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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3:00:33

방덕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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龐德
? ~ 219년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2.2. 평양 전투2.3. 중기 생애2.4. 번성 공방전2.5. 사후
3. 삼국지연의4. 기타5.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자 위나라의 인물로 는 영명(令明). 옹주 남안군 환도현 사람.[1]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군리, 주종사를 역임하였다. 젊어서부터 군의 관리가 되었고, 초평 연간(190년 ~ 193년)에는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있던 마등을 따라 반란을 일으킨 강족, 저족을 무찌르며 누차 공을 세웠기에 차제에 승진하여 교위가 되었다.

2.2. 평양 전투

202년, 여양에서 조조가 원씨 일가인 원담, 원상을 토벌하자, 원상은 곽원, 고간 등을 보내 크게 북쪽을 우회하여 하동군을 공략케 하였다. 조조종요로 하여금 관중의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이를 토벌케 하였다. 이때 마등은 한수와 더불어 서북부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였는데 종요의 설득으로 결국 조조의 편을 들기로 결심하고는 아들인 마초와 함께 방덕을 파견한다. 방덕은 마등의 아들 마초를 좇아 평양에서 곽원, 고간과 대치하였는데, 방덕은 군의 선봉이 되어, 나아가 이들을 크게 격파하고, 직접 곽원의 목을 베었다.

위략》에 따르면 방덕은 스스로 수급 하나를 베었으나, 그것이 곽원인 줄은 알지 못했다. 싸움이 끝난 후, 사람들이 곽원이 죽었으나, 그 목이 없다고 하였다. 곽원은 종요의 조카였다. 방덕이 뒤늦게 와서는 활통에서 수급 하나를 꺼내자, 이를 본 종요가 큰 소리로 울었다. 방덕이 종요에게 사죄하자, 종요가 말했다.
곽원은 내 조카이기는 하나 국가의 적이다. 어찌 경이 사과할 필요가 있겠는가.

중랑장의 관위를 받고 도정후에 봉해졌다.

2.3. 중기 생애

이후 장백기홍농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방덕은 또한 마등을 좇아 정벌에 나서 양효 사이에서 장백기를 격파했다. 전장에서 늘상 적진에 돌격하여 적군을 격퇴하였으니, 무용이 마등군에서도 수위였다. 이렇듯 방덕은 전장을 누비면서 항상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용장이었으며 마초와 함께 마등군의 중추를 담당했다. 이후 마등은 나이가 들자 가족들과 함께 조조의 도읍인 업으로 이주한다. 즉 조조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조조는 보답으로 마등에게 위위(衛尉)라는 지위를 주었는데 구경(九卿)에 속하는 고위직이다. 더불어 아들 마초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여 량주에서 마등의 세력을 이어받도록 해 준다. 이때 방덕은 마등을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마초를 섬겼다.

마등은 조조에게 귀부할 때에도 어느 정도는 억지로 귀부한 듯한 장면이 보이고, 온전히 귀부한 것도 아니고 마초를 남겨 양주에 있는 자기 세력을 이끌게 했다. 이건 조정과 조조 세력에서 인정을 받으면서도 양주의 자기 세력은 유지하고 싶었단 건데, 이게 양립하기 어려운 목표라는 게 문제였다. 마초는 조정에 있는 아버지와 일족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참 뜻인지, 양주에 있는 마씨 세력을 지켜내는 것이 목적인지 선택해야 했다. 결국은 둘 다 이루지 못했지만 말이다.

결국 마초는 한수 등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방덕은 당연히 그를 수행하여 전투에 참전했다. 조조가 위남에서 마초를 격파하자, 방덕은 마초를 좇아 한양군으로 도망하여 기성에서 수비를 굳혔다. 이후 또 마초를 좇아 한중으로 나가 장로를 따랐다.

<마초전>에 따르면 마초는 장로가 더불어 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한 인물이라 생각하여 내심 근심하고 번민했는데 유비성도에서 유장을 포위했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서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유비군에 투항했다. 허나, 마초는 이때 방덕을 데려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정사 <방덕전>에 따르면 마초를 쫓아 한중으로 간 이후에 방덕이 장로를 따랐다고 되어있는데, 이 서술만으로는 마초가 객장의 신분으로 함께 있다가 혼자 남겨져서 장로를 따르게 된건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앞뒤 선후관계를 따져보면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는데, 먼저 마초는 장로에게 있다가 장로 주변의 신하들에 의해 견제를 받아 유비에게로 귀의하게 되는데, 이때 마초는 사촌 마대와 방덕의 사촌형인 방유 역시 데리고 갔다. 마초의 처자식은 장로에게 인질형식으로 잡혀있는 것을 감안해도 방유까지 마초를 따라 간 마당에 방덕이 마초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방덕은 마초를 따르기 보단 한중에 남아 장로를 섬기기로 한 것로 보인다. 한편, 이때 당시 마초는 가족인 아들 마추, 첩 동씨 를 데려가지 못했다. 인질형식으로 잡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니, 방덕은 사람들과 더불어 항복하였다. 방덕의 무용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조조는 그에게 입의장군(立義將軍)을 배수하고 관문정후(關門亭侯)로 봉했을 뿐만 아니라 식읍 삼백 호를 주는 등 크게 후대한다.

2.4. 번성 공방전

후음, 위개 등이 완성에서 모반하자, 방덕은 수하를 이끌고 조인과 더불어 완성 공략에 나서 이 둘을 참하고 그대로 남쪽으로 진군, 번성에 주둔하고 관우를 토벌했다. 번성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방덕의 형이 한중에 있었으므로 이를 의심하였다. 방덕의 옛 주인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했으니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방덕은 억울했던지 거듭 말했다.
나는 국은을 입은 몸이니, 죽음으로 의를 다하겠소. 내가 직접 나서서 관우를 치고자 생각하고 있소. 올해 안에 내가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관우의 손에 죽겠소.
이후 직접 관우와 교전하여 관우를 노리고 화살을 날려 그 이마에 적중시켰다. 그 무렵, 방덕은 항상 백마를 타고 다녔으니, 관우의 군중에서는 그를 백마장군이라 부르며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후 우금이 칠군을 이끌고 구원을 왔고 조인은 방덕을 번성에서 북으로 십 리 떨어진 곳에 주둔시켰으나[2], 십여 일 계속된 비에 한수가 범람하여 번성의 평지는 5, 6장 정도 수몰되었으므로 방덕은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제방에 올라 물을 피했다. 관우가 배를 타고 이를 공격해왔는데, 큰 배에서 사방으로부터 제방 위에 화살을 쏘아댔다. 방덕은 갑주를 몸에 두르고 활을 잡고 나섰으니, 쏘는 화살마다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장군 동형, 부곡장 동초 등이 항복하려 하였으므로, 방덕은 그들을 붙잡아 베어 죽였다.

일출시부터 전력을 다하여 정오가 지나도록 싸웠으나, 관우의 공격은 점점 격렬해졌다. 방덕이 가진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도검을 쥐고 단병접전을 벌였다. 방덕은 독장 성하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양장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도망치 않고, 열사는 절개가 꺾이면서까지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이 내 제삿날이니라.
방덕은 막하의 장수 한 명, 오백(오장) 두 명을 거느리고 활을 당기며 작은 배에 올라 조인의 진영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물결에 배가 뒤집혀 활과 화살을 잃고 말았다.

전복한 배에 매달려 물속에 있던 중에 관우의 포로가 되었으나, 당당히 서 있었다. 관우가 말했다.
방덕, 그대의 형 방유는 한중에 있고 옛 주인 마초도 촉을 섬기고 있으니 함께 촉을 섬기지 않겠는가?

이에 방덕은 관우를 질책하며 말했다.
꼬마야, 어찌 항복 따위를 논하냐! 위왕께는 정병 백만이 있으며, 위의를 천하에 떨치고 계신다. 네 유비 따위는 범재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대적이나 가능할 줄 아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귀신이 될 생각이니, 적의 장수 따위가 되지는 않을 셈이다.

이에 화가 폭발한 관우는 도부수에게 일러 방덕을 참수하라 명하였다. 조조는 이를 듣고 슬퍼하며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우금전>에 따르면 우금은 투항하고, 오직 방덕만이 절의를 굽히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조조가 이 일을 듣고 오랫동안 슬피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우금을 30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위난에 처하자 오히려 방덕보다 못하리라는 것을 어찌 짐작했겠는가!

2.5. 사후

조조는 그의 두 아들을 열후에 봉하였다. 조조가 죽은 후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방덕의 묘에 사자를 보내 시호를 내렸다. 그 책(사령)에 이와 같이 말한다.
그대는 전장에서 과감하게 나갔으며, 곤란을 뛰어넘어 공명을 날렸다. 명성은 당시에 차고 넘쳤으며, 의로운 마음은 고금에 높았다. 과인은 이를 애달프게 여겨 시호를 장후라 내린다.
또 아들 방회 등 네 명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리고, 소령을 각기 100호로 하였다. 방회의 용렬(勇烈)함은 아비에 버금갔으니, 관위는 중위장군까지 올랐고, 열후에 봉해졌다.

<관우전> 주석 《촉기》에 따르면 방덕의 아들 방회종회, 등애를 따라 촉을 정벌했고, 촉이 격파되자 관씨 일가를 모두 멸족시켰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실로 2대에 걸친 무시무시한 스케일의 복수극이었던 셈.

《촉기》에 따르면 종회는 촉을 평정한 때에 전후에 북과 피리를 울리고 방덕의 유체를 맞이하여 조문하고 업에 보내 장례케 하였는데, 묘 안의 머리와 몸이 마치 산 사람 같았다. 그러나 배송지는 방덕은 번성에서 죽었고, 조비가 즉위한 뒤, 다시 사자를 파견해 방덕의 묘소에 이르게 했으니, 즉 그의 시체는 촉에 없었고 이는 왕은의 헛소리라고 지적했다.

3. 삼국지연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16px-Shang_Xi%2C_Guan_Yu_Captures_General_Pang_De2.jpg
관우금장도(關羽擒將圖)

마등이 모살되고 마초조조에 대한 복수를 위해 출병하는데 이때 방덕과 마대가 마초의 충실한 부장으로 나온다. 위장이면서도 그 충심이 나관중의 총애를 받아 지용겸비의 호걸임이 강조되는데 마초의 장안성 공략은 거의 방덕의 공이나 다름없는 일로 묘사된다. 더불어 방덕은 마초의 무모함을 싫어했다고 하며 참모역으로도 발언한다. 실제 정사에서는 마초가 통솔력을 발휘하고 방덕은 주로 맹장으로서의 기록만 남았다는 걸 생각하면 정사와 연의가 바뀐 셈이라 아이러니 하다.

이후 마초군은 조조군에게 패퇴하여 장로에게 의탁한다. 마초가 유비에게 투항할 때 방덕은 병 때문에 동행을 못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는 연의의 창작으로 정사에서는 마초를 따라 한중에 온 이후 마초가 유비에게 투항함에 따라 의탁을 받아준 장로를 따랐다.

그렇게 조조가 장로의 한중에 침공하자 방덕은 장로의 군세로 출진하여, 하후연, 허저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인다. 방덕의 무예와 지략을 본 조조가 방덕을 죽이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해서 장로의 최측근 부하이자 뇌물을 엄청 좋아하던 양송을 매수, 양송의 이간질로 장로와 방덕의 사이를 틀어지게 만들고 물자가 끓겨서 장로에게 복귀하려 하나 장로는 배신자라며 죽이려드니 어쩔수 없이 방덕은 조조에게 투항한다.

그 뒤, 유수구 전투에 종군하여, 손권의 부장인 진무를 격렬하게 합을 주고받은 끝에 무찔러 무공을 세웠다. 정사에서 방덕은 유수구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으며 진무도 이 때 죽은 게 아니고 방덕과 싸우지도 않았다.

관우를 공격하러 갈 때 방덕은 주변으로부터 방덕의 이전 주군인 마초가 촉나라의 오호대장군으로 있다며 여차하면 배신 가능성이 거론되자 자신의 충의는 조조에게 있다며 의심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을 메고 출전했다는 식으로 더 장렬함이 강조되는데 관을 메는 것은 창작된 묘사이다. 신참이라서 장군이 숙장 우금, 부장이 방덕이 되었으나, 두 사람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참고로 정사에서 방덕은 우금의 부장이 아니라 조인의 부장으로 출전했다. 아마도 항복한 우금과 대비시키기 위해 우금 휘하로 그려진 듯 하다. 방덕은 먼저 나온 관평에게 "너 같은 애송이는 안 죽일 테니, 네 아비나 불러와라."라고 도발하며 30여합을 겨루었고, 마침내 관우가 나오자 일 대 일로 무려 100여합을 겨루었다가 서로 물러났다. 다음날도 50합을 겨뤄도 승부를 내지 못할 정도의 실력을 선보이더니 도망치는 척 하다가 관우의 어깨에 화살을 맞혀 위기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금은 방덕이 공을 세우는 것을 두려워하여 방덕에게 철수 명령을 내린다. 이후 관우의 수공에 대패하자 주창이 물 속에서 방덕을 포박해온다. 이후 역사에서처럼 관우로부터 마초도 촉에 있으니 투항하는게 어떻냐며 권하지만 방덕은 투항을 거부하면서 처형되었고 우금은 관우에게 투항한다.[3]

정사에서는 관우의 이마를 맞혔는데 연의에서는 어깨를 맞췄다. 물론 그 와중에 관우는 끈질기게 목숨을 건졌다.

4. 기타

이름 때문에 간혹 착각할 수 있으나 방통의 숙부인 방덕공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절대로 방덕'公'이 아니다.

방덕은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개인의 무용으로는 단연 최상급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일단 대규모 전투에서 장수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적장을 죽인 것은 정사에서는 무척이나 드문 일로 안량을 죽인 관우에 비견할 수 있을 만한 용맹이며, 또 활을 쏘아 관우의 이마를 맞힌 사례나 쏘는 화살마다 빗나가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면 여포, 태사자와 더불어 손꼽히는 명궁이기도 하다. 방덕은 그런 일신의 용맹으로 마등과 마초 부자를 섬겼다. 허나, 그로 인해 나중에 위나라 사람들에게 의심을 샀으며, 그의 마지막 행보는 보기에 따라 어떻게든 의심하는 이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비칠 공산이 크다.

한편, 방덕의 충의에 대해 후세의 학자들은 의문을 품었던 듯하다. 강발상(康發祥)은 "방덕이 항장이 되니, 마초, 장로에게 있으면서는 죽지 않았으나, 조조에게 있으면서는 죽었으니, 오대(五代) 때 주(周)의 신하 한통(韓通)이 한(漢)에 있으면서는 죽지 않았으나 주에 있으면서는 죽은 것과 같으니 비록 죽음을 씩씩하게 말하며 죽은 걸로 썼으나, 군자가 취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한담(韓菼)은 "방덕은 조씨에게 절의를 다했으니, 진실로 의기로운 공덕이나, 다만 젊어서부터 마등에게 의지했고, 마씨는 조씨에게 멸해졌으나, 방덕은 조조에게 등용됐으며, 또한 마초와 방덕의 형은 모두 촉에 있으나, 도리어 촉과는 우의를 버리고 원수로 삼았으니, 적합하지 못하다"고 했다.

즉, 방덕도 여러 주군을 섬겼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납득 가능한 이유를 찾자면 저수가 그랬던 것처럼, 전자인 마씨 부자와 장로같은 경우는 세력이 망하면서 함께 투항한거니 방회 등 그의 가족이 위태롭지 않았지만 후자인 조조의 경우 방덕이 개인적으로 패배한거지 위나라는 여전히 건재한데다 그의 가족이 남아있었기에 그들의 안위를 염려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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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그가 태어난 때는 아직 옹주량주에서 분리되어 나오기 전이었고 남안군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굳이 출생 시점으로 따지자면 양주 천수군 출신이라고 하겠다.[2] 우금은 고지로 올라가고 방덕은 제방으로 대피하였다는 점과 본래 방덕군은 조인 휘하의 군대라는 점에서 방덕이 우금보다 번성에서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아마 조인과 우금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번성에서 군대가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여유로웠던 것 같다.[3]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방덕이 항복을 거부하며 독설을 퍼붓는 모습을 보고 조조에게 항복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충성심이고 의리냐며 방덕이 객기를 부린 것이라고 폄하했다. 이문열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충성심을 가진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좋고 더군다나 조조에 충성한 인물인데 이렇게 까는 건 이례적인 케이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