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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23:45:28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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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資治通鑑
저자 <colbgcolor=white,#191919>사마광
시기 11세기 북송
언어 한문
권 수 294권
분량 기원전 403년 ~ 기원후 959년(1362년)
동주 위열왕 23년 ~ 후주 공제 원년
보러가기 한문 원본
호삼성 주석본[1]
표준 중국어 번역본(기원전 403년 ~ 기원후 525년)
표준 중국어 번역본(기원후 526년 ~ 기원후 959년)[2]

1. 개요2. 구성3. 편찬 배경4. 특징
4.1. 단점
5. 편집본
5.1. 《통감강목》5.2. 《통감절요》5.3. 《통감기사본말》
6. 한국어 완역본7. 다른 나라의 번역본8. 기타9.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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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금(황제)이 되어 《자치통감》을 모르면 정치를 잘 하려 해도 잘 다스릴 수 있는 근원을 알지 못하게 되며, 혼란스러움을 싫어하면서도 그런 혼란을 막는 방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신하된 자가 자치통감을 알지 못하면 위로는 임금(황제)을 섬길 줄 모르고 아래로는 백성(신민)을 다스릴 수 없다.
호삼성(胡三省, 1230~1302)[3]
11세기 중국 북송시대의 정치가 사마광이 주도하여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 1065년부터 1084년까지 약 20년 간 작업했다.

《자치통감》이라는 제목은 다스림(治)에 도움(資)이 되고 역대를 통하여(通) 거울(鑑)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원 제목은 《통지》(通志)였으나, 송 신종이 광대한 역사를 저술한 사마광을 치하하며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4] 사마광의 작호 온국공(溫國公)을 따서 일명 《온사》(溫史)라고도 한다.

2. 구성

총 294권, 우리나라에서는 중앙대 명예교수 권중달 교수가 완역하고 주석을 단 역주본이 있는데 총 32권이나 된다. 역주본에 대해서는 아래 해당 문서로.

각 나라마다 분량 배분은 다음과 같이 하였다.

400여 년 동안 통일제국을 번영시킨 (漢)과 300년 동안의 통일제국을 이룩한 (唐)의 분량이 총 141권으로 《자치통감》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가장 많다. 이는 이 두 제국이 오래 지속된 통일제국으로서 중국 역사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며, 또한 특히 당나라의 경우 집필 시기와 가깝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사례가 남아 있고 당대사(當代史)로 내려올수록 중요하게 여겨진 경향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8]. 다른 한편으로 송나라가 건국되기 전인 5대10국시대의 전쟁 국가들의 분량도 존속 기간과 그 중요성에 비해서는 많은 편인데, 약 50년간 지속된 시대에 <후량기>, <후당기>, <후진기>, <후한기>, <후주기> 등 총합 29권으로 비슷한 기간 동안 존속한 삼국시대의 <위기>나 6조시대 유송의 <송기>, 남량의 <양기>에 비해서도 분량이 더 많다.

3. 편찬 배경

송 5대 황제 영종이 그간 정리되었던 중원의 방대한 역사서들의 부족함을 보다못해 친히 사마광에게 칙령을 내려 편찬 작업을 지시, 1065년 《통지》 8권을 저술함으로써 거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후 1084년까지 19년에 걸쳐 대전쟁시대의 시작인 (周) 위열왕 23년(기원전 403년)[9]부터 북송 제국이 건국되기 직전의 후주 세종 6년(959)에 이르는 1362년간의 역사를 294권 분량에 편년체로 기록했다. 대개 동양 역사책 중 기전체의 대표는 《사기》, 편년체의 대표는 《자치통감》으로 통한다.

송 황제 영종이 사마광에게 사서를 편찬하라고 지시한 데에는 당시 지나치게 격화된 구법파와 신법파의 대립 및 분쟁을 완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구법파는 물론 신법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 수장인 사마광조차 현재의 법률 체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에는 공감했고, 신법파는 혁명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주장은 했지만 그들이 내세운 개혁안이 다 맞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갈등이 말로는 해결되지 않으면서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송 황제 영종이 어느 한쪽을 전부 학살해서 정리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일단 구법파의 필두인 사마광에게 사서를 편찬하라는 칙령을 하달하여 정계에서 영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제안을 한 것이다.[10]

그렇다고 사서 편찬이 꼭 구법파에게 불리한 것만도 아니었으니, 사서를 통해 고대의 가치와 방법을 고수하자는 주장을 피력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자치통감》은 전체적으로 고대시대 같은 옛날의 가치ㆍ윤리ㆍ도덕ㆍ사회제도를 옹호하는 관점을 취하였다. 《자치통감》 편찬은 송 황제 영종의 절묘한 정치적 타협안이었던 셈이다.

다만 이렇게 구법당의 당수가 쓴 책이다 보니 철종 시기 신법당이 득세하자 없어질 뻔했지만, 영종이 지시하면서 편찬하기 시작한 책이고, 신종 역시 편찬을 지원하면서 《자치통감》이라는 이름까지 친히 내려주었기 때문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4. 특징

사마광 개인이 모두 편찬한 것은 아니다. 시대별로 나눠서 다른 학자들이 편찬하기도 했고, 북송의 영종도 편찬국까지 설립해 지원해주는 등 정부의 도움도 받았다. 간단히 말해 《자치통감》은 정부가 주도해 편찬한 《삼국사기》와 사마천 개인의 노력으로 완성된 《사기》의 중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사마광이 지어 올렸던 《통지》(通志) 8권을 기초로 하여 《구오대사》를 따라 《춘추》의 규범을 모방했으며, 《춘추좌씨전》의 서법을 따라서 완성했다. 정사를 비롯한 물론 실록(實錄), 야사(野史), 묘지류(墓誌類) 등의 사료 322종의 각종 자료를 인용했다고 한다. 사마광이 《자치통감》 편찬에 《춘추》 필법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음은 상당히 명교적인 선택으로서 그의 문집에 남은 여러 글들이나 당시의 저명한 《춘추》전문가였던 유창과의 편지 교환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역사가들이 전문 분야를 맡아서 정리했다는 부분은 사서 편찬에 있어서 선구적인 방식으로서, 한나라 시대의 파트는 유반, 삼국시대~남북조시대(위진남북조시대)는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 유서가 맡고[11], 당나라 시대의 파트는 사마광의 제자 범조우가 맡았다.[12] 죽을 위기에 처하면서 고군분투하여 《사기》를 저술했던 사마천보다는 훨씬 훌륭한 환경에서 저술 작업을 시행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사마광 본인이 "내 온 힘을 이 책에 다 쏟았다." 할 정도로 내용에 열과 성의를 들였다. 중국의 명역사서로 손꼽기에 손색이 없으며, 지금은 산일되고 없는 사마광 당시까지 전해지던 사료를 적지 않게 수록했기에 유력한 사료라고 주목받는다. 중국사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사기》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필수자료이다.

주요 사건들에 대해 '신광왈'(臣光曰, 신 사마광은 말한다)이라 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탈고한 후에도 스스로 '이건 따로 고증이 필요하겠는걸' 이라고 생각해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사료 고증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통감고이》(通鑑考異) 30권을 저술하기도 했다. 《자치통감연표》 30권도 존재하고, 사마광 본인이 본편의 목록과 범례를 정리한 《통감목록》(通鑑目錄) 30권이나 《통감석례》(通鑑釋例) 1권도 있다. 《계고록》(稽古錄) 20권은 본편에서 사마광 본인이 '이 부분은 좀 부족하지?' 싶은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

삼국시대조위를 정통으로 보지 않은 역사서라는 점에서 《삼국지》(삼국시대)를 다룬 사료에서는 특기할 만하다. 물론 연도를 세는 기준으로 위•진의 연호를 채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위만 정통으로 내세우고 촉한손오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특히 촉한에 대해선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 촉으로 칭한 것을 본래 국호였던 한으로 표기하였다. 즉, 사마광이 위•진에 치우친 서술을 했다는 것은 세간의 오해이다.[13] 《자치통감》을 읽다보면 사마광이 이 부분에 있어 공정성에 신경을 쓴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사마광이 무통설(無統說)로 입장을 정하면서 조위정통론촉한정통론의 대립을 어느 정도 일단락시킨 점과 조씨와 본인의 조상인 사마씨가 나라위나라의 황위를 찬탈하고, 위나라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점에서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다.[14]

게다가 《정사 삼국지》 번역 중 김원중역이 하도 안 좋은지라 삼국시대를 보는 데 있어 이 책이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15] 하지만 이 책이 위 정통론을 주장한다고 착각하는 촉한의 팬들과, 이 책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무리들 때문에 《자치통감》의 무통설이 퇴색된 감도 있다. 참고로 《삼국지》의 시대로 잡는 황건적의 난부터 삼국통일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부분은 <한기>(漢紀) 부분인 58권 초반부터 <진기>(晉紀) 부분인 81권 초반까지 대략 23권쯤 되는 분량이다.

사마광은 본인부터가 이미 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정치가였고, 따라서 《자치통감》은 사마광 시대까지의 역사서를 단순 요약한 것이 아니라 옛 사료들을 정치적 이성으로 재해석하여 새롭게 편집한 역사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상산 4호'(商山四皓)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는 장량이 "유방이 얻지 못한 은거 선비들인 상산 4호를 얻으면 황태자의 위치가 확고해진다"며 여후에게 권했고 유방이 그들이 황태자를 따르는 것을 보고 황태자를 바꾸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사마광은 유방이 폐태자하려다가 뜻을 바꾼 일에 대해 전설 같은 '상산 4호' 이야기를 사료로 채택하지 않았고, 그렇게 성질이 사나운 유방이 은거 선비들 몇몇이 말린다고 뜻을 꺾었을 리 없다며 당시 장량을 비롯한 조정의 세력이 강한 정치가들이 황태자 편이었기 때문에 황태자를 바꾸지 않았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 증명했다. 사마천의 《사기》가 '문학가가 저술한 역사서'라면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정치가가 저술한 역사서'임을 보여주는 예이다.[16]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저술하며 제왕이 여가에 만기(萬機)를 친람할 수 있는 역사책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제시하였다. 제왕이 보는 이유는 정치를 잘하기 위해서이다. 사마광은 정치를 잘하기 위하여 두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는 제국의 흥망과 성쇠, 둘째는 신민의 생업과 안정이다. 그중에서 제왕으로서 지지할 만한 것과 경계해야 할 것, 즉 제왕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이 그 내용이라고 하였다. 실용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또한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통해, 천하는 모두의 것이고(天下爲公)[17]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以人爲本)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신민이 고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황제(임금)는 가볍다."

라는 《맹자》의 민귀군경(民貴君輕)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천하위공의 자세는
"대저 관직은 폐하의 관직이 아니라 천하의 관직입니다."

란 말이 그 실체를 잘 말해준다. 이는 관직이란 현명하고 유능한 적임자에게 수여하여 사회와 제국을 함께 다스리는 공공 도구이지, 위정자나 통치자가 사사롭게 지지하는 인물에게 내리는 보상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또 사마광은 역사의 여러 사례를 통해 문화와 교육을 통해 개인의 품성으로 내면화한 명분과 도의의 덕성은 부단한 수신 과정에서 일상 속의 자기 절제력으로 승화되고, 더 나아가 매우 현실적인 검약과 겸양의 가풍으로 확장되며, 궁극적으로는 명분과 대의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 기풍으로 보편화하는 것을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 기풍은 법이나 규제로 지탱되는 강제적 질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인 실천과 참여로 유지되는 느슨한 구속력이다. 하지만 이 느슨한 구속력은 명예와 염치와 도의를 중시하는 사회 전체 분위기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어떤 강제적 구속력보다 더 끈질기고 지속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사마광은 이처럼 기본적으로 '정치가'답게 중국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과거의 사례들을 돌이켜보면서 사료들을 엄밀히 선별하고 검증하여 《자치통감》이 명저가 되도록 했다.

이후의 역사서 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자치통감》 이후 《자치통감》의 전례를 따른 역사서가 많이 나왔지만, 《자치통감》 이상의 역사서는 나오지 않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다. 학자들은 물론 공부를 좋아하는 군왕들의 No.1 필독서이자 애독서였다. 주석 가운데는 송말 원초의 문인 호삼성(胡三省, 1230~1302)의 주석인 이른바 《호주》(胡註)가 가장 유명한데 본편의 기사를 보정하고 새로운 사료를 덧붙이는 등 훌륭한 주석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호삼성 본인의 평론은 다분히 흥망에 대한 감개가 많이 담겼다는 평가도 있다.[18]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중국으로 사신들이 떠날 때면 임금님들이 꼭 《자치통감》 한 챙겨오라고 당부하거나, 명나라의 황제들이 조공 답례품으로 쏘는 기사도 자주 보인다. 책 한 세트를 답례품으로 내리다니 말이 되겠냐 싶겠지만, 후술하듯 책은 1권 사는데 쌀 몇말을 들여야 할 정도로 정말 비쌌고, 특히나 총합 백 몇십권이나 되는 《자치통감》의 전권은 중국 내에서도 부자나 명문가 정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소유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답례품으로는 딱이었다.

특히 세종대왕은 명실공히 《자치통감》덕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애독하여 경연에서 《자치통감》을 강연하게 했고, 스스로 해설서를 붙여 간행하기도 했으나, 이 책의 분량이 분량인 만큼 세종의 시력이 악화되는 원인이 되는 데도 일조했다. 집현전의 인재들을 총동원해 펴낸 이 주석서가 바로 《자치통감훈의》로, 세종은 세종 16년에 이를 편찬했으며(세종 16년 6월 26일) 이것을 간행하기 위해서 전국을 수소문해 호삼성이 음주를 단 《자치통감》 일부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세종 17년 3월 5일 세종은 이후 청주 향교에 《자치통감훈의》를 비롯한 서적을 하사하기도 하는 등 《자치통감훈의》의 보급에 힘썼다.(세종 26년 8월 14일)

4.1. 단점

당연히 현대 사학의 입장으로 봤을 때는 문제가 없을 수가 없다. 《자치통감》은 '다스림(治)에 도움(資)이 되고 역대를 통하여(通) 거울(鑑)이 되는 책'이라는 이름답게, 사마광이 스스로 사실성보다는 후대에 교훈을 주는 내용을 채택한 경향성이 있다. 어떻게 보면 교훈을 위한 역사 왜곡의 소지가 있는 셈이다.

또한 아무래도 자치통감이 수천 년의 역사를 정리한 통사(通史)이고 기존의 기전체 정사서들에서 내용을 선별하여 편년체로 늘어놓다 보니 연대기 상 다른 사서에서 보면 분명 시계열이 틀렸거나 잘못 옮겨 틀린 부분이 자치통감에 있다. 물론 사마광이 뛰어난 학자이고 자치통감이 현대 사학자들에게 있어서도 연대기로서 간편함을 제공하는 사서이다 보니 많이 이용되지만, 사마광이 현대의 역사학자들처럼 정밀한 역사학 교육을 받은 이도 아니고 시대의 한계 때문에 분명 실수도 있다. 따라서 어느 사건을 볼 때 통사로서 자치통감이 나쁜 사서는 아니지만, 자세한 세부사항을 살피고자 한다면 기존 사서와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5. 편집본

5.1. 《통감강목》

과거에도 분량이 엄청난 것이 사실이라서 보통 주자가 정리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총 59권)이 더욱 퍼졌다. 약어로는 《강목》이었다. 편년체인 《통감》과는 달리 《춘추》의 체재에 따라 사실에 대해 큰 제목인 '강'(綱)을 따로 세우고, 사실의 '목'(目)으로 구별하여 강목체[19]로 작성되었다.

주자는 서술의 기본 원칙인 <서례>(序例)를 만들었고, 강을 제외한 목의 대부분은 그의 제자인 조사연(趙師淵)이 담당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치통감》을 모체로 하여 강목체로 재조직했다. 강목은 역사적 사실(史實)을 '강'(綱)으로 판단하고 '목'(目)으로 실증한 것인데 따라서 '강'과 '목'은 《춘추》와 《춘추좌씨전》의 관계를 한 역사서 내에서 구현한 것이다. 주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춘추필법'이라는 유교적 역사 판단방식을 이 책의 서술에 그대로 적용하여, 역사는 단순히 기술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판단하는 차원으로 바꾸어버렸다.

주자는 '강'을 통해 포폄을 하고, 그 포폄을 시간순으로 배열함으로써 역사의 맥락을 자신의 의도대로 정리했다. 또 순환하는 '천문'에 대응하는 것이 '인사'(人事)라는 점을 나타냈다. 이런 점은 《통감》에서는 기사가 없는 해에는 연도를 쓰지 않았지만, 《강목》에서는 한 해도 빈 해가 없도록 연도를 배열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방식은 역사의 맥락을 일관(一覽)적으로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통감》과는 달리 《강목》은 통사 자체를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주자는 자신이 주장한 역사순환론을 실제로 역사서에서 구현하였다. 이런 순환론 즉 인과론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자면 반드시 시간적 추이를 살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 장치가 바로 간지이자, 간지에 딸린 강이며, 포폄은 인과를 인식하는 틀이다. 좋은 일이 누적되어 시간적으로 쌓이면 치세가 되며, 치세가 극성해지면 나쁜 일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것이 누적되면 난세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하의 독서법이 가능하도록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만든 것이 바로 《강목》이다.

지금 보기엔 《강목》도 분량이 엄청나고, 잘라먹은 부분도 꽤 되지만 원본을 읽은 사람들의 평으론 꽤나 성공적인 편집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처음 나온 남송 무렵엔 첨삭된 부분이 많다고 비판도 많았던 모양으로[20] 이후 남송 말기부터 점점 중요시되어 명나라 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중요한 책으로 취급되었는데 《강목》을 연구한 송나라 윤기신(尹起莘)[21]이 쓴 《발명》(發明),유우익(劉友益)의 《강목서법》(綱目書法),원나라 왕극관(汪克寬)의 《강목범례고이》(綱目凡例考異)를 구우(瞿佑)가 교감해 명나라 성조 영락제 재위 8년에 《자치통감강목집람전오》(资治通鉴纲目集览镌误)라는 제목으로 간행했고, 이후에도 수많은 문인들이 《강목》을 연구하고 주석을 덧붙였다. 특히 윤기신의 《발명》(發明)과 유우익(劉友益)의 《강목서법》(綱目書法)은 중요한 주석으로 취급받는데 뒤에서 설명할 조선 세종의 《자치통감강목훈의》와 청나라 성조 강희제의 《어비통감강목전서》(御批通鑑綱目全書)에서도 그 내용이 그대로 이어질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받았다.

사실 사마광조차도 《자치통감》 294권은 양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여 80여 권 정도로 더 축약하려고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주자가 60권 이내로 《자치통감》을 축약했으니 주자가 사마광이 본래하고자 했던 일을 대신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주자는 《강목》의 <서례>(序例)에서 편찬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통감》이 완성된 이후 사마광은 너무 거질이라고 생각하여 그 핵심을 간추려서 《목록》(目錄)을 만들었다. 그리고 만년에는 《통감》이 지나치게 자세하다고 생각하여 다시 《거요력》(擧要曆)을 만들어서 적당한 규모로 축약하였지만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자 남송 소흥(紹興, 1131~1162) 초에 호안국이 미완성된 《거요력》을 바탕으로 《통감거요보유》(通鑑擧要補遺)를 만들었다. 주자는 이를 보고 효종 연간에 사마광의 《통감》, 《목록(目錄)》, 《거요력》과 호안국의 《통감거요보유》 4종의 책을 가지고 따로 의례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강목》을 대략적으로 완성했다고 밝히고 있다.[22]

중국 푸단대 석좌 교수인 거자오광(葛兆光, 갈조광)은 주자가 《통감강목》을 편찬하게 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주자는 호안국의 《통감거요보유》가 내용이 간략하면서도 사실이 구비되어 있어 매우 훌륭하지만, 사체(史體)의 핵심을 얻지는 못했다고 생각하였다. 둘째, 호안국의 아들인 호인(胡寅)이 편찬한 역사평론서 《독사관견》(讀史管見)에 대하여 주자는 모순되는 점이 자못 있다고 비평했다. 따라서 주자의 《강목》 편찬은 호안국과 호인 두 사람의 장점을 취하면서도 부족한 점을 보완한 것이며, 두 사람의 사업을 계승하여 두 사람이 발전시키지 못한 부분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견해는 바로 《통감》의 대체로서 《강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마광과 호안국이 만들려 했던 《통감거요》를 완성한 것이 《강목》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본디 사마광의 의도를 주자가 대신 해냈다는 것은 사실이며, 여기에 주자가 《통감》을 축약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역사체를 내세운 새로운 역사서를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주자 역시도 생전에 이 책의 완성을 보지 못했고, 앞서 언급했듯이 《강목》을 주자와 같이 편집하던 제자 조사연(趙師淵)이 번천서원(樊川書院)에서 이어 편찬을 완료하였다고 한다. 이거 때문에 장태렴(章太炎)같은 사람은
"《강목》은 《자치통감》을 모본으로 하는데, 회암(晦庵, 주자)이 몸소 지은 것이 아니고 그 제자 조사연이 지은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춘추》를 지으실 적에는 그 적을 것은 적으시고 뺄 것은 빼버리심에 자유(子游), 자하(子夏)의 무리가 감히 한마디 보탤 수가 없었다. 회암은 곧 제자가 지은 것에 이름만 의탁한 셈이다."

라고 까기까지 했다. 어쨌든 분량에 압도된 사람들은 이거라도 시도해보자.

이 역시 세종대왕의 애독서로 세종은 《강목》에도 훈의를 달아 《자치통감강목훈의》를 간행했다. 《강목》에 대해 세종이 생각한 것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이해하고 국가를 경영하는 기본 자료로서 경사(經史)의 완벽한 세트이다. 세종은 이것을 '체용'(體用)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내외'로도 표현하기도 했으며, 그 작용을 '박략'(博約)으로도 정의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완벽한 세트를 구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경서(經書)는 이미 명나라의 유서 《영락대전》의 수입과 간행으로 충족되었지만, 사서(史書)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내가 《통감》을 보니 제가의 주석이 맞는 것과 그른 것이 어지러이 섞여 있고, 자세한 것과 간략한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이것을 하나로 모아서 반드시 모든 역사에 박통(博通)하게 하려고 하였다."(《세종실록》 18년(1436) 4월 25일)

는 세종의 술회에서 드러난다.

그렇기에 세종은 《통감》과 《강목》에 모두 주목했다. 세종은 《강목》이 사마광 《통감》의 대체품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단순히 주자가 정통론 때문에 재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둘 다 모두 중요한 사서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진강도 함께했고, 간행도 모두 하였으며, 훈의의 작업도 둘 다 한 것이다. 세종은 《통감》과 《강목》의 훈의를 찬술하게 하면서
"무릇 학문의 방법은 경학(經學)을 근본으로 삼아, 참으로 마땅히 먼저 해야 하지만, 경학만을 공부하고 역사에 통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은 넓지 않을 것이다. 사학(史學)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강목》만 한 것이 없다. 지난번에 《통감훈의》를 찬술하였고, 또 이를 이어 《강목》까지 아울러 주해(註解)하여 후학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니, 너희들은 《강목》의 훈의에 힘을 쓰도록 하라."

라고 신하들에게 명하였다.(《세종실록》 18년(1436) 7월 29일)

세종은 《고려사》의 편찬에도 깊게 관여하였으며, 신하들과 경사(經史)의 관계와 그의 현실적 적용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 결과로 《통감》과 《강목》에 주목하였고, 기존의 주석서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특히 《영락대전》을 통해 안목이 높아지고 인식이 제고된 그로서는 그에 버금가는 역사 주석서의 집대성을 충분히 꿈꿀 만했다. 이전에 없었던 통사(通史)를 기획해 역사서로서의 뛰어난 완성도를 가진 사마광의 《통감》과 강목(綱目)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유교 이데올로기를 고도화시킨 주희의 《강목》은 사부(史部)의 《영락대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세종은 바로 그런 입장에서, 사정전훈의에 그것을 구현하려 한 것이다.

《통감》과 《강목》의 사정전훈의가 출현한 이후로 조선에서의 중국사 인식은 대체적으로 이 두 책을 통하여 형성되었으며, 이는 《통감》이나 《강목》이 조선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경연(經筵)의 과목에 꾸준히 등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성종영조는 이 두 사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서 이 두 책을 경연에서 가장 많이 진강(進講)했다. '진강'은 신하의 의견이 반영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결정은 결국 왕이 하는 것이므로 진강 과목은 대부분 왕의 기호에 따라 결정된다. 《실록》을 살펴보면 경연에서 《통감》의 진강 횟수가 《강목》의 진강 횟수에 비하여 매우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영조 같은 경우엔 《강목》보다 《통감》의 진강 횟수가 많지만, 중종이나 숙종 같은 경우에는 《통감》의 진강 기록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에 《통감》보다 《강목》이 훨씬 더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간행에서도 드러난다. 조선시대 《통감》의 간행과 유통 상황을 살펴본 연구에 의하면 《통감》은 주로 활자로 인행되었고, 목판본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필요에 따라 외국에서 수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달리 《강목》은 현존하는 목판본도 다수 있으며, 특히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목판본은 거의 훈의본 《강목》이라는 점에서 누차에 걸쳐 목판으로 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훈의본 《강목》의 판본은 중국본과는 달리 매우 도드라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강'(綱)의 글자가 매우 큰 것이다. 유의손은 훈의의 서문에서 글자가 작으면 나이 들어 보기 어려울까 봐 세종이 수양대군을 시켜서 큰 글자를 쓰게 하고, 그것을 모본(模本)으로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강'(綱)을 찍게 했다고 했다. 이를 보면 세종은 단순히 글자를 크게 해서 보기에 편하게 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보기에 편하게 하려 한다는 것은 '강'(綱)이나 '목'(目)보다는 훈의 부분에 방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강의 글자를 키우지 않는다면 훈의의 글자가 너무 작아지기 때문이다. 훈의는 주석이므로 당연히 주석의 대상인 목의 아래에 분주(分註)해야 하는데, 목의 글자가 작으면 분주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글자의 크기를 구성하다 보니, 본문인 강이 마치 제목이나 요약처럼 보이고, 목이 본문처럼 되었다. 즉 시각적으로 강이 매우 도드라지게 보여서, 중국본 《강목》과 비교할 때 강이 제목이나 요약의 구실을 하고 있으며, 나아가 강만 발췌하여 읽는 것도 편하게 되어있다.

실제로 《통감》을 읽어보면 글자의 크기가 동일하고 간지도 없으며, 간신히 연호로 구분할 수 있을 뿐인데, 그에 비해 《강목》은 연도에 따른 구분이 분명하고, 또 강만으로도 기사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 주희의 의도와 관계없이 가독성을 높인다. 따라서 조선에서 성리학이 심화되는 과정 속에서, 유교 이데올로기가 고도화된 《강목》의 수용성 역시 조선 지식인에게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결국 《강목》은 조선 지식인의 중국사 인식의 기본 토대가 되었다. 예컨데 주자가 《강목》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춘추필법을 통해 오리지널 《통감》의 무통론을 까면서 촉한정통론을 내세웠고, 결과적으로 주자학이 대세를 이룬 조선에서도 《강목》을 많이 접하면서 촉한에 동정적인 여론이 널리 퍼지는 결과가 나왔다.

《자치통감강목훈의》 보러가기

한편 청나라의 강희제는 《강목》을 비판하고, 강희 46년(1707) 송락(宋犖) 등에게 명령하여 사료를 거듭 새로 모아 편집한 것을 교각하여 《어비통감강목전서》(御批通鑑綱目全書)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는 총 190권. 그만큼 강희제의 학문 수준이 높고, 《통감》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서구권에 소개되기도 했는데, 청나라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소속의 프랑스 선교사인 조제프안마리 드 모이리아크 드 마이야가 1730년에 《자치통감강목》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23] 번역본은 1737년에 프랑스로 보내졌으나, 출간은 1777년에야 이루어졌다. 출판 당시 제목은 "Histoire générale de la Chine, ou Annales de cet Empire; traduit du Tong-kien-kang-mou par de Mailla, Paris, 1777-1783"(중국의 전체적 역사, 혹은 중국 제국의 연대기: 마이야가 번역한 통감강목, 파리, 1777-1783년)[24]이었으며, 1777년 12권으로 출판되었으며 1785년 1권을 추가로 발매하였다.

5.2. 《통감절요》

성백효 역본 《통감절요》 보러 가기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원 간섭기 때 유입된 《소미가숙 통감절요》(小微家熟通鑑節要), 약칭 《통감절요》(通鑑節要)가 조선 말기까지 더 많이 읽혔다. 이 책은 강씨의 가숙(家塾)에서만 전해지다가 주자(朱子)가 높이 평가하면서 알려졌다. 북송 휘종 때 사람인 강지(江贄)가[25] 집안 애들 전용 교재로 편집한 버전이었는데 편찬 자체는 주희의 《통감강목》보다 이전에 편찬되었지만 출간은 더 늦은 1237년에 간행되었다.

《통감절요》는 《자치통감》 294권의 내용을 절요하여 편집한 것이다. 〈주기〉 5권을 2권으로, 〈진기〉 3권을 1권으로, 〈한기〉 (漢紀) 60권과 〈위기〉 (魏紀) 10권을 22권으로, 〈진기〉 (晉紀)40권을 5권으로, 〈송기〉 16권과 〈제기〉 10권을 1권으로, 〈양기〉 22권을 1권으로, 〈진기〉 10권을 1권으로, 〈수기〉 8권을 1권으로, 〈당기〉 81권을 14권으로, 〈후량기〉 8권과 〈후한기〉 (後漢紀) 4권을 1권으로, 〈후주기〉 5권을 1권으로 줄여, 전체 50권 15책으로 추린 것이다. 이 중 〈한기〉 22권과 〈당기〉 14권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전•후한과 당 시기 위주로 엮어졌으며, 6조(六朝)와 5대에 있어서는 큰 사건 정도만 열거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강용(江鎔)의 <서문>에
"양한(兩漢)과 수·당에 있어서는 정화{精華, 정수가 될 만한 뛰어난 부분}가 다 구비되었고, 6조와 5대에 있어서는 본말(本末,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는 부분)이 모두 나와 있다."

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간행되었을 때는 이미 《강목》이 퍼진 뒤라 중국에서는 인지도가 형편없었다. 《통감절요》(通鑑節要)는 중국에서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판본이 나타났지만, 조선에서처럼 크게 유행하지는 못한 듯하다. 연경(燕京, 베이징)에 간 박차수(朴次修)가 서점가에서 《사략》(史略)과 《통감절요》(通鑑節要)를 찾아보았으나 볼 수 없었고, 그곳의 유명 선비들도 무슨 책인지 모른다 했다고 전했다. 그에 비해 유독 조선에서는 《통감》과 《강목》을 처박아두고, 이것만 읽는 선비들이 많아서 《통감》이라고 하면 《자치통감》 원본이나 《통감강목》보다 이 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통감절요》에 비판적인 조선 학자들은 《통감절요》는 완전하지 못한 책으로, 내용의 주객이 바뀌고 왕적(王賊)이 전도됨으로써 의리에 온당치 못하고, 기타 착오와 사실의 와전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논란할 필요조차 없다고 평가했다. 실학자 이덕무정약용은 원전을 놔두고 축약본에 매달리는 이런 세태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물론 이런 세태는 요새도 비슷하기는 매한가지지만.

조선시대 학자들은 '사서(史書)의 자세하고 간략함이 모두 구비된 것은 이 《통감절요》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칭찬했는데, 조선에서 《통감절요》의 유행은 당시 도덕사관을 위주로 한 주자의 정통론이 크게 유행한 관계로 《자치통감》보다 《통감강목》이 더 많이 읽힌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 즉, 조선시대에 와서 주자학이 절대적으로 숭봉됨에 따라 《자치통감》은 정통론에 어긋난다 하여 점차 소외되고, 대신 《통감절요》를 많이 읽게 되었다. 특히 주자를 절대 존숭하던 조선 중기 이후에는 교본적 차원 내지 역사 지식 습득의 차원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선비로서 이 책을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무장(武將)들에게도 병서의 일종으로 애독되었다. 이 책은 역대 사서의 편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여기에 실린 역대 인물들의 언행이나 고사는 공령문(功令文)의 제작은 물론, 일반 문장을 작성할 때도 필수적인 전거로 활용되었다.

다만 조선 후기에 《자치통감》 원본보다 《통감절요》가 더 널리 읽히게 되는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재정 문제였다. 이후 조선의 문물이 초토화되면서 그 방대한 분량의 원전 《자치통감》과 《강목》을 인쇄할 만한 재정이 뒷받침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강목》을 인쇄하는 데 소요된 종이의 양만 해도 959첩이라는 기사가 있는데, 16세기 기준 종이 한 첩이 20장이었으니 《강목》 한 질을 완간하는 데만 거의 2천 장이 소요된 셈이다. 물론 간행 과정에서 버려지는 양은 제외한 것이다. 편집본인 《강목》도 이 정도인데 전 294권이나 되는 원전 《통감》을 인쇄하는 데 드는 물자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거기에다가 책을 값싸게 구할 수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민간에서 《자치통감》을 발행한다해도 천석꾼, 만석꾼 소리 들을 정도로 집안이 부유하거나 정승, 판서 정도를 지낸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가 아닌 이상 《자치통감》 전권을 사는 것은 아무리 양반이라 해도 금전적인 부담이 너무도 컸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또 하나 《통감절요》가 널리 읽힌 이유로는 서당이나 가숙에서 아동이 한문의 문리를 터득하는 기초 교과서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 판 《성문종합영어》인 셈이다. 더구나 이런 경우 완질을 다 읽지 않고, 제7권 <양태부가의상소>(梁太傅賈誼上疏)까지만 읽히고, 이때 문리가 트이면 재능이 있다고 여겨 다른 책으로 들어가고, 여기까지 배우고도 문리가 트이지 못하면 가난한 집안 아이의 경우,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여겨 공부를 중단했다. 그리고 문리가 트여도 《통감절요》를 더 읽지 않고 다른 경서로 넘어갔다. 어차피 축약이 심해 제대로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더 읽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5.3. 《통감기사본말》

남송원추가 《자치통감》의 기사를 모아서 42권 분량으로 편집한 편집본. 사건 중심의 역사 서술체인 기사본말체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6. 한국어 완역본

교보문고에서 판매하는 《자치통감》 한국어본과 《사정전훈의 자치통감강목》을 비롯한 《자치통감》 관련 서적들
리디의 《자치통감》 한국어본 Ebook과 관련 서적들

워낙 분량이 어마어마하기에 전권을 읽기 어려웠으나 중앙대학교 권중달 교수가 무려 14년에 걸쳐 완역하여 출판했다.[26] 출판사가 힘들어져서 관둔 적도 있었으나 《자치통감》을 완역 출간하겠다는 열정이 엄청나서 끝내 자신의 사재와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 이후 받은 퇴직금을 털어 《자치통감》 하나만 출판하기 위한 출판사를 스스로 설립하고 2009년에 완간. 총 32권으로 삼화 출판사에서 출판 중이다. 총 32권의 정가가 90만 원에 육박하는 가격의 압박이 있으나 수십 년 노력과 집념이 깃든 완역본이라 그런지 권중달 교수 찬양글을 자주 볼 수 있다. eBook으로도 나왔다. 가격은 리디 세트가 58만 원. 단권을 다사면 82만 원. 전자책이 출간되면서 일부 전자 도서관에서 대여할 수 있으며, 앞으로 지원되는 도서관의 수를 늘려나갈 것이라고 한다. 지원된다면 이용해 보자.

다만 《통감》 원문만을 완역했다는 것이고, 호삼성이나 세종대왕이 달아놓은 주석까지 번역한 것은 아니라서 약간 아쉬움이 남는 편이다.[27] 그래도 원문만으로도 분량이 만만치 않은데 이를 홀로 완역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호삼성 주석은 권중달 교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분에만 조금씩 달려있다. 다만 가끔 번역이 아쉬운 부분이 있다. 삼국시대를 예로 들면 촉한의 재상 비의를 '불의'로 번역한다든가 주석에 습착치의 《한진춘추》를 《진한춘추》로 잘못 기재한다든가 하는 등. 2015년 10월에는 권중달 교수가 2009년 완간본을 보완한 《평설 자치통감》을 새로 출간하고 있다. 원문과 번역을 나란히 실어 바로 원문 대조가 가능하도록 하고[28], 역사 지도와 권 교수의 평설을 함께 실었다고 한다. 《평설 자치통감》의 경우, 한 권이 원본 한 권의 내용을 담고 있으니 다 출간하려면 294권이 나와야 한다. 2018년부터 증보판을 만들고 있다. 원문과 번역이 함께 실려있어 완성도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자치통감》의 요약본인 《통감절요》와 《강목》 역시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 중이다. 《통감절요》는 세 가지 완역본이 존재하는데, 2015년 충북대 김정화 교수가 번역한 충북대출판부 판본과 2006년 ~ 2010년 한학자인 성백효 선생이 번역한 전통문화연구회 판본, 1987년 고려대 철학과 김충렬 교수가 다른 다섯 명과 함께 공역한 삼성출판사 판본이 있다. 김정화 역본은 총 4권, 성백효 역본은 총 9권, 김충렬 역본은 총 3권이다.[29]

《통감강목》은 2015년부터 전통문화연구회를 통해 《사정전훈의 자치통감강목》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고 있는데, 2020년 4월 30일 시점에 19권까지 출판되었다. 1권, 2권은 성균관대 신승운 교수가 책임 번역자로 참여하였고, 3권 ~ 5권까지는 한학자 성백효 선생이 책임 번역으로 참여하였다.[30] 참고로 사정전은 경복궁의 편전으로 바로 세종대왕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주석이 달린 《강목》의 국역본이라는 뜻.

2019년 4월에 신동준 21세기 정경연구소 소장이 번역한 올재 클래식스 30차 세트(총 30권 계획 중 1차분 10권)가 출간되었다. 올재 사무국의 말로는 3차에 걸쳐서 전 294권을 새로 완역 출간한다고 한다.# 그러나 번역자로 나선 신동준 21세기 정경연구소장이 2019년 4월 25일 사망한 터라 향후 계획은 불투명해졌고, 결국 2019년 8월 12일 나머지 2/3 분량은 출간이 불가함을 공지했다.# 따라서 2020년까지 한국어로 완역된 《자치통감》 번역본은 권중달 교수의 번역본이 유일하다.

《사기》는 완독한 사람들이 꽤 있는 편이지만, 《자치통감》은 식자층 중에서도 완독한 사람이 많지 않은 편이다. 분량도 《사기》보다 훨씬 방대하고, 《사기》보다 번역 작업 및 대중화가 덜 된 측면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표준 중국어를 공부해서 현대 중국어로 된 《자치통감》을 읽는다면 못할 것도 없기는 하다. 중국 본토나 타이완,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에서 이렇게 읽는 경우가 대다수니까.

7. 다른 나라의 번역본

현재까지 확인된 다른 나라의 번역본은 일본에서 1932~1933년에 공개된 가토 시게루와 코다 렌타로의 완역본이다.1권 링크 《속 국역 한문대성 경자사부》라는 전집의 1~16권으로 존재하며, 책 뒤에 원문이 달려 있다. 일본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1995년 새로 인쇄본을 낼 때, 한국 서울의 어느 출판사에서 냈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서는 완역을 다시 시도한 사람이 없으며 축약본만 몇 개 있고, 베트남에서는 2017년에야 번역이 시작되어 2020년 현재 1, 2권이 베트남어로 번역되었다. 영어로는 《삼국지》에 관련되는 부분만 몇 번 번역이 시도된 적이 있다.

8. 기타

9. 외부 링크



[1] 원본과 호삼성 주석본은 모두 중국어 위키문고 출처이다. 호삼성 주석본의 경우 작은 글씨가 호삼성이 달아놓은 주석이다.[2] 타이완의 작가이자 반체제 인사였던 역사학자 백양(柏楊, 1920~2008)이 펴낸 판본으로 여기 링크된 PDF는 편의상 둘로 나뉜 것이지 실제론 하나의 판본이다. 원문 한문백화문을 병기하여 비교가 쉽도록 했다. 표준 중국어에 자신이 있다면 도전해보자. 정체자로 쓰여있기에 이에 익숙한 한국 독자들이 한자를 읽기에 좋고 내용을 긁어가 복사할 수도 있는 장점이 있다.[3] 《자치통감》에 주석을 달아 《자치통감음주》(資治通鑒音注)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4] 권중달 교수도 《자치통감》이란 이름을 하사한 황제는 송 신종이라고 설명한다.#[5] 단 연호만 위나라의 것을 썼을 뿐, 세 나라 가운데 누구도 정통은 아니라고 했다. 촉한도 원래의 국명인 한(漢)으로 표기한다.[6] 이 역시 사마씨의 진나라 시기, 화북에 수많은 강대국들이 난립했으므로 진나라 연호를 기준으로 했다. 《자치통감》은 수나라의 중국 통일때까지 남조의 연호로 표기했다.[7] <송기>~<진기>까지 표제 및 연호는 남북조시대 중 남조의 것을 따랐다.[8] 또한 자치통감이 편찬되었을 당시에 후대의 300년 통일제국인 명나라와 청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북송도 남송과 합쳐서 300년 제국이라지만, 송 건국 100년도 되지 않았을 때라는걸 감안해야 한다.[9] 춘추시대 주요 제후국이었던 진(晉)조(趙), 위(魏), 한(韓)으로 분열된 해로, 이 사건은 주나라 희성 왕족의 분봉에 의해서 만들어진 국제 세계 질서가, 지방 영주나 다름없는 제후들의 휘하 군사력들간의 내전이 발발하여 분열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는 주나라 희성 왕족 중심의 봉건제를 명목적으로나마 지키는 것이 패자의 조건이자 국제질서의 근간이었던 춘추시대와 그런 세계 질서가 모두 무너져 내리고, 각 강대국들이 격렬하게 전쟁을 벌이는 전국시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역사적•전쟁사적 구분점이 된다.[10] 이는 태조 조광윤이 남긴 송나라의 통치 기조인 <석각유훈> 때문이기도 하다. 송 태조는 이를 통해 사대부를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유훈을 후대 황제들에게 지시하고 붕어했다. 그리고 이러한 풍조는 고려에도 영향을 미쳐 고려 인종은 김부식을 은퇴시키고자 할 때 그의 세력들을 마구잡이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삼국시대의 역사를 편찬하라는 칙령을 내려 삼국사기 편찬에 전념하도록 유도하는 식으로 그가 영예롭게 정계에서 물러날 수 있게 했다.[11] 특히 남북조 파트의 완성도가 대단해서 사마광 본인이 "나는 이걸 그냥 받기만 하면 되겠는걸." 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12] 특히 수•당 부분은 《신당서》 이후 새로 수집한 자료도 써서 사서의 정밀도가 높아졌다.[13] 그러나 이런 평가는 《자치통감》이 나온 이후부터 종종 있어왔던 듯 하다. 당장 주자부터가 촉한을 정통으로 내세우면서 《강목》을 지었고, 조선의 성대중이라는 학자는 사마광을 비판하며 위•진을 정통으로 내세웠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현대에도 미야자키 이치사다 같은 권위자마저 《중국중세사》에서 '위를 정통으로 하여 기술했다'라고 적어놨을 정도다. 심지어 사마부가 사마광의 조상이니 위•진에 곡필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의 시선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예컨데 위나라의 입장에서 촉한이나 동오의 침입을 침구(침탈)라고 적었다던가. 위나라의 군주는 황제로 적고, 촉한과 오나라의 군주는 각각 한주, 오주로 적는다던지...그러나 이는 오해로, 25사의 선구주자인 사마천의 《사기》도, 삼국시대 매니아들이 흔히 보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도 갖고 있는 한계다.[14] 만약 사마광이 조상의 영향을 받아 위진정통론 신봉자였다면, 그 전신인 조조의 황위 찬탈 과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사마씨의 황위 찬탈 과정을 어떻게 해서든지 미화했을 것이다.[15] 마침 《자치통감》은 《삼국지》와 달리 편년체라서 끊김없이 읽기에 편한 것도 한 몫한다. 어디까지나 삼국지와 비교하면 읽기 편하다는 거고, 한 번 읽어보면 만만찮게 어렵다.[16] 이는 두 사람의 사서 서술 당시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경우엔 혼자서 중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전해지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선택하여 서술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마광은 유서와 범조우를 비롯한 최고의 학자들과 함께 조정의 지원을 받아 많은 사료들을 수집하여 고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7] 천하위공이라는 4자로도 알려졌다. 20세기 초에 중국의 군주정을 종식시키고, 공화정을 출범시킨 쑨원의 좌우명이 되기도 했다.[18] 아닌 게 아니라 이 사람은 한족의 남송 왕조가 몽골족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던 그 엄청난 시대의 풍파를 목도했던 사람이다. 또한 문천상(文天祥)이나 육수부(陸秀夫)는 호삼성과는 진사과 급제 동기였다.[19] 강목체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할 때 강과 목을 구분하여 기록한다. 은 기사의 큰 줄거리를 요약한 것이고, 은 기사의 세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편년체와 동일한 체제이지만 목을 통해 세부 내용을 정리 및 구성함으로써 편년체 특유의 단점인 전체 사건의 일관적인 파악이 어렵다는 점을 보완할 수 있다.[20] 애초에 강목체라는 역사 서술 방식이 중국 본국에서조차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데, 역사가의 주관이 지나치게 개입되고 기록의 원문이 역사를 집필하는 사람에 의해 임의로 깎이거나 바뀌거나 하다가 원래 뜻이 바뀌기도 한다는 단점이 있어서다. 당대의 실록 및 관련 기록을 거의 복붙해 짜맞추다시피 한 《구당서》가 후대에 문장면에서 다듬어지기는 했지만 원문을 여러 가지로 첨삭했다고 알려진 《신당서》보다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이유이다.[21] 송나라의 학자, 생몰연도 불명. 자는 경도(耕道),호는 정일(靖逸) 역사학을 더욱 즐겨 신동으로 칭해졌으며 학문은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 섭적(葉適, 1150~1223)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조정의 소관(小官)을 역임했는데 남송의 고종, 효종, 광종, 영종의 4조 일화를 기술한 《사조문견록》(四朝聞見錄)을 통해 신약(莘約)이 남송 가정{嘉定, 중국 남송의 제 4대 황제인 영종이 사용한 네 번째 연호(1208~1224)} 연간의 사람임을 판명했다. 시집으로는 《정일소집》(靖逸小集)이 있으며 역사책으로는 《통감강목발명》(通鑑綱目發明) 59권이 있다.[22] 그러나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주자가 사마광의 《통감》와 호안국의 《통감거요보유》를 바탕으로 두 가지를 절충하여 《강목》을 만들었다고 했다.[23] 정확히는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을 통해 구한 만주어 번역본을 중역했다.[24] '통감강목'을 '통키엔캉무'로 음차하였다. 현대 중국어 기준으로는 통지안강무(tōngjiàngāngmù)이며, '지안'을 '키엔'으로 음차한 등 근고한어 발음이 드러난다.[25] '소미'는 강지의 호다.[26] 권중달 교수의 인터뷰에 의하면《자치통감》에 관심을 갖고 출판하기 전까지 번역하기 위한 작업 기간까지 합치면 40년 세월을 《자치통감》과 함께했다고 한다. 진정한 '의지의 한국인'. 참고로 원저자인 사마광의 집필 기간은 19년이고, 권중달의 번역 기간은 14년이다.[27] 안타깝게도 중국 역사서를 번역할 때 주석이 홀대받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처지가 가장 나은 《사기》만 봐도 번역자들이 삼가주를 날려 먹어서 그 주석들에 반영된 여러 사료 비판, 인용 자료, 주석자의 부연 설명들에 대해서는 번역서를 읽는 사람이 알 길이 없게 된다. 그 다음으로 사정이 괜찮은 《정사 삼국지》는 역자가 배송지주에 대해 아예 대놓고 좋지 않은 소리를 했었다.[28] 단순히 《자치통감》 원문만 실은 것이 아니라, 《강목》과 《통감절요》의 원문도 실어 놓았다.[29] 전통문화연구회에서는 1995년, 한학자 김도련 선생이 번역하여 《통감절요》 1권을 출간한 적이 있다. 아마 완역을 목표로 하였던 것 같지만 아쉽게도 후속 출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2년 김도련 선생이 타계하면서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김도련 선생이 아세아문화사를 통해서 《통감절요》의 전통 방식으로 한문 주석(두주)을 달았던 적이 있었던 만큼 《통감절요》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던 것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다. 이 외에도 완역은 아니지만, 1996년 홍신문화사에서 출간된 조수익 번역의 《신역통감》이 있는데, 일부만 번역한 것이다.[30] 공동 번역자도 있는데 교체가 많은지라 주석에 달아두었다. 1권 ~ 3권은 서정문, 4권은 이종덕, 윤은숙, 5권은 이난수, 윤은숙 등이다. 6권은 이종덕, 윤은숙, 7권은 윤은숙, 이목용, 8권과 9권은 윤은숙이 맡았고, 10권은 이목용이 맡았다.[31] 마오쩌둥은 카를 마르크스의 원전을 상대적으로 적게 읽은 편이었고 레닌의 저서를 훨씬 많이 읽었다. 공산당 초기 시절 동료인 보구로부터 책을 빌려 읽었지만, 보구는 그가 농촌 출신임을 들어 시골 촌놈이 마르크스 서적을 읽어 뭐 알겠냐고 뒤에서 비웃었다고 한다.[32] 한문은 2천여 년 전 중국어 문어체(상고한어)를 바탕으로 한 서면어인지라 시간이 갈수록 구어체 중국어(백화문)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이 때문에 현대 구어체 중국어를 바탕으로 한 표준 중국어와는 문법과 어법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한자를 사용한단들 현대 중국인들이 고전 한문을 읽기 위해서는 별도의 학습이 필요하다. 한국으로 친다면 같은 한글로 쓰였어도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관동별곡>, <사미인곡>과 같은 조선 초중기의 한글서적이나 한글문서, 한글작품을 원문 그대로 읽기 위해서 별도의 학습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렇게 한문 원본을 봤다는 것도 20세기 중반까지 일이다. 현대어로도 번역되었고, 만화로도 나왔기 때문에 중국과 타이완, 홍콩, 마카오에서도 전문가나 한문에 능통한 사람이 아닌 이상 일반인들은 현대어 버전으로 읽는 경우가 대다수이기는 하다. 한국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을 한문 원본 그대로 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는것과 비슷하다.[33] 한숙창은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아버지기이기도 한 좌의정 한확(1403~1456)의 증손자이다. 한확은 세조의 집권을 도와 정난공신과 좌익공신 1등에 책봉되기도 했다. 또 선조 대 영의정을 지낸 홍섬은 한숙창의 장남인 참판 한자의 사위다. 인장에 나오는 '희경'과 '퇴지'는 각각 한숙창과 홍섬의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