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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23:06:53

밀양 박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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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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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陽 朴氏 (密城 朴氏)
밀양 박씨 (밀성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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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colbgcolor=#fff,#191919>경상남도 밀양시
원시조 혁거세 거서간
비조 경명왕 박승영(朴昇英)
시조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
파시조 박언부(朴彦孚), 박언상(朴彦祥), 박언인(朴彦仁), 박양언(朴良彦), 박천익(朴天翊), 박을재(朴乙材), 박원(朴元), 박척(朴陟), 박원광(朴元光), 박중미(朴中美), 박위(朴威), 박현(朴鉉) 등
집성촌 서울특별시 마포구
부산광역시 수영구
대구광역시 동구·군위군
경기도 성남시·화성시
충청북도 청주시·영동군
충청남도 천안시·금산군·예산군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전라남도 보성군·장성군·진도군
전라남도 해남군
경상북도 경주시·김천시·상주시
경상북도 영천시·의성군
경상북도 청도군·청송군
경상남도 밀양시·의령군·합천군
인구 3,168,084명(2015년) | 국내 2위
링크 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밀양박씨규정공파대종회

1. 개요2. 역사3. 항렬
3.1. 규정공파3.2. 판서공파3.3. 복야공파3.4. 아당공파
4. 분파5. 인명6. 여담

[clearfix]

1. 개요

경상남도 밀양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박씨 인구의 80% 정도를 차지한다. 김해 김씨에 이어 본관별 인구로는 2위다. 이씨 최대 본관인 전주 이씨보다도 많다는 점이 특징인데, 본관 순위로는 김해 김씨-밀양 박씨-전주 이씨가 된다.

2. 역사

[[신라|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파일:투명.png
신라의 역사
新羅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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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5d2,#ccc4a8> 시대 국가
고신라
(古新羅)
왕정 이전
진한 사로국
(계림)
삼국시대 신라
신라
보덕국 | 계림대도독부
삼국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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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신라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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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귀족
박씨 왕조 | 석씨 왕조 | 김씨 왕조
성골 | 진골 | 육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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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박씨[1]를 포함한 대부분의 박씨는 신라 건국자인 박혁거세의 후손들이다. 초창기 신라(서라벌) 6촌 백성들의 지도자로 선출된 박혁거세는 신라 시대 내내 신라인들의 시조로 숭상되어 왔다. 훗날 금척 전설이 생기고 김·석씨 왕들이 혁거세를 시조로 여겨 신궁에서 제사 지낸 것은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왕실에서 주관하여 세종 때 경주 숭덕전을 세워 이를 이어왔고, 임진왜란 이후엔 박씨 선비들이, 현재엔 오릉보존회 등의 단체들이 해마다 봄, 가을에 모여 혁거세에 대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박씨는 신라 초기에 7명, 후기에 3명, 총 10명의 국왕을 배출하였다. 박혁거세의 후손은 크게 절대다수인 일성왕계와 소수인 파사왕계로 나뉘는데, 밀양 박씨는 그중 일성왕계로 분류되며 경명왕의 제1왕자인 30세 밀성대군 박언침(密城大君 朴彦忱)을 도시조로 한다. 박언침은 밀양, 반남 박씨들의 공동 시조가 된다.[2]

고려 개국 시점에, 밀성대군이 아버지 경명왕으로부터 분봉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밀양경주시 일부 등 영남에 기반을 둔 신라계 유력 호족 중 하나였고, 밀성대군의 아들 박욱이 기인 제도로 삼한벽상공도대장군으로 고려조정에 출사해 개경에 진출했다.

박욱의 7대손 박언부는 고려의 황금기였던 문종 치세에 태사중서령을 역임하고 문하시중에 올라 당시 최충 등과 함께 명재상 반열에 올랐다. 이후, 좌복야 박언인, 밀직부사 박양언, 판도판서 박천익, 삼사좌윤 박을재, 도평의사사사 박언상 등등 고려 역사에서 가장 태평성대에 주요 관직에 후손들이 이름을 올림으로써 이름이 있는 문벌귀족이 되었다.

비록 권신이나 왕비를 배출해 중앙정계에서 강한 권력을 휘두르거나 재상지종가문은 아니었으나, 개경에서 가까운 경기, 패서 일대에 기반을 둔 유력 문벌귀족들에 비해 결코 떨어지는 집안이 아니었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쓴 송나라 책인 고려도경에 이들이 언급될 정도로 영남 기반의 실력이 있는 문벌귀족 집안이었다.

특히 신라 말엽부터 경주 땅은 박씨의 영향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신라 말기의 영토가 경주 일대로 축소되어 김씨들의 기반이 거의 날아갔는지 이 시점부터 박씨 왕들이 새로 나오기 시작했고, 김현승의 김씨 복위반란으로 경주 안에서 시가전이 일어났지만 박씨인 경명왕이 이를 진압해서 지배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 결정적 근거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씨 왕들의 무덤이 몰려 있는 경주 남산 서쪽면 배동 일대에 경애왕릉, 배동 삼릉, 오릉, 박씨의 성지인 나정과 경애왕이 피살당한 제사용 연회공간인 포석정 등 박씨와 역사적 연관성이 높은 유적들이 대거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이쪽 구역이 박씨와 특별히 연관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3]

대몽항쟁 이후, 고려 정부가 원나라의 식민통치를 받아들였을 때 전라도 진도군에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경상도 밀성군(현재의 밀양) 군민들이 고을 부사를 죽이고 인근의 청도군까지 세력을 넓힌 후 삼별초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건이 벌어진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때 밀양 박씨가 그 배후세력의 핵심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당장 드러난 주동자 5명(박평, 박공, 계년, 방보, 박경순) 중 3명이 박씨다. 삼별초는 진압되고 이후 밀성은 반역의 땅으로 낙인되어 귀화부곡(歸化部曲), 즉 천민들이 사는 땅으로 바뀐다.[4] 이 흔적은 현재도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바로 밀양 바로 서쪽의 창녕군 부곡면, 즉 부곡하와이가 그것이다. 이후 복권되지만, 군이 현이 되고 다시 군이 되는 등 원간섭기에 꽤나 수난을 겪는다. 그런 와중에도 오히려 밀양 박씨는 권문세족들이 강성하던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인재들을 배출했고, 절묘하게도 반원자주를 국가정책으로 밀었던 공민왕 시기에 정점에 달했다.

이 시기의 주요 인물로는 충렬왕 때 급제한 후 내부시승에 임명된 충헌공 박척, 판전교사사로 봉해지고 원나라로부터 문하찬성사로 증직받은 박원, 전법판서 박천명, 사헌부 규정 박현[5], 대제학 박중미, 박광후, 박윤겸, 공민왕 때 장원급제한 성균관대사성 박의중, 고려군 1만 명을 이끌고 왜구의 전초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박위,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박득중, 고려 때 호조전서였으나 조선 개국 후 두문동 전설에서 죽었다는 박침, 박침의 아들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참찬의정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세종에게 딸을 후궁으로 시집보낸 박강생 등이 있다.

고려 말 정국군파 파시조 박위가 대마도를 정벌할 때는 군사 1만 명과 전함 100척을 동원했는데, 기록상 고려 중앙군이 긴 전란으로 궤멸되고 다른 신흥무인들이 정벌을 주저할 때, 박위와 박천[6] 등 개인 사병들이 주축이 되어 먼저 출항하고 여러 다른 신흥무인들의 합세를 나중에 받은 것으로 보아 당시 밀양 박씨가 고려 내 크고 작은 신흥무인들 사이에서 구심점이 되어 세력을 이룰 정도의 경제, 군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주목할 만한 점은 정벌 이후 류큐오키나와 왕국이 고려에 신하가 되려고 특산물 등 조공을 보냈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이후에도 조공을 바쳤으며 이 시기부터 조선과 오키나와는 교류하기 시작했고, 낙후되어 있던 오키나와의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이후 규슈 다이묘였던 시마즈 가문의 정복으로 일본 영토가 되기 전까지 200여 년간 조선과 교류한다.

한편 고려 말 당시에 규슈 지방 토착 봉건 영주들이 정벌 얼마 후 사신을 보내 고려에 저자세를 취하며 접근해 왔으며 1390년엔 규슈절도사가 조공을 바쳤던 기록이 있고, 1391년엔 규슈에서 고려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등 성과들을 거두었다. 이들은 일본 남조 잔여세력으로 규슈는 고려 말 왜구의 발흥과 직접 연관있는 아지트였다. 이들은 꽤나 무장한 정규군이면서도 교토 인근까지도 약탈하는 등 자국내에서도 상당히 악명 높은 해적이었는데, 일단 머리를 숙여온 것이다. 이 시기 대마도 정벌은 확실히 밀양 박씨의 공이 크다.

고려 말 규정공파 박현의 후손들이 조선조에 유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고 현재 각파별 인구면에서도 가장 많다.

밀양 박씨는 조선 개국 이후 518년을 통틀어 문과 급제자가 261명, 무과 급제자 1125명,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문형) 2명, 청백리(淸白吏) 2명, 공신 6명, 생원진사 756명을 배출하는 등 대단한 가문적 행보를 선보였다. 260명을 넘는 문과 급제자 숫자에 비해 정승은 광해군 때 숙민공 박승종(영의정)[7] 한 명뿐이다.

경주 이씨와 마찬가지로 집성촌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포진하고 있다. 여기서 추가하면, 부산광역시전라남도 여수시, 목포시, 전라북도 군산시 근처로 갈수록 전체 인구에서 밀양 박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 # 이것은 전주 이씨경주 김씨이북 지역에 인구집성촌이 많은 것과 대조된다.

현대의 인물 중에서는 두산그룹 일가[8]포스코의 창업자인 박태준 등이 밀양 박씨이다.

3. 항렬

항렬의 폭이 굉장히 넓은 밀양 박씨의 경우 동 연령대지만 항렬이 10세손 이상 차이나는 경우가 의외로 흔하다. 동 연령대에서 복야공파나 은산군파에 속하는 사람은 규정공파나 양산군파에 속하는 사람에 비해 항렬이 훨씬 높다. 복야공파나 은산군파 계열은 현재 시조 61~64세손에 포진해 있는데, 규정공파 기준 해당 항렬이면 최소 조선 정조 시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3.1. 규정공파

<rowcolor=#ece5b6> 세수(파시조) 세수(시조) 항렬자
20世 64世 <colbgcolor=#ffffff,#222>재(載)○|기(基)○
21世 65世 ○진(鎭)|○수(銖)
22世 66世 준(準)○|영(永)○
23世 67世 ○래(來)|○화(和)
24世 68世 노(魯)○|성(性)○|병(炳)○|희(熙)○
25世 69世 ○규(圭)|○신(信)|○재(在)
26世 70世 종(鍾)○|상(商)○|용(鏞)○
27世 71世 ○순(淳)|○수(洙)|○호(浩)|○원(源)
28世 72世 상(相)○|주(柱)○|인(仁)○
29世 73世 ○열(烈)|○용(容)|○희(熙)
30世 74世 중(重)○|시(時)○|준(埈)○



3.2. 판서공파

<rowcolor=#ece5b6> 세수(파시조) 세수(시조) 항렬자
26世 67世 <colbgcolor=#ffffff,#222>수(壽)○|○희(羲)|상(尙)○|기(基)○
27世 68世 선(善)○|○현(鉉)|석(錫)○|○한(漢)
28世 69世 영(永)○|○수(洙)|택(澤)○|주(柱)○
29世 70世 식(植)○|근(根)○|환(桓)○|○연(然)
30世 71世 엽(燁)○|유(裕)○|변(變)○|훈(勳)○
31世 72世 희(喜)○|○곤(坤)|재(宰)○|길(吉)○

3.3. 복야공파

<rowcolor=#ece5b6> 세수(파시조) 세수(시조) 항렬자
22世 58世 <colbgcolor=#ffffff,#222>○흠(欽)
23世 59世 ○호(浩)
24世 60世 래(來)○
25世 61世 ○하(夏)
26世 62世 희(喜)○
27世 63世 ○용(用)
28世 64世 ○범(範)
29世 65世 병(昞)○
30世 66世 ○정(正)
31世 67世 의(義)○
32世 68世 ○기(紀)
33世 69世 용(鏞)○
34世 70世 ○재(宰)
35世 71世 종(種)○
36世 72世 ○규(揆)



3.4. 아당공파

<rowcolor=#ece5b6> 세수(시조) 항렬자
66世 <colbgcolor=#ffffff,#222>묵(默)○
67世 ○진(鎭)
68世 해(海)○
69世 ○상(相)
70世 제(濟)○

4. 분파

밀양 박씨의 분파는 수없이 많은데, 이를 각 파시조의 가계와 종법상의 순서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파시조 옆의 세수(世數)는 혁거세 거서간의 30세손(29대손)인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을 시조로 한다. 진하게 적은 것은 12개의 주요 파의 파시조를 나타낸다.[12] 그런데 영동정공파 파시조 박원광은 밀직부사공파 시조 박양언의 5대손 중 족보에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므로, 현대에 밀직부사공파와 영동정공파는 사실상 동일한 집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5. 인명

신분직위에 상관 없이 가나다순 정렬, 특정인물 강조표기를 금합니다.

6. 여담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재조명된 성씨인데, 바로 서울특별시밀양 박씨에서 해주 오씨로 바뀌고 부산광역시해주 오씨에서 밀양 박씨로 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밀양 박씨와 해주 오씨 둘 다 흔한 본관인 만큼 아주 신기한 일은 아니다.
일본의 성씨 아라이(新井)는 한국의 박씨들이 유독 통명이나 일본인으로 귀화할 때 이 성을 많이 쓴다. 우물에서 알이 나왔다는 시조 박혁거세의 설화 때문.
박씨는 밀양 박씨 밖에 없다.

[1] 함양 박씨, 순천 박씨, 반남 박씨, 고령 박씨, 영해 박씨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박씨들은 박혁거세의 후손들이다. 네덜란드인 박연이 귀화한 것은 박씨 본관이 이미 모두 생긴 뒤였다.[2] 1899년 밀양 박씨 측 기록에서 반남 박씨 박응주가 경명왕의 장남 언침의 후손이라며 반남 박씨를 밀양 박씨와 같은 계열로 추정하였지만, 반남 박씨 측은 이를 부정한다. 밀양 박씨 측 기록에는 경명왕의 아들들이 언(彦)자 항렬을 사용했다는데, 경명왕 당시에는 항렬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또한 ‘대군’이라는 당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호칭이 사용됐기 때문에 밀양 박씨 측 기록을 조작으로 보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3] 다른 설로는 신라의 왕실이 박성에 박씨, 석씨, 김씨 씨족이 나뉜 사실상 한 가문이라는 설도 있다. 엄격한 성씨구분이 적용됐을 경우 이는 매우 타당하다. 비슷한 예로 백제와 고구려의 경우 왕실끼리 서로 같은 성이라 여겼지만 기록상 국성이 다르다. 이는 국성이 다르다기 보단 국씨가 다르다 봐야 할 것이다. 2020년대 이후 이 가설이 학계에서 급격히 부상하고 있어 상당히 신뢰성 있는 가설이다.[4] 참고로 고려시대 행정체계는 부, 군, 현, 향, 부곡, 소 순으로 내려간다. 학교에서는 흔히 "향. 소. 부곡이 천민의 동네였다"라고 가르친다.[5] 조선조 밀양 박씨 최다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규정공파의 파시조.[6] 구산 박씨의 시조.[7] 선조 때 조정에 출사해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했다. 왜란 후 병조판서에 올라 문란해진 군적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등 그 능력을 증명했다. 붕당은 동인(소북) 소속으로, 밀창부원군으로 봉해지는 등 이이첨, 류희분과 함께 광해군의 삼창(三昌)이라 불릴 정도의 최측근이었다. 손녀는 광해군의 세자빈(며느리)였고 우, 좌, 영의정을 모두 지냈으나 인조반정 당일 전세가 기울자 경기감사였던 장남 박자흥과 함께 자결한다. 둘째 박자응은 유배 후 풀려나 후사를 이었고 이들이 규정공파에서 분적한 정승공파다.[8] 기사에는 부마공파라고 나온다.# 항렬자를 遠에서 原으로 바꿨다고 한다.#[9] 박휘순은 현대 한국남성에게 흔치 않은 '순'이란 글자 때문에 종종 같은 향렬로 오해 받는데 모 프로그램에서 자신은 상주 박씨라고 밝힌 바 있다.[M] 부마공파 파조 박갱의 증조부인데, 박윤문 처 김씨 묘지명 등 각종 묘지명에는 박밀양으로 기재된 반면 『문화 류씨 가정보』 및 『씨족원류』에서는 그를 밀양군 박린(朴僯)이라고 기재했다. [11]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아들이 처가에 들어가 살고 딸과 사위가 부모의 집을 물려받는 경우가 대다수였다.[12] 선정 기준: 밀양 박씨 규정공후 절도사공파세보 1권 335~6면.[13]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라고도 한다.[14] 박승안의 아버지인 박안명(朴安命)을 파시조로 간주하고 월봉공파(月峰公派)라고 부르기도 한다.[15] 파시조의 호를 따서 강수공파라고도 한다.[16] 고려 충선왕 때 인물로, 밀성군은 작위이고 사후 충헌공의 시호를 받았다. 밀성군파 혹은 척자공파라고도 불린다.[M] [18] 조선 정종의 장녀인 함양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됐다.[19] 일명 돈지(敦之).[20] 복야공파라고도 한다.[21] 계보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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