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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3:00:22

학경

郝經

1223~1275

1. 소개2. 생애3. 저서

1. 소개

원나라의 관료, 유학자, 역사가, 자(字)는 백상(伯常). 그의 6대조인 학종의(郝從義)는 송대(宋代)의 이학(理學)자 였고(《능천집(陵川集)》卷27) 그 조상은 노주(潞州) 사람이었으나 택주(澤州) 능천(陵川)으로 이주했다. 금나라의 대학자 학천정(郝天挺, 1161~1217)의 손자다.

2. 생애

금나라 말, 학경의 아버지 학사온(郝思溫)은 전란을 피해 하남의 노산(魯山)에 옮겨가 살았는데 하남에도 전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땅을 파고 움집을 지어 숨어 지냈는데, 병사들이 불을 피워 연기를 동굴 속에 집어넣으니 많은 백성들이 죽었다. 학경의 어머니 허씨도 이렇게 죽을 지경이 되자 학경이 꿀과 차가운 채소절임 국물을 구해 모친의 입을 벌리고 마시게 하니 허씨가 소생하였다. 당시 학경은 겨우 9살이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두고 총명한 소년이라 칭찬하였다.

금나라가 망하자 학경의 가족들은 순천(順天)으로 이사를 갔다. 학경은 집안이 가난하여 낮에는 장작을 지고 팔아 쌀을 구해 양식으로 삼았으며, 밤에는 책을 읽었다. 이런 생활을 한지 5년, 1243년에 수수(守帥) 장유(張柔)와 가보(賈輔)가 학경의 소문을 듣고 그를 상객으로 불렀다. 두 집안에는 장서가 모두 1만 권에 달하였는데 학경이 두루 읽고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다. 학경은 이후 연, 조 나라 지방을 두루 오갔고 할아버지를 많이 닮아 재능과 기량이 비상해 보이니 더욱 공부에 노력해 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2세 후가의 집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 학경은 금나라의 유신이자 조부의 제자였던 원호문과 송나라 출신인 이학대사(理學大師) 조복[1]을 알게 되었다. 학경은 원호문의 학문과 됨됨이를 칭찬하며 '일대 종장'이라고 부르며 제자의 예로서 그를 대했고 여러 차례 조복을 만나 그와 교제하며 논도하였다. 조복은 "강좌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백상과 같이 책을 읽는 사람이 아주 많은데, 마치 우리 백상이 늘 하늘과 땅 사이에 우뚝 서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학경을 칭했다.

1252년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기 전, 칸(황제)의 동생으로서 금련천(金蓮川)에 개부하고는 문인들을 추천받았다. 학경은 쿠빌라이의 부름에 응해 왕부로 들어갔고 쿠발라이는 학경에게 나라를 경영하는 기본 도리에 대해 물었다. 학경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안정시킬 계책 수십 가지를 올렸고 쿠빌라이는 크게 기뻐하여 학경을 왕부(王府)에 들어가게 했다. 이 무렵 몽케 칸송나라를 정벌하기 위에 으로 들어가고 쿠빌라이는 동로군을 맡게 했는데 학경도 호종해 복주(濮州)주로 갔다. 그곳에서 송나라 조정의 문서를 입수하게 되었는데 쿠빌아리는 이 문서를 보여주고 참모진에게 의견을 구하니 학경은 지금은 아직 송나라를 정벌할 때가 아니라 내정을 다스릴 때라고 하여 쿠빌라이는 학경이 일개 유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가 학경의 식견에 놀랐다고 한다. 이후 학경은 전국 7개 지방에 관해 7천여 단어로 건의하였다.

이에 쿠발라이는 양유중(楊惟中)을 강회, 형호남북등로의 선무사(江淮荊湖南北等路宣撫使)로, 학경을 그 부사에 임명하고 귀덕군을 지휘하여 선봉이 되라고 지시하였다. 이들은 먼저 강장으로 내려가면서 은덕을 선포하고 투항자들을 받아 들였다, 도중에 양유중이 제 멋대로 변경으로 돌아가려 하자 학경은 나와 귀공은 함께 송나라를 정벌하라는 명을 받았지 돌아가라는 명을 받은 적은 없다고 하고 양유중이 노하여 학경의 의견을 받지 않자, 학경은 자신만의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갔고 양유중은 처벌이 두려워 사과하고 학경을 따라갔다.

한편 몽케 칸이 이끄는 서로군은 촉 지방에서 송나라 군의 저항을 받아 지지부진 했고 이에 학경은 <동사의(東師議)>을 지어 회남부터 형양 지역까지 3개군을 나누어 진격하자는 의견을 쿠빌라이에게 바쳤다. 그 후 쿠빌라이는 군사를 모아 장강을 도하하여 악주를 포위하다가 몽케 칸이 죽자 모든 장수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학경이 몽케칸의 장례와 후사를 준비하기 위해 후퇴를 주장했고 때 마침 송나라 재상 가사도가 사신을 보내 평화협정 체결을 요청하자 쿠발라이는 협정을 맺고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였다.

1260년 쿠빌라이가 칸으로 즉위하였다. 쿠빌라이는 학경을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 임명하고 금으로 만든 호부(金虎符)를 달아주며 송나라에 즉위를 고하고 송과의 화친을 확정짓도록 하였으며 변방의 모든 장수에게 송나라를 노략질하지 말라고 지시하게 했다. 학경이 출발 보고를 하러오자 쿠빌라이가 포도주를 하사 하면서 "짐이 이제 즉위하여 모든일이 처음이니 경이 먼 길을 가더라도 짐을 보필할 일이 있으면 빨리 상주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학경이 그때 그때 필요한 적절한 처지 16개를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은 정치를 바로 세우는 요체를 기술한 것이었다.

그런데 학경이 이렇게 명성과 신임을 얻자, 평장 왕문통(王文統)이 이를 시기하여 학경이 떠난후 몰래 이단(李璮)에게 연락하기를, 송나라를 침공해 자극하라 하였다. 송나라의 손을 빌어 학경을 없애버리자는 속셈이었다. 학경이 제남(濟南)에 도착하자 이단은 글을 보내 송나라에 가지 말라고 했는데 학경은 그 글을 조정에 보고하고는 계속 가던길을 갔다. 학경은 숙주(宿州)에 도착하자 부사 유인걸(劉仁傑), 참의 고도(高翿)를 보내 언제 송나라에 입국하면 좋을지 그 기일을 물었으나, 송나라에선 이단의 군대가 송나라에 침입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그 감정 때문에 응답을 하지 않았다. 학경은 송나라 재상 가사도와 회수 지방 원수 이정지에게 입국 기일을 독촉했으나 이정지는 학경의 방문 의도가 의심스럽다는 답서를 보내 왔다. 특히 가사도는 당시 자신이 몽골군을 물리친 것처럼 자랑하고 있었는데 만약 학경이 오면 그게 탄로날까 우려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학경은 자신이 고집하여 회수를 건넜고 송나라 진주(真州)의 관사에 감금되었다. 이에 학경은 송나라 임금에게 공문을 보내 일러 질책하였다.
"노중련의 의로서 난관을 없애 분쟁을 해결코자 할 뿐 당검[2] 같은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소. 어찌 병사를 내어 나라를 그르치시오?"
이후에도 송나라 임금과 재상에게 수차례 글을 보내어 화친의 중요성과 알현을 요청하고 아니면 귀국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모두 묵살되고 말았다. 송나라 역참 서리들은 울타리를 치고 열쇠를 단단히 잠궈 밤낮으로 순라하면서, 학경에게 변심하여 송나라에 귀순하게 하려 했는데 학경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학경은 평소 아랫사람들에게 엄하였는데 구류가 길어지자 아래에서 불평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학경이 말하였다.
"지난번 명령을 받고 바로 나아가지 않은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한번 송나라 영역에 들어온 이상 생사나 진퇴도 모두 저들의 손에 달렸으나, 나는 죽더라도 몸을 굽혀 어명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들도 불행하게 되었으나 마땅히 이 어려움을 참아야 한다. 내가 보건대 송나라의 운세는 얼마 남지 않았노라."
이렇게 7년을 억류당하니 호종자 가운데 항의하다 죽은 사람이 여러 명이나 되었고 학경과 다른 6명만이 별관에 갇혀있었다. 다시 9년이 흘러 지원(至元) 12년(1275년) 승상 바얀이 어명을 받고 송나라 정벌에 나설때 쿠빌라이가 예부상서 즁투카야와 학경의 동생 추밀원 도사 학용을 보내 학경 일행을 붙잡고 있는 죄를 물었다. 송나라가 두려워하여 총관 단우를 보내 예를 갖추고 학경 일행을 돌려보내 주었다. 비로소 가사도의 음모가 드러났고 가사도는 얼마뒤 비참하게 죽었다.

학경은 귀국길에 병이 들었는데 쿠빌라이가 추밀원과 상의원에 대해, 노고를 위로하고 의사를 보내 치료해주라 하였다. 길에 나와 학경 일행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많은 마을 원로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학경이 대궐에 도착하여 쿠빌라이가 성대한 잔치를 열어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였고, 정무를 자문하고 많은 포상을 하사해 주었다. 그 해 7월(양력 8월 9일) 죽으니 나이 53세였다. 관청에서 호상하여 고향으로 보내 장사를 치르게 하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올렸으며 그 이듬해 송나라가 평정되었다.

학경이 돌아오기 전에, 변경(카이펑)의 어떤 백성들이 금명지(金明池)에서 활을 쏘아 기러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기러기 발에 비단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 풀어보니 한편의 시가 적혀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서리내리고 바람 차니 왔던 곳이 생각나는구나(霜落風高恣所如)
돌아갈 때가 언제리연지 오는 봄에는 갈 수 있으련지(歸期回首是春初)
상림에 계신 천자시여, 활을 당겨 주십시오(上林天子援弓繳)
바닷가에 갇힌 신하가 올린 편지가 있습니다(窮海累臣有帛書)

그리고 뒷면에는 '중통(中统) 15년(1274년) 9월 1일 기러기를 풀어 주었으니, 붙잡은 사람은 죽이지 말라, 국신대사(國信大使) 학경이 진주 충용군 군영 신관에서 글을 썼다'라고 쓰여있었으니 그 동안 원나라 조정은 그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도 몰랐다. 학경은 몇 년 간 구금된 후 1274년에 송인이 식량으로 준 살아있는 기러기 중에서 건장하고 날 수 있는 한 마리를 골라서 편지를 매어 기러기를 날려보냈던 것이다. '중통 15년'은 실은 '지원 11년'으로, 학경은 송에 구속되어 원나라의 개원에 대해 알지 못했을 정도로 깊히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중통 15년'으로 썼던 것이다. 그 충성심이 이와 같았다.

학경의 두 동생 학이(郝彞)와 학용(郝庸)도 이름이 있었다. 학이는 자가 중상(仲常)으로 죽을 때까지 은거하였으며,학용은 자가 계상(季常)으로,추밀원 도사, 영주수령을 하였다. 학경의 아들 채린(採麟) 또한 어진 사람으로 집안을 일으켜 산남, 강북도 숙정염방사(山南江北道肅政廉訪使)에 올랐다.

학경은 몽골군이 일으킨 전쟁 성격을 바꾸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송원전쟁 초기에는 몽골이 부를 약탈하고 경제적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는데, 쿠빌라이에 이르면서 송원전쟁의 성격이 바뀌었다. 학경은 비교적 일찍 '한법(漢法)'을 내세워 연경 천도를 주장했으며, 남송과 평화를 주장하며 무장을 해제하고 백성들을 쉬게 한 정책을 건의했고 쿠빌라이는 이를 수용했다. 몽골군은 약탈과 남획을 거의 중지하였고, 쿠빌라이는 마침내 중국을 통일했다.

3. 저서

학경은 사람됨이 기개와 절조가 있고 학문을 연구해 많은 업적을 쌓았다. 억류생활 16년 중에도 학문을 닦고 연구를 계속하였으며 현실에 유용한 학문에 힘썼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속후한서(續後漢書)》, 《역춘추외전(易春秋外傳)》, 《태극연(太極演)》, 《원고록(原古錄)》, 《통감서법(通鑒書法)》, 《옥형정관(玉衡貞觀)》, 《주삼자(注三子)》, 《일왕아(一王雅)》, 《행인지(行人志)》, 《능천집(陵川集)》등의 저서와 문집 수백 편을 썼다. 그의 글은 (문채가) 풍부하고 웅장하고, 의론을 잘하여 (논리가 정연하였으며), 그의 시도 기굴(奇崛)[3]하였으며 마음에 담긴 뜻을 솔직하게 풀어놓은 편이었다. 무려 16년을 억류되다보니 그의 호종자들도 모두 학문에 통달하여 서좌(書佐)로 갔던 구종도(茍宗道)는 후일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촉한을 정통으로 보아 촉한 중심으로 후한 말기부터 진나라 초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속후한서》와 그의 문집은《능천집》이 세상에 남아 있다. 이중 촉한의 역사를 다룬《속후한서》는 명나라의 국가 주도 유서(백과사전)인 영락제 시기 《영락대전》과 청나라 건륭제 시기 백과사전인《사고전서》에도 수록되었다.


[1] 趙復, 강서성 북부 덕안(德安) 출신, 1215?~1306, 송말원초 때 사람. 자는 인보(仁甫)고, 호는 강한선생(江漢先生)이다. 남송 출신으로 오고타이 칸 7년에 몽골군에 포로로 잡혔다. 요추(姚樞)가 인재를 구하는 조서(詔書)에 응해 이야기를 나눈 뒤 석방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죽자 애통해 하며 죽으려고 했는데, 요추가 무익하다며 설득하여 요추를 따라 북상했다. 양유중(楊惟中)이 세운 태극서원(太極書院)에서 강학하여 요추를 비롯하여 학경(郝經), 허형(許衡), 두묵(竇默), 유인(劉因) 등의 학자를 배출했다. 남송 때 북방 지역에 정주학을 전파한 주요 인물이다. 끝내 관직은 받지 않았다. 집이 강한(江漢)에 있어 제자들이 강한선생이라 불렀다.[2] 당나라 태종능연각 24공신 중 하나로 여기서 당검의 일이란 태종 정관(貞觀) 초기 돌궐 지역과의 갈등이 심각할 때, 이정이 군사력으로 돌궐을 공략하는 동안 당검이 사신으로 가서 돌궐 칸의 투항을 권유한 일이다.[3] 기발하면서도 빼어남. 대체로 방정하지는 않지만 힘이 있으면서도 새로운 형태를 추구했을 때 많이 쓰는 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