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가 위치했던 섬에 대한 내용은 제주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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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탐라어 |
탐라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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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473d><colcolor=#fff> 탐라 耽羅 | Tamna | |||
▲ 추자도는 1914년부터 제주도에 편입되어 탐라국의 영역에서는 제외. | |||
?[1] ~ 140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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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국?[2] | 조선[3] | }}} | |
별칭 | 섭라(涉羅)[4] 탐모라(耽牟羅)[5] 담라(儋羅)[6] 탁라(乇羅)[7] | ||
위치 | 제주도 및 부속도서 | ||
수도 | 무근성[8] → 제주성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국가 원수 | 국왕(? ~ 1108년?) → 성주(星主)[9] | ||
주요 군주 | 양을나[10], 고을나[11], 부을나[12] 유리도라 자견왕[13] | ||
국성 | 고(高)[14], 부(夫)[15], 양(梁)[16] 가(加)(?)[17], 문(文)[18] | ||
언어 | 탐라어(고대 토착어)[19] 중세 제주어(13세기 이후)[20] | ||
종교 | 토착 신앙, 불교 | ||
주요 사건 | 498년 백제에 예속 662년 신라에 예속 938년 고려에 예속 1105년 탐라군으로 개편, 성주제 시작 1273년 원, 탐라총관부 설치 1294년 명칭 '제주' 명명 1404년 성주제 폐지 | ||
현재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제주특별자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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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09년에 만들어진 〈탐라지도병서〉 |
약 12세기까지 독립 상태를 유지했으며[21], 조선 초기에 완전히 본국에 편입된 뒤 구한말까지 제주도의 이름을 계속해서 '탐라'로 부르다가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주'라는 이름에 밀려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탐라국의 주민인 제주 원주민을 탐라인이라고 한다. 이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데, 탐라국이 있던 당시 육지의 한민족계와 완전히 다른 혈통은 아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애초부터 한반도에서 공존한 고대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도 서로 말이 통한다는 기록이 있고 동시에 스스로를 삼한인이라 지칭하는 등 어느 정도 공통의식은 있었으나 서로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는데, 탐라인도 이런 지역민 정도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다만 이런 것과 별개로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한반도 본토와는 확실히 차별된 문화가 발전해 왔고, 언어적으로도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22]
원나라 때부터 명나라 초기까지는 탐라국에 중국 윈난성과 몽골의 문화가 유입되었으나, 본토에서의 중앙 집권 통치가 굳건해진 조선 왕조때부터 한반도 본토와 같은 목, 군, 현 단위의 행정구역이 설치되고, 관리를 받으면서 점점 한반도 본토와 일체화가 되어 갔다.
2. 명칭
명칭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삼국시대 말기 신라 문무왕 때 고을나의 15대손인 고후 형제가 원래 복속했던 백제의 멸망 이후 신라에 탐라국을 대표하여 입조할 때, 전라남도 강진군의 옛 지명인 '탐진'의 '탐'과 '라'를 합쳐서 붙여준 것이라고 전한다.그러나 백제가 아직 건재했던 476년 백제 문주왕 때 이미 탐라국에서 조공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오며, 백제 멸망 이전에 편찬된 《수서》에도 탐모라국에 표류한 사신들이 백제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따라서 위의 설화와 달리 '탐라'라는 국호는 외부에서 붙여준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쓰이고 있었던 자생적인 국호로 보인다. 오히려 '탐진'이 '탐라로 건너가는 나루'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양서》 〈백제전〉에 따르면 백제어로 '읍(邑)'을 '담로(擔魯)'라 부르고, 《신당서》에는 탐라가 '담라(儋羅)'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탐라는 고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제주'라는 한문식 지명은 건널 제(濟)자를 쓰는데, 고려 무렵에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탐라와 제주란 이름은 조선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혼용되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제주 목사 등이 편찬한 〈탐라순력도〉 등을 보면 지명인 제주도 섬 자체는 '탐라', 행정구역인 제주목(현 제주시) 지방은 '제주'라 칭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면서 탐라가 '타미(民 - 백성)'+'무라(村 - 마을)', 또는 '타(田 - 밭)'+'무라(村 - 마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도 일본어설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가설로 평가받으며 제주 방언 이전에 존재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되는 토착어인 탐라어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탐라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은 편이다. 게다가 고대 일본에서는 '토라(度羅, トラ)'라는 명칭으로도 불려졌다는 상반되는 증거도 있다. 일본의 전통 궁중 음악 가가쿠(아악)의 탐라 음악도 이를 따라 '토라가쿠(度羅楽)'이다.
그러나 적어도 탐라의 뒷부분만큼은 보빈의 가설대로 반도 일본어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서》에서는 탐라를 탐모라(耽牟羅)라고 표기했는데, 여기서 모라(牟羅)라는 지명 요소는 《일본서기》[23], 《양서》[24], 〈울진 봉평리 신라비〉[25] 등 삼국시대의 각종 문헌에서 문증되며 《삼국지》[26], 〈광개토대왕릉비〉[27], 《삼국사기》[28]에도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다. 학자들은 이 단어를 보통 일본어의 무라(むら)와 연관지어 마을이라고 해석하는 편이다. 참고로 중세 한국어에서 'ᄆᆞᅀᆞᆶ(/*mʌzʌlh/)'이었던 현대 한국어의 '마을'과는 별개의 어원을 가진다.
다만 위 어휘가 차용된 방향성은 알 수 없다. 반도 일본어파의 잔재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고대 한국어 어휘가 일본조어로 넘어갔다가 되려 한국어족에서는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라(牟羅)와 모로(牟盧)는 산(山)을 뜻하는 한국어일 가능성도 있는데, 그 근거로는 《일본서기》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이 구례산(久禮山)으로도 표기되었다는 점, 모로비리국의 옛 땅이 신라에 편입된 뒤 고창군(高敞縣)이 되었다는 점,[29] 《용비어천가》에 '·피모·로(椵山)'라는 산 이름이 나온 점 등이 있다.
한편 과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그의 저서 《해동역사》에서 "우리말로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며 '탐, 섭, 담' 이 세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이 풀이를 따른다면 '탐라'는 말 그대로 '섬나라'가 되는 셈이다. 다만 이는 언어학적 지식이 모자라던 조선 후기에 나온 가설이라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한계가 많다. 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섬을 뜻하는 당시 고대 한국어는 '세마'에 가깝게 발음된 반면[30] 한자 탐(耽)의 당대 발음은 '톰'이었으므로 큰 차이가 있다.[31]
여담으로 한라산의 옛 명칭이었던 두모악(豆毛岳) 또는 두무악(頭無岳)은 탐모라의 '耽(*tom)'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언어
자세한 내용은 탐라어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역사
제주도의 역사는 오랫동안 한반도와 동떨어져 진행되어 왔으며, 남은 기록 또한 매우 소략하다. 이로 인해 기초개론 수준인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내용은 많지 않다. 잠깐 언급이 되긴 하나, 자세히 다뤄지지 않고 지도에서도 생략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잘 인지하지 못할 뿐, 찾아보면 선사시대 고산리 선사유적 기록부터 시작해 은근히 제주도 관련 기록이 적지 않게 이어져왔다.4.1. 선사 시대
애월읍의 빌레못굴 유적과 같은 구석기시대 유적부터 인류 거주의 흔적이 발견되며, 이는 당대에는 제주도가 해수면의 영향으로 육지와 연관되었을 가능성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사적 412호인 고산리 선사유적이 매우 유명하며, 삼양동 선사유적 역시 사적 416호로 지정되어 있어 제주도의 인류 거주가 역사 기록 이전에도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고고학적으로는 한반도에서 송국리형의 문화상이 청동기 중기 이후로 발현한 이래 가장 오래도록 송국리 유형의 주거지와 문화를 유지하는 곳이 바로 제주도, 즉 탐라국이기도 했다. 5~6세기가 되면서부터 백제나 신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정제된 기법으로 만들어진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일종의 해상 문화 지체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제주도의 신화적 기록으로는 개척 설화인 삼을나(三乙那) 설화가 있다. 이는 특이하게도 다른 지역과는 다른 '3성(三姓) 신화'의 형태이다. 《고려사》와 《동문선》 등에 인용된 탐라국 건국신화에 따르면 태고에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 오늘날의 삼성혈)에서 신인(神人) 3형제가 솟아났는데[32], 맏이가 양을나(良乙那)[33], 버금이 고을나(高乙那), 막내가 부을나(夫乙那)였다.[34][35][36] 이들은 벽랑국(碧浪國)[37]에서 들어온 세 명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면서 제주 양씨, 제주 고씨, 제주 부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신화 형태상 고구려, 백제와 동계인 부여계 신화의 영향이 있다고도 하며, 지도자의 칭호가 을나(乙那)인 것 또한 음가상 백제에서 부여계 왕호로 보이는 어라하(於羅瑕)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38] 시조가 바다를 건너온 여인과 결합한 부분은 김해 금관국의 시조인 수로왕이 바다를 건너온 왕후 허황옥과 결합한 것이나 신라 혁거세 거서간이 물의 근원으로 태어난 알영부인과 결합한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이렇듯 초기에는 3을나(良乙那, 高乙那, 夫乙那)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 군림해 국주(國主)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후술하듯 고려시대 이후에는 국왕격인 성주(星主), 부왕격인 왕자(王子), 이 양자가 함께 다스리는 2원적 통치체제로 변화해 나간다.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무려 기원전 2337년으로 단군조선보다 빠른 건국이라지만, 애초에 단군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기록부터가 신뢰하기 어렵다. 이때 세 씨족 사회가 뭉쳐 고씨가 왕이 된 건 인간 세상이 생긴 뒤로 900년 뒤라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신화적 기록은 실제 출신이나 성씨, 시간관념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창세 설화 내지 건국 설화에 나타나는 신화적 요소로서 파악해야 한다.
4.2. 삼국시대
탐라국이 본격적으로 역사서에 등장하기 앞서,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주호국이라는 세력이 등장한다. 마한 서쪽 바다 큰 섬의 세력이라는데, 한반도 부속 도서 중에는 제주도가 가장 크므로 이들이 고대에 탐라를 지배한 세력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제주도는 남쪽에있기에 확실한 사항은 아니며, 진도 등 다른 섬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탐라국이 맞다고 해도 그닥 좋은 명칭은 아닌 게, 주호국의 胡(되 호) 한자는 오랑캐를 뜻하기도 하기에 멸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일반적으로 탐라가 한반도 국가와 직접적으로 통교한 것은 5세기 말 백제의 남하 시기 이후로 추정된다.[39] 백제 제13대 근초고왕 대의 남방정벌 기사를 연구할 때, 과거에는 침미다례를 탐라로 규정하여 제주도까지 소급 적용했던 바 있었으나 나중에는 침미다례와 같은 마한계 후기 국가의 소재를 전남 지역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백제 문화권이 전남으로 내려오는 것은 웅진백제 시기 이후라,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등의 기록을 보더라도 백제의 전남 및 제주 등의 남방 진출은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 이후로 해석할 수 있다.[40]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의 공물 납입 및 복속 기록, 《일본서기》의 복속 기록, 《수서》 〈백제전〉의 백제 부용국인 '탐모라(耽牟羅)'[41] 기록 등을 종합해 볼 때 일반적으로 시기의 오차가 조금 있기는 해도, 동성왕 대를 전후한 500년 무렵에 전남 해안 지역과 탐라까지의 편입이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후술되어 있듯 5~6세기 백제에 복속되어 백제왕이 탐라 사신에게 은솔(恩率)이라는 작위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제주 지역에 백제와 관련된 유물이 잘 나타나지 않는걸 보면, 백제의 탐라 지배 방식이 내륙과 달리 간접 지배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平陳之歲, 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 其南, 海行三月有耽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진을 평정하던 해에, 군선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탐모라국에 닿았다. 그 배가 돌아올 때 백제를 경유하여 가게 되었는데, 창(위덕왕)이 이 배를 후하게 지원하여 보내고, 사신을 같이 파견하여 진을 평정한 것을 기리는 표를 올렸다. (중략) 그 나라의 남쪽에서 바다로 3개월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으로 1,000여 리이고 동서로 수백 리이다. 토산물로 노루와 사슴이 많이 나고 백제에 부용해 있다.
《수서》 〈백제전〉
진을 평정하던 해에, 군선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탐모라국에 닿았다. 그 배가 돌아올 때 백제를 경유하여 가게 되었는데, 창(위덕왕)이 이 배를 후하게 지원하여 보내고, 사신을 같이 파견하여 진을 평정한 것을 기리는 표를 올렸다. (중략) 그 나라의 남쪽에서 바다로 3개월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으로 1,000여 리이고 동서로 수백 리이다. 토산물로 노루와 사슴이 많이 나고 백제에 부용해 있다.
《수서》 〈백제전〉
신라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울 때의 아홉 나라(九韓, 구한)에도 탁라(托羅)가 들어간다. 이외의 8국은 왜(倭), 중화(中華), 오월(吳越), 응유(鷹遊, 백제로 추정), 말갈, 단국(丹國, 거란), 여적(女狄, 여진족)[43], 예맥(濊貊, 고구려로 보임)이다. '구한(九韓)'이라고 하여 삼한을 비롯한 주변의 대동소이한 민족들을 열거한 것으로 보인다.
耽羅始遣王子阿波伎等貢獻. 伊吉連博德書云, ... 九日八夜, 僅到耽羅之嶋. 便卽招慰嶋人王子阿伎等九人, 同載客船, 擬獻帝朝. 五月廿三日, 奉進朝倉之朝. 耽羅入朝, 始於此時.
탐라가 처음으로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이키노 하카토코의 서》[44]에서 말하였다. "(중략) 8박 9일만에 겨우 탐라도에 도착하였다. 섬사람인 왕자 아파기 등 9명을 불러 위로하고 함께 객선에 태워 천황의 조정에 바치려 생각하였다. 5월 23일에 아사쿠라(朝倉)의 조정에 이 사람들을 바쳤다. 탐라의 입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서기》 26권 사이메이 덴노 7년(661년) 5월 23일
탐라가 처음으로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이키노 하카토코의 서》[44]에서 말하였다. "(중략) 8박 9일만에 겨우 탐라도에 도착하였다. 섬사람인 왕자 아파기 등 9명을 불러 위로하고 함께 객선에 태워 천황의 조정에 바치려 생각하였다. 5월 23일에 아사쿠라(朝倉)의 조정에 이 사람들을 바쳤다. 탐라의 입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서기》 26권 사이메이 덴노 7년(661년) 5월 23일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조했을 때 백제가 복속시킨 이후 백제의 관직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며, '왕자'의 존재도 확인된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662년 탐라국주 좌평[45] 도동음률(徒冬音律) 또는 탐라국 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46]
한편, 663년, 신라 및 당나라와 백제 부흥군, 야마토 왕권의 양대 연합군이 맞서 싸운 백강 전투에 탐라국도 백제/왜 연합군측에 참전했다고 보는데 이는 《구당서》 〈유인궤 열전〉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 가령 제주특별자치도 홈페이지에는 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 왜군과 연합해 나당동맹군에 맞서 싸웠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탐라는 한·중·일 역사서에 모두 나오는 이 전투 관련 기록을 통틀어봐도 《구당서》 〈유인궤 열전〉 말고는 언급이 없고, 그 《구당서》에서도 백제·왜 연합군의 잔병들이 항복할 때 탐라인도 같이 데리고 항복했다는 구절이 전부다. 따라서 이 전투에서의 비중이 미미해 많은 병력을 보내 참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662년 도동음률의 신라 항복과 663년 백강 전투 당시 탐라가 백제 부흥군의 편을 들었다는 두 기록은 모순되는데, 둘을 모두 인정할 경우 당시 탐라는 백제/왜와 신라/당이라는 양대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나당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679년에 신라가 다시 한 번 탐라국을 경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662년의 항복은 형식적인 것이고, 한반도의 정리가 끝난 679년에 신라가 여유가 생긴 뒤 본격적으로 탐라를 속국화했다는 주장도 있다. 662년의 신라는 백제 부흥군을 상대하랴, 고구려를 상대하랴, 그리고 곧 나당전쟁 준비하랴 바빴기 때문에 탐라국에 신경쓸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일본쪽 기록에서는 백제 멸망 직후인 661년에 처음으로 왕자 아파기(阿波伎)를 보낸 뒤로, 수 차례 탐라국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등 백제가 무너진 뒤 탐라국도 나름대로 여기저기 활로를 모색한 흔적이 보인다. 탐라국과 일본의 교류는 693년 사신 가라(加羅)를 일본에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리고, 그 뒤로는 일본이 탐라국과 연락할 일이 생겨도 직접 하지 않고, 신라 조정을 통하는 식으로 바뀐다.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이즈음부터 신라의 탐라국 통제력이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4.3. 남북국시대
“신라 때 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3형제가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하니 왕이 기뻐해 작호를 주었는데, 고후에게는 성주(星主), 고청에게는 왕자(王子), 고계에게는 도내(都內)라 하고 국호를 주어 탐라라고 했다.”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중에서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중에서
성주란 명칭은 '별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탐라가 입조할 당시 신라 남쪽에 객성이 떴고, 그 뒤 고후 형제가 신라에 입조해오자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하사한 것이었다.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항로 지표로 별자리를 이용했고, 탐라국에선 북두칠성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칠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을 쌓은 것이 칠성단인데 현재 속칭 '칠성통'이라 불리는 곳에 칠성단이 있었다.[47] 《탐라지》 등에 조선조 칠성단에서 제를 지냈는데 칠성은 하늘의 북두칠성이고, 제의도 천제란 기록이 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에 항복했다. 그 후로 탐라국은 제51대 진성여왕 때인 892년, 육지에서 후삼국시대가 개막할 때까지 통일신라에 정기적으로 조공했다. 보덕국이나 우산국처럼 일종의 신라의 번국이 된 것인데, 속국이지만 일단 나라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어서 신라 복속 초창기인 7세기까지는 당나라에 조천사를 보내거나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일본과 탐라 사이에 견탐라사(遣耽羅使)라는 사신단이 잠깐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8세기가 되면 신라의 속국화가 진행되어 견탐라사는 끊겼다. 8~9세기가 되면서 일본 측도 탐라국이 신라의 속국인 것을 인지하고 있음이 드러나는데, 《속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제36대 혜공왕 때인 778년 일본의 견당사가 탐라국 주민들에게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나자[48] 779년 신라에 견신라사를 보내 탐라국에 억류된 우나카미노마히토 미카리(海上眞人 三狩) 등을 빼내 일본으로 귀국시켰다. 이는 탐라국에서 붙잡은 외국인을 신라 조정이 지시하면 바로 수도 서라벌로 데려올 수 있었다는 의미로, 즉 탐라국은 일단 신라와 별도의 국가지만 실질적으로 신라의 통제를 받는 상태였던 것이다.[49]
제31대 신문왕 대인 684년에는 고지창(高支昌)을 신라에 보내 설총의 이두 문자를 도입했다고 한다. 다만 《탐라국 왕세기》에서만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낮다.
제41대 헌덕왕 대인 822년 일어난 통일신라 역사상 최대의 내란이었던 김헌창의 난 당시에는 신라의 일부 귀족이 탐라국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4.4. 고려 시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두 해 즈음 지난 938년. 탐라국주 고자견은 태자 고말로를 보내 고려에 입조하여 형식상 속국이 되었으며, 이에 고려 태조는 전대 신라의 예에 따라 탐라에 성주와 왕자의 관작을 제수했다. 탐라가 신라나 고려로부터 관작을 제수받은 것은 지방 호족 세력이 한반도의 패권을 가진 중앙정부에 입조하여 탐라 지방의 지배력을 인정(책봉)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고려 초기까지는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지방 호족을 고려의 지배 체계에 편입시키며,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탐라국 역시 차츰 고려의 지방 행정 단위로 편입되었다. 처음으로 설치된 제주라는 명칭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주어도 11세기경부터 고대 한국어로부터 분화되어 나갔을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이후 탐라인이 고려의 빈공과[50]에 합격하거나, 탐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간관에 임명되지 못한 고유의 사례처럼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고려와는 별개인 속국 취급을 받는 등 자치는 허용되었다.
1105년 제15대 숙종 시기에 탐라국은 탐라군으로 개편되면서 속국의 지위가 박탈되었고, 본토에 있는 중앙 정부의 통제권에 들어갔다. 개경의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과 탐라 현지인은 서로 갈등을 빚었으며 결국 제18대 의종 때인 1168년 양수의 난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성주'는 여전히 대를 이어 세습되었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계속 허용되었다. 고려 말 목호의 난 진행 과정에서도 목호 측과 고려 진압군 측 모두 명목상 탐라의 지배자인 탐라 성주를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고려 중기 이후의 탐라는 사실상 고려에 복속했지만 아직 독립국가의 성격도 일부 가진 2중적인 정체성을 가진 지역이었다.
《고려사절요》 제13권 명종 광효대왕편에 따르면 탐라국 안에서도 정쟁이 일어났는데, 본래 양씨가 '왕자'를 제수받았지만 정작 마지막 왕자의 이름은 문충세(文忠世)였다. 오히려 왕자 작위를 세습한 성씨는 문씨가 더 많다. 이렇게 된 사연은 좀 길다. 탐라국은 명목상 고씨가 성주였지만 사실상 서쪽 반만 성주의 영토였고, 동쪽 반은 양씨 왕자의 영토였으며, 수도는 공동 통치였다. 화산재 때문에 농사가 어려운 동부보단 서부가 늘 더 강력했지만 고씨 성주들은 이에 만족못하고 외국인 고려에서 과거를 보고 관직까지 얻을 정도로 중앙의 개경 조정에 협조해서 지원을 받았다. 조정은 덕분에 고씨와 양씨가 분열한 틈을 타 탐라국을 속국화시켰고, 고씨 성주는 탐라국 안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얻는 윈윈 전략이었으나 이들에게 부림을 당하는 탐라인들과 토호들에겐 의문의 2패가 되었다. 그러다가 제18대 의종 때의 무신정변으로 고려의 중앙 정부가 막장이 되니 고씨 성주는 반발하는 토호들을 찍어누를 수 없게 되었고, 왕권 유지를 위해서 육지의 문벌귀족 출신의 이주민 가문인 남평 문씨와 결혼 동맹을 맺게 되었다.[51]
《고려사절요》 제13권에 따르면, 남평 문씨는 고려 제19대 명종 때인 1194년에 탐라국에 파견되어 중앙 문물을 제주에 전파하는 데 공헌했다. 문탁의 5세손이었던 문창우가 성주인 제주 고씨의 사위가 되면서 탐라의 부왕격인 왕자직을 세습했다. 근래에 연구진에 의해 복원된 《씨족원류》 및 《동문선》의 복원에 따르면, 문탁의 5세손이자, 문극겸의 장남 문후식의 차남인 문착(文𧨳)부터 문양부(文陽夫), 문영희(文永禧), 문신(文愼), 문창우(文昌祐), 문공제(文公濟), 문승서(文承瑞), 문신보(文臣補), 문충걸(文忠桀), 문충세(文忠世)로 이어지는 왕자직 세습으로 고씨 및 양씨의 성주, 왕자 가문에 버금가는 명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52]
여기서 뜬금없이 남평 문씨가 등장하는 이유는 탐라 서쪽의 성주 고씨 세력이 탐라 동쪽의 왕자 양씨 세력에게 위협받자, 육지의 세력인 고려의 개경 중앙정부 문벌귀족들과 권력적으로 연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는 무신들간의 다툼으로 혼돈의 상태에 놓여있었기에, 무신들에게 잘못 줄을 대었다가는 거꾸로 숙청될 위험이 높았다. 따라서 문신 출신이면서 무신들과 가깝고, 또한 지리적으로 제주도에 가까운 남평(나주)의 문씨가 정치적 차선책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고려사절요》 제14권에서 제17권 그리고 고려 시기의 《씨족원류》에 따르면, 제주 고씨는 탐라 안에서의 지위를 지키고자 재상이자 상장군이었던 문극겸에게 지속적으로 접촉했고, 문극겸의 아들들인 문후식 및 문유필 때가 되어서야(고려 제23대 고종 시기) 군사와 친족을 보내어 왕자 가문인 제주 양씨를 축출하고, 기존의 성주 가문인 제주 고씨는 탐라의 서쪽, 신진 유입 세력인 남평 문씨는 탐라의 동쪽으로 함께 권력을 분점했다. 그 결과, 제주 고씨는 고려의 중앙정부와 연줄을 대고, 지속적으로 성주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남평 문씨는 그 뒤 약 400년 동안 탐라의 동쪽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또 다른 설명으로는, 우봉 최씨 무신 세습정권때 일어난 몽골 제국의 침략에 대한 것이 있다. 당시 고려가 더더욱 혼돈 상황이 된 끝자락 쯤, 고려의 빽이 완전히 증발한 성주 고적을 왕자 양호가 끌어내리고, 성주에 올랐다.(양호의 정변) 다수의 탐라인들과 성주 양호는 탐라국의 자주 독립을 목적으로 제24대 원종 때 일어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을 도왔고, 1인자 자리에서 밀려난 제주 고씨와 고려 중앙정부에서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남평 문씨는 자신들의 권력을 보장해줄 여몽연합군을 지원했다. 최종적으로 김통정이 이끌었던 삼별초가 전멸하면서 제주 양씨가 몰락하고, 이때부터 제주 고씨가 다시 성주를 차지했으며, 동맹인 남평 문씨에게 부왕격인 왕자의 자리와 왕자의 영토인 섬 동부를 주었다. 그 뒤로 이 문씨의 왕자 직위가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몽골 제국과의 여몽전쟁 시기에는 삼별초가 제주도를 점령하여, 최후 항전지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1273년 4월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한 뒤인, 원 간섭기에는 말을 키우기 좋은 환경에 몽골인들이 주목해 탐라총관부가 설치되어 중국 동북의 요양행성 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빼앗긴 충렬왕(제25대) 시기에 일단 반환받았다. 고려에서는 충렬왕 치세 때인 1295년부터 탐라라는 이름을 '(바다를) 건너야(濟) 갈 수 있는 고을(州)'이라는 뜻의 제주로 고치고 지방관인 목사를 파견하는 제주목으로 행정단위를 재설정했는데, 한편 원나라와의 외교관계하에서 탐라는 지방관인 만호가 파견되는 탐라만호부로도 기능했다.
제31대 공민왕이 즉위한 뒤 일어난 병신정변(1356) 이후 개경의 중앙 정부가 강력한 반원정책을 펴자 제주에 남아 있었던 몽골인 목호(牧胡)[53]들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공민왕 치세 말기인 1374년에 목호의 난이 일어나 명장인 최영 장군이 진압군의 수장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렇게 고려 정부, 몽골, 삼별초 등이 탐라국을 계속 뺏고 빼앗았지만 그 동안에도 탐라 성주는 계속 존재했다. 탐라의 토호인 성주와 왕자는 고려와 원나라에서 보내는 지방관들에게 밀려 지역의 실제적인 통치권을 서서히 잃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362년(공민왕 11년)에 성주 고복수가 목호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거나, 제32대 우왕 치세 말기인 1386년 고려가 성주 고신걸과 그 아들 고봉례를 개경에 억류해두고서야 비로소 탐라가 귀순했다고 평가한 것을 보면 고려 말기의 제주(탐라) 성주가 허울뿐인 직책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5.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들어선 제3대 태종 2년(1402), 명칭이 제주도가 되었으며, 마지막 성주인 고봉례(高鳳禮)가 삼국시대 이래로 제주를 지배한 고씨와 양씨가 세습한 성주와 왕자의 명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 줄 것을 청하며 인부(印符)를 조선 조정에 반납했다. 그래서 1404년부터 국왕격인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부왕격인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었고, 이로써 그나마 이름만 유지하다가 조선에 완전히 편입되어 전라도 관할 제주목과 정의현 및 대정현을 설치하여, 완전하게 한양 중앙 정부의 지휘를 받는 행정 구역이 되었다.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오랜 세습 제도가 한 번에 폐지된 건 아니었고, 제4대 세종 27년(1445)이 되어서야 좌도지관은 상진무(上鎭撫)로, 우도지관은 부진무(副鎭撫)로 명칭이 바뀌면서 비로소 선출제도가 실시되었다. 그 뒤 제15대 광해군 12년(1620) 상진무는 진무(鎭撫)로, 부진무는 유향(留鄕)으로 개칭되었다.
비록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도에 속했으나 제주목은 사실 조선시대에도 특수행정구역에 가까웠다. 실제로 다른 군수와 현감들이 목사와는 독립적으로 관찰사의 직속 부하였던 것과 달리 정의현과 대정현의 현감들은 전라도 관찰사의 직속이 아니라 제주목사의 관할하에 있었고, 소속 현감에 대한 행정적인 명령에 대해 전라도 관찰사에게 사후 보고했다.
5.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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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 고자견 | 고말로 | 주물 | 고오노 | 가리 | 고일 | 두량 | 가야잉 | 가어내 | 가양잉 | 고복령 | 의인 | 구대 | 양호 | 고인조 | 고인단 | 고수좌 | 고복수 | 고순량 | 고순원 | 고실개 | 고신걸 | 고봉례 | |||||
두라 | 양구미 | 호잉 | 수운나 | 문창우 | 문창유 | 문충걸 | 문충보 | 문충세 | ||||||
조선 시대 | 좌도지관 고봉례 | 고상온 | 고충원 | |||||
우도지관 문충세 | ||||||
* 신라에 세 형제가 내조하여 각각 받은 칭호. 시기 불명. 고려사상 확인됨. ** 백제 문주왕에게 담왕이 받은 칭호로 족보상 기록됨, 후대 도동음률(명칭에 이설 있음)은 삼국사기상 좌평으로 확인됨. | ||||||
}}}}}}}}}}}} |
중국과 일본 사서에서 나타나는 조공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가계도가 만들어진다.
?. 유리도라 | ||||
?. 고여 | 아파기 | |||
구마기 | 구마예[54] | 도라 | 우마 |
아래의 연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정사가 아닌 《제주 고씨 문중 족보》에서[55] 발췌한 것이기 때문에 열람에 주의를 당부한다. 연표에 포함되지 않은 족보상 추가 정보는 제주 고씨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족보상 정사에서 확인되는 탐라국 왕의 이름이 몇 있지만 워낙 기록이 모자라 제대로 된 왕계조차 파악하기 어렵고, 유리도라 같이 고씨가 아닌 왕의 인명도 기록되어 있으며, 자료에 따라 양씨가 탐라 국왕 및 성주를 지낸 기록도 있어 고씨가 쭉 탐라국의 군주였는지도 의문이 가는 노릇이다. 그리고 애초에 시조 고을나왕의[56] 무려 136년이라는 재위기간부터가 신빙성이 없다.[57] 신라에 입조한 뒤에도 다시 고려에 입조하기 이전까지 왕이라는 칭호가 이어진 것을 보면 외신내왕(外臣內王)적 성격을 띈 것으로 보인다.
순서 | 왕호 | 재위 기간 | 성 | 휘 | 칭호 |
1대 | 고을나왕 | BC 2337년 ~ BC 2206년 | 고 | 을나 | 왕 |
15대 | 후왕 | BC 58년 ~ BC 7년[58] | 고 | 후 | 왕 |
26대 | 담왕 | 423년 ~ 453년 | 고 | 담 | 왕 |
27대 | 지운왕 | 453년 ~ 483년 | 고 | 지운 | 왕 |
43대 | 경직왕 | 883년 ~ 909년 | 고 | 경직 | 왕 |
44대 | 고민왕 | 909년 ~ 934년 | 고 | 민 | 왕 |
45대 | 자견왕 | 934년 ~ 938년 | 고 | 자견 | 왕 |
5.1. 역대 성주 및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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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 김부 | 김위옹 | 왕정 | ||
<rowcolor=#670000> ▨▨대왕 | 필영대왕 | 정간왕 | 양헌왕 | ||
(미상) | (미상) | 왕기 | 왕도 | ||
<rowcolor=#670000> 탐라국왕 | 우산국왕 | ||||
}}}}}}}}} |
아래는 《고려사》 등의 사서에서 확인되는 고려의 제후인 성주(星主)와 왕자(王子), 조선의 지방관인 좌·우도지관의 목록이다.
순서 | 칭호 | 성[59]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1대 | 성주 | 고(高) | 후(厚) | 662년 ~ ? | [탐] |
성주 | 고(高) | 자견(自堅) | ? ~ ? | [동] | |
성주 | 고(高) | 말로(末老) | 938년 ~ ? | [고] | |
? | 추장[63] | 고(高) | 주물(周物) | ? ~ 1024년 | [고] |
추장, 운휘대장군 상호군 | 1024년 ~ ? | [65][고] | |||
- | 세자 | 고(孤) | 오노(烏弩) | ? ~ 1029년 | [고] |
세자, 유격장군 | 1029년 ~ ? | ||||
성주, 유격장군 | 가(加) | 리(利) | ? ~ ? | [고] | |
성주 | 고(高) | 일(逸) | ? ~ 1063년 | [고] | |
성주, 명위장군 | 양(梁)[A] | 두량(豆良) | 1063년 ~ ? | [고][B] | |
성주, 유격장군 | 가(加) | 야잉(也仍) | ? ~ ? | [고] | |
- | 유격장군 | 가(加) | 어내(於乃) | ? ~ ? | [고] |
성주, 유격장군 | 가(加) | 양잉(良仍) | ? ~ 1090년 | [고] | |
성주, 배융부위 | 고(高) | 복령(福令) | 1090년 ~ ? | [고] | |
성주 | 의인(懿仁) | ? ~ 1092년 | [고] | ||
성주, 정원장군 | 1092년 ~ ? | ||||
성주, 배융부위 | 구(具) | 대(代) | ? ~ 1101년 | [고] | |
성주, 유격장군 | 1101년 ~ ? | [고] | |||
성주 | 양(梁) | 호(浩) | ? ~ ? | [80] | |
성주 | 고(高) | 인조(仁朝) | ? ~ ? | [여] | |
성주 | 고(高) | 인단(仁旦)[82] | ? ~ ? | [고][동] | |
성주 | 고(高) | 수좌(守佐) | ? ~ ? | [85][동] | |
성주 | 고(高) | 복수(福壽) | ? ~ ? | [87][고] | |
성주 | 고(高) | 순량(順良) | ? ~ ? | [89][동] | |
성주 | 고(高) | 순원(順元) | ? ~ ? | [91][동] | |
성주 | 고(高) | 실개(實開) | ? ~ ? | [고] | |
성주 | 고(高) | 신걸(臣傑) | 1384년 ~ ? | [94][고][동] | |
성주 | 고(高) | 봉례(鳳禮) | ? ~ 1404년 | [조] | |
1대 | 도주관 좌도지관 | 1404년 ~ 1411년 | |||
- | 도주관 좌도지관 | 고(高) | 상온(尙溫) | 1411년 ~ 1412년 | [98][조] |
2대 | 검교한성윤, 도주관 좌도지관 | 고(高) | 충언(忠彦) | 1412년 ~ ? | [100][조] |
도주관 좌도지관 | ? ~ 1445년 | [C] |
순서 | 칭호 | 성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1대 | 왕자 | 고(高) | 청(淸) | 662년 ~ ? | [탐] |
왕자 | 양(梁) | 구미(具美)[104] | ? ~ ? | [동] | |
왕자 | 양(梁)[A] | 두라(豆羅) | ? ~ 1043년 | [고][B] | |
왕자 | 양(梁)[A] | 호잉(號仍) | 1043년 ~ ? | [고][111] | |
왕자 | 수운나(殊雲那) | ? ~ 1053년 | [고][113] | ||
왕자, 중호장군 | 1053년 ~ ? | ||||
왕자 | 문(文) | 착(𧨳) | ? ~ ? | [여][동] | |
왕자 | 문(文) | 양부(陽夫) | ? ~ ? | [여][동] | |
왕자 | 문(文) | 영희(永禧) | ? ~ ? | [여][동] | |
왕자 | 문(文) | 신(愼) | ? ~ ? | [여][동] | |
왕자 | 문(文) | 창우(昌祐) | ? ~ ? | [여][동] | |
왕자, 성주 | 문(文) | 창유(昌裕) | ? ~ ? | [고][동][연려실기술] | |
왕자 | 문(文) | 공제(公濟) | ? ~ ? | [여][동] | |
왕자 | 문(文) | 승서(承瑞) | ? ~ ? | [동] | |
왕자 | 문(文) | 신보(臣補) | ? ~ ? | [동] | |
왕자 | 문(文) | 충걸(忠傑) | ? ~ ? | [동] | |
왕자 | 문(文) | 충보(忠甫) | ? ~ ? | [조] | |
왕자 | 문(文) | 충세(忠世) | ? ~ 1404년 | [조][134] | |
도주관 우도지관 | 1404년 ~ 1406년 | ||||
도주관 우도지관 | ? ~ 1445년 | [C] |
6. 연표
자세한 내용은 탐라국/연표 문서 참고하십시오.7. 여담
- 탐라국 궁궐의 존재에 관해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많으나 본궐은 지금의 제주목 관아터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 까닭은 탐라국의 성주가 업무를 보았던 성주청이 제주 우체국 자리에 위치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신라 헌덕왕 16년(824년)에는 서귀포에 이궁인 남궐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민간설화에는 탐라국의 왕자가 지금의 서귀포 위미리 또는 한남리에 남궐을 지었다고 한다. #
- 탐라국에 대한 기록 자체가 부족하다. 고려 중기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조선 초기의 《고려사》 등에서도 단편적으로만 언급되고, 자체적으로 남긴 기록도 적다. 때문에 명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그렇다보니 긴 역사와 육지와 다른 독자적인 지점이 있음에도 탐라국 자체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소설들은 거의 없는 편이다.[137] 그래도 울릉도의 우산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남은 유적과 유물 및 기록이 많다.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시조와 말왕의 기록도 우산국보다 많다.
- 〈해적: 도깨비 깃발〉에서 권상우가 작중 탐라국의 왕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주인공 일행들이 찾는 보물들을 노리고 있는 부흥수라는 악역을 연기했다.
- 야사에서는 베트남 왕족을 제주도의 왕이 죽였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 광해군 3년(1611년) 8월 제주도에 외국 상선이 표류해 온 것을 당시 제주 목사 이기빈이 왜구로 몰아 승객과 선원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사건인데, 류큐 왕국 왕자 설(조선왕조실록)과 베트남 왕족 설(정동유 著 주영편, 장한철 著 표해록)이 전해 내려오나 그 뒤로 류큐, 베트남 모두 조선에 보복이나 항의성 조치가 전혀 없었던 것을 보면 죽은 선원들의 신분이 확실치는 않다.
8. 관련 문서
[1] 기원전 2337년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고조선의 건국 연대라 전해지는 기원전 2333년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신화적인 연대이다.[2] 후한 시대와 동시기에 제주도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토착 세력이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3] 고려 제15대 숙종 시기에 탐라군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제18대 의종 대가 되면 중앙 정부의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재지 세력에게 '성주'와 '왕자'라는 세습 작위가 부여된 점과, 고려 말 제31대 공민왕 시기에 와서도 탐라가 고려에 공물을 바쳐왔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점에서 고려 본토와는 다른 특수한 위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중국과 별개의 천하관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천자국을 자처하던 고려에서 탐라를 제후국으로 취급한 것으로, 이후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해 격이 낮아진 조선은 명목상으로 남아있던 탐라 고유의 위상과 권한을 점차 철폐시키게 된다.[4] 《위서》. 이를 신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고구려 사신 예실불이 말한 내용에 따르면 섭라가 아예 백제에 합병되었다고 나오기 때문에 통설은 탐라국으로 보는 것이다.[5] 《수서》[6] 《신당서》[7] 《삼국유사》, 《고려사》[8] 주호국으로 비정되는 섬 주민의 문화 및 초기 탐라국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지금의 라마다프라자 제주호텔과 탑동로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9] 부왕격으로 왕자(王子)가 있었다.[10] 제주 양씨의 시조이다. 그리고 제주 양씨에서 분관된 남원 양씨의 시조이기도 하다.[11] 제주 고씨의 시조이다.[12] 제주 부씨의 시조이다.[13] 이후 성주제가 실시된다.[14] 제주 고씨, 초기 통치시 국왕, 후기 통치시 주로 성주(星主), 왕자를 맡은 기록이 확인된다. 시조 삼을나(梁高夫) 이후 세력이 강성해지자 국주가 되어 현재의 제주도 전역을 관장하다가, 성주제 이후 섬의 서쪽을 통치하게 되었다. 조선 이후에는 좌도지관(左都知管)이었다.[15] 제주 부씨[16] 제주 양씨, 후기 통치시 주로 왕자(王子), 성주를 맡은 기록이 확인된다. 성주제 이후 섬의 동쪽을 통치하다가, 이후 고씨와 결탁한 문씨에게 통치권을 내어주고 말았다. 조선 이후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이었다.[17] 일시적으로 탐라의 성주를 맡은 기록이 있다. 다만, 《탐라지》나 《실록》에서 고씨의 오기일 가능성이 학계에서 제기되었다. 한자로 전사된 고대의 고유어 표기는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다. 당사자가 한자식 인명을 사용했으며 공식표기도 남겼다면 이견이 없지만 고대 한반도에는 아직 한자 문화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유어로 된 명칭이 한자로 가차되면 필사자의 습관 및 지역마다 달랐던 방언적 차이에 따라 비슷하지만 다른 한자로 가차되는 경우가 흔했다. 여기서 특히 자음은 비슷비슷해도 모음은 그보단 다르게 표기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고'의 이표기가 아닐까 추정되는 것이다. 특히 '가(加)'는 매우 간단한 자형의 한자로써 음차에 흔히 이용된 한자였다.[18] 남평 문씨, 왕자(王子), 성주를 한 기록은 없으며, 양씨 대신 탐라의 동쪽을 통치한 바 있었다.[19] 중세 이후의 제주어와의 연결고리는 제한적인 가능성만 있을 뿐, 같은 언어라는 근거가 아직 부족하다. 오히려 제주어는 고려 시대 한반도에서 유입된 중세 한국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0] 언제부터 한국어족인 제주어의 고어에 해당하는 언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최초로 기록된 것은 15세기 경이다. 한반도의 중세 한국어가 10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성립된 것을 보아, 중세 제주어 역시 그 이후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1] 물론 주요 사건에서 보듯 이전부터 한반도 여러 왕조의 지배권 영향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2] 오키나와의 류큐인도 오늘날엔 일본인과 형제뻘(?)인 민족 취급받지만 야마토 민족인 것은 아니며, 일본 본토와 그닥 동질성을 느끼지 않는데 이와 비슷하다. (게다가 오키나와는 가까운 일본령인 규슈 섬과 한참 떨어져 있다.) 차이점은 복속 역사가 더 긴 탐라국이 더 본토와 동화되었다는 정도이다. 오키나와는 지금도 일본 본토와 꽤나 이질적이다.[23] 529년 3월 신라가 공략한 성들 중 하나인 포나모라(布那牟羅), 같은 해 4월 왜국의 오우미노케나가 머무른 가야의 구사모라(久斯牟羅), 530년 9월 기사에서 등장하는 이사지모라성(伊斯枳牟羅城),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 등리지모라(騰利枳牟羅), 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 그리고 554년 12월 백제의 부여창이 요새를 쌓았다는 구타모라(久陀牟羅)가 기록되어 있다.[24] 6세기 신라인들은 왕성을 건모라(健牟羅)라는 명칭으로 부른다고 기록했다. 이는 《남사》에도 실린 내용이다. 건(健)은 백제의 고유어 왕호인 건길지의 건(鞬)과 같은 단어로, 크다[大\]는 뜻으로 추정하기도 한다.[25] 524년 1월 15일의 기록으로, 울진 지역에 거벌모라(居伐牟羅)라는 지명이 있었다고 한다.[26]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의 54개국 중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과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이 있다.[27]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옛 백제의 성들 중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모로성(牟盧城), 모루성(牟婁城), 고모루성(古牟婁城)이 있다고 기록했다.[28] 전라북도 고창군의 백제 시절 지명으로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 등장한다.[29] 신라 경덕왕은 한화 정책을 실시할 때 '산'에 대응하는 어휘를 山 말고도 高로 번역하기도 했다. 또 다른 예는 본래 고구려의 달홀(達忽), 즉 '산성'이었던 고성군.[30] 백제 무령왕의 이름 사마(斯麻)는 중고한어로 /*siᴇ mˠa/ '셰마'라고 발음되었는데,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이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같은 문헌에서 무령왕을 아예 섬의 왕(嶋王; 세마키시)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알렉산더 보빈은 중세 한국어 ':셤'을 염두에 두고 *syema(셔마)라고 재구했다. #[31] 중고한어 재구음부터 /*tom/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6세기 신라의 인물 탐지(耽知)가 〈단양 신라 적성비〉에서 두미지(豆弥智)로도 적힌 것을 보면 당시 한국 한자음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32] 고조선, 고구려, 가야의 건국 신화에서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는 반대다. 백제와 신라 같은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건 아니고 혈연(동명성왕)이나 상징물(백마(신라))을 통해 간접적으로 매개되며, 가야 같은 경우에는 신화가 두 가지인데 김해의 금관국(금관가야)이 하늘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과는 다르게, 고령 반파국(대가야)의 신화는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중심이다. 반파국 신화를 생각하면 제주도의 것과 비슷하게 땅의 역할을 크게 보고 있다.[33] 양씨는 나중에 신라에 입조시 梁을 하사받아 고려때까지 둘을 혼용하다가, 점차 梁으로 바뀌었다.[34] 조선 왕조 초기의 관찬 사서인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형제의 순서는 차례대로 양·고·부(良高夫/梁高夫)이다. 다만 나중에 기록된 사료에서는 고씨가 앞에 오는 고·양·부가 나타나기도 하나, 사찬 사서이고 《고려사》보다 시기가 뒤늦어 정통으로 보기 어렵다. 만년 3인자 부씨. 자세한 사항은 삼성혈 외부 링크 참조.[35] 참고로 이 삼성(三姓)의 순서를 두는 문제로 양씨와 고씨가 정통성 싸움을 하고 있는데, 2014년에는 제주삼성을 대표하는 재단의 이름에 고씨 문중의 주도로 양·고·부가 아닌 고·양·부가 들어가자 법정 다툼까지 벌일 정도였다. 다만 정통성 문제는 조선시대에 이미 옛 문헌을 널리 상고한 끝에 첫째가 양씨, 둘째가 고씨, 셋째가 부씨인 것으로 결론이 났고, 이에 따라 관찬사서인 《고려사》, 조선시대 제주목사의 삼을나 배향 신위의 순서 등에서 그대로 따랐다. 즉, 오늘날의 논란은 3성 중 가장 수가 많은 고씨 문중의 억지인 셈인데, 이를 토대로 보면 정통성으로는 양·고·부, 인구수로는 고·양·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제주 양씨에서 분적한 남원 양씨의 수가 제주 양씨 본성보다 많아 이들 제주계 양씨와 제주계 고씨 모두 수가 50만 명 단위로 큰 차이가 없어 애매하다. 일단 제주 본토에는 고씨가 더 많기는 한데...[36] 조선 제21대 영조 때 고한준(高漢俊)의 상소에도 양·고·부(良高夫)로 되어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주 고씨이다. 《조선왕조실록》 제주 유생 고한준 등 상소문 참조. 상소 내용 자체는 탐라국의 역사를 고려하여 전조 왕 대접을 해달라는 건데 쿨하게 까였다.[37] 《고려사》에는 일본국이라 되어 있다.[38] 이는 현대 한국어의 으리으리하다의 '으리'와 연관이 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여기서 파생되어 3왕가 중 고씨를 칭한 왕가가 있다는 점에서 아예 고구려의 계루부 고씨 왕가와 연관이 있지 않은가 하는 추정도 있다. 삼국시대 내내 거의 백제에 복속된 상태였던 탐라국이 바다까지 끼고 가장 멀리 있는 고구려와 연관이 있다는 점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실제로 탐라국은 백제를 달달 털었던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재위기 즈음에 일시적으로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다가 제21대 문자명왕 대에 백제 제24대 동성왕의 무력시위에 의해 다시 이탈하게 되었다고 당대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탐라국 기준으로는 지운왕 시기에 해당한다). 또한 삼국시대 도중 항해기술의 발달로 연안항해에서 원양항해가 가능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백제를 달달 턴 시기 즈음 고구려에서 함대를 파견해 탐라국을 복속시킨 것이 되며, 만약 위 고구려 왕가 관련설이 맞다면 이때 고구려 본토의 기술력과 군사력을 통해 우월한 지위를 갖고 정착한 고구려인 집단이 있었던 것이 되고, 이들이 도래한 이야기가 토착지배층의 전설과 합쳐져 탐라국의 신화를 재구성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39] 좀 더 정확하게는 제주도에서 중국계 유물도 발견되는 만큼 이미 한나라의 교역망에도 들어가 있었고, 따라서 침미다례와 같은 한반도 남방 국가들과는 백제보다도 먼저 교류가 있었을 것이나, 오늘날 기록이 전해지는 중앙집권 왕국과 통교한 건 이때가 최초였다.[40] 다만, 이는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41] 남북 1,000여 리, 동서 수백 리에, 항해 일수가 석 달이 걸린다는 기록 때문에 섬의 크기나 생김새, 그리고 거리상 제주도가 아니라 지금의 대만 섬이라는 떡밥이 있으나, 군선이 대만으로 표류했다면 굳이 백제를 들러 중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또한 대만은 《수서》에 함께 기록된 '유구국(流求國)'이라는 설이 있다. 다만 유구국에 대해서는 오키나와, 즉 류큐설이 조금 더 우세하긴 하다. 물론 가장 기본적으로 백제가 제주도 또한 완전히 영토로 편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만까지 원정을 나가는 뻘짓을 왜 했느냐, 그리고 했다면 관련 기록은 왜 없느냐는 비판 또한 들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수나라가 바다 동쪽의 여러 섬들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로 보인다.[42] 현존하는 한국 사서에서 탐라국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단이다. 다만 이 문단에서의 탐라국은 아래 기록의 처음으로라는 말 때문에 전남 지역에 존재하는 마한의 잔존 세력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43] 의외로 여진족의 존재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기록에 나온다. 흔히 퉁구스계 민족들의 계보를 '물길-말갈-여진-만주'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확히는 퉁구스계 제민족들을 통일한 부족의 이름이 종족명이 된 경우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즉 말갈족이 득세할 때도 여진족이 있긴 했지만, 이때만 해도 말갈족에게 끽소리도 못하고 눌려지내던 겉절이였다는 뜻이다.[44] 伊吉博徳書(いきのはかとこのしょ). 이키노 하카토코(伊吉 博徳)가 제4차 견당사로 갔다왔을 때의 기록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가문의 급을 나타내는 카바네(姓)가 후히토(史)였다가 무라지(連)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당대의 관습에 따라 씨(氏)와 합쳐서 이키노무라지 하카토코(伊吉連 博德)라 기록되기도 했다.[45] 백제의 제1품 관직이다. 탐라국은 상기했듯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들어오기 전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다. 따라서 으레 그랬듯이 백제에서 명예관직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기된 연마는 백제가 멸망한 뒤인 667년에도 좌평을 자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관습적인 칭호로써는 여전히 한동안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6] 《제주 고씨 족보》에 따르면 처량왕(處良王)이 이때의 왕인데, 후대에 지어진 족보보다는 당대 기록 쪽이 당연히 신빙성이 높다. '도동음률'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서, '유리도라'라는 이름은 《신당서》와 《책부원귀》에서 등장한다. 다만 도동음률의 경우 인명이 아닌 지명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47] 칠성통과 그 주변 지역은 탐라국 시대부터 1990년대까지 제주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며, 땅값 역시 가장 비싼 곳이었다. 허나 제주도청과 시청, 법원 등 주요 기관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신제주와 광양 등지로 중심지가 옮겨가면서 점차 쇠락하는 중이다. 특히 제주도립병원(현 제주대학교병원)이 산골 아라동으로 이전한 것을 두고 호흡기를 떼버렸다는 평가도 있다. 제주도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관덕정 앞 마당이 오늘날 칠성통 입구 제주목관아 앞에 있었고, 그 제주목관아와 관덕정 바로 동쪽에 있는 제주우체국이 옛 탐라국의 군주인 성주(星主)가 집무하던 성주청 터이다. 조선보다 더 이전 원간섭기에는 지금의 제주목관아 북쪽. 그러니까 탑동 매립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바로 바닷가 앞이였을 곳에 탐라총관부의 관청들이 있었다.[48] 일본에서 당나라로 견당사를 보내는 바닷길 중간 지점에 탐라국이 있다보니, 견당사를 탐라국에서 약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49] 신라의 또다른 종속국이던 울릉도의 우산국 역시 비슷한 위치였다. 863년 일본에 우산국 사람이 표류했을 때도 우산국에 직접 보내지 않고 다른 신라인과 함께 귀국시켰다.[50] 賓貢科 : 외국인을 자국의 관료로 임용하기 위하여 치르던 시험.[51] 부연하자면 남평 문씨는 육지 이주민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제주도와 가까운 전남 나주 일대의 가문이었다.[52] 현재 문탁의 묘소는 없어졌지만 후손들이 하가리에 사당을 세워 문탁을 추모하고, 역사적 사료를 연구진에 공유했다.[53] 목호는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담으로, 제주도 향토사학자인 이영권이라는 사람은 이 사건을 두고 고려시대 버전 4.3 사건이라고 했다. 제주도에 살았던 몽골인 목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고려군에게 진압되면서 애꿎은 제주인들 일부가 몽골인으로 오인받아 학살당하자, 몽골계 귀화인(제주 초씨나 제주 좌씨 등)과 제주도 토착민 등이 자신들이 몽골인들과 연관되었음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는데, 이것이 현대의 4.3 사건 당시에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아서 제주도민들의 상당수가 학살당한 뒤에 제주도에서 반공주의가 확산된 것과 절묘하게 똑같아서 그렇다고 한다.[54] 구마기와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55] 이런 경우 대부분 숭조 작업의 일환으로 왜곡한 기록이기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가치를 두지 않는다.[56] 고을나왕과 제15대 고후왕은 《고려사》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사서와 제주의 여러 전설에 전하고 있어 근대에 창작된 허구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전하는 사서들이 탐라국이 멸망하고 워낙 수백 년 뒤에 쓰여진 거라서 실존했다는 신빙성은 없다.[57] 제28대 서왕부터 제42대 소왕까지는 모두 똑같이 25년씩이다.[58] 고을나의 15대손 고후는 삼국통일전쟁 시기의 인물이다. 고을나의 재위 기간을 고려하면서 사서의 기록을 짜맞춘 결과 600년 전의 원삼국시대 사람이 되었다.[59] 고(高)를 제외한 성주의 성씨는 문헌상의 이름에서 성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표기한 것이다.[탐] 《탐라지》(耽羅志)[동] 《동문선》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고] 《고려사》[63] 《고려사》에서 '추장(酋長)'이라는 표현은 말갈과 여진의 군주를 이를 때 쓰인다. '성주(星主)'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나, 아들의 이름이 고몰(高沒)인 것으로 미루어 '성주' 본인이거나 탐라국의 하위 토호인 것으로 보인다.[고] [65] 아들 고몰(高沒)도 함께 운휘대장군 상호군에 임명되었다.[고] [고] [고] [고] [A] 《제주 양씨 족보》[고] [B] 《제주 양씨 족보》에서는 왕자 두라와 성주 두량을 함께 중시조 양구미의 2세손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고] [고] [고] [고] [고] [고] [80] 《원사》, 《신증동국여지승람》[여] 《여지도서》(輿地圖書). 《여지도서》에 따르면 "원종 11년(1270년) 경오년에 반적 김통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진도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신미년에 탐라를 침략하니, 성주 고인조와 왕자 문창우 등이 (왕에게) 아뢰었다(十一年庚午反賊金通精領三別抄據珍島翌年辛未來據侵掠星主高仁朝王子文昌祐等以聞越)"고 한다.[82] 또는 인탄(仁坦)[고] [동] [85] 고인단(인탄)의 동생.[동] [87] 공민왕 11년(1362년) 목호의 난에 관련된다.[고] [89] 고인단(인탄)의 손자로, 고석의 아들이다.[동] [91] 고순량의 동생.[동] [고] [94] 고순원의 아들.[고] [동] [조] 《조선왕조실록》[98] 고봉례는 장남 고상온이 토호인 도주관 좌도지관을 이어받기를 태종에게 청했다. 고상온은 좌도지관을 이어받았지만, 약 3개월의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조] [100] 의정부의 청으로 '고봉례의 뒤를 이어' 도주관 좌도지관이 되었다.[조] [C] 병조의 청에 따라 도지관직이 혁파되었다. (《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 6월 19일)[탐] [104] 또는 차미(且美).[동] [A] [고] [B] [A] [고] [111] 《제주 양씨 족보》에서는 이 인물을 4세손이자 이름(號)이 잉(仍)인 양잉(良仍, 梁仍)으로 본다.[고] [113] 아들은 배융교위 고물(古物)[여] [동] [여] [동] [여] [동] [여] [동] [여] [동] [고] [동] [연려실기술] [여] [동] [동] [동] [동] [조] [조] [134] 사서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왕자 직위는 장자 세습이었다. 하지만, 문충세는 문신보의 차남이자 문충걸의 동생으로 나온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이르러, 정치적 구도상 세습에 관련되어 격변의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사례된다.[C] [136] 사실 이러한 사례는 많은데, 백제문화단지와 월정교 등이 그 예시다.[137] 다만 몇몇 게임에서 게임상 등장하는 제주도 지역을 탐라국을 모델로 만든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