베로쿠릴스크 지진이 발생했으며[5] 그 외에도 여러 차례 대규모 지진이 발생한 지역이다. 캄차카 반도 동쪽 지역이 판 경계에 위치하기 때문. 앞에서 화산이 아주 많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불의 고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지역은 동쪽으로는 알래스카, 남쪽으로는 사할린, 쿠릴 열도,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화산섬대에 위치해 있다.
4. 역사
북아시아의 역사 | ||||||||
시베리아 | 극동 | 몽골 | ||||||
사하 | 하카시야 | 투바 | 캄차카 | 사할린 | 쿠릴 |
캄차카 반도의 역사는 거의 알아볼 수 없다. 기록이 별로 없기 때문. 일단 제정 러시아 때부턴 기록이 조금 있다. 러시아의 코사크 용병대장이었던 데즈뇨프와 알렉세예프가 북극해의 콜리마 강 하구로 출발했다가 길을 잃고 1648년 아나디르 강 근처 해안에서 난파당했다. 1697년 이곳을 코사크 용병대장 아틀라소프는 120명을 이끌고[6] 아나디르스크 요새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향했는데 요새들을 건설하고 영토에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식량을 징발 혹은 약탈당한 원주민들에 의해 반란과 전투가 빈번했었다 한다.
당시 이 지역을 탐사하던 코사크 일부가 이 지역에서 복무 혹은 정착하는 과정에서 현지 원주민 여자들과 만나는 일이 많았는데, 이들은 캄차카 반도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캄차달인의 기원이 되었다. 이후 티길 강에 도착하여 등산하다가 알네이 봉우리 밑에서 캄차카 강 계곡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였다. 참고로 클류체프스카야 화산도 이때 코사크 원정대가 먼저 봤다.
1714년 표트르 대제는 캄차카로부터 모피 수송이 지연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급히 오호츠크에 파견하여 배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이후 야쿠츠크에서 캄차카까지 가는데 두 가지의 길이 생겼다. 하나는 먼저 육로로 아나디르스크를 경유해 가다가 남쪽으로 육로나 수로를 이용해 캄차카까지 도달하는 방법, 두번째는 코략족의 영토를 피해 오호츠크에서 바로 캄차카까지 항해할 수 있는 정규 해상통로가 개설되었다. 특히 이곳은 러시아의 몇 없는 부동항이었기에 크림 전쟁 당시 이곳의 주요 도시인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영프 연합군의 표적이 되어 공격당해 함락당한 적도 있었다.
2020년 동부 해안에서 해앙생물들이 대량으로 폐사하고 서핑을 하러 바다에 들어간 사람의 각막이 손상될 정도로 심각한 해양 오염이 발생했다.# 환경단체에서는 유독성 물질이 흘러들어간것으로 추정하나 러시아 정부에서는 독성 조류가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5. 기타
캄차카 반도에는 곰들이 엄청나게 많이 살고 있다. 농담삼아 사람보다 곰이 더 많다는 소리가 나돌 정도이다. 물론 실제로는 사람이 더 많다. 곰은 대략 15만 마리 정도로 추산되지만 2023년 캄차카 인구는 28만 9천명이다.
아무튼, 사람 두 명과 곰 한 마리가 공존하는 수준이니 곰이 엄청 많은 것도 사실이라 유럽과 러시아의 부자들이 캄차카까지 건너와서 밀렵을 하는 바람에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이 지역은 인구가 희박하고 자연이 잘 보존된 청정지역이며 곰의 먹이인 연어가 풍부하게 서식하고 화산의 영향으로 비옥해진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곰이 살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지역이다. 그래서 곰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발생한다. 주민들의 인명 피해 방지를 위해 매년 수십마리의 곰을 사살한다.
캄차카 반도에 조선인 노무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련정부의 노동자 모집에 캄차카로 이주했으나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된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현재 1세대 조선인 노무자들은 극소수가 남아있고, 2세대로서는 대부분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고려인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정수웅 감독의 다큐멘터리 '고향이 어디세요'가 그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소련 정부의 조선인 노동자를 향한 반인륜적 행위를 고발하고 그들의 현 세태를 그리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100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풍토병과 기아로 줄줄이 죽어나갈 때 시신을 아무런 처리 없이 구덩이에 넣고 한꺼번에 다 묻어버리는 등의 수난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러시아의 전설적 락밴드인 키노의 세 번째[7] 앨범의 제목이 '캄차카의 지배인(Начальник Камчатки)'인데, 이는 1967년 소련 코미디 '추코트카의 지배인'에 대한 오마주이자, 당시 러시아에서 '캄차카'라는 단어가 '아주 머나먼 곳' 혹은 '보일러공'이라는 의미의 속어로 사용된 것에 대한 비유이다.[8]
허경영이 과거 대선 공약으로 이 땅을 한국이 인수하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역사상 최대의 해우류였던 스텔러바다소가 캄차카 반도, 정확히는 베링 해 근처에 서식했었다.
좀비 액션 게임 월드 워 Z: 애프터매스에서 등장한다. 좀비 아포칼립스로 이미 멸망한 상태로, 도쿄에서 피난해온 일본인들이 러시아인들과 힘을 합쳐 핵잠수함을 피난 정착지에 연결하여 전기와 난방을 복구하는 것이 목표. 화산이 많다는 현실답게 로비 화면에서도 연기를 내뿜는 화산이 있고, 실제 인게임 3챕터에서 불을 뿜는 화산이 보인다. 오로라는 덤.
[1] 뒤에 보이는 산은 코략스키 화산(Корякская Сопка, 3,456m)으로, 2008년에도 분화했다.[2] 한반도의 면적은 약 22만 km²이다.[3] 일 평균 최고기온 -5.1℃, 일 평균 최저기온 -9.8℃[4] 일 평균 최고기온 15.9도, 일 평균 최저기온 10.2도[5] 도호쿠 대지진과 같은 규모다. 참고로 원래 공식적으로는 8.2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9.0이었다는 게 정설로 통하고 있다. 8.2면 세계적으로 규모가 매우 큰 지진 목록에는 못 들겠지만 9.0이면 역사상 기록된 지진 가운데 규모 4위이다![6] 러시아인, 유카기르 보조병사 각각 60명.[7] 데모 앨범 '46'을 제외하면 두 번째[8]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 체제라 개인의 경제활동을 철저히 금지했기 때문에 키노의 '앨범'은 정식 루트로는 발매될 수 없었고 기껏해야 불법복제본으로 팔려나갔으므로 앨범이 얼마나 팔리든 키노는 돈을 벌 수 없었다. 때문에 멤버들은 모두 다른 직업을 지니고 있었고 리더인 빅토르 최는 죽을 때까지 보일러공으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