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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0:16:38

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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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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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캅카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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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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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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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아랍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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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우마이야 칼리파국
ٱلْخِلافَةُ ٱلأُمَوِيَّة
al-Khilāfatu al-ʾUmawiyyah
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
국기[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Age-of-caliphs.png
<colbgcolor=#fff> 최대 강역[2]
661 ~ 750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정통 칼리파조 아바스 왕조
후우마이야 왕조
위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아라비아 반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수도 다마스쿠스(661 ~ 744)
하란(744 ~ 750)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칼리파
주요 칼리파 무아위야 1세
아브드 알 말리크
왈리드 1세
면적 11,100,000km²
민족 아랍인
베르베르인
페르시아인
유대인
쿠르드인
그리스인
튀르크인
아르메니아인
소그드인
모사라베
고트족
언어 아랍어(공용어)
콥트어
페르시아어
아람어
아르메니아어
베르베르어
쿠르드어
소그드어
종교 이슬람 수니파
통화 디나르
1. 개요2. 역사
2.1. 무아위야 1세: 건국2.2. 카르발라 참극과 2차 피트나2.3. 아브드 알 말리크: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과 행정, 화폐, 군사 개혁2.4. 왈리드 1세: 정복 전쟁2.5. 술라이만: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2.6. 우마르 2세: 3년간의 선정2.7. 야지드 2세: 쇠락하는 왕조2.8. 히샴: 고군분투2.9. 멸망
3. 후우마이야 왕조4. 건축과 예술5.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목록

[clearfix]

1. 개요

아랍어: الدولة الأموية (al-dawlah al-ʾumawiyyah)[3], الخلافة الأموية (al-khilāfah al-ʾumawiyyah)[4], الأمويون ‎(al-ʾUmawiyyūn)[5]
영어: Umayyad Caliphate

우마이야 왕조 또는 우마이야 칼리파국(Umayyad Caliphate)은 정통 칼리파 시대에 이은 이슬람 제국의 두 번째 칼리파 시대로서, 최초의 세습 칼리파 왕조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서적에서는 옴미아드 왕조(Ommyads)로 적혀있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는 한국에서 아랍어 외래어 표기 방식이 제대로 보급되기 이전 왕조 명칭 뒤에 붙는 영어 접미사 ~ad, ~id를 왕조의 원래 명칭으로 잘못 오해해서 생긴 일이었다.[6] 2010년대 이후 교과서 등에서 해당 오류가 시정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전성기인 아브드 알 말리크 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에 바위의 돔을 건설했으며,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등 기존 로마 건축을 받아들인 건물을 각지에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역대 이슬람 제국 중 영역이 가장 넓었던 왕조였다. 서쪽으로는 현재의 포르투갈, 동쪽으로는 현재의 파키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다.[7] 그러나 피정복민에 대한 강압적 통치와 아랍 우월주의로 인한 반발로 인해 왕조의 존속은 오래가지 못했다.

2. 역사

파일:Sufyanid_dynasty_genealogy.png
시조 무아위야 1세의 직계 칼리파는 3명에 불과하다. 이후 무아위야 1세의 6촌인 마르완 1세의 자손들이 세습했다.

왕조의 기원인 우마이야 가문(بنو أمية / Banū ʾUmayya)은 쿠라이시 부족에 속한 상인 가문이었다. 1차 피트나에서 당시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아부 수피안의 아들 무아위야가 제4대 정통 칼리파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누르고 스스로 우마이야 왕조의 제1대 칼리파가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고 정통 칼리파 시대의 정복을 이어받아 마그레브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신드 지역 등을 정복했다. 717년 우마이야군이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동로마 제국레온 3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히샴은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을 일시적으로나마 저지했지만, 히샴이 죽고 나자 카이스(아랍 북부)와 칼브(아랍 남부) 간의 분쟁이 대규모 반란으로 발전했다. 749년 반란군들은 아부 알 아바스 앗 사파흐를 칼리파로 선포했다. 그는 아바스 왕조의 제1대 칼리파가 되었다. 그 후 750년 대 자브 강 전투에서 우마이야군은 패배했고, 전우마이야 왕조는 멸망했다.

2.1. 무아위야 1세: 건국

무아위야 1세메카의 유력 부족인 쿠라이시 부족 출신으로, 아버지 아부 수피안은 저명한 상인이었다. 수피안은 아랍 다신교 신봉자로, 무함마드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며 다신교 배격 운동을 전개하자 어떻게든 그를 죽이려 들었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갖은 탄압을 받은 끝에 메디나로 피신하자(헤지라), 수피안 일가는 메디나로 쳐들어가 무함마드를 끝장내려고 했다. 그러나 수년 간의 전쟁 끝에 무함마드가 승기를 잡았고, 무슬림군은 630년 메카에 입성했다. 결국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던 수피안은 모든 부족민과 함께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이때 무아위야 역시 아버지를 따라 개종했고 무함마드의 서기장이 되었다.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무아위야는 형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안과 함께 무슬림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후 형제들과 함께 이슬람 제국의 시리아 정복에 참여하여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활약해 무슬림군의 완승에 기여했다. 639년 형 야지드가 역병으로 사망하자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에 의해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그의 처지는 좋지 않았다. 시리아에 주둔한 무슬림군 대부분이 역병으로 죽거나 무력해졌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현지 주민들은 이교도인 아랍인들의 지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이들을 회유할 필요성을 느끼고, 시리아에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아랍 부족인 칼브 부족장의 딸 마이순과 결혼했다. 이후 기독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동로마 제국의 과중한 과세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세금을 대폭 삭감했다. 이에 시리아 주민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이와 함께 병력을 대폭 충원하고 철저한 훈련을 실시했으며, 우수한 장비를 가급적 확보하고 병사들의 봉급을 인상하며 정기적으로 지급했다. 그 결과 시리아의 무슬림군은 강력한 전투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장병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한편, 그는 동로마 제국사산 왕조의 행정 체계를 대폭 수용해 행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그러면서 해군을 양성해 키프로스로도스를 잇따라 점령하고, 아나톨리아의 리키아 해안에서 동로마 해군을 괴멸시켰다.(마스트 해전) 이와 동시에 정기적으로 아나톨리아약탈 원정을 떠나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칼리파 우스만의 지시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준비했다.

그러던 656년 6월, 제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이 메디나에서 폭도들에게 포위되자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무아위야는 구원군을 파견했지만 와디 알쿠라에서 우스만이 피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철수했다. 이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제4대 정통 칼리파에 즉위한 뒤 우스만의 살인자들을 체포하고 처벌하는 걸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반감을 품었다. 그는 알리가 칼리파 살인의 공범이라고 간주하고 반기를 들기로 했다.(1차 피트나) 먼저 동로마 제국과 평화협약을 맺고 역시 알리를 칼리파로 인정하지 않는 무리를 끌여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657년 그와 알리의 군대는 시핀에서 최초의 전쟁을 치루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무아위야는 병사들에게 《쿠란》을 창끝에 매달고 《쿠란》의 시구를 외치게 했다. 그러자 적의 피로 《쿠란》을 더럽혀질 것을 우려한 알리의 군대가 더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알리 역시 무슬림끼리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알리는 무아위야의 협상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협상 결과, 무아위야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종주권을 인정받으며, 칼리파 알리는 그 외의 영토를 보유하기로 했다. 또한 알리는 무아위야의 요구에 동의하여 자신의 정식 작위인 '아미르 알 무미닌'[8]을 협정 문서에서 생략했다. 강경파 인사들은 무아위야를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며 오직 알라만이 중재할 수 있다며 평화협정을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알리의 진영을 이탈하고, 카와리즈파를 결성했다. 이후 추가 협상이 있었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로 인해 결국 결렬되었다. 이에 암르(아므르)와 시리아 대표단은 무아위야를 '아미르 알 무미닌'으로 추대해 칼리파로 인정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658년 4월 또는 5월, 무아위야는 시리아 민중과 군대로부터 충성을 서약('바이아')받았다. 알리는 이 소식을 듣자 무아위야를 '알라의 적'으로 선포하고 무아위야와 그의 측근에 대한 저주를 아침 기도 의식때 행했다.

658년 7월, 무아위야는 이집트에 파견되어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던 알리측 군대를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알리의 의붓아들 무함마드를 붙잡아 처형했다. 당시 알리는 카와리즈파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이라 무아위야의 세력이 갈수록 강성해지는 걸 억제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아위야는 알리의 군사적 역량이 탁월해서 무력으로 제압하는 건 무리라고 여겼다. 그 대신, 알리를 따르는 부족장들을 회유하여 자기 편으로 돌려 세우고 국경 지대 주민들을 습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659년 또는 660년에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아라비아 반도 서부 히자즈까지 공격하여 여러 오아시스 주민들의 복속을 받아냈다. 660년 4월 메카 공격은 격퇴되었지만, 그해 여름에 히자즈와 예멘 정복에 성공하고 메카를 계속 압박했다. 이때 원정군 사령관 부스르 이븐 아비 아르타트는 도시 사나를 공략한 뒤 주민을 전부 학살하는 등 예멘에서 저항하는 자들을 철저히 짓밟았다.

알리는 이라크에서 군대를 모아 시리아로 쳐들어갈 준비에 착수했으나, 661년 1월 26일 쿠파의 대사원에서 새벽 예배를 위해 절하던 중 카와리즈파 암살자 압둘라흐만 이븐 물잠에게 암살당했다. 카와리즈파는 무아위야 역시 암살하려 했지만, 그가 사전에 암살 시도가 있을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예배에 나오지 않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 후 알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무아위야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의 모든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이라크로 진군할 채비를 갖췄다. 그러면서 새로운 칼리파로 추대된 알리의 장남 하산 이븐 알리에게 서신을 보내 신변을 보장해주고 이맘으로서 지위를 인정해줄 테니 칼리파를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군 6만 명을 이끌고 하산이 있는 쿠파로 진군했고, 하산 역시 병력 4만 명을 일으켜 무아위야를 향해 진군했다.

이후의 교전에서 하산이 군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부하들이 잇따라 이탈하면서 시리아군이 승기를 잡았지만, 무아위야는 무력으로 칼리파를 찬탈했다는 악명을 살 것을 우려했다. 그는 하산 및 그 추종자들과 화평을 어떻게든 이루기로 마음먹고, 하산과 협의한 끝에 그의 신변을 보장해주고 연금을 지급해주며 전투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사면을 선포하는 조건으로 칼리파로 인정받았다. 시아파 측은 무아위야가 하산보다 먼저 죽으면 하산이 칼리파가 되고, 하산이 무아위야보다 먼저 죽으면 하산의 동생 후세인 이븐 알리가 무아위야의 후계자가 되는 조건으로 평화협약이 맺어졌다고 주장했지만, 수니파 측은 그런 사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무아위야 1세는 칼리파에 즉위한 뒤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정하고 궁정을 세웠으며, 쿠파에 있었던 국고를 이곳으로 옮겼다. 10만 명에 달하는 시리아 부족 병사를 권력 기반으로 삼아 봉급을 지속적으로 늘렸으며, 핵심 지지세력인 쿠다족과 킨드족의 귀족 2천 명에게 상속 가능한 영지를 지급했다. 그들은 또한 모든 주요 결정들에 대해 협의할 수 있고, 이를 거부하거나 또다른 제안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또한 알리처럼 암살당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칼리팔라'(개인 경호대)와 '슈르타'(근위대), '마쿠라'(예비 부대)를 설치했다. 칼리파의 재원은 시리아의 세입과 이라크와 아라비아에서 압수한 왕령지로부터의 수입에 크게 의존했으며, 부관들이 원정 중에 획득한 전리품의 5분의 1이 무아위야 1세에게 넘어갔다.

무아위야 1세는 시리아 총독을 맡았을 때처럼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의 관료 체계를 유지했다. 디완이라 불리는 여러 관료 기구를 설립해 이슬람 제국의 통치를 체계적으로 수행하고 중앙집권화를 도모했다. 초기 아랍 문헌들은 그의 시대에 '알 카탐'(총리)과 '바리드'(연락 담당관)의 두 디완을 언급하며, 그들의 존재가 제국 내의 연락체계를 크게 향상시켰다고 밝혔다. 또한 사르준 이븐 만수르를 포함한 기독교 인사들을 중용했다. 여기에 로마 시대의 목욕 시설을 복구했으며, 679년 지진으로 파괴된 에데사 교회를 복원하는 등 기독교-로마인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기독교 외에도 유대교, 사마리아인, 마니교 등 다른 종교 신봉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역사가 톰 홀랜드는 무아위야 1세의 시대에 모두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허락받았다며 호평했다.

심지어 그를 적대했던 인사도 과감하게 기용하기도 했다. 659년 이란 남부 파르스 지방의 페르세폴리스에서 조로아스터 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해방 노예 출신의 지야드가 이를 진압하고 칼리파 알리로부터 파르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칼리파로 즉위한 무아위야 1세의 초빙을 받은 지야드는 그가 알리의 핵심 지지자였던 자신을 죽일 거라 여겼다. 하지만 무아위야 1세는 지야드와 의형제를 맺고, 아버지의 이름인 '수피안'을 그에게 붙였다. 이리하여 지야드는 '지야드 이븐 수피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지야드는 자신을 이토록 잘 대해준 것에 감격하여 바스라쿠파 총독을 역임하며 그곳의 반우마이야 정서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쿠파에 대모스크를 세우기도 했다. 그래도 적대감을 끝까지 드러내는 쿠파 시민 5만 명을 671년 동쪽 호라산메르프로 이주시켰다. 673년 지야드가 사망한 후 아들 우바이둘라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했다. 우바이둘라는 674년 부하라를 약탈했으며, 옥소스 강(아무다리야)을 도하한 첫 무슬림 장군이 되었다. 우바이둘라는 아버지에게 은총을 베푼 무아위야 1세에게 충성을 다했기에, 그의 치세 동안 동방 영토는 평안했다.

이렇듯 내부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무아위야 1세는 정복 전쟁으로 눈길을 돌렸다. 674년 그의 아들 야지드 이븐 무아위야 아비 수피안이 이끄는 해군과 육군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했다.(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한 기지들을 건설하고 동로마 제국 각지를 휩쓸며 적이 굴복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함대가 그리스의 불을 앞세워 반격에 착수하자, 이슬람 함대는 막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무슬림군은 678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육로에서 그들을 돕기로 했던 미르다이트족마저 패배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무아위야 1세는 679년 콘스탄티노스 4세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그동안 점령했던 에게 해의 섬들을 반환하고 황제에게 매년 노예 50명, 말 50마리, 금 3천 파운드를 공물로 보내기로 했다. 한편, 무슬림군은 서쪽으로의 원정을 감행했다. 670년 시칠리아를 공격했으며, 같은 해 우크바 이븐 나피는 이프리키야(현재의 튀니지)를 공략하고 카이루완 시를 세웠다. 이 곳은 훗날 카르타고를 대신하여 북아프리카의 행정 중심지이자 군사 작전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교의 최고 지도자가 된 칼리파의 세습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친족으로서 10살 때부터 무함마드를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워 수많은 이의 지지를 받았던 알리가 바로 칼리파가 되지 못한 것도 세습을 극도로 경계한 이슬람 지도부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아위야 1세는 아들 야지드 1세를 후계자로 삼기로 마음먹고, 교묘한 정치 공작을 벌인 끝에 675년 또는 676년에 모든 지역의 대표들로부터 야지드 1세의 칼리파 계승을 인정받았다.

2.2. 카르발라 참극과 2차 피트나

680년 4월 무아위야 1세가 붕어한 뒤 야지드 1세가 칼리파에 등극했다. 그러나 칼리파 세습을 인정할 수 없었던 시아파는 알리의 차남 후세인 이븐 알리를 칼리파로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야지드 1세는 우마르 이븐 샤에게 후세인과 일가족, 몇몇 추종자들이 쿠파 인근 카르발라에 이르렀을 때 습격하여 전원 사살하도록 했다.(카르발라 참극) 후세인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자,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당초 야지드 1세의 집권을 받아들였던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는 친척인 후세인 이븐 알리의 복수를 위해 궐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후세인의 죽음을 거룩한 순교로 승화시키며 지지 세력을 모았고, 자신이 칼리파 자격이 있음을 선포하고 충성 서약을 받았다. 야지드 1세는 일단 대표단에게 상당한 선물을 딸려서 그에게 보내면서 협상을 제안했지만, 압둘라 빈 주바이르는 끝내 거부했다. 이에 야지드 1세는 압둘라의 형제이지만 사이가 나빴던 암르(아므르)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압둘라를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암르는 참패하여 체포된 뒤 곧바로 처형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메디나 주민들은 압둘라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이는 야지드 1세가 정부 수입을 늘리기 위해 토지를 몰수한 것에 반감을 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야지드 1세는 메디나의 유력 인사들을 다마스쿠스로 초대해 막대한 선물을 줘서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들은 메디나로 돌아와서 야지드 1세가 지나치게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며 도시에 거주하는 야지드 1세의 지지자들과 사촌인 우스만 이븐 무함마드 이븐 아비 수피안을 추방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야지드 1세는 이븐 우크바가 이끄는 우마이야 군대 1만 2천 명을 파견하여 메디나를 공략하게 했다. 메디나인들은 이에 맞섰으나 알 하라 전투에서 패배했다. 야지드 1세의 군대는 메디나에 주둔한 뒤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하고 약탈을 자행한 후 압둘라 빈 주바이르를 잡기 위해 메카로 향했다. 이븐 우크바는 메카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고, 후세인 이븐 누마이르 알 사쿠니가 지휘권을 넘겨받아 683년 9월 성도 메카를 포위했다. 이후 벌어진 제1차 메카 공방전에서 무슬림의 신성한 사원인 카바에 불이 붙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야지드 1세에 대한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렇듯 내전이 급격하게 진행되던 683년 11월 11일, 야지드 1세가 급사했다. 이후 야지드 1세의 사촌이자 매부이며 바누 칼브의 부족장인 하산 빈 말리크의 지원을 받은 야지드 1세의 아들 무아위야 2세가 칼리파로 선임되었다. 무아위야 2세는 메카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븐 주바이르와의 전쟁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는 메디나와 메카에서의 전쟁은 광기와 신성모독이며, 특히 카바를 불태운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메카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던 후세인 이븐 누마이르 알 사쿠니[9]에게 철군령을 내렸다. 내전이 한시바삐 끝나기를 바랐던 무슬림들은 이에 기뻐했다.

이후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에게 사절을 보내
"내겐 아들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그대가 뒤를 이어 칼리파가 되어라."
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주바이르는 무아위야 2세가 아직 어려서 나중에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높으니 말을 바꿀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거부하며 내전을 재개해 이집트 남부와 이라크를 침공했다. 무아위야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다시 사절을 보내 두 사람이 동시에 퇴위하고 슈라에 새 칼리파 선출을 맡기자고 제안했으나 역시 묵살당했다. 그러다 684년 2월에 급사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확실한데, 황달이나 전염병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죽기 전에 퇴위했다는 설도 제기되나 불확실하다.

무아위야 2세가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팔레스타인, 히스, 킨나스린을 포함한 수많은 총독들이 우마이야 왕조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며 압둘라 빈 주바이르에게 귀순했다. 친우마이야 세력의 영향력은 시리아에 그쳤고, 그나마도 중심지인 다마스쿠스 총독 앗 다하크 마저 주바이르 편으로 돌아서고 시리아 내 카이스 부족 역시 우마이야 왕조를 적대시하는 등 입지가 매우 위태로웠다. 칼브 부족장 하산 빈 말리크는 야지드 1세의 또다른 아들 칼리드를 새 칼리파로 밀어붙였지만, 시리아 원로들은 압둘라 빈 주바이르와 내통한 다마스쿠스 총독 앗 다하크가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젊은이를 따를 수는 없다며 반대했다. 이라크에서 압둘라 빈 주바이르에게 축출된 뒤 시리아로 피신한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는 차선책으로 무아위야 1세의 부관으로서 상당한 활약을 한 마르완 1세를 옹립하자고 제안했고, 하산 빈 말리크도 결국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시조 무아위야 1세의 직계는 3대로 끝났고, 이후에는 방계인 '마르완 왕조'로 이어졌다.

마르완 1세는 칼리파 즉위 이후 바누 칼브를 중심으로 킨다와 가산 부족들을 포섭하여 군대를 조직한 뒤 다마스쿠스 총독 앗 다하크와 상대하러 진군했다. 그러다가 적이 마르즈 앗 사파르 평원에 집결하느라 다마스쿠스 수비를 게을리한 틈을 타 다마스쿠스로 진격, 가산 부족에 속한 인사의 내통으로 도시를 장악했다. 이후 적이 돌아오기 전에 왕실 금고를 접수한 뒤 도시를 나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다마스쿠스로 달려오던 앗 다하크와 마르즈 라히트에서 대치했다. 당시 마르완 1세의 군대는 적에 비해 절반도 안 되었지만, 금고에서 얻어낸 재화를 마구 풀어서 적군을 자기 편으로 회유했다. 그 결과 전투 당일에 다수의 적군이 전투 도중에 마르완 1세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혼란이 일어났고, 그는 이 때를 틈타 적 수뇌부를 집중 공격해 앗 다하크를 주살하고 대다수 적병을 흡수했다. 이에 힘스의 카흐탄 부족이 마르완 1세에게 귀순하면서 세력이 강해졌다.

684년 7월 또는 8월에 다마스쿠스에서 칼리파 즉위식을 정식으로 거행한 후, 마르완 1세는 선제 야지드 1세의 미망인이자 칼리드의 어머니인 움 하심 파히타와 결혼하면서 이전의 칼리파 왕족이었던 수피안 일족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마르완 1세는 바누 칼브 출신의 아히야 빈 카이스를 '수르타'(경찰 또는 보안군)의 수장으로 임명했으며, 궁전 관리자로 아부 살 알 아스와드를 선임했다. 다만 마르완 1세의 지위는 시리아에서만 인정받았고, 다른 지역은 여전히 압둘라 빈 주바이르를 따랐다. 만약 주바이르가 시리아로 당장 쳐들어갔다면 당해내기 어려웠겠지만, 주바이르는 이라크에서 봉기를 일으킨 카와리즈파를 토벌하는 데 전념하느라 그쪽에 신경쓰지 못했다. 마르완 1세는 이 기회를 틈타 영역 확장을 노리기로 하고, 각지에 군대를 보내 하나둘씩 제압했다.

685년 2월 또는 3월, 마르완 1세는 당시 이집트로 진군하여 이집트의 수도였던 푸스타트의 주요 부족들의 도움에 힘입어 이집트를 장악했다. 압둘라 빈 주바이르를 지지했던 이집트 총독 압두라흐만 빈 우트바는 축출되었고, 그의 아들 압둘 아지즈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또한 암르 빈 사이드가 이끄는 친마르완파 군대는 무샤브 빈 주바이르가 이끄는 적군을 상대로 팔레스타인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확보에 성공한 뒤, 여세를 몰아 히자즈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마르완 1세가 파견한 군대는 메디나 동쪽 아르라바자에서 패퇴했다. 또한 그는 아들 무함마드에게 유프라테스 강 계곡의 중부 지역에 있는 카이스 부족 패잔병 토벌 임무를 맡겼으며, 685년 초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해 압둘라 빈 주바이르로부터 이라크를 탈환하는 임무를 맡겼다.

685년 4월 또는 5월, 마르완 1세가 붕어하고 아들 아브드 알 말리크가 제4대 칼리파로 등극했다. 당시 이라크 일대는 압둘라 빈 주바이르로부터 독립하여,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아들들 중 한 명인 무함마드 이븐 알 하나피야[10]의 지시를 받들어 후세인 이븐 알리의 복수를 하겠다고 선전한 알 무크타르 이븐 아비 우바이드가 다스리고 있었다. 아브드 알 말리크는 이라크를 탈환하려 했던 아버지 마르완 1세의 유지를 잇기로 하고,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에게 자신이 지원군을 이끌고 갈 테니 무크타르 원정을 지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686년 우바이둘라는 카지르 전투에서 무크타르에게 참패하여 사로잡힌 뒤 알리를 직접 살해한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쿠파군 병사들에 의해 몸이 두 개로 찢겨지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브드 알 말리크는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러 가던 중 카지르 전투의 대패 소식을 전해듣고 시리아로 귀환했다.

그후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가 이라크로 쳐들어가서 수개월간 쿠파 공방전을 벌인 끝에 공략에 성공하고 쉬아파의 수령 무크타르를 죽였지만, 아라비아 반도 동부와 이란 남부에서 카와리즈파가 준동하고, 이라크 총독으로 부임한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의 동생 무사압이 토지를 착복하며 주민들을 학대하는 등 실정을 거듭하면서 주바이르 왕조는 민심을 잃었다. 아브드 알 말리크는 주바이르 왕조가 내우외환에 시달리느라 시리아에 관심을 두지 못하는 틈을 타 카지르 전투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시리아에서 우마이야 왕조에 적대적이던 카이스 부족을 토벌했다.

686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파견한 레온티오스 장군이 캅카스로 진군하여 알바니아(아제르바이잔의 고대 지명)에서 아랍군을 격파했다. 아브드 알 말리크는 내전을 치르는 와중에 동로마 제국과 싸우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여 688년 동로마 제국과 평화협약을 갱신했다. 일시불로 1천 노미스마타를 지급하고 매주 금요일마다 일정량의 노미스마타와 말, 노예를 바치기로 했다. 또한, 키프로스와 이베리아(현재 조지아 중부), 아르메니아의 세금도 양국이 양분하기로 했다. 특히 키프로스는 양국의 공동통치구역(condominium)으로 삼았다.

689년, 아브드 알 말리크는 이라크로 친정하면서 아므르 빈 사이드에게 다마스쿠스의 관리를 맡겼다. 그러나 사이드는 마르완 1세로부터 칼리파 계승을 약속받았지만 아브드 알 말리크가 칼리파가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그가 이라크로 떠나자 칼브 부족장 후마이드 빈 후라이트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켜 다마스쿠스를 확보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드 알 말리크는 군대를 돌려 다마스쿠스로 진군했다. 사이드가 후마이드와 주하이르 빈 알 아브라드 휘하의 기병을 출전시키자, 아브드 알 말리크는 후마이드의 사촌인 하산 빈 말리크와 주하이르의 동생 수피안에게 맞서게 했다.

양측이 충돌하며 칼브 부족 간의 전쟁이 수일간 이어진 후, 부족의 여인들이 아이들과 함께 나타나 후마이드와 수피안에게 우마이야 가문을 위해 서로 죽이지 말라고 간청했다. 이에 두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전투를 중단했다. 그렇게 대치가 이어지다가, 후마이드는 다마스쿠스로 회군했고 아브드 알 말리크의 군대는 도시를 포위했다. 16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사이드가 신변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하면서 평정되었다. 하지만 아브드 알 말리크는 사이드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 약속을 어기고 처형했다. 다만 반란에 가담했던 후마이드와는 화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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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드 알 말리크가 제2차 피트나(내전) 종결 기념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폐허에 지은 바위의 돔.

691년, 시리아를 안정시킨 아브드 알 말리크는 재차 이라크로 진군하여 쿠파와 바스라, 파르스 일대를 공략했다. 뒤이어 692년 호라산을 평정했고, 같은 해 핫자즈 빈 유수프에게 병력 2천을 주어 히자즈 평정을 맡겼다. 아브드 알 말리크는 협상을 통해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를 항복시켜보고, 항복을 거부한다면 메카를 포위하게 했다. 핫자즈가 전초전에서 주바이르군을 격파한 뒤, 아브드 알 말리크는 타리크 빈 아므르에게 병력 5천을 줘서 핫자즈와 합세하게 했다. 타리크는 메디나를 어렵지 않게 공략한 뒤 주바이르와 핫자즈의 협상이 결렬되자 핫자즈와 합류하여 3월 25일부터 메카를 포위해 여덟 달 동안 포위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카바는 공성 무기에 의해 손상을 입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수비대가 대거 투항하자,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우마이야군을 향해 돌진했다가 전사했고 수급은 효수되었다. 이리하여 기나긴 제2차 피트나가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최종 승리로 종결되었다.

2.3. 아브드 알 말리크: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과 행정, 화폐, 군사 개혁

제2차 피트나 종결 이후, 아브드 알 말리크는 핫자즈를 이라크 총독으로 임명하여 동방 영토에서 여전히 준동하고 있는 카와리즈파를 토벌하게 한 뒤 자신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착수했다. 전쟁은 동전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는 688년에 맺은 조약에 따라 노미스마타를 바쳐야 했다. 그런데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692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진 노미스마타를 주조했다. 이슬람 교리에는 인간의 모습을 새기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아브드 알 말리크는 황금의 무게는 같게 하되 예수의 모습이 없는 동전을 주조하여 바쳤는데,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이를 빌미로 삼아 선전포고했다. 이에 아브드 알 말리크는 동생 무함마드 이븐 마르완에게 아나톨리아 공격을 명령했다.

양군은 아나톨리아 동부의 세바스토폴리스에서 맞붙었다. 첫 번째 교전에서 동로마군이 더 많은 우마이야군을 살해했다. 이에 무함마드는 동로마군 내의 슬라브 군인들을 매수했고, 2만 명에 달하는 슬라브인이 진영을 이탈했다. 동로마군은 이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무함마드는 이 틈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여 동로마군을 격파했다. 레온티오스 장군은 수도로 소환된 뒤 패전의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갇혔고, 우마이야 왕조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아르메니아를 공략했다.

695년, 이프리키야 총독 하산 빈 알 누만은 아브드 알 말리크의 지시를 받고 북아프리카의 중심도시 카르타고를 공략했다. 이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몰아내고 제위에 올랐던 레온티오스는 요안니스와 아프시마로스에게 해군을 맡기고 카르타고를 탈환하도록 했다. 두 장군은 697년 기습 공격을 감행해 카르타고를 성공적으로 탈환하고 아랍군을 이집트의 카이로로 축출했다. 그러나 698년 하산 빈 알 누만이 재차 반격을 가해 카르타고를 공략했고, 동로마 함대는 크레타 섬으로 철수했다. 그들은 곧 황제 레온티오스에게 반기를 들기로 작정했는데, 아프시마로스는 '티베리오스'로 개명하고, 요안니스를 처단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해 레온티오스를 체포하여 코와 혀를 잘라버리고 달마티아의 수도원으로 보낸 뒤 새 황제로 즉위했다.

얼마 후, 하산 빈 알 누만은 베르베르인의 여왕 카히나 주위에 모인 제네트족의 역습에 직면했다. 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바르카로 철수했지만, 아브드 알 말리크가 지원군을 보내주자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해 타바르카 인근에서 승리했다. 카히나는 참수되었고, 그녀의 머리는 702년 아브드 알 말리크에게 전해졌다. 이후 하산 빈 알 누만은 튀니지까지 공략했다. 705년 하산 빈 알 누만이 사망한 뒤 무사 이븐 누사이르가 새 총독으로 부임하여 북아프리카의 동로마 잔여 세력을 분쇄했다. 다만 지금의 지브롤터 해협에 해당하는 세우타 공략에는 실패했다.(무슬림의 마그레브 정복 전쟁)

한편, 아브드 알 말리크는 내치를 다지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우선 그때까지 동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의 체계를 그대로 따랐던 행정부를 제국의 실정에 맞춰 현지화했고, 연락 체계를 개편했으며, 농업과 무역 진흥 정책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화폐 개혁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슬람 제국은 사산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사용하던 동전을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아브드 알 말리크는 군주의 초상이 그대로 실린 동전을 사용하는 건 이슬람 교리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693년, 칼리파는 이슬람 금화인 디나르를 도입했다. 이 주화에는 이슬람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이자 최고 군사령관인 칼리파를 묘사한 그림이 새겨졌다. 그러다 696년 또는 697년에 《쿠란》의 인용문이 새겨진 이미지가 없는 주화로 대체되었다. 699년에 사산 왕조의 옛 영역인 이란에서 발행된 은화 디르함에도 유사한 변경이 이뤄졌다.

아브드 알 말리크는 군대 개혁에도 힘을 기울였다. 부족의 지위와 칼리파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군 고위직을 차지했던 아랍 귀족들은 점차 군공을 세우면서 승진한 군인들로 대체되었다. 또한 긴 내전을 치르는 동안 우마이야 왕조에 끝까지 충성한 시리아 군대를 제국 전역에 배치했으며, 참전 용사들의 후손들에게도 봉급을 지급하던 관행을 폐지하고, 오직 현역 군인에게만 봉급을 지급하도록 했다. 이 조치를 통해 제국의 재정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봉급을 받지 못하게 된 이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여기에 시리아군을 각지로 분산시킨 조치는 750년 아바스 왕조가 이끄는 반란군이 이들을 각개격파하면서 우마이야 왕조의 지지 세력이 순식간에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성공적인 통치를 이어가던 아브드 알 말리크는 말년에 당초 후계자로 지정되었던 동생 아브드 알 지라즈 대신 장남 왈리드 1세를 칼리파로 지명하려고 했다. 아브드 알 지라즈는 이에 불복하여 이집트에서 반기를 들 준비를 했지만, 705년 5월에 병사하면서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브드 알 말리크는 즉시 또다른 아들 아브드 알리를 이집트 총독으로 선임해 분란의 여지를 차단했다. 그로부터 5개월 후인 705년 10월 9일에 바스라에서 발발한 역병에 걸려 붕어했고, 아들 왈리드 1세가 뒤이어 칼리파로 즉위했다.

2.4. 왈리드 1세: 정복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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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제국의 최대 강역[11]

왈리드 1세는 전 세계를 이슬람으로 통합시키겠다는 야망에 불탄 인물이었다. 그는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 무함마드 이븐 알 카심 등을 기용해 동방 원정을 맡겼다. 두 장군들은 트란스옥시아나, 신드, 편자브 등을 평정하고 인더스 강까지 우마이야 제국의 세력을 확장했다. 서방 원정 역시 비슷한 시기에 추진되었다. 왈리드 1세의 이복 형제인 마슬라마 이븐 알 말리크는 칼리파의 지시에 따라 아나톨리아로 진군했다. 마슬라마는 안티오키아를 공략했고, 707년 티아나에서 동로마 제국군을 격파했다. 708년 아모리움을 공략하면서 아나톨리아의 중심부를 장악했다. 712년 멜리테네 정복을 완료하고 아마세아와 미스티아를 약탈한 후 그 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713) 갈라티아로 진군하여 그 일대를 평정했다. 왈리드 1세는 동생의 잇따른 성공에 고무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준비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이를 간파하고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전면 보수했으며, 금각만에서 함선 건조에 착수하고 식량을 대대적으로 비축해 아랍군의 침략에 대비했다.

한편, 이프리키야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는 서쪽으로 대서양까지, 남쪽으로 시질마사까지 진격했고 탕헤르를 점령했다. 다만 현재의 지브롤터 해협에 해당하는 세우타 공략에는 실패했다. 그러던 중 동로마 제국의 세우타 총독 율리아누스가 무사에게 귀순하고 서고트 왕국 정벌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일설에 따르면, 율리아누스는 자기 딸 플로린다 라 카바를 강간한 서고트 왕 로데리쿠스에게 복수하고자 무사에게 귀순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로데리쿠스에게 반감을 품은 서고트 귀족이 북아프리카의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에게 밀사를 보내 로데리쿠스를 타도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무사는 가장 신뢰하는 장군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에게 7천 명을 맡겨서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애초에 이베리아 반도를 공략할 마음이 있었다는 정황이 있다. 이슬람에 귀의한 베르베르군은 705년경부터 이베리아 해상에 수시로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고, 《알폰소 3세의 연대기》에는 웸바 왕의 재위기간(672~680) 동안 이슬람군이 에르위그라는 귀족의 청탁에 따라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710년 타리크가 이끄는 무슬림군은 율리아누스의 도움을 받아 바다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한 뒤 지브롤터에서 출발하여 카르타헤나 해안 일대를 돌며 약탈을 자행했다. 로데리쿠스는 이에 맞서 가능한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남하했지만, 711년 과달레테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후 타리크는 코르도바, 톨레도, 세비야를 잇따라 공략했다. 그러나 무사가 군대 1만 8천 명을 거느리고 해협을 건너 탈라베라에서 타리크와 합류한 뒤 타리크를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고, 무사의 아들 아브드 알리가 712년부터 이베리아 원정을 맡아 각지의 서고트 귀족들을 순조롭게 복속시켰다.

한편, 왈리드 1세는 아버지 아브드 알 말리크의 관료집단의 언어를 그리스어와 페르시아어에서 아랍어로 대체하는 정책을 이어받았다. 그는 이복 형제이자 이집트 총독인 아브드 알리에게 이집트의 디완(정부 부처)에서 그리스어와 콥트어를 배제하고 아랍어를 사용하게 했다. 또한 제국의 복잡한 조세 제도를 정리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했고, 메카메디나 주민들을 가급적 온건하게 대해서 반우마이야 정서가 강한 그들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썼다.

또한 정복 전쟁에서 확보한 전리품을 토대로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공공 사업과 사회 복지 정책을 추진했다. 왈리드 1세는 형제 및 아들들과 함께 시리아의 도로를 정비하고 우물을 팠으며, 관개망과 운하를 수반하는 간척사업에 정력을 쏟아부었다. 여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 조치를 실시하고, 장애인 한 명당 하인 한 명을 배치해 평생 돌보도록 했다. 다만 이러한 공공 사업과 사회 복지 정책은 우마이야 제국의 중심지인 시리아에 국한되었다. 아울러 건축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특히 다마스쿠스의 우야미드 모스크와 예루살렘의 예언자 모스크가 왈리드 1세의 치세에 재건축되거나 확장되었다. 또한 제2차 피트나 때 손상을 입은 메카의 성소인 카바 복구에도 막대한 지원을 했다.

2.5. 술라이만: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715년 2월 25일 또는 3월 11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준비를 하던 왈리드 1세가 붕어했다. 뒤이어 칼리파에 오른 술라이만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총독들을 가차없이 숙청했다. 이프리키야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는 체포된 뒤 두 자식이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죽음을 맞이했고, 선제 왈리드 1세 치세 때 동방 제패에 큰 공을 세웠던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과 무함마드 이븐 카심 역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이후 메카 순례를 마치고 다마스쿠스로 귀환한 술라이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을 성공해 권위를 드높이기로 작정했다. 보병 9만 명, 낙타 기병 6천 명, 노새 기병 6천 명이 집결했고,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온 함대 500척이 마슬라마 이븐 알 말리크의 지휘 아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그들은 중간에 막아선 적군을 모조리 격파하고 공성전을 감행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온 3세는 마슬라마에게 수도의 시민 전체 몫에 해당하는 금화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비대를 조직하는 등 승리를 확신했던 마슬라마는 거부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의 결사적인 항전 때문에 좀처럼 함락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우마이야 해군 역시 그리스의 불을 앞세운 동로마 함대에 번번이 격퇴되었다.

이렇듯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이 쉽게 이뤄지지 않던 717년 9월 24일, 술라이만이 다비크에서 중병에 걸려 붕어했다. 그는 생전에 장남 아이유브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아이유브는 717년 초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에 또다른 아들 다우드를 지명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라자 이븐 하이와 알 킨디는 다우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싸우고 있으며 그가 아직 살아있는지 확실하지 않다며 반대했다. 그러면서 사촌이자 칼리파의 조언자인 우마르 이븐 아브드 알 아지즈가 인격과 능력이 뛰어나고 신실한 무슬림이라며 그를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술라이만은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혹여 자신의 형제들과 우마르 간에 분란이 생길 걸 우려해 형제인 야지드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를 우마르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리하여 우마르가 우마르 2세로서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2.6. 우마르 2세: 3년간의 선정

우마르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가망이 없다는 걸 파악하고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 후 거듭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회복하기 위해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궁정에 도입했다. 하인, 노예, 하녀, 말, 황금 예복, 토지 소유지를 국고에 반납하고,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똑같이 하라고 권고했다. 또한 피다크의 정원[12]을 공동체에 환원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족들은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각지에 막대한 세금을 징수했으며 상인들에게 그들의 상품을 헐값에 팔도록 강요했다. 또한 각지의 관리들은 백성으로부터 뜯어낸 돈을 고스란히 바치면서 답례로 금과 은을 선물로 받았다. 우마르 2세는 이러한 관행을 금기시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며 질서를 바로잡았다.

한편, 우마이야 관리들은 피정복민인 마왈리를 학대했다. 마왈리의 재산은 종종 정당한 법적 절차없이 몰수당했다. 게다가 본래 개종하면 내지 않아야 하는 지즈야를 계속 납부해야 했고, 이를 거부하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우마르 2세는 이러한 관행 역시 금지했다. 마왈리의 재산을 불법으로 몰수한 자를 엄히 처벌했으며, 개종한 마왈리는 지즈야를 납부하지 않도록 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에 민중이 호응하면서, 악화 일로를 걷던 민심이 호전되었다. 또한 우마르 2세는 중국과 티베트에 사신을 보내 그곳의 통치자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일 것을 권유했으며, 이슬람 제국 치하의 현지 주민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선교 활동을 충실히 수행했다.

우마르 2세는 이슬람교의 저명한 학자들인 무함마드 빈 카브 및 마이문 빈 메흐란 등과 깊은 교류를 가졌으며, 교사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교육을 장려했다. 또한 우마르 2세는 대중에게 경건함, 끈기, 사업 윤리, 청렴 등을 가르쳤다. 음주를 엄격히 금지했으며, 공공 장소에서 알몸을 드러내지 말도록 했고, 남녀가 혼욕하는 것 역시 금지시켰으며, 자카트(자선용 세금)의 공정한 처분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란, 호라산, 북아프리카에 운하, 도로, 여행자들을 위한 휴게소 및 의료소를 건설하는 등 광범위한 공공 사업을 수행했다. 우마르 2세는 《쿠란》을 아랍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게 한 최초의 칼리파이기도 했다. 718년, 그는 신드에 있는 라자의 요청에 따라 《쿠란》을 고대 신드어로 번역하여 라자에게 보냈다.

우마르 2세는 무슬림 사이의 정치적, 종교적 차이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는 금요일 설교에서 시조 무아위야 1세의 숙적이었던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모욕하는 관행을 폐지했고, 시아파카와리즈파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한편으로는 지하드에 대한 의무를 준수하고자 동로마 제국의 국경 지대에 대한 연례 여름 습격을 계속했으며, 시리아 북부의 쿠나시라 영지에 거주하면서 여러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이븐 하팀 이븐 알 누만 알 바힐리 휘하의 군대를 아제르바이잔으로 파견해 그 일대에 피해를 끼치던 튀르크인들을 물리치도록 했다. 그리고 동쪽으로의 확장은 중단했지만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에 요새를 세워서 외적의 반격을 저지하게 했다. 알안달루스의 무슬림군은 우마르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오늘날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 도시 나르본을 정복하고 요새화하기도 했다.

이렇듯 검소하고 경건한 삶을 추구한 우마르 2세는 이슬람 사료에서 진정으로 경건하며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훌륭한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아바스 왕조 제2대 칼리파 알 만수르는 우마이야 왕가의 무덤을 파괴하고 시체를 난도질했지만, 우마르 2세만큼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며 남겨뒀다. 이후 바그다드의 역사가와 율법 학자들은 우마이야 왕조의 역대 칼리파들을 찬탈자로 간주했지만 우마르 2세만큼은 정통 칼리파로 인정했다.

2.7. 야지드 2세: 쇠락하는 왕조

720년 우마르 2세가 붕어한 뒤 칼리파에 등극한 야지드 2세는 여러 면에서 선제 우마르 2세와 정반대였다. 우마르 2세가 검약한 삶을 추구한 것에 비해, 그는 즐거움을 추구했으며 사치를 구가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야지드 2세는 우마르 2세 시절 부패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었던 오사마를 석방한 뒤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이라크 출신의 기독교인으로 최근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부 무슬림을 이프리키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우마르 2세의 세제 개혁은 원상태로 환원되었고, 우마르 2세에 의해 파직되어 감옥에 갇혔던 이들 역시 석방된 뒤 자신들의 직책으로 돌아가서 우마르 2세의 지명자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했다.

아부 무슬림은 이프리키야 총독으로 부임한 뒤 지즈야를 대거 거둬들였고, 세금을 미납한 자의 손등에 낙인을 찍는 최악의 관행을 부활시켰다. 이에 분노한 베르베르인들은 721년 반란을 일으켜 사원에서 아부 무슬림을 살해했다. 하지만 그들은 보복을 두려워하여 칼리파 야지드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총독의 부당한 행위에 분노했을 뿐 칼리파 님께 대적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라며 사죄했고, 아부 무슬림의 전임 총독 이스마일 이븐 압드 알라 이븐 아비 알 무하지르를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야지드 2세는 특별히 그들을 용서했다. 한편, 이라크 남부 바스라의 총독은 우마르 2세 시절 온건한 대우를 받았던 카와리즈파를 강하게 탄압했다. 카와즈리파는 이에 분노하여 이라크의 전 총독이지만 감옥에 갇혀 있었던 야지드 이븐 알 무할랍을 탈옥시킨 뒤 그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규모는 작았지만, 이라크의 주민들과 부족 민병대는 그들을 굳이 토벌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에 의외로 반란이 오래 갔다. 바스라 인근에서 무히라 이븐 압둘라가 이끄는 우마이야군 기병대가 저지했지만, 야지드의 동생 무함마드 이븐 알 무할랍에게 패퇴했다. 이후 야지드 이븐 알 무할랍은 자신의 집에 도착하여 금고를 확보한 뒤, 바스라의 주민들에게 황금을 아낌없이 나눠줬다. 당시 우마이야 정부군은 하루에 2디르함만 받았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금을 나눠주겠다는 말에 마음이 넘어가 무할랍 형제의 반란군 편으로 대거 가담했다. 바스라 총독은 곧 체포된 뒤 감옥에 갇혔다.

720년 4월 15일, 야지드 이븐 알 무할랍은 바스라 시민들을 모아놓고 《쿠란》과 순니를 따르라고 촉구하며,
시리아인에 대한 지하드는 튀르크인과 델람인에 대한 지하드보다 알라의 보상을 더 받을 것
이라고 선언했다. 여기서 우마이야 왕조가 아니라 시리아인을 지하드의 대상으로 삼은 점이 특이한데, 이는 이라크인들이 봤을 때, 모든 시리아인들이 우마이야 왕조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무할랍의 반란군은 720년 8월 23일 바빌론으로 접근하던 중 아스시브 전투에서 우마이야군에게 괴멸되었고, 야지드 이븐 알 무할랍과 그 일족은 목숨을 잃었다.

오직 알 무파달 알 무할랍만이 살아남아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와시트로 철수했다. 야지드 2세는 생포된 무할랍 반란군 병사들을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알 무파달은 바스라로 이동한 뒤 다시 카르마니아의 수도로 피신하려다가 토벌대에게 어느 협곡에서 따라잡혀 목숨을 잃었다. 야지드 2세는 마슬라마를 새 이라크 총독에 임명했지만, 그가 지방세 잉여금을 자신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곧 해임했다.

암군이었던 야지드 2세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과 반란으로 인해 갈수록 고갈되어가는 제국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 이프리키야, 호라산, 신드 및 이베리아 반도의 총독들에게 지방 세수의 5분의 1을 반드시 바치라고 명령했다. 또한 개종하면 지즈야를 면제받았던 피지배인 마왈리에게 지즈야를 무조건 납부하라고 강요했다. 이로 인해 우마이야 제국 각지에서 불온한 기온이 피어올랐다.

722년 3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총독 말라크 이븐 사파르 알 바흐라니가 튀르크계 하자르 칸국에 패배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야지드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하여 사파르를 해임한 뒤 알 자라 이븐 압달라에게 시리아군 2만 5천 명을 맡겨 하자르로 진격하게 했다. 압달라는 발란자르를 점령했지만, 하자르군이 무슬림들의 추적을 피해 멀찌감치 달아났기에 별다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723년, 바흐라니는 추가 병력을 제공받은 뒤 발란하르 북쪽에서 하자르군에 공격을 감행했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야지드 2세는 우마이야 제국 전역에 있는 기독교 교회의 모든 성상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온 3세는 이에 큰 영향을 받아 726년 성상 파괴주의를 추진했다.

2.8. 히샴: 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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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년경의 우마이야 제국

724년 실정을 저지르던 암군 야지드 2세가 붕어한 뒤 새 칼리파에 등극한 히샴은 쇠락한 제국을 구하기 위해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란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뛰어난 전략가였던 마슬라마를 코카서스 전선으로 보내 침략을 일삼던 튀르크계 하자르 칸국을 격퇴하고, 하자르의 본거지인 카프카스 산맥 너머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호라산을 수시로 습격하는 튀르크인 토벌을 위해 군대를 잇따라 파견했으며, 숙적인 동로마 제국에 대한 습격 작전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갔다.

732년, 알안달루스의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은 피레네 산맥의 서쪽을 넘어 북상해 아키텐 공작을 격파하고 보르도를 약탈한 뒤 투르의 상 마르탕 교회에 박대한 재보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그곳으로 가기 위해 루아르 강으로 진군했다. 메로베우스 왕조의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은 이를 격퇴하기 위해 남하했고, 양군은 푸아티에 인근 평원에서 마주쳤다. 이후 벌어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무슬림군은 괴멸되었고 아바드 알 라만은 전사했다. 이후 알안달루스의 현지 지배층간의 정쟁이 심화되면서, 무슬림군은 더 이상 프랑크 왕국을 향한 조직적인 공세를 벌이지 못했다.

740년, 칼리파 히샴은 알 가미르가 이끄는 경무장 기병대 1만 명을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해안지대로 보내고 압달라 알 바탈과 아부 말리크 이븐 슈에비브에게 후속 병력을 이끌고 뒤따르게 했으며, 아들 술라이만에게 또다른 병력을 맡겨 카파도키아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레온 3세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출진하여 아크로이논 전투에서 아나톨리아 서부의 해안지대를 휩쓸던 압달라와 아부 말리크를 주살하고 아랍군 10만여 명을 섬멸했다. 술라이만은 아나톨리아의 시골 지역을 약탈했지만 요새화된 도시 공략에 실패하다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패퇴했다. 그 과정에서 2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동로마군의 포로가 되었다. 레온 3세는 승리를 기념하여 아크로이논을 '승리의 도시'라는 뜻인 '니코폴리스'(Νικόπολις)로 개명했다.[13]

740년, 시아파이맘이었던 자이드 이븐 알리가 쿠파에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쿠파에 주둔하고 있었던 수백 명의 우마이야 병사들을 몰아낸 뒤 바스라, 모술 등지에서 추가로 병력을 모집하여 이라크를 장악하고 시리아로 진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쿠파의 총독은 이 음모를 조기에 적발하고 사람들에게 대 모스크에 집결하라고 명령한 뒤 그들을 안에 가둔 후 자이드를 찾으려 했다. 자이드는 일부 사람들과 함께 모스크에서 빠져나온 뒤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와 항전하자고 소리쳤다.

그러나 자이드를 심정적으로 지지했던 이들은 눈앞의 우마이야 장병들이 칼과 창으로 위협하자 겁에 질려 자이드를 따르지 않았다. 결국 자이드는 수십 명의 추종자만을 거느리고 우마이야군과 맞서 싸우다가 화살 하나가 이마에 관통하면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추종자들에 의해 쿠파 외곽에 비밀리에 묻혔지만 나중에 우마이야군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머리는 칼리파 히샴에게 보내졌고 몸통은 십자가에 못박혀 3년간 방치되었다. 그 후 743년 히샴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왈리드 2세의 명령에 따라 시신이 비로소 수습되어 화장된 뒤 유프라테스 강에 뿌려졌다.

한편, 총독들은 히샴의 피지배층에 대한 지즈야 부과 정책을 적극적으로 따랐는데, 특히 북아프리카의 지배자 비쉬르 이븐 소판이 극심한 수탈을 일삼았다. 이에 분노한 베르베르인들은 740년 카와리즈파 인사인 마이사르 알 마사리의 통솔하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탕헤르를 공략했다. 741년 우마이야군이 바그두라 전투에서 참패한 뒤 반란의 불길은 급속도로 번졌고, 한때 알안달루스와 북아프리카 대부분이 카와리즈파의 수중에 넘어갔다.

히샴은 시리아의 최정예부대를 북아프리카로 보내고 이집트 총독 한드할라 이븐 사프완 알 칼비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다. 한드왈라는 알 카른 전투와 알 아스남 전투에서 대규모 격전을 치른 끝에 수많은 베르베르인들을 죽이고[14] 북아프리카 반란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히샴은 발지 이븐 비슈르를 알안달루스로 파견하여 베르베르 반란군을 마저 섬멸하도록 했다.

그래서 반란이 어느정도 진압되었지만 시리아인들이 알안달루스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권력을 장악하려 들자, 현지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시리아군과 알안달루스 무슬림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에 한드할라는 743년 5월 사촌 아부 알 카타르 이븐 다라르 알 칼비를 알안달루스의 새 총독으로 파견하여 양 세력을 화해시키고 질서를 재정비하게 했다. 알 칼비는 임무를 완수하고 알안달루스에 남기를 원하는 시리아인들을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에 정착시켰다. 이리하여 반란은 수습되었지만, 모로코는 끝내 재점령하지 못했다.

이렇듯 내란이 각지에서 발발했지만, 히샴은 우마이야 왕조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이슬람 중심 정책을 강화했다. 741년 비무슬림의 공직 취임을 금지했는데, 갓 개종한 마왈리들에게도 이러한 제약이 따르는 폐단이 발생하는 등 사회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8세기까지만 해도 무슬림 인구는 우마이야 제국 전체 인구의 10%를 상회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차별 정책으로 인한 분노를 수습하는 건 매우 힘들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바스 가문의 하쉬미야 세력은 각종 쉬아, 마왈리, 비무슬림들을 결집시켜 719년부터 비밀리에 혁명을 준비했다.

2.9. 멸망

743년 2월 8일,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도 우마이야 제국을 구하고자 고군분투했던 칼리파 히샴이 붕어하고 왈리드 2세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는 야지드 2세처럼 향락에 빠져 제국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아 인망을 일찌감치 잃어버렸다. 급기야 노예 후궁인 나와르에게 자기 대신 예배를 인도하게 해 무슬림들의 질타를 받았다. 카와리즈파는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쿠파를 장악한 뒤 이라크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여기에 시아파마저 가담할 기미가 보이자, 암군 왈리드 2세는 시아파를 회유하기 위해 지난날 선대 히샴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진 뒤 방치되었던 자이드 이븐 알리의 유해를 수습하여 화장한 뒤 유프라테스 강에 뿌렸고, 자이드의 아들 아히야 이븐 자이드를 석방했다. 그러나 이라크 총독 나스르는 아히야가 이라크에 접근하자 도주 중이라고 믿고 체포하려 들었다가 아히야의 추종자들에게 격퇴되었다. 아히야는 이라크로 가는 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동쪽의 호라산으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피살당했다.

744년 초, 왈리드 2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명장 술라이만 이븐 히샴을 체포하여 감옥에 수감했다. 이에 분노한 이들은 칼리파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이 할리드 이븐 아브드 알라에게 접근하여 함께 하자고 제안했지만, 할리드는 이를 거부하고 왈리드 2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왈리드 2세는 격분하여 음모자들을 모조리 죽였지만, 고변자인 할리드 역시 칼리파 암살 음모에 가담했을 거라고 의심해 유수프 벤 오마르를 시켜 가혹한 고문을 가해 죽였다. 이에 우마이야 왕족들마저 왈리드 2세에게 등을 돌렸다. 744년 7월 17일, 사촌인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가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의 알 아그다프 요새에 왈리드 2세가 머무는 틈을 타 군대를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마르완은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술라이만 이븐 히샴을 석방시킨 뒤 왈리드 2세가 머물고 있었던 알 아그다프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칼리파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피살당했다.

그 후 야지드 3세가 반란의 주동자인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의 추대로 칼리파에 등극했지만, 찬탈 방식으로 등극했기에 민심이 곱지 않았다. 게다가 폐주 왈리드 2세의 급여 인상을 취소해 "안 나퀴스"(an-Naqis: 감소자)라는, 그리 좋지 않은 별명으로 불렸다. 얼마 후 홈스 주민들이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통치자 알 아바스 이븐 알 왈리드를 축출하고, 주변 도시들에 편지를 보내 왈리드 2세의 아들 중 장남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하며, 그들이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면 슈라를 소집해 가장 가치가 있는 자를 선택하자고 촉구했다. 이에 야지드 3세는 말로 설득해보려 했지만 홈스 주민들이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자 무력으로 응징했다.

그러나 내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왈리드 2세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명망높은 이슬람 학자를 칼리파로 세우려 했다가 홈스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단했다. 다만 우르둔은 야지드 3세를 인정할 수 없다며 버텼으나 술라이만 이븐 히샴의 군대가 주변 영지를 약탈하기 시작하자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 항복했다. 744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카와리즈파가 이라크에서 반란을 일으켜 모술을 포위하여 주민들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받은 뒤 쿠르디스탄 산악 지대의 샤라주르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농성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마르완 2세는 왈리드 2세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자지라(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이동한 뒤 살해당한 칼리파의 원수를 갚겠다며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군대 내에 있었던 예멘인들은 시리아인들과 맞서기 싫어 밤중에 진영을 떠났다. 그러다가 야지드 3세로부터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자지라 등 3개 주의 총독직을 한꺼번에 주겠다는 제안을 담긴 편지를 받자, 마르완 2세는 마음을 바꿔 야지드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호라산의 상황 역시 총독 나스르 이븐 사야르의 가혹한 지즈야 수탈로 인해 민심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병사들에게 지급해야 할 봉급을 갈취하고 예멘인들에겐 아예 지급하지 않는 조치로 인해 군심마저 흔들렸다. 이때 예멘인의 우두머리였던 유다야 이븐 알리 알 키르마니가 예멘 병사들의 대표로서 나스르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나스르의 북부 아랍인 측근들은 유다야를 당장 체포해 처형하라고 요청했지만, 나스르는 상황이 너무 악화될 것을 우려해 거절하고 단지 메르브 성채에 가두었다. 하지만 유다야는 20일만에 탈출한 뒤 호라산에 은신하던 카와리즈파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아트로파테네에서도 칼리파 야지드 3세에 대항하는 반란이 발발했다.

이렇듯 제국 각지에서 반란이 발발하고 있었던 744년 10월 4일, 야지드 3세는 뇌종양으로 붕어했다. 그는 죽기 전에 동생 이브라힘 이븐 알 왈리드에게 칼리파 직위를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745년 1월 마르완 2세가 반란을 일으켜 이브라힘을 몰아내고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마르완 2세는 반우마이야로 돌아버린 홈스를 공격하여 10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함락시켰다. 이후 술라이만 이븐 히샴이 이끄는 반란군 역시 격파했다. 이에 술라이만은 이라크에서 반란을 일으켜 쿠파와 모술을 공략한 알 다하크 이븐 카이스 알 샤이바니가 이끄는 카와리즈파와 합류했다. 마르완 2세는 이들을 진압하러 출전하여 카프르 투사에서 맞붙었다. 첫 번째 전투는 승패를 내지 못한 채 끝났지만, 그 와중에 알 다하크가 전사했다. 마르완 2세는 카와리즈파가 지도자의 사망으로 흔들리는 중이리라고 예상하여 전장에 '사면의 깃발'을 세우도록 했다. 그러나 카와리즈파는 끝까지 싸우기로 다짐하고 새로운 지도자로 알 카이바리를 선출했다.

카와리즈파는 새 지도자의 지도 아래 적을 향해 결사적으로 돌격했다. 그들은 적진에 침입하여 칼리파의 천막을 무너뜨렸고, 마르완 2세는 급히 달아났다. 카이바리는 다 이겼다고 판단하며 칼리파의 카펫에 앉았다. 그러나 튀르크계 하자르와의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마르완 2세의 우마이야군 병사들은 본진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은채 전열을 재정비한 뒤, 마르완 2세의 아들 압둘라의 지휘하에 본진을 약탈 중이던 카와리즈파 반란군을 몰아붙였다. 압둘라는 카와리즈파와 싸우는 자에겐 자유를 주겠다고 외쳤는데, 진영에 남겨졌던 노예 3~4천 명이 이에 응해 카와리즈파를 향해 사력을 다해 항전했다. 이로 인해 카와리즈파는 막심한 손실을 입고 도주했으며, 수령인 알 카이바리는 전사했다. 전장에서 12 km 떨어진 지점까지 도망쳤던 마르완 2세는 뒤늦게 승리 소식을 접하자 군대에 돌아와서 자기 없이도 용맹하게 싸운 장병들을 칭송했다.

그러나 카와리즈파는 계속 항전하기로 결의하고 샤라반 이븐 압둘 아지즈를 새 지휘관으로 세웠다. 술라이만 이븐 히샴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샤라반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그러면서 지역 주민들의 지원에 의존할 수 있는 모술로 후퇴하라고 조언했다. 카와리즈파는 이 조언에 따라 모술로 이동했고, 마르완 2세는 모술로 진군해 여섯 달 동안 포위공격을 퍼부었다. 그 후 야지드 이븐 우마르가 이끄는 우마이야군 분견대가 쿠파를 공략하고 모술로 와서 마르완 2세와 합세하자, 카와리즈파는 이대로 가면 꼼짝없이 몰살당하리라고 판단한 후, 어둠이 깔린 틈을 타 모든 재산을 버려둔 채 모술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들이 도망쳤다는 걸 알게 된 모술 주민들은 마르완 2세에게 항복하며 자신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했고, 마르완 2세는 기꺼이 받아줬다.

샤라반은 모술을 탈출한 뒤 샤라수르로 이동했다가 하마단으로 후퇴했다. 이후 술라이만 이븐 히샴과 병력을 나누어 각기 움직였으나 747년 봄 추격대에게 각개격파되었다. 술라이만은 체포된 후 호라산이나 하란의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고, 이후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샤라반도 오만이나 시지스탄으로 도피한 후 역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리하여 카와리즈파의 반란을 완전히 토벌한 마르완 2세는 이제 누구도 우마이야 왕조를 위협하지 못하리라 여기고 다마스쿠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집트에서 그에게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사실 이집트는 초기엔 마르완 2세의 집권을 용인했다. 콥트교 신자이자 이집트 총독이었던 하프스 이븐 알 왈리드는 히샴 사후 칼리파가 등극할 때마다 다른 지역에서 반란이 속출한 것과는 달리 역대 칼리파들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이라크의 반란 진압에 나서야 했던 마르완 2세는 하프스가 다른 마음을 먹고 반란을 일으킬 걸 우려해 745년 하프스를 폐위시키고 하산 이븐 아티야를 새 총독으로 임명했다. 하프스는 해임을 침착하게 받아들였지만, 콥트교 신자가 주류였던 이집트군은 반발했다. 결국 하산 이븐 아티야는 그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이집트에서 달아났다. 마르완 2세는 당시 이라크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기에 이집트에 병력을 따로 보낼 겨를이 없어서 하프스의 재집권을 용인했다. 하지만 반란 진압 후에는 이집트의 반란을 토벌하겠다고 선언하고 이집트로 진격했으나 쉽사리 승부를 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지역에서 반란이 빗발쳤다. 747년 호라산에서 라마단 기간(5월 16일~6월 14일) 동안 수많은 군중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집결한 틈을 타, 아부 알 아바스, 아부 무슬림 등이 시아파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호라산을 지배했던 총독 나스르 이븐 사야르가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당시 85세의 고령인데다 중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748년 11월 9일 라이에서 사망했다. 나스르의 사후 호라산의 우마이야군은 와해되었고, 아바스 반란군은 호라산 전역을 장악했다. 그 후 반란군은 749년 봄까지 이란을 석권한 뒤 이라크로 진격하여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749년 11월 28일, 쿠파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 반란군은 아부 알 아바스를 새 칼리파로 선출했다.

이집트에서 콥트파 반란군을 상대로 고전하던 마르완 2세는 동방에서 벌어진 사태를 전해듣자 군대를 돌려 이라크로 향했다. 그리고 750년 1월 25일, 티그리스 강 북부 지류인 대 자브 강변에서 아부 무슬림이 이끄는 아바스 반란군과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300여 명에 달하는 우마이야 왕족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고, 마르완 2세는 수도 다마스쿠스로 피신했지만 시민들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팔레스타인, 요르단을 거쳐 이집트로 피신한 뒤 파이윰 오아시스를 근거지로 아바스군에 저항했지만 750년 8월 6일, 붙잡힌 뒤 처형되었다. 마르완 2세의 수급은 이라크의 쿠파로 옮겨져서 공개 효수되었다. 그의 아들 압둘라는 동아프리카의 에리트레아 지역으로 피신해 반아바스 저항을 이어갔지만 몇 달 만에 전사했다. 이리하여 전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했다.

3. 후우마이야 왕조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바스 왕조를 세운 아부 알 아바스는 화해와 용서의 연회를 위장하여 살아남아 있었던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들을 불러들인 후, 급습하여 모두 학살했다[15]. 하지만 제10대 칼리파 히샴의 손자였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알 안달루스로 도망쳐 코르도바에서 에미르를 칭하며 우마이야 왕조의 계승을 선언했다. 이를 후우마이야 왕조라고 한다.

제8대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치세에 정식으로 칼리파를 칭하고 후우마이야 왕조는 최전성기에 도달했다. 하지만 아브드 알 라흐만 3세 사후, 11세기에 이르러 황권과 국력이 쇠퇴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알 안달루스 전역이 여러 소국(타이파)으로 분열되었다가 1031년 마침내 멸망하면서 우마이야 왕조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4. 건축과 예술

파일:왈리드 2세 2.jpg
요르단 동부에 위치한 카스르 아므라 궁전의 프레스코 벽화. 동로마(비잔티움)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파일:터키 팔레스타인.jpg파일:우마이야 터키 팔레스타인.jpg
아리하히샴 궁전에서 출토된 석상들
파일:다마스쿠스 보물고2.jpg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에 지어진 모스크[16]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지해 우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람, 동물 등을 닮은 형체를 제작, 묘사하는 것조차 피하려하는 훗날의 이슬람[17]과 달리, 이 시절의 이슬람은 사람의 모습을 그림으로 묘사하기까지는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18].

제정일치 대제국의 절대군주가 된 우마이야 왕조의 역대 칼리파들은 화려한 궁전 외에도 오아시스에 호화로운 별장을 지었고, 사치스럽고 문란한 생활을 즐겼다. 이들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문화와 풍습을 받아들였고, 전제적이고 화려한 생활방식 또한 흡수했다. 이런 태도들은 독실한 이슬람 신자들에게 규탄받았고, 안그래도 1•2피트나 때 행했던 학살과 성지 메카에 대한 파괴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신망을 더 추락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호라산의 아바스 가문에게 불평분자들이 모이는 빌미를 제공했다.

5.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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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알 무스탄지드 알 무타와킬 2세 알 무스탐식 알 무타와킬 3세
제72대2
아바스 왕조
제73대2
아바스 왕조
제74대
오스만 왕조
제75대
오스만 왕조
알 무스탐식 알 무타와킬 3세 셀림 1세 쉴레이만 1세
제76대
오스만 왕조
제77대
오스만 왕조
제78대
오스만 왕조
제79대
오스만 왕조
셀림 2세 무라트 3세 메흐메트 3세 아흐메트 1세
제80대
오스만 왕조
제81대
오스만 왕조
제80대2
오스만 왕조
제82대
오스만 왕조
무스타파 1세 오스만 2세 무스타파 1세 무라트 4세
제83대
오스만 왕조
제84대
오스만 왕조
제85대
오스만 왕조
제86대
오스만 왕조
이브라힘 1세 메흐메트 4세 쉴레이만 2세 아흐메트 2세
제87대
오스만 왕조
제88대
오스만 왕조
제89대
오스만 왕조
제90대
오스만 왕조
무스타파 2세 아흐메트 3세 마흐무트 1세 오스만 3세
제91대
오스만 왕조
제92대
오스만 왕조
제93대
오스만 왕조
제94대
오스만 왕조
무스타파 3세 압뒬하미트 1세 셀림 3세 무스타파 4세
제95대
오스만 왕조
제96대
오스만 왕조
제97대
오스만 왕조
제98대
오스만 왕조
마흐무트 2세 압뒬메지트 1세 압뒬아지즈 무라트 5세
제99대
오스만 왕조
제100대
오스만 왕조
제101대
오스만 왕조
제102대
오스만 왕조
압뒬하미트 2세 메흐메트 5세 메흐메트 6세 압뒬메지트 2세
^^ 1 :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지만 하산도 잠깐 동안이지만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
대수 이름 재위기간 비고
1대 무아위야 1세 661~680 1차 피트나에서 승리한 이후, 우마이야 제국이 이프리키야(튀니지, 리비아)로 팽창했다. 하지만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는 패배했다.
2대 야지드 1세 680~683 카르발라 참극이 일어났다.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가 반란을 일으켜 2차 피트나가 발발했다.
3대 무아위야 2세 683~684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의 세력이 이집트, 아라비아 반도, 이라크, 시리아 동부에 이르게 되었다.
4대 마르완 1세 684~685 마르완 왕조가 개창되었다.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5대 아브드 알 말리크 685~705 제2차 피트나가 종식되고, 타바르카 전투에서의 승리로 마그레브가 정복되어 우마이야 왕조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6대 왈리드 1세 705~715 과달레테 전투를 시작으로 이베리아 반도가 정복되었다.
7대 술라이만 715~717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패배하여 우마이야 왕조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8대 우마르 2세 717~720 아랍인과 비아랍인의 차별을 철폐하는 파격적인 개혁이 시도되었다.
9대 야지드 2세 720~724 사치와 향락, 그리고 폭정으로 인해 우마이야 왕조가 쇠락하게 되었다.
10대 히샴 724~743 왕조 중흥의 노력이 있었지만 프랑크에서의 투르 푸아티에 전투, 동로마와의 아크로이논 전투, 트란스옥시아나에서의 목마름의 하루 등 우마이야 왕조의 유명한 패전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11대 왈리드 2세 743~744 사치와 폭정으로 인해 제국 각지에서 여러 번의 반우마이야 반란이 일어났고, 내전의 조짐을 보였다.
12대 야지드 3세 744
13대 이브라힘 이븐 알 왈리드 744
14대 마르완 2세 744~750 계속되던 내전을 정리하고 제국을 일시적으로 통합했으나 아바스 왕조의 초대 칼리파 아부 알 아바스와의 대 자브 강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했다(3차 피트나 혹은 아바스 혁명).
우마이야 왕조와 후우마이야 왕조의 계보도


[1] 하얀색 한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당나라 시대를 다룬 역사서인 《구당서》에 백의대식(白衣大食)이라고 언급되었다.[2] 붉은색이 초기 이슬람 제국, 주황색이 정통 칼리파 시대에 정복한 영토, 노란색이 우마이야 왕조가 정복한 영토[3] 한국어 발음 : 앗다울라툴 우마위야[4] 한국어 발음 : 알할리파툴 우마위야[5] 한국어 발음 : 알우마위윤[6] 반면 아바스 왕조(압바스 왕조)의 경우에는 영어 명칭이 Abbasid Dynasty, Abbasid Caliphate인데, '아바시드'로 오역되지 않고 아바스 왕조로 번역되었다. 유사 사례로 셀레우코스 제국을 '셀루시드' 왕조로 표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편이다.[7] 우마이야 제국에서 가장 먼 두 지점의 거리는 8,700km에 달하는데, 이는 현대 러시아의 가장 먼 두 지점 7,900km보다 더 멀다. 거기다 러시아는 인구가 희박한 시베리아와 극동으로 수월하게 진출할 수 있었지만, 우마이야 왕조가 정복한 지역은 수백, 수천년에 걸쳐 개발되어 이미 사람이 바글바글하던 땅이었다. 전성기 이슬람 제국의 국력을 잘 보여주는 부분.[8] '신앙의 지휘관'. 칼리파의 전통적인 명칭이었다.[9] 앞서 야지드 1세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에게 힘을 합쳐 다마스쿠스로 쳐들어가자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다.[10] 당시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에 의해 메카에 억류되어 있었다.[11] 이베리아 반도와 인도~중앙아시아 일대의 초록색 영역이 왈리드 1세 당시 확장한 영역이다.[12] 예언자 무함마드가 소유한 야자수 숲으로, 무함마드는 딸 파티마가 자기에게 유산으로 물려달라는 요구에 "내가 소유한 것은 공동체 전체의 것이다"라며 거절했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의 사유지가 되었다.[13] 결과적으로 기독교 세계와의 대규모 전투 2개의 패퇴로, 더이상 확장할수 없게되어 제국의 힘은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한다.[14] 이슬람 기록에 따르면 12만 명에서 18만 명에 달하는 베르베르인이 알 아스남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15] 이때 아부 알 아바스는 연회에 와서 음악을 연주하던 악사들이 학살의 참상에 놀라 연주를 멈추자, 아직 연회는 끝나지 않았으니 계속 음악을 연주하라고 윽박질렀고 그래서 악사들이 연주를 계속하는 가운데 우마이야 왕족들은 하나둘씩 죽어갔다고 전해진다.[16] 사진 좌측에 있는 금칠된 보물고는 엄밀히 말하면 9세기 아바스 왕조 시기의 건물이다. 그 곳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대부분 우마이야 시대의 것이거나 그대로 후대에 보수한 것이다[17] 페르시아 세밀화나 무굴 제국의 회화를 보면 후대에도 인물화를 많이 남기긴 했다.[18]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조각상, 그림은 물론이고 아이들 인형조차 우상으로 여겨질까 꺼린다. 터키같이 세속주의를 표방하고, 세속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이슬람 주류 국가들은 이런 경향이 그래도 없는 편이다(터키는 국교가 없다). 참고로 이렇게 우상숭배를 극도로 피하려는 이슬람의 성향은, 이슬람 문화권의 미(美)적 활동과 예술에 크게 영향을 끼쳐 이슬람 서예아라베스크가 등장해, 발달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라베스크'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