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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년 4월 8일 | ||
후한 기주 안평군 광종현 (現 허베이성 싱타이시 광쭝현) | |||
사망 | 235년 3월 14일 (향년 51세) | ||
조위 예주 영천군 허창 (現 허난성 쉬창시) | |||
능묘 | 수양릉(首陽陵) | ||
재위기간 | 후한 위왕부인 | ||
220년 3월 15일 ~ 220년 11월 25일 | |||
조위 귀빈 | |||
220년 11월 25일 ~ 222년 10월 31일 | |||
조위 황후 | |||
222년 10월 31일 ~ 226년 6월 29일 | |||
조위 황태후 | |||
226년 6월 29일 ~ 235년 3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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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부친 관진경후 곽영 (觀津敬侯 郭永, ? ~ ?) 모친 도향군 동씨 (都鄕君 董氏, ? ~ ?) | ||
형제자매 | 4남 2녀 중 차녀 | ||
배우자 | 고조 문황제 | ||
자 | 여왕(女王) | ||
봉작 | 부인(夫人) → 귀빈(貴嬪) → 황후(皇后) → 황태후(皇太后) | ||
궁호 | 영안궁(永安宮) | ||
존호 | 영안태후(永安太后) | ||
시호 | 문덕황후(文德皇后) |
[clearfix]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여성이자 남편은 조비, 아버지는 남군태수 곽영(郭永), 어머니는 동씨(董氏), 언니는 곽욱으로 기주 안평군 광종현 출신. 시호는 문덕황후(文德皇后).성은 곽씨(郭氏), 이름(名)은 불명, 자는 여왕(女王). 흔히 곽여왕(郭女王)으로 불린다.
2. 정사 삼국지
그녀가 어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이 아이는 내 딸 중에서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하여 여왕(女王)이라는 자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어려서 부모를 잃었고, 전란의 와중에 유랑하며 동제후의 집안에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조조가 위공이 되었을 때 눈에 띄어 동궁에 들어와 조비를 시중들게 되었다. 지모와 술수가 있어 조비가 후계자로 선택될 수 있도록 계책을 내어 조비는 이를 종종 받아들였다. 조비가 후계자가 된 이후에도 계책을 내었다.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곽여왕은 부인으로 봉해졌으며, 제위에 오르자 귀빈이 되었다. 문소황후 견씨의 죽음으로 인해서 곽여왕은 총애받게 되었다.
222년에 조비가 곽여왕을 황후로 책봉하려 하자 잔잠은 상소를 올려, 본래 첩이었던 여자를 정실로 삼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고 위로부터 화가 일어날까 두렵다며 반대했다. 다음은 상소문의 전문이다.
옛날의 제왕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밖(조정의 신하)의 도움뿐만 아니라 안(궁정)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내조의 문제는 천하가 다스려지고 혼란스러워지는 원인이 되며, 국가의 흥성과 쇠약함도 이로부터 비롯됩니다. 따라서 서릉씨의 딸(서릉루조)은 황제에게 시집갔으며, 영아 등은 순 임금에게 시집가서 모두 현명함으로써 상고시대에 향기로운 명성을 떨쳤습니다. 하나라 걸 임금이 남소 땅으로 도망친 것도 말희가 화를 야기한 것이며, 은나라의 주가 포락의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아래에는 숯불을 지피고 그 위에 죄인을 놓고 태워서 죽게하는 형벌을 세운 것도 달기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선왕과 성철을 그들의 정비를 책립함에 있어서 매우 신중히 해 반드시 이전부터 계속 내려온 귀족의 가문에서 취했고, 그 중에서도 아주 정숙한 여자를 선택해 후궁, 즉 육궁을 통솔하게 하고 경건하게 종묘에 제사를 올리게 했으며, 그 결과 부인의 덕교가 계승되고 바르게 되었습니다. 역경에서, "가정의 도가 바르게 되면 천하가 안정된다."라고 했으니 안으로부터 밖으로 미치는 것은 선왕의 법령이고 제도였습니다. 춘추에서 예를 관장하는 종인, 흔하의 말에, "첩을 정부인으로 삼은 예제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제나라 환공이 규구에서 제후들과 맹약을 결심하면서 또한 말하기를 "첩을 아내로 삼는 경우는 없다." 했습니다. 지금 후궁의 대열에 들어선 첩들은 항상 수레를 타는 제왕의 지위에 근접해 있습니다. 만일 총애 때문에 이런 사람 중에서 황후를 얻는다면 비천한 사람이 갑자기 고귀한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니, 신은 후세에 아랫 사람이 제왕을 능멸해 제왕의 권위가 떨어지고 전제가 느슨해지고 법도가 없어져서 화란이 위로부터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조비는 이를 무시하고 곽여왕을 황후로 세웠다. 황후가 되자 곽씨의 일가친척이 모두 관직을 얻었지만 잘못된 일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 감시했다. 아마도 예전에 자기 동생이 관가에서 베를 훔치다 걸려 포훈에게 처형당한 것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듯.
224년에 조비가 동쪽에 정벌하러 갔을 때 장마비로 인해 누각이 파손되었을 때도 별 것 아니라면서 거처를 옮기지 않는 담대함을 보여줬고, 225년에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을 막는 것을 저지하였다.
조조의 육촌 동생이자 개국공신인 조홍에게 사적인 원한이 있던 조비가 조홍을 죽이려들어 조정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시어머니 무선황후 변씨가 곽여왕에게 '조홍이 처형당한다면 내가 직접 황제(조비)에게 다음 날 바로 조칙을 내려 널 황후 자리에서 폐하겠다.'고 압박했다. 곽여왕은 위협을 느끼고 조비에게 매달려서 결국 조비는 조홍을 죽이는 것을 단념했다.
조예가 황제에 즉위하자 곽여왕은 황태후에 책봉되었으며 영안궁에서 거처하였다. 언니 곽욱이 죽었을 때 조예가 후하게 장사지내려던 것을 곽여왕이 검소하게 치르도록 말렸다. 235년에 허창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유언에 따라 수양릉의 서쪽에 묻혔다. 명제기에 의하면 곽여왕은 1월 정사일에 죽었지만 자치통감을 번역한 권중달 교수의 주석을 보면 이해 1월에는 정사일이 아예 없다. 2월에는 정사일이 존재하기 때문에 2월에 죽었다는 다른 기록이 있다면 단순한 오기이겠지만 문덕곽황후전을 봐도 이해 봄에 죽었다고만 기록되었고 2월이라고는 명시되지 않았다. 정황상 정확한 사망시점은 당대에도 몰랐던 듯하다. 당대 사서인 위략이 곽여왕은 갑자기 죽었다고 기록했음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위략》에 따르면 조예가 어머니인 문소황후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음을 슬퍼하자 곽여왕은 우려하다 갑자기 죽었다. 문소황후가 죽을 때 조예를 이부인에게 맡겼다. 곽여왕이 죽자 이부인은 처음으로 문소황후가 참소에 의한 화를 만났으며, 죽을 때는 대렴(시신을 관에 넣는 절차)도 받지 못하고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조예는 슬프고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곽여왕의 장례식을 문소황후의 장례식과 똑같이 치르도록 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예가 새어머니 곽여왕을 죽였다. 조예는 곽여왕에게 항상 원한을 품고, 자주 울며 생모 견씨가 죽을 때의 상황을 물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곽여왕이 말하길 "선제(조비)께서 친히 죽이셨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책문하느냐? 또한 너는 사람의 자식이 되어, 죽은 부친을 원수로 삼고 추궁하며, 전 모친을 위해 그 뒤의 모친을 능멸하고 죽일 수 있느냐?" 하였다. 조예는 이 말을 듣고 분노하여 곽여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그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게 하였고 그 입에 쌀겨를 엄청나게 들이부은 다음 땅에 묻었다고 한다.[1]
정사와 야사의 내용이 충돌하지만 《자치통감》은 정사의 내용을 뒤집고 곽여왕이 견씨를 참소했다는 야사의 이야기를 채택했다.
고개지의 《계몽기》에 기이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떤 사람이 주왕(周王)의 무덤을 열었더니 순장된 여자가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니 숨이 돌아오고, 몇 개월이 지나니 말을 할 수 있었으며 나이는 스무 살 정도였다. 여자는 수도로 보내져 곽태후의 사랑을 받았으며, 곽태후가 죽으니 슬프게 통곡하다가 1년쯤 후에 죽었다고 한다.[2]
《수신기》에도 비슷한 일화가 전한다. 동한 말년, 관중에 대란이 일어났을 때 어떤 자가 서한의 궁녀 무덤을 팠는데 매장자가 놀랍게도 살아 있어 정상적으로 삶을 회복했다. 위문제의 황후가 그 궁녀를 가여이 여겨 궁으로 들이고 서한시기 궁중에 대한 일을 물어보곤 했는데, 궁녀는 모두 하나하나 상세히 대답해 주었다. 황후가 죽자 궁녀도 너무나 애통해 한 나머지 죽고 말았다고 한다.
3. 삼국지연의
곽영이 딸이 여자 중 왕이라고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왕이라고 불렸다. 그러니까 연의에서는 여왕(女王)이 곽씨의 자(字)가 아니라 그냥 별명일 뿐이다. 조비가 황제가 되자 귀비로서 총애되고 장도와 공모해 문소황후 견씨를 죽이고 황후가 되었으나 아이가 없어 조예를 길렀다.절세미인인 견씨를 내쫓았다는 설정에 따라 곽씨 역시 엄청난 미인이라고 묘사된다.
4. 기타 창작물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100만인의 삼국지 | 삼국지 11 |
삼국지 12, 13, 14 |
이름이 11~13탄까지는 자를 미표기한 곽씨(郭氏)로, 14탄부터는 자를 반영한 곽여왕(郭女王)으로 나온다.
삼국지 11 콘솔판에서 추가되었다. 능력치는 통솔력 32/무력 6/지력 79/정치력 74/매력 85. 자못 심술궂게 생긴 일러스트지만 보유 특기는 경국이라서 꽤 좋다. 연의 설정을 반영해서 그런지 문소황후 견씨가 혐오무장인데, 어차피 문소황후의 특기도 경국이라 둘이 함께 엮어쓸 일은 전혀 없다. 대신 보유자 중 가장 낮은 매력치가 눈길을 끄는 정도.
삼국지 12에도 등장하며 매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능력은 씁쓸하다. 일러스트 감상용 캐릭터. 일러스트는 왼손을 올리면서 오른손을 펼치고 있다. 조비가 후계자 경쟁을 할 때 그에게 진언하던 모습으로 보인다.
삼국지 13에서는 통솔 42/무력 4/지력 69/정치 64다. 병과적성은 C/C/C에 특기는 상업 2, 위풍 1(조비 인연 효과). 중신특성은 없다. 전수특기는 상업이며 전법은 창속약화. 도토리 키재기지만 전체적으로 견씨만 못하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22, 무력 6, 지력 70, 정치 64, 매력 68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20이나 깎인 대신 무력이 2, 지력이 1 상승했다. 또한 매력도 11때보다 17이나 깎였는데 아무래도 데뷔작인 삼국지 11 콘솔판 때부터 그랬던 것 같지만 코에이에게 어지간히도 밉보이는 모양이다.[3] 개성은 재원, 주의는 패도, 정책은 본초학 Lv 2, 진형은 학익, 전법은 혼란, 매성, 친애무장은 조비, 혐오무장은 견씨, 조예다.
삼국지 8 리메이크에서는 100만인의 삼국지 일러스트를 재활용했다.
4.2. 대군사 사마의
자세한 내용은 곽조(대군사 사마의) 문서 참고하십시오.4.3.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곽여왕(郭女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2019년 6월 업데이트에서 난세여걸의 패에 추가되었다. 병종은 군주계, 성우는 사문영.
4.4. 삼국지톡
시즌 10부터 얼굴을 드러냈으며, 널리 알려진 자(字)인 여왕은 그대로 유지하되 '곽희'라는 오리지널 이름이 생겼다. 조비의 현 아내인 견복과 대조되는, 아래로 늘어뜨린 나뭇가지 모양의 옥비녀로 일부 뒷머리를 올리고 나머지는 길게 내려뜨린 흑발에 검은 동태눈, 왼쪽 입가의 매력점이 특징인 팜 파탈형 미녀로 등장. 놀라운 식견을 자랑하며 조비를 황제위에 올린 핵심 책사로 묘사되는데, 일각에서는 글작가 무적핑크의 오버 아니냐는 의견도 있으나 정사에서도 '곽후는 지모와 술수가 있어 때때로 문제에게 의견을 제시하여 받아들이게 했다. 문제가 후계자로 정해졌을 때도, 곽후는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라는 기록이 있기에 납득 불가능한 각색은 아니다.
시즌 10 첫 화부터 조비의 바람 상대로 등장하면서 견복의 비극적인 앞날을 예고하게 됐다. 패디큐어를 발라주던 조비가 한중을 노리고 아버지 조조에게 선전포고를 한 유비와 그런 유비를 치겠다 선언해놓고 지지부진한 아버지 조조와 친척들을 디스하자, 발로 조비의 얼굴을 누르며 "하여튼 아빠만 집에 없으면 여포도 쌈싸먹을 입영웅이 되냐"고 놀리고는, 조비의 용포까지 빼앗아 입으며 과인을 자처하는 행태를 선보인다. 물론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얼이 빠져 얼굴을 붉히던 조비는 곽희의 '귀엽다'는 말 한 마디에 아예 그녀를 업고 망아지를 자처할 정도로 추태를 보인다. 공식 태자비는 견복인데도 그녀의 후원에서 출신 불명의 전쟁고아 출신 궁인인 곽희와 희희낙락 정분이 난 조비의 행태에 신하들조차 뒤에서 흉을 보며 수군거리나, 하필 곽희가 조비가 조식에게 밀려날 것을 확정된 마당에서도 상황을 정확히 보고 그의 태자 책봉에 큰 도움을 준 실세인지라 아무도 이에 대해 태클을 걸지 못하고 있다.[4]
시즌 11에 이르러서는 헌제를 몰아내고서 그의 곤룡포를 걸친 채 옥새를 들고 나타나 조비에게 인계하고, 조비가 본처인 견복에게 사약을 내리고 죽이면서 공식 후처이자 황후로 등극했다. 하지만 전쟁고아 천민 출신의 첩인 자신에게 있어 유일한 뒷배이자 일국의 황후로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인 조비가 고작 39세에 요절하고, 그의 뒤를 이어 자신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쫓겨나고 반 평생 유폐된 조예가 조위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그의 보복으로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풍전등화 같은 신세로 전락한다.[5]
그러나 정작 조예 관련해서는 즉위 이후 대부분의 시간선이 스킵되며 당연하게도 곽여왕은 얼굴도 비치지 못한채 등장이 종료되었다. 곽여왕 개인에게는 핍박 받는 장면 없이 끝났으니 오히려 다행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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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건국 | ← | 문덕황후 곽씨 | → | 명도황후 모씨 |
[1] 이 방식은 견씨가 죽을 때 받은 초빈으로 조예는 똑같은 형벌로 원수를 처형한 것이다.[2] 다만 이 이야기는 구라일 가능성이 높다. 주왕 시절과 위나라 시절의 세월의 차이를 고려해보면 20살에 묻혔던 사람이 그 때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 곽태후가 살던 시기에 누가 몰래 이 여자를 잡아다가 넣어놨는데 다른 사람에게 구출되었거나 하면 또 모를까.[3] 야사에서 문소황후를 참소했다는 이야기와 조예가 문덕황후를 죽인 이유가 친모를 참소해 죽게 만들었다고 확신해서라는 말이 있는데 이 내용들만 보면 탐욕스러운 악녀로 보이지만 정작 사료를 보면 황실 외척이 된 자기 친정 사람들에게 지위를 악용하지말고 처신을 잘 하라고 충고하거나 장마로 누각이 파손됐을 때 거처를 옮기지 않는 대범한 모습을 보여줬고, 물을 막아 낚시를 하는 걸 막는 등 악녀와는 거리가 멀다. 당장 수십년 뒤의 가남풍이나 손노반 등과 비교하면 문덕황후가 무슨 사치나 막장 행위를 저질러 나라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없다.[4] 한편 어린 조예는 조비와 곽희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며 두 사람에 대한 증오를 일찌감치 키운다. 이미 아버지인 조비는 물론 백성들에게까지 조비의 친자식이 아닐 거라는 근거 없는 의심과 미움을 받으며 어머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는데, 이젠 아버지가 친엄마는 팽개치고 다른 여자랑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고 있으니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할지라도 절대 곱게 보일 리가 없다.[5] 어머니의 억울한 사망과 동시에 유폐 당한 조예는 자신을 버리고 곽여왕과 희희낙락하는 조비의 뒤통수를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증오를 품게 되었으니, 어쩌면 야사의 내용을 차용해 훗날 조예가 조비의 사후 보위에 오른 뒤 어머니 견복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핍박과 수모를 곽희에게 가하다가 죽이면서 앙갚음을 하는 전개로 나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