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28대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 GORDIANVS III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피우스 (Marcus Antonius Gordianus Pius) |
출생 | 225년 1월 29일 |
로마 제국 로마 카일리우스 언덕 내의 폼페이우스 저택 | |
사망 | 244년 2월 (향년 19세) |
메소포타미아 키르케시움 근처(암살 또는 전사)[1]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38년 4월 22일 ~ 244년 2월 11일 (5년 296일) | |
전임자 |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
후임자 | 필리푸스 아라부스 |
부모 | 아버지 : 유니우스 리키니우스 발부스(의심[2]) 어머니 :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
배우자 | 트란퀼리나 |
가족 | 고르디아누스 1세(외조부) 고르디아누스 2세(외삼촌, 양부)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친척) |
종교 | 로마 다신교 |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칭호 | |
제호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카이사르 즉위 당시)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 (즉위 후 공식 제호로 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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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섯 황제의 해에 등장한 로마 제국의 제28대 황제. 외조부, 외삼촌과 함께 세습왕조 고르디우스 왕조(Gordian Dynasty, 238~244)[3]로 묶여 서술되기도 한다.238년 3월 아프리카 속주에서 벌어진 라티푼디움 농장주들의 대규모 반란에 편승하며 황제를 칭한 아프리카 속주 총독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아들인 전직 법무관 고르디아누스 2세가 자신들과 사이가 껄끄러운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를 일방적으로 숙청하려고 하다가 카펠리아누스가 이끈 군대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후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의 요청으로 폐위당한 뒤 국가의 적으로 선포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푸피에누스, 발비누스가 추대했다. 이에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의 클리엔테스와 고르디우스 가문 사람들, 지지자들이 로마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군대가 아퀼레이아를 포위 공격해, 이 도시만 함락되면, 상황은 최악으로 끝날 위기로 몰린다. 이런 가운데,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은 서둘러 아퀼레이아를 지원하고자, 고르디우스 가문 측에서 폭동 중지 조건으로 내세운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카이사르 임명을 내세웠다. 이렇게 카이사르 직에 오른 고르디아누스 3세는 이후 막시미누스가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손에 안정된 로마 제국이 곧 두 황제의 권력 다툼으로 다시 시끄러워지자, 프라이토리아니 일부를 선동해,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붙잡아 고문하고 잔혹하게 죽였다. 이후, 고르디아누스 3세는 다시 혼란한 분위기가 조성된 틈을 노려, 원로원을 설득해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고르디아누스 3세가 유일한 황제가 됐을 당시, 고작 13살밖에 안 됐다. 하여 즉위 직후에는 어머니, 이후에는 근위대장이자 장인인 티메시테우스의 보좌를 받아, 황제자문회의와 근위대를 중심으로 국정을 꾸렸다. 그러나 즉위 후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사비니아누스의 반란, 지진이 터지는 과정에서 보인 무책임한 일 등을 연이어 벌이며 그 능력을 의심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북방에선 게르만족이 침공했고 동방에선 사산조 페르시아가 동방 속주들을 위협했다. 따라서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게 되는데, 원정군을 이끌던 중 티메시테우스가 돌연사하면서 의지할 곳을 잃어버렸고, 원정 도중 새 근위대장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19살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다고 그동안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발견된 페르시아 측 기록이나 관련 유적, 유물 등을 통해 이 모든 주장은 거짓말로 밝혀졌다. 고르디아누스 3세 관련 비문과 페르시아 측 기록, 유적 등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3세는 당시 근위대장 필리푸스를 비롯한 수뇌부의 간언에도 수도 크테시폰까지 로마군이 밀고 왔다가, 격렬한 전투 중 낙마해 전사하고, 시신이 페르시아 기병대에게 짓밞히는 굴욕을 당했다가, 근위대장 필리푸스 등의 분전으로 겨우 황제 시신이 수습됐다. 따라서 사산왕조 페르시아에서 만든 부조에 샤푸르 1세 말에 짓밞혀 엎드려 죽은 채 깔려 있는 형태로 조각되고, 관련 승리를 적은 비문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관련 증거가 많아, 과거처럼 제위를 노린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피살됐다고 단순 설명하는 학자들은 현저히 줄고 있는 추세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고르디아누스 3세는 225년 1월 20일 로마 7언덕 중 하나인 카일리우스 언덕에 위치한 유서 깊은 저택[4]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미상이며, 카이사르 칭호를 받은 뒤 취한 이름은 외조부, 외삼촌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피우스(Marcus Antonius Gordianus Pius)로 택했다. 단독황제 즉위 후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ntonius Gordianus Pius Augustus)이다.허구의 이야기가 가득한 《로마황제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친아버지는 로마의 이름난 명문가로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여동생이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양손녀의 손자 발부스이고 외가는 트라야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피를 이은 고르디아누스 가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르디아누스 일가와 고르디아누스 3세 모두 친가와 외가 모두 족보 위조가 있을 정도로 그 가계는 의심받고 있고, 오늘날에는 조작된 기록으로 불린다. 하지만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스스로 트라야누스와 셈프로니우스 가문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했고 그들이 족보위조를 했어도, 이 집안이 신참자답지 않게 문예지원 등을 많이 해준 탓에 민중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먼저 그의 외가 고르디아누스 가문은 오늘날 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신흥귀족 가문으로, 세베루스 왕조 시절 외조부 고르디아누스 1세 대에 이르러 원로원에 최초 입성했다.[5] 그러나 신흥가문임에도 이 집안은 외조부가 엘라가발루스 총애 아래 집정관,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을 지냈고, 외삼촌은 가문의 막대한 재력, 엘라가발루스의 후원 아래 세습의석을 차지한 권세가였다. 외조부의 조카 혹은 친척인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 역시 원로원 의원이었고, 외조부 형제인 고르디우스는 엘라가발루스의 연인이며 이 당시 권세가인 히에로클레스와 각별한 사이였다.
이런 외가의 배경 때문에,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신참자로 원로원에 들어온 뒤 엘라가발루스, 히에로클레스, 율리아 마이사 지지 아래 귀족 반열에 오른 고르디아누스 가문은 이 무렵 로마 최고 수준의 재력, 꾸준한 문예후원을 통해 구축한 클리엔테스 인맥을 기반으로 웬만한 원로원 귀족 가문보다도 부유하고 명망 높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가 태어날 무렵, 외가 고르디아누스 가문은 최고급 대리석 원기둥 200개가 원형으로 회랑을 이루어 둘러진 별장 보르가타 고르디아니를 비롯해, 첼리오 언덕 내의 폼페이우스 저택 등을 소유했고, 최근 발굴에서 드러나듯이 근거지인 옛 프리기아 일대에도 상당한 규모의 개인영지, 가문 공동묘지 등을 가지고 있었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아버지는 한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발부스 가 태생의 안토니누스 왕가 방계 황족 유니우스 리키니우스 발부스라고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근현대 학자들에게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 믿을 수 없는 거짓기록에서 주장된, 발부스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의 여동생의 외손자로 2세기 당시 집정관과 아프리카 총독 등을 역임한 퀸투스 푸덴스의 아들이다. 그러나 이 발부스가 친부라는 고대기록의 주장은 여러 학자들에게 여러 증거상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그 발부스와 그 가계의 비문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 외가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발부스가 친부라는 주장은 위조된 기록으로 강력하게 평가받고 있다.[6]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3세의 아버지는 루키우스 베루스 여동생의 손자 발부스가 아니더라도, 세베루스 왕조 시대때 로마 상류층에 속한 원로원 의원 중 한 명 내지 세베루스 왕조 시절의 신흥귀족 가문 자제였던 것은 확실하다. 익명의 원로원 의원 내지 상류층 자제였던 고르디아누스 3세의 아버지는 이름이나 경력 등은 알려진 바 없지만, 238년 이전에 죽었다.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3세가 친가 쪽 이름 대신 외가의 이름을 거의 취했고 이름도 외조부에서 많이 따온 풀네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봤을때, 아마도 양친의 가계 중 부와 권력을 갖춘 외가의 힘이 친가보다 더 컸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는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 고르디아누스 2세의 여동생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이다. 그녀는 마이키아 파우스티나라는 이름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진짜 이름이라고 하는데, 전부 이 주장들은 현대 사가들의 연구로 파기되거나 무시받고 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 이름은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유일하며, 마이키아 파우스티나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허구의 이름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즉,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는 한때 오현제 중 트라야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피를 이은 집안 태생으로 소개되면서, 그녀의 남편이 발부스라는 것은 전부 거짓이며 고르디아누스 3세의 가계는 오현제 중 그 누구의 후손도 아니다.
이런 배경처럼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카이사르 등극 이전까지의 13년의 삶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먼저 그는 고대기록과 달리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후손이 아니었음에도 로마 원로원 내에서 최고 수준의 부를 가진 신흥귀족 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상술했듯, 외가는 옛 프리기아에서 발원한 신흥귀족임에도, 세베루스 왕조 시절부터 당시 로마에서 최고 수준으로 워낙 부유하고 명망 높았던 고르디아누스 가였으며, 친아버지 역시 원로원 의원 내지 상류층 자제였다. 또한 고르디아누스 3세는 본인 소유의 재산이 로마 최고 수준이었다. 이는 최소 원로원 의원이었던 친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비롯해, 외가의 유일무이한 상속자였던 외삼촌 고르디아누스 2세에게 정식 결혼으로 얻은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7] 따라서 그는 238년 전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을 유일한 남자혈육이자 상속자였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음에도, 어린 나이부터 유년기의 삶은 당대 상류층 자제 중에서도 최고였다.
2.2. 황제
2.2.1. 즉위
238년 3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맡고 있던 외할아버지(고르디아누스 1세)가 현지 주민들의 추대를 받아들여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물론 이는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일방적 주장이었지만, 이 소식을 전달받은 원로원은 이들 부자를 내켜하지 않았음[8]에도 진짜 막시미누스를 미워했기 때문에 일단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즉위를 인정했다. 이날 대리낭독을 한 율리우스 실라누스 주재 아래, 원로원은 전직집정관 고르디아누스 1세와 이 사람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이런 소식은 곧바로 제국 각지에 국가 공식문서로 통보됐다. 당연히 게르만족들과 전투를 위해 변방에 나가있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도 이 결의안이 알려졌는데, 10여일 만에 이 소식을 알게된 황제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반역자들에게 협력한 원로원과 로마를 끝장내겠다며 군을 규합해 본국 이탈리아로 밀고 내려왔다.
한달 여 뒤인 그해 4월, 누미디아 속주 총독 카펠리아누스가 원로원의 고르디아누스 부자 황제 승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총독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맡은 뒤, 함께 현지 농장주들의 집단소송을 처리했던 사람이기도 했는데, 오래 전부터 고르디아누스 가문과 사적으로 서로 원한이 깊은 견원지간이었다.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아프리카 속주에서 미리 준비된 황제복과 악세사리를 착용했고, 황제 선포 후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면서 로마 내 몇몇 권력가들에게 도움과 지지를 요청했다. 또 두 사람은 서한을 통해 막시미누스 쪽에 가까운 인사임에도 원로원과 사이가 완만했던 카펠리아누스의 즉각 경질과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막시미누스 공적 선포와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인준 외에는 그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조치 이후, 누미디아 총독은 황제 속주라고 해도 같은 원로원 동료 의원 중 법률가이면서 야전사령관 경험 있는 사람들이 차지했고, 누미디아와 아프리카 속주 분리 조치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의 푸닉 지방 월권을 막기 위한 원로원과 로마 황제들의 상징적인 조치이기도 했다. 더욱이 카펠리아누스 해임은 같은 원로원 동료를 잘라내야 한다는 점에서 원로원 입장에게 무척 부담스러웠다. 허나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자신들과 사이가 나쁜 카펠리아누스를 쳐내달라고 계속 요구했고, 로비까지 벌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원로원의 의견을 묻는다면서 자기 부하를 새로운 누미디아 총독으로 보내 카펠리아누스에게 자리를 빼라고 협박했다. 이렇게 되니, 원로원은 군병력이 없다면 실패할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벌인 자살행위를 예상한 듯, 한발 빼고 사실상 물러난다. 그래서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발레리아누스 등 원로원 중진들은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에게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당신의 처벌과 경질을 요청했다. 이에 귀국을 권고하니 고민해달라"며 단순 권고 액션만 취한다. 어차피 자기들한테는 고르디아누스 부자 외의 후임황제 카드로 여럿 있으니, 두 황제의 요청을 사실상 무시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원로원 판단처럼 누미디아 총독은 황제를 자처한 고르디아누스 부자와 예전부터 서로 원한도 깊어 꺼림직하던 차에, 두사람이 자신에 대한 처벌, 교체를 요구했다고 원로원이 알리자 즉각 반응했다. 이 당시 카펠리아누스를 더 자극한 것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제국 전역에 공포된 원로원 포고문에 본인의 해임이 언급되지 않음에도, 일방적으로 후임자를 보내며 자리를 빼라고 요구한 사건이었다고 한다. 즉, 믿을 수 없는 고대기록처럼 그가 막시미누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오버하면서 그랬다고 한 것과는 상반된 진실인데,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이런 행동은 두 황제를 파멸로 몰고 갔다.
격노한 카펠리아누스는 깜냥도 아닌 후임자를 무시했고, 원로원의 뜻은 이해하지만 일단 그 권고를 불이행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원로원에게 승인받은 두 황제를 주민을 선동해 사태를 키운 반역자로 규정했으며, 로마 총독이며 원로원 의원으로서 국법과 총독에게 규정된 의무 규정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어떻게 보면 법률가이기도 한 이 사람 입장에선,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제 역할을 다했다는 면죄부를 깔아 놓고 내린 현실적인 행동이었다. 그래서 카펠리아누스 총독은 누미디아 주둔 병력을 이끌고 아프리카 속주의 카르타고로 진격해 공격을 가했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니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쪽은 누미디아 총독과 협상 테이블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 2세는 경비병력이나 다름없는 휘하 1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카르타고 시가전을 하면서 시간을 벌고자 노력했다. 그렇지만 카펠리아누스 본인의 지휘력과 경험도 풍부한데다, 누미디아 속주 주둔 병력은 베르베르인과의 오랜 전투 등으로 다져진 북아프리카 내 정예병력이었기 때문에, 애당초 이 싸움은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양군이 충돌한 직후, 어이없게 목숨을 잃었고 경비병들도 누미디아에 주둔 중인 로마군의 공격을 받자 녹아내렸다는 표현처럼 일순간 전멸했다. 한편, 아들의 전사 소식과 카펠리아누스의 입장을 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체포 전 허리띠로 목을 메는 방식으로 자살했다. 이후 카펠리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지지한 아프리카 속주를 약탈케하며, 자신의 원한을 풀었고, 이 사건 이후 원로원를 존중해 막시미누스에게 가담하지 않고 스스로 누미디아 총독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골치 아플 뻔한 문제가 해결되자 원로원은 막시미누스와 협상을 시도하다가, 포기한 뒤 반(反) 막시미누스 세력 규합을 위해 판을 다시 짠다. 그래서 오래된 이탈리아 세습귀족 출신의 원로원 의원들로 풍부한 경험과 많은 업적을 이룬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했다.
하지만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는 그 능력을 보았을 때, 황제가 될 자격이 있는 자들임에도 지나치게 공적이고 엄격한 탓에 인기가 진짜 없었다. 반면, 고르디아누스 가는 신흥귀족임에도 도서관 기증, 문예 후원 등으로 이미지가 좋아 인기가 많았고, 그들이 즉위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애당초 세금을 뜯어가듯 뺐던 트락스 탄핵인 터라 이미 팬덤화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로마 내 고르디아누스 일가 지지자들은 포로 로마노에서 평민들과 지지세를 모아 떼를 이뤘고, 그 무리는 원로원 회의장이 있던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향했다. 이후, 그들은 70대 고령의 요직을 두루 거친 두 전직집정관 출신의 새 황제들이 아닌 고르디아누스 일가의 유일한 남자혈육을 새 황제로 인정하라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그들은 국가위기 상황에서 “두 사람은 우리들이 원하는 황제도 아니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이다”며 이유를 든 뒤 막대기를 휘두르며 강하게 항의했다. 또 원로원으로 향하던 푸피에누스, 발비누스에게 돌을 던지고 협박을 하면서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이 무렵, 막시미누스는 로마를 끝장내겠다며 군을 규합한 뒤 이탈리아로 움직인 상황이라, 원로원과 두 황제는 막시미누스 트락스와의 일전을 서둘러 치르기 위해, 이런 항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자신들을 도울 20인 위원회 구성과 동시에 과격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협박하던 군중들을 달랠 방법으로, 어쩔 수 없이 13살에 불과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자신들이 있던 카파톨리누스로 불렀다.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가의 유일한 남자혈육을 제 3의 황제로 인정하고, 카이사르 직위를 줬다. 이후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가까스로 군중 무리의 협박에서 벗어나 로마 치안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시작으로 공동의 적 막시미누스에 맞서게 된다. 이때가 해를 넘긴 2월 초로, 이미 막시미누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본국 이탈리아 침공을 시작한 뒤 이탈리아 북부 최대의 항구도시 아퀼레이아 근처로 진군하고 있었다.
문무 모두에서 경험이 풍부한 푸피에누스는 촉박한 시간 속에서 이탈리아 내 방어병력을 모았다. 이후 북상해 아드리아 해를 면한 아퀼레이아 쪽에서 진영을 펼치고 방어전을 준비했고, 발비누스는 원로원과 함께 고르디아누스 일가 팬덤이 일으킨 혼란 등으로 시끄러워진 치안에 힘썼다.
238년 4월, 막시미누스는 아퀼레이아를 포위했음에도 함락시키지 못했고 보급품 관리 문제도 실패하면서 푸피에누스의 방어전에 완전히 말리며 고전했다. 이런 이유로 막시미누스 군대는 자신들이 황제에게 사기당했다고 불만을 터트렸고, 아퀼레이아 전투가 4주가 지났을 때 이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 그래서 트락스 부자는 막사 안에서 최측근 근위대장 등과 함께 제2 군단 파르티카 부대원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막시미누스와 그 아들의 머리는 제2군단 소속 병사들 손에 라벤나에서 전달됐고, 이를 받아든 푸피에누스는 판노니아 속주 주둔병력과 아퀼레이아 병력을 모아 화해시킨 뒤 로마 근교에서 해산시켰다. 이때 그는 그들에게 공을 치하하고, 많은 하사금을 지급한 뒤 그들을 평화롭게 주둔지와 이전까지 주재하던 지역으로 각각 돌려보냈다.
이후 푸피에누스는 국법에 따라 게르만호위대과 로마에서 함께 출발한 프라이토리아니와 귀환했는데, 민중들은 로마에 들어온 황제 일행에게 개선식을 떠올릴 만큼 열렬히 환호했다. 그렇지만 이때부터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권력 다툼을 시작했다. 애당초 두 황제는 훌륭한 경험과 오래된 귀족 출신이라는 공통분모 외에는 공통점이 적었고, 발비누스는 자신이 돋보여야 할 상황에서 푸피에누스만 민중들의 환호를 받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특히 그가 가장 불만을 품은 것은 푸피에누스가 자신보다 먼저 이름이 언급되고, 공문서와 승전 기념비에도 이름이 먼저 기재된 일이었다. 그래서 발비누스는 푸피에누스를 견제했고, 같은 명문 귀족이라고 해도 자신의 혈통이 더 훌륭하다며 푸피에누스와 그 가문을 은근슬쩍 까내렸다.
이는 푸피에누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자신보다 잘난 것이 없는 동료 황제가 자신을 비하하는 것 외에도 발비누스가 로마에 있는 동안 치안 안정조차 형편없이 한 일에 대해 불만이 상당했다. 따라서 막시미누스가 사라지자 칠십이 넘은 두 공동황제는 서로 권력 다툼을 벌였고, 이들의 대립은 황궁 안팎에서 매일 벌어졌는데 결국 두 황제 모두 자연스레 근위대 병사들에게 불만을 샀다. 다행히 푸피에누스는 근위대 불만을 먼저 깨닫고 이를 달래려고 했고, 발비누스에게 게르만 호위대대를 내줄 것을 동의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발비누스는 이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푸피에누스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며 자신들을 죽이러 들어온 근위대 병사들이 눈 앞에 닥칠 때까지 시비를 걸고 욕설을 퍼부었다. 따라서 238년 7월 29일 두 황제는 황궁 안에서 근위대 병사들에게 체포된 뒤, 심한 고문을 당하고 팔,다리가 잘린 상태에서 로마 시내를 끌려다니며 조롱받은 뒤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이렇게 근위대가 자신들의 병영 안에서 두 황제를 잔혹하게 고문하고 조리돌림 후 살해한 직후, 원로원은 위기를 직감했다. 따라서 그들은 어린 고르디아누스 3세가 로마 평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 쉽게 못 건들거라고 판단해 즉시 움직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주는데 도운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와 같은 야심가들이 재빨리 손을 써서 그에게 단독황제 자리를 줬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래서 그들은 근위대가 새 황제를 내세우기 전에 어린 고르디아누스 3세를 유일한 황제로 옹립했다. 그렇지만 이 당시 근위대 병사들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고, 일단 한 발 물러섰다. 분명한 점은 근위대는 13세밖에 안 된 소년 황제를 특별하게 여기거나 크게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 중 일부는 고르디아누스 가문에게 포섭됐고, 나머지는 고르디아누스 3세를 쉽게 반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어린 황제의 뒤에는 로마 민중들의 강력한 지지와 원로원이 있고, 그들에게는 마땅한 카드가 없었기 때문이다.
2.2.2. 어머니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원로원은 소년황제의 외조부, 외삼촌을 신격화시켜줬고, 빠르게 정국을 수습하고자했다. 이에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앞세운 고르디아누스 가문 지지세력은 자신들에게 로마 황제 자리를 준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에게 생애 두번째 집정관을 선사한다. 카라칼라가 살해당하기 전까지 권세를 누렸던 늙은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의 생애 첫 집정관 경력을 돕는 동료집정관이 되어 초기 제위 안정에 힘을 보탠다.고르디아누스 일가와 고르디아누스 3세를 절대적인 선으로 묘사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어린 고르디아누스 3세는 완벽했다. 성격 자체가 명랑하고 유쾌했고, 얼굴도 잘생겼으며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학문에도 관심이 많고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 민중들과 원로원, 관료들은 어린 소년 황제를 진심으로 좋아했으며, 이런 여론은 고르디아누스 3세가 19살의 나이에 사망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 달리 고르디아누스 3세는 즉위 당시,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13살 소년이었고, 이 소년을 앞세운 황제의 어머니와 일가 친척들의 악행은 여러 문제를 낳았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지극히 평범한 소년이었다. 하여 일부 사료에서는 기본적인 집무는 4세기 조작된 고대기록에서 마이키아 파우스티나로 불린, 어머니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대신했다고 나오는데, 이는 형식적인 방식이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어머니 고르디아나와 친척인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 같은 인사들을 제외하곤, 소년 황제를 도울 마땅한 책사 혹은 영리한 인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점이었다. 설상가상 고르디아누스 3세를 단독황제까지 올려준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마저 집정관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그 기록이 완전히 없다. 때문에 소년 황제는 본인의 어린 나이, 능력의 한계, 신흥귀족 가문인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역량 부족 등으로 단독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로마 권력을 장악할 수가 없는 처지와 비슷해진다. 따라서 원로원과 관료, 근위대장 등이 황제의 업무를 대리함에도 시작부터 서서히 불안함을 노출시킨다.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는 대략 201년생으로 추측되는데, 학자들은 고대기록에서 드러나진 않아도 상당히 똑똑하고 정치적 술수도 상당한 귀부인으로 추측한다. 그녀는 아들의 제호를 아버지, 오빠와 똑같이 잇게 하여, 이를 통해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지지를 유지했다. 또 238년 7월 말의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 살해에도 관여한 것으로 강하게 추정된다. 이에 대해 여러 학자들은 고르디아나가 과거 율리아 마이사처럼 막대한 재산과 원로원과 근위대 내 인맥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킨 집단을 포섭했다고 본다. 그 증거는 프라이토리아니라는 군사집단이 가진 성격과 그들의 전후 행보, 그리고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살해한 병사들이 엄청난 중죄를 저질렀음에도 정작 고르디아누스 3세 단독황제 등극 후 뚜렷한 처벌이 없었던 것 등이 거론된다.
그녀는 과거 율리아 마마이아와 달리 상당히 상식적이고 지나치게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고, 꽤 똑똑했다. 고르디아나는 원로원이 싫어할 행동을 자제했고, 여러 자리를 내주면서 그들을 자신들의 지지자로 포섭했다. 어린 아들을 도울 내각을 꾸리면서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내각을 구성시킨 율리아 마이사의 전례를 모방했다. 이런 이유로 고르디아누스 3세 내각의 실질적인 집무는 16명으로 구성될 황제자문회의를 중심으로, 근위대와 원로원이 차지했다. 황제의 모후는 아들을 도울 내각 책임자에게 근위대장 자리를 맡기기로 했다. 이렇게 되니 과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절처럼 근위대장 직을 가지게 될 사람은 울피아누스처럼 근위대와 원로원 모두를 손아귀에 넣고 실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는 매우 교활했고, 그 방식은 과거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보다 악랄해 여러 불만을 낳았다.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함께 집정관에 오른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숙청 사례가 대표적이었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는 소년 시절에 아르발 형제 사제단에 속한 동명이인 아버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를 따라 사제단 행사에 참여한 이로, 누구에게나 온화하고 당파적 색채가 적어, 모두에게 존경받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와 당파는 이 귀족을 이용했다가 살해했다. 이 사건에 관해, 독일 역사가 디네츠, 미국 역사가 갈리반 등은 당시 원로원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막아낸 푸피에누스를 불명예스럽게 죽인 이유,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가 원로원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분노를 막을 방패로 사용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분노하자, 고르디아누스 3세 당파와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타협책으로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를 갓 즉위한 고르디아누스 3세의 동료 집정관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이후,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는 이용가치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고르디아누스 3세 당파에게 살해됐다. 그래서 라오라트 같은 역사가 등은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카이사르 등극과 정변을 통한 단독황제 등극에 기여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가 다음해 정규집정관이 되었을 때, 이 사람의 동료 집정관으로 루키우스 라고니우스 베누스투스가 지명돼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이런 불만을 임시방편으로 막고자 한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의 꼼수로 평하고 있다.
2.2.3. 장인 티메시테우스
티메시테우스는 당시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를 위해 헌신해줄 수 있던 관료 출신으로, 근위대장에 오른 뒤 섭정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름에서 잘 드러나듯, 그리스인인데 기사계급 출신으로 전통적인 그리스-로마식 교육을 받은 로마인이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여러 근거를 토대로 레반트 속주 태생의 그리스계로 보고 있는데, 이런 추측은 리옹에서 발굴된 티메시테우스 비문을 통해 사실로 확정됐다.제국 섭정을 하면서 벌인 정치공작과 죄없는 중진들을 숙청한 조치를 제외하면, 티메시테우스는 아주 영리하고 그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배출된 관료 중 제국의 행정을 주로 맡아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면서도 군사 방면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갖춘 보기드문 인재였다. 이 사람의 경력은 오늘날 프랑스 리옹에서 발굴된 그의 비문에서 잘 드러난다. 비문에 따르면 티메시테우스는 시리아 속주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으로 그 부모의 재력이 대단해 어릴 적부터 수사학, 고전 문학, 예의범절 등을 두루 배웠다고 한다. 성년식 이후, 아주 젊은 나이에 관료 생활을 시작해 세베루스 왕조 시절부터 보조군 기병 사령관, 벨기카 총독, 감찰관, 시리아 총독 휘하 최고관료 등의 훌륭한 경력을 쌓았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부터 히스파니아,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갈리아, 벨기카 등에서 두루 민간행정과 군행정을 거쳤던데다, 카라칼라 시절에는 군행정 중 병참, 인사, 전역 및 입대자 관리 등 굵직굵직한 사무를 도맡아 처리했다고 하니 그 능력은 동시대 로마 엘리트 중 군계일학이 분명했던 것 같다. 어쨌든 세베루스 왕조 시절부터 로마 제국에서 군행정과 도시행정 분야를 전문으로 경력을 쌓았는데, 티메시테우스가 본격적으로 중용된 시기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때였다. 이때 제국의 고급 행정을 도맡았고, 당시 세베루스 왕조 내 실세였던 시리아 여인들의 재정 문제도 처리하게 됐다. 이는 그가 국고 재정 및 징세 분야에서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실제 티메시테우스는 시리아 속주 태생의 그리스계 로마인임에도 제국 서방, 동방의 문화에 두루 능통하고 적응력도 대단했다. 하여 그는 시리아 여제들의 개인영지나 다름없던 지역 내 현물, 현금 납부 및 회계 관리도 담당했다. 그러다가 알렉산데르 황제가 살해됐다. 그런데 이 시기, 티메시테우스는 다른 세베루스 왕조의 고위관료들과 달리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숙청되지 않았다.도리어 막시미누스의 지시로 동방으로 건너가 맡았던 일을 계속 맡더니 황제 곁에서 더 큰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왜냐하면 다른 로마 고위관료들과 달리 원로원 대신 프라이토리아니, 속주행정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근무하면서, 쓰임새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막시미누스의 보좌관에 임명됐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치세 기간 내내, 그는 행정 면에서 까막눈인 황제를 대신해 제국의 행정을 도맡았다. 이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티메시테우스를 상당히 중용해, 그를 흑해 연안의 비티니아, 폰투스 등 소아시아 주요 속주들의 회계 및 영토, 세금 관리 총책임자로 파견했다. 따라서 티메시테우스는 막시미누스의 군자금을 직접 관리했는데, 이 직책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몰락할 때까지 계속 됐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가 황제를 칭하고 원로원이 막시미누스가 국가의 적으로 낙인 찍혔고, 티메시테우스는 두 계급 이상을 강등당하는 징계와 함께 공직을 떠나야 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일을 잘해서 기용됐다가 출세길이 꼬이게 된 케이스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갈고 닦은 그리스-로마식 수사교육 등을 이용해 갈리아 일대 유력자들을 교육하며 곧 재기했다. 이때 그는 막시미누스를 따랐던 다른 이들과 달리, 갈리아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 중 한명이 되었고, 이를 토대로 당시 불완전한 고르디아누스 3세쪽과 손을 잡았다. 그는 곧 로마로 돌아왔고, 가족들과 로마에 들어온 직후 그동안 쌓아 놓은 경력과 인맥을 바탕으로 갈리아인들의 의견을 대변하면서 여러 원로원 인사들과 접촉했다. 본래부터 입담 좋고 아는 것도 많은데다 예의바른 사람인 까닭에, 얼마 안 가 그는 관료로 복귀하게 됐다.
서기 241년, 고르디아누스 3세는 여러 원로원 의원들과 동방 출신 인사들의 추천 아래 가이우스 푸리우스 사비니우스 아퀼라 티메시테우스의 딸 트란퀼리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어머니 고르디아나 안토니아, 신랑 고르디아누스 3세의 지시로 로마 근교의 화려하고 웅장한 고르디아누스 별장에서 열렸는데, 결혼식 전 황제 모자는 엄청난 돈을 들여 본래부터 거대하고 화려한 이 별장을 리모델링하고 재증축해 호화로움을 더하게 했다.
같은 해인 241년, 고르디아누스 3세는 근위대장 도미티우스 대신 새로운 근위대장에 장인 티메시테우스를 지명했다. 티메시테우스는 일찍부터 근위대장 직과 임페리움을 원했고 그 야심이 상당해 이는 사위가 장인에게 큰 선물을 내려준 것과 같았다. 이때 소년 황제와 모후는 티메시테우스에게 임페리움(통솔권)을 수여하면서,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치안 및 곡물 관리권, 기소권까지 넘겼고 그에게 장군이라는 영예까지 하사했다. 이 조치는 과거 울피아누스가 누린 영예보다 더 큰 것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 모자가 능력 좋고 영악한 고위 관료 티메시테우스를 통해 불안한 제위를 지키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이렇게 되자, 티메시테우스에게 모든 전권은 사실상 넘어갔고 이때부터 이 사람의 동향인 시리아 속주를 비롯해, 그리스, 푸닉, 아나톨리아, 레반트 출신의 실력자들이 부와 권력을 움켜쥐었다. 당연한 말인데, 티메시테우스는 애당초 능력 자체가 출중하고, 적당히 눈치를 잘 보면서 원로원과 다른 지역 출신 인사들을 의식해 그들을 포섭했다.
다음해인 242년,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 티메시테우스의 파트너 근위대장에 장인의 오른팔 가이우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를 지명했다. 이 임명조치는 자연스레 동방 속주 태생의 인재들(율리우스 프리스쿠스,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와 같은 이들)이 근위대와 내각를 차지할 기반을 확장시켰다. 특히,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그의 형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 모자와 티메시테우스가 믿던 내각의 핵심멤버였고, 소년황제를 도운 내각 내 서열이 높은 멤버들로 젊은 시절부터 프라이토리아니에 소속되거나 깊이 연관된 이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율리우스 프리스쿠스의 전면등장은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의 모든 권력이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로 넘어갔음을 의미했다. 이는 율리아 마마이아가 외손자를 위해 울피아누스 같은 인사들을 기용한 것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분명 다른 조치였다.
두 근위대장 중 가장 중요한 근위대장 자리를 맡게 된 사람은 가이우스 푸리우스 사비니우스 아퀼라 티메시테우스였고,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는 동료 근위대장이지만 티메시테우스의 오랜 부하 내지 측근에 불과했다. 이렇게 되니 자연스레 티메시테우스가 누린 영예와 권력, 지위는 울피아누스보다 훨씬 강력하게 됐다.
장인 티메시테우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의 불안한 제위를 보장하고, 그 정통성을 끌어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와 율리우스 프리스쿠스, 필리푸스 아라부스 등은 여러 정치공작으로 정적들을 견제했고, 소년 황제 부부는 대중들에게 고귀하고 아름답고 온화한 소년황제, 소녀 황후로 선전됐다. 이런 장인의 노력 아래, 고르디아누스 3세는 즉위 후 외조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수 많은 건축 공사를 이행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어린 황제와 내각의 통치 스타일은 과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절을 연상케하는 방식을 취했다.
2.2.4. 개혁이라는 이름의 보복
고르디아누스 3세 즉위 직후, 가장 먼저 집행된 일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몇 가지 조치였다. 큰 줄기를 살펴보면, 지방 행정/재정/군대로 나뉜다. 하지만 당대 로마인조차 평했듯이 모든 조치는 티메시테우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전부 개인과 가문 차원의 보복이었고, 개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무했다. 따라서 티메시테우스가 등장한 이후 집행된 조치들까지 평가절하될 정도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조치는 특정인의 개인기에만 의존해 여러 한계를 낳았고, 급기야 미완으로 끝나 실패로 귀결됐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의 개혁은 지방 행정과 군대 개혁은 지방 행정 공백을 장기화시키고,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재정비된 속주 명령과 군대 방어 전략 모두를 구멍나게 하면서 3세기의 위기를 증폭시키는 이유가 됐다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강도 높은 비판을 듣고 있다.고르디아누스 3세가 단독 황제가 되자마자, 황제의 어머니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와 이들의 협력자들이 가장 먼저 집행한 조치는, 국경 방어 강화와 속주 행정 안정 조치였다. 하지만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 속주의 권력 남용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집행된 것은 전부 반대파 처벌, 총독 처벌 강화 조치였다. 이런 조치와 함께 고르디아누스 3세와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는 군인, 제국 관료들이 불법을 저지르면 4년의 공소시효 조항을 삭제해 범죄시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발표했다. 헌데 이 조치와 명령은 도리어 정치, 경제적 격변을 증폭시켰고, 제국을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몰아갔다. 지극히 개인적인 보복을 공적인 이유로 내세운 일은 이를 심화시켰다.
모든 로마인에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평가받은 개혁은 누미디아 속주에 주둔 중인 제3군단 아우구스타를 강제 해산 결정이었다.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는 마우레타니아에 주둔한 병력을 활용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이는 북아프리카 해안의 치안 악화를 초래해, 많은 인사들의 우려를 샀다. 그렇지만 고르디아누스 3세와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는 고집을 피워 3군단이 강제로 해산시키고, 병사들을 불명예 전역시키는 등 일개 사병까지도 끝까지 보복했다. 따라서 이런 행동은 240년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사비니아누스가 황제를 참칭하면서 반란을 일으킬 때, 그 명분이 됐다.
이렇게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 모자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여러 황제가 정비한 방어 시스템을 순식간에 무력화시켰다. 따라서 제3군단 아우구스타가 강제해산된 이후, 평화로운 푸닉 지방과 그 옆 속주들의 치안공백은 후기 로마 황제들이 골머리를 앓게 한 큰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자신들의 조치를 정당화했다. 이런 조치 못지 않게 고르디아누스 3세의 개혁은 알맹이 없이 보복만 가득했다. 그러니 치세기 내내 벌어진 국경 방어 전략에서 갈팡질팡할 뿐 유연성이 없었다. 일례로 서방 국경에서 거대한 적으로 떠오른 고트족에게 조공을 바쳐 습격을 막는다는 조치를 발표하면서도, 다른 게르만족에게 그 반대로 협상하여 여러 문제를 초래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즉위 직후 , 무분별한 소송을 막겠다고 선언하고 재정 문제로 인한 각종 보완을 발표했다. 이 조치는 지방 행정 업무를 가중시키는 소송 문제를 덜고, 재정 문제의 안정을 위한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알맹이가 전혀 없고, 거진 정치보복이었다. 모든 것은 엿가락을 늘리고 줄이듯 원칙 없이 집행됐고, 중앙의 지방행정 파악 문제를 심화시키는 문제를 일으켰다. 따라서 티메시테우스가 등장한 뒤, 해결되기 전까지 로마 제국은 고르디아누스 3세 아래에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절보다 혼란을 겪는다.
예를 들어, 부정부패와 불법을 이유로 벌어진 단속과 처벌 규정은 옛 막시무스(푸피에누스), 발비누스 등을 따른 정적과 제3군단 아우구스타 장병들에게 화살이 돌아가, 이중잣대 같은 모습이 일반화되는 모양새로 개혁이 집행됐다. 고르디아누스 일가와 대립한 이들의 승진은 제한됐고, 일부 인사들은 공적, 사적으로 소외되는 조치가 이어졌다. 그래서 티메시테우스가 메노필루스를 기록말살형하기 전부터 이 부분에서 고르디우스 가문 일족이 정치보복을 한다고 불만이 나왔다.
다만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 아래에서 후대에 이르러 호평을 받은 개혁도 있었다. 막시미누스가 통과시킨 기독교도 박해 정책을 뒤집어, 주교와 교황을 기소하는 선에서 사실상 평신도의 박해를 중지시킨 일이었다. 이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트락스와 같이 중앙에서 마구잡이로 탄압으로 일관하지 않겠다는 조치였다. 하지만 이 역시 고르디아누스 3세 모자가 정치적으로 악용해, 후일 에우세비우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를 기독교도가 되었다고 서술하면서, 그가 막시미누스가 지은 죄를 속죄했다고 평하는 수준에서 이 역시 말끔한 조치가 아니었다고 은연 중 짚었다.
2.2.5. 연이은 위기와 페르시아 전쟁
티메시테우스는 3년간 근위대장에 있으면서, 자신의 지위와 프라이토리아니의 권위 강화에 주력했고 행정가로서 상당히 뛰어났다. 특히, 그가 옛 세베루스 왕조 시절의 궁중 관료들을 대거 복귀시킨 조치는 고르디아누스 3세의 불안한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이때부터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에게 골치아픈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먼저 240년, 아프리카 총독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사비니아누스가 카르타고에서 황제를 자처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바로 옆에 있던 마우레타니아 속주 총독이 신속히 개입한 까닭에 곧 진압되었지만, 조시무스가 말하듯 푸닉의 카르타고인들이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불만을 품고 일으킨 터라 단순한 황제참칭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후 터진 241년 툴루스 메노필루스의 처형과 기록말살형 조치는 그 분위기를 더 암울하게 만들었다. 처형된 메노필루스 장군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몰락시킨 아퀼레이아 공성전의 영웅으로, 사비니아누스의 반란과 연관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던 터라 이 사건은 황제 모후와의 내부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티메시테우스가 자신의 입지를 회복하기 위한 쓸데없는 보복으로 비춰졌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하필이면 지진이 크게 발생해 도시들이 피해를 입고 땅이 꺼지는 자연재해가 벌어졌다. 이때 다시 한 번 고르디아누스 3세와 티메시테우스 내각은 비상사태 대책을 시험받았는데, 소년 황제가 내각들과 모여 한 일이라곤 다른 황제들과 달리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명한 예언, 신탁서 시빌라 예언서를 보며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대처케 한 주술 행동 뿐이었다.
다만 이 점은 참작의 여지가 있다. 현대인들은 "자연재해가 빗발치는데 주술행위만 했다"라며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당대 로마인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미신을 신봉하는 경향이 강했고[9], 만사가 신의 뜻대로 이뤄진다고 확신했다. 제국 각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현상 역시 신의 징벌이라고 여겨 민심이 흉흉했을 테니, 그들을 달래는 차원에서 시빌라의 예언집을 참고하여 제사를 지내는 등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실제로 당대 역사가들은 이 일화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가하지 않았다.
한편 239년 또는 240년경부터 고트족과 카르피족(다키아인)이 함께 다뉴브 강 하류를 침략했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정부는 고트족에게 연공금 지불을 조건으로 포로를 석방시키고 그들을 돌아가게 했으나, 카르피족에게는 연공금 지불을 거절했다. 따라서 카르피족이 다키아 속주에 침략을 더욱 거세게 하게 된다.
이런 여러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는 가운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몰락의 평행이론처럼 240년 동방 일대에서 잠잠하던 사산조 페르시아가 샤푸르 1세의 지휘 아래 사막도시 하트라를 점령하더니, 1년 뒤 로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242년, 사산 왕조의 왕중왕 샤푸르 1세가 로마 동방 영토인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소아시아의 안티오크를 위협했다. 이에 티메시테우스는 황제를 대동한 채 동방 원정에 착수했다.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는 소식을 접한 샤푸르 1세는 이미 탈취한 도시들의 수비대를 철수시키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티그리스 강으로 후퇴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첫 번째 원정 승리를 원로원에게 통지하면서 그 공로를 티메시테우스에게 돌렸다.
티메시테우스는 원정 기간 내내 군대의 안전과 기강을 감독하고 단속했다. 그는 부대 내에 물자를 충분히 비축하고 전방의 모든 도시들에 식초, 베이컨, 밀짚, 보리, 밀 등의 창고를 짓게 함으로써 군인들이 안심하고 전쟁에 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로마군은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여 레세나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을 격파하고 사산 왕조의 영토 깊숙이 진군했다. 그런데 243년, 티메시테우스는 돌연 사망했다. 이질 때문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향간에서는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장인이 갑자기 사라지자, 고르디아누스 3세는 망연자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의 입지는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2.3. 불분명한 죽음
19세의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자신의 장인 티메시테우스를 굉장히 신뢰했고, 그가 가진 능력과 경험에 의지했으므로, 티메시테우스의 불분명한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이후 황제는 꽃다운 19살의 나이에 244년 2월 죽었다. 그런데 이 죽음은 불분명하고 아직까지도 의견이 둘로 갈린다.장인이 사망한 직후, 내각 내 서열 2위였던 율리우스 프리스쿠스가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자신의 동생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후임자로 추천한 것과 고르디아누스 3세는 244년 2월 두 번째 전투를 전후로 완전히 근위대와 군단병 모두에게 신뢰를 잃어버렸던 것은 두 가지 버전의 주장 모두에서 공통되게 언급된 사실이다. 이와 함께, 확실한 또 다른 사실은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임명할 때 소년 황제와 율리우스 프리스쿠스가 고르디아누스 가문 출신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의 또 다른 외삼촌(고르디아누스 2세의 남자형제) 혹은 모후의 사촌오빠로 추정되는 원로원 의원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를 새로운 근위대장에 지명해 그에게 상당한 권한을 줬다는 점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그의 형 율리우스 프리스쿠스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장악하고 있었던 부분을 주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행보가 두 주장에서 불분명할 정도로 갈리고 있고 소년황제의 몰락은 프라이토리아니가 지지를 거두면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먼저 로마 측의 고대기록, 즉 잘 알려진 첫번째 주장에 따르면 젊은 황제는 낙담한 나머지 13살 때 상황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자연스레 황제 경비는 느슨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티메시테우스의 후임 근위대장이 된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일부러 병사들에게 생필품 배급을 늦췄고, 이에 병사들은 생필품 부족을 불평했다. 이후 그 불만은 심각해졌고 병사들은 나이값도 못 하는 어린 황제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를 틈 타 근위대장 필리푸스는 형[10] 프리스쿠스 등과 공모해 병사들을 선동한 다음 244년 2월 11일 유프라테스 강과 아보라스 샛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다. 이는 사산 왕조 측의 주장과 로마 측의 주장을 합친 새로운 주장으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 대표되는 첫 번째 주장보다 당시 정황상 더 맞고 현실적인 시니라오로 평가받는다. 이 버전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 사후 멘붕 상태였지만 마냥 손을 놓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는 소년 황제를 설득해 군심을 다독이게 했으며, 이때 프리스쿠스의 추천으로 공백이었던 근위대장 자리는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맡게 됐다. 이후, 새로운 근위대장과 함께 그는 군 수뇌부들을 모아, 군대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244년 2월 진격했다. 하지만 이 진격은 사산 왕조군의 반격을 받아 혼전 중 패배한다. 이어 그들은 크테시폰 공방전을 펼쳤는데, 사산 왕조 측의 기록들에 따르면, 사산 왕조 군대와 크테시폰을 놓고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가 로마군은 대패하고 고르디아누스 3세는 낙마 후 전사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 측의 기록도 비슷한데, 조나리스와 케드레노스는 일관되게 고르디아누스 3세가 페르시아와 크테시폰에서 교전 중 전사했다며 샤푸르 1세와의 대결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가 죽었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또 사산왕조 페르시아에서 만든 부조에 샤푸르 1세 말에 짓밞혀 엎드려 죽은 채 깔려 있는 형태로 조각되어 있고, 이 점이 비문으로 적혀 강조되어 있어, 그 설득력은 더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로마군은 패퇴했는데, 고르디아누스 3세 전사는 제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로마군은 사태 수습을 위해, 동방 상황에 능통하고 군을 안정적으로 통제한, 현직 근위대장 필리푸스를 지지해 그를 황제로 옹립했다. 따라서 케펜호펜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의 경우, 교전국 페르시아의 기록, 동로마 시대의 기록, 샤푸르 1세 측의 기록 등을 근거로 고르디아누스 3세가 필리푸스 아라부스 등의 음모로 암살되었다고 단정짓지 않고 있는데, 두번째 주장은 이전까지의 주장보다 의문점이 덜 하고, 양측의 기록을 토대로 구성됐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고르디아누스 3세의 죽음 못지 않게 이후의 사태 수습 방향도 두 가지 버전이 전해진다. 첫 주장의 연장선이기도 한 첫번째 버전에 따르면, 황제를 암살한 직후 원정 중인 병사들은 후임 황제로 당시 근위대장이던 필리푸스를 지지했고, 필리푸스는 즉위 후 그곳에 고르디아누스 3세의 시신을 묻고 그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또 다른 버전에 따르면, 로마군을 이끈 필리푸스 등이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자상하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인기가 있던 고르디아누스 3세의 평판과 새 황제의 정통성 확보 등을 의식해, 죽은 황제의 시신을 수습한 뒤 로마로 옮기고 신격화시켰다고 한다.
한편, 고르디아누스 3세의 아내 트란퀼리나는 남편이 암살된(또는 전사한) 직후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고대기록에 따르면 짤막하게 다른 남성과 재혼해 딸을 낳고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반면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남자 친척이자 근위대장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래서 이들은 필리푸스 아라부스나 로마 근위대 병사들에게 남은 고르디아누스 가문 사람들은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3. 평가
3.1. 당대의 평가
로마 제국 당시의 고르디아누스 3세 등장과 평가는 당대의 헤로디아누스와 100년여 뒤의 고대 기록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마황제열전)>에서부터 완전히 갈린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대중에게 가장 유명하고 어떤 반박도 없는 진실된 평가로 인식된 것은 두 사서 중 위서로 평가되고 있는 후자의 평가다.3.1.1.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마황제열전)>
믿을 수 없는 고대 기록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마황제열전)>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3세는 사망 이후에도 로마인들에게 ‘고결한 황태자’, ‘진정한 로마인’ 등으로 추앙받은 게르마니쿠스 못지 않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 황제였다면 분명히 세간의 기대처럼 평균 이상의 훌륭한 군주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평했다. 이런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그는 명랑하고 경쾌한 젊은이였다. 얼굴은 잘 생겼고,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호감을 샀으며...(중략)... 실제로 그에게는 나이를 제외하고는 제국을 통치하는 군주로서의 부적절한 면이 전혀 없었다.
<로마황제열전> 중 고르디아누스의 생애, 33
<로마황제열전> 중 고르디아누스의 생애, 33
즉, 4세기 작성된 이 고대기록 주장만 놓고 보면, 고르디아누스 3세는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처럼 어렸고, 주변의 기대에도 시대를 잘못 탄 나머지 실패한 황제가 됐다고 설명 중이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는 무결점에 가까운 소년황제였지만 불행하게도 개인적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시간도 부족해 보인다는 식으로 묘사됐다.
3.1.2. 헤로디아누스
당대 사람 헤로디아누스는 기사계급 출신의 황실 서기관, 관료, 수사학자였다. 그는 원로원에게 크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황제와 황실에게도 크게 유화적이지 않았다.헤로디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 일가와 그 반대에 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대단히 좋아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를 지지한 사람이 아니면서도, 싫어하지 않았다. 따라서 헤로디아누스의 기록 중 고르디아누스 일가에 대한 시선은 현대까지도 당대 로마 지식인과 관료, 원로원 귀족의 중립적이고 일반적인 입장으로 평가받는데, 이는 9세기 동로마 제국에서도 비슷해, 그의 기록과 인물 평은 당대 로마의 평에서 정치적 목적성이 배재된 것으로 인식 중이다.
그는 고르디아누스 3세의 외조부, 외숙부가 일으킨 반(反) 막시미누스 기치에는 그 명분과 가치 모두 동의했다. 그런데 그는 여섯 황제의 해를 끝내고, 고르디아누스 3세가 단독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을 이끄는 과정에서 상당한 시사점을 줬고, 이 부분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마황제열전)>가 테오도르 몸젠과 헤르만 데사우를 시작으로 한 고전학 연구 속에서 위서로 밝혀진 이후부터 당대부터도 고르디아누스 3세에 대한 평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와 갈렸다고 평가된 이유가 됐다.
헤로디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의 즉위 과정을 담담하게 적었는데, 그는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즉위 때의 모습부터 고르디아누스 3세의 등장 전의 일 속에서 이미 고르디아누스 일가에서 프라이토리아니 일부와 함께 움직임을 지적했다.
나머지 기간 동안 두 황제[11]는 질서 있고 잘 규제된 방식으로 통치하여, 사적으로나 공개적으로 모든 면에서 인정을 받았다. 시민들은 그들을 애국심이 강하고 존경할 만한 제국의 통치자로 존경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프라이토리아니 일부 병사들은 개인적으로 불만을 품었고, (일부) 사람들은 황제들이 지지를 받음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고귀한 출신은 프라이토리아니에게 모욕으로 인식됐고, 황제들이 원로원에게 황제 자리를 승인받음에 일부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은 분개했다.
헤로디아누스, <역사> 8권
헤로디아누스, <역사> 8권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은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달려들었다. 황궁 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황제들을 버리자,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은 노인들을 붙잡아 집에 있다는 이유로 입고 있던 수수한 옷마저 찢었다. 그들은 벌거벗은 두 사람을 궁전 밖으로 끌고 나가서 그들에게 온갖 모욕과 모욕을 가했다. 그들은 원로원이 선출한 황제들을 조롱하면서 구타하고 고문했으며, 턱수염과 눈썹을 잡아당기고 온갖 신체적 고문을 자행했다.
게르만족 경비대에서는 이런 일을 알게 되자 무기를 움켜쥐고 서둘러 구조에 나섰다. 프라이토라이니 병사들은 이런 접근을 알게되자 신체가 절단된 황제들을 죽였다. 시체를 거리에 버린 채 프라이토라이니 병사들은 고르디우스 카이사르(고르디아누스 3세)를 보호하며 그를 황제로 선포했다. 현재로서는 다른 공직 후보자를 찾을 수 없었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애초에 시민들이 자신들을 통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만 죽였다고 선포하면서, 로마인들이 스스로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고르디우스(고르디아누스 1세)의 후손인 이 고르디우스(고르디아누스 3세)를 선택했다. 그들은 고르디우스 황제를 데리고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로 가서 성문을 닫고 조용히 지냈다.
서둘러 구출하려던 사람들이 살해되고 시신이 내버려졌음을 알게 된 게르만족 병사들은 이미 고인 된 사람들을 위해 헛된 싸움을 벌이길 꺼려 그들의 병영으로 돌아갔다. 존경받고 저명한 이 두 원로 정치가, 고귀하게 태어나 당연히 공화국의 권좌에 오른 인물들이 겪었던 부당하고 불경건한 운명이 바로 이것이었다. 고르디우스[12]는 열세 살쯤 되었을 때 황제로 임명되어 로마 공화국의 중책을 맡았다.
헤로디아누스, <역사> 8권
게르만족 경비대에서는 이런 일을 알게 되자 무기를 움켜쥐고 서둘러 구조에 나섰다. 프라이토라이니 병사들은 이런 접근을 알게되자 신체가 절단된 황제들을 죽였다. 시체를 거리에 버린 채 프라이토라이니 병사들은 고르디우스 카이사르(고르디아누스 3세)를 보호하며 그를 황제로 선포했다. 현재로서는 다른 공직 후보자를 찾을 수 없었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애초에 시민들이 자신들을 통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만 죽였다고 선포하면서, 로마인들이 스스로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고르디우스(고르디아누스 1세)의 후손인 이 고르디우스(고르디아누스 3세)를 선택했다. 그들은 고르디우스 황제를 데리고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로 가서 성문을 닫고 조용히 지냈다.
서둘러 구출하려던 사람들이 살해되고 시신이 내버려졌음을 알게 된 게르만족 병사들은 이미 고인 된 사람들을 위해 헛된 싸움을 벌이길 꺼려 그들의 병영으로 돌아갔다. 존경받고 저명한 이 두 원로 정치가, 고귀하게 태어나 당연히 공화국의 권좌에 오른 인물들이 겪었던 부당하고 불경건한 운명이 바로 이것이었다. 고르디우스[12]는 열세 살쯤 되었을 때 황제로 임명되어 로마 공화국의 중책을 맡았다.
헤로디아누스, <역사> 8권
즉, 당대의 헤로디아누스로 대표된 로마인들의 시선에서는 고르디아누스 3세는 즉위 과정과 단독 황제 등극 모두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상의 고대 기록과 다르게 적혀 있고, 그 평가 역시 냉소적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헤로디아누스의 기록과 평가는 19세기까지 고대 평가 중 여러 시선 중 하나로 평가되거나, 헤로디아누스의 주장이 거짓일 것이라는 조소 속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평이 이전까지는 일반적이고 당연한 시선으로 추앙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로 대표된 동로마 지식인들은 자국의 역사가 기록을 정리하면서 헤로디아누스가 가진 시대적 가치와 당대 시선 및 자국에서의 실제 평가를 높이 평가해, 그의 저서 전체를 필사해 이를 남겼다. 이때 포티오스는 헤로디아누스가 자국의 역사가 중 가장 뛰어난 이로 모든 미덕에서 그보다 우월한 이가 없다는 극찬을 하며, 고르디아누스 3세에 대한 평 역시 주목하게 했다.
3.2. 현대의 평가
3세기의 위기가 연구되면서부터, 고르디아누스 3세에 대한 상반된 로마제국 시대의 두 고대기록 평가는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주목 속에서 몸젠과 그 제자 데사우를 시작으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오류 투성이임이 확인되고, 20세기 이래 옛 로마 제국 고토에서 3세기 황제와 그 일가의 비문, 유적,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자연스럽게 고르디아누스 3세에 대한 평가 역시 새롭게 전개됐다.결론부터 말하면, 현대에 이르러 고르디아누스 3세에 대한 상반된 로마의 두 시선 중 확고한 지지를 받고, 그 지지가 두터워지는 쪽은 헤로디아누스가 내린 평가다. 현대 학자들은 악명 높은 군인황제 시대를 연구하면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과거처럼 미완의 대기(大器), 내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같은 '운이 없는 문치주의 황제'로 평가하지 않는다. 되레 헤로디아누스의 중립적이고 담담한 시선 속 평가 못지 않게, 고르디아누스 3세에 대해 앞 세대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보다 혹평하며, 그를 암군으로 평가 중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다양하나 결론은 1가지로 끝난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즉위 과정, 집권, 몰락 모두 의문스럽고 지극히 무능한 암군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고르디아누스 3세는 내치 부분에서만은 현군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달리, 황제로서 지극히 무능했고, 함께 비교하는 것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에게 실례가 될 만큼 비교할 가치도 떨어진 암군이었다. 그의 치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프라이토리아니의 주도로 시작됐고, 이조차도 티메시테우스 등장 전까지 평균 이하였다. 다행히 티메시테우스의 명령은 그 실책을 막았는데, 그럼에도 티메시테우스라는 특정인의 개인기로 가리기 힘들 만큼 내정에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와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 그의 치세는 허장성세라는 표현 그대로 실속이 없고 프린키파투스의 단점을 부각시키는 조치, 명령과 개인의 야심, 가문의 원한을 위한 복수로 제국의 푸닉 방어선 붕괴, 군대의 이중화, 원로원의 이중성을 심화시켰다.
다음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 티메시테우스의 급작스러운 사망 이후 제 스스로 어린애같이 넋을 잃고 간단한 문제해결도 보여주지 못한 것 이상으로, 위기 전부터 개인적 자질도 평균 내지 평균 이하라는 평을 듣는다. 고대기록을 통해 미화 내지 고평가받음에도, 자질이 뛰어났는지 의문인 것이 곳곳에서 눈에 띠고 있다는 것은 쉽게 확인된다. 그는 어리다는 이유로 원로원에게 통치를 위임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어머니와 일가를 중심으로 족벌주의를 강화했다가 푸닉 지방의 아프리카 속주를 시작으로 한 반란에 직면하는 등 일가마저 통치력을 제대로 선보이지 못했다. 더욱이 티메시테우스 등장 이후부터는 티메시테우스가 사실상 공동황제로 군림함에도, 얼굴마담 노릇만 해서 어떤 면에서는 루킬라가 벌인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직후의 콤모두스가 페렌니스에게 정사를 맡기는 흐름과 유사함을 선보임도 확인돼, 평가가 수직하락했다.
더욱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고르디아누스 3세가 고평가되고 그들의 가계가 조작된 이유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왕조가 고르디아누스 왕조로 불린 고르디아누스 3세 일가의 적통을 계승하는 모양새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제위를 차지한 것과, 콘스탄티누스 왕조에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자신들의 상징적인 정통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이미지 역시 허상 내지 조작이라는 악평을 추가로 듣고 있다.
이런 악평 그대로, 실제 당대 사가 헤로디아누스를 토대로 한 연구는 여러 가지 검증 속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가 가진 후광 역시 고대 기록상의 이미지와 달리, 전혀 특장점이 없었음이 확인된다. 형식상 공화국이라고 해도 로마 제국은 엄연히 출신 가문과 혈통을 중요시 여겼다. 고르디아누스 3세와 동시대 사람이자 정적들로 고르디우스 가문 손에 사실상 몰락한 푸피에누스, 발비누스와 비교하면 쉽게 설명이 가능할 정도다. 부모 모두 공화정기부터 내려온 오래된 귀족 가문 출신이나, 본인과 친인척 모두 몰락한 귀족들로 원로원에 겨우 재입성한 푸피에누스가 고르디우스 가문보다 훨씬 가난했고, 공동황제였던 발비누스에게 "그래봤자 몰락한 귀족놈"이라고 조롱받았더라도, 재력보다 출신 가문의 오랜 역사를 강조한 곳이 로마 제국이었다.[13] 고르디아누스 3세는 혈통적 정통성도 의문이며, 상속받은 재력 외에는, 다른 경쟁자들과 비교해 그나마 훌륭한 케이스였을 뿐, 이 역시 "대단하기는커녕 여러 신흥일가 중 주목만 받을 법 했다."는 당대의 평이 이해가 간다는 평이 나옴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즉, 믿을 수 없는 고대기록에서 떠들었던 것과 달리, 3세기 황제 중 그 혈통은 결코 특별하지는 않았다.
족벌주의와 혈통주의가 여전했던 이 당시, 그의 일가는 푸피에누스, 발비누스처럼 부와 지위는 비슷하거나, 우위였다고 해도 수대째 내려온 명문귀족 가문이 아니었다. 21세기 이르러 발견된 튀르키예의 옛 프리기아 지방, 프랑스 리옹에서의 고르디아누스 1세 비문 내용처럼, 고르디아누스 3세가 속한 고르디우스 가문은 전형적인 신참자 중 재력 많고 문예후원으로 팬덤이 두터운 명망가에 가까운 신흥귀족일가였다. 외조부는 50대 중반이 되어서야 원로원 의원이 됐고, 60대 초반에야 집정관에 오른 전형적인 부유한 신참자이며, 외삼촌이자 양부 고르디아누스 2세는 세습 원로원 의원이라고 한들 원로원 안에서 압도적인 재능도, 가문의 후광도 특별하지 않은 원로원 의원 중 한명. 그것도 교차검증을 통해 세습 의원 중 플레이보이 내지 무능력한 인사에 불과했다. 즉, 2세기 후반 ~ 3세기 초반까지 흔히 보이는 신흥 귀족 가문을 외가로 두었고, 친가는 그보다 이름이 없는 이가 고르디아누스 3세였다. 그렇지만 고르디아누스 3세의 외가는 막대한 부와 문예 후원을 통한 명성에 기반한, 인기 있는 신흥 귀족 가문으로 명성을 떨쳤고, 고르디아누스 3세는 이런 외가의 재력과 잘 만들어진 이미지로 황제까지 올랐다. 따라서 그를 지지했다는 로마인들은 모든 계층의 대다수 사람보다는 극렬하고 조직력이 강한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추종자들과 이들을 팬덤으로 따르는 무리였을 뿐, 과거의 카이사르 가문(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안토니누스 가문(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같이 혈통과 명망을 두루 갖춘 로마 귀족 가문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평가받는다.[14]
따라서 실력 위주 집단이었던 로마군이나 고르디아누스 일가보다 훌륭한 집안 출신들이 많은 원로원에게 그의 인기, 상징성은 크게 특별하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는 평을 듣는다. 그래서, 영리한 티메시테우스와 그 부하들은 이러한 고르디아누스 3세의 단점을 상쇄하고자 툴루스 메노필루스 등을 죽이고 기록말살형이라는 무리수를 둔다거나, 대대적인 프로파간다와 고르디아누스 가문 이름의 빵과 서커스에 열을 올렸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다시 말하면,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카이사르 등극부터 단독황제 즉위까지의 과정, 티메시테우스와 필리푸스 형제 등의 행보 등을 보면, 고르디아누스 3세에 관한 고대기록과 실제 행보는 그 간극이 매우 크며, 이는 쉽게 교차 검증된다는 평을 듣는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주장과 달리, 지지기반에 있어 한계가 뚜렷해, 치세 부분에서 섭정이자 장인인 티메시테우스 및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 등의 역할이 크지 않았겠느냐는 의견이 설득력 있게 평가받는다.
이런 배경과 실제 모습에서 드러나듯, 고르디아누스 3세는 버팀목인 티메시테우스가 급사한 직후, 순식간에 몰락하고 만다. 이는 훌륭한 가문, 혈통을 배경으로 둔 후일의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부자와 매우 대비되는 모습인데, 고르디아누스 3세가 무너진 시점은 로마 제국 안에서 타고난 배경과 개인의 실력을 모두 감안해 평가하던 로마군 앞에서 친정을 맡고, 연이은 오판으로 벌인 행보를 하면서 시작됐다. 즉, 지지기반은 아니지만 클리엔텔라 사이인 것은 분명한 로마군 앞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는 목숨을 잃고 그 일가는 몰락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에 관한 병사들의 평가는 세간과 다르게 제정 중기부터 나타난 정통성의 특장점[15]이 전혀 없고, 그저 함량 미달의 어린애에 불과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근현대 학자들의 일관된 평처럼 두 기록 중 어느 것이 확실한건지 아직도 의문인 부분이 많아, 고르디아누스 3세가 마냥 형편없는 함량미달자로 폄하하는 것은 대단히 곤란하다. 당시 로마 내 상황은 분명 실력이 중요시하는 군대의 영향이 강했고, 이 흐름은 전임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역시 비슷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몰락의 모든 짐을 감당하라는 이야기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르디아누스 3세가 고평가되었다는 것은 여러 갈래로 교차검증이 되고 있다.
과거 헤로디아누스의 저술 스타일은 객관적이며 연대기순으로 현장감있게 전하는 방식이었지만 몇몇 고증의 오류 탓에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평가받았다. 하지만 20세기 이래 로마 시대의 비문이 발굴되고, 금석문 해석이 발전하면서,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은 과거처럼 B급 사료로 취급받지 않는다. 도리어 교차검증을 통해 그 가치가 좋아지고 있다. 헌데 이 사람의 기록을 보면 고르디아누스 3세에 관한 평가는, 4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왕조 황제들의 정통성 향상 목적을 위해 그가 숭고하게 포장된 것이 곳곳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기존 평가의 기반이 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는 고르디아누스 왕조로 불리는 세 명의 황제 가계, 이들의 경쟁자인 막시무스(푸피에누스), 발비누스, 필리푸스 아라부스, 데키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등의 인적사항과 행보가 곳곳에서 조작된 것이 드러나고, 이는 교차 검증되고 있어 신빙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물론 세베루스 왕조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게타, 엘라가발루스에 대한 기록은 조작이 덜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고르디아누스 왕조의 세 황제와 이들의 경쟁자 막시무스, 발비누스에 대한 기존 평가를 180도 바꾸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에 대한 평가는 이를 반박할 유적이나 비문이 발견돼 확실히 반박할 무언가가 나오지 않는 이상 과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의 찬사로 바뀔 확률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설상가상 이란 일대에서 적국 페르시아 측의 승전기념비문 등이 발굴되고 해석된 결과, 후임자 필리푸스 아라부스까지 암살범으로 왜곡되어 악평을 얻었다는 점까지 확인된 까닭에, 고르디아누스 3세가 불운했다고 평하는 것조차 그 목소리가 줄고 있다.
다만, 고르디아누스 3세가 암군으로 확정적으로 평가받더라도, 그의 장인으로 사실상 공동황제인 티메시테우스까지 암군으로 몰아간 권신 내지 간신으로 폄하하면 대단히 곤란하다.
소년 황제의 섭정이며 장인 티메시테우스는 능력이 뛰어난 권신으로, 콤모두스를 의도적으로 망치며 권력을 누린 페렌니스와 달리 진심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실정을 막은 사람이었다. 3세기의 위기 동안 섭정 티메시테우스의 조치들은 후일의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카루스 못지 않게 뛰어난 측면이 많았고, 그가 정적을 숙청한 것 역시 불안정한 황제 일가를 위해 벌인 선택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렇지만 고르디아누스 3세 시기는 티메시테우스가 임페리움을 가진 근위대장으로 국정을 돌보기 전까지, 거의 무정부와 다름없었고 티메시테우스의 죽음 후 고르디아누스 3세는 연이은 오판, 군사작전 실패 속에서 몰락했다는 점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가 고평가될 여지가 없다는 점도 분명 사실이다. 괜히 고르디아누스 3세와 모후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및 고르디아누스 가문 사람들의 내치 모두 여러 부분에서 형편없고 불안했다고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16][17]
즉,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주장처럼 고르디아누스 3세는 당시 황제 자리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군인들에게 당시에도 절대적인 아이돌로 추앙받는 게르마니쿠스와 그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 같은 아이돌도 아니었고, 모든 민중에게 끝없는 사랑을 받는 소년황제가 아니었던 암군이었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평가다.[18]
4. 여담
- 고르디아누스 3세의 초상화가 새겨진 은화는 현재 가장 구하기 쉬운 로마 제국의 은화인데 그 이유는 그가 살았던 시기에 은화로서의 데나리우스가 마지막으로 대량발행되었기 때문이다.
- 외조부, 외삼촌과 마찬가지로 고대 기록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통해 가계가 꽤 정확히 기록되었지만, 두 사람처럼 이 황제 역시 모두 조작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 아버지가 명문귀족의 후예,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먼 후손 유니우스 발부스라고 전해지지만, 이는 정통성을 위해 끼워맞추기 식으로 서술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어머니의 신상정보도 마찬가지인데, 모후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는 마이키아 파우스티나라는 이름을 본인이 사용하지도 않았고, 이런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근대 이후 학자들에게 단호할 정도로 일축되고 있다.[19]
- 3~4세기 당시 그가 외삼촌 고르디아누스 2세의 친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 후대 로마인들에게서 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저자들은 덱시푸스 같이 황제들 사생활을 꿰뚫고 있던 이들도 이를 높은 사실로 생각해, 이를 확정적이라고 말했다고.
- 3세기 초중반에 제작된 로마 귀부인 두상이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 조각상의 여인은 대략 40대로 로마 황후였다고 하는데 나이는 추정이라고 한다. 이 조각상 속 로마 황후는 살집이 많이 있어 턱살이 처질 정도로 뚱뚱한데 동시대 제위에 오른 여러 로마 황제 중 눈, 코, 턱, 귀모양이 해당문서 인물 초상 두상으로 실린 고르디아누스 3세의 것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것이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외조부 고르디아누스 1세는 머리가 크고 목이 짧으며 평균 키에 어느 정도 살집 있는 체구였고, 외삼촌이자 양부 고르디아누스 2세 역시 체구가 크고 뚱뚱했다고 하니 이 여인이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일 확률은 높다고. 따라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고르디아누스 3세 두상 등과 함께 보면,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1] 과거에는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암살되었다고 단정됐다. 하지만 21세기 이후에는 교전국 페르시아 측의 기록 등이 발견되면서, 페르시아와의 교전 중 전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중이다.[2] 단순 의심, 논란이 아니라, 거의 확정적으로 거짓 가계로 부정되고 있는 중이다.[3] 고르디아누스 왕조가 아니라 '고르디우스'로 부르는 이유는, 당대 로마 사서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고르디아누스 3세 비문 모두 GORDIVS(고르디우스)로 명시되어 있고, 이렇게 불렸기 때문이다.[4] 폼페이우스가 지은 저택.[5] 2000년대에 발굴된 튀르키예의 옛 프리기아 일대 유적에서 고르디아누스 일가의 비문 발굴 결과 밝혀진 사실이다. 이 비문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가문은 이름처럼 옛 프리기아의 고르디움 근교에서 발흥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일가(안토니아 자매 중 한명)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은 것이 확인된다.[6] 로마인들, 특히 이 당시 상류층들에게 자녀의 풀네임은 그가 어떤 혈통을 이어 받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정통성의 증거이기도 했다.[7]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애인, 정부, 여자노예 등 스무명이 넘는 여인들과의 사이에서 각각 2~3명의 사생아를 두고 있었다. 하여 3, 4세기 로마 원로원 의원, 황실 비서, 역사가와 당시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비롯한 이들은 고르디아누스 3세 친부가 고르디아누스 2세일 것이라고 거의 확실시 하거나, 그 소문의 신빙성을 높게 평했다고 한다.[8] 고르디아누스 1세는 성공한 속주 태생의 전직 집정관으로 교양이 풍부하고 적을 많이 만드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참자임에도 로마 최고 수준의 부자가 된 시절인 카라칼라 황제 시절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본래부터 권력욕이 강했고, 큰 대회 등을 열면서 스스로를 군중들에게 트라야누스의 후손이자 그라쿠스 형제의 셈프로니우스 가문 후손이라고 주장했다.[9] 전투를 치르기 전 닭에게 모이를 줘서 닭이 모이를 먹는 모습을 관찰해 전투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판단하기도 했다.[10] 이 이야기를 기록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이부동생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필리푸스와 프리스쿠스는 동복형제로 밝혀졌고 나이는 프리스쿠스가 더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11]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12] 고르디아누스 3세[13] 발비누스는 고르디우스 가문이 재력이 대단한들 300년 가까이 권력을 유지하면서 막대한 재력을 과시한 본인 일가와 비교할 것도 아니된다는 식으로 사실상 무시했다. 대신 푸피에누스에게만은 조상들이 대단하더라도 그와 그 친척들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피나리우스 발렌스 같은 자들 역시 결국엔 매우 가난한 원로원 의원이자 똑같이 몰락한 귀족들로 조상들만 훌륭하다는 식으로 까내렸다.[14] 왜 실정을 연달아 벌이던 네로, 콤모두스가 버텼는지 이해해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콤모두스를 예를 들면, 그는 암살 직전 구제불능의 폭군이자 암군으로 원로원 전체에게 확정나고, 로마군 내에서 일부가 반발함에도 가문과 본인의 명망이라는 후광으로 모든 불만을 잠재웠다.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말살형 선고를 받고도 철회될 때조차 그 후광 덕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본인 정통성을 높이려고 이를 철회하면서 세베루스 왕조 시작을 위한 명분으로까지 이용했을 정도였다.[15] 10대 이전부터 형식상 받은 여러 군복무 경력과 정치, 행정 경험과 훈장, 영예들[16] 가령 고르디아누스 3세가 즉위 직후, 제3군단 아우구스타를 일방적으로 없애고 군대와 제국 공무원들의 불법 행동에 따른 손해배상 자체를 폐기해버린 조치 등은 어린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티메시테우스가 없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됐을건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17] 실제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 티메시테우스의 프로파간다, 잠재적 정적 제거 및 견제를 통해, 이미지가 포장된 황제였을 뿐, 결코 인품과 혈통적 후광으로 모든 계층의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는 황제가 아니었다. 당대의 헤로디아누스의 기록 등에서 확인되듯, 로마의 지식인, 관료들은 이 소년의 등장과 치세를 쌍수들고 환영하지 않았다. 이는 군대도 비슷했다.[18]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부자에 대한 라인강, 판노니아 일대 로마군의 절대적인 사랑은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자발적이었고,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이들 부자를 위한 추모식과 제사는 무려 3세기 후반까지도 계속되었고, 이를 기린 탑은 드루수스 부자가 생전 활약한 마인츠에 드루수스 탑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아울러 이들 부자의 생애를 다룬 책들은 이 일대 로마군 병사들이 즐겨 읽던 책 중 하나였고, 재향군인회 퇴역병 가족들 역시 이들을 존경했다고 한다.[19] 같은 기록에서, 반대로 그와 대척점에 선 모양새로 카이사르 직위를 수여한 푸피에누스는 현대 연구와 유적, 유물, 금석문 등을 통해 오히려 가계가 폄하되는 경향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