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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15:02:06

양대연

1. 개요2. 생애
2.1. 남송 시절2.2. 성을 바치고 몽골에 투항하다2.3. 몽골을 도와 사천을 공격하다
3. 기타4. 주요 영향5. 가족관계6. 논란

1. 개요

楊大淵, ?~1265
감숙성 천수시 출신으로 송말원초 시기의 장수이다. 원래 남송의 장수였는데, 몽골에 투항한 후 몽골이 사천을 평정하는 것을 도와 동천도원수에 이르렀다. 1271년 낭중군공에 추봉되었고 시호는 숙익(粛翼)이다.

2. 생애

2.1. 남송 시절

양대연은 초기에는 남송의 장수로, 여개의 수하였다. 그는 남송 봉주의 지주, 이주의 동로 마보군 부총감독을 역임했다. 순우 5년(1245년), '사천팔주(四川八柱)'의 하나인 운산성(運山城)을 축조한다.

보우 2년(1254년), 낭주의 도통이 되었다. 보우 5년(1257년)에는 사천제치사 포택지와 함께 검문관을 수복했다. 보우 6년(1258년), 포택은 청두를 탈환할 계획을 세웠고, 양대연과 단원감, 유정[1]은 수녕 영천산을 지키며 몽골의 원군을 저지했으나, 몽골군에 격퇴당한다.

2.2. 성을 바치고 몽골에 투항하다

1258년 몽케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낭주로 가서 대획성을 얻었고, 남송의 항장인 왕중을 보내 양대연으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지만 양대연은 그를 죽였다. 이에 몽케 칸이 크게 노하여 제군들에게 전력으로 공격할 것을 독촉하자, 양대연은 두려워하여 성을 바치고 항복했다. 몽케 칸은 양대연을 주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다행히 왕천가의 권유로 목숨을 부지했다. 양대연은 몽골군을 따라 봉주, 광안 등지를 항복시키고 합주의 조어성으로 진격했다.

2.3. 몽골을 도와 사천을 공격하다

1259년에는 시랑과 도행성에 배향되어 변관의 중책을 맡는다. 1260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예의성(사천성 검현)[2]으로 진격하여 포로총관 황문재, 노검, 고탄지를 귀환시킨다.

1261년 가을, 군대를 이끌고 동천을 침공하여 송나라 장수 선공과 싸운 뒤 백계원을 포로로 잡아들인다.

1262년 봄에는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 개주와 달주를 떠나 송나라 군과 평전에서 싸운다. 파거군에서 다시 싸움을 벌여 송나라 지군 범섭, 통제 위흥, 노분 황적, 절간 진자윤 등을 사로잡는다. 양대연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내세웠다.
오나라를 취하면 반드시 촉을 먼저 얻고, 촉을 취하면 반드시 기를 먼저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조카 양문안을 보내 송나라 파거군을 공격한다.

만안재에 이르러 수장 노식이 항복했다. 양대연은 양문안에게 명하여 기주, 달주의 요충지인 번룡산에 성을 쌓게 했다. 성의 수리가 끝나기도 전에 정자가 군대를 이끌고 싸우러 왔고, 양문안은 전력을 다해 방어에 대비했다. 양대연은 송나라 병사, 즉 조카 양문중의 장병을 보내 지원했는데 송나라 병사가 패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양대연은 입조하여 동천도원수를 알현한 뒤 정남도원수와 함께 서사한다. 또한 거강 강변에 호소성을 쌓고 송군이 주둔하고 있는 대량성을 압박했다.

1263년 남송 재상 가사도는 양림을 보내 양대연을 남쪽으로 귀순하도록 유인했으나 양림이 양문안(楊文安)에게 붙잡혀 죽고 만다.

1264년 양대연은 한성(지금의 사천 파중)을 습격하여 송나라의 기창(祁昌)을 사로잡고, 군수 향량(向良) 등을 사로잡은 데 이어 수천 대의 군수를 포로로 잡았고, 다음날 남송 도통 장사광의 지원군을 대파하고 장성의 총관과 기창의 동생을 생포했다.

1265년 세상을 떠났고 1271년 낭중군공에 추봉된 뒤 숙익(粛翼)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3. 기타

4. 주요 영향

5. 가족관계

6. 논란

그가 항복한 것에는 논란이 있다. 성에서 수만 명의 목숨을 위해 몽골군의 왕덕신에게 먼저 연락하여 항복했다는 설과, 항복하겠다고 한 왕중을 죽였다가 그 아들 왕인(王仁)의 회유에 항복했다는 설, 마지막으로 몽골의 핍박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는 설이 있다.


[1] 여기서 유정은 1261년 여문덕의 무시와 박해를 받았고 자신과 사이가 나빴던 유흥이 사천제치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몽골에 노주를 바치며 투항한다.[2] 이 성은 조어성과 함께 몽골군을 막아냈던 성 중 하나이다.[3] 양대연과 비슷하게도 여문환의 경우 그의 종형 여문덕을 제외한 그의 일족들이 모두 투항하였다. 여문덕은 제4차 양양 전투가 벌어지던 와중 병사하였고 여문환이 1273년 제4차 양양 전투에서 투항한 뒤, 원나라의 군대가 장강으로 동진할 때 여씨 일족들과 그 문하생들이 투항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여문덕의 사위 범문호와 여문덕의 아들 여사기, 여문환의 문하생 정붕비, 진혁 등이 있다. 하지만 양대연과는 다르게 여문덕의 친동생 여문신은 1275년 원나라의 군대와 조우하여 죽고 말았다.[4] 장강의 지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