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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2:09

위구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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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위구르인 도래 이전의 신장 지역
1.1. 흉노 연맹의 오른팔1.2. 중국으로의 불교 전파1.3. 돌궐, 당, 티베트, 이슬람 칼리프조1.4. 위구르인1.5. 위구르 제국
2. 중세: 위구르인 정착 이후의 역사
2.1. 동튀르키스탄으로의 이동2.2. 이슬람화
2.2.1. 카라한 칸국2.2.2. 차가타이 칸국
3. 근세: 모굴리스탄 칸국과 오이라트 부족 연맹
3.1. 티베트 불교와 수피 낙슈반디야 교단3.2. 준가르 홍타이지의 지배3.3.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의 호자 형제
4. 청나라 치하의 위구르족과 신강 지역 (18세기~19세기)
4.1. 둥간 봉기4.2. 신장성 건성
5. 근현대
5.1. 위구르 민족주의5.2. 신해혁명러시아 내전5.3.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5.4. 성스차이 스탈린주의 정권
5.4.1. 1933년 인구 조사
5.5.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5.5.1. 제2공화국과 장즈중과의 협상5.5.2. 제2공화국과 중국 공산당과의 협상
5.6.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5.7.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
6. 참고문헌
6.1. 고대사 / 중세사6.2. 근세사 / 근현대사

1. 고대: 위구르인 도래 이전의 신장 지역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국 역사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준 지역이기도 한데, 고대 전차, , 을 비롯하여 청동기 문물 상당수가 이 지역의 인도-유럽어족 계열 토하라인들을 통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1] 기원전 13세기에는 이 지역에서 철제 물품이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중국의 현재 국경 내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빠른 것이었으며, 서아시아의 철기 시대의 시작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토하라인을 뒤따라서 들어온 이란계 스키타이, 즉 사카(塞)인들도 기원전 8세기 무렵, 동아시아에 승마술을 전파했다. 또한 중앙아시아 출신 승려들이 와서 불교를 전하거나 불경을 한역할 때도 대부분 해로 대신에 육로로 왔으니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투르키스탄 동부가 중국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이곳은 위구르족만이 대대로 정주했던 영역은 아니고, 위구르족의 선조가 되는 아리아인 계통의 여러 오아시스 도시국가 및 유목민족의 활동지였다. 위구르족은 원래 외몽골 지역에 살았는데 키르기스인들의 침공으로 이곳으로 이주했다. 이주 이후 신장 남부(알티샤르)는 카를룩, 위구르들을 포함한 튀르크 제족들의 영역이었고, 북부인 중가리아는 근세 이후 오이라트계 제족들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이 문서에서는, 위구르는 물론 신강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도 다룬다.[2]

1.1. 흉노 연맹의 오른팔

파일:Centum_Satem_map.png
파란색 부분은 켄툼어군 Centum, 빨간색 부분은 사템어군 Satem.

고대에는 인도-유럽계 토하라인들과 사카족들이 살던 곳이었다. 토하라인과 샤카인 모두 백인종이긴 했지만 사용하는 언어[3]나 문화는 꽤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학자들은 중국 사료에 나오는 월지와 토하라인이 동일한 민족이라고 본다. 토하라인들은 알타이 산맥예니세이 강 분지에서 신장 지역을 넘어 간쑤성 일대로 남하하였는데 둔황과 치롄 산맥을 중심으로 강족과 교역하였다.

기원전 2세기 흉노 연맹의 묵특선우가 월지를 공격하면서 토하라인 상당수가 일리 강추 강 유역으로 밀려났다. 다시 흉노족들이 이들을 추격하여 공격하자 이들을 아무다리야 강 유역으로 이주하였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정복하였는데 이들은 중국 사료에서 "대월지"라고 칭해진다. 원래 일리 강과 추 강 유역에 거주하던 이란계 사카인들(오손(烏孫))은 월지족 피난민들의 공격을 받아 고향에서 쫓겨난 이후 남서쪽으로 멀리 이주하여 인도-스키타이가 되었고 일부는 타림 분지 서부로 들어와 호탄을 중심으로 정착했다.

다른 한편으로 토하라인들이 흉노족을 피해 이주하는 과정에서 낙오한, 이른바 “소월지” 족은 타림 분지 동부의 오아시스를 따라 정착하며 흉노에 조공을 바쳤다.[4] 토하라인들과 샤카족들이 세운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은 흉노족에 복속했고, 그 때문에 중국의 한나라도 기원전부터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중국은 한무제 시절 장건의 보고에 의해 흉노가 이 지역에서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과 교역을 하거나 조공을 받으며 많은 이득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나라는 흉노족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 흉노의 오른팔을 자른다.[5]는 계획 아래 이곳으로 이광리 장군이 지휘하는 원정군을 보내 군마를 징발하고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에서 흉노 주둔군을 몰아냈다. 타림 분지와 투르판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들에서 생산되는 농산품과 공물은 흉노에게 필수적이었다. 반면 한나라는 경제적인 이익이 아니라 흉노를 견제하려는 전략적인 이유에서 이곳을 침공하였다.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고 현도와 낙랑을 세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서쪽으로 대완을 정벌하고 36국을 아우르며 오손과 관계를 맺고 돈황(敦煌) · 주천(酒泉) · 장액(張掖)을 세워 야강을 막아 흉노의 오른팔을 찢었다. 선우는 홀로 고립되어 멀리 막북으로 돌아갔다.

『사기』 위현전

후대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당시 한나라의 타림 분지 영토에 살던 주민들이 중국어의 방언을 사용하는 한족의 일파이며, 한나라의 통치가 소위 왕도 정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상 한나라의 서역 침략은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바대로 타림 분지 일대의 주민들을 제3자로 삼아 흉노 연맹과 한나라 사이의 일진일퇴가 거듭되던 양상이었다.

이광리의 서역 원정 당시 보급 문제로 이 지역에 원정나간 한나라 군인들은 대부분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막에서 얼어죽거나 굶어죽었다. 현지인들의 비협조 때문에 보급이 너무 힘들어지자 궁여지책으로 한나라는 죄수들과 고아들을 서역 영토에 주둔군으로 정착시키고 둔전과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둔전 경작은 타림 분지에서 장안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보급에 비용이 너무 많이 나가는 문제[6] 때문에 만들어낸 방식인데, 비용 절감 효과가 확실하다는게 입증돼서 삼국시대 이후로는 중국 전역에 확대되었다. 이광리의 서역 원정이후 한나라흉노에서의 군사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서역국가들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갔고, 기원전 60년에는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여서 타림분지 전역에 한나라의 행정력이 미치게 되었다. 이후 왕망에 의해서 전한이 무너질때까지 중앙아시아에서의 한나라의 힘은 절정에 이르러서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에 해당하는 이식쿨 호 근방에까지 둔전이 한 곳 설치될 정도였지만, 신나라를 세운 왕망의 외교적 실책으로 서역 국가들이 한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후한 시대에는 오늘날의 하미 근처의 둔전 하나만이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고고학을 통해 분석해 보면 한나라의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쿠샨 왕조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서 강해진 것으로 보이지만 쿠샨 왕조 측에서는 한나라와 다르게 자세한 역사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쿠샨 왕조는 박트리아를 점령한 대월지족이 기원이 된 북인도-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한 제국이었다. 1세기 후반경부터 3세기 말까지 쿠샨 제국은 타림 분지에서 한 때 한나라가 누렸던 것과 동등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쿠샨 제국에서 사용된 카로슈티 문자로 된 문서들이 호탄과 니야에서 발견되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후한은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인하고자 반초를 보내 이 지역으로부터 조공을 다시금 징수하는 데 성공했다. 반초가 귀환한 후 서기 102년이 되자 한나라는 서역에 투입시킨 병력을 감축하였고, 이로 인해 타림 분지 일대는 107년부터 125년까지 다시 한번 북흉노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반초의 아들 반용이 뒤를 이어 이 일대를 다시 정복함으로서 한나라는 다시금 127년부터 15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타림 분지 일대를 다스릴 수 있었다 한다.

이후 후한말 위진남북조의 혼란으로 한의 서역 통치는 방치되었으며 전진부견이 일으킨 서역 원정 등과 같이 중국의 서역 영향력은 간헐적으로 미친채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진다.

1.2. 중국으로의 불교 전파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의 대부분은 마니교 경전에서 "쿠차카슈가르에서 코초와 베슈발리크에 이르는" 토하리스탄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쿠샨 왕조의 초기 이름이랑 헷갈릴 수도 있는데, 토하리스탄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그냥 "토하라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불교를 중국에 처음 전파한 사람들은 바로 이 토하리스탄 사람들이었다.[7] 따라서 중국 불교의 초기 전래는 인도 불교 그대로가 아니라 당시 이미 중앙아시아에 전해진 불교가 이식된 것이기도 했다. 그 영향이 아직도 동아시아 불교계에 남아있는데, 이를테면 사문, 외도, 출가, 십이인연설 같은 한자어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번역된 것이 아니라 토하라어 등 중앙아시아 언어에서 번역된 것이다. 소련의 학자 보리스 A. 리트빈스키(Boris A. Litvinsky)에 따르면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기록된 인물 중 여섯 명은 인도인이었고 일곱 명이 중국인이었으며 열여섯명은 중앙아시아인이었다고 한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불교 승려들은 '해설'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용어인 위바사(Vibhasa) 식의 글쓰기를 선호했다.

서기 3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는 간다라 지방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로프누르 호 근방에 정착한 후, 크로라이나(Kroraina) 왕국을 세우고 이 지역에 카로슈티 문자를 보급했다. 인도에서 도입한 문자가 널리 쓰임과 동시에 타림 분지 곳곳에 불교 경전이 보급되고 불교 사찰에 기반을 둔 초기 형태의 학교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흉노족과 선비족이 중국으로 진출하는 사이에 에프탈족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중국과 이 지역이 모두 유목제국의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인도와 중국, 중동을 연결하는 경제/문화 교류가 무척 활발해졌다. 소그드인들은 에프탈족의 영토 넘어 서쪽으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둔황을 넘어 장안과 낙양까지 진출하였다. 둔황 근처 옥문관 근처에서 서기 313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그드어로 쓰여진 편지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편지들은 사업상의 내용 외에도 흉노에 의해 낙양이 약탈된 소식을 비롯하여 중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혼란한 사건과 교역에 관한 이야기들이 쓰여있었다. 모든 편지들은 규격화된 형태로 주소가 적혀 있고 포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사마르칸트, 호탄, 누란, 둔황 및 다른 지역에 있는 소그드인들이 기존의 우편 체계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나타낸다.

한편 오호십육국 시대 중국에 유입된 여러 유목민족들은 한족과 비한족 간의 통합을 위해 불교를 적극 장려했다. 수많은 중동, 중앙아시아 출시 승려들이 오호십육국 시대 당시 중국으로 건너가 환영을 받으며 불경을 한역하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쿠차 출신의 쿠마라지바[8]를 들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불교 경전 번역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아직 완료되지 못한 시점이었고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불교 교파는 경전 독서와 공부가 중심이 되는 교종 불교였다.

쿠마라지바의 고향, "구자국"으로도 알려진 쿠차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의 중심지 중 하나로, 한서에는 서기 2세기 인구가 8만에 달하는 도시라고 기록되었으며, 진서(晉書)에서는 3~4세기 쿠처에서 불교가 번성한다는 기록이 있다.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벽은 3중으로 되어있다. 불사와 불탑이 1,000여개소에 달한다. 주민들은 농사와 목축에 종사하며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머리는 모두 목까지만 기른다. 왕이 사는 궁전은 마치 귀신이 쌓아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으리으리하면서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6세기 이 쿠차를 방문한 현장[9]은 불교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대해 다소 미화된 기록을 남겼다.
이곳은 토양이 비옥하여 오곡을 심기 알맞으며... 훌륭한 포도와 석류, 자두, 배, 복숭아와 아몬드가 생산된다... 근처의 금과 구리와 철, 납과 주석 광맥이 풍부하다. 공기도 좋은 곳이며 사람들은 행실이 정직하다... 천축(인도)에서 유래된 문자를 조금 변형해서 사용한다. 이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현악기와 피리를 훨씬 더 능숙하게 다루며 비단에 자수를 놓은 의복을 주로 입는 등 여러모로 풍요로운 나라이다... 이 나라에는 5,000명 이상의 출가자들을 가르치는 100여 개의 사찰이 있다. 소승 불교를 주로 믿으며 교리와 계율은 천축국의 그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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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차 인근의 키질(Qizil) 동굴의 석굴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 사원과 성소가 있었다. 키질 석굴은 동굴을 파내고 그림을 그려 성소로 이용하는 인도의 전통이 중앙아시아로 확대되었음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사원 형태의 다른 예로는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10], 투르판 분지의 베제클리크, 둔황, 룽먼석굴 등이 있다.

토하리스탄 쿠처에서 부파 불교를 믿고 팔리어 원전의 설일체유부 경전과 자타카[11]를 공부한 것과 대조적으로 사카족이 살던 호탄 왕국에서는 대승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산스크리트어 원전의 반야부 경전을 주로 공부하였다. 호탄을 방문한 중국인이나 신라인 승려들은 이 곳 주민들이 삼보를 매우 공경하여 집집마다 집 앞에 불탑을 조성하고 큰 사찰만 14개에 작은 사찰은 수도 없이 많았다고 기록하였다. 호탄의 왕족들은 둔황의 한족이나 소그드인 유력자들과 자주 통혼하였으며 둔황과 룽먼 석굴 조성에 직접 기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살단나(Kustana, 호탄의 산스크리트어 이름)국은 모래와 돌이 태반이고 토양이 있는 곳은 조금뿐이다. 토양이 비옥하여 갖가지 과일이 많다. 이곳에서는 품질 좋은 면제품이 나오고 백옥과 예옥이 난다. 기후는 온화하지만 회오리 바람이 일어 흙먼지를 날린다. 사람들의 성질은 예절바르고 온순하며 학예를 좋아하면서도 음악도 발달했다. 가죽옷이나 모직물을 입은 사람은 드물고 면직물 옷을 입은 사람이 많다. 천축국(인도)에서 유래된 문자를 변형해서 쓴다. ... 사찰은 100여 개에 승도는 5,000여 명에 달하며 모두 대승을 학습하고 있다.

호탄 왕국은 중국의 둔황과 교류하기 앞서 인도와도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이들은 크로라이나 왕국과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인도의 카로슈티 문자를 변형시켜 사용했으며 인도에서 도입한 면직물을 생산하며 번영을 누렸다. 호탄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산스크리트어로 "땅의 젖"이라는 이름의 "쿠스타나"(Kustana)로 칭했다. 중국보다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와 교류가 많았던 호탄 왕국이었지만, 불행히도 고대 중앙아시아 역사 기록은 대부분 중국인이나 그리스인에 의해 기록되었던 바, 호탄 왕국의 역사와 생활상의 많은 부분은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는 부파 불교와 대승 불교가 서로 공존했던 것과 다르게 중국에서는 부파 불교가 잘 도입되지 못하고[12] 도교와 융화가 가능했던 대승 불교가 이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널리 전파되었다.

1.3. 돌궐, 당, 티베트, 이슬람 칼리프조

중원을 통일한 당나라는 경쟁상대였던 동돌궐, 서돌궐 제국을 쳐부수고 튀르크계 번장과 번병들을 활용하여 투르판 분지와 타림 분지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을 정복하였다. 당나라 조정은 호탄의 우전도독부, 카슈가르의 소륵도독부, 카라샤르에 언기도독부를 설치한 후 쿠차에 설치한 안서도호부[13]로 하여금 타림 분지와 투르판 분지 영토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이를 "안서 4진"이라고 했다. 또 정주에 북정도호부를 설치하여 튀르크계 유목민을 견제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이 지역 토하라계 도시 국가의 음악이 당나라로 수입되어 당나라의 음악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중국인들은 타림 분지 주민 중에서 절반 이상이 악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을 놀라워했으며, 서역 악기 상당수가 당나라로 수입되어 중국 악기 개량에 영향을 주었다. 서역인 무용수를 뜻하는 호희, 서역 춤을 뜻하는 서역무 역시 당나라 고위층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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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구법승과 이를 호위하는 소그드인 병사, 서역 지역의 당군의 상당수는 돌궐족과 소그드인으로 구성되었다.

토번이 654년대부터 676년까지 이 지역으로 팽창하며 타림 분지를 점령하고, 우전도독부와 소륵도독부를 파괴하자, 당나라 조정은 황급히 안서도호부 본진을 다시 투르판고창국으로 옮겨야 했다. 당나라가 지배할 당시의 투르판 주민들은 망자에게 입힐 옷과 모자, 신발을 주로 재활용 종이로 만들었는데, 투르판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망자의 옷으로 만들었던 여러 문서들 관청에서 쓰고 버리던 서류 및 계약서, 약 처방전, 학교 교재 등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렇게 보존된 종이 중에는 마니교 경전도 있었는데, 여태 수수께끼에 쌓여있던 마니교 경전 내용이나 교리가 20세기 초반 투르판에서 마니교 경전이 발견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연구될 수 있었다.

당나라와 티베트, 즉 토번은 660년대부터 730년대까지 타림 분지와 투르판 분지의 지배권을 놓고 계속 전쟁을 벌였다. 티베트 제국의 명장 가르친링 첸드로[14]가 이끄는 티베트군이 670년 대비천 전투에서 당나라의 대군을 궤멸시키자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당나라는 나당전쟁에 파견보낸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티베트군과 맞서야 했다. 당나라를 궁지에 몰아넣은 티베트는 690년대까지 동튀르키스탄 영토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8세기 초 우마이야 왕조의 팽창으로 티베트의 동맹이던 튀르기시족이 약화된 틈을 타서, 744년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나라군이 티베트의 돌궐 동맹군을 궤멸시키고 일리 강과 이식쿨 호 근처의 영토를 다시 수복하면서 당나라가 서역에서 직접 통치[15][16]하는 영역은 최대 판도로 확장되었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군은 페르가나의 왕과 연대하여 750년 타슈켄트를 점령하고 왕을 생포했다. 오늘날의 타슈켄트에 해당하는 사쉬 왕국의 왕은 평화적으로 물러났지만 고선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보내 사쉬 왕국에서 강간, 살인, 약탈을 자행했고 타슈켄트의 왕을 장안으로 압송시켜 처형당하게 만들자, 사쉬 왕의 아들은 아바스 왕조 아랍인들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했다. 고선지는 아랍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카를룩족 기병들을 동원하였으나 이들은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배신하면서 당나라는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탈라스 전투는 그 자체로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무슬림들의 군대는 당나라 군을 격파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토번 제국을 뚫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당나라 역시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고선지와 가서한을 비롯한 여러 유능한 장수들이 죽어나가고 안서 4진의 정예병들이 소모되었고, 이 틈을 타서 티베트인들이 안서 사진을 너머 돈황에 이르는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타림 분지와 투르판 분지는 소모된 당나라군을 대신해 안록산의 난을 진압해준 위구르인들이 차지하게 된다.

1.4. 위구르인

위구르는 중국 기록상 튀르크계 유목민들의 연맹으로서 약 6세기경 분화되었다. 본래 서돌궐이 지배하는 땅에 살았으나 서돌궐과의 충돌 후 동북방 셀렝게 강 유역으로 이주한 뒤, 이후 꾸준한 돌궐제국의 적국으로 상대하였으나 번번히 패퇴하였고, 돌궐 제국의 토벌에 못 이겨 일시적으로 당나라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가기도 했다. 당나라, 설연타와 연합해 동돌궐을 630년 멸망시켰고 이후 당나라의 기미지배를 받으며 지내다가 당나라에 멸망했던 돌궐이 부활하자(돌궐 제2제국) 돌궐에 다시 복속되거나 당나라가 지배하는 하서회랑으로 도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740년대에 돌궐 제2제국이 내분으로 혼란에 빠지자 바스밀, 카를룩 부족과 연합해 돌궐을 무너트리고, 위구르의 수령 쿠틀룩 보일라가 쿠틀룩 빌게 퀼 카간으로 즉위해 위구르 제국을 건국했다.

1.5. 위구르 제국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1b15dc97cd3fa3daec4adb2fcaffd66f--warriors-silk-road.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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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는 한자회골이나 회흘, 회홀 등으로 쓰였는데, 중당시대에 꽤나 강성한 국가였다. 대표적인 것이 744년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세웠다가 842년 키르기스인의 침공으로 멸망한 위구르 제국(위구르 칸국)이었다. 돌궐 제국때부터 항쟁해왔던 당나라와는, 위구르 제국의 서쪽에 있던 아바스 왕조와 연합한 뒤 751년 일어난 탈라스 전투의 승리로 인해 당나라의 서진이 저지되면서 위구르 제국의 안정이 확보되었고 이후 위구르는 이슬람 제국과 당나라의 사이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동쪽에 쳐들어오는 당나라를 막으면서 생존해왔다. 안록산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나라를 지원해주었는데 단순히 반란군을 격퇴하는 것뿐 아니라 수복한 낙양을 약탈하고, 심지어 칸이 당나라를 방문했을 때 칸을 맞이해준 당나라 황족인 옹왕(후의 당나라 덕종)이 보는 앞에서 당나라 장수들 더러 춤을 춰보라고 협박하고, 장수들이 거부하자 칸이 직접 매질을 해 죽여버릴 정도로 당나라를 업신여기고 무시했다.[17] 위구르에 바치는 어마어마한 비단 등 조공량 때문에 당나라 사람들의 허리 펼 날이 없었다고 할 정도다. 위구르를 비롯한 유목민 국가들은 자신들의 말과 중국의 비단을 거래하는 이른바 '견마무역'을 통해 이득을 얻었는데 원래 말과 비단의 환율은 1대1이었으나 위구르는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이 환율을 1대40, 1대50 등으로 멋대로 올려버리면서 당나라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위구르 제국은 관롱집단의 기원이 된 탁발선비처럼 중국 문화와의 동화를 선택하는 대신에 소그드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마니교를 국교화하였으며 초원에 거주하는 북방 유목민족의 역사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2. 중세: 위구르인 정착 이후의 역사

2.1. 동튀르키스탄으로의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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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제국키르기스족에 의해 840년 멸망했다. 그러나 키르기스족도 위구르를 대체할 만한 제국을 세우지는 못했고, 많은 위구르 유민들이 원 거주지인 몽골 고원에서 현 거주지인 토하리스탄으로 대이주하여 천산 위구르(고창회골)를 세우고, 타림 분지 현지에 거주하는 인도유럽어 계통 백인인 토하라인들과 혼혈하여 지금의 위구르인을 형성하였다.

다만 간쑤 지방에 남은 위구르인도 있었는데 이들은 하서 위구르(하서회골)를 형성했다. 하서 위구르는 혼혈이 별로 진행되지 않았으므로 동아시아계[18]의 모습을 유지하였고 이들이 "황색 위구르 또는 위구족"이라고 불리는 유고족이다.[19] 이리하여 위구르족의 도래와 정착으로 동투르키스탄이 형성되었다.[20]

10세기 페르시아 지리서 《후두드 알-알람》에는 오우즈 투르크 영토 동쪽에 위치한 코초(고창)는 중국화된 도시로, 코초를 중심으로 하는 다섯 도시에 소그드인들이 많이 살고 이들은 조로아스터교(마니교), 기독교, 다신교(불교)를 믿고 있다고 기록했다. 당시에는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쇠퇴하면서 신장 지역에서도 마니교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불교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던 듯 하다. 중국 사서에도 비슷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는 비와 눈이 잘 내리지 않으며 무척이나 덥다. 매년 중 가장 더울 때면 이곳 주민들은 땅 속에 굴을 파고 그곳에 머무른다. 은이나 놋쇠로 만든 관으로 서로 물을 튀기며 더위를 식히는 놀이도 종종 즐긴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숭상하며 귀족들은 말고기를 먹고 그 이하 사람들은 양고기, 야생 오리와 거위의 고기를 먹는다... 비파와 해금으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이곳에서는 양질의 면포가 생산된다. 그들은 달력으로 아직 개원력[21]을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는 50개가 넘는 사찰이 있으며, 각 사찰의 이름은 과거 당나라 때 알려진 그 이름과 같다. 사찰에서는 대장경을 사경하며 이곳에서는 당음, 옥편 그리고 경운에 관한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봄 날 밤에는 지역 주민들이 무리지어 사찰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악기를 연주한다. 이곳에는 물론 페르시아인 승려가 자신들의 계율을 말하며 불경(佛經)을 외도(外道)라고 칭하는 마니교 사원도 있다. 이 나라에는 빈자가 없으며 누구든지 먹을 양식이 모자란 사람은 여럿에게 도움을 받는다. 사람들은 보통 100살이 넘도록 장수하며, 젊은 나이에 일찍 죽는 사람이 없다.
-『송사 고창전』

코초 위구르, 즉 고창회골은 876년 둔황의 한족 군벌들과 싸워 하미(쿠물)를 정복했다. 위구르인, 토하라인, 소그드인이 중심이 되고 튀르크인, 사카계 호탄인, 중국인, 티베트인의 영향을 받는 위구르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은 인종의 전시장이자 국제 도시였다. 코초 위구르 주민들은 굳이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세계 여러 지역의 문화와 종교, 언어에 대해서 기본 상식을 갖출 수 있었으며 이웃 유목민들은 이들을 "초원의 지식인"들이라며 부러워했다. 위구르인들은 과거 쿠처어나 한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위구르어로 번역하는 일에도 열심이였으며, 평범한 노예도 계약서를 직접 작성할 수 있을 정도로 식자율이 높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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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초 위구르국이 존재할 당시에는 중국에 면화가 널리 보급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동튀르키스탄에서 생산된 면직물은 서하요나라의 위구르인 상인 공동체를 통해 중국으로 수출되면서 위구르인들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코초의 위구르인들은 풍부한 일조량과 천산산맥의 눈 녹은 물을 이용하여 목화, 포도를 비롯한 많은 상품작물을 재배했다. 위구르 농부들은 이모작을 통해 많은 잉여 농산물을 생산하며 이 지역 상인들에게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했다.

1130년 이들은 서요에 복속되었으나 1209년에 몽골군이 서요를 정발하자 즉각 몽골 제국쪽으로 줄을 갈아탔다. 몽골 제국 시대에는 코초 위구르를 중심으로 한 위구르인들과 타림 분지 서부의 무슬림 주민들이 서요를 침공한 몽골군에게 적극 협력하면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22] 그러나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카이두가 이 지역을 두고 서로 내전을 벌이면서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쿠빌라이 칸은 이 지역에 몽골 기병과 중국인 보병들을 정착시켰는데[23], 이 때문인지 당시 위구르 지역에서는 이슬람, 불교, 기독교, 마니교 신자뿐만 아니라 도사들이나 유생들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한다.

2.2. 이슬람화

당나라가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동튀르키스탄 일대가 바로 이슬람화가 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상술된 토번 제국 때문이었다. 토번 제국은 압바스 왕조 군대가 토번과 인접한 트란스옥시아나 일대를 정복하자 이를 경계하여 튀르크계 동맹군 튀르게시를 지원하여 소모전을 벌이도록 만들었고, 토번 제국 역시 압바스 왕조 군대와 직접 여러차례 전투를 벌여 승전하였다. 이 때문에 탈라스 전투 이후에도 압바스 왕조 군대는 티베트 대신 타림 분지를 장악하는데 실패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고창(코초)회골의 위구르인들은 불교-기독교 경교-텡그리 신앙을 신봉하다 튀르크계 국가 중 가장 먼저 이슬람으로 개종한 카라한 칸국의 영향으로 인해 다른 튀르크계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11세기경부터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4세기 이전까지는 타림 분지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위구르인들은 기존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것은 몽골 제국의 성립과 분열로 차가타이 칸국이 성립된 이후부터였는데 1300년대 초 테베크 칸의 치세 대부터 이슬람으로 개종한 차가타이 칸국은 주변의 비무슬림들에게 이슬람을 강요하기 위한 지하드를 자주 벌였고, 고창회골 또한 차가타이의 지하드 대상 중 하나였다. 차가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이 분열된 이후부터는 동차가타이 칸국(모굴리스탄 칸국)의 공격을 받아 고창회골은 멸망하고, 타림 분지의 위구르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16세기 초반으로 가면 동투르키스탄 동쪽 끝 투르판과 하미(쿠물)의 위구르인들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타림 분지 전체가 이슬람화되었다.

물론 동투르키스탄이 이슬람화되었다고 해서 기존 거주민들의 생활상이나 문화가 한꺼번에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는 호탄의 비단 직조 산업이 있는데, 고대 불교국가였던 호탄은 인도로부터 목면을 도입해 면직물을 생산해서 중국으로 수출하는 한편 중국으로부터 누에나방과 뽕나무를 도입해 견직물도 생산하였고, 이는 현대까지 단절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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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에서 동남쪽으로 5~6리 떨어진 곳에 마사(麻射)라는 절이 있다. 이 나라 선왕의 부인이 세운 것이다. 옛날 이 나라 사람들은 뽕나무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동쪽의 나라에는 그것이 있다고 들었으므로 사신에게 명하여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군주는 이것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변방의 출입문에 엄명을 내려서 누에나 뽕나무 종자가 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경비를 서도록 하였다. 하는 수 없이 호탄왕은 자존심을 굽혀서 중국에 혼처를 구하였고, 중국의 군주는 그 청을 받아들였다. 호탄왕은 사신에게 중국의 왕녀를 받아들일 때 ‘여기는 본래 비단실이나 누에, 뽕나무의 종자가 없으니, 반드시 그것을 가지고 와서 옷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도록 명령하였다. 공주는 그 말을 듣고 비밀리에 종자를 구한 뒤 모자 속에 감추어 마침내 변방의 출입문에 도착하였다. 국경의 관리는 두루 수색하였지만 공주의 모자만은 조사하지 못하였다.
대당서역기 / 현장[24] #

김호동 교수의 저서 황하부터 천산까지에 의하면 고대 당시 호탄 주민들 사이에서는 비단을 생산할 때 누에고치 속에 번데기를 죽이면 다음 뽕나무 농사를 질 때 부정이 타서 비가 오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터부는 호탄이 이슬람화되고 나서도 한동안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한다.[25]근데 위에 사진에서는 누에나방이 나오지 않고 안에 번데기가 그대로 있는 누에고치를 걍 삶고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설화에 따르면, 타림 분지 남쪽 갈로락가성에는 놀랍게도 백단향으로 만들어진 불상이 날아들었으나 도시 주민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런에 한 이방인 아라한이 불상을 숭배하기 위해 도착하자 사람들은 그를 모래에 파묻고 굶겼다. 아라한이 오기 앞서 불상에 예불하곤 했던 주민 한 사람이 그 아라한을 측은히 여겨 몰래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아라한은 그 사람에게 도시가 곧 모래에 파묻힐테니 떠날 준비를 하라고 일러주고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이 남자의 친척과 이웃들은 앞으로 닥칠 재앙에 대한 그의 경고를 무시했고, 7일째가 되던 한밤에 모래와 흙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하더니 온 성 안을 가득 메웠다. 아라한에게 음식을 공양했던 남자는 미리 준비했던 땅굴을 이용하여 도시를 탈출했는데 신비롭게도 그 불상은 이후 그가 피신했던 비마성에 다시 나타났다.
『라시드사』에 기록된 설화에 따르면, 자말룻딘이라는 이름의 호자는 투르판에서 호탄 사이 로브 카타크라고 알려진 도시에 살며 다와이슬람 선교를 하였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를 업신여겼다. 어느날 그는 설교 중에 하나님께서 도시에 곧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고를 남긴 후 자말룻딘과 한 무엣진은 함께 도시를 떠났는데, 어느정도 길을 가다가 무엣진이 마음을 바꾸어 도시로 돌아갔다. 그가 미나렛(첨탑)에 올라가 아잔을 외치는 동안 모래가 하늘로부터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미나렛 위에 있었기 때문에 재앙을 피할 수 있었으나 도시는 완전히 모래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는 다시 자말룻딘과 합류하여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

동투르키스탄의 이슬람화는 수피승들이 현지 불교나 샤머니즘 신도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킴으로써 완성되었다. 이들은 질병에 대한 치유력을 보여주고 전투의 승리를 위해 기도를 하는 등 샤먼처럼 행동했다. 전근대 중앙아시아의 수피 이슬람은 기존 신앙이나 종교 풍습을 제거하지 않은 채 그 위에 덧씌워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고고학 조사 및 문헌대조 결과 동튀르키스탄 일대에서 수피들이 숭배하는 성묘들 역시 대부분 과거 불교 사찰이나 성지가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2.2.1. 카라한 칸국

카를룩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카라한 칸국은 본래 텡그리 신앙을 믿는 튀르크계 유목민 집단이었다. 카를루크족들은 돌궐 제국의 적법한 계승자의 지위를 차지하는데, 그들의 지배자들은 추 강에 위치한 텡그리 신앙의 성지를 장악하였고 이를 근거로 자신들의 지도자를 이라고 칭했다. 본래 칸이라는 용어는 텡그리 신앙의 성소를 지배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호칭이었다. 카라한의 칸들은 유목민들이 흔히 그렇듯이 칸이 사망하고 영토를 물려받는 과정에서 분열되었는데, 한 쪽은 사자 칸이라는 뜻의 아르슬란 칸이라 불렸고, 다른 한 쪽은 숫낙타 칸이라는 뜻의 부그라 칸으로 불렸다.

부그라 가문의 왕족 사투크는 기록상으로는 무슬림 무역상들에게 감화되어(혹은 아마도 이웃한 무슬림 왕국이었던 사만 왕조의 도움을 받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숙부를 무찌르고 사투크 부그라 칸이 되었으며, 이후 부그라 가문보다 세력이 더 컸던 아르슬란 칸마저 제압하였다. 무슬림 사료에 따르면 사투크 부그라 칸이 사망한 지 5년 후인 서기 960년 20만 가구의 튀르크인들이 변발을 깎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한다. 사투크 부그라 칸은 타지크계 사만 왕조[26]의 도움을 받아 비무슬림 친척들을 제압하였는데, 부그라 칸의 후계자들은 역으로 사만 왕조를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이후 카라한의 칸들은 공격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호탄 왕국을 공격했다. 고대 샤카인들의 후손이자 대승 불교를 믿던 호탄이 1006년부로 카라한 왕조에 정복당해 멸망당하면서 호탄 왕국의 샤카족 주민들은 튀르크-이슬람화되었다. 카라한 왕조는 여새를 몰아 동부의 코초 위구르(고창회골)와도 전쟁을 벌였지만 정복에는 실패했다. 카라한 칸국은 한 편으로는 무슬림 왕조였으나 기본적으로는 튀르크계 정복왕조이기도 했다. 고창회골의 위구르인들을 타트(Tat)라고 불렀는데 이는 튀르크인들이 페르시아인 농민들을 지칭하던 멸칭의 하나였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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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한 칸국이 정복한 호탄과 카슈가르의 불교 문화는 튀르크인들의 전통적인 텡그리 신앙과 함께 수피 이슬람 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발라사군에서 태어나 카슈가르의 대학에서 공부한 튀르크 무슬림 문인 유수프 카스 하지브[29]는 중세의 대표적인 튀르크어 문학 작품 중 하나인 《쿠타드구 빌리그》(복락지혜)를 집필했다. 그의 책에서는 네 명의 등장인물 칸, 재상, 재상의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이 등장하여 종교 생활과 사회 생활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소재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대개 칼릴라와 딤나 같은 페르시아어 문학 작품들과 소재가 꽤 다르다. 칸 밑에서 일하는 재상이 아들을 남기고 사망한다. 칸은 일찍 사망한 재상의 아들을 보살피고 그는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 재상 자리에 오른다. 칸은 그에게 다른 지혜로운 신하를 구해올 것을 명하고 재상 자리를 이어받은 주인공은 자신의 친형이 속세를 떠나 고행을 한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에게 두 차례 편지를 보낸다. 답장이 없자 주인공은 형을 만나러 가지만 형은 동생 앞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주인공은 자신도 형을 따라 고행 생활을 이어갈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를 따라서 재상직을 이어받을 것인지 고민하는데 이 때 형은 그에게 자신 대신에 아버지를 따라서 재상 자리를 이을 것을 권한다. 형의 임종을 보고 돌아온 주인공은 명재상이 되어서 선정을 펼치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 책에서는 불교 문화와 텡그리 신앙의 잔재가 중세 튀르크 무슬림들 문화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카라한 칸국의 튀르크인들이 페르시아 문화권이나 아랍 문화권의 이슬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카라한 칸국 출신 학자로 카슈가르에서 수학했던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튀르크어의 위상 상승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셀주크 제국으로 이주 후 바그다드에서 아랍어, 산스크리트어 사전에 대해 추가로 공부할 수 있었으며, 이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튀르크계 민족들이 거주하는 여러 지역의 방언과 기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후 1070년대 바그다드에서 아랍어-튀르크어 사전을 집필했다. 카슈가리의 사전 편찬 당시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는 이미 셀주크 튀르크의 보호를 받는 상황에 있었으나 아직은 튀르크인들의 언어와 문화가 아랍인페르시아인 입장에서 야만시되고 무시당하는 입장이었다. 카슈가리의 사전 편찬 이후 튀르크어족 언어와 문화의 위상이 상승되면서 중동 내 튀르크인들의 입지도 훨씬 더 견고해졌다.

카슈가리는 오늘날 역사학자들이나 언어학자들 입장에서 너무나 고맙게도 당시 튀르크어의 여러 격언이나 운문 문장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였으며, 여기에는 물론 자신의 고향인 카슈가르의 격언과 시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카슈가르 방언이 페르시아어 차용어가 적은 순수한 튀르크어로 여러 튀르크 방언 중에서도 여러모로 가장 훌륭한 튀르크어라고 결론지었다. 여러 튀르크 방언에서 페르시아어 차용어들을 일일이 분리해내는 작업도 해냈다. 오늘날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는 위구르인 사이에서 세종대왕 급의 존경을 받는 위인이 되었다.

2.2.2. 차가타이 칸국

카슈가르는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만 유명했던 것이 아니었다. 카슈가르는 고대 말부터 네스토리우스파 대주교구가 존재했을 정도로 기독교가 번영했던 도시로, 이 지역의 소그드인들과 위구르인 기독교도들은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웅구트 등 여러 몽골 부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카슈가르를 장악한 카라한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호탄의 불교가 수피 이슬람으로 대체되는 와중에도 카슈가르의 기독교 공동체는 무슬림 튀르크인들과 공존하며 수백년동안 계속 번영하였다. 카슈가르를 1273~4년에 여행했다는 마르코 폴로에 따르면 당시 많은 수의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 주민들과 여러 교회들이 번성했다고 한다. 13세기 말 차가타이 칸국의 투글룩 티무르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기독교인 주민들에게도 이슬람을 강요하기 시작한 듯 하다. 흑사병의 창궐과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의 이라크 이주 이후 이웃한 기독교 공동체와 소통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티무르 제국티무르가 카슈가르를 약탈하며 교회들을 파괴하였고, 그 결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동투르키스탄에서 사멸했다.

1390년 차가타이 칸국의 히즈르 호자는 키타이에 대항하는 지하드를 벌여 위구르스탄의 중심지인 투르판과 코초를 정복하고 위구리스탄 주민 전부를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즈르 호자는 중국인에 맞서 싸운 것도 아니었으며 위구르의 불교 주민들은 그의 주장과 다르게 정복 이후 수십년에 걸쳐서야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위구리스탄 주민 전부를 개종시켰다는 주장과 다르게 이들은 15세기 초 불교 승려를 대동한 사절을 북경으로 파견하였으며, 1420년대 이 지역(당시에는 모굴리스탄 칸국 영토였다.)을 거쳐간 티무르 제국의 사절은 이 지역에서 다신교(불교) 사원들이 엄청 화려하고 수도 많다고 기록했다. 1450년대 즈음 돼서야 이 지역에 모스크가 많다는 기록이 나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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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위구르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는 바로 같은 차가타이어파에 속하는 우즈베크어인데, 이는 카라한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에 의한 신장의 이슬람-튀르크화와 관련이 있다.

차가타이 칸국을 계승한 티무르 제국 치하 트란스옥시아나호라산 각지에서는 차가타이어 문학 및 천문학 등이 융성하였다. 티무르 제국과 동쪽에 이웃한 모굴리스탄 칸국 주민들은 같은 차가타이어를 사용하는 사마르칸드의 차가타이 튀르크인(이들은 우즈베크들의 선조에 해당한다.)들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미 카라한 칸국 시절부터 타림 분지 서부 주민들은 여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피파 마드하브를 따르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동튀르키스탄 주민들은 서부의 차가타이 튀르크인들과 문화적으로 동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모굴리스탄 동부의 불교를 믿는 주민들은 주변 교역 파트너들이 하나둘씩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상황에서, 이들도 불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되었다.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 원나라 왕족들이 위구르계 주민들을 다스리던 불교 왕국인 카라 델 왕국은 하미를 수도로 삼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16세기 초까지 잔존하고 있었으나, 1513년 모굴리스탄 칸국의 만수르 칸에게 정복당해 멸망당했다. 명나라는 하미를 탈환하기 위해 몽골족 한 개 부족을 통째로 고용하는 등 비싼 비용으로 대군을 동원하며 맞섰으나, 결국 망신만 당하고 실패하였다. 하미에 살던 위구르인들은 불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으로 개종을 원치않은 이들은 명나라에 요청해 난민이 되어 감숙성으로 이주하였다. 명나라 간쑤성으로 피신한 위구르인들은 2~3세대가 지나며 서유구르어를 잃어버리고 현지 중국인들과 완전히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동튀르키스탄 주민 중 불교 신도들이 순니파 하나피파로 개종하는 동안 타슈쿠르간 등지의 산악지대에서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파미르족 주민들은 시아파 중에서 소수종파였던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였다. 시아파 이스마일파의 경우 노루즈 같은 조로아스터교 풍습을 권장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위구르인들 중에서도 시아파로 개종한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타림 분지 동부의 일부 주민들은 시아파의 수피 교단 중 하나인 알레비파로 개종하였다. 알레비파는 하나님과 무함마드와 알리의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특이 종파로서, 영지주의 및 텡그리 신앙의 영향을 흡수한 수피 교단으로 순니파 이슬람과 교리 및 율법에서 차이가 적지 않았다. 이른바 에이누인이라 불리게 된 위구르족 알레비파 신도들은 여타 동튀르키스탄의 순니파 무슬림 주민들과 충돌한 끝에 타클라마칸 사막 한가운데서 유목을 하거나 아니면 집시처럼 잡상인이 되어 도회지에서 유랑하는 방식으로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준가르 칸국이 동튀르키스탄을 장악했다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완전 이슬람화한 이후, 청나라의 통치 시기 동안 위구르인 인구가 늘고 장작 수요가 늘어나자 신장의 많은 고대, 중세 불교 유적들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당시 불교를 미신으로 경멸[30]하던 청나라 관료들은 무슬림 주민들이 비료로 활용하기 위해 불화를 긁어내서 쓴다던가 사찰 유적의 나무를 가져다가 땔감으로 쓴다던가 같은 행위를 방조하였고, 이로 인해 신장의 불교 유적 상당수가 건조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이 지역의 불교 유적들이 20세기 서구인 역사가들과 고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면서, 중앙아시아를 통해 불교가 중국에 도래한 역사가 재조명될 수 있었다.

3. 근세: 모굴리스탄 칸국과 오이라트 부족 연맹

티무르 제국의 건국자 티무르는 원나라의 복수를 위해 동쪽의 명나라를 정벌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원정 와중에 병사하였다. 당시 티무르 제국과 명나라는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것이 아니었고, 두 제국 사이에는 모굴리스탄 칸국이 있었다. 티무르는 이교도들을 정벌한다는 미명 하에 오히려 비무슬림들과 대치하던 다른 무슬림 왕국들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일들이 많았는데[31], 아마도 티무르가 원정 도중 급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명나라 원정은 모굴리스탄 칸국만 박살내는 방식으로 끝났을 확률이 없지 않았다. 티무르의 정복 전쟁은 명목상으로는 이슬람 지하드를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몽골 대제국을 복구시킨다는 목표가 핵심이었다. 티무르의 정복 과정에서 몽골 제국의 계승국 상당수가 멸망하거나 쇠퇴한 것을 계기로,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주요 민족에 해당하는 여러 튀르크계 민족들이 흥기하기 시작했다.

사마르칸드가 위치해 있던 트란스옥시아나에는 우즈베크 칸국이 들어섰고, 고대 소그드인들과 중세 카라한 칸국의 후손들은 우즈베크인이라는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 티무르의 침략을 받고 붕괴되던 킵차크 칸국 동부 영토에는 카자흐 칸국이 들어서고, 이를 계기로 킵차크족 유목민들은 카자흐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모굴리스탄 칸국은 서쪽으로 우즈베크 칸국카자흐 칸국을 이웃으로 두게 되었다. 다른 한편 중세 초 몽골 고원 북부에서 위구르 칸국을 멸망시키고 타림 분지로 피난하게 만들었던 키르기스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말에는 자신들도 위구르인들의 피난 경로를 따라 천산 산맥과 이식쿨 호로 이주하였다. 이렇게 이주한 키르기스 유목민들은 타림 분지 서쪽의 무슬림 주민들을 흡수하였고 이 과정에서 키르기스인들도 수피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되었다. 네 민족 모두 튀르크계였지만 전통적인 유목 생활을 유지한 것은 카자흐인과 키르기스인이었고, 우즈베크인들과 위구르인들은 하천과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농사를 지었다. 청나라의 정복 이전 당시에는 위구르인들과 우즈베크인들이 서로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천산 산맥 북부에는 몽골계 오이라트부 유목민들이 정착했다. 알타이인들과 근연 관계인 오이라트인들은 본래 삼림 지대에서 수렵을 하며 살았으나 몽골 제국의 영향으로 유목민이 되면서 목초지를 찾아 천산 산맥 북부로 유입되었다. 이후에도 이들은 동쪽에 이웃한 몽골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특히 1449년 오이라트의 수령 에센 타이시토목의 변을 일으켜 명나라의 영종 정통제를 사로잡은 것을 계기로 위상이 급상승하였고, 서쪽의 몽골 부족 상당수를 오이라트 연맹 내로 흡수하는데 성공했다. 오이라트 연맹은 모굴리스탄 칸국과의 전쟁에서도 연거푸 승리하였으나, 에센 타이시 사후 내분이 격화되면서 역으로 다시 밀리게 되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오이라트 연맹은 동모굴 칸국의 아흐마드 알라크의 군대에게 두 차례에 걸친 치명적인 대패를 입고 약화되었고, 부족 집단 사이의 내분까지 격화되었다. 명사에 따르면 상당수의 오이라트 부족민들이 동모굴 칸국에 패배한 것을 계기로 난민이 되어 흩어져 명나라로 귀순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16세기 중반 동쪽의 알탄 칸이 자신이 이끄는 몽골 튀메드 부족들과 함께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하자, 이웃한 오이라트인들도 그동안 믿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이슬람을 배교하고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했다. 이 때부터 동투르키스탄은 톈산 산맥을 경계로 북쪽의 티베트 불교를 믿는 몽골 유목민들의 준가리아와 무슬림 농민들이 주가 되는 타림 분지로 나뉘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파를 믿던 케레이트족들은 다른 오이라트 연맹 부족들과 함께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 후 토르구트족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었다. 17세기 초 토르구트족들은 오이라트 연맹 내 다른 부족들과 갈등 끝에 부족 전체가 이주할 것을 결정하였고, 서쪽 카스피해 근방으로 밀고들어와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들을 정복하고 노예화했다.[32] 이슬람측 사료와 러시아 측 사료는 이들 오이라트계 토르구트인들을 "칼미크(Kalmyk) 혹은 깔무끄(قلموق)"라고 칭했다.[33] 다른 한편 오이라트 부족 연맹의 호쇼트족은 티베트 방향으로 남하하여, 내전 중인 티베트인들을 제압하고 호쇼트 칸국을 건국하였으나, 티베트 불교 겔룩파달라이 라마 5세가 이들을 무력화시켰다. 멀리 이주하지 않고 잔류한 오이라트 부족들은 만주족들이 동쪽의 여러 몽골 부족들을 병합한 것에 위협을 느끼고 준가르족을 중심으로 뭉쳐 준가르 홍타이지국으로 거듭난다.

3.1. 티베트 불교와 수피 낙슈반디야 교단

15세기에 이슬람 수피 교단의 일파였던 낙슈반디야 교단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수피 스승이 제자에게 사후에도 영향과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며 교단주의 영향력을 절대화했으며, 수피승들은 더 이상 산 속이나 사막 한가운데서 묵상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샤리아를 엄격히 준수하도록 만들어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한다는 논지를 펴며 과거의 수피 성직자들과 다르게 정치에 적극 관여하였다. 다시 말해서 수피 교단 지도자가 정치에 대놓고 개입하였다.[34][35] 당시 타림 분지는 모굴리스탄 칸국에서 갈라져 나온 동모굴리스탄 칸국과 야르칸드 칸국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동모굴리스탄 칸국을 다스리던 차가타이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을 지도하며 차가타이 칸국의 실권을 장악한 호자 가문[36]이 칸국의 권력을 잡게 되었다. 호자 가문의 구성원들은 곧 칸국의 권력을 놓고 아파크 호자가 이끄는 "백산당"과 이스하키 호자가 이끄는 "흑산당"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고 여기서 아파크 호자의 백산당이 패하면서 아파크 호자는 남쪽 티베트로 도망쳤다.

아파크 호자는 라싸로 가서 티베트를 다스리던 달라이 라마 5세 아왕 롭상 갸초에게 백산당이 다시금 동모굴리스탄 칸국의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달라이 라마 5세의 겔룩파 티베트 불교 역시 낙슈반디야 수피 교리와 비슷하게 "종교 지도자들이 세속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지상낙원이 이루어진다."는 새로운 교리로 무장하며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동모굴리스탄 칸국이 차가타이 가문의 대가 끊기자마자 곧바로 낙슈반디야 교단주들이 직접 지배자로 올라선 것과 비슷하게, 아왕 롭상 갸초 역시 자신을 밀어주던 호쇼트 몽골의 구스리 칸이 사망한 이후 구스리 칸의 자식들을 밀어내고, 자기 자신이 직접 티베트의 정교일치 지배자로 등극한 상황이었다. 종교는 다르지만 삶의 방향이 흡사한데 따른 동질감 때문이었는지, 달라이 라마 5세는 아파크 호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준가르 칸국의 갈단 칸에게 아파크 호자를 도와 동모굴리스탄 칸국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 때 티베트 불교 승려로 수행했던 갈단 칸은 이를 칼같이 받아들여 1678년 12만 명의 대병력으로 타림 분지 서부를 침공하여 백산당과 연합, 흑산당을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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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출신이던 갈단 칸은 환속 후에도 항상 삭발 상태를 유지하고 다녔다 한다. 티베트인 호위병, 카자크 사절과 같이 있는 갈단

갈단 칸은 아파크 호자와 그의 후손들을 달라이 라마 5세의 윤허 하에 타림 분지의 칸으로 임명한 후 준가르 칸국의 봉신으로 삼았다.[37] 갈단 칸은 1680년 야르칸드를 약탈하던 키르기스인들을 격파하고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요새와 오아시스 농장을 건설했으며, 카자흐 칸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준가르는 1705년 모굴리스탄의 뒤를 이어 야르칸드 칸국마저 멸망시켰으며 이로서 동투르키스탄 전역이 준가르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준가르 칸국의 지배를 받게 된 타림 분지의 각 도시들은 매년 은 12만 냥에 해당하는 공물을 준가르의 칸에게 바쳐야 했다.

3.2. 준가르 홍타이지의 지배

17세기와 18세기 전반부에 준가르인들은 위구르인들과 부하라 상인들로부터 무거운 세금을 거두고, 카자흐인들과 키르기스인 전쟁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중가리아 오아시스에 라티푼디움 비슷한 대농장까지 세우며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다. 이들은 타림 분지를 직접 통치하지 않고 현지 지도자들에게 은과 곡물, 강제 노역을 징수했고, 이들이 각종 세금을 징수하러 올 때마다 술과 음식, 여자들이 제공되었다. 위구르인들은 막대한 공물을 그것도 불신자인 준가르의 칸에게 바쳐야 하니 죽을 맛이었고, 준가르인들은 위구르인들에게 공물을 걷으러 갈 때마다 성상납까지 강요하는 횡포를 부렸다.

결국 견디다 못한 타림 분지 동쪽 투르판과 쿠물(하미)의 위구르인들은 동쪽의 청나라에게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였던 강희제는 준가르를 제국의 서쪽 국경을 위협하는 적으로 보고 있었고 투르판과 쿠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96년 준가르와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준가르 칸국은 청나라의 전성기였던 강희제, 옹정제 재위 시절에도 팔기군이 준가르 칸국으로 원정올 경우 100일치 이상의 군량을 준비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청군을 준가르 영토 깊숙히 유인한 뒤 습격하는 방법으로 괴롭혔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갈단 칸의 군대를 두 차례에 걸쳐 크게 격파하면서 갈단 칸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38], 원정 거리로 인한 보급 비용 지출이 너무 심각했던 문제로 준가르 칸국 전체를 병합하는 일은 보류하였다.

맨 처음 청나라에게 신종할 것을 맹세한 투르판과 쿠물은 "쿠물 칸국"이라는 이름으로 청나라의 봉신국으로서 자치를 허용받았고, 이후로도 준가르와의 전쟁이나 야쿱 벡의 예티사르 반란 등 신강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전쟁에서 청나라 편으로 활약하였다.[39] 한편으로 1697년 갈단 칸이 자살하자 그와 대립하던 체왕 랍탄이 홍타이지가 되어 준가르 홍타이지국을 장악했다. 갈단 칸이 사망하기 이전 1694년 체왕 랍탄은 이미 달라이 라마에게서 에르데니 조릭투 홍타이지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상황이었다.[40] 갈단 칸 시절 청나라 강희제가 지휘한 원정으로 쿠물과 투르판을 상실하자, 체왕 랍탄은 이를 대체하기 위해서 서쪽에 이웃한 카자흐 칸국을 공격하여 일리 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다졌다.[41] 한편으로 체왕 랍탄은 종종 러시아인들을 납치해왔다. 당시 루스 차르국의 시베리아 영토는 소금이 부족했고, 준가르 칸국은 정기적으로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지역을 습격하여 러시아인들을 납치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카자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대북방전쟁 와중에 붙잡힌 스웨덴인 포로들도 있었다. 준가르는 이렇게 사로잡은 러시아인들이나 스웨덴인들로부터 총기 주조 기술과 지도 제작법을 배웠다. 또한 과거 준가르와 분리되어 카스피 해 인근으로 이주했던 칼미크 칸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던 준가르 홍타이지국도 정치 권력의 안정을 위해 티베트 불교계의 수장 달라이 라마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유목제국은 지배자가 죽으면 후계자들이 서로 싸우며 분열하는 문제로 약해지는 일이 흔했는데, 몽골인들이 티베트 불교로 개종한 이후에는 티베트 불교가 이러한 분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더군다가 준가르의 통치자들은 칭기스 칸의 직계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칙상 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고, 티베트 불교가 주는 권위가 더더욱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42][43] 이를 파악한 강희제가 티베트에 손을 쓰면서 달라이 라마들이 청나라 조정과 손을 잡자, 청나라와 대립하던 준가르 홍타이지의 권위도 실추되기 시작했다. 체왕 랍탄 역시 이를 가만히 보지 않고, 1704년 1만 명의 기병을 라싸로 파견하였다. 준가르 기병들은 1년만에 1만리에 달하는 거리를 주파하여 라싸에 도달한 후에 친청파 라짱 칸을 살해하고, 이 왕에 온 김에 몽골 풍습대로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한 이후, 라짱 칸의 요청으로 달려온 청군 7천여 명을 전멸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전투 승리와는 별개로 명색이 티베트 불교를 섬긴다던 준가르족들이 성소 포탈라궁을 불지르고 주민들을 강간하자, 그간 준가르 홍타이지국과 청나라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던 티베트인들과 달라이 라마들은 청나라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버렸다. 체왕 랍탄과 그의 아들 갈단 체렝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달라이 라마들과 준가르 통치자들의 사이가 나빠져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44], 1745년 갈단 체렝이 사망한 이후 왕위를 다투는 그의 후계자들 중 누구도 달라이 라마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이는 준가르 홍타이지국이 내분의 구렁텅이에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건륭제 시절 준가르가 내분에 시달리는 틈을 노리고 마침내 팔기군이 1756년 준가르 칸국을 정벌하여 1759년 준가르를 완전히 멸망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정복한 옛 준가르 칸국 영토에 "새로운 강역"이란 뜻의 "신강"(新疆, 신장)이란 이름을 붙였고 일리장군으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다. 청나라 조정은 중앙아시아 원정과 방어에 비용이 지나치게 들어간다고 생각하여, 준가르인들이 다시는 세력을 복구하지 못하도록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여성과 노약자들은 전부 팔기군의 노예로 삼아 청나라 각지로 분배했다. 또한 무슬림 농민 거주 지역의 지역 유력자를 "베그"(伯克, بەگ)로 임명하여 무슬림 주민을 통제하였다. 준가르족들은 청군의 공격을 피해 서쪽으로 도주하려고 해도 그동안 준가르 칸국과 싸우던 카자흐 칸국과 러시아가 이를 막아버리자 피난하지 못하고 청군에게 속절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3.3.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의 호자 형제

준가르 칸국이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는 과정에서 낙슈반디야 교단이 청나라에 맞서 전쟁을 일으켰다. 아파크 호자의 증손자이자 '호자 형제'라는 별명을 가진 부르하누딘와 호자 지한 형제는 준가르가 멸망한 당시가 낙슈반디야 교단이 다시 알티샤르를 장악할 적기라고 보았다. 이들은 타림 분지 오아시스가 청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청군이 안정적인 식량 보급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에 호소했다. 호자 지한은 자신의 형이던 부르하누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이제 강력한 준가르 국가가 우연히 무너지고, 우리를 압박할 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기회를 잡아 독립국을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노예가 되는 재앙을 겪을 것입니다. 중국은 이제 준가르 땅을 차지했지만, 알티샤르에서 무엇을 할 지는 아직 정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들의 군대는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고, 설령 들어온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싸우지 않고도 그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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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한 호자에 자극받은 낙슈반디야 교단은 4천여 명의 병력으로 쿠처에서 청군 1만여 명에 맞서 싸워 한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45], 현지 벡들은 이들이 쿠처에서 거둔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지원하는데 소극적이었다. 호자 형제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야르칸드와 카슈가르를 점령했다. 호자 형제는 자신들을 공격해오던 청군들을 포위하였으나, 키르기스인들이 호자 형제의 낙슈반디야 군대를 공격하면서 포위망이 풀리고 청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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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 예실콜노르 전투에서 호자 형제의 위구르군을 격파하는 청군을 그린 그림.

1759년 여름, 호자 형제는 인도로 가기 위해 무리 4,000명을 이끌고 파미르 산중으로 퇴각하였다가 바다흐샨에서 현지인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낙슈반디야 교단은 청군에 저항하기 앞서 청군의 식량 보급을 어렵게 할 목적으로 카슈가르 주변의 논밭과 과수원을 황폐화시켰는데 이 소식을 접한 바 있던 바다흐샨 무슬림들이 호자 형제를 바로 처단하였다.

청나라는 엄청난 비용을 지출한 준가르 원정에서 승리를 홍보할 개선 행사를 위해 준가르족 지도자의 수급이 필요했다. 문제는 준가르족 최후의 저항 지도자 아무르사나가 러시아로 도망갔다가 토볼스크 근처에서 천연두에 걸려 죽은 후에 매장되었고, 러시아가 한참 후에야 이를 청나라에 통보하였다는 것이다. 청나라에서는 천연두에 걸린 상태에서 몇 달 동안 흙 속에서 부패한 시체를 개선 행사에서 자랑할 수는 없는 법이고, 하는 수 없이 청군은 바다흐샨의 술탄 샤[46]를 협박하여 호자 형제의 수급을 받아냈고, 호자 형제의 수급은 청군의 개선 행사에 사용되었다.

4. 청나라 치하의 위구르족과 신강 지역 (18세기~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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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청나라 만국내조도(萬國來朝圖)에 묘사된 위구르 및 카자흐 사절단. 일리(伊犁), 카자흐(哈薩克), 우시(烏什), 쿠차(庫車), 카라샤르(哈爾沙爾), 아크수(啊克蘇) 같은 출신지를 한문으로 나타낸 깃발을 들고 있다.

오이라트계 준가르인들이 인종 청소당하며 신장 지역 북부가 공백지가 되자 청나라 조정은 한족 죄수들과 동쪽의 감숙성에 있던 회족 농민들, 남쪽의 타림분지에 있던 위구르인 농민들을 공백지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했다. 준가르족의 거점 중 땅이 비옥하고 수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우루무치는 회족과 한족들의 이민 정착 거점이 되었다. 청나라는 사민 정책 외에도 범죄자를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식민지로 보낸 영국처럼 중범죄자들을 이 곳으로 유배를 보내 개척을 명하게 하기도 하였다. 마명심 반란을 일으켰다 중가리아로 대거 추방당한 살라르족이 그 예시.

또한 청나라는 유목민 세력이 신장 지역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목초지를 대규모로 개간하는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신장 지역의 경작지가 대거 확충되었다. 만주족 팔기군이 한족이나 회족 상인들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은 것과 다르게 시버족들은 쿨자시 인근에서 직접 둔전을 일구어야 했다.[47] 원래는 시버족 외에 다른 팔기군들도 만주족 기인이 아닌 이상 둔전을 직접 경작해야 했으나, 몽골 팔기군이나 한족 녹영은 둔전을 불법으로 민간인들에게 임대시켜서 경작을 대신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청나라는 일리 지역을 중심으로 팔기군을 주둔시켰다. 4~5만 명 정도 규모의 팔기군은 대개 신장 북부, 과거 준가르족이 살던 곳에 거주했는데, 이는 타림 분지 남부에 있는 위구르 무슬림들과의 충돌을 예방하고 러시아에서 돌아온 칼미크족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오이라트인의 일파 중 노가이 칸국을 정복했던 토르구트인들 이른바 칼미크인들도 러시아 제국이 처음과 다르게 군역을 점점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부과하자 15만 명 정도가 다시 신장 북부로 귀환했는데, 오늘날의 광대한 카자흐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기나긴 귀환 여정 동안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카자흐인들이 이들을 습격하며 복수했다고 한다. 카자흐인들은 이들의 친척인 준가르인들이 많은 카자흐인들을 노예로 삼은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굳이 복수가 아니더라도 칼미크인들이 이 지역을 평화롭게 통과하려 시도할 리는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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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 유목민

한편 위구르에 대한 회유 차원에서 위구르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타림 분지의 경우, 한족의 정착을 엄격히 금했다. 이 조치가 풀리게 된 것은 자한기르 호자의 반란 이후이다. 청나라가 정복하기 이전의 신강은 이미 위구르인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인과 카자흐인들이 함께 살았으며, 청나라 정복 이후에는 회족들이 대규모로 정착하여 신장 북부를 개간했다. 즉 동투르키스탄 전체는 위구르인만의 영역이 아니며, 키르기스인들과 회족들도 정당한 지분권을 요구할 수 있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준가르의 압제로부터 위구르인들을 해방시켜 준 입장이며, 단순한 침략자라고도 보기 힘들다. 원인을 제공한 두 민족 중 준가르인들은 멸종한 상태이며[48] 만주인들은 이 지역에 더 이상 관심도 세력도 없다. 동투르키스탄이 어느 민족의 땅인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귀속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청나라의 지배 기간 동안 중가리아의 목초지가 대거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이 지역의 농업 생산량과 인구가 크게 증가하긴 했으나, 과거 준가르 홍타이지국 지배 시절까지도 그럭저럭 돌아갔던 실크로드 무역 체계가 무너지면서 위구르인들은 오히려 더 가난해졌다. 17세기까지는 알티샤르의 상인들이 중동, 인도, 러시아, 시베리아 등과 밀접하게 교역하였고 준가르 칸국에서도 외교 사절들 중 상당수를 이러한 상인들 가운데서 뽑았지만, 청나라는 위구르 상인들의 대외 교류를 상당부분 제한하였다. 위구르인 상인들은 서쪽의 코칸드 칸국 상인들보다 무역에서 불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팔기군 군영에 접근할 수 있었던 한족, 회족 상인들보다도 훨씬 불리한 입장이 되었다. 한때, 중세 튀르크어 사전을 편찬했던 바그다드 대학의 교수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까지 배출시키던 이 지역의 유수의 학교들도 유명무실해졌고 중세 시대 지식인들로 유명했던 위구르인들은 준가르인들의 잔인한 수탈과 청나라 시절 무역 붕괴의 영향으로 문해율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고창회골 시기에는 위구르인 노비들도 계약서를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당시 위구르인 상류층 자제들조차 글을 읽을 수는 있으나 작문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웃한 부하라 칸국의 경우 부하라를 중심으로 마드라사들이 융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학을 원하는 위구르인들은 부하라의 마드라사에서 따로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여타 중앙아시아 및 남아시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튀르키스탄에는 순니파하나피파 마드하브가 우세했기 때문이다. 다만 청나라 치하에서는 출세의 기준과 이슬람 율법학 지식 수준이 서로 별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유학을 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동튀르키스탄 지역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계와 중국 이슬람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지속하였고, 청나라 치세에는 교류가 본격적으로 더 활발해졌다. 중국의 회족들은 이미 명나라 때부터 위구르인들과 교류가 활발했고 위구르인들 사이에서 우세하던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이 중국에 건너가 쿠피야 수피 교단이 되었다.

위구르 농부들은 밀과 쌀, 여러 가지 과일을 재배했다. 화덕에 구운 난(빵)과 차를 곁들인 살구, 아몬드, 복숭아, 포도가 주식이었으며 양고기는 주중에 한두번 먹었다. 노령으로 죽은 야크와 말의 고기나 하천에서 잡은 물고기는 비교적 저렴했다. 명절 때는 우즈베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양의 비계와 당근, 양파를 넣은 쌀밥 폴로우를 먹었다. 준가르 칸국 시절에는 신장에서 생산되는 광물들을 사실상 준가르인들만 독점할 수 있었고, 위구르 농부들은 목재 농기구만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으나, 이후 철제 농기구들이 자유롭게 시장에 풀리면서 농업 생산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천산북로에는 준가르 홍타이지국의 농노였던 타란치들이 자유민이 되어 팔기군에게 공급할 말과 소를 사육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리, 우루무치, 타르가바타이, 바르콜에는 농경지 외에도 목마장이 들어섰다. 이 외에도 신장에서는 이웃한 카자흐인들로부터 말을 수입하여 부족한 군마를 보충하였다.

호자 형제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무슬림 위구르인들은 비무슬림 청나라 만주족의 지배에 반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원나라 때 위구르인들이 요직을 차지했던 것과 다르게 청나라 때 신장은 가장 가난한 지방으로 위구르인들이 몽골인이나 한인에 비해서 많이 하대받았기 때문이었다.[49] 청나라의 지배 동안 이곳에서는 무슬림들에 의해 무려 42차례의 봉기와 국지전이 일어났다. 하미에서는 만주 팔기군 일부가 위구르인들을 괴롭히고 부녀자들을 납치해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 와중에 위구르인 10,000여명이 학살당했다. 무슬림들만 봉기를 일으켰던 것은 아니었다. 신장으로 유배된 한족 범죄자들 역시 종종 봉기를 일으켰는데, 1768년 한 번은 술취한 청나라 관리가 유배지에서 둔전을 경작하던 한족 농민들의 부녀자들을 희롱하자, 한족 농민 1천여 명이 우르르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청나라는 반란 우려 때문에 위구르인들에게 광산에서 노역시키는 일은 자제했고, 대신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신장에 광산으로 파견하였다. 청나라 본토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장 둔전에서 5년, 광산에서 8~10년을 일하면 사면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1820년 '호자 형제' 부르하누딘의 손자인 자한기르 호자(جهانگیر خوجا‎)가 파미르를 넘어 진격하였다. 1826년, 자한기르는 그를 따르는 백산당의 무리를 이끌고 카슈가르를 함락하고 야르칸드, 호탄 등의 도시를 정복하며 한족들과 회족들을 노예로 납치하였다.[50] 청나라의 팔기군은 파미르 산중에서 자항기르를 1827년 처형하는 등 분전했지만 신장의 한족 상인 대부분이 살해당하거나 납치당하며 일부 지역에서 행정이 마비되는 상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청나라 조정은 결국 1832년 더 이상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관세를 일방적으로 코칸트 칸국에 유리하게 조정하고, 코칸드 상인의 치외법권을 보장하며 매년 은전 12,500~50,000냥을 보조금으로 받는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은 청나라가 맺은 사실상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나라 조정은 굴욕적인 조약에 대한 반발과 민심의 동요를 덮기 위해서 코칸드 칸국 병사 6만명을 사살했다는 거짓 전과를 공표했기 때문에, 강남의 한족들은 청나라가 이런 불평등 조약을 맺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청나라 입장에서는 보급이 힘든 신장 지역으로 대군을 파견하는 것 보다는 보조금을 조금 떼어주는 것이 더 남는 장사였다.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만주족의 청나라는 전임자인 준가르 홍타이지국이나 후술되는 야쿱 벡 및 한족 군벌들에 비교하면 위구르인들에게 확실히 더 나은 수준의 선정을 베풀었다. 비교하자면 청나라의 남쪽 먀오족이나 야오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한족 농민들이 남방 소수민족 화전민들의 비옥한 땅을 빼앗아 싸움이 벌어지면 팔기군이 직접 출동하여 소수민족 반란을 진압하면서 소수민족들을 점점 산간벽지로 밀어넣은 것과 다르게, 타클라마칸 사막이 위치한 신장 지역은 자발적으로 이주해오는 한족 인구가 거의 없다보니 청나라 입장에서 위구르인들에게 잘 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 입장에서 신장 지역은 경제 식민지라기보다는 전략적 요충지에 가까웠고 이 때문에 청나라 조정에서 보조금을 보내 뿌리는 방식으로 경제가 운영되었다. 신장 지역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린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청나라 기준으로 인구 밀도가 희박하여 세입이 항상 부족한 편이었다. 청나라 조정에서 보내주는 막대한 양의 보조금이 아니면 이 지역에 주둔한 팔기군의 봉급을 제대로 지불할 수 없었다. 19세기 청나라의 국력이 쇠퇴하자 장강 이남에서 거두어 신장으로 보내는 보조금이 점차 삭감되고 지연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도광제에서 함풍제 치세로 이어지는 시점이던 1850년에는 신장 지역의 만주 팔기 기인들에게 보조금을 삭감할테니 어차피 훈련 안 하고 놀거면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4.1. 둥간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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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는 청나라 중앙 정부에서 보내주는 원조금이 태평천국 운동으로 인해 끊기고, 팔기군들은 위구르인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 군비를 충당했다. 그 결과 많은 신강 무슬림들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또한 태평천국 운동은 다른 방향에서도 반란에 영향을 주었는데 태평천국 운동과 같은 일이 발생할까봐 청나라 정부가 중국(정확히는 China proper)내 회족들을 학살한 것이었다. 1850년대 운남성의 회족(판제이)들이 수 천명 단위로 집단 학살당하고, 1862년 감숙성섬서성의 회족(돈칸, 둥간)들이 학살을 당했다. 1862년의 학살은 섬감회족의 반란을 불러일으켰고 이 반란의 진압 과정에서 도망친 회족들이 신장에서, 청나라가 수천 명 단위로 회족들을 집단 학살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원래 세금 증가로 불만을 가지던 쿠처의 회족들이 이와 같은 유언비어를 듣자 1864년 반란을 일으키며 팔기군 요새들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를 쿠처에서 반란이 시작되었다 해서 쿠처 반란이라 한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같은 이슬람교도[51]인 호탄의 위구르족들도 청나라에 저항하며 봉기하면서 위구르인들도 회족들의 봉기에 대거 합류했다.

이 봉기는 단일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여러 세력 사이의 주도권 다툼으로 팀킬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자한기르 일족의 성전 호소에 영향을 받아 코칸드 칸국에서 넘어 온 야쿱 벡 (ياقۇب بەگ, Yaqub Beg)(야쿠브 베그로 읽히기도 하며 타지크인으로 추측된다.)은 아파크 호자의 후예를 군주로 세우고 카슈가르를 근거지로 삼아 다른 세력들을 평정하며 위구르인 뿐만이 아닌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을 믿는 여러 민족을 모아 "일곱 도시의 나라"라는 뜻의 "예티샤르"(카슈가리아 왕국)를 세웠다. 예티샤르는 카슈가르(قەشقەر, Qeshqer), 야르칸트(يەكەن, Yeken), 호탄(خوتەن, Xoten), 아크수(ئاقسۇ, Aqsu)[52], 쿠차(كۇچار, Kuchar)[53], 코를라(كورل, Korla)[54], 투르판(تۇرپان, Turpan) 등을 아우르는 이슬람 세력의 통일국가였다. 1872년에는 러시아 제국[55], 1873년에는 오스만 제국[56], 1874년에는 영국[57]에게 독립 국가임을 인정받았다. 이 와중에 러시아는 만주, 몽골처럼 동투르키스탄을 식민지로 만들려 획책하였으며 파병하여 쿨자시(غۇلجا, Ghulja)[58] 맞은 편 지역을 강점한다.

하지만 청나라의 위구르인들과 회족들은 종족적 다양성에서 보듯이 단결이 안되었고, 이런 종족 간 증오심 외에도 이슬람의 교파 간 문제 때문에 서로를 공격하는 팀킬도 자주 벌어졌다. 예를 들어 둥간족(회족)과 위구르족은 종교는 같았지만 자주 살육극을 벌였다. 파죽지세처럼 보이던 신장의 반청운동은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한 회족과 카슈가르를 중심으로 한 위구르족 사이의 반목, 그리고 좌종당의 성공적 전략 수립으로 실패하였다.

4.2. 신장성 건성

청나라는 처음에는 이 지역을 포기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흠차대신 좌종당이 이 지역을 포기한다면 러시아 제국이 청나라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며 원정을 강행하였다. 오스만, 러시아, 영국은 야쿱 벡 정권에 최신 무기를 지원했으나, 무능하고 단순한 야쿱 벡의 상대는 바로 태평천국과 염군의 난을 진압하면서 수많은 실전을 겪은 역전의 노장으로 회민 반란군을 전멸시키지 않고 용서하고 포섭하는 정책으로 조기 진압한 좌종당이었다. 야쿱벡은 샤리아를 엄격히 적용하는 탈레반식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같은 무슬림인 회족들은 탄압하는 앞뒤가 안 맞는 정책을 펼쳤다. 회족 뿐 아니라 이슬람 근본주의화 정책으로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 사이에서도 "호로자식"이라고 욕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현지에서 신망을 잃고 있었다. 원래 튀르크인은 모든 종교에 관대했던 유목민이었고 정체성을 이슬람에 두지만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해서는 경기를 일으키는데 거기에 돌직구를 던졌으니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59] 청나라 조정은 위구르인들을 안정시키는데 나름 노력했으나[60], 야쿱 벡의 반란 세력은 일단 기원이 용병에 불과해서 국가통치 경험이 청에 비해 부재했고 일종의 모험 결과로서의 국가 성립이라 청에 비해 체계적인 국가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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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신장 지배 당시 자치를 누리던 많은 위구르인 토후들이 야쿱 벡의 지배에 반발했는데, 그중 한 명이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동쪽 입구 부분에 해당하는 하미(쿠물)의 칸이었다.

감숙, 섬서 반란을 진압한 좌종당의 사병들이 신장을 재정복하기 위해 진입하자 하미의 칸은 이에 적극 협조하여, 좌종당의 한족 민병대가 신장 기후에 적응될 때까지 충분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까지 줘가며 식량을 보급해주었다.[61] 1876년, 하미(쿠물) 근방의 둔전에서 훈련을 마친 좌종당 군은 야쿱 벡이 청나라와 외교 협상을 벌이겠답시고 어리석게도 발포 중지 명령을 내린 틈을 타서 위구르의 중심도시 위륌치를 탈환했다.

야쿱벡은 영국의 중재로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강화하려 했으나, 좌종당 군은 야쿱벡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신장 전역이 러시아나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여 협상을 무시하고 투르판을 함락시키며 계속 진군하였다. 위구르인들의 독립 정권이 성공한다면 그 다음에는 내외몽골의 몽골인들도 러시아의 입김을 받아 동요할 수가 있어 만주, 그리고 북경이 직접적으로 위협받기 때문에 청의 입장에선 반드시 막아야 했다. 오늘날에 중국이 소수민족의 독립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은 중화주의 때문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중앙아시아 소수민족 독립은 중화제국의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야쿱벡은 추격하는 청나라군을 피해 중앙아시아 깊숙히 도주하던 중 홧병을 얻은 탓인지 급사했다. 이것으로 야쿱 벡의 예티사르 왕국은 청군에게 멸망하고, 야쿱벡의 미성년자 아들들은 청나라에 잡혀 거세후 환관이 되었다. 이리하여 신강은 1876년 다시 청나라의 영역이 되었으나, 1871년 러시아 제국이 이미 신장 북서부의 이식쿨 호수와 일리 강 일대의 광활한 영토를 장악한 이후였다. 청나라는 러시아 제국이 점거한 신장 영토를 돌려받기를 원했으나 러시아 제국은 중추지인 일리를 병탄하려 했고 쿨자의 위구르인들과 둥간족들이 한족들의 보복을 두려워해 러시아 제국의 잔류를 요청한 것을 계기로 리바디아 조약에서 일리를 반환하는 대신 호르고스강과 테케스강을 국경으로 일리의 10분의 7을 러시아에 할양하는 지경까지 몰렸다가 188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쿨자 남부 일대만을 간신히 돌려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발하슈호일리 강 유역 서부는 반환되지 않고 오늘날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영토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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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간 신장 북서부 지역은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의 동부 영토로 귀속되었다.

야쿱 벡의 예티사르 반란 이후 좌종당은 이 일대에 자주 반란이 일어나는 이유가 동북 지역이나 다른 번부들과 마찬가지로 당국의 직접적인 행정력이 닿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직접통치를 할 수 있는 행정기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신강 일대를 정복한 이후 준가리아 일대를 준부(準府), 또는 천산북로(天山北路), 타림 분지 일대를 회부(回府), 또는 천산남로(天山南路)라고만 명명할 뿐, 중국 본토에 직접통치를 위한 직성을 둔 것과 달리 별다른 행정기관을 두지 않았는데 1884년 쿨자의 일리 장군부를 철폐시키고 준부와 회부를 통합해 디화를 수도로 삼는 신강성(新疆省)을 설치한다. 둥간 봉기와 감섬회란 와중에 신장과 감숙성을 잇는 도로망과 숙박 시설들도 대거 파괴되었고 그 빈자리는 좌종당이 데려온 산서성의 한족 상인들이 메꿨다.[62]

좌종당은 전략과 전술 방면에서는 뛰어난 인재였을지는 몰라도 양무운동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처럼 수구 유학자라는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는 위구르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무가치한 적폐로 간주하고 위구르인 아이들에게 유교 경전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서당들을 신장 각지에 설치했는데, 해당 학교들은 언어 소통 문제로 당연히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실패했다. 좌종당이 설치한 기숙 학교에서 공부한 아이들은 위구르어를 잊어버려서 부모랑 대화할 수가 없었다 하며, 위구르인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을 가능한한 터키인이나 러시아의 카잔에서 볼가 타타르인 교사들에게 맡겨 서구 최신 학문과 이슬람 학문을 동시에 배우게 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전통 위구르 학교에 몰래 보내는 편을 선호한 것. 좌종당이 설치한 서당들은 20년 동안 간신히 한문을 읽을 순 있지만 한어 작문은 거의 하지 못하는 수준 낮은 졸업생들만 양산하자 좌종당의 뒤를 이어 신장을 통치한 양쩡신은 유학 학교들의 지원금을 무자비하게 삭감하며 사실상 좌종당의 교육 정책 실패를 인정하고 서당들을 폐교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5.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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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성이 새롭게 한족의 제국주의 식민지로 변화하려는 찰나, 러시아 제국이 여기에 제동을 걸었다. 1881년 2월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러시아와 청나라 조정간의 통상이 자유화되자 러시아 제국 상인들이 유입되어 러시아산 물산을 중국산 공산품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카슈가르의 시장에서는 루블화가 청나라 화폐보다 더 잘 통용되었다. 1902년부터 1904년까지 590만 루블어치의 상품이 신장에서 러시아로 수출되었고[63] 340만 루블어치의 상품이 수입되었다. 신장에 주둔한 청군은 러시아가 언제 이 지역으로 쳐들어올지 조마조마하면서 청나라 조정에 증원군을 요청하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청나라는 착실히 막장 테크를 밟고 있던 시점이라 많은 지원을 보내기 힘들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붕괴하면서 군벌시대에 들어섰으나 위구르는 여전히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영역으로써 양쩡신, 진수런, 성스차이 등 한족 군벌에게 통치당하게 된다. 이시기 위구르 민족주의가 태동하였는데 위구르라는 이름은 원래 동투르키스탄튀르크인을 총칭하는 의미로써 현재 위구르족은 과거의 위구르와는 혈연적으로 많이 다르다. 위구르라는 이름은 러시아의 튀르크어 학자인 세르게이 말로프(Сергей Малов, 1880년 ~ 1957년)가 신장의 무슬림 농민들의 언어와 중세 카를루크어 및 위구르 이디쿠트의 언어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해 후대에 붙인 이름이다. 위구르인들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고 터키인과 러시아 타타르인 교사들을 신장으로 초빙하면서 이슬람 학문과 서구의 최신 학문을 동시에 배우며 튀르크 민족주의를 확립해나갔다.

5.1. 위구르 민족주의

청나라의 지배 기간 동안 위구르인들의 전통적인 교육 방법은 마드라사를 중심으로 꾸란하디스에 나오는 아랍어 문구와 페르시아어 시문을 단순 암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대게 꾸란과 하디스에 나오는 아랍어 문구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우라고 때리니까 기계적으로 암송할 뿐이었으며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작문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러시아 제국과 신장의 교역이 점점 증가하고[64] 러시아 제국에 거주하는 무슬림들과 신장에 거주하는 무슬림들 사이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러시아 제국에서 부를 쌓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무슬림 볼가 타타르인들을 본 카슈가르의 부유층 상인 후세인 무사바요프와 바우둔 무사바요프는 문화적 충격을 받고 1885년 신장에서 최초로 서구 학문과 이슬람 신학을 현대적으로 가르치는 초등학교를 설립했다. 후세인은 초등학교 설립 이후에도 교사들을 꾸준히 러시아의 카잔으로 보내 연수를 시키고 카잔과 이스탄불의 교과 과정을 신장에 도입하였는데, 여기에는 전통적인 꾸란 암기 뿐만이 아니라 언어와 문학, 산수, 역사, 지리, 자연, 예술, 체육, 러시아어와 아랍어 회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세인은 자비를 털어 잠재력 있는 학생들을 외국으로 유학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신식 학교들이 기존 마드라사들과 보수 율법학자들의 공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위구르인들의 상황은 재래식 마드라사 교육을 유지할 만큼 한가하지 못했다. 당시 신장의 상황은 러시아령 투르케스탄이나 중국 본토에 비해 매우 빈곤한 상황이었고 위구르인들도 이를 모르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카슈가르에서는 러시아 제국에서 온 상인들이 가난한 위구르인 여성과 결혼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들 중에는 우즈베크인이나 타타르인 같은 무슬림들이 많았지만, 일반적인 러시아인이나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 러시아 유대인들도 드물지는 않았다. 이슬람 율법에서는 비무슬림 남성과 무슬림 여성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지만 그렇다고 위구르인 빈곤층 여성들을 다 굶겨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 위구르인 여성들이 부유한 힌두교도 상인이나 한족 상인이 결혼하는 일이 많았는데, 한족과 결혼한 위구르인 여성들의 경우 무슬림용 묘지에 매장되는 것이 거부되었음에도 양자간의 혼인 자체는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위구르 보수 율법학자들 입장에서도 괜히 고집부리는 대신 이슬람 모더니즘 신식 학교들과 타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15년 한족 군벌 양쩡신이 후세인이 설립한 카슈가르의 신식 이슬람 학교들을 폐교시키고 로도스 섬에서 온 그리스계 터키인 교사 아흐마드 카말을 체포하자 카슈가르의 지역사회가 크게 동요했다. 다행히 카슈가르의 회족들이 위구르인들과 한족 군벌 사이를 중재하여 교과 과정에 중국어를 추가한다는 조건 하에 폐교를 막을 수 있었다. 이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서구 교과 과정에 중국어 수업 과정이 추가된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신장 전역에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8년에는 쿨자에서 러시아 타타르인 상인이 무슬림 여학생들에게 투르크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열였다. 그 이전의 신장의 전통적인 마드라사에서는 12세 이하의 여학생들에게만 기초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그쳤었다. 1920년대부터는 투란[65]이라는 이름의 위구르어 문예지가 출간되기 시작했으며, 카자흐인들과 키르기스인들에게도 근대 교육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5.2. 신해혁명러시아 내전

죄종당은 야쿱 벡을 제압하고 신장을 재점령할 당시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하미의 술탄에게 마음대로 세금을 거두며 자치를 누릴 권리를 하사했다. 하미의 술탄과 그 자손들은 이 “마음대로 세금을 거둬도 된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나머지 하미의 위구르인 농민들을 지나치게 착취했다.

하미의 위구르인 칸이 위구르인 주민들에게 세금을 두 배 이상 늘리고 그 돈을 가지고 러시아와 중국에서 쓸데없는 사치품을 사 쓰자, 분노한 위구르인 농부들은 자신들의 처우를 새로 신장에 정착한 한족 농부들과 동일하게 해달라고 폭동을 일으켰다. 청나라 조정은 봉기를 진압한 후 하미의 칸에게 세금을 원래 걷었던 만큼만 걷으라고 명령했으나 하미의 칸은 듣지 않았다.

신해 혁명 이후 청나라가 멸망하자 하미와 투르판의 위구르인 농부들은 다시 봉기하며 한족들을 살해했다. 각지에서 군벌이 들끓는 상황에서 중화민국은 신장을 포함한 중국 대륙 전역에 제대로 된 통치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 운남성 출신 한족 군벌 양쩡신이 자신들의 회족 사병을 데려다 위구르인 봉기군들을 진압하거나 회유하는 방식으로 진정시키고 군사력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위구르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양쩡신은 청나라의 보조지원금이 끊긴 신장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신장과 중국의 다른 지역과의 연락을 차단해버렸으며, 상술했다시피 좌종당이 세운 학교들 상당수를 긴축 재정을 위해 폐쇄시키고 그렇게 아낀 돈으로 재정의 72퍼센트 가까이를 군사력 유지에 몰빵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3~4만에 이르는 러시아 난민들과 무장한 백군이 준가리아로 들어왔는데 이들 대부분은 양쩡신 입장에서는 환장하게도 백군 군인이었다. 양쩡신은 계략을 써서 백군 지도자 안넨코프를 죽이고 적군을 불러들여 백군을 알타이 산맥으로 몰아냈다. 러시아 백군을 몰아낸 것을 계기로 양쩡신 통치 시기의 신장과 소련 사이의 관계는 매우 친밀해졌는데, 1928년 소련과 신장의 교역량은 신장과 중국의 교역량의 거의 10배인 2400만 루블에 달했다. 한족 군벌들은 신장을 통치하면서 위구르인들이 한화되리라 기대했지만, 정작 신장의 위구르인들은 계속해서 러시아인들과 투르키스탄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튀르크 민족주의를 배우고 위구르 민족주의를 확립해나갔다. 국민당의 사주로 양쩡신이 암살당하고 중화주의자 진수런이 일방적인 한족우선주의를 내세우자 위구르인들은 생존과 자유를 위해 봉기하게 되었다.

5.3.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

1928년 6월 11일, 국민혁명군국민당의 2차 북벌을 통해 장쭤린을 축출하고 베이징을 점령하는 것을 본 군벌 양쩡신중화민국 국민정부에 대한 복종을 타전하면서 산하에 들어간다. 얼마 안 가 1928년, 양쩡신의 부하였던 진수런이 양쩡신이 국민당의 사주로 살해된 틈을 타서 집권했다.

진수런은 양쩡신과 다르게 현실 감각이 전무했다. 골수 중화주의자였던 그는 좌종당이 야쿱 벡을 공격할 때 협력한 위구르인 칸들과 벡들의 특권을 철폐하고, 동시에 위구르인 농민들의 재산을 함부로 뺏어 한족들에게 분배하고 항거하는 위구르인들을 마구 처형했다. 위구르인 사이에서 몰래 자체적으로 튀르크-이슬람 교육이 시행되는 마당에 이러한 정책은 기름에 라이터를 던지는 꼴이었다. 1931년 중국인 경찰서장이 위구르인 여성에게 집적거리다 분노한 위구르인들에게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하미에서 또 한차례 봉기가 일어났다. 양쩡신이 위구르인 봉기군에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면서 제압한 것과 다르게 진수런은 이번에도 한족의 복수라며 항복한 위구르인 민간인마저 마구 학살했고, 이에 당황한 위구르인들은 회족 군벌 마중잉을 끌어들였다. 1931년 마중잉이 이끄는 회족 기병 수백여 명이 진수런의 군대를 하미에서 축출하면서 이에 위구르인들이 고무되면서 1932~33년 사이에 신장 전 지역이 봉기에 휩싸였다. 마중잉은 하미를 해방시키고 진수런이 보낸 후속부대마저 대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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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진수런 정권에 의해 강제 징집된 위구르인들

무능한 진수런은 같은 한족들에게도 버림받아 1933년 4.12 디화 정변으로 축출되었고 쿠데타 세력은 신강성 최대의 무력을 가지고 있던 육군군관학교장 성스차이를 변방독판으로 추대했다. 1933년 마중잉과 함께 싸우던 위구르인 지도자 니야즈 호자와 마흐무드 무히티는 소련의 사주를 받고 돌연 마중잉을 절교하고 성스차이 편으로 돌아섰으며, 그 대가로 소련과 성스차이의 지원을 받아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을 세우고 헌법을 제정, 독립을 선언한다. 위구르인들의 지지까지 얻은 성스차이는 쿠데타 세력을 모조리 숙청해버리고 신강의 지배자로 등극한다. 성스차이와 협력하던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은 이듬해 위구르인들에게 배신당했다 생각하며 폭주하던 마중잉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었고, 살아남은 지도부는 1937년부로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성스차이에게 숙청당했다.

신장에서 소련과 국민당 정권, 러시아 백군 난민과 회족과 위구르인이 서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탄생한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은 민주주의를 강조했으며, 헌법에서 교육의 진흥과 외국 과학 기술의 도입에 관련된 내용을 집어넣었다. 허나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은 실질적으로는 소련과 성스차이 군벌의 통치를 받았으며, 민주주의와 교육 및 과학을 진흥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실행할 만한 돈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신생 공화국의 정책은 실질적으로 니야스 호자 정권의 생존에 맞춰졌다. 신장에 체류하던 스웨덴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빌려 유인물을 인쇄하는 정도가 이들이 할 수 있는 근대화의 전부였다. 소련에서 보내준 고문들은 대게 NKVD 요원들이었다.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은 삽질만 한 것은 아니고 오늘날의 위구르족 민족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기여를 남긴다. 국민당과 진수런이 과거 이 지역에 있었던 토하라인들이나 사카인들이 한어의 방언을 썼다고 우긴 것과 다르게 러시아의 튀르크어 학자 세르게이 말로프와 동투르키스탄 정부는 신장의 여러 민족들을 비교분석한 후에 신장의 무슬림 농민들에게 위구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준 것. 성스차이는 소련 학자들이 고안한 "위구르 민족"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유포했으며, 동튀르키스탄 정부는 이름을 위구리스탄으로 변경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마중잉의 공격으로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이 붕괴되고, 성스차이의 소련인 고문들이 동튀르키스탄 민족주의자들을 의심하고 대거 숙청하면서 해당 계획은 파기되었다.

5.4. 성스차이 스탈린주의 정권

성스차이가 쿠데타로 진수런을 몰아낸 이후에도 마중잉을 비롯한 여러 회족들이 우루무치를 공격해왔다. 당시 소련은 마중잉이 일본과 커넥션이 있다는 의심을 품었는데, 실제로 마중잉의 수행원들 사이에서 일본인이 한 명 발견되었던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의 무슬림 봉기(바스마치 운동)를 진압하느라 진땀을 뺀 적이 있었던 스탈린은 당시 소련 중앙아시아 영토와 인접한 신장에 친일 군벌정권이나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이 들어설 것을 우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장왕 성스차이와 소련 사이의 윈윈이 이루어졌다. 성스차이는 중국인으로서 중국 공산당 대신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성스차이는 한동안 국민당-소련 사이에서 반독립상태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위구르를 동튀르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합병시키려 하였다. 만약 소련에 위구르가 합병됐다면 소련의 일부로 있다가 1991년 소련 해체 때 옆동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과 함께 동튀르키스탄으로 독립했을 가능성이 높다.

친소 성스차이 정권은 상술한 세르게이 말로프의 도움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민족 분류법을 신장에 도입하는데, 이는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며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낸 이후 중국 전역에서 여러 소수 민족을 분류하는 방식의 근간이 되었다. 공산당과 대립하던 국민당은 쑨원의 오족공화(한족, 만주족, 몽골족, 티베트인, 회족 이렇게 다섯 민족이 모두 단합해야 한다) 이론의 바탕을 둔 소수민족 정책을 세웠으나[66], 성스차이는 당시 여러 민족들이 얽혀살던 동투르키스탄 상황에 맞추어 신장성 내 거주민들을 14개 민족[67]으로 분류하였다. 성스차이 이전 중국인 관료들은 튀르크계 농민 무슬림들을 회족들과 구분하기 위해 전두(纏頭)[68]라고 불렀다면 성스차이 정권 시절부터 이들은 전두라는 멸칭 대신 공식적으로 위구르족이라는 민족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위구르라는 민족명은 1921년도부터 이슬람 모더니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던 말이었지만, 해당 어휘를 공식화한 것은 성스차이였다. 성스차이는 14개 민족 분류를 바탕으로 각 민족들에게 신장성 의회의 대표권을 할당하는데, 당시는 아직 위구르인 인구가 한족 인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혹은 소련처럼 레닌주의 방식에 입각한 민족 자치구역 할당까지는 진행되지 못했다.

성스차이 그 자신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회의적이었지만, 신장성 곳곳에 스탈린 초상화와 자신의 초상화를 함께 걸어놓게 하는 등의 노골적인 아첨 행각으로 엄청난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미 성스차이는 소련과 관계를 틀때부터 미리 자본론공산당 선언 책을 구해와서 서가에서 눈에 제일 잘 띄는 곳에 진열해놓고, 소련에서 우루무치 주재 총영사로 파견한 가레긴 아프레소프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던 전과가 있었다. 그는 소련에 석유텅스텐, 망간, 주석, 우라늄 채굴권을 팔아먹었고, 1937년에는 과거 아첨을 바치던 대상에서, 신장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던 라이벌이 된 가레긴 아프레소프를 체포하여 소련으로 압송시킨 이후 스탈린의 충실한 꼬봉 노릇을 하게 되었다. 성스차이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아프레소프는 1941년 오룔의 한 수용소에서 총살당한다. 성스차이는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싫어하던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스탈린이 보낸 부하들을 정리할 때,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운 후 처형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69] 비교하자면 성스차이의 라이벌 아프레소프는 칠칠치 못하게도 백군 난민들을 숙청할 때 일본 스파이라는 덜 면밀한 누명을 씌워서 죽였었다.[70] 또한 자신이 신장에 처음 왔을 때 도와줬던 스웨덴인 선교사들을 1938년 추방하고, 현지 위구르인 유력자들에게 자신이 이슬람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줄 요량에서인지 기독교로 개종한 극소수의 위구르인들을 이런저런 핑계를 갖다붙여 교수형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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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인 선교사(왼쪽)와 러시아 백군 난민 가정. 당시 신장성에서는 소련군 장교가 러시아 백군 출신 군인들을 지휘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명목상 국민당 정권에 충성하던 성스차이는 소련하고만 줄타기한 것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도 끌어들었다. 옌안의 있는 중국 공산당에 접근한 그는 마오쩌민을 비롯한 공산당원 수십명을 받아 신장 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다졌다. 이들은 소련과 중국 공산당과의 연락망을 가동하는 역할을 맡았다. 성스차이는 중국 공산당과의 친교 관계를 확실히 다지기 위해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민을 꿀보직인 재정청 부청장에 임명하였다.

그러던 중 독소전쟁이 벌어지고 소련이 전쟁 초반부 나치 독일에 대패하자, 그는 갑자기 반공을 외치며 소련인 고문과 마오쩌민을 처형하고 국민정부에 접근했다. 그러다가 국민정부가 자신의 이권을 박탈하기 시작하고 소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이후 부활하고 독소전쟁에서 승리할 것 같자 다시 소련에 접근했다. 성스차이는 스탈린에게 "잘못했으니까 다시 꼬붕짓 할테니 한번만 봐주셈"이라고 편지를 보냈으나, 성스차이의 배신 행위를 괘씸하게 생각했던 소련은 그 편지를 장제스에게 보냈고, 화가 난 장제스는 성스차이를 농업부장에 임명하는 형식으로 신장성장에서 해임했다. 그가 신장에서 얼마나 해먹었는지 50개의 트럭에 온갖 사치품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결국 친소련 군벌 통치하에 있던 동투르키스탄은 국민정부로 귀속된다.

5.4.1. 1933년 인구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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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무치의 타란치 위구르인들과 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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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키르기스인, 타타르인, 카자흐인
민족명 인구수 (비율)
위구르인 2,900,173 (77.75%)
카자흐인 318,716 (8.55%)
한족 202,239 (5.41%)
회족 92,146 (2.47%)[71][72]
키르기스인 65,248 (1.75%)
몽골인(오이라트계 포함) 63,018 (1.69%)
타란치[73] 41,307 (1.11%)
러시아인 13,408 (0.36%)
시버족 9,203 (0.25%)
사리콜인, 와키인 8,867 (0.24%)
우즈베크[74] 7,966 (0.21%)
타타르 4,601 (0.12%)
쒀룬족 2,489
만주족 670 [75]
합계 3,730,051

5.5.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신장에서는 거리와 교통 문제로 공산품을 중국 해안 대도시에서 생산된 공산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영토에서 철도로 운송하는 물품을 구입하는 것이 더 저렴했다. 덕분에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는 중국 화폐보다 루블화가 신장에서 더 많이 통용되었는데, 국민당 정권은 여기에 불만을 가지고 소련과의 무역을 갑자기 금지시키고 중국 본토와 똑같은 화폐만을 사용할 것을 강제했다. 이 와중에 한족 상인들의 농간이 개입하여 신장에서는 반년도 안 돼서 물가가 열 배 가까이 폭등하고 위구르인, 카자흐인, 키르기스인들의 민간 경제가 붕괴되었다.

때마침 소련에서는 다시금 신장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일리 강 유역의 카자흐인들에게 식량과 무기를 지원해주고 있었는데, 중국 국민당에서는 중일전쟁을 위해 군마가 필요하다며 일리 강 일대의 카자흐인 유목민들의 말을 무상으로 뺏어가려다 카자흐인 유목민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말을 뺏으러 온 국민당 군과 경찰의 기강이 헤이한 것을 보고 카자흐인들은 이들을 손쉽게 제압했으며, 오히려 카자흐인들이 여세를 몰아서 국민당 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국민당 군인들이 해당 마을의 카자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쿨자로 집결하였으나 카자흐인들은 이들을 크게 격파하고 쿨자시를 점령했다. 쿨자의 경찰서를 검색하는 와중에 국민당 경찰 본부 우물에서 훼손된 무슬림 시신 200여 구가 발견되었고 이에 자극받은 위구르 공산주의자들이 무장 저항에 합세하였다.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이 수립된 지 정확히 11년 후 되는 시점에 카자흐, 키르기스, 위구르 민족이 힘을 합쳐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을 세워 다시 독립을 선언하였다. 성스차이의 실각 이후 다시 이 지역에 영향력을 확보하고 싶어한 소련에서는 공군을 동원해 신장성 내 국민당 시설과 기지를 폭격했다.

소련군 공군의 지원까지 얻은 동튀르키스탄 정부의 일리 민족군은 키르기스인들도 끌어들이며 국민당 군을 상대로 여러차례 승전을 거두었다. 국민당은 신장 농민들에게 9년치에 달하는 토지세를 미리 징수하여 원성이 자자하였고, 이에 위구르, 키르기스, 카자흐인들이 힘을 합쳐 국민당 세력을 신장 서부 전역에서 축출해냈다. 우루무치 근방의 국민당 군이 대패하면서 이 지역은 곧 다시 명목상이나마 독립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 중 공산주의자는 엄연히 소수에 불과하였고, 위구르인 농민 대다수는 동투르키스탄 군과 싸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 협력하지도 않았다.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이 1945년 1월 발표한 쿨자 선언이나 여타 전단지에는 반국민당, 반중국 내용이 주가 되었지 이슬람과 직접 관련된 내용은 거의 없었다. 제2공화국의 전단지 『왜 우리는 투쟁하는가?』에서는 "우리의 위대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친구이자 이웃인 소련"이라는 문장이 들어갔으며, 종교적 내용이라고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을 한 번 언급한 것 정도 밖에 없었다. 이들이 배포한 전단지에는 "파시스트 중국인 압제자"라는 말은 있어도 "이슬람을 박해"하는 "비무슬림 한족"에 대한 "지하드" 같은 말은 없었다. 쉽게 말해서 제2공화국이 동튀르키스탄의 무슬림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어필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이를 노리고 국민당에서는 일부러 칭하이성의 회족 군벌 마부팡 휘하의 회족과 한족 혼성군 10만여 명을 우루무치로 파견하여 동튀르키스탄 군과 대치시켰다. 같은 무슬림들끼리 싸우기 머뭇거리는 상황이 길어지고 동튀르키스탄 군은 결국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5.5.1. 제2공화국과 장즈중과의 협상

상황이 심각해지자 장제스는 서북 군사령부의 사령관을 역임한 장즈중을 우루무치로 파견하였다. 국민당과 일리 정부 사이의 협상은 수개월이 걸렸는데 1946년 7월이 되어서야 마침내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을 주도했던 장즈중은 그동안 신장성을 지배했던 군벌들이 탐욕스럽거나 혹은 중화주의에 집착했던 것과 다르게, 청렴하면서도 온건한 인물이었다. 장즈중은 "우리 중국인들은 신장 인구의 단지 5%만을 구성하고 있다. 왜 우리는 나머지 95퍼센트를 이루고 있는 위구르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정치권력을 넘겨주지 않는가?"라는 말과 함께 신장 주민의 대다수가 한족이 아니라는 사실 외에도 장제스의 중화주의 가치관이 신장에 먹히지 않는 다른 사실을 인정했다. 장즈중은 이슬람 모더니즘 성향의 지식인이었던 무함마드 에민 부그라,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ئەيسا يۈسۈپ ئالپتېكىن‎, Isa Yusuf Alptekin), 마수드 사브리를 초청하여 신장성 연합 정부의 각료로 임명하는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장즈중은 신임 신장성 정부의 주석이 되었고 아흐메트잔 카시미는 부주석이 되었으며, 신장에서는 언론과 출판에서 검열이 완화되었고 정부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위구르어와 카자흐어가 사용되었다.

장즈중은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수립 이전 과중했던 징세를 대폭 경감한 것은 물론 가난한 농민들에게 저리 대출을 시행하였으며, 비한족과 한족 공무원의 비율을 70대 30으로 조정하는 작업을 시행하여 지역 행정의 형평성과 효율을 높였고, 부르한 샤히디가 위구르어-중국어-러시아어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지원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과 신장의 장즈중 정권이 공존하던 시기는 짧았지만 그 유산은 적지 않았는데, 근대부터 이어져왔던 위구르인/카자흐인들의 이슬람 모더니즘 교육 운동이 이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소수민족 주민들은 한족에 비해 소득 수준이 낮음에도 불구 교육 수준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은 경우가 많았다. 2000년 중국에서 발표한 민족별 문맹률과 교육 수준 자료를 보면 15세 이상 한족 평균 문맹률은 8%, 소수민족 평균 문맹률은 14%였던 반면, 신장에 주로 거주하는 타타르족은 1.8%, 우즈베크인은 2.5%, 카자흐인은 2.6%[76], 시버족 2.7%[77]로 심지어 조선족(문맹률 2.8%)이나 만주족(문맹률 5%)보다 문맹률이 낮은 걸로 나왔다.[출처] 같은 통계에서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의 경우 문맹률은 한족과 비슷한 것으로 나왔다. 오늘날 중국 내 위구르인들과 키르기스인들의 소득 수준이 한족 평균에 비해 상당히 낮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서구권이나 인도에서는 무슬림 소수민족들이 비무슬림들에 비해 평균 교육 수준이 낮다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눈에 띄는 차이이다. 비교하자면 마부팡 군벌이 통치하던 칭하이성 역시 적극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음에도 불구 티베트인과 회족의 문해율 문제가 신장만큼 개선되지 않았다. 같은 2000년 통계에서 중국 본토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무슬림 살라르족의 문맹률은 49% 간쑤성의 몽골계 무슬림 둥샹족은 63%에 달했다. 비교를 위해 첨언하자면 같은 기간 기준으로 발표한 통계에서 티베트인은 문맹률 40%대, 회족은 문맹률 17%, 러시아계 중국인은 3%로 조사되었다. 장즈중은 자신이 발언했던 바 그대로 동튀르키스탄 현지 무슬림 주민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하지만 국민당 측에서는 이를 두고 장즈중이 소수민족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이유로 친소파라고 매도하며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위구르인들 중에서도 이슬람 모더니즘 성향의 인물들이 그에게 협조를 바쳤지 그를 의심하는 위구르인들이 적지 않았다.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은 신장성 북부의 3개 지구에서 독자적인 화폐제도와 군대를 유지하는 사실상 독립적인 정체 체제로 남아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장즈중은 1947년 5월부로 마수드 사브리에게 주석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하였다. 장즈중의 든든한 뒷받침 없이 주석이 된 마수드 사브리는 취임 이후 국민당의 강경 중화주의자 송시롄 장군에게 견제를 받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1949년 1월 마수드 사브리가 퇴임하고 부르한 샤히디(بۇرھان شەھىدى‎, Burhan Shahidi)가 신장성 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샤히디는 이후 신장에서의 국민당과 공산당 통치 사이의 전환기를 주재하게 되었다.

5.5.2. 제2공화국과 중국 공산당과의 협상

2차대전 종전 이후 중국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쿨자를 중심으로 한 신장성 북부 3개 구역은 사실상 소련의 통치를 받는 상태로 중국의 인플레이션 문제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은 물론, 장즈중이 소련과 타협하면서 소련과의 교역이 공식적으로 재개되었다. 쿨자를 중심으로 한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정부는 무리하게 농업 집산화를 시도하지 않고, 의료 시설 및 출판 산업에 세금을 투자하면서 비교적 좋은 평판을 얻었다. 1945년 미국 보고서조차도 동튀르키스타 공화국 체제가 지역적으로는 인기가 높았다고 지적했으며 또한 이후 제2공화국 정부의 인기가 감소했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한편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하고 우루무치에 남아있던 국민당 군 8만여 명이 일리 민족군 1만 2천명에게 항복한 이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내부에서는 정치적 장래를 둘러싼 내분이 생긴다. 종주국이었던 소련마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연대를 위해 위구르를 버리자 1949년 임시 정부의 주석이었던 부르한 샤히디중국공산당과의 연합을 선언했고[79], 부주석이었던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에 반대해 터키로 망명했다. 1949년에는 동투르키스탄 정부 내 여러 소수민족 대표들이 베이징에서 회담을 하기 위해 비행기로 이동하는 와중에 비행기 추락사고가 발생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동투르키스탄은 중화인민공화국 영토가 되었고, 1955년부터 신장 위구르 자치구라고 불리게 되었다. 중심 도시 디화는 소련의 눈치 때문에 우루무치(위구르어로는 위륌치ئۈرۈمچى)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5.6.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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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문화 대혁명이나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참상이 비교적 덜한 편이었다. 애초에 신장은 인구 밀도가 적은 지역이었기도 했고, 소련과 국경이 바로 붙어있어서 중국 정부에서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티베트 자치구의 경우처럼 대놓고 다 때려부수는 정책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에서 경제가 빠른 속도로 부흥하는 것과 반대로 중국의 상황이 걷잡을 수 악화되자, 1962년부로 소련과 중국 국경지대에 있던 주민 중 최소 6만여 명에서 최대 1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소련 영토로 망명하였다. 이들 중에는 카자흐 유목민 외에도 위구르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1932~33년 카자흐스탄 대기근 당시에는 소련 영토에서 신장으로 카자흐 난민이 유입되었던 것과 정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중국 당국은 인민해방군을 보내 국경을 봉쇄하려 들었으나 쿨자에서 국경 봉쇄에 항거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쿨자시에서의 폭동을 계기로 중국 공산당은 비한족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한편 중소국경분쟁으로 신장 지역에 소련군과 중공군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남에 따라 분쟁지역이 되기도 하였다.

문화 대혁명 기간에는 신장 동부의 한족을 중심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신장 지역 내 이슬람과 위구르 전통문화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성스차이 스탈린주의 정권 시절에도 당연하게 허용되었던 전통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일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금지되었으며 위구르 전통 결혼식도 금지되었다. 마오쩌둥의 부인이었던 장칭은 "당신들의 작은 신장이 무엇이 그렇게 특별한가? 나는 당신들이 싫다"라고 말한 것을 계기로 자극받은 홍위병들은 일부러 신장 지역 모스크 상당수를 돼지 사육장으로 만들고 쿠란을 공개적으로 소각하였다.

문화 대혁명이 끝난 이후에는 개혁 개방이 진행되면서 나름 위구르인들에 대한 박해가 줄어드는 듯 했다. 1978년부터 시행된 한자녀 정책을 펴기 시작했을때 인구 1천만 미만 소수민족은 산아제한 정책 적용대상에서 제외대상이 되어서 위구르인들은 두 명의 자녀를 둘 수 있었으며, 농촌 지역에서는 3명까지 출산이 가능하였다.[80] 이 때문에 위구르인들의 출산율이 2명대 중후반대의 높은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장에 철도가 건설된 이후 한족들의 이주가 늘어나고, 신장 경제 개발의 성과를 한족들이 독점하는 경제구조가 유지되면서 위구르인들의 평균 소득은 한족의 절반에 불과한 상황이 이어졌다.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인한 경제개발 이후에는 신장성 밖으로 이주한 위구르인 농민공 등에 대한 차별 문제가 겹쳐 2009년 우루무치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티베트 자치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국공산당은 해당 지역에 한족 이주가 늘어나면 위구르인들이 한족과 혼혈되고 동화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무슬림 위구르인들은 비무슬림 한족과 결혼을 기피했고, 위구르인들의 출산율이 2명대 중반을 꾸준히 유지하여 1명대 중반 수준이었던 한족들을 압도하면서 한족 이주민이 늘어나도 위구르인 인구는 더 빨리 늘어나 위구르인 인구 비율이 한족보다 더 높은 상황이 지속되었다. 결국 하나의 중국 정책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위구르인 대상으로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2010년대 후반부로 시진핑 정권 들어 신장의 위구르인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신장 재교육 캠프라는 미명하에 위구르인들에 대한 대규모 제노사이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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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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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고문헌

6.1. 고대사 / 중세사

6.2. 근세사 / 근현대사


기타 내용은 위키피디아 영어판 및 러시아어판 등 참조


[1] 강족을 통해 간접적으로 여러 문물을 전해준 것으로 추정된다.[2] 위키백과에서는 대부분 신장의 역사(중국어, 영어, 한국어 등) 또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일본어)의 역사로 나오지만, 나무위키에서는 신장 지역의 역사도 다루되 훗날 위구르족들이 신강에서 다수 정착하기도 해서 제목을 위구르의 역사로 하였다. 우즈베크어, 카자흐어, 튀르키예어, 아제르바이잔어, 러시아어에서는 "동투르키스탄의 역사"라고 쓰여져있다.[3] 토하라어는 켄툼어군에 속하며 사카어는 사템어군에 속했다.[4] 일부는 오늘날의 칭하이성 방향으로 피난하여 강족과 동화되어 노수호로 이어진다.[5] 흉노의 왼팔로 여겨지던 세력도 있었는데 그게 바로 고조선, 고조선 역시 한무제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6] 보통 중국의 왕조들이 중앙아시아로 원정을 보낼 경우 소와 말이 먹을 건초와 병사들이 먹을 군량 보급 문제로 100일 이상의 원정 계획을 짜는 건 사실상 자폭 행위나 다름 없었다.[7] 중국 불교 초기의 도래승 가운데 인도에서 직접 온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8] 대승 불교를 믿던 인도 출신 아버지와 설일체유부 부파불교를 믿던 쿠처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이다. 금강경을 한역한 것으로 유명하다.[9] 쿠마라지바와 함께 불경 번역사업의 크게 기여함[10] 탈레반이 바미얀 불상을 파괴하기 앞서 불화들을 화염방사기로 반달했다.[11] 팔리어 경전에 여러 가지 설화를 주석삼아 덧붙인 이야기 모음집[12] 다만 부파 불교 경전은 아함경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긴 했다.[13] 원래는 지리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고창국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인구가 더 많고 중요도가 높은 쿠처로 이동.[14] 가르 가문은 토하라인들과 티베트인 사이의 혼혈 가문이다.[15] 당나라 치세 초에 동맹이던 돌궐 제국이 호라산 일대까지 석권한 적도 있었지만, 당나라의 직접 통제가 전혀 미치지 못했다.[16] 당나라 치세 초 7세기의 서역 원정군은 사실상 돌궐족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고선지가 이끄는 안서 4진 군대는 한족과 소그드인 병사들이 많았다.[17] 이 일을 직접 목격한 옹왕은 위구르를 극렬히 증오하여 나중에 황제가 됐을 때 그들과의 동맹 맺기를 거부하다가 신하의 간절한 조언으로 겨우 위구르와 동맹을 맺었다.[18] 몽골로이드는 황인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분류가 아니었고, 비하의 의미가 있던 용어였기 때문에 현대 학계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현재는 동아시아인(East Asian) 혹은 동북아시아인(Northeast Asi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지역적인 개념을 사용해도 좋을 만큼 동아시아는 단일민족 경향이 매우 강한 곳이기 때문이다.[19] 이들은 간쑤성에 있었기에 나중에 몽골 제국 멸망 후 이루어진 카를룩어파(=차가타이어파) 언어를 쓰던 이들의 지하드를 겪지 않아 무슬림도 아니었고, 카를룩어파의 현재 위구르어를 쓰지도 않아 원래 위구르어(시베리아어파)를 보존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의 영향을 받아 동부 위구르족들은 몽골어족 언어를 사용한다.[20] 중국에서는 이를 "동돌궐(东突厥), 줄여서 동돌(东突)"이라고 부른다. 정작 현 동투르키스탄은 서돌궐의 일부 지역이었으며 동돌궐은 현 몽골 지역에 있었다는 게 함정.[21] 719년에 당나라에서 제정된 달력.[22] 이 지역은 몽골 제국 시대에도 여전히 비옥한 과수원들에서 과일을 풍족하게 수확하며, 말린 과일이나 포도주가 품질이 좋은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반면 칭기스칸 군대가 제대로 깽판 친 호라산 일대는 농경지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주민의 4분의 1이 튀르크계 유목민으로 대체되었다.[23] 이 지역으로 끌려간 중국인 보병들은 미개간지에서 둔전을 일구며 몽골 기병에게 먹일 식량을 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24] 해당 설화와 다르게 고대 중국인들은 비단이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잘 몰랐고, 뽕나무 재배와 누에나방 사육 관련 기술은 고대부터 서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25] 그리고 원래 이슬람에도 동물에게 잘해주면 선이 쌓이고 동물을 함부로 학대하면 악이 쌓인다는 교리가 있다.[26] 압바스 칼리프조의 지방 정권[27] 유사 사례로 캅카스아제르바이잔에서 튀르크계 민족인 아제리인들이 이웃한 페르시아계 주민들을 타트족이라고 불렀다.[28] 원래 유수프 카스 하지브는 키르기스인이 아니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타이납에 있던 유수프의 무덤을 폭파한 것을 계기로 키르기스스탄에서 그를 대신 기념하고 위구르인들이 이를 묵인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29] "유수프 발라사구니"라는 이명으로 더 유명하다.[30] 청나라 조정의 만주족들은 티베트 불교를 존중했는데, 한족 지식인과 관료들은 그 반대급부로 불교에 내심 적대적인 경우가 많았다. 성리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한족 지식인층이 불교에 무관심해진 영향도 있었지만 지배층인 만주족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교를 경멸하는 경우가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청나라 지식인들이 조선 사절들에게 위구르인을 소개하면서, “이들은 불교와 마찬가지로 천국과 지옥 같은 미신을 믿는다.”고 경멸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31] 동로마 제국을 넘어 유럽 각지를 정복하던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여 바예지트 1세를 사로잡고, 동유럽의 모스크바 대공국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대치하던 킵차크 칸국을 초토화시켰으며, 이 외에도 인도에서 힌두교를 믿는 토후들과 대치하던 투글루크 왕조를 박살냈다.[32] 노가이족들은 중세 말 동유럽 일대에서 악명 높은 노예 사냥꾼으로 유명했었으나, 이들의 노예 사냥을 복수하려던 코사크와 동투르키스탄에서 이주해온 토르구트인들의 공격을 동시에 받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33] 이렇게 정착한 오이라트인들의 후손들은 오늘날 유럽 유일의 불교 공화국인 칼미키야 공화국칼미크인들의 선조가 되었다.[34] 은둔과 고행을 강조했던 기존의 수피 교단과는 다르게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에서는 수피 교단의 지도자가 직접 나서서 샤리아가 엄격하게 적용되도록 국가 운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35] 참고로 이렇게 수피 교단이 정치성을 띄게 되는 현상은 낙슈반디 교파 뿐만 아니라 특유의 비밀결사스러운 철저한 내부적 조직문화 때문에 수피즘의 역사에서 종종 보이는 현상이다. 당장 원래는 수니파 다수였던 현대 이란 일대를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현대 중동의 수니-시아파 대립의 지정학적 구도를 만든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만 하더라도 원래 수피 교단이었던 자흐디야, 차후 사파비야교단이 아예 교주-제자 관계를 세속적 주종관계로 확대시키며 교단 자체가 하나의 왕조국가로 성장한 경우다.[36] 호자 가문은 스스로를 무함마드의 후손이라고 선전했으나 진실은 저너머에...[37] 쫓겨난 흑산당은 이후 아파크 호자와 백산당을 배신자로 선전했으며 지금의 위구르 독립 운동 세력에게도 아파크 호자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하다. 결과적으로 준가르 토벌을 명목으로 한 중국의 개입을 불러일으켰기 때문. 또한 달라이 라마 5세에게 빌붙었다는 점 때문에 위구르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안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이슬람 교리는 초창기 부파 불교와는 약간은 융화가 가능해도 티베트 불교와는 융화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 이와 별개로 신장 현지에서는 통치를 그럭저럭 했기 때문에 아파크 호자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며 카슈가르에 있는 아파크 호자의 묘는 중요 문화재로서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38] 부하 대부분과 부인을 잃고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39] 쿠물 칸국은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속국으로 남아있었으나 1930년 마지막 칸인 마크수드 샤가 사망한 이후 국민정부가 칸국을 폐지하면서 멸망했다.[40] 러시아인들은 그가 칭호를 받은 홍타이지라는 말을 '콘타이샤'라고 기록했다.[41] 후일 일리강 유역에는 청나라의 국경 요새가 세워졌으며, 청나라가 멸망하고 수십년이 지난 이후에는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의 중심지로 변한다.[42] 본래 오이라트인들은 몽골의 통일 직전에야 수립채집민 생활에서 유목 생활에서 넘어가던 단계였고 칭기스 칸과 대결하다가 패배하면서 이후 몽골 제국에 흡수되었던 부족 집단이었다. 이들에게는 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만한 정통성이 부족했다.[43] 준가르 홍타이지국은 오이라트 몽골어를 표기하기 위해 티베트 승려에 의해 특별히 고안된 토도(Todo) 문자로 된 책을 출간하였는데, 종이를 만들고 책을 인쇄하는 작업에는 러시아 영토에서 잡아온 스웨덴인 포로들이 이용되었다. 이렇듯 티베트 불교 불교와의 연결 관계는 준가르 국가의 성장과 정통성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했다.[44] 대신 갈단 체렝은 달라이 라마의 인정을 받지 못한 자신의 입지를 보완하기 위해, 티베트 불경 및 자신의 환생 설화 등을 담은 책들을 낙타 수십마리에 항상 휴대하고 다녀야 했다.[45] 당시 전투를 지휘했던 청나라 장수 야르하샨은 이후 건륭제의 명령으로 처형당했다.[46] 여담으로 바다흐샨의 술탄 샤는 자신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청나라 황제에게 도스트(친구)라고 불렀다가 또 전쟁이 날 뻔 했다.[47] 차부차얼 시보 자치현은 이렇게 시버족들이 개간한 둔전이 기원이다. 찹찰은 시버족 말로 곡창시대라는 뜻이다.[48] 오늘날 신장에 남아있는 오이라트인들은 준가르인들의 후손이 아닌 칼미키야에서 이주해 온 오이라트인들의 후손이다.[49] 비슷한 이유로 회족들(한족계 무슬림들)도 신장 인근의 감숙성에서 수피 지도자 마명심의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감숙성과 섬서성 역시 가난한 변방으로 전락한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50] 이렇게 납치되어 중앙아시아 각지에 노예로 팔린 한족이나 회족 후손들은 둥간족의 기원이 되었다.[51] 이슬람이란 종교는 회족과 위구르를 묶는 중요한 기제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반란이 이슬람교도 이외의 지역 내 한족, 만주족, 시버족 등에서 발생하지 않았고 처음 반란지도자 제의를 받은 사람은 이슬람 성직자였다. 이런 위구르인들의 이슬람교에 대한 강렬한 지지 때문에 야쿱 벡이 이슬람주의적 정책을 시도한 것이다.[52] 지금의 아크수지구(阿克苏地区) 아크수시(阿克苏).[53] 지금의 아크수지구( 阿克苏地区) 쿠처시(库车).[54] 지금의 바인궈렁 몽골 자치주(巴音郭楞蒙古自治州/ᠪᠠᠶᠠᠨᠭᠣᠣᠯ ᠮᠣᠩᠭᠣᠯ ᠥᠪᠡᠷᠲᠡᠭᠡᠨ ᠵᠠᠰᠠᠬᠤ ᠵᠧᠦ) 코를라시(库尔勒).[55] 당시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거주지역 대부분을 석권, 위구르와 국경을 맞댄 주변국이었다.[56]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슬람 세계 전체의 지도자격인 칼리파를 겸직해 이슬람의 종주국과 같은 나라였고 위구르인과 마찬가지로 튀르크계여서 큰형님이나 다름없었다.[57] 지금의 인도파키스탄이 당시 영국령으로, 위구르와 국경을 맞댄 주변국이었다.[58] 일리(ئىلى, Ili)라고도 한다. 지금의 일리 카자흐 자치주(伊犁哈萨克自治州/ىله قازاق اۆتونوميالى وبلىسى) 중심도시.[59] 2019년 터키의 집권당과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이슬람 원리주의자이지만 공식적으로 세속주의를 철폐하지 못하는 게 이 때문이다.[60] 물론 예외로 투르판에서 만주족이 위구르인 부녀자 수백명을 납치하고, 투르판의 위구르인들이 여기에 항의하자 오히려 위구르인 1만 여명이 반란군으로 몰려 학살당하는 억울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 조정은 애초에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할 것을 생각하고 팔기군 기지를 대부분 위구르인 거주지와 최대한 분리시켜 놨다. 사실 팔기군 주둔지는 대부분의 중국지역에서 일반 중국인 거주지와 분리되어 있었다. 위구르에서만 이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신장의 경우는 다른 중국지역과 달리 분리가 한족/만주족 이 아니라 한만/위구르 식으로 분리되어 있었다.[61] 야쿱 벡을 제압하고 신장을 재점령좌종당은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하미의 술탄에게 마음대로 세금을 거두며 자치를 누릴 권리를 하사했는데, 하미의 술탄과 그 자손들은 이 “마음대로 세금을 거둬도 된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나머지 하미의 위구르인 농민들을 지나치게 착취했다. 이후 하미에서는 1930년대까지 계속해서 폭동과 소요가 일어나게 된다.[62] 신강성은 1912년 청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 때까지 내려오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전환된다.[63] 주로 목화나 말린 과일 같은 1차 생산품.[64] 양쩡신 지배 시기부터 성스차이 지배 시기까지의 신장은 중국보다는 러시아, 소련과의 교역이 더욱 활발했다.[65] 전통 페르시아 문학에서 나오는 고귀한 이란과 적대시하는 추악한 야만인들의 국가, 그러나 페르시아 문학을 받아들인 튀르크인들은 투란을 재해석하여 오히려 강건한 유목 튀르크 제국이라며 이상화했다[66] 좋게 말해서 오족공화이고... 소수민족에게 적대적이던 중화주의자 장제스는 당시 중국 영토 내 모든 민족들을 억지로 다 상술한 5족 분류에 우겨넣고 강압적인 동화정책을 강요하였다.[67] 위구르, 타란치, 카자흐, 키르기스, 우즈베크, 타타르, 타지크, 만주족, 시버족, 쒀룬족(다우르족), 한족, 회족, 몽골족, 러시아인[68] 둘러쓴 머리, 덮어쓴 머리 정도의 뜻[69] 소련에서는 신장을 소련에 완전히 예속시키기 위해 소련 중앙아시아 영내에 살던 중국계 무슬림들인 둥간족 공산당원들을 신장으로 파견하였는데, 성스차이는 이들을 트로츠키주의자라면서 모조리 숙청했다.[70] 스탈린은 마중잉이 친일파라고 의심했는데 우루무치와 일리의 백군 난민들이 마중잉과 싸우던 상황에서 외려 이들을 일본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죽였으니, 공산당 고위 간부들 입장에서는 아프레소프가 니콜라이 예조프 같은 부류로 여겨졌을 것이다.[71] 수가 생각보다 적은데 1864년 봉기 때 상당수가 팔기군과 야쿱 벡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일대로 탈주했다.[72] 일리 강 유역의 일부 살라르족 정착민들 역시 회족과 통혼이 빈번했던 이유로 회족으로 집계되었다.[73] 우루무치의 무슬림 다민족 혼혈. 오늘날에는 위구르족에 흡수됨[74] 일부 튀르크멘인 포함[75] 1864년 봉기의 결과 거의 전멸했다.[76] 원래 유목민이면 문맹률이 높아야 정상이지만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시절 소련의 교육 인프라가 도입된 혜택에 힘입어 교육 수준이 한족보다 높았다.[77] 시버족의 경우 무슬림이 아니라 이슬람 모더니즘 운동의 혜택과는 별개였으나 오히려 중국 본토의 만주족들보다도 문맹률이 더 낮았다.[출처] 중국소수민족연구 (주)한국학술정보[79] 물론 말이 연합이지 사실상 항복 선언이지만.[80] 물론 한족들도 농촌에 주거하는 사람들은 자녀를 두세명씩 보는 경우는 2000년대 이전에는 흔했고, 2010년대 중반 이전까지도 편법을 쓰는 경우가 흔했다. 이것이 중국의 출산율이 2010년대 중반 이전에 타 동북아권 국가 보다 크게 높았던 이유였다. 중국인들이 출산을 기피하게 된 현상이 두드러진것은 2010년대 후반 이후의 일이다.[81] 국내 유일의 위구르 유목제국사 전공자이자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경상국립대 사학과에 재직 중.[82] 본문 외에도 주석의 내용이 상당히 풍부하고 충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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