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타이 칸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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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다이인 올로스 ᠴᠠᠭᠠᠳᠠᠢ ᠶᠢᠨ ᠤᠯᠤᠰ Tsagadai-yn Ulus | ||
위치 | ||
1225~1346 / 1370 / 1402 | ||
<rowcolor=#000>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몽골 제국 | 티무르 제국 | |
서요 | 모굴리스탄 칸국 | |
<colbgcolor=#edf202><colcolor=#000> 수도 | <colbgcolor=#fff,#000>알말리크, 카르시 | |
정치 체제 | 봉건군주제 | |
국가원수 | 칸 | |
주요 칸 | 차가타이[1] | |
언어 | 중세 몽골어, 차가타이어, 페르시아어 | |
민족 | 몽골인, 카를룩, 기타 유목민 | |
종교 | 텡그리, 이슬람, 네스토리우스교 | |
주요 사건 | 1225년 건국 1346년 칸이 실권을 잃음 1370년 티무르가 실권을 잡음 1402년 완전히 멸망 | |
통화 | 디르함[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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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가타이가 자신의 아버지 칭기즈 칸에게서 상속받은 중앙아시아 지역을 기반으로 탄생한 칸국. 1346년 칸이 실권을 잃었고, 그 직후 동쪽의 모굴리스탄 칸국이 떨어져 나갔다. 1370년 티무르가 집권하면서 사실상 티무르 제국으로 흡수되었고, 명목상의 칸 지위는 1402년까지 유지되었다. 이후의 내용은 모굴리스탄 칸국 문서 참조.2. 역사
차가타이 칸국의 역사 |
2.1. 초기 : 대칸에 종속
차가타이가 중앙아시아 일대의 영토를 분봉받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차가타이 사후, 칸국은 오고타이계와 툴루이계의 대칸 싸움에 휘말렸다. 1246년 즉위한 오고타이계의 구유크 칸은 카라 훌레구를 폐위하고 그의 삼촌 예수 몽케를 칸으로 삼았다. 1251년, 구유크 칸이 죽고 툴루이계의 몽케 칸이 즉위했고, 몽케 칸은 예수 몽케를 내쫓고 카라 훌레구를 복위시켰다. 카라 훌레구는 자기 영토로 복귀하던 도중 사망했고, 아들 무바라크 샤가 즉위했다. 무바라크 샤는 아직 어렸으므로 모후인 오르가나 카툰이 섭정을 맡았다.2.2. 중기 : 오고타이 칸국과의 대립
1260년, 몽케 칸이 죽고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가 대칸의 자리를 두고 서로 치열히 싸우기 시작했다. 아리크부카는 알루구를 차가타이 칸국으로 보내 세력을 키우고자 했고, 알루구가 무바라크 샤를 쫓아냄으로써 목표를 이루었다. 하지만 알루구는 이후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 쿠빌라이를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었으며 아리크부카를 지지하던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를 공격했다. 카이두는 킵차크 칸국의 제3대 칸인 베르케 칸의 지원을 받아 반격했으며, 싸움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1266년, 알루구가 죽고 무바라크 샤가 복위했으나 쿠빌라이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바라크를 보냈다. 바라크는 무바라크 샤를 몰아내고 칸의 자리에 올라 다시 카이두와의 싸움에 들어갔다. 카이두는 당시 킵차크 칸국의 칸이었던 만그 테무르 칸의 도움을 받아 바라크를 물리쳤고, 바라크는 트란스옥시아나를 나누어 갖는 것에 합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라크는 자신의 영토를 킵차크 칸국과 오고타이 칸국에 빼앗긴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고, 카이두는 그에게 일 칸국을 공격하여 영토를 뺏을 것을 종용했다. 이로써 킵차크, 오고타이, 차가타이 3개국이 연합하여 아바카의 일 칸국을 침공,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킵차크 칸국 및 오고타이 칸국 군대와의 갈등이 발생, 두 나라의 군대가 돌연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 영향으로 1270년 헤라트에서 벌어진 일 칸국과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바라크는 부상당해 도망치면서 카이두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카이두는 오히려 군대를 보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결국 바라크는 진중에서 죽었고, 1271년, 카이두는 네구베이를 차가타이 칸으로 만들고 나서 본국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네구베이는 반란을 일으켜 카이두에 대항했고, 카이두는 네구베이를 없앤 후 부카 테무르를 다음 칸으로 삼았다. 부카 테무르는 알루구와 바라크의 아들들이 일으킨 반란에 대응하지 못했고, 1282년 카이두는 바라크의 아들인 두아에게 차가타이 칸의 자리를 줌으로써 이들과 타협했다. 이후 두아는 카이두에게 협력하여, 원나라와의 전쟁에 여러 차례 출진했다. 1300년 카이샨의 침입을 격퇴한 카이두는 두아와 함께 1년 뒤인 1301년 카라코룸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카이두와 두아의 연합군은 이 싸움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두아는 크게 다쳤고 카이두는 이 싸움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죽고 말았다.
이후 본국으로 복귀한 두아는 1303년, 오고타이 칸국의 칸 계승에 개입, 카이두가 지목한 후계자인 오르스 대신 장남 차파르를 오고타이 칸으로 세웠다. 1년 뒤인 1304년, 두아는 차파르와 원 성종을 설득해 평화 협상을 맺었고 이로써 카이두와 원나라 간에 벌어진 오랜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카이두 시절 오고타이 칸국이 차가타이 칸국에게 갖고 있던 우위는 점점 차가타이 쪽으로 뒤집히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306년 두아는 원나라와 협력하여 차파르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차파르는 두아에게 항복했고, 두아는 그에게 작은 영토를 주었다가 곧이어 그 영토마저 뺏어 차파르의 동생인 얀기차르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1307년 두아가 죽은 뒤부터 차가타이 칸국은 내분에 빠졌으며, 3년 뒤인 1310년에 차파르와 오고타이 칸국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당시의 칸이었던 케벡 칸이 알말리크에서 이를 진압하고, 차파르는 원나라로 망명하면서 오고타이 칸국의 세력은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한편 차가타이 칸국은 1292년부터 1306년까지 계속 인도 북부를 침공하였다. 이 차가타이 칸국의 인도 침공은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3], 동원한 병력이 10만 명에서 무려 20만 명이나 될 만큼 그 규모가 매우 컸다. 하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인도 침공은 당시 인도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델리 술탄국 할지 왕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할지 왕조는 무려 47만 5천 명의 기병을 포함해 거대한 상비군을 유지할 만큼 국력이 막강했던 데다가, 원래 투르크족 군벌이 세운 왕조여서 기병 전력도 매우 뛰어났다. 특히 1306년에 차가타이 칸국이 동원했던 인도 원정군이 할지 왕조의 군대에 의해 참패하자[4] 차가타이 칸국의 칸인 두아는 충격을 받아 다음 해인 1307년에 죽었으며, 그 이후로는 오히려 할지 왕조가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아프간 지역의 도시인 카불과 가즈니와 칸다하르로 쳐들어가 약탈을 하는 식으로 반격에 나서는 등 차가타이 칸국은 인도 원정에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5]
2.3. 후기 : 분열과 멸망
숙적인 카이두의 오고타이 칸국을 멸망시킨 이후, 원나라나 일 칸국과 종종 겪은 분쟁을 빼면 대외적으로 큰 위협은 사라졌다. 하지만 내부적인 혼란은 격화되어, 두아 칸이 죽은 1307년부터 실권이 있는 마지막 칸인 카잔 칸이 죽은 1346년까지 39년간 13명의 칸[6]이 난립하는 혼란기를 겪었다. 또, 이 시기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이슬람으로의 개종이었다. 가장 먼저 개종한 것은 몽케 칸 때의 무바라크 샤였으나, 본격적인 이슬람화가 가속화된 것은 이 때로 탈리쿠(1308 ~ 1309), 타르마시린(1331 ~ 1334) 칸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특히 타르마시린은 이슬람 개종 후 알라 앗 딘(ala-ad-din)이라는 무슬림 식 이름으로 개명하기까지 했다. 1342년, 오고타이 계의 무슬림 칸 알리 술탄이 즉위했고, 그는 이교도들을 박해하면서 이슬람 포교에 앞장섰다. 알리 술탄은 금방 쫓겨났지만 이후의 칸들도 무슬림이었고, 차가타이 칸국은 완전히 이슬람화하였다. 이렇듯 14세기 초반 차가타이 칸국의 상황은 몽골의 현지화 과정에서 이슬람과 몽골 전통 텡그리 신앙, 도시 정주민 문화와 유목민 문화 간의 갈등을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칸 가문의 내분과 얽혀 혼란한 상황을 나타내게 되었다.1346년 카잔 칸이 카라운 부[7]의 아미르 카자간과 싸워 패하여 사망했고, 카자간은 다니슈멘디를 명목상의 칸으로 내세우고 실권을 차지했다. 1년 뒤인 1347년, 동쪽의 투글루크 티무르가 이에 반발하여 모굴리스탄 칸국을 세워 떨어져 나가면서 칸국이 분열되었다. 카라운 부의 지배는 카자간과 그 아들 압둘라 2대에 걸쳐 3명의 칸을 옹립하며 12년간 이어졌다. 1358년, 바를라스부의 하지 벡과 술더스부[8]의 부얀 술더스가 압둘라를 제거했고, 이후 2년간 칸이 없는 상태가 이어졌다. 1360년, 모굴리스탄 칸국의 투글루크 티무르가 쳐들어오자 부얀 술더스와 하지 벡은 도망쳐서 목숨을 보전했다. 1년 뒤, 투글루크 티무르가 다시 쳐들어와 카라운부의 아미르 후사인을 격파하고, 술더스부의 부얀 술더스와 자라이르부의 바야지트를 처형했으며, 하지 벡은 도망치다가 목숨을 잃었다. 투글루크 티무르는 아들 일리아스 호자에게 서 차가타이 칸국을 맡기고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1363년에 사망했다.
일리아스 호자는 카라운 부 후사인과 바를라스 부 티무르에게 쫓겨나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2년 뒤인 1365년 다시 쳐들어와서 승리를 거뒀으나 역병 때문에 후퇴한 뒤로 다시는 복귀하지 못했다. 협력 관계에 있던 카라운 부 후사인과 바를라스 부 티무르는 이후 대립하게 되었다. 1370년 티무르가 후사인을 격파하고 수르가트미쉬를 칸으로 옹립한 뒤 본인은 아미르를 칭하면서 차가타이 칸국의 실권을 꿰찼고, 이후 연전연승을 거두며 티무르 제국을 건설했다. 차가타이 칸의 계보는 수르가트미쉬의 아들 술탄 마흐무드가 1402년 죽은 이후 끊겼고, 차가타이 칸국은 명목상으로도 멸망해 티무르 제국에 흡수되었다.[9]
3. 역대 칸
묘호 | 시호 | 칸호(휘) | 재위기간 | 비고 |
성종(聖宗) | 충무황제 (忠武皇帝) | 차가타이 | 1226 ~ 1242 | 칸을 자처한 적 없음. |
- | - | 카라 훌레구 | 1242 ~ 1246 1251 ~ 1252 | 예수몽케 퇴위 후 복위. |
- | - | 예수몽케 | 1246 ~ 1251 | 카라훌레구를 퇴위시킨 뒤 즉위. |
- | - | 무바라크 샤 | 1252-1260 1266 | 알루구 사후 복위. |
- | - | 알루구 | 1260 ~ 1266 | |
- | - | 바라크 | 1266 ~ 1270 | 차가타이의 증손자. |
- | - | 네구베이 | 1270 ~ 1272 | 실권자 카이두 |
- | - | 부카 테무르 | 1272 - 1287 | 실권자 카이두 |
- | - | 두아 | 1283 ~ 1307 | 바라크의 아들 카이두 사후 오고타이 칸국 멸망 |
- | - | 콘첵 | 1306 ~ 1308 | |
- | - | 탈리쿠 | 1308 ~ 1309 | |
- | - | 케벡 | 1309 1318 ~ 1325 | 복위 |
- | - | 에센부카 | 1309 ~ 1318 | 원나라를 공격하지만 일 칸국과 손잡은 원나라에게 패퇴한다 |
- | - | 엘지기데이 | 1325 ~ 1329 | |
- | - | 두아 테무르 | 1329 ~ 1330 | |
- | - | 알라딘 타르마시린 | 1331 ~ 1334 | 이슬람으로 개종 밑 국교 선포 |
- | - | 부잔 | 1334 ~ 1335 | |
- | - | 창시 | 1335 ~ 1338 | |
- | - | 예순 테무르 | 1338 ~ 1342 | |
- | - | 알리 술탄 | 1342 | 오고타이계 |
- | - | 무하마드 1세 이븐 풀라드 | 1342 ~ 1343 | |
- | - | 카잔 칸 이븐 야수르 | 1343 ~ 1346 | 최후의 실권이 있는 칸. |
- | - | 다니슈멘지 | 1346 ~ 1348 | 오고타이계. 실권자 아미르 카자간. 모굴리스탄 칸국 분리 |
- | - | 바얀 쿨리 | 1348 ~ 1358 | 실권자 아미르 카자간, 이후 압둘리 |
- | - | 샤 테무르 | 1358[10] | 실권자 아미르 압둘리 |
- | - | 투글루크 티무르 | 1360 ~ 1363 | 모굴리스탄 칸국의 칸 (1347 ~ 1363) |
- | - | 아딜 술탄 | 1363 | 실권자 아미르 후사인과 티무르 |
- | - | 카불 샤 | 1364 ~ 1370 | 실권자 아미르 후사인 |
- | - | 수우르가트미시 | 1370 ~ 1388 | 오고타이계. 실권자 티무르 |
- | - | 술탄 마흐무드 | 1388 ~ 1402 | 오고타이계. 실권자 티무르. 명목상 마지막 칸 |
4. 관련 항목
[1] 사실 차가타이는 죽을 때까지 칸에 오른 적도 없고, 칸을 자칭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차가타이 칸국(울루스)의 시조로 간주되는 것은 분명한데, 이에 대한 것은 차가타이 항목 참고.[2] 중세 페르시아, 아랍, 북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 널리 쓰인 화폐 단위.[3] 몽골의 인도 원정에 대해서 국내에서는 그저 인도의 날씨가 덥고 습해서 실패했다, 라고 정도만 간략하게 인식되어 있다.[4] 이때 사로잡힌 몽골 병사들은 모두 목이 잘렸고, 그들의 잘려나간 목은 할지 왕조의 군대에 의해 탑처럼 쌓여졌다(...)[5] 출처: 신의 전쟁/ 도현신 지음/ 이다북스/ 319~345쪽[6] 복위한 케벡 칸은 1명으로 취급[7] 카라운 부는 사실 몽골의 전통 부족은 아니고, 훌라구의 중동 원정에 참여한 킵차크 칸국 출신 부대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정착한 뒤 부족화한 것이었다. 카라운 부 이외에 당시 차가타이 칸국의 주요 부족으로는 자라이르부, 바를라스부, 술더스부, 야사우리부, 두글라트부 등이 있었다.[8] 술더스부는 사실 타이치우드 부족의 한 씨족이다.[9] 약 30년 뒤인 1429년에 티무르의 손자인 울루그 벡이 모굴리스탄 칸국으로 쳐들어가면서, 사투크 칸이라는 명목상의 칸을 내세운 적이 있기는 하다.[10] 아미르 압둘리와 샤 테무르가 함께 제거당하고 나서의 공백기 동안 칸이 없었다. 이 공백을 노리고 투글루크 티무르가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