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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colbgcolor=#ffffff,#191919>개명왕(開明王) |
작위 | 당양정후(當陽亭侯), 평양후(平襄侯) |
최종직위 | 대장군(大將軍), 녹상서사(錄尙書事) 영 량주자사(領 涼州刺史) |
성씨 | 강(姜) |
휘 | 유(維) |
자 | 백약(伯約) |
부친 | 강경(姜冏) |
생몰 기간 | 202년[1] ~ 264년 1월 18일 (음력) 202년 ~ 264년 3월 3일 (양력) |
고향 | 옹주(雍州) 천수군(天水郡) 기현(冀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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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자는 백약(伯約). 시호는 서위의 우문태가 추봉한 개명왕(開明王)이다.[2] 옹주 천수군[3] 기현 사람이다.
위의 신하였다가 제갈량의 제1차 북벌에서 촉한에 항복하고 촉한의 신하가 되었으며, 제갈량 사후 촉한의 대장군까지 올랐다. 약 20여년간에 걸쳐 위나라로 여러 차례 쳐들어가는 강유의 북벌을 벌였으나 위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실패했으며 촉한멸망전에서 위의 침공에 맞서 촉군 주력군을 지휘해 방어에 나섰으나 촉한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그 후에도 촉한을 재흥시키려 위나라의 장군 종회와 협력해 난을 계획했지만 사전에 탄로나면서 습격해온 위군과 싸우다 죽음을 맞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후계자처럼 그려지며, 제갈량 사후 삼국지연의의 마지막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제갈량의 직접적인 후계자라고 볼 수 있었던 인물은 장완과 비의였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도 제갈량이 강유를 두고 칭찬하는 등 각별한 인연은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2. 생애(정사)
자세한 내용은 강유/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세상을 떠나고 뒷일을 도맡은 촉한의 마지막 사령관이자, 거대 낭만서사로서의 삼국지연의에서 사실상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유비-제갈량에 이은 세 번째 주인공이기도 하다.현대 한국의 삼국지연의에 큰 영향을 준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선 제갈량이 104회에서 죽고 그 후부터인 105회부터 그가 죽는 119회까지는 강유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비중이 있다. 모종강본이 120회이니 1/8 정도는 그에게 주인공으로서 분량이 가는 것이다. 유비는 1회부터 85회까지 제갈량의 경우 36회부터 104회까지 강유는 92회부터 119회까지 출연하니 다른 둘에 비하면 확실히 비중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한국 판본에서는 제갈량의 사후를 대놓고 축약하거나 그냥 오장원에서 끊어버리는 삼국지 판본들도 꽤나 많은데 황석영 삼국지와 나관중본 삼국지연의에선 제갈량 사후 한 권 반을 차지하는 독보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연의에서 묘사되는 구벌중원은 다음과 같다. 1차: 249년 우두산(국산), 2차: 254년 철롱산(적도), 3차: 255년 조수, 4차: 256년 단곡, 5차: 258년 장성, 6차: 258년 기산, 7차: 260년 야곡, 8차: 262년 조양, 9차: 263년 답중. 이 중 6차, 7차 북벌은 완전히 창작이고, 9차 북벌은 실제로는 그냥 가서 주둔하고 둔전한 게 다다. 정확히는, 성도의 정치 싸움을 피할 겸 새 북벌을 하느라 가서 군량과 무장을 마련하는 중이었지만.
3.1. 연의에서의 촉 귀순 과정
연의와 실제 역사 모두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촉에 귀순하는 것은 같지만 정사와는 이야기 진행이 크게 다르다.연의에서는 93회 때 제갈량의 전략을 간파하고 그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 준 인물이라는 상당히 임팩트 있는 데뷔를 한다.[4] 강유를 본 제갈량은 반드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되겠다고 심혈을 기울이고 마침내 성공하여 강유의 항복을 받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다.
제갈량이 계책을 써서 안정태수인 최량을 죽인 이후 같은 방법으로 천수태수인 마준을 죽이려 했는데, 이 때 강유가 그 계책을 꿰뚫어봐서 마준이 말려들지 않게 했다. 제갈량은 배서를 하후무의 심복이라 위장해서 보내서 '하후무께서 위험하니 와서 도와주십시오'란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 가짜 파발꾼을 한 번 더 보내자 마준은 완전히 속을 뻔했는데 강유가 '하후무가 도대체 무슨 수로 포위망을 뚫고 사람을 보내며, 배서란 심복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고, 파발꾼 또한 공문 한 장 없이 다녀갔다.'란 근거를 대며 속임수란 것을 간파하여 무산되었다. 강유는 한 발 더 나아가 제갈량의 계략에 넘어간 척 역이용하여 조운을 끌어들인 뒤 스스로 복병을 맡아 조운과 싸운다. 조운은 점점 날카로워지는 강유의 창 솜씨에 깜짝 놀란다. 이에 마준과 양건의 본대까지 돌아와 협공하자 조운은 가까스로 도망쳤고, 본래 마준을 기습하려고 매복 중이던 장익과 고상이 사태를 깨닫고 구원하러 온 덕분에 간신히 돌아간다.
조운의 보고를 받은 제갈량은 자신의 계략을 간파당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고 "이제 천수를 취하려는 참에 이런 인물이 나타날 줄이야!"라며 탄식한다. 충격을 받은 제갈량은 다음번에 직접 선봉으로 나서 성을 공격하지만, 그것조차 강유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 생각보다 성의 방비가 철저해 제갈량이 일단 밤까지 기다렸으나 미리 밖에서 매복하고 있던 강유가 바로 야습해 온다. 이렇게 되자 제갈량으로서는 드물게도 황급히 말에 올라 무작정 도망치는 굴욕을 당하고, 관흥과 장포의 호위를 받아 간신히 빠져나온다. 이 과정에서 강유가 마치 뱀처럼 군사를 부리는 것을 보고 제갈량은 다시 한 번 감탄한다. 지략으로는 제갈량의 작전을 간파할 정도로 뛰어나며, 무재로는 조운과 대등할 정도의 면모를 드러내며 데뷔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다.
이후 제갈량은 강유가 효심이 깊다는 것을 이용, 위연에게 강유의 어머니가 사는 기현을 공격하게 하고는 구원하러 온 강유를 입성하게 내버려둬서 성 안에 묶어놓았고 근처 요충지인 상규를 공격해서 보급로를 차단한다. 한편 붙잡았던 하후무를 풀어주되 그가 가는 길에 난민으로 위장한 촉군과 마주치게 하여 강유가 촉에 항복했다는 소문을 뿌렸다. 하후무가 천수성에 들어가 마준에게 보고 들은 바를 알리고, 그날 밤 천수성에 강유와 비슷한 사람을 앞세워서 공격하자 마준은 강유가 촉에 항복했다고 확신하게 된다.
한편 갇혀 있는 터라 군량이 부족해진 강유에게 일부러 허술하게 무장한 군량 수송대를 보여줘서 강유를 성 밖으로 끌어낸다. 장익과 왕평이 강유의 발을 묶는 사이에 위연이 성을 점령해 버리자 강유는 천수로 달아난다. 하지만 천수성의 마준은 물론 상규성의 양건도 강유가 항복했다고 여기고 쫓아냈다.
이에 강유가 홀로 장안을 향해 달리지만 관흥이 길을 차단하고, 지칠 대로 지친 강유는 싸울 엄두도 못 내고 도망치려고 하지만 뒤에서는 제갈량이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 완전히 포위된다. 제갈량이 항복을 권유하자 강유는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인정하고 땅에 내려 항복한다. 그러자 제갈량은 수레에서 내려 손수 강유를 일으켜주고는 "내가 평생 배운 바를 현명한 이에게 전하려 했으나 마땅한 인재를 못 찾아 초조하던 터인데, 이제 백약(강유의 자)을 만났으니 소원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기뻐한다.
그러나 이것은 연의의 창작으로 제갈량 사후 촉한을 책임지는 강유를 띄워주기 위한 소설적 장치이다. 실제 역사에서 강유의 투항은 부당한 조국의 버림과 모친과의 생이별이 담긴 안타까운 스토리이다. 하지만 직접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을 뿐 제갈량이 강유를 높게 평가하여 후세대를 이끌 인재로 여긴 것은 사실이며, 촉에 귀순한 그를 파격승진시키며 입지를 다지게 해줬다.
4. 평가
자세한 내용은 강유/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 여담
- 검각에 내려오는 다음 전설들은 실제 정사에선 강유가 유선이 항복하기 전에 검각에서 성도로 이동하였으므로 성립되지 않는 전설들이다, 이 전설들은 연의에 그 바탕을 두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물론 정사에서도 분격한 촉군이 칼을 들어 돌을 베었으나 그건 성도 지척인 광한군 오성현에서의 일이지 검각에서의 일은 아니었으리라. 강유가 검각으로 와서 진영을 정비하고 요새를 굳게 지키자, 종회의 10만 대군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등애가 성도로 우회 기습하면서 유선이 항복하였다. 유선의 항복 조서를 받든 강유와 장졸들은 원망스럽고 화가 나서 분통을 참지못해 칼을 뽑아 옆의 돌을 베었다. 그때 그가 자른 돌은 지금도 검각 협곡 안에 위치해 있으며, 사람들은 이 돌을 '감도석'이라 부른다. 억울하고 울분을 참을 수 없었지만, 강유는 유선의 성지를 거역할 수 없었기에 양면으로 된 군기를 거꾸로 걸게끔 명령을 내려 위국에 투항할 뜻을 표했다. 그 양면으로 된 기를 꽂았던 돌은 주가채의 바위 절벽에 남아있는데, 이를 '쌍기암'이라 부른다. 그는 장수와 병사들을 소집하여 각기 지니고 있던 병기를 모아 소검산의 한 동굴에 숨긴 다음, 차후에 때를 보아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 왕실을 부흥하고자 했다. 이 동굴을 '강유 도창고'라고 불린다. 강유는 검문관을 떠날 때 마고자를 벗고 손수 빨은 뒤, 이를 말리기 위해 산의 바위 위에 널며 반드시 돌아올테니 그때 다시 마고자를 입을 것이라고 맹세했지만, 결국 한 해가 지나고 또 다시 다른 한 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옷은 돌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검문관 20리 밖에서 큰 바위 위에 널려 있는 마고자의 모양을 볼 수가 있다. 이를 가리켜 '양의암'이라고 한다.
- 2022년 들어 유독 한국의 삼국지 팬덤 사이에서 삼국시대 인물들의 외모에 대한 추측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강유도 포함됐다. 강유가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나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 미소년에서 미청년으로 묘사된 것처럼 잘생겼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고개를 들고 있다. 종회가 강유에게 대하는 모습은 단지 자기 야심에 호응을 해주는 사람에 대한 신뢰보다는 마치 첫눈에 반해서 콩깍지가 씌인 것과 흡사한데, 종회는 실제로 여장 취향이 있는 꽃미남 하안과 친했고, 강유에게 "그대는 공휴(제갈탄), 태초(하후현)보다 훨씬 빼어나다."고 한 발언이 단지 능력에 대한 립서비스가 아니라 외모에 대한 칭찬이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하안과 하후현이야 당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미남이고, 제갈탄 역시 사위 왕광이 아내에게 "장인어른은 미남인데 당신은 왜 그런거야."라고 디스했다가 역관광을 기록이 존재하기에 강유 역시 60대였음에도 종회가 제갈탄과 하후현보다 더 잘생겼다며 립서비스를 하며 반할만큼 미노년이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에 대해선 '아무리 기록이 부족한 촉한이라지만 강유는 그래도 기록이 많이 남은 편인데 외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에도 강유의 외모를 좋게 보는 건 비약 아니냐'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 확실히 삼국지 정사의 기록을 본다면 특정 인물을 논할 때 의외로 얼평이 자주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드라이하고 간결한 문체로 유명한 정사지만 미남으로 거론된 인물들을 찾아보면 의외로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당대에 인물을 평가할 때 외모를 중시여기는 문화가 의외로 팽배했고, 또 인물의 외모를 논하는 기록은 별로 드문 게 아니었기에 외모에 대한 기록이 확실하게 남지 않은 강유 같은 경우는 외모로 좋게 평가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맹달처럼 유장-유비 진영에 속했을 땐 외모에 대해선 별 말이 없는데 위나라로 귀순하자마자 얼빠로 유명한 조비의 눈에 띄어 사서에 미남으로 기록되는 행운을 얻은 케이스도 있고, 당대의 꽃미남인 하안과 하후현에게 알랑거리는 등 수상한 기록들이 즐비해 게이가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는 종회의 무한신뢰를 얻은 강유이기에, 비록 사서상에 강유의 외모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러한 행간을 읽어보면 외모가 뛰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또한 그리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 《신당서 재상세계표(新唐書 宰相世系表)》에 따르면, 강유의 후예들이 천수 상규에 거주하는 것이 확인된다. 이들의 거주지가 강유의 출신지인 천수 지역인 것을 보아, 아마도 이들은 강유가 촉한에 항복하며 북방에 남긴 가족들로부터 세계가 이어진 것일 터이다. 투항 당시 강유의 나이가 20대 후반이었으니 그 시대에는 이미 가정을 꾸리고도 남았다. 한편 강유는 입촉 이후 재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는데, 이 쪽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강유가 촉한 황실을 복고하려다 실패하고 죽은 뒤, 성도에 있던 그의 가족들 또한 난리통에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천수에 남은 강유의 가족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불분명하지만 촉에서 새로이 이룬 가족이 몰살당한 것과 달리 이쪽은 명맥이 이어진 걸 보아 몰살당하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강유의 대표적인 후손들로는 강명(姜明)[5], 강원(姜远)[6], 강보의(姜寶誼, ?-619?)[7], 강각(姜恪,?-672)[8], 강협(姜協)[9], 강수(姜琇)[10], 강앙(姜昂)[11], 강원(姜還)[12] 등이 있다.
6.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강유/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국내의 일부 연의 평역본과 진삼국무쌍 7 엠파이어즈에서는 206년이라 기재되어있는데 오류이다. 강유가 사망 당시 58세였다고 하여 역산하면 206년 생이 나온다.[2] 우문태가 개명(開明)이라는 시호를 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과거 춘추전국시대 고촉(古蜀)왕조의 명칭이 개명(開明)이었기에 촉과 관련하여 준 듯 하다.[3] 천수군은 해당 지역의 옛 이름이고, 74년에 '한양군'으로 개명되었다가, 후한말과 위진시대에는 천수군과 한양군이 혼용되었다. 삼국지연의에는 천수군으로만 호칭됨.[4] 연의에서 제갈량의 공식 라이벌인 사마의가 그를 엿 먹인 경우는 보통 제갈량이 제대로 잘 짜놓은 판에 여러가지 예상 못한 차질이 생겨 사마의가 틈을 놓치지 않고 공략했거나 예상치도 못한 행운이 찾아와 기회를 잡고 공명의 허를 찌른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강유는 자기 혼자서 곧장 제갈량의 계략을 꿰뚫어보고, 정면으로 뚫어버렸다는 점이 인상을 크게 남겼다.[5] 강유의 후손, 북위시기 관원, 연주자사, 천수군공(天水郡公)[6] 강명의 아들, 북주시기 관원 형진이주자사(荆秦二州刺史), 조읍현공(朝邑縣公)[7] 강원의 아들, 당고조 시기 장령, 일찍이 태학(太學)에서 공부했는데, 학업에 진전이 없자 그만두고 좌익위(左翊衛)가 되었다. 공로를 인정받아 응양낭장(鷹揚郎將)으로 옮겼다. 당나라 고조가 병사를 일으키자 좌통군(左統軍)에 오르고 영안현공(永安縣公) 작위를 받았다.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을 지냈다. 송금강(宋金剛)과 싸우다 전사했다. 시호는 강(剛)이다. 좌위대장군, 유주총관으로 추증되었다.[8] 강보의의 아들, 당고종 시절 장령, 시중, 영안군공(永安郡公), 전투로 인한 전공으로 인해 좌상(左相)에 올랐으며, 염입본(閻立本, 중국 당대 초기의 화가, 600 - 673)이 동시기에 그와 더불어 우상이 되었다. 시인이 평론하기를 “좌상은 장수로서 그 위엄은 멀리 사막에까지 퍼졌고(宣威沙漠),우상은 명예로움을 단청에 남겨 후세에 전하였다(馳譽丹靑)”라고 말하였다.[9] 강보의의 아들, 당나라 시기 관원, 연연도호(燕然都護), 하주도독(夏州都督), 성기현후(成紀縣侯), 전서(篆書)와 주문(籀文)을 잘하였다.[10] 강협의 아들, 당나라 시기 관원, 하주도독부법조(夏州都督府法曹)[11] 강수의 아들, 당나라 시기 관원, 조의대부전(朝議大夫前),행상서사훈랑중(行尙書司勳郎中),상주국(上柱國)[12] 강앙의 손자, 당나라 시기 관원, 건주자사(虔州刺史), 장작소감(將作少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