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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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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양장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오자양장(五子良將)
于禁
우금
파일:우금.jpg
시호<colbgcolor=#FFFFFF,#191919>여후(厲侯)
작위 익수정후(益壽亭侯)
최종직위 안원장군(安遠將軍)
성씨(于)
(禁)
문칙(文則)
생몰 기간 ?년 ~ 221년
고향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거평현(鉅平縣)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2.2. 복양 전투2.3. 여남 전투2.4. 전투2.5. 수춘 전투2.6. 관도대전2.7. 박망파 전투2.8. 창희 토벌2.9. 진란 토벌2.10. 형주 정벌2.11. 번성 공방전2.12. 오나라에서의 행적2.13. 죽음
3. 삼국지연의4. 평가
4.1. 부정적 평가4.2. 긍정적 평가4.3. 투항에 대한 논쟁
4.3.1. 비판4.3.2. 옹호4.3.3. 조비 관련
5. 기타6.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는 문칙(文則). 연주 태산군 거평현 사람이다.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황건적이 봉기하자 포신이 무리들을 불러 모았고 우금이 이에 의탁해서 뒤따랐다. 조조가 연주를 다스리게 되자 우금은 그의 무리와 함께 나아가 도백(都伯)이 되었고 장군 왕랑[1]에 속했다. 왕랑이 그를 높이 평가해, 우금이 대장군을 맡을 재능이 있다고 추천했다. 조조가 우금을 불러 대화를 나누어 보고 군사마로 삼고, 군을 이끌고 서주로 나아가 광위를 공격하게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함진도위에 임명했다.[2]

2.2. 복양 전투

조조를 수행해 복양에서 여포를 토벌했는데, 별도 군으로 성 남쪽에서 여포의 2진영을 격파했다. 또한 별도로 군을 인솔해 연주 동평국 수창현에서 고아(高雅)를 격파했다. 조조를 수행해 연주 동평국 수장현, 제음군 정도현과 이호현을 공격하고, 진류군 옹구현에서 장초를 포위해 모두 함락시켰다.

2.3. 여남 전투

조조를 수행해 황건적유벽, 황소 등을 정벌하기 위해 판량에 주둔했는데, 황소 등이 조조의 둔영을 야습하자 우금이 휘하 군을 통수해 그들을 격파해 황소 등을 참수하고 그 무리들을 모두 항복시켰다. 평로교위로 올렸다.

2.4. 전투

조조를 수행해 에 이르러 장수를 항복시켰다. 장수가 다시 모반하자 조조는 싸움이 불리해 패하고 형주 남양군 무음현으로 돌아왔다. 이때 군중에 난이 일어나 장수들은 각각 조조를 구하러 갔는데, 단지 우금만이 휘하의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싸우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며 비록 사상자가 생겨도 진을 흩뜨리지 않았다. 그러다 적의 추격이 느슨해지자 서서히 행대(行隊)를 정돈한 채 북을 울리며 돌아왔다.
조조가 있는 곳에 당도하기 전, 도로에서 십여 명이 창에 찔려 부상을 입은 채 알몸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우금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길, 청주병에게 약탈당했다고 했다. 당초 황건적이 항복했을 때 그들을 청주병이라 이름하고 조조가 관용을 베풀었었는데 이 때문에 감히 노략질을 일삼은 것이다.
우금이 노하여 그 무리들에게 말했다.
청주병도 함께 조공(조조)에 속하는데 다시 도적질을 한단 말인가!
이에 그들을 토벌하고 여러 명의 죄를 물었다. 청주병이 급히 조조에게로 달아나 고해 바쳤다. 우금은 도착한 뒤 먼저 군영의 보루를 세우며 곧바로 조조를 찾아가 배알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우금에게 말했다.
청주병이 이미 그대를 고해바쳤으니 서둘러 공께로 나아가 변명해야 합니다.
우금이 말했다.
지금 적이 배후에 있어 어느 때고 들이칠 터인데, 먼저 방비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적을 감당할 수 있겠소? 게다가 공께서 총명하시니 참소가 어찌 통하겠소!
천천히 참호를 파고 영채를 안돈시킨 후에야 비로소 조조를 배알하고 그간의 정황을 진술했다.
조조가 기뻐하며 말했다,
육수에서 겪은 곤란으로 나는 참으로 급박했소. 그러나 장군은 변란에 처해서도 군사를 정돈해 적을 치고 보루를 단단히 했으니 옛 명장이라 한들 어찌 이보다 뛰어날 수 있겠소!
이에 우금의 앞뒤 공을 따져 익수정후에 봉했다.

2.5. 수춘 전투

<무제기>에 따르면 가을 9월, 원술예주 진국을 침략하자 조조가 동쪽으로 가서 정벌했다. 원술이 조조가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군을 버리고 달아나며 그의 장수인 교유, 이풍, 양강, 악취를 남겼다.

조조를 수행해 예주 진국 고현에서 교유를 포위하고 교유 등 4명의 장수를 참수했다.

다시 조조를 수행해 에서 장수를 공격하고, 하비에서 여포를 사로잡았다.

2.6. 관도대전

우금은 별도로 사환, 조인과 함께 사견에서 수고를 공격해 깨뜨리고 그를 참수했다.

조조가 처음 원소를 정벌할 때 원소의 병력이 강성했으나 우금은 선봉이 되기를 자원했다. 조조가 이를 장하게 여기고 보졸 2천 명을 주어 이끌게 했다. 우금은 연진을 지키며 원소와 맞섰고 조조는 군을 이끌고 관도로 돌아갔다.
유비서주를 들어 모반하자 조조가 동으로 원정했다. 원소가 우금을 공격했는데 우금이 굳게 지켜 함락시킬 수 없었다. 또한 악진 등과 함께 보병과 기병 5천을 이끌고 원소의 따로 설치한 군영을 들이치고, 연진 남서쪽으로부터 황하를 따라 하내군 급현, 하내군 획가현의 2현에 이르기까지 보취(保聚) 30여 둔을 불사르고 적군을 참수하고 사로잡은 것이 각각 수 천에 이르렀고, 원소의 장수 하무, 왕마 등 2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조조는 다시 우금을 보내 별도로 군을 이끌고 하남군 원무현에 주둔시켰는데, 두씨진에 있던 원소의 따로 설치한 군영을 격파했다. 비장군으로 올렸다.
그 뒤 조조를 수행해 관도로 돌아왔다. 조조는 원소와 더불어 진영을 잇달아 세우고 토산(土山)을 만들어 서로 대치했다. 원소가 진영 안으로 활을 쏘아대자 사졸들이 다수 죽거나 부상을 입어 군중에서 이를 두려워했다. 우금이 토산을 맡아 지키며 힘을 다해 싸우고 기백을 떨쳤다. 원소를 격파하고, 편장군으로 올렸다.

2.7. 박망파 전투

<이전전>에 따르면 유표유비를 보내 북방을 침략하도록 하고 섭(葉)현에 이르렀다. 조조는 이전을 보내 하후돈을 따라가서 유비와 대항하도록 했다. 유비는 하루아침에 군영을 불태우고 떠났으며, 하후돈은 군사들을 이끌고 그를 추격하려고 하는데 이전이 말했다.
적군이 이유도 없이 물러났으므로 틀림없이 매복하고 있을 것으로 의심됩니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좁고 초목이 우거져 있으므로 추격할 수 없습니다.
하후돈은 듣지 않고 우금과 함께 그를 추격하였고, 이전은 남아 군영을 지켰다. 하후돈 등은 과연 적군이 매복해 있는 가운데로 들어가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전이 구하러 가자, 유비는 구원병이 도착한 것을 보고 흩어져 물러났다.

2.8. 창희 토벌

기주가 평정되고 창희가 다시 모반하자 우금을 보내 이를 정벌케 했다. 우금이 급히 진격해 창희를 들이쳤다.

<하후연전>에 따르면 창희가 모반하자 우금을 보내 공격하게 했는데 이기지 못하자 다시 하후연을 보내 우금과 힘을 합치게 했다. 마침내 창희를 공격하여 10여 둔영을 항복시켰고 창희는 우금에게 나아가 투항했다.

창희는 우금과 교분이 있었으므로 우금에게로 나아가 항복했다. 제장들은 모두 창희가 이미 항복했으므로 응당 조조에게로 호송해야 한다고 했다. 우금이 말했다.
포위당한 후에 항복한 자는 사면하지 않는다 했소. 비록 창희가 옛 벗이긴 하나 나 우금은 절개를 잃을 순 없소!
직접 창희의 형을 집행했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수했다.
이때 조조는 청주 북해국 순우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했다.
창희가 내게로 와 항복하지 않고 우금에게 항복했으니, 어찌 그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금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서주 동해군이 평정되자 우금을 호위장군에 임명했다.

2.9. 진란 토벌

그 뒤 우금은 장패 등과 함께 매성을 공격하고, 장료, 장합 등은 진란을 공격했다. 우금이 도착하자 매성은 그 무리 3천여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그러나 항복한 후 다시 모반하여 진란에게로 달아났다. 장료 등은 진란과 서로 대치하며 군량이 부족했는데, 우금이 군량을 계속 보내주어 마침내 장료가 진란, 매성을 참수했다. 식읍을 2백 호 늘려주어 예전과 합해 모두 1,200호가 되었다.

2.10. 형주 정벌

<조엄전>에 따르면 당시 우금은 영음에 주둔하고 있었고, 악진은 양적에 주둔하였으며, 장료는 장사에 주둔하였는데, 그 장수들은 기질에 따라 행동하고 대부분 서로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조엄에게 세 군대의 사무를 동시에 담당하도록 했다. 조엄은 매번 규분이 있을 때마다 훈계하여 깨우쳤으므로 결국 서로 친하게 되었다.

<조엄전>에 따르면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때, 조엄에게 장릉태수를 겸임하도록 하고, 도독호군으로 바꿔 임명하고 우금, 장료, 장합, 주령, 이전, 노초, 풍해 등의 7군을 통솔하게 했다.

이 무렵 우금, 장료, 악진, 장합, 서황이 모두 이름난 장수로, 조조가 매번 정벌할 때마다 행군할 때는 군의 선봉이 되고 군을 물릴 때는 배후를 지켰다. 우금은 군을 이끌 때 엄정하였고 적의 재물을 얻어도 사사로이 차지하는 일이 없어 이 때문에 특히 중한 상을 받았다. 그러나 법으로 아랫사람들을 다스려 병사들의 환심을 크게 얻지는 못했다.
조조주령을 항상 증오하여 그의 군영을 뺏고자 했는데, 우금이 위엄이 높았으므로 우금으로 하여금 수십 기를 이끌고 명령서를 갖고 가게 했다. 우금이 곧장 주령의 군영에 도착해 그 군을 빼앗았으나 주령과 그 부하의 무리들은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그리고 주령을 우금의 부하독(部下督)으로 삼게 했으나 그 무리들이 모두 두려워 떨며 복종했으니, 사람들이 우금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좌장군에 임명되고 가절월을 받았다. 식읍 5백 호를 떼어내어 아들 한 명이 열후에 봉해졌다.

이후 형주 공방전까지 우금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우금의 능력과 경력을 생각하면 한가하게 있었을 리 없고, 조조를 따라 종군하며 여러 전투에 참전했겠지만 이름이 거론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만보면 우금은 기대와 신임도 많이 받았고 그만큼 공도 많이 세운 조조 휘하 위나라의 뛰어난 명장이었다. 그러나 이후 우금의 인생은 완전히 추락하게 된다.

2.11. 번성 공방전

219년, 조조가 장안에 있을 때 조인으로 하여금 번성에서 관우를 치게 하고 또한 우금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3]

가을, 큰 장맛비가 내렸다. 한수(漢水)가 범람해 평지에 물이 차올라 수장(丈)에 이르렀고 우금 등의 칠군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고,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우금은 투항하고, 오직 방덕만이 절의를 굽히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조조가 이 일을 듣고 오랫동안 슬피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우금을 30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위난에 처하자 오히려 방덕보다 못하리라는 것을 어찌 짐작했겠는가!

<오주전>에 따르면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여몽전>에 따르면 에서 우금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손권이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때마침 손권관우를 사로잡고 그 군사들을 포획하자 우금은 다시 오로 보내졌다.

2.12. 오나라에서의 행적

<우번전>에 따르면 위나라 장수 우금이 관우에게 붙잡혀 구금되어 있었다. 손권은 강릉에 이르자, 그를 풀어주고 서로 만나보기를 요청했다. 그 후 어느 날 손권은 말을 타고 우금과 나란히 외출하게 되었다. 우번은 우금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투항한 포로이거늘 어찌 감히 우리 주군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느냐.
그러고 나서는 채찍을 들고 우금을 때리려 하였다. 이때 손권이 질책하여 이를 저지시켰다.[4]

그 후 손권은 누선에서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열자 우금은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우번이 또 말했다.
당신은 거짓으로 사면을 구하려 하시오?

손권은 우번이 자신의 뜻과 같지 않아 원망하고 불평했다.[5]

<우번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손권이 위나라와 화친했으므로 뒤에 우금을 북쪽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우번이 다시 간언했다.
우금은 수만 군사를 패배시키고 자신은 항복한 포로가 되어 또한 죽지도 못했습니다. 죄를 지은 도적을 풀어주는 것이니, 그를 참수해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보여주느니만 못합니다.
손권이 이를 듣지 않았다. 군신들이 우금을 전송할 때 우번이 우금에게 말했다.
경은 오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내 계책이 때마침 쓰이지 못했을 뿐이오.
비록 우금이 우번에게 증오를 받았으나 도리어 우번을 매우 칭찬하니 조비가 늘 우번을 위해 조정에 빈 자리를 만들어두었다.

2.13. 죽음

조비가 황제가 되자 손권번국을 칭하며 우금을 돌려보냈다. 조비는 우금을 불렀다. 우금은 수염과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형용이 초췌했는데,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조비는 순림보와 맹명시의 고사를 들어 그를 위로하고 안원장군에 임명했다.[6]
번성에서의 패배는 수재(水災)가 사납게 닥친 것일 뿐 싸움에서 잘못한 것이 아니니 우금의 관등을 복구한다.
그리고 오에 사자로 보내고자 한다며 우선 업에 가서 조조의 능묘에 참배하라고 했다.

그런데 앞에서는 이렇게 네 잘못도 아니지 않느냐며 용서한다는 투로 달래놓고는, 뒤로는 미리 사람을 보내 능옥(陵屋)에 관우가 싸움에서 이기고 방덕이 분노하며 우금이 비굴하게 항복하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우금은 이를 보고 부끄럽고 분한 마음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 화병으로 죽었다.
아들인 우규(于圭)가 후사를 이어 익수정후에 봉해졌다. 시호를 내려 여후(厲侯)라 했다. 시법에서 갈 려(厲)는 죄없는 사람들을 살육한 경우(殺戮無辜曰厲)를 의미한다. 우금은 죽고 나서도 모욕을 받은 것이다. 조조의 묘정에는 수많은 건국의 공신들이 모셔졌으나 우금만은 모셔지지 않았다.

북송사마광자치통감에서 이렇게 평했다.
우금은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도 패해 죽지도 않고 산 채로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다시 돌아왔으니 조비가 그를 버리는 것도 옳고, 죽이는 것도 옳다. 그러나 능묘에 그림을 그려서 능욕한 것은 임금답지 않은 행위이다.

3. 삼국지연의

실제 역사에서 조조군의 주축으로 많은 전장에 나선 것을 반영해서인지 조조군 장수 중 출연수가 상위권에 꼽히나 막판의 행적을 반영해서 영 이렇다 할 활약이 없거나 당하는 역으로만 나온다.

포신의 부하였을 때의 행적은 나오지 않고, 처음부터 조조의 휘하로 들어간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전위 등용 장면이 있어서 다들 잊어버린다. 완성 전투의 간지나는 장면도 나오긴 하는데[7] 역시 바로 전에 나왔던 전위의 폭풍간지 장면 때문에 묻힌다.

유종이 항복한 뒤 조조의 명령으로 유종과 채부인을 제거했다. 하지만 정사에서 유종은 그 후에도 승진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았다.

적벽대전에서는 참수된 채모장윤을 대신하여 우금과 모개수군 도독으로 세워지지만 조조가 제갈량에게 낚여서 화살만 쏘라고 해서 그대로 수행한다.

마초가 아버지 마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안을 공격해 함락하고 동관을 함락했다. 그때 마초와 일기토를 벌이나 패한다.

한수의 부장인 이감이 마초의 추격에서 달아날 때 마초에게 활을 쏘나 마초가 피해 이감을 맞춘다. 마초가 그에게 덤벼들자 달아난다.

방덕을 부장으로 데리고 번성조인을 구원하러 출전하는데 여기서 방덕이 공을 세우는 것을 질투해 방덕이 관우를 다 잡은 걸 방해하는 장면이 창작되었다. 그리고 독장인 성하가 수공을 간언하는데 무시했다가 관우에게 패해서 항복한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서 조조의 묘지기로 보내지는데 자신이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그림을 보고 화병으로 죽는건 정사와 비슷하다.

4. 평가

진수의 평에서도 나와있듯이, 오자양장 중에서도 조조에게 가장 큰 신임을 받은 장수였기에 활약이 대단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관도대전에서 토산을 쌓아 원소의 군대를 막아낸 일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번성 공방전에서의 실책으로 조비에게는 물론이고 조조에게마저 박한 평가를 받으며 안타까운 최후를 당했다.

4.1. 부정적 평가

관도대전까지는 우금의 전공이 돋보이는 편이다. 조조군 초반으로만 한정하면 조인, 악진과 더불어 가히 조조군을 먹여살린 3톱이라 볼 수 있다. 단 209년부터 219년 번성 공방전까지, 무려 1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우금의 큰 전공은 없다. 그 사이 장료, 악진, 서황, 장합이 하북, 회수, 형주, 관서 등 각지에서 꾸준히 활약을 이어간 것에 비하면, 우금의 전적은 돋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장수들에 비하면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

진수가 장합, 우금, 악진의 경우엔 서술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주된 기록이 없어 행적을 상세히 갖추지 못했다고 평한 바 있으나, 다른 초기 장수들도 간략한 서술이나마 관도전 이후의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면, 유독 우금만 기록이 부족했다는 추측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즉, 이는 기록 부족이 아니라 우금 본인이 조조를 계속 모셨음에도 큰 전공이 없었던 것으로 보는게 여러모로 아귀가 맞을 듯 싶다.

우금이 윗사람에게 너무 지나치게 보여주기식 전시행정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대표적으로 우금하면 떠오르는 청주병 일화가 있는데 이는 우금의 엄정한 처사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부대도 아닌 다른 부대의 병사를 멋대로 처벌한 것[8]은 직권남용이었다. 충분히 명령으로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우금의 말마따나 급한 것은 먼저, 그 다음은 나중에라면 급히 진영을 독려하여 적을 막고 그 다음에 죄를 묻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창희를 죽인 것 역시 비판받을 일인데, 친분이 있는 친구를 죽여 공정하다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저렇게 친분까지 거론해가며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창희가 배신이 잦았다지만 그것을 의심한다면 조조에게 창희를 호송하여 조조가 판단할 문제지 우금이 부하 장수들의 의견도 듣지 않고 창희를 죽인 것은 분명히 의구심이 들 만한 대목이다. 배송지도 우금이 군법에 따랐다고 하지만 죄인을 호송해야하는 명을 거슬렀으니 우금이 사후에 나쁜 시호가 붙은게 당연하다고 비판했다.

번성공방전 얘기를 하자면 그가 오판을 했을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방덕이야 조인의 허락도 있어야 하고 또 본래 번성 수비군라는 점에서 제외하더라도 큰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 우금은 명백히 지원군으로서 수몰 가능성과 혹시나 지원 지체 중 하나를 고르라 하면 우금 역시 안전하게 좀 더 뒤로 빠지는 것을 고려할만 했다. 단순히 범람시 물의 속도가 빠르다는 점에서 그러한 시간이 없었다고 완벽하게 부정하기엔 비는 십여일 동안 왔다는 기록의 존재와 면수와 7km나 떨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우금이 큰 비로 차츰차츰 홍수의 기미가 보임에도 방심하여 진을 옮기지 않았을 가능성을 부여한다.

또 우번전 주석인 오서에서 우번이 우금을 삼군을 호령하고 배신하지 못하게 본보기로 죽이자고 할때 이런 말이 있다. "우금은 수만 군사를 패배시키고 자신은 항복한 포로가 되어 또한 죽지도 못했습니다." 우금이 항복해 버려서 애매하긴 하나 위나라에서 반대로 우금 옹호도 하나 없는 상황에서 우번의 말 역시 오판 가능성을 부여한다.

4.2. 긍정적 평가

우금의 장점은, 조조가 가장 어렵고 보잘것없던 시기에도 숱한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그의 패업에 공헌한 일관성이었다. 황건적의 난 당시 황소가 조조의 둔영을 야습했을 때 우금이 그를 구했고, 장수가 조조를 위기 일발로 몰아넣고, 청주병이 이를 기회삼아 군을 어지럽혔을 때 오직 우금만이 군을 정비하며 조조를 구했다. 모두가 원소를 두려워할 때 우금은 선봉을 자처했고, 조조마저 관도대전에서 회군을 생각할 때 우금은 기백을 떨치며 분전했다. 이렇듯 조조 인생 초기의 모든 위협에서 우금은 일관성 있는 충성과 위엄을 보여줬고, 조조는 바로 이 점을 신뢰했던 것이다. 조조군 중에서도 우금은 황건적의 난 당시부터 같이 활동한 최고참 중 한 명이다.

우금이 병졸들에게 법을 엄정히 집행해 인심을 얻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나 병졸들에게 법을 집행한 것은 그 병졸들이 백성들을 약탈해서였고 병사들이 백성들을 약탈하는 것을 법을 집행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였던 상황이다. 또 우금은 수많은 병졸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한다는 점에서 병졸들을 마냥 가혹하게 다룬 장수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209년부터 우금의 전공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우금을 폄하하기도 하는데, 이걸 뒤집어 말하자면 209년까지 조조군에서 보여준 활약만으로 우금의 평가가 후일 장료, 악진, 장합, 서황과 묶여 오자양장으로 평가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금은 하후돈과 조인을 제외하면 군부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서열이 높은 장수였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식읍과 가절월[9]인데, 당시 우금의 식읍은 1200호로 항장 출신인 서황, 장합은 물론이고, 한동안 자신보다 먼저 조조군에 임관했던 악진보다 식읍이 500호가 더 많았다.[10] 예외적으로 장료가 조조 휘하에서 우금보다 400호의 식읍을 더 하사 받아 1600호의 식읍을 보유했었지만, 우금과 달리 가절월이 되진 못했으며, 이는 장료 이외에 다른 장수들 역시 마찬가지다. 참고로 유비 진영에서의 사방 장군 가운데 가절월을 받은 인물이 바로 관우다.

이를 볼 때, 우금을 대신할 수 있는 명장 자원들이 충족된 이후, 우금의 역할은 이러한 일관성과 짬밥을 바탕으로, 대군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것으로 점차 변화된 듯 하다.

실제로 관도대전에서 조조군 최고의 에이스는 우금이다. 가장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에이스 역할을 충실히 해낸 것. 관도대전 초기, 관우가 이탈한 이후 하내의 원소 세력을 격파해냈고 조조유비군을 격파하려 친정했을 때에도 관도의 방어를 담당한 것은 우금이었다. 관도대전에서 대치전이 본격화됐을 때의 위업은 말할 것도 없다.

209년을 기점으로 다른 오자양장들처럼 눈에 띄는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해 직접적인 군공이 기록되어 있진 않고, 식읍을 추가적으로 늘리진 못했지만, 분명히 이 시기에도 조조 밑에서 군을 다스리면서 충분히 중용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관우를 상대할 때 우금을 보낸 것은 가장 뛰어난 명장이어서가 아니고 제일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허울뿐인 장수였다면 애초에 조조가 그런 장수에게 명장 관우를 대적할 할 정예 7군을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와 후기 기록이 없다는 점만을 들어서 폄하하고 있으나 정작 왜 우금이 당대 사학자들에게 대우받으며 다른 위오양장과 엮인지는 간과한 것.

4.3. 투항에 대한 논쟁

이러하듯 평가가 극렬하게 엇갈리는 우금이지만, 평가를 엇갈리게 만든 진짜 핵심은 번성 전투에서 자결하거나 끝까지 싸우다 죽지 않고 관우에게 전군을 바치고 투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1]

사실 번성 공방전 이전까지만 보고 평가한다면 보여주기식이든 일정 기간 동안 군공에 대한 기록이 대한 부족하든, 관도대전에서 행적을 포함해 확실히 실적 자체는 있고 조조의 두터운 신임, 그리고 번성공방전 전까지 장료장합보다 높은 직위에 있었다는 것 등 어떻게 봐도 일단 '조조 측에서 손꼽히는 장수 중 하나였다'는 것은 확실히 맞다고 봐야 한다. 이 논란은 어디까지나 우금이 다른 오자양장이나 조인 등과 비교해 어느 정도냐는 수준이며, 우금이 조조의 매우 주요한 공신 중 하나였다는 것 자체를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번성에서 투항이야말로 우금에 대한 평가를 송두리째 뒤집을 수 있는 우금 생애 제일 큰 치욕이었다.

4.3.1. 비판

말년에 관우에게 패배하여 조조가 믿고 맡긴 정예 7군을 모조리 헌납한 행적은 그의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을 실책이었으며 30여년의 세월 동안 조조에게 충성을 바친 그 동안의 행적을 모두 부정당할 만한 사건이었다.

오죽했으면 조조마저도 "우금이 30년을 내 곁에서 싸웠는데 방덕만 못하다니!"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그리고 자연재해라고는 하지만 그게 우금에게만 적용되었는가? 적장이었던 관우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자연재해인데 치열하게 싸운 한쪽은 열흘이란 시간 동안 대비를 못한 채 수몰되고 한쪽은 안전한 곳으로 군세를 이동시킨 다음 기세등등하게 배타고 와서 화살을 쏘아대며 닥치는데로 죽이고 사로잡았다. 물론 이 사태엔 같이 군을 지휘하던 방덕이나 조인 같은 장수도 책임이 없는것은 아니나 엄연히 최대 책임자는 수몰된 7군의 총사령관인 우금이였다.

조인은 이를 악물고 난장판이 된 번성에서 버텼고 방덕은 남은 위군을 이끌고 관우와 하루종일 치열하게 싸우다가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금이 전사하지는 못하더라도 투항해서 부하들만은 살리고 자신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면 비록 패했다고는 하나 수하들의 생명은 물론 지금껏 지켜왔던 절의까지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우금은 부하들의 목숨만을 구걸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더 연장하여 온갖 안 좋은 꼴을 보았다. 말년의 싸움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은 것이다. 우금은 항복이라는 선택으로 약 30년 간 쌓아온 자신의 정체성을 한순간에 박살냈다. 충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무엇보다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선택을 했다고 볼수있지만, 그 선택 하나로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의 스트레스와 모욕을 받으며 얼마 못가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조비도 공신록에서 우금의 이름을 파버렸지 않은가? 이것은 나라의 명예에서 우금을 제명한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우금 본인이 군율을 엄하게 잡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정작 자기는 지우인 창희를 '포위된 후 항복하면 사면이 안된다'면서 직접 참했다. 조조의 협천자 이래 유비 원소 등 여타 세력들을 전부 괴뢰집단으로 규정했던 것이 조위의 명분이기 때문에 우금의 번성 항복 건은 명분상 무려 반란 세력에게 정예군을 헌납한 행위에 해당한다. 물론 이런 명분 놀음이 아니어도 당하는 군주 입장에서는 별 차이가 없고, 오히려 배신감과 모욕감 같은 심리적 측면에서 반란 일으켰다가 항복하는 놈보다 더 괘씸하다. 거기다 우금이 신참도 아니고 조조군 내에서 최고참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실망과 배신감은 더했을 것이다.

우금은 위에 송환되어서 조비에게 능욕당할 때까지 멀쩡히 있었는데, '자신의 항복이 가진 무게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이 같은 처신은 과연 우금이란 인물이 조조군 오자양장에 꼽힐 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인가 회의하게 만들 만한 사건임은 확실하다.

4.3.2. 옹호

그러나 우금과 방덕이 처했던 상황은 매우 특수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을 해보기엔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다. 고대 충절론에 입각해서 보면 항복안하고 죽은 방덕은 충절을 지킨 장수고 우금은 그렇지 못한 졸장이겠지만 전략&전술적 관점에서 보면 방덕의 사망은 개죽음이고 대장이 죽어 아군의 사기를 크게 깎는 삽질이며, 오히려 후일을 도모한 우금의 판단이 옳았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 기록에도 나오지만 방덕군이 거두었다는 전과는 단지 총사령관의 투구를 맞춰 상처를 낸 게 전부고 이것도 방덕 개인의 성과일뿐, 사령관을 죽이는데 실패한데다 결과적으로 관우군을 제대로 후퇴시키지도 못했으니 전술적 성과는 실질적으로 없다고 봐도 된다. 즉, 방덕 개인의 무용이야 유명해졌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우금의 항복 시점 역시 중요한데 우금군과 방덕군이 비슷한 환경에 놓여있었음이 기록에 남은 것으로 보아 양측 모두 근방에서 관우군에 대항해 비슷한 시점에서 싸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악천후 환경에서 전투 중의 사령관의 전사로 아군의 사기가 끝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우금은 여기서 승기를 잡을 수 없음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계속 싸워봐야 정예 7군이 전술적 성과도 못내고 개죽음 당해 갈려버리느니 이 시점에서 전군 항복이라는 용단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담으로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관우의 인도주의적 포로 운용으로 군량 압박에 시달린 관우군은 하필이면 손권군의 군량고를 터는 실책을 저지르고 이는 배신 밀약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것이 아니더라도 유비 세력과 손권 세력의 관계가 이미 형주문제 등으로 요단강을 건넌 상태는 맞았고 사실 유비에게도 절반의 지분이 있는 곳이었기에 무엇이 트리거가 되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하필 그 트리거를 우금의 투항군에 의해 중요한 전투 중 관우 본인이 당겨버리게 만들었다.[12]

춘추전국시대 때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君子報仇,十年不晩)는 말이나 와신상담, 과하지욕의 고사만 봐도 명확하지만 중국인들의 실질적인 가치관은 "어지간하면 일단 살아남아서 큰 그림을 그려라" 라는 쪽이다. 중국에서 오자서를 아버지와 형을 희생시키고 혼자 살아남은 졸장부라고 평가하던가?

창희 처형 사건도 직접 비교하기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이, 우금은 포위되어 자신을 포함해 모든 병졸이 사망할 위기에서 적에게 항복한 것이지만. 창희 건의 경우 창희가 그와 그의 병졸들의 위기상황에서 사건을 벌인 것이 아니라 조조군이 혼란한 와중에 조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후 포위되자 항복한 상황이었으며, 게다가 당시 창희는 이미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조조군에게 다시 항복한 전례도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우금의 옹호받는 주요 이유중에 하나인 병사들의 생명도 허투로 보면 안 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창희는 무조건 참살되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창희가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면 또다시 병졸의 목숨이 희생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경우, 자공이 "식량, 군대, 마음 가운데 뭘 버려야 합니까"라고 물어보자 "군대를 버려야 한다"고 했고, 자공이 재차 "그러면 식량과 마음 가운데 뭘 버려야 합니까"라고 물어보자 식량을 버려야 한다"라고 했다. 맹자의 경우는 "지도자가 폭거를 저지른다면 그 지도자는 자격이 없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자의 경우 가장 예의와 형식을 중시한 대표 유학자이지만 그조차도 백성의 소리가 천명이라는 입장이다.

순자의 제자인 법가한비자이사 정도가 백성의 소리 따위 집어치우고 법률을 최상의 원칙으로 두고 있지만, 법률이 최상의 원칙인 이유는 소수<다수&단기적<장기적인 이득을 위한 것이다. 위나라의 법률은 지휘관의 실력이 어쨌든 천재지변이 닥쳐서 몰살당할 상황까지 처했으면 지휘관이고 병졸이고 모두 죽어야 한다고 써져 있던가?

도가 계열의 경우, 애초에 권력과 전쟁 등을 혐오하는 케이스라 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항복에 대해 직설적인 대의명분을 제시한 것이 사기의 저자로 유명한 사마천이다. 사마천이 고자가 되는 궁형(宮刑)을 당하게 된 이유가 포위당한 이릉이 분전하다 흉노에 항복한 것을 두고 한무제가 펄펄 뛰는 것을 말리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고대의 대의명분의 거두라 할 수 있는 사마천의 대의명분부터가 이랬던 마당에 명분을 따지자면 오히려 우금의 항복이 명분 없는 항복이었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조조의 반응이야 충격적인 패배를 접한 군주가 30년 세월의 우금과 신참인 방덕의 인상적인 모습이 대비되는 바람에 뱉은 말이고 그걸 모욕까지 한 조비가 또라이일 뿐이다.

따라서 우금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자신과 같이 온 방덕은 죽었고 자신까지 죽으면 3만의 포로들은 지휘관을 모두 잃은 셈이 되니 심리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 포로들의 입장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대표자로 남아 있었어야 할 여지는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재해 때문에 굴욕적으로 싸우기 전에 항복하긴 했으나 엄밀히 따지면 우금은 패전 장수인데 윗 문단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애당초 일본전국시대도 아니고 중국 고대에 그런 일로 고결함을 증명하겠다고 자결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며 당시 장수들은 패전 뒤엔 대개 상급자의 처분을 기다렸다.

실제로 삼국시대 때는 조휴 & 우금같은 분사나 마속같은 군율에 의한 처형은 있어도 패전 등을 이유로 스스로 자결하는 경우는 없다. 어느 패전 장수가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그렇게 따지면 항장 출신 장수들이나 탕거전을 거하게 말아먹은 장합도 패배했으니 자결해야 한다.

마치 다른 장수들은 보신주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당시 무장들의 보신주의는 보편적인 개념이라 우금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여 비판하기엔 너무 모호한 케이스이다. 우금이 행한 행위는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그러한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기록을 보면 우금 본인 역시 항복이라는 선택지가 모욕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금 본인도 이 점을 감내하고 선택한 결정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오나라에서 우번에게 당한 굴욕에 대해서 납득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설명을 읽어보면 이미 우금은 위나라에 송환될 당시 초췌한 모습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오나라에서의 치욕으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태로 보인다. 그 상태에서 임금이던 조비에게까지 조롱을 당하자 폭발하여 죽음에 이른 것에 가깝다. 적국의 부하가 조롱하는 것과 아군의, 그것도 군주라는 작자가 조롱하는 것은 굉장히 차이가 크다. 심지어 우금은 우번에게 그렇게 굴욕을 당하고 나서도 오히려 그를 칭찬했다 하지 않던가?

4.3.3. 조비 관련

어느 쪽이든 우금의 투항은 단순히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는 어렵고, 여러가지 관점이 있으며 그 관점에 따라 평가가 극으로 갈리는 특이한 케이스이므로 이렇다고 딱 잘라서 말하는 것은 어렵다. 판단은 글을 전부 읽은 독자들의 몫일 뿐이다.

다만, 조비가 우금을 욕보인 행위를 근거로 우금의 투항을 비판하는 것 만큼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쓰인 사마광의 평가가 그걸 잘 설명하고 있다. 사마광은 우금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맞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조비가 한 짓은 한 나라의 임금이라는 인간이 범부만도 못한 유치한 짓거리로 신하를 모독하여 죽인 것이라며 같이 비판하였다. 쉽게 말해 "우금이 죽을 죄를 지었으면 그냥 죽일 것이지, 그런 몹쓸 인성질을 부리냐? 쯧쯧…"이라고 말한 것이다. 조비가 한 짓은 우금이 더 큰 잘못을 했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조비는 비슷한 이유로 이릉대전 당시 촉한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 하는 수 없이 위나라에 항복한 황권을 치욕스럽게 대하긴커녕 후대해줬다. 황권 역시 우금과 마찬가지로, 유비황권의 항복을 듣고도 그의 가솔들을 죽이지 않을 만큼 아끼던 인재였으며 황권은 대군의 목숨을 건 투항 같은 것도 아님에도 이런 대접을 받았다.

5. 기타

2009년 12월, 조조의 묘로 추정되는 고분이 발굴되었지만 우금이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그려진 벽화는 보이지 않았다. 발견된 화상석이 그 벽화가 아니냐는 논쟁도 돌았으나, 탁본 결과 전혀 다른 그림으로 밝혀졌다. 물론 그 무덤이 조조의 무덤이 맞는지도 확실치 않다.

북송시대 시인 공평중(생몰년도 미상)이 지은 시로 ‘우장군(于將軍)’이 있는데, 위의 인물에 대해서 지은 시다.#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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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시대 위나라의 왕랑와는 동명이인.[2] 비유하자면 회사 사장이 업계 전문가에게 추천받은 면접생을 직접 만나서 면접한 후 그 자리에서 합격시켜 단순 사원이 아니라 일정 직급 이상에 바로 배직시켜준거다.[3] 원래는 번성에 조식을 파견하려고 했다. 그런데 조비가 그에게 술을 먹게 하여 명령을 수행치 못하게 만들어 조조의 노여움을 품게 만들고 지휘관이 우금으로 바뀌었다.[4] 우번은 우금, 미방 등 투항자들에게 가혹했다. 우번 역시도 왕랑을 섬기다가 손책에게 갔던 사람이기는 하지만, 우번은 왕랑이 손책과 싸우려 하자 부친상을 치르다 말고 나와 말렸고, 왕랑이 충고를 듣지 않고 싸웠다 패해 표류하고 다닐 때도 따라다니며 보좌하던 걸 왕랑이 노모를 모시라며 돌려보냈다. 이처럼 본인의 힘이 다할 때까지 섬기던 군주를 바꾸지는 않았으며, 왕랑이 돌려보낸 뒤에는 손책이 우번을 직접 찾아가서 스카웃한 거라서 항장인 우금, 미방과는 경우가 다르다.[5] 우번의 이러한 성격은 손권을 자주 분노하게 만들었기에 손권은 우번을 좌천의 형식으로 조정에서 쫓아버리게 된다.[6]정사 삼국지》<우금전>에는 기록상 좌장군이 안원장군으로 임명되기 전 마지막 직위었다.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에는 손권이 우금을 돌려보내야 하는데 병 때문에 도착이 늦어졌다고 언급될 때 전장군으로 언급되고 있다. 진서가 오기한 것이고 좌장군이었을 수 있고, 삼국지가 오기했고 원래 전장군이었거나, 좌장군이 된 후 전장군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좌장군이었건 전장군이었건, 조비가 즉위하면서 좌장군은 장합, 전장군은 장료가 임명되어 있어서 더 낮은 직위인 안원장군에 임명된 것이다. 우금이 위로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공석을 메운 것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돌아와도 쓰지 않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다.[7] 어째서인지 이때 조조가 의심한다는 걸 우금에게 전해준 사람이 순욱이라고 언급되는 작품이 있는데 이문열 삼국지가 그 예. 실제로 당시 순욱은 허도에 있었지, 완성까지 조조를 따라오지는 않았다.[8] 우금전에 보면 토벌했다는 기술이 있음으로 보아 대표자 몇 명을 처벌한 정도가 아니라 그 부대를 공격해 괴멸시켰다는 의미가 된다.[9] 가절은 전시 군령을 어긴 관리를 임의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인데, 가절월은 그런 가절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10] 악진의 최종 식읍은 우금과 같은 1200호였지만, 우금이 악진보다 먼저 1200호의 식읍을 하사받았다.[11]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사람들이 우금에게 객관적인 전공이나 업적을 떠나 은근히 감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위나라를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황충에게 패한 하후연과 더불어 평가가 영 박한 편이다.[12] 다만, 관우 본인이 직접 군량고를 털러 갈 여유는 없었기에 상관과 가까운 곳에 있던 부하들 중 누군가가 그곳을 털었거나 보급을 담당하던 미방이 진작부터 여몽과 내통하고 있었기에 뒷치기하기 확실한 구실을 만들어주는 걸 겸해 그가 털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저 군량고를 털기 이전부터 오나라 내부에서는 이미 형주를 뒷치기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관우가 군량고를 안 털었어도 뒷치기는 예정대로 진행됐을 거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