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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2:08:06

쿠빌라이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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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db1> 몽골 제국 제5대 대칸
쿠빌라이 칸 | ᠬᠤᠪᠢᠯᠠᠶ ᠬᠠᠭᠠ
원 초대 황제
세조 | 世祖
파일:쿠빌라이.jpg
출생 1215년 9월 23일
몽골 제국
즉위 1260년 5월 5일[1]
몽골 제국 개평부
(現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자치구)
사망 1294년 2월 18일 (향년 78세)
원나라 대도
(現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재위기간 몽골 제국 대칸
1260년 5월 5일 ~ 1294년 2월 18일
(33년 9개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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孛兒只斤(패아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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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Хубилай)
忽必烈(홀필렬), 呼必賚(호필뢰~호필래)
ᠬᠤᠪᠢᠯᠠᠶ
부모 부황 예종 보르지긴 툴루이
모후 현의장성황후 케레이트 소르칵타니
종교 불교
묘호 세조(世祖)
시호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존호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
(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칸호 세첸 칸
薛禪汗(설선한), 色辰汗(색진한)
ᠰᠡᠴᠡᠨ ᠬᠠᠭᠠ
연호 중통(中統, 1260년 ~ 1263년)
지원(至元, 1264년 ~ 1294년)
언어별 표기 둘러보기 }}}}}}}}}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생애
3.1. 즉위 이전3.2. 즉위 이후3.3. 말년
4. 대외 관계
4.1. 고려와의 관계4.2. 일본 원정4.3. 대월 원정
5. 평가6. 기타7. 가족관계8. 대중매체에서
8.1. 문학8.2. 드라마·영화8.3. 애니메이션8.4. 비디오 게임
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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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담에서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나타난 어떤 사람보다도 많은 지역과 재물, 영토를 소유한 사람."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 사실상 통합 몽골 제국의 마지막 대칸[3]으로 이후에는 울루스들의 독자적 세력 형성이 시작된다.

묘호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칸호는 세첸 칸, 휘는 '보르지긴 쿠빌라이'다.[4][5] 휘의 어원은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백조를 뜻하는 튀르크어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자라는 중세 몽골어 어휘가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2. 언어별 표기

파일:쿠빌라이 칸.jpg
언어별 표기
<colbgcolor=#004db1><colcolor=#fff> 한국어 쿠빌라이 칸[6]
몽골어 ᠬᠤᠪᠢᠯᠠᠶ  ᠬᠠᠭᠠᠨ
Хубилай хаан
영어 Khublai khan
중국어 忽必烈汗
(Hū bì liè hàn)
일본어 クビライ・カン
(Kubirai kan)

3. 생애

3.1. 즉위 이전

그는 할아버지 칭기즈 칸이 한창 몽골군을 호령하며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던 1215년에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인 툴루이와 소르칵타니 베키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뒤 오고타이 칸툴루이계에게 화북 지역을 주었다. 쿠빌라이도 이때 한 지역을 받았는데, 아직 젊은 쿠빌라이는 통치 경험이 없어서 몇몇 관리들에게 통치를 완전히 맡기고 영지를 떠났다.

그동안 부패한 관리들이 세금을 쥐어짜서 백성들이 달아나고 영지가 황폐화되는 지경에 이르자, 쿠빌라이는 영지로 돌아가 한동안 고생하며 영지를 복구하였다. 영지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쿠빌라이는 중국의 여러 문화와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중국 승려카라코룸으로 불러 아들 칭김의 교육도 맡기는 등, 친(親) 중국적인 성향을 띠었다.

1251년, 형 몽케가 제4대 대칸의 자리에 오르자, 중국 방면 대총독에 올라 내몽골 지역에 자리 잡았다. 몽케는 오고타이 칸이 계획했던 남송페르시아의 정벌을 결심하고, 쿠빌라이에게는 중국 전선을, 그리고 다른 형제인 훌라구에게는 페르시아 전선을 맡겼다. 쿠빌라이가 북중국을 잘 다스려 화남 지역은 농업 생산량이 늘고 서민은 삶의 질이 올라갔다. 이러한 성공으로 북중국의 장수들과 관리들에게 지지를 받았고, 이들의 지지는 이후 원 제국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253년, 쿠빌라이는 몽케 칸의 명령을 받고 운남 지방의 대리국(大理國)을 정벌하여 남송의 측면을 돌파하고자 하였다. 쿠빌라이는 먼저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대리국의 단씨 왕조는 사자를 죽이고 항전하였다. 쿠빌라이는 1254년 대리국을 멸망시켰는데, 대리국에서 몽골의 사신을 죽였음에도 몽골 제국의 전통과는 달리 대량학살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결국 대리국이 쿠빌라이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였기 때문인 듯하다. 중국 측 사료에는 그의 참모 요추가 건의하여 쿠빌라이가 관용을 베풀었다고 했지만 과장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훗날 남송 정벌 과정을 생각하면, 쿠빌라이 자신이 다른 칸들보다는 호전적이지 않은, 너그러운 성격이라 과하게 피를 흘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굳이 학살을 벌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항복한 적을 용서하는 것은 몽골군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전술이기도 했다.

물론 사절 살해에 관여한 관리들은 처형했다. 가장 큰 관여자였던 재상 고태상은 사형당했지만 그 자손들은 처벌받지 않고 차별도 받지 않으며 그는 자신의 관대함을 보일 수 있었다. 어쨌든 쿠빌라이는 대리국을 공격함으로써 군사적 역량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7]

쿠빌라이는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능력을 높이 사서, 티베트 불교/정치적 문제에도 개입하였다. 사실 쿠빌라이는 불교를 편애하였다. 도교의 도사들이 절을 빈번히 약탈하자 몽케 칸이 쿠빌라이에게 두 종교의 분쟁을 풀도록 시켰는데, 1258년 쿠빌라이는 승려와 도사들을 불러 입배틀을 시켰다.[8] 도사들이 승려들에게 지자 쿠빌라이는 강제로 237개 도장을 불교 사원으로 바꾸고 도교 경전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의 지지 기반 세력이 북중국에 있었기 때문에 쿠빌라이는 친(親) 중국적인 정책을 펼침이 화근이 되어 형 몽케와 초원에 있는 몽골의 보수세력에게 의심을 받았다. 이 갈등은 제법 심각해서 1257년에는 세무 조사를 받았고, 상당수 가신들이 제대로 변호조차 하지 못하고 처형당했다. 이때 쿠빌라이는 아직 세력이 미약했다고 생각했기에 형인 몽케를 카라코룸에서 직접 만남으로써 갈등을 봉합했다.[9]

몽케와 보수 세력의 견제는 계속되어, 1258년 남송 원정 초반에는 원정군에서 제외되는 대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좌익군을 이끌고 있던 테무게 옷치긴 가문의 타가차르가 약탈 문제로 몽케와 갈등을 빚다가 그냥 자기 영지로 되돌아가자, 결국 그 자리에 임명되어 원정에 참여했다. 몽케는 1258년 3월에 성도를 점령하며 사천 지방 일부를 점령했으나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전진을 하지 못했고, 끝내 1259년 8월, 쿠빌라이가 전장에 도착하기 이전에 사망했다.[10]

쿠빌라이는 몽케가 죽었음을 알았는데도 계속 장강 변의 주요 도시 악주[11]를 공격했다.[12] 악주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가사도와 여문덕의 군대[13]가 악주로 지원을 오기 전 장승의 군대만이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여문신[14]은 몽골군의 장영실이 이끄는 군대에 패사했고 장승이 이후 쿠빌라이에게 항복하겠다고 하고 쿠빌라이가 물러나자 장승은 성의 민가를 철거하는 등 방어 태세를 갖춘다. 이후 강릉에서 고달이 원군으로 오자 몽골군이 공격하나, 고달은 계략으로 몽골군의 공언휘를 주살했다. 이후 가사도가 도착한 뒤 송의 장군 가사도는 쿠빌라이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었는데, 쿠빌라이에게도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15] 그러나 성 내 사상자가 13,000명에 달했는지, 비밀리에 쿠빌라이에게 접촉하여 장강을 경계로 국경을 나누는 대신 매년 남송이 막대한 세폐를 바치는 것을 제안하였다. 쿠빌라이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한족 참모 학경이 몽케 칸의 장례 등 할 일이 많다고 진언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고, 곧 가사도와 평화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16]

쿠빌라이는 막내 동생 아리크부카가 군대를 소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몽골 초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오기 전에 아리크 부카는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몽골 귀족들 대부분에게 지지받아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17] 몽골족 중에 쿠빌라이와 그의 다른 형제 훌라구[18]만이 아리크부카의 카간 즉위를 반대하는 형세였는데,[19] 북중국의 중국인 장군과 만주의 과거 금나라 출신의 여진족 장군들은 쿠빌라이를 지지하고 나섰다. 1260년 쿠빌라이는 자신의 본거지인 내몽골의 개평부로 돌아가 자신만의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칸을 칭했다.

내전이 나자 쿠빌라이는 배후를 든든히 하러 남송에 학경을 사신으로 보냈다. 하지만 가사도는 협정을 지키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학경을 가두었다.[20]

아리크부카는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대칸으로 추대받았을뿐더러 본래 몽골의 관습에서는 막내 아들이 세습했기에[21] 정통성에서 앞섰다. 쿠빌라이는 중국 화북이라는 강력한 배후 기지가 있었지만, 위에서 말한듯이 화북 이외의 점령지의 몽골군 사령관들과 칸들이 아리크부카에게 붙는 바람에 전체적인 전력에서는 약세였다. 하지만 각 칸국들이 자신들끼리 싸우느라 아리크부카에게 충분히 지원을 하지 못했고, 결국 국지적인 전력에서 쿠빌라이 쪽이 우세를 점하게 된다. 1261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 양 군세가 본격적으로 붙었을 때에도 쿠빌라이군이 승리하였으나 아리크부카는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수도인 카라코룸의 물자를 쿠빌라이가 끊는 데 성공하면서 판도가 쿠빌라이 쪽으로 기울었다.

아리크부카의 진영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아리크부카가 동맹국인 차가타이 칸국의 인물들을 살해하는 등 가혹한 처신을 일삼으면서 몽골인들의 민심까지 떠났다. 결국 1264년 8월, 아리크부카는 항복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를 지지했던 인물들은 죽였지만 아리크부카는 용서했다.[22][23] 이후 쿠빌라이는 새로 쿠릴타이를 열고 카간에 올랐다.

한편 이 내전 도중인 1262년, 쿠빌라이의 한족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쿠빌라이가 가장 신임하던 한족 관료도 끼어 있었다. 사실 쿠빌라이는 처음부터 한족 관료를 완전히 신뢰하지도 않았으며, 대부분 몽골 칸들이 그러했듯이 다국적으로 가신들을 구성했는데, 그래도 쿠빌라이가 역대 칸들 중에서 한족을 가장 신뢰하기는 했으므로, 그가 원하는 중국의 지배자가 되려면 한족들에게 지지받고 그들을 위한 정책이 필요했기 때문에 한족 관리는 계속해서 등용되었다. 당장 남송 정벌 당시에도 장홍범,[24] 사천택, 유정[25]과 같은 이들이 최고위 책임자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이들의 반란은 쿠빌라이가 남송을 공격하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언제라도 남송과 연대해서 자신의 통수를 칠거란 우려가 생겼기 때문이며 이는 북중국 정복지를 기반으로 한 쿠빌라이 군대가 전통적인 몽골 기병 군대를 제압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고, 이는 한 세기 뒤 남중국 홍건적들이 몽골 기병들을 몰아내는 것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3.2. 즉위 이후

1271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중국의 대도(大都)[26]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대원(大元)이라고 정했다. 그 김에 할아버지 칭기즈 칸태조(太祖)에 추증했다. 아울러 아버지 툴루이는 예종(睿宗)으로 추존했고, 큰아버지들인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에게도 각각 황백고(皇伯考), 황백고(皇伯考), 태종(太宗)이라는 제호를 올렸다. 사촌 귀위크 칸에게는 정종(定宗), 형인 몽케 칸에게는 헌종(憲宗)의 묘호를 올렸다. 이후 복식이나 의례도 죄다 중국식으로 바꿔 중국식 황제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는 칭기즈 칸이나 다른 유목 제국들이 정주 민족과 엄격하게 선을 긋고 문화적으로 섞임을 꺼렸던 것과는 정반대 행위다. 당시 중국의 인구와 경제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중국을 정벌하고 통치하기 위한 수단인 듯하다.

즉위 초에는 반대파 몽골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느라 제대로 남송 정벌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그 외에 상당히 오랫동안 남송 정벌을 위해 수군을 준비하고 훈련하는 등 전쟁 내내 준비 기간도 길었다. 실제로 별 수를 다 써도 양양을 공략하지 못했고, 결국 훌라구에게 도움을 요청해 파견된 이슬람 기술자들의 공성 병기를 동원하여 겨우 점령하였다.

한편으로 그의 군대가 양양 공방전에서 일부러 힘을 보존하면서 포위전만 질질 끌어 물자를 바닥내려는 작전을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투 중간중간에 중단된 적도 있으며 서로 시장을 연 적도 있고, 성 안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부녀자들을 내보내는 것을 승인하고 보호해준 적도 있었다. 한 마디로 처음부터 몽골군은 많이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육로 & 수로를 철저하게 봉쇄해서 상대를 말려죽이는 전략을 택했던 것이다.

반면 남송 쪽은 정반대의 입장이라 어떻게든 양양을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수많은 장군들이 몽골군의 포위를 뚫어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들의 포위망을 뚫어 물자와 병사를 전달하곤 했다.[27] 이런 필사적인 남송군의 의지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 몽골군이 완벽한 포위망을 유지하지 못하게는 했지만 이것도 후반에 가서 수군을 제대로 구축한 몽골군에게 실패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쿠빌라이는 동생이 보내 준 이슬람 기술자들의 공성 병기에 힘입어 번성을 함락시키고 양양성에 마지막으로 항복 권유를 하여 양양 성주였던 여문환항복을 받아냈다.[28] 양양의 함락 뒤 남송의 방어 체계가 무너져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남송 영토를 차례차례 정복한다. 실제로 몽골군은 포위전을 하면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반면 남송군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수많은 병사들이 전멸하고 물자를 써야 했기 때문에 몽골군의 포위 전략이 효과를 거둔 셈이다.

양양 공략에 몽골과 남송이 이토록 집중한 이유는, 이곳이 남송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형주 문서에 나오듯이 양양을 비롯한 형주 지역은 북중국과 남중국을 연결하는 중심지였다. 남송의 수도인 임안을 중심으로 한 강남(중국)은 하천과 호수, 습지가 많아서 직접 공격하기엔 몽골의 기병이 제 힘을 발휘하기 힘들고, 이 양양을 뚫어야만 순조로운 진격이 가능했다. 따라서 남송은 이곳을 반드시 막아야 했던 것이다.

1276년, 마침내 남송의 수도 임안[29]를 함락해 멸망시키고 조씨 황족을 대도로 불러와 나름대로 후대했다. 하지만 남아있던 잔당 세력이 어린 황자를 데리고 도주했다. 남송의 잔당은 홍콩 근처 애산(涯山)이라는 섬에 요새와 행궁을 짓고 자리를 잡았는데, 1279년 애산 전투를 끝으로 남송은 사라졌다.

이로서 원나라는 순수 이민족 왕조로서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 북방 민족의 피가 섞인 한족이 세운 통일 왕조로는 수나라당나라가 있었지만, 순수 이민족 혈통이 세운 통일 왕조는 원나라가 처음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에 학교, 무역항, 운하를 건설하고 과학과 예술을 지원하면서 원 제국을 크게 융성시켰다.

쿠빌라이는 미얀마, 베트남, 사할린 등을 침공했지만 완전히 점령은 못하고 형식적으로 칭신만 하게 하는 것에 그쳤다. 특히 인도네시아자바 섬베트남으로의 침공과 2차례의 일본 원정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쿠빌라이와 일 칸국십자군과 동맹을 맺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려 하기도 했다. 쿠빌라이 통치 아래 원 제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중심에 올라, 그의 연회에는 전 세계에서 사신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몽골 제국은 끝내 나뉘었다. 오고타이 칸의 손자 카이두 칸이 반(反) 쿠빌라이 세력을 규합하며 아리크부카의 계승을 선언, 쿠빌라이 칸을 찬탈자로 비난하고 대란을 일으켰다. 1276년 쿠빌라이는 4남 노무간에게 대군을 주어 원정을 보냈지만, 친(親) 아리크부카 장수들이 진중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을 킵차크 칸국에 넘겨버리고 카이두에게 붙었다.

1277년 카이두가 카라코룸으로 진군해 오자 쿠빌라이는 명장 바얀을 파견하여 카이두를 격파했다. 1287년 카이두가 동방 3왕가들과 결탁하여 또 쳐들어 오자 쿠빌라이는 먼저 동방 3왕가들을 멸망시키고, 카이두를 상대하러 갔다. 쿠빌라이가 동쪽에 있는 사이 카이두는 우세한 전황을 유지했지만 쿠빌라이의 본군이 오자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카이두의 세력이 점차 위축되었지만 두 칸의 전쟁은 쿠빌라이가 죽은 뒤까지도 이어졌다.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30] 등이 모두 반(反) 쿠빌라이 파였기 때문에 지금의 중동 지방을 지배한 일 칸국과만 친교를 이었다.

3.3. 말년

그는 점차 재정 정책을 위한 색목인 관료를 대거 키우면서 몽골인들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쿠빌라이 칸의 사후부터 원 제국은 점점 번영이 끝나고 기울기 시작한다. 대규모 원정으로 재정이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목민 특유의 후계 제도의 약점[31]과 황제가 티베트 불교에 물들어 명 4대 암군에 맞먹는 양태를 보여 문제가 심화되었다. 그리고 엄격한 한족 차별로 인구의 90%가 넘는 한족을 적으로 돌린 점도 있을 것이다. 대충 한족 10개 가구에게 식칼 1개 줘서 돌려쓰게 하고, 아궁이에 불때는 것도 허락받고 하고 수준이었다.

당시 색목인 관료들의 대표 주자로 권신 아흐마드 파나카티[32]가 있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었기에 '회회인'이라고도 불렸는데 돈 불리는거에 아주 뛰어나서 몽골 귀족들이 너나 할거없이 이들에게 돈을 맡기고 싶어했다. 1냥을 맡기면 10년 후에 1,000냥이 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색목인들은 몽골 왕공 귀족들의 마음을 얻고, 대칸에게 '우리는 재물은 좀 탐하지만 한족들처럼 반란은 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다가가 점점 조정의 중추를 장악했다. 아흐마드 파나카티는 카라 키타이 포로 출신으로 처음에는 궁에서 잡일이나 하던 자였는데 워낙 민첩하고 영리해서 쿠빌라이 칸에게 중용되어 중서평장정사[33]로 파격적인 출세를 하게 되었다.

그 역시 돈불리는데 귀신이어서 각지의 세율을 제멋대로 정하고 각종 광산 사업을 독점하며, 농기구나 생필품 값을 올려 백성들에게 강매해 폭리를 취했다. 또한 일부러 화폐 가치를 폭락시켜 인플레이션을 조장하는 수법으로 경제를 박살내고 자신의 배를 불렸다.

하지만 방법이야 어찌되었건 국고 수입을 올려 놓았기에 쿠빌라이 칸은 아허마를 총애했고, 대칸의 비호 아래 아흐마드는 조정에 붕당을 조성하고 대저택을 지어 수백명의 미녀를 첩으로 삼는 등 권력을 농단한다. 점점 못할 짓이 없게 된 아흐마드는 아예 조정 인사까지 주무르려하고 심지어 군권까지 넘보았으며 이에 중서좌승상[34] 허형은
"아흐마드가 이미 민, 재, 군정 중 이미 두 가지를 장악했는데 군정마저 아허마가 가지게 되면 매우 우려스러울 것입니다."
라고 상주했다. 쿠빌라이 칸이
"아흐마드가 반역할까봐 그러는가?"
라고 묻자 허형은
"증거는 없지만 이미 모두 갖추었습니다."
라고 하며 아흐마드를 경계해야 한다고 답했다.

아흐마드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앙심을 품었고
"네가 뭔데 증거도 없이 날 모함해? 모반자는 너같은 놈이다! 권력과 여자를 탐하지 않고 깨끗한 척하며 인심을 매수하는 것이 모반의 증거가 아니냐!"
라는 어처구니 없는 항변을 했는데 어이없게도 쿠빌라이 칸은 이 궤변을 옳게 여겨 허형을 귀양보냈다.[35] 또한 최빈이라는 신하가 아흐마드의 악행을 고발하자 모함해 죽였고, 병부상서 장웅비에게는 자신의 정적을 모함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장웅비가
"무고한 사람을 모함해 얻는 벼슬 자리는 필요없소이다."
라고 거절하니 장웅비를 모함해 사직시켰다.

이렇게 아흐마드가 자신의 반대파, 특히 한족 관리들을 대거 모함해 숙청하는 짓을 일삼자 몽골 왕공 귀족들 사이에서도 아허마를 꺼리는 이들이 생겼는데, 쿠빌라이 칸의 장남 칭김이 대표적이었다. 칭김을 중국어로는 '진가'라고 하는데 유교적 정치 이상을 받아들였고, 한족 대신들을 존중했기에 아흐마드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느날 칭김이 아흐마드의 악행을 지적하며 그를 때린 적이 있었다. 조회 때 쿠빌라이 칸이 아흐마드 머리의 상처를 보고 무슨 일인가를 물으니 아허마는 차마 태자가 때려다고 할 수가 없어서 넘어져서 다쳤다고 답했지만, 칭김은
"아닙니다. 이자가 하도 간악해 제가 때렸습니다."
라고 하며 쿠빌라이 칸이 보는 조회 자리에서 아흐마드에게
"이 죽일 간신배 놈! 죽일 놈!"
이러며 또 두들겨 팼다고. 쿠빌라이 칸도 사실 내심 아흐마드의 악행을 알고는 있었지만 하도 그 돈 버는 재주가 아까워서 내치질 못했다. 이러다 보니 칭김 태자부터 대신들, 백성들까지 모두 아흐마드를 증오하는 지경이었다.

아흐마드는 명장 바얀을 모함하기도 했다. 아흐마드는 쿠빌라이 칸에게 바얀이 남송에서 압류한 재물과 미녀를 모두 가졌다고 모함했고, 화가 난 쿠빌라이 칸은 바얀의 저택을 압수 수색했지만 나온 재물은 전부 쿠빌라이 칸이 하사한 것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책...나중에 쿠빌라이 칸은 그때 일을 회상하며
"하마터면 충신을 죽일 뻔했다."
며 후회했다고.[36]

1282년 쿠빌라이 칸, 그리고 태자 칭김이 도성을 비웠는데 무관 왕저와 고씨 성을 가진 승려가 아흐마드를 암살하려는 거사를 꾸몄다. 그들은 80여 명의 무사들을 태자부의 사람들인 것처럼 꾸며 아흐마드의 집으로 들어가 아흐마드에게 태자가 왔으니 맞을 준비를 하라 소식을 전했고 태자의 조서를 위조해 추밀원 부사[37] 장역이라는 자에게 군대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장역도 아흐마드를 증오하던 사람이라 태자가 아허마를 죽이려는 것인 줄 알고 따랐다.

그날 저녁, 왕저는 무사들을 이끌고 아허마의 집으로 가
"태자께서 오시니 영접하라!"
라고 명령했다. 태자라면 오금을 저리는 아흐마드는 밖으로 나와 꿇고 고개를 숙여 대기했고 그틈에 왕저가 망치로 아흐마드를 내리쳐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다. 이에 장역이 보낸 병력들은 이건 태자와 무관한 일임을 눈치채고 왕저의 무리를 공격했으나 왕저는 도망가거나 저항하지 않고 의연히 포박되어 왕저와 그 무리들은 처형되었다. 처형장에서 왕저는
"나 왕저는 천하를 위해 해를 제거했다! 오늘 비록 죽지만 내일 사람들이 나의 사적을 기술할 것이다!"
라며 당당하게 2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아흐마드가 암살되자 조정 대신들로부터 백성들까지 모두 축제 분위기가 되어 모두 덩실덩실 춤추며 기뻐하고 술을 마시는 통에 대도[38]의 모든 술이 다 거덜날 정도였다고 한다. 민심이 이런 지경이자 쿠빌라이 칸은 그제서야 뭔가 느끼는 게 있었던지
"왕저가 아허마를 죽임은 뭔가 까닭이 있는 듯하다."
라며 아흐마드가 간신이었음을 인정했고, 그의 시신을 버려두어 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다. 아흐마드는 죽었지만 그의 붕당은 처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잔당은 반격을 준비하여 바로 황태자 칭김에게 황위를 물려주라는 상소를 올렸다. 권력욕이 아주 강한 쿠빌라이 칸에게 이런 상소를 올림은 그야말로 사자의 코털을 뽑는 격이라 잘못하면 칭김까지 연루되어 요절이 날 수도 있었다.[39]

이 상소의 폭발력을 우려하여 어사대[40]와 우승상 안동[41]은 상소를 감춰놓고 올리지 않았는데, 아흐마드의 잔당들은 이걸 알고 쿠빌라이 칸에게 보고했다. 쿠빌라이 칸은 대노하여 안동에게 추궁했다. 안동이 아흐마드의 잔당이 꾸민 음모와 모함이니 들으면 안 된다고 간절히 항변하자 쿠빌라이 칸은 안동에게
"그럼 그대의 죄는 없단 말인가!"
라고 물었다. 안동은
"죄는 인정하지만 이건 태자를 모해하기 위한 음모이며 이것에 속으신다면 천하가 혼란해질 것입니다."
라고 답했다.

안동의 간절한 충언에 쿠빌라이 칸은 분노를 어느 정도 풀고는 아흐마드의 잔당들을 모두 처벌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칭김 태자는 병을 얻어 오래지 않아 4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쿠빌라이 칸 이후 황실의 내부 분열 양상을 생각하면 소양이 뛰어난 칭김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또 쿠빌라이 치세의 몽골은 남송 지역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그들을 최하위 단계로 두었는데 몽골인을 살해하면 무조건 사형, 색목인을 죽이면 중국 돈 은 80냥, 하지만 한족을 죽이면 나귀 2마리만 물어주면 끝이었다. 또한 물자를 징발할 때도 한족은 색목인보다 2배 이상 많이 징발당했고, 이 때문에 한족 지역에서 키운 말이 씨가 말라버려 오히려 한족이 기르는 말은 아주 희귀해 고가에 팔렸다고 한다.

또한 한족은 무기 소지 금지, 종교 집회 금지, 무술 교육 금지, 야간 통행 금지, 시장 개설 금지, 사냥 금지 등 각종 제약을 걸었다. 그리고 20가구를 하나의 '갑'으로 묶고 몽골인 '갑주'를 두어 한족들을 감시했는데, 갑주가 명령하면 그 안의 백성들은 음식이든 돈이든 여자든 간에 모두 바쳐야 했다. 훗날 한족들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원나라를 무너뜨린 가장 큰 이유가 몽골인 갑주들이 부린 횡포였다. 그런 주제에 몽골은 남송을 정벌하고 나서도 남송 지역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결국 남송이 망한지 70여 년 만인 1350년대부터 남부 홍건적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남부의 통제력을 아예 상실했다.

쿠빌라이는 79세에 붕어했는데 장수왕처럼 오래 살았던 탓에 황태자 칭김이 죽고, 손자 성종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4. 대외 관계

4.1. 고려와의 관계

고려 원종은 몽골의 침략 끝에 더 이상 항전 의사가 없음을 전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항복하러 가던 중에 몽케 칸이 죽었는데, 후계자 자리를 놓고 내전 중이던 쿠빌라이가 즉위하리라 보고 일부러 쿠빌라이에게 접근하였다는 말도 있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다는 설, 가던 도중 내전 정보를 모른 채 가장 가까운 쿠빌라이 측에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는 썰이 있다.

이 때 원종은 쿠빌라이와 여몽전쟁을 끝내고 강화 조약을 체결하며 돌아와 무신정권을 끝내고 왕권을 회복했다. 흥미롭게도 이때 쿠빌라이는 고려를 고구려(고려) 그 자체(후신)로 생각하여, "당태종도 정복하지 못한 고(구)려의 후손이 제발로 항복했다." 하며 매우 좋아했다. 당시만 해도 아리크 부카와 대권 경쟁 중이었고, 정통성 측면에서 아리크부카 쪽이 좀 더 우위에 있던 상황에서 몽골제국에게 무려 30년이나 저항하던 고려가 제발로 쿠빌라이에게 와서 항복했으니 정통성 측면에서 상당한 힘을 보태서였다. 대외적으로 쿠빌라이 쪽을 계승자로 봤다는 증거다.[42] 이때 쿠빌라이는 고려 사절단을 매우 환영하며 대접하였고 이들이 고려 본국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도록 호위병력을 상당수 붙여 보냈다고 한다.

다만 카다안의 침입 당시에는 고려가 속절없는 모습을 보이자 "고구려가 강력하다고 했건만 고려는 어찌 이리도 나약하단 말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43] 전자의 고구려 관련 발언에 비해 사람들이 이 말은 잘 모르는데, 카다안의 침입 자체가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딸 제국대장공주고려 충렬왕에게 시집보내 고려의 왕비가 되게 했다.[44] 사실 이건 몽골에 있어서 굉장히 파격적인 조치였는데 원종이 제안했다고 하지만 원나라에서 황금씨족 직계 공주는 본래 몽골인하고만 혼인하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고려 왕족만은 유일한 예외로 자기 막내딸을 고려 왕비로 만든 것이며 사실상 고려 왕족을 점령국 중 유일하게 부마국이자 제후국으로 인정해준 셈이다.

제국대장공주는 충선왕을 낳았다. 충선왕은 외가인 원나라에서 오래 지내며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쿠빌라이의 증손녀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고려 왕비(제1비)의 자리를 원나라 여황족이 차지했다. 공민왕의 왕비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하면, 원나라 공주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횡포가 대단했다.

세계사적인 입장에선 볼 땐 형식적인 국가틀은 유지했지만 왕조 건국 과정의 문제 때문에 로마 제국에 예속된 거나 마찬가지였던 헤로데 왕가 치하 유데아 왕국[45] 및 조공을 바치고 칭신(稱臣)을 한 헝가리, 폴란드 등의 사례나 국체를 유지한 노브고로드 공국러시아 제공국들도 있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이지 원에 예속되어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해외에서 발행된 역사 지도는 대부분 고려를 몽골 제국의 영토나 속국, 적어도 그 영향권 내 있는 지역[46]으로 표시한다. 오스만 제국에 경기병을 공급해 주었으며 오스만의 황통이 단절되었을 경우 황위를 이어받도록 되어있을 정도로 우대를 받았던 크림 칸국을 오스만 제국의 영역 하에 포함시킨다.

4.2. 일본 원정

이즈음에 일어난 대삽질이라면 역시 원나라의 일본원정. 전통적으로 몽골군의 약한 수군을 뻔히 알면서도 자국보다 나름 수군이 있는 고려군만 믿고 송나라 정벌과 병행으로[47] 원정을 추진했는데, 1274년 1차로 원정할 때 아라비아 반도까지 교역을 다니던 고려군이 바다를 더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바다를 생판 모르는 원군 지휘부가 총지휘를 맡았던 게 문제였다. 포에니 전쟁 초기에도 해운국이었던 그리스의 일부 폴리스를 제치고 농경국가인 로마 제국의 군대가 연합해군 총지휘를 맡았다가 비슷하게 패배한 일이 있었다.

상륙해서 일본군에게 꽤나 강력한 타격을 몇 번 줬으며 당시 막부마저 긴장하게 만들었으나, 태풍에 쓸려 원정 함대의 1/5이 침몰하고 말았다.[48] 나머지 군사로도 그냥 지르면 끝인데, 원군은 장기전을 예상하고도 이를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이 피해에 깜짝 놀란 원나라 지휘부는 철수결정을 내려버렸고 이렇게 철수하다가 재수없게도 또 태풍을 만나 살아남은 함대의 절반 이상이 또 침몰해버렸다.[49] 이는 남송이 멸망하지도 않은 시점에서의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 원정이 그 시절판 임진왜란이란 설도 있다. 송나라가 항복하자[50] 당시 50만에 달하던 항복병들은 몽땅 기병 위주의 원군에 합류시키기도, 먹여살리기도 어렵고 써먹을 데도 없었고 그래서 일본 원정이 나왔다는 주장이다.

하여튼 이 일본원정 때문에 고려에선 군함을 건조하고 이들에게 먹일 군량미 모으느라 등골 빠졌다. 1차 ~ 2차를 대차게 말아먹었지만, 오히려 오기가 생긴 쿠빌라이 칸은 3차 원정을 또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3차 원정은 대월 공격을 위한 부대를 편성하면서 취소했다. 게다가 이런 원정을 수행하기 위한 재정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신하들이 죽기살기로 반대하여 끝내 쿠빌라이는 뜻을 꺾고 만다.

그러나 고려군을 믿지 못한 원군은, 자기들은 배를 못 모는데 배를 잘 모는 고려군이 배 타고 자기들을 버린 채 떠날까봐 겁먹어서 여러 번의 삽질[51]을 하며 몇날 며칠을 보내다가 끝내 태풍을 만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사실상 '우연히 태풍을 만나 망했다'가 아니라 '태풍이 올 때까지 기다린' 셈이다. 이 설에 따르면 이는 우연한 원정 실패가 아니라 언제든 필연적으로 망했을 원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뒤이어 1281년, 투항한 송군 10만 명을 강남 ~ 규슈 루트로[52] 원군, 고려군과 함께 원정을 보냈다. 일본 또한 1차 원정처럼 정예 사무라이 일기토하러 내보냈다가 돌격에 당하지 않고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러나 열도에 상륙한 군대는 막부군에 패배하고, 이전 보다 더 강력한 태풍이 불어와 몽골군 고려군 할것없이 궤멸당했다.

이후 일본은 이 자연 현상에 '신푸(神風, 신풍)'라는 이름까지 붙였고, 이후 일본은 신이 수호하는 나라라서 결코 패망하지 않는다는 불패(不敗)와 신국(神國) 사상이 생겨났다. '신주불멸(神州不滅)'도 같은 표현. 태평양 전쟁미국에게 본토를 폭격당하기 전까지는 '본토가 점령되어 패배한 적은 없다.'는 뜻에서 불패, 신국 사상이 횡행했다.[53]

그러나 안 그래도 쇠퇴하던 가마쿠라 막부는 이 침공의 여파로 더더욱 빨리 쇠퇴해 불과 50년 뒤 무너졌다.[54]

그리고 생각보다 일본의 피해가 큰건 아니었다지만, 1차 원정에서 규슈에 상륙한 여몽 연합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규슈 지역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이 때의 공포를 일본에선 '무쿠리고쿠리'(몽골, 고려)라 불렀고, 이것은 뒷날 미증유의 공포 등을 일컫는 표현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용례는 일본의 모 작가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무쿠리고쿠리의 구름'이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4.3. 대월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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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월 원정
쿠빌라이의 굴욕은 일본 원정 실패만으로 그치지 않았다.[55] 대월에도 3차례의 원정을 기획했었다. 1257년(1차 원정), 1284년(2차 원정), 1287년(3차 원정)으로 일본보다 더 많이 갔다. 심지어 3차 원정은 일본 원정을 그만두고 시작했을 정도로 대월 원정에 집착했다. 일본과 상황이 다른 게 일본은 일본이 격파한 게 아니라 태풍으로 말아먹은 거지만 대월은 이집트나 인도처럼 제 실력으로 깨부순 거라서 굴욕의 수준이 다르다.

1257년에 일어난 1차 원정은 대리 주둔군이 남송을 공략하기 위해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돼서 대월군을 손쉽게 전멸시키고 수도 탕롱[56]을 점령했지만, 이후 대월군의 게릴라전과 질병으로 철수했다.

1284년에 일어난 2차 원정에서 원정군은 참파 지역을 점령하고, 수도를 또 점령했지만, 이번엔 쩐흥다오와 그의 군사 25만이 기획한 청야 전술에 말려들어서 또 털리고 철수했다.

1287년에 일어난 3차 원정에서 원정군은 또 수도를 점령하고 남하를 하려고 했지만 해군이 바익다 강에서 쩐흥다오에 전멸당하는 바람에, 또 후퇴를 하였다.

사실 이후에도 4차 원정까지 하려고 했으나, 내치에 신경도 써야 되는데다 게릴라 전술에 희생자가 워낙 많이 나와서 포기했다. 결과적으로는 남송 정복으로 만족을 해야됐다.

5. 평가

쿠빌라이 칸은 몽골사 내에서도 상당히 특이하며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칭기즈 칸몽골 울루스라고 하는 대(大) 세력의 시초가 되었다면 쿠빌라이 칸은 중국적인 의미에서 최초로 제국을 세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원나라의 증흥을 이끌었지만 반대로 원나라가 몰락하는 원인들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간신을 믿었고 권력 때문에 자기 아들마저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불교를 지나치게 중시해 대대로 원나라 황제들이 라마승에 빠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루이 14세양무제의 경우와 여러 측면에서 비슷한데, 쿠빌라이 칸도 이 두 사람처럼 장기간 통치하면서 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한편으로 무리한 원정과 권신들의 발호 등의 문제로 인해 황제가 죽은 후 나라가 기울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남송을 군사적으로 약소국이었다고 말하지만,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요, 금 그 어떤 이민족 국가나 몽골의 역대 칸들도 남송을 정벌하지 못하거나 정벌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57] 이는 남송 자체가 군사적으로는 다소 열세였을지언정 그 저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송의 군사력은 북송 시절보다 강력했으며 공세적으로 나올 수는 없을 지라도 이민족 군대가 마음만 먹으면 내려와서 한번에 밀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첫 번째로 고려되어야 할 요소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몽골과 같은 북방 민족들은 내륙지방 출신으로 수군을 운용할 필요가 없었기에 전통적으로 수군이 약했다. 몽골 제국조차도 쿠빌라이 이전에는 수군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조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기병이나 보병 중심으로는 강을 건널 때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반면 남송은 사회 상류층 대다수가 부패했을 때에도 나라의 목숨줄과 똑같은 수군만큼은 상당히 강력한 수준이었다. 쿠빌라이가 수군을 정비하고 양양에 포위망을 펼쳤을 때도 남송의 수군은 그 포위망을 뚫고 물자와 병사를 수비군에게 전달할 정도였다. 남송의 영역인 강남(중국)은 곳곳에 습지와 강, 호수가 위치해 있어서 강남 진군을 위해선 반드시 수군이 필요했고, 그 준비를 하는데 많은 자원과 시간이 필요했다.

2번째로 기후와 지형이 완전히 달랐다. 강남(중국)은 덥고 습하기 때문에 아무리 말 중에 가장 뛰어난 내구력을 지닌 몽골말을 주력으로 한 강한 기병이라도 제대로 활약하기 힘들었다. 전대의 칸인 뭉케도 사천성으로 들어갔다가 날씨와 기후의 탓으로 진군이 막히고 도중에 사망했을 정도다. 뭉케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이질로 죽었다는 설과 성을 공략하는 중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는 설 2가지다.

과거 삼국시절 북방의 위나라 병사들이 오나라를 쉽사리 정벌하지 못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기후와 토양이 다른 땅에 익숙지 않은 병사들이나 말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또한 연운 16주를 통해서 곧바로 본토가 공격받을 수 있었던 북송과는 달리 남송의 경우 장강, 회수, 사천의 산맥 등 국경 방어에 유리한 지형들이 많았다. 이러한 지형과 기후로 인해 상기 언급했던 수군을 운용하지 않고서는 남송을 정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3번째로 점령 이후 유지가 굉장히 어려웠다. 정주민족인 한족으로 구성된 중국인들은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민족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당연한 것이 쉴 새 없이 자기 땅에 내려와 죽이고, 약탈하는 과정에서 생긴 증오가 쉽게 사라질 리 없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생긴 증오와 공포 때문에 한족 중국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쿠빌라이가 북중국을 장악하고 유학자와 농민들을 보호하면서 너그러운 정책을 폈음에도 유력 귀족들과 호족들이 송나라와 내통하거나 반란을 획책했을 정도니 반발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유목민족의 가치관 차이도 한몫했다. 뭉케 칸과 쿠빌라이 칸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남송을 정벌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칸들이나 유목민족 국가들은 무리해서 남송을 정벌할 이유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그것보다는 막대한 조공을 받거나 약탈하는 것이, 어느 한 곳에 정주하지 않는 유목민족들에게는 훨씬 합리적이었다.

4번째로 남송의 경제력은 생각보다 강대했다. 정강의 변으로 송나라가 강남(중국)에 쫓겨났을 당시는 마침 강남의 경제력이 본격적으로 폭발력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였다. 중국사 전체에서도 경제력 면에서 황하 유역을 비롯한 북중국보다 강남이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이 때였다. 사천과 강남의 막대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남송은 양양과 번성과 같은 요충지 지역들에게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이는 양양 공방전 때 몽골군이 크게 고전하는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게다가 이 경제력이 위의 반발심과 겹쳐서 몽골은 남송 공격 뿐만 아니라 점령 후 통치에도 굉장히 피곤한 시기를 거쳐야 했다.

그렇기에 남송을 정벌한 최초의 이민족 황제인 쿠빌라이는 중국적인 가치관을 받아들인, 혹은 그것을 인정한 칸이었고 그들을 위한 정책과 함께 굉장히 관대하면서 인내심 있는 전략을 통해 남송 정복을 진행했고, 끝내 성공했다. 당장 그의 형인 몽케는 급하게 남송을 정벌하려고 했다가 처절하게 실패하여 전사했고, 결국 자신이 견제하던 동생인 쿠빌라이에게 칸 자리를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으니 남송 정벌이 결코 쉬운 업적은 아니었던 셈이다.

다른 칸들이었다면 결코 기다리지 않고 무작정 공격을 했을 양양 함락만 봐도 그렇다. 그는 몇 번 지휘관들을 질책하긴 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장군들을 믿고 기다렸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에게 야만인들의 왕이 아닌 관대한 황제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다. 당장 금방 점령할 수 있었던 양양성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항복 권유를 했으며, 끝까지 양양을 지키며 남송에 충성을 바쳤던 성주 여문환은 이런 그의 대접에 감격하여 이후에 남송 정벌에 앞장서며 활약했다. 양양을 먼저 먹으면 나머지 지역은 손쉽다고 권하던 유정은 남송에서도 나름 명망높던 장군이었고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며 중용한 것도 쿠빌라이 칸이었다.

그는 중국인을 보호한 최초의 칸으로 농지를 함부로 빼앗아 목초지로 만들지 못하게 했고, 중국인들의 눈에 위대한 황제로 보이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위에서도 전술했던 근본적인 차별을 철폐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이런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면 남송을 정복하더라도 자기 치세 동안은 유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기성에 사로잡히지 않았던 면모도 있었고 호기심도 많아서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의 역사나 문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외손자인 충선왕이 세자 시절에 쿠빌라이 칸과 만났을 때 충선왕의 학문 스승들이 방에 들어오자 바로 의관을 정제하고 충선왕의 스승들을 예를 갖추고 맞이했으며, 그 스승들에게 고려의 역사, 풍속, 정치사에 대해 강론하게 하며 밤새도록 문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처럼 저항한 세력들에게 다른 칸들보다 매우 관대했다. 양양을 수비하던 장수 여문환의 예에서도 볼 수 있으며 자신에게 항복한 사람들 대다수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의 지배를 인정해주었다. 항복한 자들을 용서하는 것은 몽골 군대의 전통적인 전략이기는 했으나 그만큼 관대하게 이 원칙을 확대해서 적용했던 칸은 없었다. 저항하는 자들은 철저히 짓밟고 보는 인간들이기도 하고. 이런 전략은 양양이 무너진 후 수많은 남송의 호족들이 앞다투어 항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 천자 특유의 관대함을 지닌 사람이기도 해서, 송말삼걸 중 한 사람인 문천상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죽이지 않고 잡아와서 회유를 시도했다. 문천상은 희대의 명문 정기가(正氣歌)라는 한시를 쓰면서 거부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처형했지만 마지막까지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다른 칸들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그는 천자가 되고 싶은 분명한 욕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베트남 원정과 무리했던 2차례의 일본 원정을 단행했다. 심지어 3차 원정도 하려 했다가 1, 2차 트라우마와 재정적인 문제에 대한 반대가 너무 심해서 단념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인들뿐 아니라 세계로부터 글자 그대로 천자라고 인정받고 싶어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런 성향은 칭기즈칸 사후부터 가속화되었던 대몽골 제국의 분열을 더 심화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실책이나 잘못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미 칭기즈 칸 대에서 아들들의 분쟁[58]은 공공연한 일이었을뿐더러 그의 아버지 또한 칸의 자리를 노리다가 실패하여 형에게 죽었다는 의혹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59]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 이 네 사람의 후손들은 쿠빌라이가 집권하기 전부터 반목하고 있었다. 당장 몽케만 해도 칸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금기였던 황금씨족[60]을 대량 학살했으며 그 윗대의 바투와 귀위크가 대립했던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 분열은 이미 칭기즈 칸 바로 이후의 대에서부터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쿠빌라이가 이것에 대해 한 가지 실책 아닌 실책을 굳이 뽑자면 그 자신이 중국적인 가치를 받아들임으로써 반대파에게 명분을 주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현대에는 몽골족한족 모두에게 관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다. 몽골족의 경우 중국 전역을 손에 넣은 것 때문에 위대한 정복군주로 추앙하는 경우가 많지만, 다소 강경한 성향의 몽골 민족주의자들은 중국적인 가치를 받아들인 것 때문에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한족의 경우 중국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항복한 한족에게 관용을 베풀며 남방 한족들에게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한 것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다소 강경한 성향의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원나라의 중국 통일 이전 마지막 한족 왕조였던 남송을 멸망시킨 것 때문에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6. 기타

7. 가족관계

제1오르도
제2오르도
제3오르도
제4오르도
생모 미상
아들

8. 대중매체에서

8.1. 문학

쿠빌라이 칸이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창작물은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쓴 쿠블라 칸이라는 미완성 영시. 흔히 제나두(Xanadu)라고도 한다. 영국 낭만주의 시를 대표하는 작품로 유명하다.

시집의 서문에 따르면 콜리지가 쿠빌라이 칸의 여름 별궁인 제나두(Xanadu)[62]의 풍광에 관한 글을 읽고 아편진통제로 복용하고 잠들어서 꿈을 꾼 내용을 썼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약 200줄 ~ 300 줄 가량의 긴 시상이 떠올라서 한참 쓰고 있는데, 중간에 폴락 지방에서 방문객이 와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어서 쓰려고 하니 그 내용을 잊어버렸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뒷부분의 내용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1797년에 썼으나 미완성인 채로 보관하다가, 시인 바이런 경의 권유로 1815년 출판했다. 워낙 유명한 영시이다 보니, 영미권에서는 '제나두'는 동양에서의 도원경(桃源境)처럼 상상속의 이상향 또는 대저택의 이름으로 통용된다.[63] 시의 처음 5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해당 시를 소재로 한 러시의 노래 제나두도 있다.
In Xanadu did Kubla Khan
A stately pleasure-dome decree:
Where Alph, the sacred river, ran
Through caverns measureless to man
Down to a sunless sea.

김용의 소설 신조협려에서도 등장한다. 대칸인 몽케 칸에 이은 2인자 격인 인물로, 작중 악역 세력인 몽골의 왕자이지만 성품은 흠잡을 데가 없는 호걸로 묘사된다. 특히 아버지인 툴루이가 곽정의 의형제였던 관계로 곽정과 만나 깊은 교분을 나누며, 적이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편이었으면 했다는 묘사가 있다.

8.2. 드라마·영화

2013년에 제작 및 방영한 중국 드라마 〈전쟁의 천재 쿠빌라이 칸(打仗天才忽必烈)〉[64]이 쿠빌라이 칸을 다룬 대표적인 드라마이다. 영화 <적벽>에서 조운 역을 맡았던 배우 후쥔(胡军)이 쿠빌라이 칸 역을 맡았다. 쿠빌라이가 칸에 오르기까지의 과정과 중국 전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드라마에 대해서 첨언하자면 스튜디오 촬영이 간간이 있어서 초원에 서있는 장면에서도 CG 티가 많이 난다.
2012년에 제작 및 방영한 한국 드라마무신〉에서 맥도날드 아저씨로 유명한 배우 김명국이 쿠빌라이 칸 역을 맡았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 방영한 일본 드라마우주형사 샤이다〉에서 나오는 후마의 지배자 대제왕 쿠비라이가 쿠빌라이 칸을 모티브로 한 걸로 추정된다.

이제 서양권 창작물을 살펴 보자. 미드 〈마르코 폴로〉나 60년대 영화들에선 쿠빌라이 칸 역을 백인 배우가 맡았다. 이렇게 비백인을 백인으로 만드는 등 인종을 바꿔버리는 것을 배역의 인종 전환(Racial Lift)이라고 부른다. 대지 같은 영화도 백인 배우 폴 무니가 왕룽을 연기했지만 1930년대 영화임을 생각하면 지금과 다른 인식과 배경이던 시절이다. 85년 영화 레모도 한국인 스승 치운을 백인계 배우인 조엘 그레이가 분장하고 맡았지만...

그러다가 2014년작 넷플릭스 드라마 〈마르코 폴로〉에서는 진짜로 동양인 배우가 맡았다. 배우는 중국계 영국인 배우 베네딕트 웡.

8.3. 애니메이션

일본 애니메이션 〈마르코 폴로의 모험〉에서는 매우 근엄하고 강인해 보이는 군주로 나온다. 한국어판 성우는 김태훈.

타카키 나나히코의 〈앙골모아 ~원구전투기~〉에서는 여몽군의 일본 침략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왕세자원종 그리고 쿠빌라이와의 관계에 대해서 나오는데 전성기 몽골제국의 원나라이다 보니 기존에 이미 알려진 전세계의 사신들이 한자리에서 경축을 하는 모습과 코끼리에 가마를 놓고 그 위에서 아래에 있는 왕세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원나라의 개국황제이자 동시에 몽골제국의 대칸이라는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8.4. 비디오 게임

코에이의 칭기즈 칸(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도 있다.

'원조비사: 고려의 대몽항쟁'에서는 시나리오 3에서 '후빌라이 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준수한 능력치(정치 B, 전투 B, 지휘 B, 매력 A)지만 아들들의 능력치가 개떡이다. 거기다가 시나리오 시작할 때쯤 쿠빌라이 칸이 이미 50대 중반이라 서두르지 않으면 능력치가 딸려도 한참 딸리는 아들들을 믿어야 되는데, 능력 좋은 장군을 부마로 삼으려고 해도 시작할 때 딸은 하나도 없으니...
파일:attachment/쿠빌라이 칸/쿠빌라이칸.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징기스칸 4'에서도 능력치가 골고루 준수한 준 먼치킨. 정치 87, 전투 85, 지모 84, 특기 건설, 문화, 외교, 등용, 돌격, 연사, 공성, 병과 적성 보병 B, 궁병 B, 기병 A, 수군 E로 형 몽케보다는 좀 딸리는 인상도 있지만 게임 속 쿠빌라이 최고의 메리트는 바로 엄청난 수명이다. 몽골 출신 무장들 중 가장 수명이 길어서 시나리오 2에서 원나라는 이미 세력이 크지만, 쿠빌라이의 수명까지 더해서 그 1대에 세계 제패도 가능하다. 의술을 조금 올리면 90세가 넘어서까지 장수하는 무서운 장면도 나온다. PK 시나리오 3에서는 회령에서 툴루이의 아들 중 하나로 나오는데 18세의 젊은 나이로 15세인 동생 훌라구와 함께 정복전쟁에 오랫동안 굴릴 수 있다.
파일:쿠빌라이14.jpg
삼국지 12, 14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12부터 등장한다.

삼국지 12 대전판 온라인에 등장하는데 정작 능력치는 통솔 87/무력 93/지력 67의 맹장에 가까운 능력치다. 쿠빌라이(사준사구)하고 헷깔린 것이 아니냐는 의견들이 있다.

삼국지 14 PK 무료 업데이트로 추가되었는데 맹장형에 가까운 능력치는 통솔 86/무력 75/지력 90/정치 95/매력 86로 고증에 맞은 스탯으로 변경되고 개성은 임재, 독장, 질주, 지리, 징세. 전법은 장구직임, 급습, 연노, 경파, 진정, 투석. 진형은 봉시, 추행, 안행, 학익, 투석. 친애무장은 할아버지인 칭기즈칸.

장구직임은 서황과 동일한 전법이지만 서황보다 무력이 낮아 효과는 큰 편이 아니지만 쿠빌라이는 투석과 연노, 안행이 있어 원거리 공격으로는 서황보다 높은 편이라 쿠빌라이는 기병보다 연노로 원딜 하는 것이 좋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몽골 제국 초기에는 몽골 궁정에 있으며, 대칸으로 즉위한 이후 쿠빌라이 집권기로 연도를 맞춰서 시작하면 원나라 황제로 중국에 있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 4에서는 징기스 칸과 함께 몽골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문명 6에서는 뉴프론티어 DLC에서 몽골과 중국의 2번째 지도자로 등장하며, 몽골 팩션이 있는 흥망성쇠 DLC를 필요로 한다.

파일:external/www.yucata.de/char_05.png
보드게임마르코 폴로의 발자취에서는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다른 캐릭터들이 모두 베네치아에서 출발해 베이징을 향하는 반면 쿠빌라이 칸은 유일하게 베이징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이 게임에서 베이징에 도달하면 칸의 은총을 받아 종료 보너스 승점을 획득하고 게임 종료 시에 남은 상품을 승점으로 거래하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쿠빌라이는 시작부터 이 혜택을 받고 시작하는 캐릭터. 주변에 시안이나 수마트라 같은 좋은 도시들이 많기 때문에 수많은 사기 캐릭터가 난무하는 이 게임에서 아무런 초능력 없이 시작 위치만 다르게 시작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강캐 반열에 들어가고 있다.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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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권 「강리탈탈등전(康里脫脫等傳)」 139권 「내만태등전(乃蠻台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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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권 「석말야선등전(石抹也先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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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권 「설탑랄해등전(薛塔剌海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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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권 「유민등전(劉敏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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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권 「홍복원등전(洪福源等傳)」 155권 「왕세현등전(汪世顯等傳)」 156권 「동문병등전(董文炳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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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90권 「유학전(儒學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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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92권 「양리전(良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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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94·195·196권 「충의전(忠義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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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권 「은일전(隱逸傳)」
두영 · 장특립 · 두본 · 손철 · 하중 · 무각
200·201권 「열녀전(列女傳)」
왕추추 · 진로화진 · 마영 · 조옥아 · 풍숙안 · 조왜아 · 주숙신 · 갈묘진 · 장의귀 · 이동아 · 탈탈니 · 주면가 · 귀가 · 이지정 · 채삼옥 · 범묘원 · 서채란 · 우숙정 · 진숙진 · 야산홀도 · 여언능 · 반묘원 · 유취가 · 나묘안 · 이새아 · 도종원 · 안정동
202권 「석로전(釋老傳)」 203권 「방기전(方伎傳)」
팔사파 · 구처기 · 전절 전충량 · 근덕진 · 장강 · 이호 · 손위 · 아로와정 · 역사마인 · 아니가
204권 「환자전(宦者傳)」 205권 「간신전(奸臣傳)」
이방녕 · 박불화 아합마 · 노세영 · 상가 · 철목질아 · 합마 · 삭사감
206권 「반신전(叛臣傳)」 207권 「역신전(逆臣傳)」
이단 · 왕문통 · 아로휘첩목아 철실 · 패라첩목아
208·209·210권 「외이전(外夷傳)」
고려 · 탐라 · 일본 · 안남(진조) · 면국 · 점성 · 섬국 · 유구 · 삼서
(1) 121권의 속불태(速不台)와 122권의 설불태(雪不台)는 동일인물이므로 122권에서는 생략한다.
(2) 131권의 완자도(完者都)와 133권의 완자도발도(完者都拔都)는 동일인물이므로 133권에서는 생략한다.
(3) 150권의 석말야선(石抹也先)과 152권의 석말아신(石抹阿辛)은 동일인물이므로 152권에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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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나라 선포는 1271년이다.[2] 원나라 선포는 1271년부터.[3] 내전 승리로 대칸 즉위를 공인받았다고는 하지만 친(親) 아리크부카 세력이 이탈했고 이후의 대칸 즉위가 내전으로 얼룩지는 선례를 만들었기에 통일 몽골 제국의 마지막 대칸몽케 칸이라는 시각이 제법 큰 편.[4] 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ᠬᠤᠪᠢᠯᠠᠶ(Боржигин Хубилай, Borǰigin Khubilai)
중국어: 孛兒只斤 忽必烈
한국어: 패아지근 홀필렬 혹은 흘필렬
[5] 엄밀히 따지면 쿠빌라이는 칸호가 아닌 휘(이름)이기 때문에 '쿠빌라이 칸'이라는 이름은 다소 어색한 감이 없지않아 있다. 조부인 칭기즈 칸으로 치면 '테무진 칸'이라고 칭해지는 격이다. 언급한 세첸 칸이 올바른 표현이다. 물론 칭기즈 칸이 특수 케이스일뿐 칭기즈 칸만 빼고 쿠빌라이 선대의 대칸들은 죄다 휘를 칸호로 썼다. 오고타이는 오고타이 칸, 귀위크는 귀위크 칸, 몽케는 몽케 칸이었다. 쿠빌라이만 칸호를 만들어 바꾼 것. 선대들의 영향이 있다보니 쿠빌라이도 '쿠빌라이 칸'이라 부르게 되는 것인데, 쿠빌라이는 중국정복하였기에 중국식 피휘의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칸호를 따로 만들었다.[6] 이 표기는 본래 영어와 일본어식 표기이다. 실제 현지인들의 발음을 들어보면 '후빌라이' 또는 '호빌래'에 가깝게 발음한다.[7] 물론 실제적인 군사 지휘는 보좌였던 장군 우량카다이가 했다고 봄이 더 맞을 것이다.[8] 관련 종교의 종교인들을 물러 토론하도록 해서 그 결과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는 것은 몽케 칸 시절에도 있었고, 중국 당나라 시절에도 있었다.[9] 물론 훗날 거의 군권을 박탈당했을 뻔함을 생각하면 겉으로만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남송 정벌을 원하는 몽케에게는 쿠빌라이가 북중국에서 쌓은 지지기반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장 전쟁을 벌여 제거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10] 단, 이것에 대해서는 훗날을 생각한 쿠빌라이가 일부러 진군을 늦게 했다는 주장도 있다.[11] 오늘날 우한(武汉)시 우창(武昌) 구. 양양과 함께 남송 정권에 있어 또 하나의 요충지이다.[12] 이때 그동안 질질 끌면서 진군해왔던 것과는 달리 제법 빠르게 공격을 진행했는데, 이는 쿠빌라이 자신이 원정에서 아무런 성과가 없으면 훗날에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대리 원정을 함께 진행했으며 돌아가지 않고 송을 공격하다가, 고립되었던 우량카다이의 부대를 구해내 그의 지지를 얻었다. 당시 우량카다이는 그의 반대파에 속했다.[13] 조어성을 지원하러 갔으나 사천택의 군대에 가로막혀 중경으로 돌아왔고, 여문덕의 군대는 악주로 향하였다.[14] 여문덕의 동생이자, 1275년 원나라의 군대에 의해 죽는 여문신과는 동명이인이다.[15] 하루아침에 성 주위에 목책을 쌓았다.[16] 악주 화약에 관해서는 가사도가 먼저 화의를 제안하였는지, 아니면 쿠빌라이가 철군하는 도중이라도 남송군에게 공격을 덜 받기 위해 가사도에게 화의를 제안하였는지에 대해 중국 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많다고 한다. 진순신의 <이야기 중국사>에 의하면, 가사도가 매국적인 거래를 했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 가사도가 사태 파악이 뛰어나고 두뇌 회전이 빠른 만큼 매국적인 거래를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7] 내전이 나자 몽케 칸의 군대도 아리크부카를 지지했다.[18] 일 칸국의 칸[19] 훌라구는 아리크부카의 즉위를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쿠빌라이를 지원하지도 않은 채 사태를 관망했다. 여차하면 대칸 쟁탈전에 끼어들어 자신이 대칸에 오를 속셈이었다.[20] 학경은 진주에 억류된다. 이 때 학경을 실질적으로 억류했던 것은 이정지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극단적인 대몽 강경파였고 나중에 원나라에 포로로 잡혀 탈출한 문천상을 원나라의 간첩으로 의심했고, 원나라의 사신을 죽이는 등 양주에서 장렬하게 싸우다가 부장들의 배신으로 강재와 함께 사로잡혀 처형당한다.[21] 말자상속[22] 그러나 아리크부카는 1266년 사망, 독살 의혹이 있고 여러 정황상 쿠빌라이가 제거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곧바로 제거하지 않은 이유는 안 그래도 정통성이 부족해서 반대파들로부터 공격받는데 이 와중에 동생까지 살해해서 그들의 신망을 더 잃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3] 훗날 원나라명나라에게 밀려나 몰락한 이후 북원토구스 테무르를 아리크부카의 후손 조리그투 칸이 살해하고 대칸에 즉위, 결국 100여 년 만에 쿠빌라이 가문은 몰락하고 아리크부카 가문이 몽골 제국 대칸을 이었다.[24] 장세걸의 친척이다.[25] 유정은 본래 남송의 무장이었지만 여문덕의 무시를 받았고, 자신과 사이가 나쁜 유흥이 사천제치사로 부임한다는 말을 듣자 불안해했다. 이후 상사벽과 조세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노주를 바쳐 몽골군이 수군을 육성할 수 있게 했다. 나중에 노주는 여문덕이 수복하나, 유정의 투항은 남송 정권에 있어 큰 손실이었다.[26] 지금의 베이징[27] 참고로 실패하면 그냥 바로 전멸이었다.[28] 여문환은 양양의 호족으로, 정말 끝까지 처절하게 저항하고 또 저항해서 종국에는 부녀자들을 성밖으로 내보낼 때 자기 가족들까지 내보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남송 조정에서는 이 사람이 쿠빌라이와 내통한다 이런 말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정말 버틸 수 없는 극한의 상황까지 저항하다가 항복해서 쿠빌라이에게 충성하게 된다.[29] 오늘날의 항저우시[30] 차가타이 칸국은 처음에 카이두의 오고타이 칸국에게 적대적이었지만, 1282년 카이두의 도움으로 두아가 칸에 오른 뒤 카이두가 죽을 때까지만 협력하였다.[31] 장자 상속제가 아니라 모든 자식에게도 권리가 있다. 특히 몽골의 경우 장자부터 순서대로 크게 지원해주며 독립시키고 마지막 남은 막내가 최종적으로 승계하는 형식이었다.[32] 阿合馬, 아허마, 아합마[33] 오늘날의 부총리.[34] 오늘날의 국무총리.[35] 다만 청렴결백한 이들 상당수가 '너 혼자 깨끗한 척 하는거 딴 의도 있지?' 하는 의심을 받은 건 사실이었고, 이 때문에 어느 정도 부정부패를 저질러야 했다. 이는 여느 조직들이 범죄나 그에 준하는 행위에 동참할 것을 강요해 공범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36] 남송 정벌 이후 아흐마드가 바얀에게 경의를 표했는데 이 자리에서 바얀은 아허마에게 옥으로 만든 고리 하나를 보여주며. "송나라 황실에 보물이 산처럼 쌓였지만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네"라 말했고, 아흐마드는 이건 분명 바얀이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이라며 앙심을 품었었다.[37] 오늘날의 합참차장이다.[38] 원나라의 수도. 현재의 베이징.[39] 동아시아 왕조 국가에서 왕이나 황제가 멀쩡히 두 눈 뜨고 살아있는데 왕위를 양위하라 운운함은 대역죄에 해당한다. 오히려 군주가 조정에서 신하들이 자기 말 안 들어준다고 땡깡부리는 한 가지 수단이 양위 선언이었다. 이런 사단이 한 번 났다간 황태자나 왕세자부터 조정 신하들이랑 같이 멍석 깔고 앉아서 군주의 체면이 설 때까지 반성문을 씀이 관행이었다.[40] 오늘날로 치면 감사원이다.[41] 칭기즈 칸용장무칼리의 후손.[42] 몽골의 특성상 막내가 계승권 순위가 더 높은데 인근 동북아 국가들은 대부분 장자 계승이 원칙이고 후계자 없이 장자 유고시 둘째가 우선권을 갖는 방식이다. 그 덕도 봤을 것이다.[43]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얘기가 나왔다.[44] 먼저 원종 측이 제의했으나 한 차례 거절했다. 이유는 삼별초의 난 때문.[45] 그러나 헤로데 대왕 시절의 유대는 로마의 헤게모니를 인정했을 뿐, 로마의 동맹국으로서 내치는 거의 간섭받지 않았으며 대외 관계도 자치를 누렸다.[46] 빗금이나 옅은 색상[47] 일본의 남송 지원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48] 이때 고려군 지휘관이 태풍의 징조가 있으니 상륙해서 대비해야 한다고 했으나 바다를 모르는 원나라군 지휘부가 이를 기각하며 적의 야습 방지용으로 배에 남으라는 지휘를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49] 이렇게 태풍 한방으로 기적같은 대승을 거둔 가마쿠라 막부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고 이로 인해 2차대전 당시 자살특공대에 붙여진 단어의 원본인 가미카제(神風)라 부르며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라며 떠들기도 하였다.[50] 공식적인 멸망은 1279년이지만 남송 자체는 1273년에 양양 함락 뒤 이미 대규모 항복 크리와 함께 실질적으로는 거의 멸망했다.[51] 낮에 진격하고 밤이 오면 진격한 걸 다 무르며 배로 되돌아오는 등[52] 태풍철에 10만 명을 이런 루트로 보낸 것이며 사실 가는 사이에 태풍을 안 만난 게 기적이다.[53] 이 신국 사상이 일본 제국 시절에 이르러 극단화된 게 그 유명한 국가신토다. 이런 사상은 아직까지도 잔존하여 일본 극우들은 자국을 신의 나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강경파였던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가 21세기에 자국을 '천황 중심의 신의 나라'라고 일컬었다가 국민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54] 첫 번째 원인은 너무 준비를 잘 한 나머지 거기에 쓸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를 위해서 많은 이들에게 돈을 빌렸는데 그에 대한 보상을 못 줘서다. 당시 봉건제 사회인 일본에서 보상은 땅으로 내려줬는데 내란이라면 적군의 땅을 빼앗아 나눠주는 것으로 가능했지만 외적의 침공을 방어한 것은 땅을 한 평도 못 얻는지라 줄 보상이 없었다. 땅을 못 얻었으면 돈으로라도 줘야 되는데 첫째 원인에서 보이듯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돈 줄 형편도 못 되게 된 것이다. 결국 막부에게 돈 빌려주고 참전한 사람들만 바보가 된 꼴이 되어 막부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게 되었다.[55] 원나라의 대월 원정 참고.[56] 현재의 하노이[57] 1대 대칸 칭기즈 칸은 남송보다 금나라 -> 서하 -> 호라즘 순으로 정벌하다 죽었다. 2대인 오고타이 칸은 남송과 손잡아 금나라를 양면전선으로 밀어붙이고 유럽 정벌을 마저 끝내느라 바빴으며, 3대인 귀위크 칸은 부임한 지 2년만에 죽었다. 4대 몽케 칸은 남송 정벌 중 병사하였다.[58] 당시 칭기즈 칸의 제1부인의 아들은 4명이 있었는데 장남 주치에게 후계자 문제를 논하자, 차남 차가타이가 "주치는 메르키트 부족에 의해 태어난 잡종일 수 있다"며 반발하였다. 이후 차가타이는 3남 오고타이가 온화하니 오고타이가 차기 칸으로 적합하다며 추천하였기에 차남 차가타이&삼남 오고타이 vs 장남 주치&사남 툴루이로 다퉜다.[59] 원조비사에 따르면 금나라가 망한 후 오고타이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툴루이는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형을 살려 달라고 하늘에 기도했고, 오고타이의 병이 낫자 곧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툴루이가 한때 대칸 후보로 거론된 점 때문에 사실은 오고타이와 트레게네, 테무게 옷치긴에게 모살당했다는 주장이 있다.[60] 칭기즈 칸의 핏줄을 이은 왕족들을 말한다.[61] 참고로 그 전각 크기는 아주 컸다고 한다.[62] 북경의 북쪽 내몽골 지방의 상도(上都)[63] 미국 가수 올리비아 뉴튼존이 1980년대 영화 <제너두>의 주제가로 동명의 노래를 발표한 적이 있다.[64] '건원풍운(建元风云)'으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