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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5:54:20

코샨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1. 개요

和尚, 생몰년 미상
원나라의 인물이다. 시호는 장숙(莊肅)이다.

2. 생애

성은 백아오태(伯牙吾台)씨이다. 조부 할라찰은 부하를 거느리고 태조에 복속하였다. 아버지 홀도사는 태종예종을 따라 금나라를 정복한 공로로 '발도로(拔都鲁)'라는 호를 하사받았는다. 금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백호를 관할한다. 남송 공격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헌종 5년(1255)에 전사하였다.

1259년 쿠빌라이 칸의 밑에서 악주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1262년에는 이단의 난 진압에 참전한다. 또한 1268년에는 제4차 양양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 와중 군무가 번잡하였는데, 코샨의 계책으로 도원수 아술의 인정을 받는다. 이후에는 바얀의 밑에서 공을 세워 쿠빌라이 칸의 칭찬을 받았다.

1275년 3월에는 아릭카야의 밑에서 악주[1] 등지를 항복시킨 뒤 사시진을 도성하였으며[2] 강릉을 지키던 호북제치부사 고달에게 투항을 권유해 그를 투항하게 한다.[3] 그 공으로 낭중으로 승진한다. 이후 담주[4]를 함락시킨다. 이 과정에서 원나라의 군대가 3개월 동안 담주를 포위 공격했지만 마침내 함락되었고, 수장 이불은 자살한다. 원나라의 군대가 성 안의 군민을 학살하려 하자 코샨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군에 저항하는 것은 송나라의 장군뿐이고 백성들은 죄가 없습니다. 이제 항복하였으니 이제 대원의 백성이옵니다. 어떻게 차마 도륙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 함락되지 않은 성이 많고, 함락되면 바로 죽이는 것은 그들의 결사적인 저항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할 뿐이옵니다.
좌승 최빈과 평장 아릭카야가 모두 코샨의 의견에 동의해 담주 백성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호남의 다른 군현들도 속속 귀순했다. 세조는 그 소식을 듣고 상을 두 배로 주었고, 코샨은 행성단사관이 되었다.

또 광서 지역을 공격하였고 코샨이 이끄는 군사들은 정강[5] 지역을 점령했다. 광서 지역이 평정된 후에는 태중대부를 하사받는다.

상덕로달로화적(常德路達魯花赤)의 자리에 있었고 후에 영남광서도제형안찰사를 지냈는데, 이때 아릭카야는 공을 믿고 교만하여 백아오태화상의 탄핵을 받았다. 이후 강남절서도제형안찰사를 지냈고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사후 선충수정공신(宣忠守正功臣), 은청영록대부(銀靑榮禄大夫), 사도(司都), 상주국(上柱國)에 증직되었고, 윤국공(沇國公)에 추봉된다.

3. 가족관계



[1] 호남성 악양시이다.[2] 바얀이 장강의 흐름을 타 동진하고 있을 때 고세걸이 형호 지역의 군사들을 모아 원나라 군사들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아릭카야는 후방 안정을 위해 그의 부장 장영실과 함께 출전하여 고세걸을 동정호의 도화탄까지 추격하여 그를 항복시켰고, 고세걸로 하여금 악주 수장 맹지소를 투항시킨다. 이후에는 사마몽구가 지키던 사시진을 도성한다.[3] 고달은 청양몽염, 주사손과 함께 투항하게 되고 고달이 투항한 이후 형호북로가 연이어 원나라에 투항하게 된다.[4] 호남성 장사시이다.[5] 이전 이증백우량카다이의 군대를 막아낸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