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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4:08:31

조비/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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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조비가 싫어한 사람들3. 조비의 여러 일화들4. 조비와 그 혈육들5. 조비가 후대했던 이들6. 조비의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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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제는 천부적인 글솜씨가 있었고, 붓을 들면 곧 문장이 되었다. 아는 것도 많은데다가, 기교와 예술성을 겸비했다. 만약 여기에 넓은 도량과 공평함, 도와 덕을 더했다면, 어찌 옛날의 현명한 임금들과 멀다고 할 수 있겠는가
文帝天資文藻,下筆成章,博聞強識,才藝兼該;若加之曠大之度,勵以公平之誠,邁誌存道,克廣德心,則古之賢主,何遠之有哉!
삼국지 무제기의 진수의 평

조비의 인간성을 평가한 문서.

2. 조비가 싫어한 사람들

조비의 문제점은 본인의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을 본인의 권력으로 갚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조비는 왕이 되자마자 왕자시절 자기를 괴롭혔거나 좋지 않은 감정이 있던 사람들을 권력을 이용해 처단하거나 손 봐 주었다. 이는 법치와는 거리가 멀던 당시에도 사람들의 손가락짓을 받을만한 행동이었고, 진수도 이런 점만 보완했으면 고대의 성군처럼 되었을 것이라고 평을 하여 애둘러 조비를 비판했다. 비슷한 짓을 한 것이 법정인데, 유장시절 찬밥을 먹던 법정도 유비가 촉을 장악하면서 권력을 쥐자 사사로운 원한을 권력으로 갚았고, 당시 촉의 최고실세였던 제갈량에게까지 이런 일이 보고되었다.[1] 당시에도 이런 행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문제가 될만한 행위였던 것이다. 조비는 다른 벼슬도 아닌 황제였기 때문에 이렇게 사사로운 감정을 권력으로 갚으려고 한 행위는 두고두고 회자되며 "도량이 넓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몇몇 부분은 조비의 입장,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할 문제도 있기에 몇몇 인물에 대해서는 다른 시선도 서술해두었다.[2]
사실 우금의 항복은 오늘날에도 팬덤에서 의견이 상당히 나뉘는 논제지만, 우금을 죽게 만든 방식이 실로 비열하고 치졸했다는 것은 대체로 부정되지 않는다. 우금의 투항이 죄라면 송환된 뒤 법으로 따져서 공정하게 처벌하거나 처형하고, 과거의 공을 감안해야겠다면 형량을 좀 낮추거나 그냥 깔끔하게 용서해주고 귀향시키거나 하는 것이 순리다. 우금 앞에서는 위로하면서 뒤로는 정신적으로 커다란 모욕을 줘서 홧병에 걸려 죽게 만든건 조비의 도덕관을 의심케 한 사건이며 오히려 (조비가 싫어하던) 우금에 대한 동정론만 만들어준 실책이다.
북송사마광도 《자치통감》에서 조비가 우금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 수법의 비열함은 임금이 할 짓이 아니라고 직접 의견을 적었다. 우금은 조조가 직접 눈여겨 보아 중용한 인물이며, 그 기대에 부응해 수십 년 조조를 따라 종군하며 크고 작은 공훈을 세우고 완에서는 위기에 몰린 조조를 구하기도 했다.물론 조조조차 번성의 일에 대해 방덕보다 우금이 못할 줄은 몰랐다고 실망감을 드러내며 한탄하기도 했고 조조의 협천자 이래 유비원소 등 여타 세력들을 전부 괴뢰집단으로 규정했던 것이 조위의 명분이기 때문에 우금의 번성 항복 건은 명분상 무려 반란 세력에게 정예군을 헌납한 행위에 해당하는 대죄이며 번성 공방전에서의 크나큰 실패로 평가가 엇갈리기에 까이는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 실패를 포함해 평가해도 오자양장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이런 장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없는 짓이니만큼 더더욱 많이 거론되는 일화이다.

3. 조비의 여러 일화들

일부 삼덕들이 조조가 죽은 후 조비가 삼년상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불효자라고 주장하나, 이미 전한시절부터 모든 사회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삼년상에 문제가 많음은 누누이 지적되었다. 한나라 최고의 성군이었던 한문제는 삼년상이 너무 허례허식이며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하여 유언에서 자신이 붕어하라도 전국의 관원은 3일만 곡을 하되, 그 이후에는 상복을 벗고, 궁궐의 신하들도 15일만 지내라고 명령하기도 했고,[16], 결과적으로 이후로는 황제나 제후의 경우 3년상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만약 제왕이 3년상을 지낸다면 통치초반의 3년을 고스란히 날릴 수밖에 없으니 이는 국정에 크나큰 지장을 주는 일이었다. 물론 유교관념에 투철한 일부 관리는 벼슬을 내놓고 3년상을 지내기도 했다.[17] 하지만 일반적으로 벼슬을 내놓을 수 없는 제왕에게는 삼년상은 해당되지 않았고, 이는 조비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는 당시의 시대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상술되었듯 한문제 이후 왕/황제는 삼년상을 치르지 않는 것이 관습화되면서 위진 시기에는 상례 문화가 많이 유연해졌다. 훗날 하증이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에게 모친상중에 술과 고기를 먹었다며 디스하자 '효로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인 사마소가 오히려 완적을 쉴드친 사례도 있다.[21]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 와중에 사마소 본인의 아들이었던 진무제 사마염이 '백성들을 예로 교화해 온 집안의 사람인 내가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준엄하게 꾸짖으며, 관습을 깨트리고 삼년상을 강행하고 후세 사가의 극찬을 받으며 이러한 전통은 끝난다.

4. 조비와 그 혈육들

조조는 아들 중에서 조충을 조비는 물론 조식이나 조창보다도 마음에 들어했는데, 10대 초반에 일찍 병사했지만 굉장히 사려 깊고 지혜가 뛰어나 조조가 이미 후계자로 마음 두고 있었다 한다. 조비도 제위에 오른 후에 "만약 창서(조충의 자)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천하를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종종 얘기했을 정도. 조충이 죽자 조조가 남은 자식들에게 "조충이 어린 나이에 죽은 게 나에게는 불행이나 너희들에게는 행운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문무 양방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두루 보인 조조의 자식들 답게, 조비의 형제들은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위에서 보듯이 조비 역시 나름대로 능력을 타고 났으며, 무엇보다 조앙과 조삭의 사망으로 인한 것이긴 하나 장자의 자리를 타고 났으니 행운아라고 할 만 하다.

조비는 견제 속에 왕(그리고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이 되고 난 후에는 형제들을 권력의 핵심에서 몰아냈다. 조식과 조창 등의 형제들을 경계하여 각각 왕위를 줘서 지방 임지에 묶어두고 감시하면서 수도로 절대 올라오지도 못하게 했고, 벼슬이나 일도 맡지 못하게 했다.

사실 형제로서는 좀 비정하지만, 친족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여 권력의 안정성을 높인 선택이었다고 보면 군주로서 비판할 일은 아니다. 이는 왕조시대 왕자의 난에서 자주 보이는 일이며, 조비의 개인적 문제라고 보기는 힘들다. 삼국지 내에서만 한정해봐도 원소나 유표는 결국 후계자 다툼을 둘러싼 왕자의 난때문에 그 세력이 멸망했다. 이는 한국의 재벌가에서도 자주 벌어지는 일이고 이를 전적으로 조비의 저열한 인간성 탓으로 돌리는 건 무리한 주장이다.

이에 반해 조비는 조간에게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등, 자기 권력에 위협에 되지 않는 여러 가솔들에게는 오히려 후대한 경우가 많았으며, 이게 지나쳐서 나중에 손가락질 받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자신과 어렸을때부터 친족으로 자란 의붓 누이인 덕양향주 조씨의 남편인 하후상이 애첩만 사랑하자 누이를 위해 애첩을 처단했는데 남의 가정사에 권력을 동원에 개입한 조비의 처사는 두고두고 욕먹는 경우가 되었다.[25]

이렇게 형제들에 대한 냉랭한 태도는 일부 팬덤의 주장처럼 조비가 본성적으로 사이코여서 그렇다기보다는 일종의 통치술이라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다만 이것이 조예 대로 가면서는 황제의 친위세력이 될 만한 친족들이 빌빌거릴 지경이 되어 사마씨의 권력 찬탈에 유리한 환경이 되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26]

5. 조비가 후대했던 이들

조비는 학자나 문인을 우대했다. 아래 나와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잘 쓰거나 혹은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공융 같은 경우는 아버지 조조시대 처단되었지만, 조비는 공융의 글을 높이 평가하여 건안칠자의 으뜸으로 놓았다.또한 항장도 후대했는데, 이는 조비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조조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종요는 매우 학식이 높았으며, 서예실력이 출중하여 서예사에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현재까지도 그 서체가 내려오고 있다.. 이랬기 때문에 조비의 총애를 받았고 종요도 아부에 소질이 있었는지, 원래 옥괴(옥으로 된 고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조비에게 바쳤고, 조비는 종요에게 감사편지를 썼다. 이 감사편지 <여종대리서(與種大理書)>는 현재도 전하고 있다. 위략에는 이 정황을 기록했는데, 조조가 한중공방전에 출정한 사이 내정을 맡고 있던 세자 조비가 임치후(조식)을 보내서 종요에게 이를 달라고 했고, 종요는 깨끗히 주었고 어떤 사람은 조비가 이렇게 종요로부터 옥괴를 강탈했다고 주장하면서 조비의 저열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예로 들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보면 조비가 종요로부터 빼앗았다기보다는 종요가 세자 조비에게 잘보이려고 조비가 관심을 갖자 바로 준 것으로 보이고, 조비도 종요에게 보물을 받은 만큼 후하게 보답했다. 이 사건의 전후로 생긴 변란이 연의에 나오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바로 위풍(삼국지)의 난이다. 위풍은 조조가 없는 틈을 타서 업성에서 봉기하여 조위 인사를 죽이고 정권을 잡으려 했는데 위풍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종요였으며, 이 난에 연루되어 위풍과 가까운 수십명이 처형당했지만 종요는 이렇게 옥괴를 바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냥 파면에 그쳤다. 조조는 이 난이 진압된 후야 낙양에 도착했다가 바로 사망하는데[36] 종요는 조비가 위왕을 계승하자 바로 복직되며 벼슬이 최고위직의 하나인 태위에 이르렀다.

6. 조비의 선정

물론 조비도 마냥 인간성이 모자란 면모들만 보여준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인간성에 문제 있었다면 조조의 후계자가 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미담도 있다.

[1] 다만 제갈량도 이 일을 덮어두었다. 법정이 유비의 입촉에 세운 공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공정무사를 제일로 치던 제갈량도 법정을 이를 들어 처벌할 수 없었다.[2] 이밖에도 일부 삼덕들의 자의적 사료 해석이 마치 정설인양 퍼지기도 했다. 아래 종요부분 참조.[3] 이때 곽가도 유성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봐서, 장수도 같은 병으로 죽은 것으로 보인다.[4] 사실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여러 기근에서 생존을 위한 식인의 사례는 종종 발견된다.[5] 《촬요(撮要)》의 기록이다. 흥미롭게도 이 대목은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에서도 등장하는데, 영락제건문제를 두고 일으킨 정난의 변에 대한 당시 정황과 연관되어 있다. 해당 문서로. 여기에 따르면 유엽은 손권이 훼이크치는 거라며 믿지 말라고 했는데 조비는 낚였다는 식이다.[6] 어찌보면 조비보다 더 철딱서니없다고 할 수 있는게, 손권은 사냥도 그냥한게 아니라 일부러 마차의 덮개를 뜯어낸 상태에서, 짐승들이 덤빌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을 덮치는 순간에 근거리에서 으로 찔러서 잡는 것을 즐겼다. 일개 장수가 해도 무모한 짓이라고 비판받을 일인데, 무려 일국의 황제가 이 짓거리를 하니 신하들이 뜯어말릴 만도 했다. 이것 말고도 손권이라는 인물이 워낙에 만용을 부리는 일이 잦아서 피본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7] 정사 원문은 다음과 같다. (소칙) 신이 듣기로는 옛 성왕들은 동물때문에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는 합니다. 폐하는 요임금을 본받으셔야 하는데 많은 관리를 죽이려하니 어리석은 저는 그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죽음으로 사면을 청합니다. 문제는 "경은 강직한 신하요"라고 답하며 모두를 사면했다. 이후 이 일 때문에 소칙을 어렵게 생각했다.(臣聞古聖王不以禽獸害人,今陛下方隆唐堯之化,而以獵戲多殺群吏,愚臣以為不可。敢以死請! 「帝曰:」卿,直臣也。 "遂皆赦之。然以此見憚 ) 일부 삼덕들은 憚을 "싫어하다"로 해석하여 조비가 소칙을 싫어했다고 주장하지만, 憚은 한문에서 주로 "경외하다" 또는 "무섭게 생각하다"는 뜻으로 쓰인다.[8] 비단 100필을 달라 했다고도 한다.[9] 무선황후는 행동을 가볍게 하는 인물이 아니었으며, 사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최대한으로 봐도 그녀가 개입을 한 건 자신의 동생이 빈곤하게 산다고 남편 조조에게 벼슬 좀 올려달라고 부탁한 것과 아들 조식을 살리기 위해 나선 것 밖에 없다. 즉 웬만해선 간섭하지 않던 태후가 당시 황후를 압박하면서까지 강하게 나설 정도로 미친 짓이었던 것이다. 조홍은 단순한 종친이 아니라 개국공신이자 황실의 웃어른, 심지어 조조의 생명의 은인이므로 조비 자신의 은인으로 공경해도 모자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별 것도 아닌 이유로 처형시킨다면 황실의 권위가 떨어질 것은 자명했다.[10] 정확히는 '오질이 조진의 건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편을 들어줬다. 오질이 조비라는 뒷배경을 밑고 위나라 원로인 조홍과 친족인 조진에게 대놓고 오만하게 굴면서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일이 허다했다.[11] 조비가 후일 일찍 세상을 뜨자 조진을 탁고대신으로 삼은 것을 생각했을때 이는 조진이 충분히 불만을 가질 만한 조비의 경솔한 행위가 맞다. 조비가 유사시 탁고를 맡길 정도로 조진은 당대 조씨 황실을 지탱할 유력한 종친 중 한명이었는데 그런 이의 명성을 깎아서 좋을게 뭐가 있겠는가. 또한 앞서 설명한대로 조홍은 황실의 최고 웃어른인 만큼 (조조에게 성을 받아 들어왔다지만) 엄연히 황실 소속인 조진도 말은 못했지만 조홍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12] 비슷한 케이스인 한단순은 조식을 칭찬했을 뿐만 아니라 조식의 사부였음에도 죽지 않았다.[13] 순운의 아내가 조조의 딸이자 조비의 누이인 안양공주였다. 해서 순운의 자식들은 조비 자신의 생질들인지라 총애했다고.[14] 사실 조상 일파의 정치, 특히 하안에 대한 이 두 평가 모두 반론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안 항목으로.[15] 다만, 이렇게 말한 것 치고 조조는 정의를 중용하지 않았다. 헌제 앞에서는 유종을 칭찬했으면서도 손권과 유수구에서 싸울 때 유종을 이복형 유기와 함께 개돼지 같다고 싸잡아 비하한 조조의 평소 언행을 고려해 볼 때, 저 탄식은 느닷없이 혼담이 깨진 정의를 달래주는 립서비스이거나 '내 딸을 하후무 같은 놈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아니었다.'는 아버지로서 후회를 돌려 말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16] 한서 문제기 문제7년(기원전 157년) 6월 기해 기사[17] 원소가 그 경우에 해당한다.[18] 위나라 고관인 왕심이 저술한 책이며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위서>는 남북조시대의 북제가 저술한 것으로 남북조 위나라의 역사서로 흔히 <북위서>로 더 잘알려져 있다.[19] 이것도 위서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역사서이며, 현재 전하지 않는다.[20] 당장 조선의 경우도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고 해서 하루를 한 달로 쳐서 27일만 상복을 입어도 삼년상(27개월)을 끝낸 것으로 여겼다. 이걸 FM으로 하다가 건강을 해쳐 요절한 조선 문종이나 인종의 사례만 봐도 임금이 국정을 돌보는데만도 힘에 부치는 판인데 삼년상에 유도리가 없는 것은 오히려 조종이 물려준 국가에 대한 책임감 결여로 볼 소지가 있다.[21] 사실 당대에는 유교가 지나치게 교조화되어 본질적인 것은 망각하고 형식에만 치중하여 그 원뜻과는 달라진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삼년상 도중 잠시 어지러워서 옆에 있던 여자한테 기댔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벼슬길에서 쫒겨난 이도 있었을 정도였다. 완적이 모친상 때 술과 고기를 먹은 이유도 그러한 풍조를 비판하기 위한 의도적인 도발이라고 보는 분석이 다수다. 애시당초 죽림칠현이 이런 허례허식에만 치중한 유교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생겨나기도 했고 말이다.[22] 출처: 오서 오주전 주석 강표전[23] 단순히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것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첩을 취했다는 뉘앙스가 있다.[24] 덕양향주의 아버지는 진백남였는데, 그는 조조의 목숨을 구해주고 대신 죽었다. 이에 조조는 그 공을 기려 그의 성을 조씨로 바꾸고 그의 아들 조진, 조빈과 딸 덕양향주를 자기 자식들과 같이 길렀다. 그러니 조비와 덕양향주가 친남매는 아니었어도 친남매처럼 같이 자란 사이였다.[25] 하지만 하후상은 조비와의 친분으로 조비의 의붓누나인 덕양향주 조씨와 결혼하여 조조의 외척이 되었고, 이후 이 연줄로 고속승진을 했음에도 애첩만을 총애한 것은 당연히 지각없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조비가 남의 가정사에 개입한 것도 문제긴 하지만, 하후상 같은 경우도 잘했다고 보기 힘들다. 조선왕조도 마찬가지였지만 중국에서도 황녀와 결혼한 부마는 첩을 두는데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 명나라 같은 경우 주원장의 딸 남강공주의 남편이 호관과 결혼했는데, 영락제 시절 호관은 기녀에 빠져 산다고 조정에서 매우 비난받았다. 부마는 공주가 죽어도 첩을 둘 수 없었는데, 마찬가지로 주원장의 딸인 보경공주의 남편인 조휘는 보경공주 사후 첩을 들였다가 조정에서 비판받았다.[26] 사실 친족의 세력이 약한 것보다는 조씨 황제들이 다 요절하거나 젊은 나이에 폐위된 것이 사실 가장 큰 문제였다. 사실 황제가 이런식으로 요절하는 것은 중국 왕조의 멸망의 패턴이며, 이후로도, 당, 송(남송), 명, 청 모두 마지막 황제들은 이런식으로 즉위했다가 왕조가 멸망했다.[27] 황제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사마문 일화는 연의에서는 각색되어 마치 조식이 조조의 명을 받고 자신을 가로막는 관리의 목을 치고 통과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은 조식이 술에 취해 엄청난 사고를 친 것이다. 이때 조조는 위왕에 갓 올라서 황위 찬탈의 전단계로 가는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었는데, 조식이 사마문을 통과해 이를 확증시켜준 셈이 되어버렸다.[28] 이러한 배경 속에 조식은 이복동생인 조정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석사부라는 글을 지었으며 친척들과 교류를 할 수 있게끔 압박을 풀어달라는 식의 상소를 올리기도 한다.[29] 둘의 나이차는 무려 30살이었다. 오늘날에 30살 많은 맏형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짧고 만 15살만 되어도 성인이었던 데다가 조혼 및 조산이 당연하던 그 시절에 30살 차이면 정말 할아버지와 손자뻘처럼 여겨져도 이상하지 않았다.[30] 헌목황후 조씨는 260년 6월 7일에 사망했는데, 같은 달 조모가 사마소에게 살해당하며 결국 그녀는 죽기 전 위가 멸망해가는 모습을 보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31] 황권을 우대한 이유도 마찬가지로 설명된다.[32] 다만 그 성격은 어디 안 가서 황권에게 어서 출두하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오는 중에도 사람을 더 보내 닦달했다. 아마 황권이 당황해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걸 보고 싶었던 듯. 하지만 황권은 시종 태연하고 침착했으며, 조비도 장난이었기에 해코지는 안하고 이후에도 계속 중용했다.[33] 또한 가후는 어디까지나 장수의 부하에 불과했기 때문에 조조의 패배, 그리고 조앙의 죽음은 조조에게 원한을 갖고 조조군을 야습한 장수에게 책임이 있다. 이에 따라 조비는 장수를 증오했으며 자살할 때까지 괴롭혔다. 가후도 물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주군을 위해 계책을 짠 것 뿐이고, 가후 본인도 언행을 조심하면서 조비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조비 입장에선 그럭저럭 쓸만한 놈으로 보였을 것이다.[34] 장료는 동탁의 부하 출신, 장합원소의 부하 출신으로 둘 다 조조의 적대 세력의 장수였으며, 서황 역시 백파적 출신이라는 추측이 있으며 양봉의 부하였다.[35] 오나라의 장흠과는 다르다.[36] 위풍의 난은 219년 9월에 벌어졌는데, 한중공방전이 5월에 끝났지만, 정사 삼국지 무제기를 보면 당시 조조는 10월에야 패잔병을 이끌고 낙양으로 복귀한다. 패전의 충격과 함께 조조의 건강은 매우 나빴던 것으로 보이며, 조조의 건강이 나빠지자 위풍은 쿠데타를 기획했다가 진압당한 것으로 보인다. 조조는 복귀 직후인 220년 1월에 사망[37] 나이 차이가 40세 가까이 나니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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