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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반도에서의 리키아 |
1. 개요
리키아어 | 𐊗𐊕𐊐𐊎𐊆𐊖 |
그리스어 | Λυκία |
영어 | Lycia |
아나톨리아 반도 남서부의 옛 지명. 호메로스의 일리야드에서 트로이의 동맹으로 묘사될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기원전 2세기부터 수세기 간 리키아 연맹을 이루어 로마 제국 하에서 자치를 유지했다. 각 도시의 대표들이 합치하는 리키아 연맹 체제는 후일 미국 건국 세력의 모델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산지와 바다가 어우러진 리키아에는 중심지였던 크산투스를 비롯해 레툰, 미라, 피나라, 파타라, 키브라 등 여러 고대 도시 유적들이 남아있어 관광 수요가 높다. 특히 리키아식 암벽 무덤과 비석형 석관 무덤 등 독특한 무덤 양식이 유명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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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만 (카우노스)의 절벽 무덤
기원전 15–14세기부터 루카로 기록되었고, 루위인들이 살았다. 호메로스는 일리야드에서 트로이의 편에 선 사르페돈의 용맹한 리키아 병사들을 묘사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일대의 원래 지명은 밀야스 혹은 솔리모스였고, 주민들은 밀야이라 불렸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두 아들 미노스와 사르페돈은 크레타 왕위를 두고 다투었는데, 패배한 후자가 밀야스에 정착했다 한다. 이후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판디온 2세의 아들 리코스가 형 아이게오스와의 계승 분쟁에서 패하여 정착했고, 리코스에서 루카 및 리키아 지명이 유래되었다 한다. 역사적으로 히타이트 제국의 해체 후, 리키아는 (히타이트 계열은 아니지만) 신히타이트 국가 중 하나로 이어졌다.
2.1. 페르시아 제국령
기원전 470년 경의 리키아 귀족을 묘사한 벽화
기원전 546년, 키루스 2세가 보낸 하르파고스는 카리아를 무혈 접수했지만, 리키아의 크산토스에서는 수비대가 전원 전사할 때까지 결사 항전하였다. 이후 나머지 리키아 도시들은 항복하였고, 크산토스는 타도시들의 리키아 인들이 정착해 재건되었다. 아케메네스 제국령이 된 이래로 일대의 주요 언어는 루위어에서 페르시아어로 바뀌었고, 알로페 (Ἀλόπη)로도 불리기도 했다. 기원전 5세기 들어 리키아 도시들은 무역으로 크게 번영했고, 아케메네스 제국 하에서 사트라프 (총독)도 배치되지 않는 등 고도의 자치를 누렸다. 대신 한타와티라 불린 군주가 페르시아의 제후로써 통치했고, 이러한 리키아 왕국은 크산토스를 수도로 삼았다. 일부 이란계, 대부분 현지 출신이던 한타와티들은 반란의 조짐이 보이면 토벌하여 이란으로 보냈다. 일례로 다리우스 1세 시기 페르세폴리스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리키아 인들이 기록되었다.[1]
아테네와의 동맹 기조를 유지한 쿠프릴리 (재위 기원전 480 ~ 440년)
페르시아 지배기 크산토스 국왕이 리키아를 대표하는 군주로 군림했다. 페르시아 전쟁 시기 키베르니스코스 휘하의 리키아 함대는 살라미스 해전 당시 페르시아 편에 참전했고, 이때 키베르니스코스가 전사하자 케지가가 계승했다. 페르시아 전쟁 후, 기원전 470년 아테네 장군 키몬의 원정 당시 리키아는 그의 설득으로 델로스 동맹에 가담했다.[2] 다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아테네가 약화되자 테멜레소스 및 파셀리스를 제외한 도시들은 동맹을 탈퇴했다. 기원전 429년, 아테네 장군 멜레산데르가 무력으로 리키아의 동맹 재가입을 시도했으나 크산토스 왕 케리가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리키아는 재차 페르시아 령이 되었고, 사트라프가 설치되었으나 자치는 유지되었다. 기원전 380년경 즉위한 페리클레스의 치세에는 리키아 서부가 페르시아의 직할령이 되어 있었기에 그는 동부만을 통치했다. 페리클레스는 사트라프들의 반란에 적극 가담했다가 패하여 해임되었고, 기원전 360년경 리키아는 페르시아의 충실한 속국인 카리아 왕국령이 되었다. 카리아 국왕 마우솔로스는 아마 리키아의 석관묘에서 마우솔로스 영묘의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헬레니즘기
리미라의 프톨레마이온
기원전 334년 리키아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손쉽게 정복되었고, 이후 네아르코스가 리키아 및 팜필리아 사트라프로 봉해졌다. 디아도코이 시기인 기원전 304년, 리키아는 안티고노스가 장악했다가 기원전 301년 그를 죽인 리시마코스의 것이 되었다. 기원전 281년 리시마코스의 사후에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리키아의 도시 리미라가 켈트인의 침공을 받자 구원했고, 이에 주민들은 그를 기념하는 프톨레마이온을 세웠다. (기원전 270년) 헬레니즘기를 거치며 리키아의 주요 언어는 현지 리키아어 및 페르시아어에서 그리스어로 대체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 하에 안정을 누리던 리키아는 기원전 200년, 안티오코스 3세의 셀레우코스 왕조령이 되었다가 기원전 188년 로마령이 되었다.
키비라의 스타디온
마그네시아 전투 후 로마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리키아와 카리아를 로마의 동맹국인 로도스 왕국에 주었다. 기원전 181년, 갈라티아 원정에 나선 로마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는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2세와 함께 리키아 일대에서 병력과 자금을 수탈하며 진군했다. 로마군이 리키아의 서북부인 키비라에 이르자, 현지 참주 모아게테스는 약탈을 면하는 대가로 15 탈렌트 납부를 청하였다. 하지만 거절당하자 그는 헤어진 옷을 입고 로마 군영으로 향했는데, 만리우스가 500 탈렌트를 요구하자 사정하여 100 탈렌트 납부로 마무리지었다. 로도스 지배 하에서 리키아 인들은 기존 셀레우코스 지배기와 달리 억압적인 지배에 시달린다며 로마 원로원에 호소했다. 이에 로마 사절이 로도스에 리키아를 선물로 준 것이 아니라 동등한 지위로써 관리를 맡긴 것이라 경고하자, 로도스 인들은 페르가몬 측이 리키아 주민들을 선동한다며 불평했다 한다. 기원전 169년, 3차 마케도니아 전쟁 후 로도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로마는 카리아와 리키아를 자치령으로 삼았다.
2.3. 리키아 연맹
리키아 도시들
이때부터 2세기 간 리키아는 리카이온 시스테마라 불리는 리키아 연맹으로 편성되었다. 23개 도시로 이루어진 연맹은 대도시 3표, 중간도시 2표, 소도시 1표의 형태로 대표자들이 모여 사안을 결정했다. 전쟁 결정권은 로마에 귀속되어 없던 것을 빼면 독자적인 행정과 사법권을 행사하였다. 6개 대도시는 크산투스, 파타라, 피나라, 올림포스, 미라, 틀로스였다.
1) 로마의 적을 돕거나 영토 통과를 허락하지 않기
2) 로마 역시 리키아의 적을 돕거나 영토 통과를 허락하지 않기
3) 상호 방위 조약
4) 공동 결정으로 조항 추가 및 삭제 가능
ㅡ 기원전 168년 리키아-로마 협정
2) 로마 역시 리키아의 적을 돕거나 영토 통과를 허락하지 않기
3) 상호 방위 조약
4) 공동 결정으로 조항 추가 및 삭제 가능
ㅡ 기원전 168년 리키아-로마 협정
파타라의 회의당 (불레우테리온)
미트리다테스 전쟁 시에 리키아 연맹은 로마와 동맹을 유지했다. 기원전 81년,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나선 로마 장군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는 키비라의 참주를 폐위했다.
1) 상호 우정
2) 각자 적에 대한 중립
3) 상호 방위 조약
4) 밀수범에 대한 상호 처벌
5) 상호 치외법권 적용
6) 치외법권은 현지 법원에서 적용
7) 포로 및 전리품은 조건 없이 반환
8) 리키아 영토 주권 확인
9) 상호 조약 준수, 합의 하에 수정 가능
ㅡ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리키아 연맹 간의 9개조 협정
2) 각자 적에 대한 중립
3) 상호 방위 조약
4) 밀수범에 대한 상호 처벌
5) 상호 치외법권 적용
6) 치외법권은 현지 법원에서 적용
7) 포로 및 전리품은 조건 없이 반환
8) 리키아 영토 주권 확인
9) 상호 조약 준수, 합의 하에 수정 가능
ㅡ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리키아 연맹 간의 9개조 협정
서기 4년,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르메니아 원정에서 부상을 입은 후 리키아에서 사망하였다.
2.4. 로마 제국기
피나라의 극장 유적
레툰 3신전 유적
서기 43년, 리키아에서 로마인들이 살해되는 등 불온 기류가 나타나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리키아를 병합하여 팜필리아 속주에 편입시켰다. (혹은 리키아 속주를 신설) 다만 리키아 연맹의 자치는 이어졌고, 리키아 도시들은 팍스 로마나 시기 안정을 누리며 번영했다. 서기 74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리키아-팜필리아 속주를 신설하였다.
2.5. 고대 이후
카라쾨이 유령 마을
동로마 제국기 리키아와 팜필리아는 카라비시아노이 해군의 거점이었고, 727년 그가 해체된 후에는 카리아와 함께 키비르하이오타이 테마에 편성되었다. 1차 대전 직후 일대는 이탈리아령에 편성되었다가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복하였다. 그리고 2천년 이상 유지되던 리키아의 그리스어 사용 인구는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으로 이주되어 페티예 인근의 카라쾨이 등의 유령 마을들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