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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04:14:13

시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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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島,ruby=しま)][ruby(津,ruby=づ)][ruby(氏,ruby=し)]
시마즈씨
파일:사츠마 시마즈 가문 문장.svg
<colbgcolor=#3a3c4f> 시마즈 가문의 가몬
동그라미에 열십자[1]
丸に十文字
본성 고레무네씨(惟宗氏) 이미키류(忌寸流)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요리토모류(頼朝)(자칭)
가조 시마즈 타다히사(島津忠久)
종별 무가(武家)
화족(華族) (공작)
근거지 가마쿠라
사쓰마번
도쿄도
가고시마현
지류
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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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인씨(伊集院氏)
혼고씨(北郷氏)
니이로씨(新納氏)
가와카미씨(川上氏)
가쓰라씨(桂氏)
사다씨(佐田氏)
사코미즈씨(迫水氏)
가바야마씨(樺山氏)
야마다씨(山田氏)
기이레씨(喜入氏)
노노야마씨(野々山氏)
마시다씨(町田氏)
당주 제32대 시마즈 노부히사(島津修久)
한자 島津
히라가나 しまづ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 시마즈
'통용 표기' 시마즈

1. 개요2. 역사3. 역대 당주
3.1. 17대 당주에 대하여
4. 시마즈 가의 분가5. 공식 서명에서 사용하는 성6. 관련 서적7. 인물
7.1. 실존 인물7.2. 가상 인물

[clearfix]

1. 개요

시마즈(島津)는 중세 가마쿠라 시대부터 근대 메이지 유신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일본의 명문가다.

본성은 고레무네(惟宗)씨였으나 나중에 헤이안 시대 제56대 세이와 덴노의 후예인 세이와 겐지(清和源氏)를 자칭했다. 규슈 사쓰마 번의 번주로서 해당 지역을 다스렸고 더 나아가 남쪽의 류큐 왕국[2]도 간접 통치했다. 이 때문에 오키나와현류큐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시마즈 가문에 암군은 없다"(島津に暗君なし)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대대로 유능한 인물들이 당주를 역임했기 때문에 가이에키 한 번없이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1,000년 가까이 영지 이동이나 영지 몰수없이 한 영지를 통치한 시마즈 가문의 사례는 일본사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극히 드문 일이다.[3] 그래서 무가 중에서도 도쿠가와 다음가는 명가로 여겨지는 편이다.

대대로 이름에 타다()나 히사()를 많이 넣었으며 이 전통은 메이지 시대 이후 오늘날에도 이어져 장남의 이름에는 '타다'(忠)를, 차남은 '히사'(久)를 쓴다.

2021년 기준으로 23,000명이 사용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이기도 하다.

2. 역사

2.1. 가마쿠라 시대

일설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장남으로서 아기 때 바다에 던져져 살해당했다는 이토고젠의 소생 센츠루마루(千鶴丸)가 시마즈 가문의 시조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마즈 가문이야말로 무가의 전설 그 자체인 카와치 겐지 가문의 장손으로, 카와치 겐지의 가장 가까운 분가 출신인 무로마치 막부아시카가 쇼군가나 먼 분가[4]라고 주장한 미카와 지역의 토호 출신인 에도 막부도쿠가와 쇼군가보다 더 정통성이 있는 무사 정권의 쇼군 가문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전설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헤이케 편을 들었다가 겐지 쪽으로 전향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초대 당주인 시마즈 타다히사가 사츠마, 오스미, 휴가 3국의 슈고직을 맡아 가마쿠라 막부 내의 유력 고케닌이 되었다. 그러나 '히키 요시카즈의 변'(比企能員の変)[5]에 연좌되어 오스미와 휴가의 슈고직을 박탈당하여 가마쿠라 시대에는 사츠마 슈고직만 대대로 물려받았다.

타다히사의 적자였던 시마즈 타다토키가 '조큐의 난'(承久の乱) 당시 활약하여 와카사 슈고직과 각지의 지두(地頭, 지토)직을 얻었으며, 조큐의 난 이후 타다히사는 에치젠의 슈고직을 받았다. 또한 조큐의 난 당시 사용했던 '타치'(太刀, 태도)는 강절이라 불러지게 되었으며, 겐지의 백기타다히사의 오요로이(大鎧, 갑옷)와 같이 시마즈 가문의 역대 당주들이 대대로 물려받았다.

1227년, 타다히사의 사망으로 에치젠 슈고직은 타다토키가 상속받았으나 곧 고토씨(後藤氏)에게로 돌아갔다. 제3대 당주 시마즈 히사츠네의 '원구'(원나라의 몽골군) 토벌을 계기로 시마즈 가문의 사츠마 입부가 시작되었으며, 제4대 당주인 시마즈 타다무네 대엔 본격화되었다. 타다무네는 사츠마에서 사망한 첫 시마즈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2.2. 난보쿠초 시대

가마쿠라 막부의 힘이 싯켄 호조 가문의 독재로 쇠퇴하고, 반막부 세력의 힘이 강성해지자 제5대 당주인 시마즈 사다히사는 제96대 고다이고 덴노의 막부 토벌 운동에 참여했고, 규슈의 고케닌들과 함께 '산제이 탄다이'(鎮西探題, 진서탐제)[6]를 공략, 다시 오스미, 휴가 2국의 슈고직을 받게 되었다.

현실과의 심각한 괴리로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이 붕괴하면서 겐무 정권에서 이탈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셋츠에서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규슈로 도망쳐온 것을 도와 타타라하마 전투(多々良浜の戦い)에서 활약하는 등 규슈 세력의 유력 다이묘로 활약했다. 사다히사는 적자인 무네히사를 일찍 잃었기에 3남인 모로히사와 4남인 우지히사에게 각각 사츠마, 오스미의 슈고직을 분배하여 시마즈씨 영지를 분할•상속시켰다.

3남 시마즈 모로히사는 카즈사노스케(上総介)에 임명되어 있었기에 그의 자손은 소슈 시마즈 가문(総州家)으로, 4남 시마즈 우지히사는 무츠노카미(陸奥守)에 임명되어 있었기에 그의 자손은 오슈 시마즈 가문(奥州家)으로 불리게 되었다. 외척 세력을 상대할 때는 놀라운 단결력을 보였지만 그러한 외척 세력이 사라진 후엔 서로를 견제했다.

2.3. 무로마치 시대

타도해야 할 적이 사라진 시마즈씨의 양 가문은 서로 대립했으나 제7대 당주인 시마즈 코레히사와 그의 적자인 모리히사 간의 관계에 불화가 생겨 소슈 시마즈 가문에 내분의 위기가 고조되자 오슈 시마즈 가문의 당주였던 시마즈 모토히사가 이를 중재했으며, 이에 은의를 느낀 소슈 시마즈 가문의 당주 코레히사가 사츠마 슈고직 및 시마즈 가문의 중요 가보를 물려주어 겉으로는 시마즈 가문이 통일되었다. 훗날 무로마치 막부로부터도 상속이 인정되었으나 소슈 시마즈 가문이 멸망한 것이 아니었기에 양 가문의 갈등은 존재했다.

그후 모토히사의 대를 이를 아들이 없어 시마즈 가문의 필두 가로[7]였던 이쥬인 요리히사(伊集院 頼久)가 자신의 아들을 시마즈 가문의 차기 당주로 세우기 위해 획책했으나 모토히사의 동생이었던 시마즈 히사토요가 이를 알아채고 형 모토히사의 위패를 앗아가 제8대 당주가 되었다. 이에 당주에 오를 기회를 빼앗기게 된 이쥬인 가문은 앙심을 품게 되었고, 원래 이쥬인 가문이 소슈 시마즈 가문(総州家)를 지지했기 때문에 이쥬인 요리히사가 반란(伊集院頼久の乱)을 일으켰으나 당주 히사토요가 진압하여 시마즈 가문의 수호령국제(守護領国制)를 완성시켰다.

제9대 시마즈 타다쿠니의 대에 들어선 시마즈 가문은 슈고 다이묘로 확립되었고, 비교적 안정적인 치세를 누렸으나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점이 존재했다. 타다쿠니의 동생인 시마즈 모치히사(島津用久)의 명성이 높아지자 형제간에 대립이 일어났으나 타다쿠니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제10대 시마즈 타츠히사의 대에 오닌의 대란이 발발하여, 호소카와 카츠모토의 동군에 가담했다.[8]

제11대 시마즈 타다마사는 게이안 겐주(桂庵玄樹)를 초빙하여 사쓰난 학파(薩南学派)를 일으키는 등 학문의 연구에 힘썼으나 영지 내의 일족 및 토착민의 반란 등으로 인해 세상을 비관하다가 자결했다.

이후 제12대, 제13대 당주는 모두 요절하여 토착민과 오스미의 키모츠키 가문, 휴가의 이토 가문을 누를 수 없었고, 여기에 시마즈 가문의 일족들까지 더해져 시마즈 본가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윽고 이자쿠 시마즈 가문의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良)와 삿슈 시마즈 가문의 시마즈 사네히사(島津実久)가 본가에 비해 압도적인 세력을 보이자 제14대 당주인 시마즈 카츠히사는 사네히사의 압박에 못이겨 어머니의 친가인 오토모 가문의 분고로 망명했다. 이리하여 한때 시마즈 사네히사가 시마즈 가문의 '3주 슈고'로 인정받았으나, 이자쿠 시마즈 가문의 타다요시·타카히사 부자가 사네히사와의 전투를 통해 사츠마와 오스미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시마즈 타카히사[9]가 제15대 당주가 되었다. 패배한 시마즈 사네히사의 슈고직은 기록 말살되었다.

2.4.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제16대 시마즈 요시히사는 휴가의 이토 가문을 구축하고, 3주를 통일했다.

1578년 규슈 최대의 세력이었던 오토모군을 미미가와 전투에서 박살냈으며, 1581년에는 히토요시의 사가라(相良)를 항복시켰다.

미미가와 전투 이후 쇠퇴한 오토모 가문 대신 규슈 최대의 세력이 된 히젠의 류조지(龍造寺) 가문을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박살내면서 시마즈 가문은 규슈 최대의 전국 다이묘로 성장하게 되었고, 분고와 부젠 일부를 남겨놓은채 규슈 통일을 목전에 두면서,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급성장에는 실전을 통해 익힌 철포 전술이 큰 힘을 발휘했다고 사료된다.

하지만 얼마 못 가 1587년, 오토모 소린은 규슈 밖 일본 열도 대부분을 통일한 효웅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도요토미의 대군이 규슈 정벌을 시작하자 압도적인 체급을 버티지 못하고 몇 번의 전투 끝에 항복하게 되었다. 패배한 시마즈 가문은 획득했던 땅 대부분을 토해내고 사츠마와 오스미, 그리고 휴가의 일부분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2.5. 에도 시대

1600년, 일본 열도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대전 당시 서군에 속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적대 관계에 빠질 뻔 했지만 순순히 항복하여 영지 안도를 인정받았다. 이후 사쓰마 번으로서 막번 체제에 포함되었으며, 분가하여 사도와라 번(佐土原藩)이 생겼다.

1609년에는 시마즈 타다츠네류큐 왕국를 침공하여 아마미 제도를 영지로 복속시키고, 류큐 왕국을 종속국으로 두어 조공을 받았다. '호레키 치수'와 같은 에도 막부의 번 약화 정책을 겪는 등 압박을 받았으나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양녀 타케히메가 시마즈 츠구토요의 후처로 시집오거나,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이자 텐쇼인으로 유명한 아츠히메가 제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이 되는 등 도자마 다이묘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도쿠가와 쇼군가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1614년의 오사카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기에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리사쓰마로 도주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지만 별일 없이 넘어갔다.

격변기인 막말에 이르러 제28대 당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서양식 제철, 조선, 방직을 중심으로 한 근대 사업을 진행했으며 워낙에도 전통있는 명문 다이묘 집안에다 실력까지 겹쳐지니 도쿠가와 쇼군가, 그리고 공가의 필두 고셋케 중에서도 종가인 고노에 가문과 깊은 족벌 관계를 맺게 되었다.[10]

나리아키라가 죽은 후에는 그의 동생 시마즈 히사미츠를 중심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토막파 하급 무사 출신이 실권을 잡고 막부에 등을 졌으며, 막부를 타도하려는 조슈 번과 손을 잡아 유명한 삿초 동맹을 맺고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는 한 축이 되었다. 하지만 막부에 대한 원한이 깊은[11] 모리 가문의 조슈 번과 달리 구 막부인사들의 처우는 온건했다. 토막파라 하더라도 사쓰마는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원한이나 불이익을 당한 적도 없었고, 오히려 막부와 손을 잡고 조슈 토벌에 참여한 적이 있었으며 막부와 조슈번 사이를 중재하기도 했었다. 더욱이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이미 도쿠가와 쇼군가의 외척이자 에도 막부의 실력자였다.

2.6. 메이지 시대 이후 ~ 2차대전 시기

메이지 시대에 시마즈 타다요시의 본가와 아버지 히사미츠의 타마사토 시마즈 분가, 2집 모두 공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황실과 인척 관계가 있었던 사도와라 시마즈 가문은 백작의 작위를 수여받았으며 다수의 분가는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쇼와 덴노의 장모이자 아키히토의 외할머니가 시마즈 타다요시의 7녀인 시마즈 치카코(俔子)로 현재도 황실과 혈연 관계에 있다. 일본 제국 해군 초기를 주도한 것이 사츠마 번이었기에 당연히 사츠마 번의 당주인 시마즈 가문도 일본 제국 해군과 연관이 있다. 가령 일본 제국 해군 소장을 역임한 30대 당주 시마즈 타다시게(島津忠重)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2.7. 2차대전 이후 현재

전후 1951년에는 시마즈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던 회사인 '사츠마 공업 주식회사'의 명칭을 '시마즈 공업'으로 바꾸고 시마즈 가문의 당주가 시마즈 공업의 사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제32대 현 당주인 시마즈 노부히사가 사장을 역임했다가 현재는 회장 겸 CEO로 이름을 올리고 있고, 사장직은 그의 장남인 시마즈 타다히로가 물려 받았다.

3. 역대 당주

각 당주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보고 싶으면 영문 위키백과의 "시마즈 가문" 항목을 참고할 것 #

3.1. 17대 당주에 대하여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당주로 표기한 첫 사료는 막말에 편찬된 《시마즈씨 정통계보》(島津氏正統系図)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 '17대 당주=시마즈 요시히로'라는 인식이 정착되었고,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이후 요시히사에게 오스미 국, 요시히로에게 사츠마 국을 하사하여 '사츠마=시마즈'라는 인식과 겹쳐져 요시히로가 당주라는 인식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니시모토 세이지의 연구를 시작으로 요시히로는 제17대 당주가 아니다라는 파가 생성되어, 여러 논문이 나오고 있으며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4. 시마즈 가의 분가

에도 시대 이전의 분가
에도 시대 이후의 분가
서가(庶家)

5. 공식 서명에서 사용하는 성

시마즈 당주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양자가 된 무로마치 막부 초기에는 고레무네 노 아소미[21](惟宗朝臣) ○○라고 서명했으나 센코쿠 시대부터 닛타류 겐지를 자칭하기 이전까지는 쿠게(公家, 공가)고노에[22]의 서자 혈통이라면서 후지와라 노 아소미(藤原朝臣) ○○라고 서명했다.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쇼군가로부터 마츠다이라 성을 부여받으면서 마츠다이라 사츠마노카미 ○○라고 서명했다. 단 에도 시대 중기의 문서에 미나모토 아소미 ○○라고 서명한 것을 보아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6. 관련 서적

7. 인물

7.1. 실존 인물

7.2. 가상 인물



[1]가몬은 본래는 붓으로 쓴 '十'자인 '쥬지몬'이었으나 이후 위와 같은 형태로 변화된 것이다.(참고) 모양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기리시탄과 관련된 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시마즈 가문이 기독교가 일본에 들어오기 전부터 존속했으므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2]오키나와현[3] 일본사에서 이렇게 한 곳에서 쭈욱 내려온 다이묘로는 소마 나카무라(相馬中村) 번주 소마씨(相馬氏), 히고 히토요시(肥後人吉) 번주 사가라씨(相良氏), 쓰시마 후추(対馬府中) 번주 소씨(宗氏) 가문 등이 있다.[4] 정확히는 닛타류 겐지의 일문인 세라다 가문이다.[5] 쇼군가의 외척 호조 가문이 또다른 외척인 히키 가문을 숙청한 사건.[6] 규슈의 도호부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7] 이쥬인 가문은 원래 시마즈 가문에서 분가한 서가에서 유래했다.[8] 단 병력을 파병하지는 않았다.[9] 족보상으로는 이자쿠 가문 기준으로 제14대 당주 시마즈 카츠히사의 18촌 손자라는 어마어마하게 먼 관계였지만, 혈연으로는 7촌 조카뻘이었다.[10] 이를 통해 천황가와도 인척 관계가 되었다.[11] 막부 말기에 금문의 변 및 막부의 조슈 정벌로 여러 번사들이 처형되었기 때문이다.[12]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13] 미에현 구와나시에 위치해 있다.[14] 타다요시라는 설이 주류이고, 그 외에 타다하루, 타다아츠라고도 한다.[15] 가고시마현 소재의 신사로, 제27대 당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모시는 신사이다.[16] 宮司. 신사의 제사를 맡은 신관들 중 최고위이다.[17] 다만 여기에는 흑역사가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한 시기에 어머니인 시마즈 아키코가 노구치라는 유명 지압사와 바람이 나서 도망간 일이 있었다.[18] 시나노 시마즈 씨라고도 부른다.[19] 에치젠 시마즈 가이다.[20] 사도와라 번의 번주 가문이다.[21] '아소미'(朝臣)란 황족 이외의 신하 중 가장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팔색성(가바네)이다.[22] 近衛: 후지와라고셋케(5섭가)의 일원이었다.[23] 회사로고로서 시마즈 가문의 가몬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