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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u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Titus Flavius Vespasianus |
출생 | 9년 11월 17일 |
로마 제국 팔라크리나이 | |
사망 | 79년 6월 23일 (향년 69세) |
로마 제국 아쿠아에 쿠틸리아에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69년 7월 1일 ~ 79년 6월 23일 (10년) | |
전임자 | 비텔리우스 |
후임자 | 티투스 |
부모 | 아버지: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어머니: 베스파시아 폴라 |
배우자 | 대 도미틸라, 카에니스 |
자녀 |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소 도미틸라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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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9대 황제.네로 황제 사후에 벌어진 내전인 네 황제의 해의 최후의 승자였고, 두 번째 세습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건자로, 오늘날 콜로세움으로 잘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극장[1] 건설을 명령한 것으로 유명하다.
출생지는 이탈리아 사비니 지역의 레아테(리에티)였으며, 최초의 기사계급 출신 로마 황제였다. 네로 황제의 자살 이후 세 명의 황제가 난립하며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69년 공식적으로 황제에 등극했다. 황제로서의 능력은 뛰어났는데 제위 계승에 대한 법률을 제정해 이전까지의 로마 제정의 세습체제를 확고히 굳히고 서기 2세기에 펼쳐진 팍스 로마나의 기반을 만든 명군으로 칭송받고 있다.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2.1.1. 출생과 가문 이야기
베스파시아누스는 AD 9년 이탈리아 레아테 근교의 팔라크리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사비니 지방의 레아테 근처의 작은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았던 기사계급(부유층)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 집안의 가업은 징세와 경매, 고리대금업이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사채, 추심, 압류를 전문으로 하는 제3금융권인 셈이라 돈은 많았지만 사회적인 평판이 굉장히 나빴다. 그의 조부였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페트로는 경매업자였고, 부친이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는 세금징수원을 지내다가 고리대금업자를 지낸 세리업자 집안 이었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형이었던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성공은 당시 부유층 사이에서도 존경받지 못하는 가문 출신이 개인 능력과 훌륭한 인품, 성실성만으로 편견을 깬 것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플라비우스 가문은 '금발머리'에서 유래한 평민 성씨였는데, 속된 말로 "어디서 굴러먹다가 급부상한 집안"으로 평가받았다. 실제로 플라비우스 왕조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절을 살았던 수에토니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로마인에게 있어 생소한 무명의 가문에 불과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세간의 평가처럼 베스파시아누스 형제가 기용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제2대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 제3대 임페라토르 가이우스 이전까지는 가문의 일원 중 단 한 명의 공직자도 배출하지 못한 성씨였다.
그나마 이 가문에서 이름이 있었던 사람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할아버지였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페트로 정도였는데, 이 역시 손자인 베스파시아누스가 고위직에 오르면서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정도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조부 티투스 플라비우스 페트로는 평범한 레아테 시민으로 태어나 무슨 일을 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그저그런 사내였다고 한다. 그는 공화정 말기의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군에서 백인대장으로 복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에 관해 수에토니우스는 조사 결과, 페트로는 백인대장으로 근무하지 않았고 자원 보충병으로 싸웠다고 한다. 페트로는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카이사르의 관용으로 특별사면을 명령받아 명예제대 형식으로 목숨을 건져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그는 고향에서 코사 출신의 테르툴라라는 꽤 넉넉한 집안 출신의 여성과 결혼했다고 하며, 사비니와 그 근처에서 로마인들로부터 멸시받는 세금징수원과 경매업자에 종사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버지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는 대를 이어 세금징수원의 길을 걸었는데, 다른 세금징수원들과는 달리 상당히 양심적이고 정직한 세리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부친은 아시아 속주에서 세금징수원을 거쳐 세관 감독까지 지냈다. 이후 그는 퇴직한 후 라이티아 속주[2]에서 고리대금업에 종사했다. 이때 사비누스는 같은 직군에 종사한 다른 이들과는 달리, 사기를 쳐서 세금을 가로채거나 고리대를 덧붙이는 악행을 벌이지는 않았다. 따라서 아시아 속주에서는 사비누스의 정직함과 성실성을 높이 평가한 이곳 시민들이 친히
"정직한 세리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라는 문구까지 적은 동상도 만들어줬고, 헬베티족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면서도 세무사 노릇을 했다고 한다. 또 그는 로마인과 속주민들로부터 "더러운 일", "비열하고 추접한 일"로 비난받는 직업을 두루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문과 자녀들이 지금 일보다 더 훌륭하고 존경받는 직업을 갖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보다 신분이 훌륭한, 고향 근처의 도시 누르시아의 명문가 출신의 처녀와 결혼했다. 그녀가 바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어머니였던 베스파시아 폴라였는데, 그녀의 아버지[3]였던 베스파시우스 폴리오는 제국군의 군단 대대장을 3번이나 지내고, 로마군 병영 행정책임자까지 지낸 전형적인 '존경받는' 기사계급 출신 관료였다.[4] 베스파시아누스의 부친 사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어린 시절, 헬베티족의 땅인 갈리아에서 근무 중 객사했다.플라비우스 가문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조부때부터 돈과 관련된 일에 종사했고, 부친 대에 이르러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다. 하지만 대를 이어 종사한 직업이 로마 사회에서 그 평판이 최악인 세리, 고리대금업, 경매업이었던 탓에, 많은 돈을 모았어도 세간의 존경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산이 상당히 많아, 베스파시아누스의 생가는 사비니 일대에 과수원과 경작지 등을 갖춘 장원을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나름 유복했고, 할머니쪽과 어머니쪽 집안도 코사와 누르시아 내에서 부유했던데다가 이들 지역에도 비슷한 규모의 집이 있었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어린 시절 그를 돌본 이는 코사에 살고 있었던 친할머니 테르툴라였다. 이런 이유로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이후, 할머니와 함께 지낸 코사 내 시골집을 그대로 보존케하고, 할머니가 물려준 은잔을 축일이나 휴일에 사용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2.1.2. 출세를 하다
평판이야 어쨌든 돈은 많이 벌었던 집안에서 태어난 베스파시아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는 모국어인 라틴어 외에도, 당시 교양인의 척도 중 하나였던 그리스어 역시 상당한 수준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코사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하며, 가정교육을 받았다가 이후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됐다고 한다. 이 시기, 형 사비누스는 말 그대로 집안의 자랑이었는데, 베스파시아누스가 성년식 직전일 무렵 하필이면 친가와 외가 양가 최초로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는 영광을 누렸다.이 시기 베스파시아누스는 어머니 베스파시아 폴라에게 매일같이 "네놈은 네 형의 시종 노릇이나 해라!"고 놀림받으며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참다못한 베스파시아누스는 페렌티움 출신 기사계급 가문의 딸이었던 도미틸라와 결혼한 이후, 36년에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트라키아 속주에 있는 로마군 장교로 입대해 복무했으며, 그제서야 베스파시아 폴라는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는 훗날 본인의 고백처럼 "폭이 넓고 자주빛 줄무늬가 있는 토가를 걸치기 싫었다"고 다짐했어도 형 사비누스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게 됐다. 이때가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고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가 갓 즉위한 때인 37년인데,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먼저 공직에 몸담고 있던 형 플라비우스 사비누스[5]를 따라 자연스레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조부, 부친이 모두 돈과 관련된 일에 종사한 까닭에 일찍부터 재무와 관련된 직무 이해도가 상당히 높았고, 성격이 워낙 꼼꼼해서 복무지였던 크레타 섬과 키레네에서 훌륭한 공적 경험을 쌓았다. 이후 39년 조영관(안찰관)에 추천받아 이 관직을 지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실제 재무와 군무 모두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선보였는데, 당시 원로원은 그의 출신 가문이 이름없고 세리업에 종사한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맨처음 추천을 통해 출마한 조영관 선거에서 그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럼에도 당시 원로원과 가이우스 황제 사이는 양측의 끝없는 견제로 알력다툼이 일었고, 가이우스 황제는 황제권 강화와 원로원 견제를 위해 측근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터라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젊은 황제의 추천 아래 본격적으로 출세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가이우스 황제는 가문의 평판이 좋지 않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출세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줬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재수 끝에 조영관을 지낸 뒤, 서기 40년 가장 빨리 법무관에 올랐다. 이는 기사계급 출신 중 평이 안 좋은 징세업과 고리대금업 집안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형 사비누스 이상으로 이른 출세였는데, 더 대단한 것은 황제의 추천 덕분에 법무관 당선도 가장 빨랐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원로원 입성의 기회를 얻게 됐다. 이런 이유로 베스파시아누스는 별 볼 일 없는 가문 태생임에도 자신에게 기회를 준 젊은 가이우스 황제를 적극 지지했다.[6] 그리고 이런 그의 태도처럼 변덕스러운 면이 많은 가이우스 황제도 여러 부분에서 베스파시아누스를 괜찮게 생각했다. 가이우스는 꼼꼼한데다 성실하고, 유머 감각이 풍부하면서도 황제와 황실에게 진심으로 헌신한 베스파시아누스를 좋게 여겼다고 한다.
이런 배경과 이유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에 온 이후, 공개석상에서 "가이우스 황제의 게르마니아 원정을 기념하고 그의 승리를 위한 기념일은 당연하다"고 대놓고 언급할 정도로 황제를 적극 지지했다. 그의 칼리굴라를 향한 그 충성심은 끝이 없었는데, 그럴수록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좋게 생각했다. 하지만 법무관이 끝난 직후인 41년 1월, 베스파시아누스를 총애한 칼리굴라가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그를 따르는 20여명에게 암살됐다. 이후 근위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칼리굴라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가 옹립돼 황제에 올랐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원로원 회의 중 "억울하게 살해당한 가이우스 황제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며 그 충정을 드러냈고, 원로원이나 암살범들이 시해당한 황제의 유해에 해를 가하면 안 되며 이를 시도하는 것은 반역 중의 반역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한 법령 제정까지 건의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 발언을 할 당시 원로원은 공화정 복귀 선언 논의를 하고 있었고, 신참자에 불과한 그가 회의 중 이런 발언을 한 것은 보통 배짱이 아니라면 하기 힘든 작심발언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황숙 클라우디우스가 클레멘스를 위시한 근위대의 지지 아래 즉위했다. 그는 24시간도 되지 않아 모든 혼란을 수습하고, 근위대를 완벽히 장악한 다음 원로원에 출석했다.
이 사건 이후, 베스파시아누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로부터 가이우스 황제의 측근이며 친황제파로 눈도장을 제대로 찍게 된다. 따라서 갓 즉위한 클라우디우스의 해방노예 참모 3인방 중 한 명인 나르키수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의 신임받는 해방노예 여성 카이니스의 천거를 받게 된다. 그 결과, 베스파시아누스는 여러 인사들과 달리 황실의 적극적 추천 아래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게르마니아에 주둔 중인 제2군단의 군단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이 시기,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실의 해방노예 카이니스와 인연을 맺어 카이니스가 죽을 때까지 사실상 부부로 지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아래에서 무수한 행정, 군사적 경험들을 쌓았으며, 특유의 성실함과 꼼꼼함 그리고 공직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보인 충성심 등을 두 황제에게 인정받았다. 그래서 여러 공직을 거친 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원로원 귀족에 편입됐다. 이후에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장군으로 상당한 공적을 쌓으면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신임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네로 시대에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잠깐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왜냐하면 네로 치세 때 시 낭송회에서 직접 출연한 네로 황제가 시를 읊는 도중에 대놓고 졸아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베스파시아누스는 잠시 네로의 진노를 사 처형될뻔했지만 목숨을 겨우 건진 채 섬으로 유배됐다. 이때 그는 유배지에서 양봉으로 소일하기도 했다.[7] 하지만 이 사건 외에는 네로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아서,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재등용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능력을 인정받아 즉위 전까지 트라키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 이집트에 파견돼 공적을 쌓았다. 따라서 그는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신임 아래 계속 군부에 남아있었는데 네로 치세 말기에 유대 지역에서 종교적 민족주의 세력인 열심당에 의해 발생한 유대 독립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명장 코르불로 휘하의 시리아 속주로 파견됐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반란을 평정할 지휘관으로서 새로이 임명을 받고 유대땅으로 파견된 이후, 지략과 용맹성으로 유대 북부 갈릴레아 지역을 점령하게 되고 요셉이라는 유대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게 된다. 후에 로마로 들어가 시민권을 얻게 되는 요셉, 즉 로마인으로서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로마와 유대 간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양쪽의 공존을 모색하게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도움으로 유대를 무리없이 통치하였다. 물론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정치를 도운 요세푸스를 보호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여튼, 이 반란을 진압하던 중 내란이 일어나 네로가 자결하자 시리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8]와 로마의 동방 관리들, 동맹국 국왕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또한 비텔리우스에게 쌓인 원한을 풀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한 도나우 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로마에 입성해 비텔리우스를 죽이고 로마를 평정하여 베스파시아누스는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2.2. 내전 수습과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종결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네 황제의 해라고 불리는 네로 후기와 세 황제의 난립기로 인한 혼란과 국가 위신의 회복을 위해 진력하였다. 최대한 보복을 줄이는 방법으로 네로 자살 이후 터진 내전 치유와 제국 안정에 최선을 다했다.비텔리우스파의 난동으로 불타버린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복구하고 방만한 재정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국유지 재측량 작업으로 상당한 국고수입 증대를 이뤘다.[9][10] 재정수입의 증대 덕에 그의 아들들 대까지 콜로세움과 같은 공공 건축 사업을 원활히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허나 비텔리우스 형제와 아들을 제거한 뒤, 네로 시대의 피소 음모로 피해를 입고 갈바의 양아들이 됐다가 억울하게 피살된 피소 리키니아누스 문제를 재조사해 신원복구해주기 보다는 이를 이유 삼아 탄압하는 태도를 취해 이 부분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때 그는 오래된 명문 피소 가문의 남성들을 정치 공작을 통해 대거 처형, 추방하고 반대파가 될 귀족 가문들까지 싸잡아 원로원에서 내쫓는 등의 이해 못 할 정치적 숙청을 자행했다. 이 외에도 베스파시아누스 즉위에 도움을 준 장군들, 즉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도나우 군단장 프리무스를 반강제로 퇴역시키거나 정치공작을 통해 묘한 분위기를 조성해 은퇴시켰다. 이들은 자체 무력을 보유하고 즉위 과정에서 비텔리우스와의 내전을 대신 치러줬기 때문에 그대로 둘 경우 권신이 될 우려가 높아 숙청 자체는 불가피했고, 다른 황제 같으면 죽였을 것을 그나마 명예롭게 은퇴하는 식으로 추방한 것은 그나마 잘했다고 평가를 받는다. 이 숙청 작업은 근위대장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의 장남 티투스가 담당했는데, 이는 티투스가 즉위하기 전까지 인기가 형편없게 된 원인이 됐다. 아울러 티투스 즉위 후 이런 보복이 줄었다고 해도 후일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도미티아누스 시대가 되면 황제가 앞장서서 이 작업을 하면서 원로원과 황제 사이의 힘 대결 양상으로 확전된다.
어쨌든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위 이후 장남 티투스를 앞세워, 본인은 관용을 베푸는 방법으로 인기를 얻고 뒤로는 계속되는 명문 귀족 숙청 및 추방으로 권력 강화에 매진하며 내전 수습에 매진한다. 헌데 이런 비열한 정적 숙청 방법은 짧게 보면 기사계급 출신 신흥 황제 가문의 권력 기반 안정에는 도움이 됐음에도, 결과론적으로는 플라비우스 왕조의 종말로 연결됐다.
이 외에도 그는 비텔리우스 즉위 후 게르마니아에서 로마군 장교로 복무해온 게르만 족장 율리우스 키빌리스 주도로 터진 바타비아 반란, 오늘날 벨기에에서 시작돼 갈리아 북동부로 퍼져나간 켈트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주력했다. 이때 그는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에게 두 반란을 진압하라고 지휘권을 내렸는데 그는 1년만에 두 반란을 모두 진압했다.[11]
서방에 이어 동방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즉위 후, 후임으로 유대 전쟁을 총괄한 황제의 장남 티투스의 손에서 마무리되어갔다. 로마군을 이끌던 티투스는 유대 반란군을 거세게 밀어붙였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유대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 전쟁은 유대인들이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양측 모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학살이 자행되었고, 포로로 잡힌 유대인들은 처형되거나 로마로 끌려간다. 특히 로마에 저항한 본보기로 예루살렘 신전 등이 모두 약탈되고 생존자들은 노예로 팔렸다.
2.3. 원로원 개편과 내정 개혁
베스파시아누스는 한평생을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원로원과의 관계도 원만했으며, 반대파들을 억누르기보단 설득하며 국정을 이끌었다.그는 원로원과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상당히 노력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제정을 공식적인 제도로 만들고 공화정을 부인하면서 제국의 통치자는 황제이며 황제는 원로원보다 위에 있다며 선은 분명하게 그었다.
69년 처음 황제로 공표될 당시, 그는 두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직위를 내리는 제위계승법을 만들면서, 이런 그의 원로원 존중 태도를 확고히 보여주고 애매모호한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 직위를 명확히 규정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카피톨리누스 신전 내에 동판으로 법령을 새긴 뒤 이를 설치했다. 그 동판에는 명문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계보와 그 정통성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로 말한 뒤 브리타니쿠스를 그 마지막 직계로 언급하고 공적으로 탄핵된 네로를 제외하면서, 플라비우스 가의 정통성이 클라우디우스에서 나왔다고 명기됐다.
또 그는 원로원에서 현군의 예시로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를 언급했는데, 원로원과 사이가 껄끄러웠던 티베리우스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언급하고[12] 칼리굴라, 네로와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는 해당 황제가 기념식이 없어 언급하기 곤란해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13] 원로원의 체면이나 플라비우스 가문의 정통성을 이유로 제위를 계승한 적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14]
베스파시아누스는 감찰관 부임 후 기존 원로원의 위상과 자부심을 존중했지만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처럼 원로원을 서서히 약화시켜나갔다. 네로 사후 혼란기 동안 당시 원로원 수는 200명가량으로 줄어들었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본국과 속주 내에서 무려 800명의 인사들을 선별해 새로운 원로원 의원으로 충원하고, 그들을 원로원 귀족에 편입시켰다. 따라서 원로원은 70년 이후 사실상 베스파시아누스와 플리비우스 왕조에 협력적인 인사들로 자연스레 교체하는데, 과거 네로 시대에 중용받던 그리스와 소아시아 출신자들보다 그가 더 신경써준 지방은 세금을 부담하면서도 소외된 갈리아 남부와 서부, 히스파니아 일대였다.[15][16]
이처럼 원로원을 약화시킨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처럼 제국 행정부를 강화시켜나갔다. 이 조치는 내전을 치르면서 항구적인 행정을 위해 필요한 결정이었으며, 과거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시대동안 관료층을 서서히 차지하던 해방노예 출신들을 다시금 밀어내고 기사계급으로 채워넣는 조치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그는 과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근위대장과 근위대의 힘을 통해 정적을 솎아냈는데, 이 중책을 맡게 된 이는 후계자 티투스였다.
이런 내정 개혁 중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후세까지 큰 명성을 가져오게 한 개혁은 재무행정 분야였다. 클라우디우스 생전부터 황제에게 재무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던 사람답게 그는 네로의 사치와 내전기 혼란으로 바닥난 국고를 다시 채워나갔다. 본래부터 꼼꼼하고 검소한 사람답게 그는 공중화장실에 오줌세 등을 부과[17]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네로 시대 이후 박살난 나라살림을 재건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세수의 기본이 되는 인구, 재산 조사를 실시하면서 관료들의 부패와 뇌물 수수, 횡령을 적극 색출해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또한 공공지출을 대폭 삭감했다.[18] 하지만 속주들에게는 새로 만든 세금들을 적극적으로 부과했다. 속주세를 최대 2배나 인상하여 재정이 나아질 때까지 유지한 것이다. 돈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닌 만큼, 가장 만만한 게 속주세였다고 할 수 있다.
2.4. 군대개혁과 속주운영체제의 변화
내전을 치르는 동안, 베스파시아누스는 야전사령관, 임페라토르 자리 모두의 위치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로마군 내 속주 주둔병력들의 수행 역할을 개혁해야 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로마군 중 국경지대에서 일부 부대들에서 벌어진 군단병, 보조병 모집 관행을 폐지하고, 동족주의 경향이 강한 레누스, 다누비우스 일대 병력 내에는 과거 아우구스투스 시대처럼 본국 출신 이탈리아 혈통 장교들을 대거 배치했다. 이는 즉위 직후 게르마니아와 갈리아 내 독립움직임 당시 일부 병력의 동요가 있었던 사건이 그 계기였다. 따라서 그 움직임에 동조한 군단들을 군대 명부에서 삭제해 재편성한 조치와 이런 쇄신은 함께 진행됐다.다음으로 그는 69년 네로의 몰락 이후 이를 심화시킨 속주총독, 야전사령관들의 여러 군단 장악과 반란 위험성을 최소화시키는데 주력했다. 이 조치는 기존 사령관들을 소환하거나 은퇴 등을 유도해 숙청시키는 극단적 방법이 아닌, 갈수록 정밀화되는 서방 외적들을 막기 위한 전략적 판단에 맞춰 국방강화 정책으로 진행됐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는 반발 없이 이 어려운 작업을 사령관급 군부 인사들의 도움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로마군은 이전까지 항구적 군사기지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형태의 군단 주둔 방식에서 군사국경선에 따라 개별 군단 단위로 주둔하는 시스템으로 변화됐다.
아울러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군의 골머리를 앓게 만든 정규 군단병 모집 대상 문제도 발빠르게 해결했다. 로마와 이탈리아 내 본국 청년들은 클라우디우스 시대부터 높아진 교육 수준과 경제 향상, 복무지 환경 등을 이유로, 속주 군단에 지원하기 보다는 프라이토리아니에 지원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따라서 네로 치세 후반부터는 본국 출신 이탈리아인들의 속주 군단 입대 비율은 뚜렷하게 하락세를 타게 되는데,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는 서방 내 갈리아, 히스파니아 출신자들도 로마 정규군 모집 대상으로 입대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이는 오래전 로마령에 편입된 역사에도, 동방 내 그리스와 소아시아 일대에 비해 은근히 차별대우를 받는다고 느낀 소외된 이 지역 내 민심을 다독이는 또 다른 조치이기도 했다. 또 곡창지대인데다 백여년 간의 평화로 인구가 늘고, 로마시민권자 비율이 높았던 현실까지 감안해 내린 결정이었다.
군대개혁이나 관료제 재정비, 재정안정화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노력한 내정부분은 3세기 초반까지 진행되는 대대적인 속주정책과 라틴 권리 확대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범위했고 도시와 농촌에서 로마화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진행됐다.
따라서 그는 여러 속주 중 갈리아 남부를 시작으로 갈리아 서부와 히스파니아 일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으로 라틴 권리를 새롭게 부여했는데, 이는 네로 시대에 이르러 나타난 이 일대의 불만을 다독이는 조치이기도 했다. 즉,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출신 기사계급들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고, 그들을 귀족반열에 올려주는 조치처럼 라틴 권리 부여는 이런 측면까지 고려했다. 하지만 이런 측면을 고려했다고 해도, 대대적인 속주 내 라틴권리 부여 정책은 본국과 속주 간의 연계성까지 강화한 효과까지 있어 단순한 선심성 결정이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 치세 말에 이르게 되면, 이탈리아 동쪽의 달마티아 일대에도 라틴 권리를 부여됐고 이 흐름은 계속 확대됐다. 아울러 이렇게 라틴 권리가 부여된 속주들은 항구적인 로마시민권자 병력 자원과 세금 징수대상 확대 효과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 성공의 과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번영에 있어 큰 힘이 되었다.
2.5. 사망
79년 봄 베스파시아누스는 고된 직무를 지속해오다 캄파니아를 순시하던 도중에 열병에 걸려 쓰러진다. 그래서 로마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가 갈수록 악화되었고[19] 결국 그는 눈을 감았다. 이때 그의 나이 69세였다. 그가 쓰러질 당시 후계자 문제는 해결된 상태였기에 뒤는 이름이 똑같은 장남 티투스가 이어받았다.평소 촌철살인 농담을 즐기던 황제답게 임종 직전에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는데
"여보게, 내가 신이 되어가고 있는 거 같아."[20]
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았다. 이때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서서 죽어야 한다며 죽기 직전에 병상에서 억지로 일어나다가 시종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3. 여담
- 상당히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농담을 즐겨했던 사람이었고 죽는 순간까지 농담으로 모두의 슬픔을 멈추게 한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이는 황제가 된 이후의 습관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나온 특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는 모두를 웃게 만들 수 있었는데, 농담 수준은 야한 내용부터 아재개그, 자학개그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내전 중 아들 티투스에게 중요 명령을 편지로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농담을 적어 보냈다.
"고맙구나, 아들아. 네가 반기를 들지않고 나를 제위에 머물게 해주니."
베스파시아누스는 생애 첫 개선식 중 개선 행렬이 오래 계속되면서 주변이 지루해하자, 다음과 같이 농담을 하면서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다 늙어빠져서 개선식을 원했으니 이래도 싸지. 당연한 거 아닌가?"
따라서 수에토니우스는 이런 베스파시아누스를 저속하고 광대 같은 익살이라며 비난했는데,[21] 대개의 원로원 의원들이나 황제가 되기 전 그를 경험한 선대 황제들과 주변인들은 수준 높은 농담부터 익살스러운 이야기까지 재밌게 말하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솔직 담백하다고 생각했을 뿐 천박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 워낙 농담을 좋아한 사람인 만큼, 모국어인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로도 모두를 웃게 할 정도로 상황에 맞는 농담을 잘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리스어로 하는 농담은 그리스어 책에 나온 문구까지 자연스럽게 암송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리스어로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였다는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그리스어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증거이며,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은 교양인이라는 증거 중 하나다.
-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머 뿐만 아니라 촌철살인의 경구를 날리는데도 능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제정 철폐와 공화정 복고를 주장하는 민주주의파 그리스 철학자들이 면전에서 계속 황제는 폭군이며 독재자라고 욕하자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나는 짖는다는 이유로 개를 죽이지는 않소."
라고 쏘아붙였고 그 한마디에 그 자리에 있던 그리스 철학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주류 그리스 철학자들은 스스로 '개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천명한 디오게네스 이래 개처럼 가진 것 없이 세상에 냉소적인 삶을 산다고 자인하는 일명 '견유학파'였는데, 그 시점에서의 공화정 복고론은 이미 잃을게 많아서 진짜 개처럼 물지도 못하는 반쪽짜리들이 짖어대는 '개똥철학'일 뿐임을 지적한 것이다.
- 탈무드에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유대 반란 당시 벤 자카이란 이름의 랍비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와 황제가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작은 학교라도 좋으니 이를 세우고 그것만은 파괴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이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즉위한 뒤 예루살렘 전체를 파괴하되 벤 자카이와의 약속대로 조그마한 학교는 남겨두어서 유대인들의 전통과 지식을 지켜나갔다는 내용이다. 위의 요세푸스와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유대인들에겐 교육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때 벤 자카이는 포위된 성을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관에 숨어서 나왔다. 로마와의 협상을 반대하며 항전하던 강경파는 관을 들춰서 칼로 찔러보려 했으나 차마 랍비의 시신을 모욕할 순 없다며 그냥 보내줬고, 로마군의 경우 실제로 칼로 찔러보려 했으나 관을 가지고 온 제자들이 '당신들의 황제께서 돌아가셔도 이런 짓을 할 거요?'라고 반대해서 무사히 통과했다는 이야기.
- 돈 문제에 민감해 세간으로부터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탐욕스러운 것 같다"고 욕을 먹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총독으로 있으면서 군자금과 국고 문제로 한 행동 때문에 생긴 비판이었고, 즉위 후 국고 정상화를 위해 세금을 여기저기 붙이면서 얻은 오명에 가까웠다. 실제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위 전부터 정의롭고 관대하며 의리있는 사내로 유명했다. 이는 그를 법무관으로 추천해준 칼리굴라 암살 당시에도, 제위에 오른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는 후세대의 수에토니우스로부터 출세를 위해 함량미달인 황제에게 아부를 떤 것이라고 폄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수에토니우스의 폄하에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제위에 오른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본인이 한 말은 지켰고 자상한 면이 많았다. 따라서, 그는 내전 이후 생활이 팍팍해진 옛 동료들을 위해 수많은 소송들을 신속히 처리해줬다. 이는 정적들에게도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 외에는 비슷했다. 일례로 베스파시아누스는 비텔리우스의 딸이 결혼을 잘하도록 혼처를 구해 도와주고, 결혼 지참금까지 두둑히 챙겨줬다. 네로가 구멍낸 400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채우는 과정에서도 정적들을 반역죄로 고발해 재물을 한 푼도 뺏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비방과 욕설이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처럼 습관적이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이유로 계속되면 관용은 더 이상 없었다. 처벌받은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는 제 손으로 무덤을 판 탓에, 베스파시아누스를 비난하기 곤란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인내심이 부각된 측면이 강했다. 프리스쿠스는 다른 정적들과 달리,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비난이 지나쳤는데, 그 비난 방식 역시 인신공격 수준이 심하고 늘 반대를 위한 반대 뿐이었다. 이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만하면 그만해라"라고 경고를 여러 번 했다. 그럼에도 그는 황제가 자신을 처벌하지 않음을 알고 계속 신상 공격을 퍼붓고, 반대를 위한 반대로 꼬투리를 잡았다. 따라서 참다못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례적으로 프리스쿠스를 추방 후 처형하도록 했고, 진짜 이를 집행했다.
- 이렇듯 건전 재정에 집착한 황제여서 온갖 짠돌이 이미지와 관련된 일화가 많고, 본인도 스스로 그에 관련된 농담을 적극 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어떤 지방도시를 방문했는데, 아부하고 싶었던 지방관이 막대한 공금을 들여 자기 상을 세우겠다고 터를 잡아달라고 하자, 프로젝트를 당장 진행하라고 한 다음 손바닥을 내밀면서 이렇게 답했다.
"내 상을 세울 터는 여기다 잡으면 되네."
아첨하는 데 괜히 공금을 쓸 바에야 그 돈 나나 줘라고 한 것이다. 결국 후일 이 말을 소재로 한 고인드립을 당했다.- 세수 증대의 일환으로 공중변소에서 공짜로 오줌을 퍼다 정제해 양모 가공에 쓰던 섬유업자들에게 부과하던 오줌세(vectigal urinae)를 부활시켰다. 본래는 네로 황제가 만들었던 세금이었는데 재정을 탕진한 폭군이 황급히 급조한 망측스러운 세금을 부활시킨 것 때문인지,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이를 부끄럽게 여긴 아들 티투스가 찾아와서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냐고 따지자 금화를 한웅큼 꺼내들어 아들의 코에 들이밀면서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고, 티투스가 안 난다고 하자 "오줌세로 거둔 돈인데 말이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돈에는 냄새가 없다(Pecunia non olet)'이라는 라틴어 숙어로 남게 되었다.
- 개인적으로도 정말로 지출을 아까워했는지, 황제 체면 상 한턱 내려고 지갑을 열 때마다 꼭 우거지상을 하고 "이 몸이 쏘는 거야?"라고 한 마디씩 생색을 내는 버릇이 있어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고 한다.
- 디오 카시우스는 '그가 돈을 얻기 위해 남을 죽인 적은 없지만, 돈을 받는 대가로 남을 살려 준 적은 많다'는 미묘한 기록을 남겼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첩인 카이니스가 이런 사업에 관여했는데, 로마 사람들은 베스파시아누스가 막후에서 조종했을 거라고 믿었다고 한다.
4. 평가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평가는 그가 69년 내전과 유혈사태로 얼룩진 로마를 안정시키고, 70년부터 네로와 갈바, 비텔리우스가 저지른 실정을 수습한 것만으로도 당대 로마인들에게 과거 옥타비아누스의 악티움해전 승리 못지않다고 찬사를 받았다. 아울러 이 황제가 재위기간동안 벌인 일들은 아우구스투스 못지않게 광범위하고 로마의 1세기 중후반 ~ 2세기까지 그 연속성을 지속케했기에, 당대사가들과 근현대사가들은 이런 그를 제정 로마의 제2 창건자라고 했다.그러나 당대사람들의 일관된 이야기처럼, 베스파시아누스는 특별대우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본인 스스로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카리스마와 묘한 매력, 특별한 신망이 없다고 생각했다.[22] 그래서 혹자들은 베스파시아누스를 2세기 로마 제정 최고의 황금기를 열었던 명군, 오현제보다 훌륭한 진정한 현군이라고 더 높여 평가해준다.
그는 사상 최초로 수도 로마가 아닌 이탈리아 지방 출신의 황제였고, 이는 이후에 로마 황제의 출생지에 대한 로마 제국 백성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어 나중에 가면 속주 출신 황제들도 나올 정도가 되게 한 선구자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세리 집안의 차남으로서 로마 제국의 권부 최상층에 오르기 어려운 신분이었으나, 치밀함과 부지런함으로 자신의 신분을 끌어 올린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고, 제위 등극 자체도 개인적 야심을 앞세워 등장한 권력자도 아니었다.
모국의 다큐에서는 이 사람과 네로를 비교하면서 네로가 와인을 홀짝거리면서 오페라 관람을 하는 속물이라면, 베스파시아누스는 맥주를 들이키면서 축구 경기를 보는 건실한 서민적 남성이라고 했다. 확실히 점잔빼면서 고상한 취향을 가장하는 네로의 시를 듣다가 졸아버린다든가 재위 중에 축구장만 한 콜로세움을 착공한다든가 한 것을 보면 단순히 서민들에게 아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서민적인 취향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황제들은 돈이 궁하면 재정 마련 수단으로 정적을 역적으로 몰아 죽여서 재산을 몰수하는 악랄한 일석이조의 행동을 종종 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런 짓을 일절 하지 않아 칭찬을 들었다. 대신 재정적자 해결의 수단으로 여기저기에 온갖 간접세를 붙였다. 따라서 이런 그의 행동은 "지나치게 돈을 밝힌다"고 까였다. 이는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그의 장례식에도, 심지어 현대 이탈리아에서도 이름이 회자될 정도다. 공중변소의 오줌에까지 세금을 매기는 등 다소 치졸한 명목의 세금도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에게는 짠돌이 황제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사후에 베스파시아누스를 풍자하는 희곡이 상연되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장례비로 1천만 세스테르티우스[23]가 들어갔다고 하자 죽은 베스파시아누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차라리 그 중 1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미리 나한테 주고 내 몸은 그냥 테베레 강에 던져버리지 그랬어!"라고 절규하는 고인드립성 내용이었다.[24] 그럼에도 황제 티투스는 이 희곡이 상연에 대해서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차피 베스파시아누스가 그렇게 돈에 집착했던 것이 물욕이 많아서가 아니라 워낙 좋지 못했던 국가 재정을 복구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건 당시 로마인들이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풍자가 플라비우스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다. 물론 문자의 옥처럼 옛날 책에 나온 사소한 글귀 하나를 과대해석해 그 후손을 멸족시키는 등 피바람을 일으킨 권력자가 동서고금 통틀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하면 베스파시아누스나 티투스의 관용과 자제심을 낮게 평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특히 티투스는 상당히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유명한 황제였고, 아버지 스스로가 평생 자신의 인색함을 적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부단히 긍정적인 유머 소재로 삼아 온 탓인지 본인도 이에 익숙했다.
[1]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 Amphitheatrum Flavium[2] 오늘날 바이에른 지역의 일부와 스위스 동부[3]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외할아버지[4] 어떻게보면 3차 대대장까지 하고 참모로 예편했으니까 진급을 못했단 것이기도 한데, 사실 그때는 아직 귀족이 아니면 군단장 진급은 어려웠다.[5] 유능한 관료로 인정받아 AD47년 보결집정관을 지냈고, 집정관 퇴임 후에는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11년이나 지낸다.[6] 당연하지만 원로원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칼리굴라를 지지하고 우호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수에토니우스도 비슷했는데, 그는 자신이 전해들은 바를 토대로 예측하건데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무 이유 없이 아부를 했다며 출세를 위해 양심을 팔았다고 힐난했다.[7] 사형이나 다름없는 자살강요까지 받을 수도 있었던 위기를 구해준 것이 페트로니우스로 네로에게 "오르페우스는 하프 연주로 케르베로스를 잠들게 했는데, 폐하는 시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잠들게 했으니 이는 오르페우스의 업적과 맞먹는 것입니다"라고 살짝 야유가 섞인 칭찬으로 달래면서 네로의 분노를 풀어주어 베스파시아누스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8] 다만 베스파시아누스 즉위 전, 인지도나 공적 등을 비교할 때 네 황제의 해 시절 황제 후보로서 베스파시아누스보다는 무키아누스, 무키아누스보다는 코르불로가 좀 더 어울렸다(다만 코르불로는 이미 네로의 치세 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후였다). 그리고 타키투스는 이러한 점 때문에 무키아누스와 베스파시아누스가 굉장히 사이가 좋지 않았고 무키아누스가 베스파시아누스 즉위 후 안하무인이 되었다고 하였으나 이는 경쟁관계를 너무 확대해석한 것에 가깝다. 즉,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경쟁관계인 동시에 협력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는 시오노 나나미의 접근이 좀 더 타당할 것이다.[9] 그 과정에서 공중변소의 오줌에 세금을 물리기도 했다. 단, 오줌 누려면 돈 내고 누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모인 오줌을 수거해서 표백이나 세탁 등에 쓰는 업자들에게 오줌 사용료를 내라는 의미다. 이때 아들인 티투스가 이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는데 그의 앞에서 금화를 보여주며 '배뇨세금으로 만든 이 금화에 냄새가 나냐?'라고 한마디 했고 여기서 '돈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Pecunia non olet)'는 명언이 탄생했다고 한다.[10]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베스파시아노'라고 하면 '공중화장실'이라는 뜻이라고. 실제로 이탈리아어 사전에 vespasiano라고 찾아보면 '(남자용) 공중변소'라고 나온다.[11] 키빌리스의 반란은 초기에는 군단장 보쿨라는 전사, 군단장 루페르쿠스는 포로로 잡혀 살해당하는 등 고전했으나 결국 반란의 근거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을 탈환하여 진압했고 키빌리스는 로마 영토를 영원히 떠나는 조건으로 살려주었다. 벨기에에서 일어난 켈트족 반란의 경우, 일찍부터 로마화되고 난 이후부터 로마 주류사회로 편입되어가던 갈리아 속주 내 켈트인들의 무관심으로 호응도 크게 못 얻고 싱겁게 끝났다고 한다.[12] 티베리우스는 말년을 제외하곤 늘 원로원을 존중해줬지만, 양쪽의 관계는 티베리우스가 20대부터 항상 다투었기에 쌍방으로 냉담했다. 이런 이유로 후임황제들로서는 그 업적을 존중하면서도, 정작 티베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나 클라우디우스처럼 황제 이름을 대놓고 언급하는 것을 자제했다. 왜냐하면 이 황제가 생전 원로원에게 한 “스스로 노예가 될 준비를 한 인간들”이라는 말은 두고두고 회자된 망언으로 취급받았고, 백년이 지난 뒤에도 티베리우스처럼 하겠다는 말은 원로원을 대놓고 거수기처럼 취급하겠다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13] 칼리굴라가 이 경우에 해당됐다. 베스파시아누스 개인 입장으로는 그의 출세와 성공의 은인이었지만, 재위 기간도 4년 밖에 안되고 황제권 강화나 수도교 건설입안, 이탈리아 경제 부흥 계획 등 외에는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 언급하지 않은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다. 또 내전 직후, 새황제가 칼리굴라를 티베리우스처럼 원로원 앞에서 언급하면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처럼 원로원과 대립하겠다는 의미도 있기에, 정치적 부담도 상당했다.[14] 당시 원로원 입장에서 기억에서 잊어버리고 싶던 황제는 네로와 갈바, 비텔리우스였다. 이들은 원로원을 존중하면서도 무시했던 티베리우스나 냉담하고 변덕스러운 칼리굴라 같은 황제처럼 자신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비난받고 있었다. 따라서 원로원에게 금지어 그 자체로 평가받고 있는 이들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15] 과거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역시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출신들에게 동방 출신 못지 않게 원로원을 개방했지만, 카이사르처럼 아예 이쪽 출신들에게 귀족 자리도 주고 그들이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고 느끼게 해준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두 황제였다.[16] 베스파시아누스의 차남이자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형과 다르게 그리스,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출신들에게 원로원이나 고위관직을 많이 하사했다.[17] 오줌세의 직접적인 과세 대상은 양모 가공업자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양모는 특유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암모니아로 세척하는데, 지금이야 정제 암모니아를 쓰지만 당시에는 암모니아가 포함된 오줌을 사용했다. 로마의 양모 가공업자들은 공공화장실의 오줌을 공짜로 이용했고, 이런 양모업자들의 무임승차에 대해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감하게 오줌세를 거뒀다. 이에 양모업자들은 크게 반발했고, 티투스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아버지에게 이를 따졌는데 이때 베스파시아누스가 은화 한 줌을 아들 코앞에 쥐어 주며 "자 맡아봐라. 오줌 냄새가 나느냐?" 라고 촌철살인급의 대답을 하며 해프닝으로 반발을 수습했다고 한다. 그래도 원체 반발이 심했던만큼 그가 죽고 난 뒤 티투스 치세 때에 그를 비판하는 연극이 오르기도 했었으나, 관대한 티투스는 그냥 웃고 넘어갔다.[18] 이는 불필요한 공공지출에 관한 내용일 뿐 오히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실 경비, 사회 인프라, 교육 분야에서의 공공지출은 확대했다.[19] 특히 설사를 심하게 하였다. 사실 말년에 가면 건강이 갈수록 나빠진터라 측근들의 조언을 받고 고향에 가서 온천욕을 하며 요양까지 했지만 여기서도 업무를 한터라 나아지지 않고 더 악화되었다.[20]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고대 로마 황제들은 대부분 사후 신으로 추앙되었다. 예외는 내전에서 패한 이들(베스파시아누스 이전의 내란기의 3명)이거나 동시대의 원로원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은 이들, 그리고 생전에 자신이 거부한 경우(티베리우스 외)가 있었다.[21] 베스파시아누스를 비난한 수에토니우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파면되고 처벌된 범죄혐의는 그의 사비나 황후에 대한 불경과 황후를 향한 뒷담화와 야하고 저질적인 비열한 언행이 하드리아누스에게 걸렸기 때문이다.[22] 장남 티투스 역시 이런 입장을 견지하여 시종일관 겸손했다. 반면 차남 도미티아누스는 칼리굴라를 연상시킬 정도로 개인 숭배와 자기신격화로 일관해 그 평가가 원로원에게 박했다.[23] 현대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물론 아무리 황제의 장례식이라도 실제로 이 정도의 돈이 들었을 리는 없고 풍자를 위한 과장이라 봐야 할 것이다.[24] 고대 로마에서 죽은 자의 시신을 테베레 강에 버린다는 건 부관참시를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