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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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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남송의 명장2.3. 이단의 반란2.4. 거듭되는 승패와 양양 공방전2.5. 악주의 대패2.6. 정가주 전투와 절조를 잃은 말년
3. 가족관계4. 여담

1. 개요

夏貴
(1197~1279)

남송 말기의 명장으로 자(字)는 용화(用和)이며, 안풍(安豊) 사람이다. 맹공이 죽은 후 남송의 호국대장 중 하나였고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남송 조정이 항복한 뒤 에 회서를 바치고 투항하여 절개를 지키지 못하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하귀는 평민 출신이어서 일개 병졸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타고난 기질이 뛰어나 밤에 화살이 떨어지는 곳을 정확히 볼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하야안(夏夜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또한 그는 어릴 적에 죄를 지어서 쌍기(雙旗)를 얼굴에 새기는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하기아(夏旗兒)'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그는 용맹하여 싸울 때마다 용감함을 발휘하였는데, 이로 인해 동향 사람인 여문덕(呂文德)의 인정을 받게 된다.

단평(端平) 원년(1234), 하귀는 조범(趙范) 등의 장수들이 낙양을 수복할 때[1] 그들을 따라 몽골 제국과의 전투에서 활약하여 비장(裨將)으로 승진하였다.

2.2. 남송의 명장

이후에 몽골군이 안풍을 침공하여 포위하자 하귀는 지원군을 이끌고 안풍으로 향하였다. 하귀는 안풍으로 가기에 앞서서 와보(瓦步)에 작은 성을 쌓고 그 성에 오색깃발들을 꽂아서 병사들이 있는 것처럼 꾸민 뒤에 지름길을 통하여 안풍으로 달려갔다. 몽골군은 안풍성을 공격하던 군대를 물린 뒤에 와보에 세워진 하귀의 성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안풍으로 돌아왔을 때는 하귀가 이미 성가퀴(陴)를 올라가서 안풍성에 입성하였고, 성의 수비도 더욱 강해져있었으므로 이에 몽골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가희(嘉熙) 3년(1239), 몽골군의 공격으로 수춘(壽春)[2]이 위급해졌고, 설상가상으로 수춘성의 식량마저 고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하귀는 여문덕과 함께 계책을 내어 밤중에 지원군을 이끌고 수춘으로 갔는데, 그 길 위에 재물과 식량을 버려놓았다. 다음날, 몽골군이 수춘성을 공격하려 하다가 길바닥에 버려진 식량을 보고는 놀라서 자기들끼리 말했다.
"성 안에 많은 식량이 공급되어서 저런 것이구나!"
그렇지 않아도 수춘성이 난공불락의 요새여서 공격하기 힘들었는데, 식량까지 보급되었다고 판단하게 되자 몽골군은 투지를 상실하였다.
하귀는 또 수군에게 벽돌이 담긴 주머니들을 보급하고 그 주머니들을 밧줄로 묶은 뒤에 교량 위로 던지게 하였는데, 그로써 교량의 높이를 낮추어 수군들이 육지로 올라올 수 있게 하였다. 하귀의 계책대로 교량이 낮아져서 수군들이 줄을 지어 육지로 올라오자 이를 본 몽골군은 철수하였고, 이로써 수춘을 지켜내었다.

순우(淳祐) 6년(1246), 몽골군이 고우(高郵)를 공격하자 하귀는 조규(趙葵)의 명령에 따라 고우를 지원하였다. 하귀는 밤중에 병사 백 명을 이끌고 고우로 달려가서 몽골군이 세워둔 요새 바깥에 매복하는 한편, 병사들에게는 자신이 피리를 불테니 그 소리를 듣는 즉시 일제히 무기를 잡고 일어도록 하였다. 작전이 성공하자 하귀는 몽골군을 격퇴하고 요새 안으로 들어와서 몽골군이 버리고 간 가축들과 기계들을 노획하였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서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보우(寶祐) 5년(1257), 가사도(賈似道)[3]는 형산(荊山)에 성을 쌓으려고 하였는데, 이에 앞서 하귀에게 형산 일대의 형세에 관하여 물으니 하귀가 답하였다.
"형산과 도산(塗山)은 서로 가까이 이어져있고 회수(淮水)의 물길을 끼고 있어서 사람들이 땅의 목구멍과 같이 여기는 곳입니다. 이 지역을 한 번이라도 막게 되면 안풍(수춘)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어 회서(淮西) 지역이 위태로워집니다."
가사도는 하귀의 말을 옳게 여겨 그에게 성의 축조를 감독하게 하였다. 성이 완공되자 조정에서는 하귀에게 길주자사(吉州刺史), 지회원군(知懷遠軍)의 관직을 내려주었다.

그 이듬해에 하귀는 하남초무사(河南初務使)를 겸하게 되고, 곧 수춘군개국백(壽春郡開國伯)에 봉해져 7백 호(戶)의 식읍을 받게 되었다.

개경(開慶) 원년(1259),하귀는 조정의 명령을 받고 회원(懷遠)으로 가서 역참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몽골군과 싸우고 지키기를 거듭하였다. 하귀가 회원을 굳게 지킨 지 백여 일이 지나자 호주(濠州)의 지원군이 도착하였고,이에 몽골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종(理宗)는 하귀를 행재소(行在所)로 소환한 뒤 그에게 황금 허리띠와 은 5백 냥을 하사하였다.

경정(景定) 원년(1260), 몽골군의 대장 올량합태(兀良合台)가 황주(黃州)[4]의 신생주(新生洲)에서부터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북쪽으로 귀환하였는데, 하귀는 위원(偉源)으로 나아가 올량합태의 후방을 공격하여 몽골군의 싸움배 300여 척을 탈취하였다. 그는 또 황석항(黃石港)에서 몽골군과 싸워서 그들의 군마(軍馬) 3백여 필(匹)을 노획하였으며, 마침내 수창군(壽昌軍)을 탈환하였다.
하귀는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황주의 봉우리에 자신의 군대를 집결시켰는데, 이곳은 백록기(白鹿磯)로부터 20여 리(里)만큼 떨어진 곳이었다. 이때 황주의 남쪽과 북쪽 언덕에는 몽골군의 전장(氈帳)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하귀는 수군을 이끌고 백록기의 부교 아래에 진을 친 다음 북쪽 언덕으로 올라가서 몽골군과 싸워 그들에게 포로로 잡힌 노약자 3백여 명을 구출해내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어떤 이는 하귀가 남쪽 언덕에서 싸우지 않았다면서 그를 참소하였는데, 하귀가 가사도에게 글을 보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적의 치중(輜重)이 모두 북쪽 언덕에 있어서 그곳을 공격하면 적들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인데, 그들은 빠르게 달려올 것이니 사흘이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제가 강가의 적들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에 하귀는 그가 거느린 모든 군대를 이끌고 백록기의 부교를 공격하여 끊어버린 뒤 몽골군의 전졸(殿卒) 7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그 다음날이 되자 장강 남쪽에 몽골군이 단 한 기(騎)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하귀의 승전보가 조정에 전해졌다. 조정에서는 하귀의 공을 논하여 그의 아들인 하송(夏松)의 숙직 업무를 면제해주고 하귀에게는 황금 허리띠를 하사하였다. 또한 하귀에게 지회안주(知淮安州), 경동초무사(兼京東招撫使)의 관직을 겸하게 하였다.

하귀가 임지로 부임한 때에 몽골의 강회대도독(江淮大都督) 이단(李璮)이 남송을 침범하였는데, 하귀가 그를 대패시키니 이단은 겨우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다. 그 이듬해에 하귀는 이단을 공격하여 연수군(漣水軍)과 동해군(東海軍), 해주(海州)를 모두 탈환하니 이종이 하귀에게 관청의 돈 백만 관(貫), 황금 허리띠 1개를 하사하고 또 율양(溧陽)[5]의 밭 3천 평(畝)을 하사하였다. 하귀는 율양에 자신의 저택을 지었는데, 집을 짓다가 황금색 거북을 발견하게 되자 이종이 하귀에게 비단으로 만든 거북의 집을 하사하고 키우게 하였다.

2.3. 이단의 반란

경정 3년(1262) 2월 3일, 이단은 북방에서 내전[6]이 벌어지고 있는 틈을 타서 자신이 다스리던 연(漣), 해(海)의 모든 성들을 남송에 바치고 몽골을 배반하였다. 이에 하귀는 아군이 된 이단을 지원하기 위해 기춘(蕲春)에서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여 몽골을 침범하였다.[7]

하귀는 2월 4일에 신채(新蔡)[8]를 공격[9]하였고, 그곳을 함락한 뒤 동북쪽으로 진격하여 3월 19일에는 부이(符離)[10]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 직후에 하귀는 군대를 나누어서 한 갈래는 숙주(宿州)와 기현(蘄縣)[11]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다른 갈래를 이끌고 4월 18일에 박주(亳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박주를 무너뜨린 하귀는 즉시 군대를 돌려서 자신이 남겨두었던 군대와 함께 숙주와 기현을 협공하였다. 5월 3일, 하귀는 두 곳을 무너뜨리고 숙주의 수장(守將) 이의(李義), 기현의 수장 장호고(張好古)를 모두 죽였다.

그 후 하귀는 서주(徐州), 비주(邳州), 등주(滕州)[12]를 모두 공격하여 차례로 함락[13]시켰고, 서주와 비주를 다스리던 몽골의 총관(總管) 이고가(李杲哥)는 성 밖으로 나와서 하귀에게 항복하였다.
이고가의 항복을 받은 하귀는 제남(濟南)으로 가서 포위당한 이단을 지원하는 대신에 청양몽염(靑陽夢炎) 등의 다른 장수들이 북진했던 제남 동쪽의 육로를 따라서 동북쪽으로 진격한다. 하귀는 5월 중에 빈주(濱州)와 이진현(利津縣)[14]을 공격하였고, 두 곳도 모두 함락시켰다.

6월 1일, 남송군은 산동을 넘어 하북(河北)에까지 북상하였는데, 이때 하귀는 빈주에서 군대를 이끌고 창주(滄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6월 4일에 몽골의 빈체로안무사(濱棣路安撫使) 한세안(韓世安)이 정하구(丁河口)에서 후방에 남아있던 남송군을 패배시키는 바람에 보급이 위태로워졌고, 그 다음날에는 몽골군의 대장 탑찰아(塔察兒)가 남송군을 토벌하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하귀는 남쪽으로 물러나면서 자신이 함락시켰던 지역의 백성들을 모두 남송으로 이주시키려고 하였으나 몽골군의 장수 곽간(郭侃)[15]에게 저지당하여 실패한다.[16] 하귀는 박주로 물러났고, 이단은 결국 제남성이 함락되면서 패망하였다.

이단의 반란을 평정한 몽골군은 하귀를 몰아내고 박주를 되찾기 위하여 공격해왔다. 몽골의 박주만호(亳州萬戶) 장홍략(張弘略)[17]은 과구(渦口)를 습격하여 그곳에 주둔해있던 남송의 수군을 패배시키고 물길을 끊어버렸다. 이에 하귀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박주를 버리고 기현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박주를 탈환한 장홍략은 지체 없이 수군과 육군을 모두 이끌고 기현으로 진격해왔는데, 하귀의 병사들이 그 기세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하귀는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할 방법이 없자 성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는데, 장홍략이 추격해오는 바람에 크게 패배하였다. 이로써 남송은 이단이 반란을 일으키는 와중에 탈취했던 영토들을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2.4. 거듭되는 승패와 양양 공방전

경정 4년(1263), 하귀는 사천안무제치사(四川安撫制置使) 겸 지중경부(知重慶府)로 임명되어 임지가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천으로 부임한 하귀는 장각과 함께 호소산(虎嘯山)을 공격하였지만 거호(鵝湖)에서 몽골군에게 패배하였다.

함순(咸淳) 원년(1265), 하귀는 몰래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불시에 유정(劉整)[18]을 급습하여 그를 크게 패배시키고 몽골군 수천여 명을 참수하였다.

함순 3년(1267), 하귀는 몽골군과 싸워서 그들을 패배시키고 광안군(廣安軍)을 수복하였다. 조정에서 하귀의 공을 논하여 그를 영무군절도사(寧武軍節度使)에 임명하였으며, 식읍 5백 호와 실봉(實封) 2백 호를 더해주었다.

함순 4년(1268), 조정의 소환에 응하여 하귀가 행재소로 가니 조정에서 그를 연강제치부사(延江制治副使), 지황주(知黃州)로 임명하였다.

함순 5년(1269), 몽골군이 양양을 공격하자 조정에서 하귀의 관직을 권경호안무제치대사(權京湖安撫制置大使)[19], 호광총령(湖廣總領), 사천책응대사(四川策應大使), 지악주(知鄂州)로 바꾸어 임명하고 양양(襄陽)을 지원하게 하였다. 이에 하귀는 수군을 이끌고 양양을 구원하려 했지만 딱 한 번만 양양성에 군량과 의복을 공급하는데 성공했을 뿐이었고, 실질적인 군사적 지원은 몽골군의 방어에 가로막혀서 이루지 못하였다.

함순 6년(1270), 하귀는 조정에 요청하여 황주로 물러났고, 이로써 양양에 대한 지원을 그만두었다. 그 이듬해가 되자 하귀는 은퇴를 요청하였지만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2.5. 악주의 대패

함순 9년(1273), 양양이 원군(元軍)[20]에게 함락되자 조정에서 하귀에게 회서안무제치대사(淮西安撫制置大使)와 지황주를 겸하게 하여 앞으로 있을 원군의 침공을 막게 하였다.

이듬해 11월 말, 원의 대장 백안(伯顔)이 악주(鄂州)의 입구에 다다르자 하귀는 전함 1만여 척과 수십만의 수군을 이끌고 원군의 진격로를 모두 차단하였다. 그러나 백안은 서쪽 방면의 입구인 한구(漢口)를 공격하는 척 하면서 남송군의 주의가 한구에 집중된 사이에 별동대를 보내어 북쪽 방면에 새로운 물길을 텄다. 그리고 그 물길을 따라 장강으로 향하는 북쪽의 입구인 사무구(沙蕪口)를 기습적으로 탈취하였고, 사무구를 통하여 악주의 주요 거점인 양라보(陽邏堡)[21]를 북쪽에서 공격하려고 하였다. 사무구의 소식을 들은 하귀는 수군을 이끌고 사무구를 탈환하려고 하였지만 백안에게 패배하였고, 이 싸움에서 그의 아들 하송을 잃게 된다.

백안이 양라보를 포위하여 공격하자 하귀 또한 총력을 다하여 양라보를 지원하였다. 백안은 그의 부장(副將)인 아리해아(阿里海牙)[22]의 군대까지 양라보에 소환하는 등 총력을 다해 공격하는 모양새를 보이는 한편, 암암리에 그의 다른 부장인 아술(阿術)[23]을 밤중에 장강의 상류로 보내면서 그에게 장강을 도하하여 악주성을 습격하도록 지시한다.
아술은 장강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 뒤 불시에 장강의 남쪽으로 도하하여 남송의 수비군을 격퇴시켰고, 곧바로 사람을 보내서 백안에게 승전보를 전하였다.

한편 아술이 장강을 건너왔다는 소식을 들은 하귀는 적들이 날아서 강을 건넜다며 대경실색하였고, 이윽고 투지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결국 그는 고작 3백 척의 전함만을 이끌고 노주(盧州)로 달아나버린다.[24]

결국 백안에 의해 양라보가 무너지면서 하귀가 이끌던 남송군 수십만 명은 몰살당하였고, 그들의 시신은 장강을 따라 떠내려가니 강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양라보가 무너진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양(漢陽)과 악주를 지키던 수장들도 모두 원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원은 장강의 중류까지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2.6. 정가주 전투와 절조를 잃은 말년

덕우(德祐) 원년(1275) 1월, 악주를 무너뜨린 백안이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격해오자 가사도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10여만의 대군을 이끌고 무호(蕪湖)에 주둔하였다. 하귀 또한 전함 2천 5백여 척을 이끌고 가사도에게 합류하였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가사도에게 전하였다.
송의 역사는 320년에 끝난다.[25]
글을 본 가사도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2월, 가사도는 지주(池州)의 정가주(丁家洲)에 도착하게 되자 정예병 7만 명을 보군지휘사(步軍指揮使) 손호신(孫虎臣)에게 넘겨주고 그를 선봉장으로 삼았으며, 하귀에게는 전함들을 이끌고 군대의 중앙을 맡도록 하였다. 그리고 가사도 자신은 후군(後軍)을 이끌고 두 사람의 뒤를 받쳐주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그러나 하귀는 이미 악주에서 백안에게 참패를 당하였으므로 내심 가사도가 이번의 전투에서 공을 세울까봐 두려워하였으며, 투지를 잃은 지도 오래되어 애초부터 싸울 의지가 없었다.
원군과 싸움이 벌어지자 보군(步軍)의 선봉장 강재는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정작 보군의 총사령관이던 손호신은 애첩을 끼고 전장을 이탈해버렸다. 이에 보군의 병사들이 동요하여 외쳤다.
"사령관(步師)이 달아났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백안은 원군에게도 손호신이 달아났다고 외치게 하였으며, 이에 따라 남송군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하귀 또한 싸우지 않고 달아나버렸는데, 그는 작은 배를 타고 가사도가 타고 있는 함선을 지나치게 되자 큰 소리로 가사도에게 외쳤다.
"적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더 이상 적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가사도는 급하게 징을 울려서 혼란에 빠진 군대를 수습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의 군대는 백안에게 크게 패배하여 궤멸당하였다.
싸움에서 진 가사도는 하귀를 불러서 상의하려 하였는데, 하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군대의 기세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내가 어찌 싸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양주에 가서 궤멸된 군사를 모집하고, 해상으로 황제를 보호하러 가십시오. 그래야 저는 회서를 사수할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하귀는 노주로 달아나버렸다. 한편 아술은 이긴 기세를 타고 동쪽으로 계속 진격해왔고, 이에 연강(沿江)의 주군(州軍)들은 서로 잇달아 원에 투항하였다.

정가주 전투 이후에 하귀는 예전에 붙잡아두었던 원의 사람 악전(岳全)을 몰래 석방시켜서 돌려보내었으며, 그 또한 원에 투항하려는 마음을 품고 백안에게 글을 보내서 말하였다.
"원컨대 변성(邊城)들[26]을 공격하는데 힘을 쏟지 마십시오. 행도(行都)가 함락되면 변성들은 모두 그대에게 귀부(歸附)해 올 것입니다!"
글을 읽은 백안은 하귀의 사위인 호응뢰(胡應雷)를 보내와서 하귀의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 때 남송 조정에서는 하귀를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임명하고 조정에 와서 수도를 지키게 하였으나 하귀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1276년 2월, 백안이 결국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을 함락시키자 하귀는 그가 다스리던 회서의 3개 부(府)와 6개 주(州), 그리고 36개 현(縣)을 모두 원에 바치며 투항하였다.

하귀의 가동(家僮) 중에 홍복(洪福)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하귀를 따라 전투에 공을 세워서 진소군통제(鎮巢軍統制)에까지 올랐다. 하귀는 원에 투항한 뒤 홍복을 설득하여 원에 투항시키려고 하였으나 홍복은 따르지 않았다. 이에 하귀는 홍복의 조카를 보내서 그를 설득하게 하였지만 홍복은 조카를 베어 죽이면서까지 투항을 거절하였다. 결국 하귀는 홍복이 지키는 성 아래에 이르러서 좋은 말로 홍복을 부르면서 자신이 혼자서 성 안으로 들어와도 되겠냐고 청하자 이에 응한 홍복은 성문을 열고 하귀를 맞아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하귀는 복병을 일으켜서 홍복과 그의 아들을 모두 붙잡았고, 이윽고 그의 손으로 직접 두 사람을 죽였다. 홍복은 하귀를 크게 욕하면서 그의 불충함을 여러차례 꾸짖다가 죽었다.

그 해 4월, 하귀는 상도(上都)에서 세조(世祖)를 알현하였는데, 세조는 하귀에게 손권(孫權)이 강동을 다스렸던 일을 그의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하귀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10가지의 방책을 세조에게 바쳤고, 이에 세조는 하귀에게 금색 무늬가 새겨진 의복과 옥대(玉帶), 신발, 모자, 안장을 하사하였다. 또한 하귀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참지정사(參知政事), 행중서성사(行中書省事)의 관직을 제수(除授)하였다.

1278년, 하귀에게 중서좌승(中書左丞)의 관직이 더해졌다.

1279년 10월, 하귀가 죽으니 향년 83세였다.[27]

3. 가족관계

하귀는 아들 세 명을 두었다.

장남 하부(夏富)는 남송에서 좌령위대장군(左領衛大將軍), 지소신군(知昭信軍)을 역임했지만 하귀보다 먼저 죽었다.

차남 하송은 남송에서 화주관찰사(和州觀察使)에까지 이르렀지만 1274년에 악주에서 수군을 이끌고 원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남송 조정은 하송에게 보강군절도사(保康軍節度便)의 관직을 추증(追贈)하였으며, 시호(諡號)는 장숙(壯肅)으로 하였다.

삼남 하백(夏柏)은 하귀를 따라 원을 섬겨서 가의대부(嘉議大夫), 악주로총관(岳州路總管)에 이르렀다.

4. 여담



[1]신원사(新元史)》에 수록된 하귀의 열전에 따르면 조범이 입락군(入洛軍)을 이끌고 낙양(洛陽)으로 간 것으로 나오나, 《송사(宋史)》에 수록된 조범의 열전에서는 조범이 이 싸움에 참전하지 않았을 뿐더러 참전에 적극적으로 찬동한 자신의 동생 조규를 탄핵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하므로 기록이 상충된다.[2] 안풍의 다른 명칭이다.[3] 이 당시에는 재상으로 집권하기 전이었다.[4] 오늘날의 후베이성(湖北省) 황강시(黄岡市) 황저우구(黃州區)[5] 오늘날의 장쑤성(江蘇省) 리양시(溧陽市)[6] 쿠빌라이 칸아리크부카대칸의 자리를 두고 벌이는 내전이다.[7] 이단과 하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주적으로 여겼었는데, 상황이 급변하자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편에 서서 싸우게 된다.[8]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주마뎬시(駐馬店市) 신차이현(新蔡縣)[9] 하귀는 이단이 반란을 일으킨 바로 다음 날부터 재빠르게 작전을 개시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이단이 일찍부터 남송과 내통하였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10] 오늘날의 안후이성(安徽省) 쑤저우시(宿州市) 융차오구(埇橋區) 푸리진(符離鎭)[11] 오늘날의 안후이성 쑤저우시 융차오구 치현진(蘄縣鎭)[12]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텅저우시(滕州市)[13] 하귀가 서주와 비주를 모두 함락시킨 것은 대략 나흘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14] 오늘날의 산둥성 둥잉시(東營市) 리진현(利津縣)[15] 의 명장 곽자의(郭子儀)의 후손이다.[16] 사실 하귀가 실패한 데에는 곽간의 능력이 주효하게 작용하였지만, 근본적으로 하귀가 점령지의 민심을 얻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하귀는 동북쪽으로 진격한 아군과 합류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으므로 재빠른 기동력 및 야전, 공성 능력을 발휘하여 경이로운 속도로 수비군을 섬멸하고 성들을 무너뜨렸지만 점령지의 민심을 돌보지 않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계속해서 진격하였다. 결국 점령지의 백성들은 남송에 반감을 가지고 몽골에 협조하여 몽골의 영토 회복에 일조하게 된다.[17] 훗날 애산 전투를 지휘하여 남송의 망명정권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장홍범의 형이다.[18] 본래 출신의 한인이었으나 남송에 투항하여 맹공의 부장으로 활약한다. 그러나 그는 여문덕에게 견제와 박해를 심하게 당하여 남송의 군부에 불만을 품었으며, 또한 남송의 신임 재상 가사도가 타산법을 빌미로 장수들을 처벌하자 유정은 이에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유정은 1261년에 그가 다스리던 노주(瀘州)를 몽골에 바치고 투항한다. 유정의 항복으로 인해 몽골군은 수군을 육성할 수 있게 된다.[19] 권(權)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직책은 임시직을 의미한다. 원래 경호제치사는 여문덕이었으나 그는 이때 중병을 앓아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으므로 하귀가 임시로 여문덕을 대신하게 된 것이었다.[20] 前 몽골군, 1271년에 몽골의 대칸인 쿠빌라이 칸이 나라 이름을 (元)으로 개칭하고 황제로 등극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기존의 몽골군을 원군으로 표기한다.[21] 다른 이름은 무기보(武磯堡)이다.[22] 아릭카야는 바얀의 군대가 장강의 흐름을 타고 동진할 때, 고세걸의 군대가 악주에서 형호 방면의 군대를 이끌고 원나라의 후방을 기습하려 하자 이를 동정호 방면에서 제압하고 고세걸을 투항시킨 뒤 그를 처형하고, 맹지소를 투항시킨다. 이후 사마몽구가 지키던 사시진을 대도살한 뒤 호북제치부사 고달을 투항시킴으로써, 형호북로와 경서 지역을 손에 넣게 되고 아릭카야는 악주에 남는다.[23] 수부타이의 손자이자 우량카다이의 아들이다. 그는 양양 공방전 당시에 몽골군의 총사령관이었으나 이번 전쟁에서는 백안에게 지위가 밀려서 그를 보좌하는 부사령관이 되었다.[24] 이 때부터 하귀는 나라를 위해 목숨 버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25] 1275년은 송이 건국된 지 316년이 되는 해였다. 4년 뒤에 남송이 망한다는 이 예언과도 같은 글귀는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다.[26] 자신이 지키는 회서 지역의 성들을 의미한다.[27] 남송이 멸망한 지 7개월 후였다.[28] 원 말기에《요사(遼史)》,《금사(金史)》와 함께 원의 승상 탈탈(脫脫)에 의해 편찬되었다.[29] 맹공의 밑에 있을 때 양동이 멋대로 직무를 이탈하자 기주에서 그를 처형했다. 제2차 양양 전투 당시 이증백의 밑에서 활약했고 이후 백하 전투에서는 몽골군의 동문울을 격파한다. 1259년 악주 전투 당시 공언휘를 계략으로 주살하는 등 경호 전선에서 명성을 드날렸지만, 가사도에게 배척당하고 만다. 호북제치부사로 있던 1275년 원나라의 아릭카야가 이끄는 군대가 고세걸이 이끄는 군대를 동정호에서 제압한 뒤, 사시진을 대도살하자 그가 지키던 강릉은 외부의 지원이 없게 되었다. 그 뒤 아릭카야가 항복을 권하자 청양몽염과 함께 강릉을 바치고 원에 투항한다.[30] 1274년 원군이 악주를 침공해올 당시 악주의 수장으로서 아술의 원군을 상대로 분투하지만, 하귀가 달아나고 양라보가 무너지자 백안에게 투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