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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曹魏正統論중원에서 220년에 후한의 선양을 받은 조비가 건국한 위나라가 중국 역사에 있어서 왕조 계보의 정통이라는 주장. 무력을 동원한 강압에 의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조비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정식적으로 선양받고 위나라를 건국하였으며 삼국이 위나라의 선양을 받고 건국된 통일 왕조 서진에게 통일되었기 때문에 '후한→ 위→ 서진'으로 이어지는 계승 라인이 정통 왕조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촉한정통론적인 관점에서의 삼국지의 주인공이 "유비→ 제갈량→ 강유"로 이어진다면 조위정통론적인 관점에서 삼국지의 주인공은 조조 → 사마의와 그 아들들"이라고 볼 수 있다.
흔히들 조위의 성립 기반을 마련한 조조가 개혁가라는 현대적인 시각[1] 하에 '새로운 중화를 개척하는 데에 의의를 둔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조위정통론이라는 건 오히려 그 반대로 조위가 '옛날의 정통 왕조를 고스란히 계승한' 왕조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의의를 둔다고 할 수 있는 정통론이다.[2] 사실 전한·현한·후한·촉한은 황족이 한고제와 그 부계 후손 유씨라는 공통점뿐이며 서양 기준으로는 카페 왕조와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처럼 다른 왕조로 구분할 만큼 엄청나게 먼 계통에 해당한다.[3] 삼국지연의에서는 헌제가 유비를 자신의 종친(황숙)으로 여기고 엄청나게 지지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러한 가설은 사실일지 몰라도 신빙성 있는 역사서로는 전해지지 않는다. 실제로 유비는 헌제가 조비에게 선양 후 실제로는 234년까지 살아 있었는데도, 선양 직후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까지 이용해가면서 스스로 촉한을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다.[4]
조위정통론에서 한나라는 헌제가 조비에게 선양하여 위나라가 건국된 시점인 220년에 멸망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역대 왕조에서 조위정통론이 강조될 때는 해당 왕조가 선양의 정통성을 중시할 때 일어난다.
2. 형성
이것은 위나라의 초대 황제인 조비가 한나라 황제인 헌제에게 선양을 받고 위나라를 건국하였기에, 한나라의 정통성이 위나라로 이어진다는 논리에서 형성된 것이다. 더군다나 정사 삼국지가 쓰여진 시기가 바로 진나라 치하였는데, 이 진나라는 초대 황제인 사마염이 위나라의 황제인 조환에게 선양을 받아 건국되었기 때문에 진나라 황실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서라도 조위정통론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대표적으로 이 입장을 내세우는 사서가 바로 서진의 역사가 진수가 쓴 사서 정사 삼국지라고 할 수 있다. 정사 삼국지는 조위를 정통 계승자로 보고, 위의 황제만을 천자로 지칭하고 있으며, 촉한의 유비와 유선은 '선주'와 '후주'로 지칭하여 임금의 휘를 쓰지 않고 이들의 승하도 황제나 제후에 준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오의 황제들은 아예 사서에서 내내 이름으로만 지칭하고 있다. 또한 위서의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면 알겠지만 정사 삼국지에서 정통으로 보는 것은 조위고 촉한은 조위만은 못해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부여받으며 손오에 대해선 별 달리 존중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것은 이 사서가 쓰여진 것이 위를 계승한 진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문제로 진수가 대놓고 조위의 정통성을 부정한 촉한의 황제들을 이 정도까지 대우한 것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보일 정도이다.[5]
3. 서진 멸망 이후 조위정통론의 부정
이렇게 후한-조위-서진에 의한 선양에도 불구하고 조위정통론은 조위가 망한지 불과 백 년도 지나지 않아 유교적 명분론 차원에서든 정치적 이해득실의 측면에서든 본격적으로 부정되거나 도전받는 위치에 서게 된다.3.1. 북조
우선 북조의 상황을 보자. 서진은 중국 역대 통일 왕조 가운데 단연 최악의 국가였다. 지배층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했고 암군들이 연이어 등장했으며, 종친들에게 지나친 권한을 부여한 주제에 중앙정부가 그걸 통제할 생각은 커녕 권력 싸움에 이용해 팔왕의 난이 발발하는 등 후한 말부터 백성들에게 힘겨웠던 나라 꼴은 완전히 개판이 되어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이런 총체적 난국 상황에 결국 서진은 외적을 방어할 군사적인 역량마저 모조리 상실하고야 만다.[6] 문제는 후한 말엽부터 조위-서진을 거쳐 중국으로 이주 혹은 잡혀온 수많은 이민족들이 이들 체제 하에서 하층민 내지는 한족에게 멸시당하는 처지[7][8]에 있는 준노예 상태였기에[9] 서진 체제를 매우 증오하고 있었고 독발수기능의 난 등 국초부터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불만이 가득했던 이민족들이 팔왕의 난으로 인해 한족들이 별 거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들고 일어나 결국 오호로 대표되는 이민족들에 의해 서진이 멸망하는 사태가 바로 영가의 난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기록들을 보면 조위-서진으로부터 억압받아온 이민족들은 이들 왕조들에 대한 엄청난 증오심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장 낙양이나 장안 등 서진의 옛 중심부를 장악한 이민족들은 과거 자신들을 억압한 서진의 도읍 낙양을 철저히 파괴하고 서진의 황릉을 도굴했으며 지배층인 황족들이나 귀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능욕하고 노예로 삼았다.
예를 들어 서진의 태위 왕연은 낙양에서 서진의 왕족들과 고위급 관리들을 데리고 도주하다가 석륵에게 붙잡혔는데, 석륵이 왕연에게 당신들의 진나라가 어쩌다 이렇게 폭망했냐고 질책했다. 그러자 왕연은 황실의 내분이 일어나서 그랬다며 서진이 실패한 이유를 전적으로 자신이 봉직한 사마씨 황실에다가만 전가하고 신하인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또 자신은 원래 젊어서 관직을 가질 생각이나 세상 일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서 석륵에게 황위에 오르라고 권유하며 자신도 그에 협조하겠다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자 석륵이 왕연에게 당신은 젊어서 서진 조정에 출사해 그 이름이 사해를 덮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 아니냐면서 그런데도 관직을 가질 생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냐며 힐책했다. 또 천하를 망친 것이 당신 같은 서진의 고위 관료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냐[10]면서 왕연과 그를 따르던 서진의 왕족들과 고위급 신하들을 모조리 죽였다.
또 전조의 유총은 사마치를 사로잡고 그에게 푸른 옷을 입히고 고급 포도주를 관리들에게 접대하도록 했다. 원래 푸른 옷은 평민이나 노비들이 입는 옷이었는데 이때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한 서진의 신하들이 통곡하자 그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사마치도 죽인다. 이민족들 입장에선 과거 서진의 지배층들은 그야말로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은 존재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진, 그리고 그 전신인 조위가 증오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일각에서 주장되는 바와 같이 후대에 촉한정통론이 성행한 이유가 조위와 서진이 정치를 잘못한 탓으로 인해 후대에 확산되었다는 설 자체는 분명 확대 해석이다. 후술하겠지만 후대의 촉한정통론은 후대 민중들의 촉한에 대한 지지와 유교적 대의명분론, 정치적인 면이 결합된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 이민족 왕조들이 조위와 서진을 부정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로 이 때문에 조위정통론이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당장 서진을 무너뜨린 전조의 초대 황제 유연은 비록 흉노족 출신이지만 서진에 대항하고 한족 인민들의 통치하기 위해 스스로를 한나라 유씨의 뒤를 이었다는 명분을 들고 일어났으며 그 전까지의 한나라 황제들을 높이고 촉한의 개창자 유비에게 열조(烈祖)라는 묘호를 바쳐 전한의 개창자 한고제, 후한의 개창자 광무제와 동열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촉한의 마지막 황제 유선을 촉한이 아니라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로서 보아 효회황제라는 시호를 올린다. 즉 흉노족인 유연은 조위가 아닌 촉한을 후한의 계승자로 본 것이다. 그리고 전조의 뒤를 이은 후조의 황제 갈족 출신의 석륵은 서진의 병폐와 사회모순을 온몸으로 겪은 밑바닥 노예 출신인터라 당연히 조위-서진에 좋은 감정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칭송하는 신하들을 앞에 두고 한나라의 시조 한고제와 후한의 개창제 광무제를 추켜세워주면서 자신은 광무제와 동급 정도는 될지 모르겠지만 한고제와 같은 위대한 인물만은 못하다고 자평하면서 조위와 서진의 창업 기반을 마련한 조조와 사마의 따위는 이런 영웅들에게 절대 비할 수 없다며 그들을 단순히 간악한 방식으로 천하를 강탈한 역적에 불과하다고 대놓고 평가절하해 버렸다. 또한 사천의 저족 출신의 이특이 세운 성한 역시 스스로 한나라로 국호를 바꿔 자신들이 촉한의 계승 왕조임을 자칭했다. 나라 이름을 바꾸기 전에도 촉한 출신의 범장생을 승상으로 등용하고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를 세우는 등 촉한의 민심을 사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화북을 통일했던 저족계 전진의 명군 부견과 그의 명재상 한족 출신 왕맹의 관계를 두고 당대에 이미 촉한의 개창자 유비와 명재상 제갈량과 같은 이상적인 군신 관계라고 평가가 정립됐던 걸 보면 당대 화북을 장악했던 이민족들의 인식에서 조위-서진 정권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들의 인심이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물론 조위에게 조공을 바쳤단 명분하에 북위[11]처럼 조위의 계승성 및 조위정통성을 떠받든 북조 왕조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후한-조위-서진으로 이어지는 연결성을 대놓고 거부하거나 비웃는 이런 이민족 리더들의 반응을 보면 조위정통론이 서진의 멸망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2. 남조
한편 서진이 멸망하고 사마씨는 건강으로 이주해 동진을 새로 세우지만 황제의 권위는 이미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심지어 동진의 중종 사마예는 통치 과정에서 왕도의 도움을 많이 받아 옥좌에 같이 앉자고 제안한 적도 있어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공유한다(王與馬 共天下. 심지어 사마씨보다 왕씨가 앞에 쓰여있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군권은 이미 각지의 군벌이나 호족들이 나누어 가진 상태에서 황권은 약하고 서진 멸망 이후 북쪽에서 도주한 명문귀족들이 사실상 정치를 좌지우지하였으며 동진의 황제들 역시 일찍 요절하거나 혼군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이런 상황에서 연이은 북벌에서 뛰어난 군사적 실적으로 추락한 한족의 명예를 드높힌 동진의 명장이자 권신인 환온은,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실적으로 새왕조의 개창 기반을 마련한 조조와 사마의와 마찬가지로 대놓고 사마씨의 왕조를 찬탈하고 자신이 황제에 오를 것을 적극적으로 도모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론의 형태로 촉한정통론의 입장을 최초로 개진한 습착치의 《한진춘추(漢晉春秋)》가 나왔다. 《한진춘추》는 후한 광무제로부터 서진 민제까지의 역사가 저술된 역사서이다. 《한진춘추》의 핵심 논리는 삼국시대 때 조위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협박하여 거짓 선양을 받은 역신 조비가 건국한 나라이므로 사마염이 조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나라를 건국한 것 역시 정통성에서 유효하지 못하며, 오히려 사마소가 촉한을 평정함에 따라 한이 완전히 멸망했고 그걸 이어받은 진나라가 흥했다고 평가하여 하늘의 뜻은 세력이 있다고 권위를 강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책의 이름도 한나라와 진나라의 역사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한진춘추》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동진의 신하 습착치는 권신 환온의 찬탈을 막기 위해 그 당시 기존의 주류 입장인 조위정통론을 부정하고, 민중 사이에선 긍정적으로 보였을지언정 지배층에선 명백히 비주류 이론이었던 촉한정통론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단순히 생각해보면 동진은 조위의 계승자 서진의 후신이다. 따라서 후한-조위-서진-동진이라는 연결고리를 정통으로 보는 기존의 주류 정통론인 조위정통론의 논리를 그냥 답습하고 이론적으로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동진을 찬탈하려는 환온은 이러한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천인공노할 역적이라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도출된다. 이런 단순명쾌한 논리를 놔두고 습착치는 왜 후한과 진나라 사이로 다른 나라인 촉한을 끌어와 기존에 주류로 취급되던 계보를 비틀어버리는 복잡한 논리적 곡예를 시도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조씨와 사마씨의 왕업이 너무나도 부도덕하고 탈법적인 과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마씨는 조위에게 선양을 받는 과정에서 황제를 멋대로 폐위시키고 현위 황제가 백주대낮에 정권의 수하에 의해 시해당했다는 충공깽의 사태를 일으켰다. 한마디로 시작부터 정권의 명분, 이미지나 정통성은 그야말로 시궁창으로 처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조위 역시 실상 말이 선양이지 후한 황실을 겁박하고 후한의 충신들을 도륙하여 반대 세력을 없애고 그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12][13]
본래 군웅할거 시기 최고의 실력자인 원소 산하의 그저그런 군벌에 불과했던 조조는 순욱이 제안한 협천자 이념을 등에 업고 후한 황실을 보위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헌제 황실을 동탁의 괴뢰로 규정한 원소를 꺾고 패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말기의 조조는 협천자로 후한 황실을 되살리려 한 순욱을 숙청하고 위공·위왕에 연달아 오르면서 자신을 있게 해준 협천자 논리를 사실상 스스로 부정해버렸고 후한 황실은 조조에게 망한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14] 사마씨는 아예 백주대낮에 황제를 죽였다.[15] 전대의 왕조들이 보여준 것들이 이런 상황인데 사마씨의 위상과 세력이 땅에 떨어진 이 상황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한족의 자존심을 세워준 능력자 환온이 새 왕조를 개창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외려 환온은 보는 관점에 따라선 조조와 사마의 이상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민족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조조나 사마의는 어디까지나 한족 내부의 분열기 때 군공을 쌓은 케이스지만 환온은 한족을 핍박한 외부의 이민족을 상대로 군공을 올린 케이스라 훨씬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습착치는 사마씨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새로운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제로는 조위와 서진 둘 다 개판이었지만, 저술에서 조위는 개판이 맞다고 기록하고 서진은 개판이 아니라 정통성 있는 국가라고 띄워 주었다. 조조는 백성들과 한실을 겁박했던 간적이라는 명분으로 협천자 논리를 부정했다. 결국 한나라가 멸망당하고 조위가 건국되자, 그 옛날 한고조·광무제처럼 유비를 중심으로 역적들과 난신적자들을 토벌해 한실을 부흥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새롭게 일신된 제3의 한나라[16]인 촉한이야말로 진정한 한나라의 정통인데, 사마씨가 이를 정복해 정통 한나라의 권위가 진나라로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촉한을 멸망시킨 사마소는 이런 명분으로 진왕 작위를 받아 봉국으로 기반을 다졌으며 사마염은 이 진왕의 자리를 이어받고 선양받아 황제가 되어 서진을 건국한다. 즉 촉한이 멸망하고 2년 뒤에 그 정통성을 흡수해 서진이 세워졌다는 것이다.[17][18]
그 과정에서 조위는 당연히 촉한의 주장대로 후한 황실을 찬탈한 역적이 되기 때문에 조위의 정당성과 정통성은 부정된다. 적어도 후한 황제의 목숨은 살려줬던 조위와는 달리 사마씨가 조위 황실을 겁박하고, 심지어 황제를 백주대낮에 비명횡사하게 만들었다 해도 그것은 애초에 조위 자체가 제대로 된 정통이 아닌 이단이고 역적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얘기다. 즉 촉한을 흡수해 정통성이라는 바통을 이어받은 서진 황실이 정통성이 결여된 조위 황실을 핍박한 것이기 때문에 황제가 시해당했든 어쨌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논리인 것이다.[19] 결국 애초에 조위나 서진이 제대로 된 대의명분이나 정당성·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거나, 혹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천하를 올바르게 통치해서 중원을 온전히 보존했다면 이런 논리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제 발등 찍는 격인 조위정통론의 부정은 조위-서진 정권의 자업자득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20]
이런 면에서 환온의 찬탈을 막기 위해서 노력한 동진의 재상인 사안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사안은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은 환온에게 그런 불온한 야심을 접고 동진의 신하로 남아달라는 부탁을 하며 "제갈무후가 되어 달라"고 말한다. 조위와 서진, 동진에도 많은 신하들이 있었을 텐데 사안은 왜 오래 전에 사라진 촉한의 재상인 제갈공명을 굳이 범례로 들 수밖에 없었을까? 조위의 공신들은 후한 황실을 버리고 권신 조씨를 따라 위나라를 세웠고 그들의 자손은 조위 사직이 위태로워지자 바로 조위를 버리고 권신 사마씨에게 협력해 서진의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나라 꼴이 어떻게 되던 말던 흥청망청 황음무도를 달리다 중화의 중심지인 화북을 이민족에게 빼앗기고 강남으로 달아나기에 급급했고, 강남으로 처박히고서도 끝까지 정신을 못 차렸다.
반면 제갈공명은 선황제가 황제가 되어도 상관 없다는 유조까지 내렸고 막대한 권한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멸사봉공하여 한실부흥이라는 대의명분을 지키고 사직과 유씨 황실의 권위를 살리고 한황실을 복권시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한 인물이었다. 또한 제갈공명의 아들과 손자는 끝까지 촉한의 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또 그의 후계자(장완, 비의, 동윤, 강유)들은 모두 촉한이라는 국가를 위해 진력하다가 힘이 다해 스러질망정 촉한이라는 국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흥시키고자 했다.
한마디로 조위-서진(그리고 동진) 사직엔 능력이 있고 권력을 가졌을 망정, 나라와 백성·사직에 정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세를 가진 모범적인 신하의 사례로 다른 나라의 명신을 내세워야 할 정도로 거론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얘기다. 물론 동시대 전진의 명재상인 왕맹을 두고 촉한의 제갈량과 같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제갈량이란 인물이 삼국시대가 끝난 이 시대쯤 오면 나라와 나라 사이를 초월해 과거의 위대한 인물로서 평가가 정립됐기 때문이다.
결국 동진은 환온의 아들 환현에 의해서 사실상 멸망하고 송무제 유유에 의해 그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찬탈당하고 만다. 송무제는 자신을 한나라 황족인 초원왕 유교(劉交)[21]의 후예로 칭하면서 촉한정통론을 떠받들었으며 이후 남조의 역사가들은 더 이상 굳이 조위정통론을 내세울 이유도 없어졌고 그에 따른 조위-서진에 대한 미화를 할 이유가 없어졌다. 배송지는 황제의 명을 받아 정사 삼국지에 여러가지 다른 시각을 가진 사서들을 주석으로 달아 진수가 조씨와 사마씨를 위해 숨기거나 미화한 부분, 사서들의 잘못된 부분들을 비판했으며 습착치의 사론을 주석으로 달아 조위와 서진이 부정하려고 했던 촉한이라는 국가의 대의명분에 대해 다시 평가했다. 또 청나라의 고증학자 조익이 그의 저서 22사차기에서 지적했듯이 이보다 좀 더 후에 지어진 범엽의 후한서는 정사 삼국지가 미화하거나 얼버무리거나 숨기려 한 조조의 여러 행적들을 노골적으로 가감 없이 드러내 조조의 행동이 정권찬탈을 위한 목적이었음을 확실하게 기술하고 있다.
통일 제국이었던 서진이 북조에게 수도를 비롯한 주요 지역을 빼앗기고 멸망했고, 서진의 방계 황족이 간신히 남쪽으로 도망쳐 동진을 세우고 진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수도를 먹었으니 정통이라는 주장이 포함된 조위정통론을 인정해 버리면, 구 서진의 중심지역을 장악한 북조에 정통성이 있다고 해도 할 말 없어지는 상황이 되는지라 남조 입장에서는 조위정통론을 내세우기가 곤란했다.
4. 남북조 시대 이후
이런 중국의 오랜 혼란기를 끝낸 당나라 시기에 조위·서진의 창업 기반을 마련한 조조와 사마의에 대한 평가는 더욱 낮아진다. 당태종은 사마의를 두고 '선제의 탁고를 받은 주제에 그 흙이 마르기도 전에 나라를 들어 엎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데 제대로 된 충신이 맞긴 하느냐?' 고 신랄하게 까버렸고 그것이 당나라가 편찬한 정사서인 진서에 남았다. 즉, 사마씨의 서진왕조 역시 제대로 된 왕조는 아니라는 식으로 냉소적인 평가가 남아버린 것이다.반면 이 시기 이후 촉한에 대한 각종 야사나 전설들은 끝임없이 민중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서민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송나라 시기에 가면 이것이 중국 민중들 여론의 대세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탄생된 것이 바로 삼국지평화 같은 촉한 중심의 문학들이다. 이 시기 역사가들의 입장도 처음엔 '조위가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서진으로 이어졌으니 정통이 아니겠느냐'는 논리에서[22]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주장하는바와 같이 '천하를 다 온전히 아우르지도 못했는데 조위가 어째서 정통이 될 수 있느냐?'라는 무정통론으로 변했으며 남송의 학자 주자는 아예 유교적 관점에서 '조위는 제대로 된 명분이 없는 역적이 찬탈하여 건국된 왕조인데 어째서 정통인가?' 라며 촉한정통론을 긍정해버렸다. 이후 주자의 영향을 받은 후대 학자들과 사가들이 이를 따르면서 조위에 대한 평가는 자연스레 박해질 수 밖에 없었다.[23]
전근대 중국은 유교적 역사관에 입각하였기에 사회 상층부에서는 조위정통론과 촉한정통론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촉한정통론이 정론으로 정착하는 듯하였으며 여전히 민간에서는 촉한정통론이 절대적으로 우세였다.
결국 이렇게 부정적인 평가가 시대를 거지면서 계속 쌓이고 쌓인 것으로 인해 중국 민중뿐만 아니라 지배층 및 사회 상층부에 해당하는 정치인이나 학자들조차도 조위의 정통성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보게 된 것이다. 민중은 민중 나름대로 조위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상류층의 여론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서 조위정통론은 크게 후퇴하게 되어 촉한정통론이 확고해지게 되었고 결국 후일 동아시아 사회에서 유교정치가 무너지고 근대화에 들어서게 될 때까지 조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주류가 되었던 것이다.
5. 현대
현 역사학계에서는 사실 더 이상 '유교적 정통론' 에 기초해 어느 왕조가 '정통'이라고 볼 필요가 없으므로 정통론 논쟁은 사실상 필요가 사라졌다. 다만 당시 조위가 중국의 중심인 화북과 영토와 인구 차지하고 있었고, 서진의 초대 황제 사마염이 조위의 조씨황제에게 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한 그 뒤로도 이를 서진의 정통성으로 삼은 역사와 조위의 국가시스템, 인적 기반을 모두 물려받은 사실에 따라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국가로 조위를 삼는다. 당장 중국사에서 한과 수 사이에 위치하였던 분열기를 두고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하지, '촉(한)-진-남·북조 시대'라고 하지 않는다.다만 과거와 달리 위나라가 서진의 정통성을 물려준 것이 긍정적으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서진은 객관적으로 50년 단명에 부패 내부분열 막장인 사회분위기 등 건국 이후 망할 때까지 파탄국가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 원인이 조위의 구조적 문제를 물려받은 것이라고 원인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서진과 이후 중국의 파탄 원인이 조위에게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촉과 달리 위나라의 이민족 정책은 매우 가혹했는데 그 결과 서진이 흔들릴 때 이민족들이 들고 일어나 서진을 멸망시켜버리고 중국을 과거 전국시대만큼이나 오랜 내전으로 이끈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본디 민간정서에 부합하는 촉한정통론도 마냥 억누르지는 않지만, 화북지역에서 질서를 바로잡고 결국 삼국통일을 가져온 조위-서진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1] 20세기 후반부에 유행한 소위 재평가로 인한 시각이라고 볼 수 있으나 21세기 들어선 이런 시각에 반기를 드는 경우도 늘고 있다.[2] 심지어 촉한이라는 국가 자체가 기존 왕조를 이어받으면서 나름대로의 새로운 천하를 선포하려 한 국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조위와 촉한이 처음 성립되었을 때 각자 내세웠던 건국 기조 때문이다.[3] 물론 동양에선 이 정도 먼 계보도 같은 일족 취급해준다.[4] 헌제가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가 아니라면 헌제가 살아있는데도 유비가 한나라 황제로 즉위하는 모양새가 되니 명분이 부족했던 것이다. 다만 유비가 즉위하던 시점에선 촉에든 오에든 헌제가 죽었거나 곧 살해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넓게 퍼져 있었다.[5] 당장 진수가 촉상 제갈량집을 짓고 진수가 옛 적국 재상의 문집을 만들었다고 죽을 죄를 지었다며 진무제 사마염에게 싹싹 빌었을 정도다. 또 촉한의 황제 유비와 그 신하들의 찬을 넣은 계한보신찬을 은근슬쩍 집어넣기도 했다. 그래서 촉한 출신 진수가 예전에 섬기던 옛 왕조를 잊지 못했기에 이러한 서술을 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6] 이 원인은 앞에서 말한 팔왕의 난으로, 서진은 왕족들에게 지나친 권한을 부여했다고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지방군 통제권이었다. 물론 이렇게 함으로서 서진 황실이 병권은 확실히 쥐었지만 문제는 그걸 가진 황족들끼리 쌈박질을 한 것이다. 황족들은 당연히 자기가 지휘할 수 있는 지방군 동원해서 싸웠고 그 결과 각 지방에서의 서진군이 싹 날아갔다.[7] 이것은 이민족들을 당대 기준으로 무작정 억압하기보다는 되도록이면 그들의 생활방식이나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과 연계하여 적당히 체제 안으로 편입시키고, 회유하면서 제어하려고 한 촉한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이런 정책은 이 시대 기준으로 대단히 파격적인 것으로 사실 조위-서진 정권이 이상한 게 아니라 촉한이 특별했던 것이다. 이민족에게 관용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중국의 통일 왕조는 당나라 때부터다.[8] 단적인 예시로 흉노족의 경우 환·령 시기까지만 해도 중국에 복속되긴 했지만 흉노만의 선우가 존재하고 또 실질적으로 존재했지만 조조는 남흉노 선우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흉노를 분열시켰다.[9] 당장 후조의 건국황제라고 할 수 있는 석륵부터가 이민족 노예 출신이다.[10] 실제로 서진은 황실만 문제였던 게 아니라 고위층들도 청담사상에 빠져 나랏일은 나 몰라라였고 왕연이라고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11] 북위의 지배층은 탁발선비족인데 이들은 위나라에 조공을 바쳤을뿐더러 서진으로부터 '대'라는 나라 이름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애초 나라 이름이 북위이다.[12] 애시당초 황제의 선양이라는 방식 자체가 전근대 시기 만고의 역적 망탁조의의 선두에 서는 왕망이 처음으로 시도한 방식으로 위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을 쓴 찬탈을 미화하기 위해서 본래 '덕이 있는 자에게 자발적으로 군주가 자리를 양보한다(고 일단은 알려져 있던)' 개념인 선양의 의미를 변질시킨 것이며 당장 조씨와 사마씨의 행적부터가 이런 변질된 선양이라는 의식의 본질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13] 사실 사마씨의 찬탈 자체가 명분이 없었다. 사마사의 경우에는 대놓고 일찍부터 조씨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다고 나오며 이 때문에 조위를 옹호하던 아내 하후휘와 갈등하던 끝에 그녀에게 독을 먹여 죽였을 정도였다. 사마의까지 정말 충심이 없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사마사는 명분이 있고 없고에 관계 없이 그냥 조위의 자리를 찬탈하고 싶었다. 이러니 사마씨 찬탈 과정이 후세의 눈으로 보기에 지극히 비정상적인 건 오히려 당연하다.[14] 유비의 한중왕 선포가 먹힌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15] 후손인 동진의 2대 황제 사마소조차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나라가 오래 갈 수 있겠냐'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16] 전한과 후한이 같은 유씨 왕조라도 그 성격이 상당히 다르듯이 유비가 세운 촉한 역시 한나라이긴 하나 후한과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즉 촉한의 성립은 그저 후한의 부활이 아닌 새로운 형태로의 재생인 것이다.[17] 그럼에도 습착치의 저서가 배송지 주석의 주요 사료 중 하나로 자주 채록된 것은 습착치가 분명 진나라를 위해 쓴 사서임에도 서진 건국의 치부를 상세하고 공정하게 서술하고 정사 삼국지마냥 사마씨의 문제를 아예 없애거나 미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18] 사실 이런 일만 없었다면 선양을 강조하는게 맞았다. 이 논리도 결코 무적이 아닌 것이 이 논리에 따르면 어쨌거나 정통성 있는 촉한을 정복해 정통성이 있다는 거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마소 시군 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사마소가 명분을 찾기 위해 조씨가 멸하지 못한 촉한을 사마씨가 멸하겠다며 나온 것으로 달리 말하면 군공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만일 누군가가 화북 국가들을 전부 섬멸하고 동진 중심으로 중국 재통일을 이룬다면 역시 정당성 주장을 할만하다. 외려 선양을 강조하는게 나은것이 선양도 결국 해주는 측의 동의가 있어야 하니 해주는 쪽이 못하겠다며 버티기, 배째라 모드로 나올 수라도 있기 때문이다. 근데 워낙 탈법적으로 집권했으니 선양의 강조가 무색해져버린 것이다.[19] 정리하자면 기존의 후한-조위-서진이 아니라 후한-촉한-서진으로 정통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서진이 촉한을 흡수통일하여 정통을 이은 것이니 비록 서진이 조위에서 선양받아 비롯되어더라도 조위는 정통과는 상관없다는 것이다.[20] 습착치식 논리도 결코 완벽하진 않다. 진고조가 추촌 황제인 조조 그리고 220년 위나라 건국 이후 조비-조예-조방 라인까지 섬겼기 때문. 어느 쪽으로도 사마씨의 집권 명분에 흠은 생긴다. 그나마 조조 같은 역적 집안에게서 물려받은 명분보다는 정통 통일 왕조인 한나라를 멸하고 얻은 명분이 더 먹히니까 그쪽을 택했을 뿐이었다.[21] 한고제 유방의 동생[22] 사실 북송 초·중반은 잠깐 조위정통론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유는 송나라가 선양을 통해 건국되었고 이전의 선양들과는 달리 어쨌든간에 전 황실을 살려주었기에 조송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선양에 두었고 그랬기에 똑같이 선양-구 황실 보존을 밟은 조위를 정통으로 쳐준 거다.[23] 괜히 이런 기류하에서 단순 악당 두목으로 격하된 조조를 '난세의 간웅'이라며 위상을 높인 나관중이 무작정 촉빠라고만 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