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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8:39:54

기록말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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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 중세 시대의 형벌3. 근, 현대의 사례4. 번외: 형벌 외 기록 말살
4.1. 스포츠 분야
5. 창작물에서의 예6. 위키에서7.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oroshilov%2C_Molotov%2C_Stalin%2C_with_Nikolai_Yezhov.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Commissar_Vanishes_2.jpg
사라진 인물은 니콜라이 예조프. 대숙청을 주도한 스탈린의 심복이었으나 그 역시 모함당하여 사형되고 기록이 지워졌다.
There will be no glory in your sacrifice.
I will erase even the memory of Sparta from the histories!
Every piece of Greek parchment shall be burned. Every Greek historian, and every scribe shall have their eyes pulled out, and their tongues cut from their mouths.
Why, uttering the very name of Sparta, or Leonidas, will be punishable by death!
The world will never know you existed at all!

네놈들의 희생에는 영광 따위는 없을 것이다.
내가 스파르타를 역사에서 한 치도 남김없이 지워버릴 것이니!
그리스의 모든 문서를 불태워버리고, 그리스의 모든 역사가들과 서기들의 눈알을 뽑아버리고 입에서 혀를 잘라버릴 것이다.
누구든지, 스파르타레오니다스의 이름을 아주 조금이라도 언급하기만 해도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다!
세상은 너희가 존재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의 대사
모든 기록을 지워버림으로써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고대 로마의 형벌. 라틴어로는 Damnatio Memoriae.[1]

2. 고대, 중세 시대의 형벌

가장 오래된 기록상 발견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데, 기원전 3000~200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형벌로 널리 쓰인 것은 고대 로마가 대표적이다. 라틴어로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라고 불린 이 형벌은 직역하면 "기억의 비난" 또는 "기억의 저주"로 불렸다. 다만, 담나티오 메모리아이라는 단어는 고대 로마인들에게는 사용되지 않고, 로마에서 집행한 형벌이었을 뿐이다. 1689년 독일에서 쓰인 로마 시대 기록말살 관련 논문에 처음 등장해 널리 사용됐다.

후대에 기록말살형로 불린 이 형벌 조치는 로마 사회에서 대놓고 사용된 단어만 아닐 뿐 로마 엘리트와 어느 정도 명망 있는 가문에게는 가장 치욕스러운 처벌로 악명이 자자했다.

통상적으로 원로원 의결 아래에서 비문에서 이름을 지우는 식으로 우선적으로 집행됐다. 황제의 경우 당사자와 그 자손 및 직계 친척들까지 특권이 박탈되고 황제는 개인이름(프라이노멘)으로 사용이 허락된 임페라토르까지 박탈됐다. 네로의 사례처럼 아예 동판을 통해 그 정통성이 철저히 무시됐으며, 이들의 조각상은 모든 공공건물에서 철거되고 발행주화는 회수됐다. 여자 황족이나 황후, 태후도 비슷해 이 형벌에 처해지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똑같이 집행됐다. 때문에, 율리아 마마이아나 파우스타처럼 살아생전 명예는 공적으로 언급이 철저히 자제됐으며, 리빌라의 예처럼 추가 조사를 통해 원로원 의결로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황제와 황후, 태후, 황족 외의 원로원 의원, 장군, 장교 이상의 관료들, 세야누스 같은 극악무도한 반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원로원 의원, 장군, 관료는 세야누스처럼 국가 전복 시도와 함께 그 악행이 끔찍하지 않는 이상, "본인이 한 잘못만 처벌받는다"는 로마법 원칙에 따라 연좌제는 적용받지 않았으므로 당사자에 한하여 원로원 회의록과 관보 안에서 기록된 공훈이 모조리 지워지고 조각상 등이 파괴됐다.

로마인들의 관습상 '집=모든 영혼의 공간"이기 때문에 이 형벌에 처해진 순간, 로마인들에게는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조각상은 파괴되고, 조상들의 조각상은 후손, 친척들의 집에서 강제 회수되고 파괴됐다. 바닥, 벽면에 설치된 해당 인물에 대한 모든 기억까지 지워지고 철거됐다. 황제, 원로원 의원, 선출직 공직자, 관료, 장교라면 공문서나 각종 기록에 남겨진 대상자의 이름을 지우고 건물에 새겨진 대상자의 초상 등을 파괴하거나 긁어내 없애 버렸다. 이들의 파괴된 조각상이나 비문은 가축들이 밟고 다니는 도로 재료 등으로 쓰여 모욕당하게 만들었고, 심할 경우에는 해당 인물이 살던 집도 완전히 철거됐다. 유가족이 같은 이름이나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모두 개명해야 했고, 특정 이름은 금지되었다. 개명하게 되면 선택권마저도 황제나 원로원이 결정한 그대로 해야만 했다.

로마에서 대역죄인 폭정을 일삼은 황제, 처형된 황후(클라우디우스 1세의 황후 메살리나,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황후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혹은 태후(율리아 마마이아), 이를테면 로마 역사상 가장 파렴치한 간신으로 평가받는 세야누스, 폭군으로 규정된 네로, 도미티아누스[2], 콤모두스, 카리누스, 공주 중 악행이 심해 이 형벌을 받은 리빌라 등의 인물들에게 내려지던 형벌의 하나였다. 현세에 세운 모든 공적들이 박탈됐고, 형벌이 통과될 당시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기록말살형 통과가 결정되면, 이를 피할 수 없었다. 당사자가 기소 전 자살하거나, 이미 처형됐다고 하더라도, 사건이 다시 조사된 뒤에 집행되는 경우도 있어, 이 형벌로 기소되는 순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이 형벌에 처해지면, 대상자만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고 해도 출신 가문도 타격이 심각했다. 왜냐하면 해당 인물의 출신 가문까지 살아생전 명예와 사후 명예, 업적까지 모조리 부정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성씨(코그노멘) 또는 조상부터 자랑스럽게 물려 받아 쓰는 개인이름(프라이노멘)까지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대상자와 함께 로마인 남녀노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가문과 가족까지도 연좌제를 당하는 치욕이 따라왔다. 그래서 살아남은 가족들에게도 그 내상이 심각했다. 기록말살형 대상자의 이름은 사회에서 인간쓰레기, 존재 자체가 혐오스러운 자와 똑같은 의미를 가진 욕설로 인식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가문의 명예 역시 추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즉, 명예로 죽고 산다고 자부한 파트리키, 노빌레스 가문들 입장에서는 살아도 산 것보다 못 한 처지로 전락하게 되는 셈이다.

다만 로마에서 기록말살형은 몇 가지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남기고, 선포와 집행 역시 양날의 칼과 같아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일단 형 선고가 내려지고 집행되는 순간 복권 자체가 무척 어려웠다. 즉, 기록말살형은 현세와 명예를 소중히 하며 죽어서는 이름을 남기는 것을 미덕으로 삼던 로마인에게는 조선의 부관참시와 마찬가지로 사형을 능가하는 최악의 형벌이었다. 이런 이유로 고르디아누스 3세 시대에 황제의 장인 티메시테우스의 일방적인 원로원 의원, 장군들에 대한 기록말살형 조치 결정처럼 논란의 여지가 심하고, 이마저도 개인의 악감정으로 황제나 실권자들이 이 조치를 악용하는 것은 로마 사회 안에서 범죄로 인식됐다. 물론 정치적 이유나 재조사 등으로 복권되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잘 알려진 것은 콤모두스의 사례였다. 이 사례는 무력으로 원로원을 제압하고, 살생부를 만들어 정적을 없앤 현직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정치적 이유로 결정을 뒤집어 신원을 복구시켜 주는 조치로 마무리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 게타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실상 기록말살형 철회를 은밀히 명해 집행해준 예처럼, 대놓고 원로원 결정을 철회해버리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

더욱이 비텔리우스가 네로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콤모두스를 일부 철회, 완전 철회하는 경우처럼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실제로 집행되더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 역시 부지기수였다. 공문이 하달되더라도 모두 집행하지 않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당장 두 사례만 해도 이 조치 회복 조치로 인해 동상 복원 명령이 하달되거나, 일방적으로 파괴를 명한 이들이 징계를 받았으니, 더 큰 불똥이 튈 속주들의 경우에는 만약을 위해 그냥 치워두는 경우가 수두룩했던 것이다. 아울러 메살리나엘라가발루스의 사례처럼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통과 후에도 공문을 만들지 않고 몰래 집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를 입안해 결의한 원로원에게 정치적 부담이 상당한 형벌 선고였다. 물론, 원로원에서 화풀이식으로 사이가 나빴던 황제에게 행사하려고 한 일도 많아 이 부분에서도 말이 많았다.[3] 하지만 대체로 원로원은 국가의 적으로 선포된 황제가 아닌 이상, 큰 부담 때문에 내부적으로 자제하는 모습이 많았다.

여기에는 원로원이 칼리굴라로 잘 알려진 가이우스 황제를 공화정 복귀 선포와 동시에 기록말살형하려고 했다가 크게 데였던 선례도 컸다. 41년 1월 원로원은 티베리우스 시절부터 황제와 사이가 최악인 분위기 속에서 칼리굴라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움직인다. 이들은 이를 결행한 암살범들에게 듣자마자 움직이는데, 칼리굴라가 암살되기 직전 그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에 있다가 곧바로 공화정 복귀를 추진했었다. 이때 그들은 암살범을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하면서, 살해된 황제의 기록말살형을 논하고, 당당하게 칼리굴라 이름을 비문에서 지우려고 시도하자며, 주화 파괴를 임시 결의한다. 하지만 이 결의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지 못했고, 이마저도 집행 명령을 입도 떼지 못한다. 갓 법무관을 마친 베스파시아누스를 필두로 한 황제파 원로원 의원들이 벌떼같이 반대하면서, 관련자 처벌과 반역법 절차에 따른 처형을 이들이 주장해 따로 결의까지 한 것은 덤이었다. 결국 회의는 공전을 거듭했고, 이 과정에서 시간을 끌 수 없던 황제파 인사들과 중립적 인사들이 전부 집단 퇴장 후 로마 근교의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로 떠난다. 이유는 아레키누스 클레멘스가 이끈 프라이토리아니 9개 대대 대부분이 옹립한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가 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파 인사들과 중립적 인사들이 이렇게 떠난 뒤, 원로원은 경찰에 해당한 수도 경비대와 소방대를 앞세워 황제와 프라이토라이니를 압박한다. 그렇지만 무력은 절대적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황제파 쪽이 우위였고, 원로원의 이런 고압적 태도는 역풍이 분다. 이때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암살 24시간도 못 되어, 20명 남짓의 암살범을 전부 체포해 처형해버리는데, 이후 황제파 의원들이 원로원에 출석해 이를 알린다. 동시에 프라이토리아니가 일제히 암살당한 칼리굴라를 위해 복수를 다짐하고 전투준비를 하는데, 이 모습을 지켜본 수도 경비대와 소방대는 눈치 싸움을 하다가 전부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황제파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백기투항을 하고 힘 싸움에서 반나절도 못 되어 원로원이 제압되는데, 이때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일단 원로원을 배려해준다면서 조카 칼리굴라의 동상을 회의장에서 전부 치워준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이후 벌어진 일을 철저히 방관해버리면서, 기록말살형을 조카와 본인 가문에게 언급한 원로원에게 제대로 복수해 버린다. 그 결과, 동상을 치워달라고 주장했거나, 칼리굴라가 발행한 주화나 비문 등을 파괴하자고 주장한 인사들은 프라이토리아니와 게르만족 황제 경호대, 흥분한 민중들에게 명단이 공개돼 줄줄이 맞아 죽거나, 가족이 줄초상나듯 그들 손에 살해된다. 이런 일이 계속 터지고, 이 과정에서 자경단이 형성돼 죽은 칼리굴라를 위한 복수극이 판을 친다. 결국 겁에 질린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를 보고자 1달을 기다린 뒤 백기투항하면서 싹싹 빈다. 하지만 이 역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벤데타를 결심하고 원로원 인사와 그 가족들을 죽이던 무리를 달랠 인사로 칼리굴라의 최측근 출신 전직 법무관 베스파시아누스를 선정하면서 일시 중지시킨 다음 원로원을 물갈이해버린다. 이런 일은 이후 네르바 황제가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후 벌인 조치 문제로 궁중 정변을 겪고 유폐되면서, 이를 명하는 원로원에게 큰 교훈을 안긴다.

즉, 원로원 입장에서는 진짜 구제불능이거나 악행이 심하지 않으면 입안조차 힘든 것이 기록말살형 선고와 집행이었다.

다만, 기록말살형이 완전히 이뤄지는 경우는 이 조치를 명령한 황제, 원로원이 마음 먹고 실행에 옮기더라도 성공할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현실적인 여러 이해관계와 물리적 한계 때문에 소요 시간도, 비용도 많이 들고 보상책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네로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당시 본국 이탈리아와 로마, 각 속주의 총독 관저 및 관청 외에서 네로가 새겨진 주화, 조각상이 모두 파괴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오늘날처럼 통신이 빠르지 않아 모든 명령이 동시 집행되는 것이 힘들 뿐더러 제약조건도 많았기 때문이다. 화폐라면 보상 없이 회수해서 폐기해 버린 터라 소유자가 신고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존속살해하고 동생을 기록말살형 선고할 당시 카라칼라는 몇 년 동안 제국 전체를 이 잡듯이 뒤졌음에도 동생의 주화를 온전히 폐기하지 못했다.[4]

이처럼 한 인물의 이름과 명예를 지우는 것을 가혹한 형벌로 여긴 점은 한자문화권의 사고방식과는 대조적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유취만년(遺臭萬年)이라고 해서 반역이나 폭정 등의 악행은 기록으로 남겨져서 역사의 이름으로 두고두고 기억되는 것을 더욱 불명예로 여겼기 때문이다.[5] 다만 한자문화권에서도 공신녹권 문서나 해당 인물이 간행에 참여한 서적의 목판 같은 경우는 먹칠로 지워버리거나 목판을 파버리거나 불태우는 등 기록말살형에 준하는 사례가 존재한다.

기록말살형은 후대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최악의 적이다. 아무래도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는 만큼 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 기록마다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따라서 한 역사적 기록이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그 주제를 다룬 다른 기록들과 비교를 해 봐야 한다(=즉, 교차검증을 해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 기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고대로 갈수록 당시의 기록 자체가 현재까지 오면서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유실되는 경우가 빈번하다.[6] 거기에 만약 그 시절 당시에 작정하고 기록을 없애버리게 된다면? 그 시절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로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렇게 될 경우 자료를 얻는 것은 사실상 답이 없게 된다. 결국 남은 것은 유물이나 (사문서로나 남아 있을)[7] 당대의 평판 혹은 추정 정도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파라오 아케나톤과 그 후계자 스멘크카레, 투탕카멘, 아이아문 대신 아톤을 섬겼던 까닭에 정권을 찬탈한 호렘헤브에 의해 비슷한 처분을 받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름이 사라지면 그 존재도 사라진다"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존재의 부정이지만 당대에는 존재의 소멸과도 비슷한 큰 충격을 준 형벌이었다. 벽화는 도굴꾼에 의해서 훼손된 흔적과는 다르게 이름과 얼굴에 집중적으로 훼손이 일어난다.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들의 교육기관의 성균관의 재학기록을 영구적으로 지워 버리는 영삭부황(永削付黃)이라는 명예형이 있었다. 이는 누런 종이에 죄목을 적고 재학기록에서 삭명하는 것이다. 팽형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조선의 팽형은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니, 상대적이긴 하지만 이 또한 산자를 죽은 것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는 잔인하다고 볼 수도 있다.[8]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은 불에 타 없어졌는데[9] 방화범인 헤로스트라투스는 범죄 동기를 아르테미스 신전의 파괴자로서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때문에 에페소스에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으나 역사가 테오폼푸스가 이걸 책에 적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소원대로 그는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에서 마치 '존재 자체를 없애는 형벌'로 묘사한 바 있는데 이것은 과장이다. 존재는 두되 그가 한 일을 기록에서 전부 뺀다는 것으로 이 자는 기억조차 되어선 안될 극악무도한 자이니 이름만 남기고 관련 기록을 없애버린다는 경고성 메세지에 가깝다. 네로나 도미티아누스도 이 형벌을 받았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두고 두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심지어 오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도 이 형벌을 받을 뻔했다.

3. 근, 현대의 사례

고대 로마 이후로 기록말살형이 공식적인 형벌로 지정된 사례는 없으나, 근대는 물론 현대에도 개념적으로 시행한 사례가 간간히 있다.

4. 번외: 형벌 외 기록 말살

이 문단에서는 국가기관에 의한 형벌이 아닌 기록 말살 사례를 서술한다.

4.1. 스포츠 분야

스포츠 분야(e스포츠 포함)에서는 개인에게 공식 혹은 비공식적으로 기록말살형이 내려지기도 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에는 승부조작, 살인, 마약, 인종 차별, 성범죄 등의 반인륜적 행위, 도핑 등 스포츠맨십을 져버린 행위 등이 있다. 이 경우, 선수의 기록이나 포상이 부정되거나 언급을 안 하게 된다.

5. 창작물에서의 예

여기에 역사 왜곡까지 곁들여서 악역이 정말 많이 사용하는 클리셰다.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6. 위키에서

7. 관련 문서



[1] 담나티오 메모리아이(교회 라틴어로는 담나치오 메모리에). 직역하면 '기록의 죽음'. damnatio(동사 으뜸꼴 damnare)는 우리가 아는 그 Damn의 어원이다.[2] 함께 언급된 네로, 콤모두스와 달리 폭군은 아니었지만 암살 직전까지 개인우상화가 지나쳤고 원로원과의 관계가 최악인 데다 황제가 대놓고 고발인으로 정적을 기소 후 고문까지 벌여 원로원 의원 여럿을 죽인 탓에 만장일치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3] 오현제로 묶여 소개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역시 말년에 원로원과 사이가 최악이 되면서 기록말살형 선고 직전까지 갔다. 이때 후임자로 양자로 입적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원로원에게 자신을 봐서 그런 일을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해, 실제 통과까지는 이루어 지지 않았다.[4] 카라칼라가 암살된 뒤 후대 황제들에게 게타 기록말살형에 폐기되면서 결정이 뒤집어지는 촌극도 벌어졌다.[5] 대표적으로 황소의 난안록산의 난 등등이 있고, 연산군만행조선이 망한 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는 것도 이 사상의 영향이다. 그러나 만적의 난이나 홍경래의 난 같이 기록자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재평가를 받는 경우도 생겨났다.[6] 삼국유사가 불교 편향적이고 사대주의적이라고 비판받고, 삼국사기가 마찬가지로 사대주의적이고 신라 편향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려도 역사 교과서에 그 두 가지 역사서만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외의 역사서는 아예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까. 삼국시대 이전 한국사 연구의 진전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7] 다른 문명이면 모를까, 로마 공문서와 기록체계의 수준은 현대 기준에서도 철저했으니.[8] 팽형은 실제 존재에 대해 논란이 있다.[9] 사실 이 사원도 과거 홍수 때문에 쓸려가버린 원래 신전을 재건축한 것이다.[10] 그런데 2022년에 현철해 소개편집물에서 나타났다.[11] 예시(장성택 숙청 전후 북한 기록영화 모습)[12] 백석은 엄밀히 말해 월북이 아니다. 정치성향 상관없이 고향이 이북에 있고 이북에서 쭉 살았으므로 6.25 전쟁 이전에 서울을 떠나 이북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기 때문이다.[13] 10.26 사건 이후 지휘관으로 재직했던 3군단6사단에서 사진과 기록이 삭제되었으나 2019년 4월 국방부의 훈령 개정으로 2019년 8월 1일부터 김재규의 사진이 다시 걸리게 되었다. 김재규의 공과야 어떻든 김재규의 존재 자체는 기억하기로 한 것이다.[14] 뉴턴이 미분을 발견한 해는 1666년이고 라이프니츠는 1676년으로 10년의 시간차가 있고, 이 순서는 엄연한 사실이다.[15] 왕립학회장이라는 지위를 악용하여 이를 판정할 심사위원 한명 한명을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으로 세심하게 고르는 등.[16] 뉴턴과 훅의 관계는 당시에도 유명해서(훅은 뉴턴이 뭘 발표하면 본인 것을 표절했다고 우겼고, 뉴턴도 훅에 대해서 실험 감독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라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막 깠다) 당시에도 뉴턴이 없앴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실제로 그랬는지 확인된 건 아니다.[17] 원본 영상은 어디에도 없으며, 인터넷상에 떠도는 영상은 프레임 수를 낮추는 등 편집을 가해서 문제의 여지를 없앤 거다. 참고로 한국 방송분에는 해당 화가 아예 삭제되어 방영됐다.[18] 전역을 3일 남겨두고 적발당했다.[19] 연공서열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는 한국 특성상 강등=권고사직으로 작용한다는 점까지 고려해서 강등과 해임의 차이보다 해임과 파면의 차이가 더 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20] 다만 보컬의 EZ2DJ까지는 지우기 힘들었는지 그대로 놔뒀다.[21] 기존의 EZ2DJ 이지투디제이 AMUSEWORLD EZ2DJ 6th 어뮤즈월드였던게 EZ2AC 이지투에이씨 SQUARE PIXELS EZ2AC 스퀘어픽셀즈로 바뀌었다.[22] 패턴은 그대로라서 해당하는 부분의 노트는 그대로 나온다. 프리뷰에서는 EZ2DJ 부분이 그대로 나온다.[23] KBS 예능 아카이브 채널인 깔깔티비에서는 정준영이 나오는 부분을 아예 모자이크 처리하고 음성변조했으며, 시즌 4의 첫 회차에서도 다른 멤버가 의도적으로 가린 장면만 회상으로 처리하면서 아예 없는 취급을 하고 있다. 다만 스티브 유는 음악 방송에선 편집되지 않고 나왔으며, 시즌 4는 이후 전 멤버였던 라비가 또 사고를 치면서 해당 방송 분량이 모두 날아갔다.[24] 박씨는 본관이 여러 개가 있지만(밀양, 반남, 함양 등) 전부 박혁거세 계열이다. 오릉 문서 참조.[25] 당연하지만(?) 같은 가문의 박형준의 압도적 격차로 부산시장에 당선된 것을 축하하는 내용이다.[26] 그래서 지금까지도 라파즈라파즈홀심 홈페이지를 치면 자동으로 현 홈페이지로 리다이렉트된다.[27] 헐크 호건은 2018년 7월 복권되었다.[28] 다만 이 쪽은 살해 의혹만 있을 뿐 유죄 선고를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제명은 불합리하다는 의견도 많아서 말이 많았다.[29] 다만 아무리 레전드급 성적을 세웠다 한들 팬들이나 스포츠계에서는 인정해주지 않는다.[30] 2012년 조 패터노 감독 사후 장학금 대폭 감소, 6000여만 달러의 벌금, 4년간 포스트시즌 진출 금지, 1998~2011년까지의 14시즌(총 111승) 기록이 말소되는 등의 징계를 받았으나 2015년 1월부터 111승 기록은 다시 살아났다.[31] ##[32] 영화 십계에서는 바로 이 학설을 그대로 영화에 담았다. 첫 장면에서 이디오피아의 정복자로 모세가 나오고 있으며 파라오가 죽기 전에 스스로 그 칙령을 어기겠다고 하고 모세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33] 다만 이 영화는 1971년 영국 해머 영화사에서 만든 미이라의 저주 Blood from the Mummy's Tomb를 1980년 미국에서 리메이크한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도 여자 파라오에 대한 기록이 말살되었다는 설정이다.[34] 초반부에 윈스턴 스미스가 오길비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그의 영웅적인 행적에 대한 빅 브라더의 칭찬과 함께 "우리도 오길비 동무를 본받아야 한다"고 편집했다.[35] 신발 생산량이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자 목표량을 낮춰 생산량을 초과달성한 것으로 속인다.[36] 유라시아가 인도를 공격할 것이란 빅 브라더의 주장이 틀리자 아프리카로 왜곡하여 빅 브라더의 예측에 맞게 바꾼다.[37] 애초에 이 소설의 오세아니아 정부 4개 기관 이름은 전부 다 이런 식이라 반동분자를 고문하고 세뇌하는 '애정부/애정성', 툭하면 배급량만 깎는 '풍요부/풍부성', 전쟁을 총괄하는 '평화부/평화성', 이렇게 이름과 활동이 완전히 반어법처럼 묘사된다. 이는 작가가 의도한 바라고 밝혔다.[38] 한 예로 영웅 친구들끼리 타임캡슐을 묻었는데 자기가 묻은 게 사라진 건 물론이며 단체로 사진을 찍었는데 자기만 쏙 빠졌다.[39] 작중에서는 아스가르드 왕궁의 천장화를 통해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왕궁 천장에는 평화 조약같은 오딘의 선정과 그에 힘입은 아스가르드의 번영을 묘사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것이 파괴되자 그 밑에 있던 진정한 과거를 그린 천장화인 오딘 부녀의 정복 전쟁을 묘사한 그림이 드러난다.[40] 2천년이 지나 다섯 영웅의 후신인 기라를 포함한 네 국왕에 의해 사면된다.[41] 차단 회피자의 기여분이 90%가 넘으면 휴지통 처리 된다.[42] 다만, 경우 및 상황에 따라서는 차단 회피자의 기여 분을 삭제하는 것만으로 관리자가 직접 개입 및 제재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2024년 10월 초쯤 한 이용자가 좀비, 아우터 갓, 그레이트 올드 원, 아테나, 제우스, 아프수, 마르두크 등 종교 및 신화 관련 문서에 있던 차단 회피자의 기여분을 지웠는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관리자(혹은 운영자) 입장에선 정도가 지나쳤다 판단했는지 관리자가 리버전 되돌리기를 통해 해당 이용자가 삭제한 분량을 되돌린 바가 있다.(한동안 해당 이용자가 남긴 편집 요약문이 '관리자에 의해 반달로 표시'로 바뀌었고 해당 이용자의 기여 내역 중 종교 및 신화 관련 문서에 취소선이 그어졌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재가 풀린 것인지 해당 이용자는 관리자가 복구한 분량을 다시 삭제했다.[43] 심각한 불쾌감을 주는 내용, 개인정보 및 국가 기밀 등 민감한 정보 유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