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서(蜀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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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雍
생몰년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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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며 자는 헌화(憲和)로 유주 탁군 사람.쭉 유비와 함께 했던 촉한의 개국공신 중 한 명이다.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그의 본래 성씨는 경(耿)이었지만, 유주 사람들이 이를 간(簡)으로 발음했기 때문에 발음에 따라 간으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1]
2. 정사 삼국지
유비와 동향이자 친구. 어려서부터 유비와 친하여 유비가 거병한 이후로 그의 막료로 활약했다. 유비를 따르던 모든 인물 가운데 간옹은 관우, 장비와 함께 최고참이자 개국 공신이다.[2]항상 유비에게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었고, 때때로 그는 사신 역할도 수행했는데, 유비가 형주에 이르자 간옹은 손건, 미축과 함께 종사중랑(從事中郞)이 되었다. 종사중랑은 참모의 직위이니 간옹은 책사 역할도 수행했다는 뜻이다.
후에 유비가 유장의 요청에 응해 익주로 가자 같이 따라갔으며 유장이 그를 보고 매우 아꼈다. 이후 익주 정벌 때, 마침내 유비가 성도를 포위하자 간옹을 보내 유장을 잘 설득해서 항복시켰고, 간옹은 소덕장군(昭德將軍)에 임명되었다. 익주가 평정되자 대우를 이적, 손건 등과 버금하게 했다. 이는 간옹이 단순히 유비 세력의 개국공신이라서 대우해준 것이 아니라 유장을 설득해 더 이상 피를 보지 않고 항복을 받아낸 업적도 반영한 것인데 유비는 2~30년에 걸쳐 유언-유장 부자가 통치해온 익주를 3년여 만에 자기 영토로 확실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실 유비가 힘으로 버티고 있던 유장을 쳤어도 이기고 익주를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있었겠지만, 그럴 경우 유장은 끝까지 항전하면서 버텼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유비는 더 큰 손실을 입으며 피폐해진 익주를 얻게 됐을 거다. 그럼 익주를 재건하면서 민심을 완전히 얻는 데 얼마 걸릴지 모를 시간이 걸렸을 테고, 그 사이에 조조가 장로를 항복시켜 한중을 얻은 뒤 망설이지 않고 익주를 치는 상황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익주의 빠른 안정적인 병합은 유비와 여러 인재들의 능력과 노력도 있지만 간옹이 유장을 설득해 항복시켜 익주의 민심과 기반을 최대한 안정시킨 상태로 유비에게 넘기게 한 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유유자적한 풍채와 생각에다, 성품은 찬찬하지 않고 오만하고 방종하며 질탕했다. 유비가 자리에 앉아 있어도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몸을 기대어 있었다. 이렇게 예법에 맞는 몸가짐이 엄숙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였다. 제갈량 앞에서 회의에 참석할 때도 혼자 걸상 하나를 차지하고 목에 베개를 베고 누워 말하니 참으로 뻔뻔했다.
삼국지 촉서[3]
그래도 아무런 벌이나 미움을 사지 않았으니 왠지 미워할 수 없는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자기 상관들 앞에서 남들은 다 앉아 있는데 홀로 목베개를 높이 벤 채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누구든 기분 나빠할 법도 한데 기록에는 그런 묘사가 전혀 없다. 한편, 법정 앞에서는 벌떡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지만[4] 이는 출처가 불확실하다.삼국지 촉서[3]
전해지는 일화 가운데 음담패설에 가까운 것이 하나 있다. 어느 날, 유비가 곡식을 아끼기 위해 금주령을 내려 법령에 따라 술을 담글 때 사용되는 기구를 가진 사람까지 처벌하는 명령을 내리려 하였다. 하루는 유비와 간옹이 거리에 나가 단속을 하였나 보다. 번득이는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간옹은 지나가던 남녀를 가리키며 둘이 간음을 저지르고 있으니 잡아야 한다고 유비에게 주장했다. 유비가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느냐고 간옹에게 묻자, 간옹은 "저들은 도구를 가지고 있으므로 술을 담그려는 자와 똑같다.(彼有其具,與欲釀者同)"[5]라고 말했다. 유비는 웃으면서 술을 담글 때 사용되는 도구를 지닌 사람까지 처벌하려던 생각을 그만뒀다고 한다.정사 삼국지 촉서 8권 간옹전[6] 그리고 간옹이 간언하는게 이와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비군의 익주 평정 후부터는 간옹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그의 말년이 어땠는지, 그의 삶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알 수 없으며, 자손에 대한 기록도 없다. 유비가 황제를 칭할 때 그의 이름이 없는 걸 보아 손건과 더불어 유비의 익주 점령부터 한중 공방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그는 유비가 거병한 이래 끝까지 변심하지 않고 유비를 따르다 죽은 충신이라고 평할 수 있다.
3.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점술 능력도 가지고 나오는데 당양 벌판에서 조조군에게 추격당하기 직전, 깃발이 부러지는 사태가 발생하자 점을 쳐보고 유비에게 뒤따르는 난민들을 버릴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고 간옹은 싸움에 휘말렸다가 길바닥에 쓰러진 채 조운에게 발견된다.또한 연의에서는 유장에게 사자로 갔을 때 이때 간옹이 위세를 부렸다가 과거의 지인이라는 진밀에게 꾸짖음을 듣고 얼른 행동을 고치는 일화가 나온다.
연의에서는 유비와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나오는 게 아니라 손건, 미축과 함께 도겸의 부하로 나오는데 이 때문에 간손미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간옹은 도겸과 일절 상관없으며 손건은 유비가 도겸의 뒤를 이은 이후 등용되어 실제로는 미축만 도겸의 부하였다.[7]
4. 평가
유비 세력이 미약했을 때부터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이리저리 구르며 고생했음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유비의 보탬이 된 걸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추측할 수 있다. 관우와 장비야 당대의 인간흉기들이라지만 간옹은 딱히 무인이 아니었음에도 익주 평정 직후까지도 살아남았다. 유비의 유랑 과정이 매우 험난했음을 감안하면, 그걸 어떻게든 따라간 간옹도 장수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무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8]간옹은 단지 군주의 친구라는 이유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한고제는 동네 절친 노관에게 왕좌까지 주었으나 오히려 독이 되어 그를 막북 오지에서 객사하게 만들었다. 그 외 그 어떤 왕을 봐도 서열관계가 확실한 보스와 조직원의 관계지 유비의 간옹처럼 말 편하게 하는 친구를 데려간 경우는 거의 없다.[9] 하후돈도 조조와 친구처럼 지냈다고 하지만, 친구보다는 친척이며 충실한 부하로서의 관계가 더 부각된다. 이건 간옹이라는 인물의 능력을 반대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탁월한 능력을 딱히 보여준 바가 없는 것 같은데도 개국공신에다 높은 반열에 오르는 데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 제일 오래된 숙신이니까 그냥 넘겼을 수 있겠지만 그 이후 특별히 아무 일도 안 한 것이 아닌 거의 의협집단의 접착제로서 그 누구에게도 적의를 얻지 않았으며 특별히 거기까지 따라가고 살아남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심지어 저런 입지임에도 불구하고 부정부패에도 딱히 연루되지 않고 깨끗하게 살다 갔다.
법정과 더불어 이릉대전까지 생존했다면 유비를 말릴 수 있는 사람으로 삼국지 팬덤에서 종종 거론되는데, 금주법을 말릴 때 유비가 기분나빠하지 않게 재치있는 말솜씨를 보여준 점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유비도 유비 나름대로 반드시 이릉대전을 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으니 쉽게 설득되진 않았겠지만 이런 떡밥이 나올 정도면 그의 말솜씨와 유비와의 친분이 제법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10]
5. 기타
손건, 미축과 함께 간손미로 묶이기도 한다.조조의 별명인 "난세의 간웅"을 입력하다가 오타로 "난세의 간옹"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간옹은 초창기부터 유비를 따라다니며 난세에 험한 고생을 하면서도 결국 천수를 누리고 갔으니 나름 그럴싸하기도 하다.
중국어 위키백과에는 쓰촨성의 젠양시에 간옹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간옹의 무덤은 청두 - 충칭 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파괴되면서 현전하지 않는다고. 무덤 앞에 있었던 돌사자와 석상들은 도로 포장재로 써버렸고 간옹의 이름을 딴 도로만 나아있다고 한다.
간옹을 다룬 유튜브 영상의 댓글에선 유비가 끝까지 간옹을 중용하며 데리고 다닌 이유를 이렇게 비유하기도 하였다.
조그만 동네 구멍가게 할 때, 친구랍시고 하나 머리 좀 쓰는 애 데려다가 같이 일 했는데 어느덧 50년이 지나버림. 내가 늙은 만큼 이놈도 늙었음. 돌아보니 잘난 서서, 진군, 전예 같은 애들은 대기업으로 가버리고 못난 공도, 유벽 같은 애들은 죽어버림.
그래도 공을 세운 애들 법정 관우 장비 방통 같은 애들 면도 세워주고 챙겨준다고 요놈한테 별거 해준것도 없는데, 폭삭 망했을때도 계속 졸졸 나를 따라다니면서 "형님이 최고", "우리 형님 최고니까 돈 좀 빌려주세요.", "촉한대의 모르십니까?" 맨날 술먹고 다니면서 돈 빌려오고 병사 빌려오고 거래처 접대하고.
내가 체면 때문에 못하던 일 다 해주고 야반도주 다니는거도 아무말 않고 다 쫓아다님. 처자식 잃었을 때도 이놈은 그냥 내 옆에 콱 붙어서, 가끔은 미안하기도하고 한심하기도 해서 농담 몇번 하면, 자기도 씩 웃으면서 맞 대거리하면
이미 먼저 보낸 사람들도 보이고, 떠나 보낸 이들도 보이고 이야기 할때마다 그때 그 시절이 떠올라.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래도 공을 세운 애들 법정 관우 장비 방통 같은 애들 면도 세워주고 챙겨준다고 요놈한테 별거 해준것도 없는데, 폭삭 망했을때도 계속 졸졸 나를 따라다니면서 "형님이 최고", "우리 형님 최고니까 돈 좀 빌려주세요.", "촉한대의 모르십니까?" 맨날 술먹고 다니면서 돈 빌려오고 병사 빌려오고 거래처 접대하고.
내가 체면 때문에 못하던 일 다 해주고 야반도주 다니는거도 아무말 않고 다 쫓아다님. 처자식 잃었을 때도 이놈은 그냥 내 옆에 콱 붙어서, 가끔은 미안하기도하고 한심하기도 해서 농담 몇번 하면, 자기도 씩 웃으면서 맞 대거리하면
이미 먼저 보낸 사람들도 보이고, 떠나 보낸 이들도 보이고 이야기 할때마다 그때 그 시절이 떠올라.
그러니 어쩌겠는가.
6.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간옹/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이는 중국, 미국, 러시아, 캐나다 등 땅이 넓은 다민족 국가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로써 미국 남부와 영국의 시골 등지에서 Beauchamp(보챔프)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발음에 따라 Beecham(비첨)이라고 고치기도 하였다. 토머스 비첨이 대표적인 예다.[2] 이를 반영해서인지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소개될 때 의용군 시절부터 유비를 따르며 사신, 참모로 활약했다고 서술되어 있다.[3] 의자는 입식 문화권으로 바뀌는 당나라, 송나라 때에나 등장하는 물건으로 삼국지 시대에도 역시 의자가 있긴 있었으나, 돗자리를 깔고 거기에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예의였다.[4] https://www.inven.co.kr/board/webzine/2097/192318[5] 아래 하씨어림 등의 다른 문헌 중에서는 '彼有淫具,與欲釀同', '저들은 간음의 도구(淫具)를 갖고 있으므로'로 더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들도 있다.[6] 이 이야기는 하씨어림(何氏語林)에도 실려있고, 이 책과 세설신어를 합친 세설신어보에도 실려있다. (세설신어에는 실려있지 않다.) 하씨어림 19권 해당 부분 번역 그 외에도 대여섯 개의 문헌에 여기저기 실려있는 유명한 일화인데 여기에서 비교해볼 수 있다. 이를 참조했는지 진삼국무쌍 7 맹장전 장성 모드에서도 유비로 플레이를 할 때 마을에 있는 간옹과 대화를 하면 금주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7] 삼국지연의 이전에 나온 삼국지평화에서는 간옹도 유비가 거병했을 때부터 따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삼국지평화에서는 손건도 촉의 거병 멤버로 나온다.[8] 현대에 와서는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자동차 따위는 당연히 존재하지도 않았고, 말도 항상 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군인이라면 걸어서 수십 km를 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대였다. 현대의 군대에서도 행군은 매우 힘든 일인데, 당시의 기술력으로 광활한 중국 땅을 가로지르며 수시로 전투까지 하던 유비의 여정이 힘들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여정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정 수준의 체력과 위기 대처 능력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9] 서양까지 넓게 본다면 나폴레옹 1세가 황제가 되어서도 말 놓고 다녔던 장 란 정도가 있지만 나폴레옹의 친구이기 이전에 능력자였으며, 또 나폴레옹의 세가 기울기 직전에 죽어 박수칠 때 떠난 케이스기 때문에 오래오래 살았을 때까지 좋은 친구로 남았을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10] 사적인 면만 아니라 공적으로도 간옹은 거병 동지이자 최고참 중 한 명인 만큼 이릉대전까지 생존했으면 조정의 원로 중 한명으로서 유비를 말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입지다. 제갈량은 제갈근이 오나라에서 일하고 있으니 반대를 계속 주장하면 내통으로 몰릴 수 있어 적극적으로 나서기 힘들었지만 간옹은 그런 부담이 없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