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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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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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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
魏延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igen_II.jpg
<colbgcolor=#008000> 위연석소상
작위 도정후(都亭侯) → 남정후(南鄭侯)
관직 전군사(前軍師) 겸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겸 가절(假節)
성씨(魏)
(延)
문장(文長)
생몰 ?년 ~ 234년
고향 형주 의양군(義陽郡)[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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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유비 → 유선),
아문장군(牙門將軍)
독한중(督漢中) 겸 한중태수(漢中太守) 겸 진원장군(鎭遠將軍)
진북장군(鎭北將軍)
진북장군(鎭北將軍) 겸 독전부(督前部) 영 승상사마(領 丞相司馬) 겸 양주자사(涼州刺史)
전군사(前軍師) 겸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겸 가절(假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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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생애2.2. 평가
2.2.1. 긍정적 평가2.2.2. 부정적 평가
3. 삼국지연의4. 기타5.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이며 는 문장(文長)으로 형주 의양군 사람. 등애, 등지와 동향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사졸을 잘 기르고 용맹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 많은 공적을 쌓았지만, 성격이 지나치고 자만하였으므로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했고 최후에 화를 자초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한발짝 더 나아가 등장부터 옛 주인을 배반하는 반골의 상으로서 제갈량의 죽음에 책임이 있도록 각색되었다.

2. 정사 삼국지

2.1. 생애

2.1.1. 초기

위연은 본래 유비부곡(部曲)이었다.[2] 일개 병졸에서 시작하여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으므로 자수성가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입촉 후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아문장군(牙門將軍)에 오르고, 한중을 수비하는 독한중(督漢中)으로 발탁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장비가 될 것이라 보았고, 장비 또한 스스로 임명될 것이라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유비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여러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위연에게
"이제 경에게 중임을 맡기노니 어떻게 하시겠소?"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하고 물었다. 이에 위연은
"조조가 천하를 들어 쳐들어온다면 편장이 십만 군사로 삼켜버리도록 청합니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하였다. 이에 유비가 칭찬하고 사람들이 높이 여겼다. 발표 직전의 중론은 전공으로 보나 연공서열로 보나 어디로 봐도 장비가 마땅하단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어찌보면 파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는 일인데 이미 장비는 파서태수로서 익주 후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는 서주와 형주 시절 관우가 맡던 역할로 유비는 서주에 있을 때 처음에는 장비에게 서주를 진수시켰으나 그가 조표와의 불화 및 여포의 배반으로 서주를 잃은 후에 다시 서주를 찾은 2차 서주 시기와, 남군 공방전 후 형남 지역을 얻고 본인이 익주 정벌 때는 후방이 된 형주를 관우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 관우가 익주 점령 시점 때 형주를 진수받으며 형주는 후방이 아닌 전방 교두보 지역이 됐고, 이제부터 익주가 후방이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후방 담당을 할 인물이 빠지자 익주 정벌 때부터 장합 격파 등의 굵직한 활약을 보인 장비에게 다시 후방 담당을 일임하며 그에 대한 신뢰를 다시금 재확인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제갈량이나 마초를 제외한 다른 1세대 장수들이 모두 고령에 가까워지고, 담당할 영역도 늘어났는데 계속해서 그들만 부담시킬 수 없으니 2세대 장수들의 기용 비중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 점에서 바닥에서부터 올라와 눈도장을 찍은 위연을 적임자라고 판단해 파격 승진을 시킨 걸로 보인다. 조조가 한중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지만 한중 공방전 직후였던만큼 한중의 빠른 안정을 위해 유비군 본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되기 때문에 위연이 한중을 완전히 책임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나, 독한중이 낮은 자리라고 볼 수는 없다.

이때까지 위연은 유비의 직속 부하로서 계급이 착착 올라가면서 중임을 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21년에는 진북장군(鎭北將軍)에 제수되었고, 223년에는 도정후(都亭侯)에 올랐다.

재미있는 점은 마초의 영입이나 황충의 후장군 제수에 늘 발끈하고 신경 쓰던 관우가, 모두의 예상과 달리 위연이 장비를 제끼고 한중독 직책에 올랐는데도 별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는 것. 장비 본인도 놀라긴 했으나 반발이 딱히 없었던 것을 보면 공식기록은 없어도 직후 이 인사조치에 대해 합의나 이해가 있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이 시점에서 이미 위연은 자신을 아끼는 유비 뿐만 아니라 장비나 관우에게도 인정받는 '우리 식구'의 위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유비의 부곡이었으니 그만큼 잘 아는 사이였기도 했겠지만, 한중독 제수는 공식적으로 위연이 유비의 총신임을 드러내는 자리였던 셈이다. 유비의 이 같은 퍼포먼스는 곧 유비 자신이 위연의 뒷배임을 분명히 하는 조치였다.

2.1.2. 제갈량의 북벌

223년에 유비가 사망하고 극적으로 촉한을 재건하고 남중을 평정하여 후환을 예방한 제갈량은 건흥 5년(227년), 위연을 독전부(督前部), 영(領) 승상 사마(丞相司馬), 양주자사(涼州刺史)로 삼았다. 이는 북벌을 위한 사전준비로 적국 영토의 자사나 태수로 임명하는 건 전시를 염두에 둔 것으로 제갈량이 이 중요한 국가적 중대사업에 위연을 중용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쳤음을 알 수 있다. 위연이 군부의 중핵으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건국자 유비를 비롯한 관장마황이 1차 북벌 이전 세상을 떠나고, 조운도 1차 북벌 후 세상을 떠나며 1세대가 모두 퇴장하자 북벌 종군 장수 중 자연스럽게 최고참 반열에 오르며 중핵이 된 위연은 입지가 상승하면서 발언권도 강해져서인지 위략에서는 이 무렵부터 제갈량이 출정할 때마다 자오곡 계책을 제안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제갈량이 매번 거절하였는데, 위연은 대놓고 제갈량에게 늘 겁이 많다고 디스를 날렸고(延常謂亮為怯)[3], 자신의 재주가 쓰이지 못함을 한탄했다.

촉은 229년까지 세 차례 북벌을 일으키고, 230년에는 에서 조진이 주도하여 남정하며 자오곡을 포함한 세 갈래로 공격해 왔으나 때마침 쏟아진 폭우로 아무것도 못하고 퇴각했는데, 이때 위연은 제갈량의 명을 받고 오의와 함께 강중으로 출진해 비요, 곽회 등의 군사를 대파하는 전공을 세운다.[4] 이 공로로 전군사(前軍師)) 겸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에 올랐으며 남정후(南鄭侯)에 봉해졌다.

231년 제4차 북벌 때, 제갈량은 농서로 진출하여 상규의 보리를 두고 대치하다 노성에서 한 차례 접전을 펼쳤다.『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의 명을 받고 위연이 오반, 고상과 함께 출진하여 사마의가 지휘하는 위군을 격파하고 3천의 수급을 얻었다. 이 공로 덕분인지 위연은 정서대장군에 오를때 받은 가절이 사지절로 승급되며 권한이 늘었다.[5] 이 전투의 결과는 『진서』 〈선제기〉와 『한진춘추』가 각기 전하는 바가 다른데, 『진서』 〈선제기〉는 위군이 대승을 거뒀다고 기술한 반면 『한진춘추』에는 촉군이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성 전투 문서 참고.

그의 경력상 최고의 전성기였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인간관계는 최악이었는데 위략에서 상관인 제갈량을 모독한 것은 위략이 촉과 오 내부의 일에 관한 기록 정확성이 떨어지니 확실하다 하기 힘들더라도 앙숙인 양의와 논쟁 도중 화를 참지 못하고 칼을 꺼내 위협한 일, 유염이라는 유비의 예주 시절 때부터 따르던 인물과 불화를 일으키자 제갈량이 유염을 질책하여 사죄하게 하고 성도로 돌려보내는 등 사적으로는 이래저래 남들과 마찰을 빚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특히 양의와의 반목은 심각했으니 과거 유비가 유파와 양의가 다투자 양의를 멀리 한직으로 보낸 것처럼 제갈량도 둘 중 누군가를 정리할 수도 있었지만 유비 시절과 달리 제갈량의 북벌 시절은 그야말로 인재 부족 현상에 시달렸기에 제갈량으로서는 용맹하고 사졸 육성 능력이 뛰어난 위연과 부대 편성과 물자 산정 및 행정/보급을 할 줄 아는 양의 어느 쪽이던 내칠만큼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라서 결국 인내하며 달래고 중재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위연은 조운이 죽은 후 유비의 사실상 마지막 남은 핵심 군사집단의 후예로써 제갈량 계열과 여러모로 불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위연은 그 성공여부를 떠나 자신의 별동대로 별개의 군대를 이끌게 해달라는 의견이 거부당해 제갈량에 대해 불만을 가졌고 제갈량이 한중에 북벌을 위한 막부를 세우고 나서 제갈량 휘하 승상부 인원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정 전투에서도 위연과 오의를 선봉으로 세우라는 주장에 마속을 세워 자신의 계파인 휘하 장수에게 힘을 실어줬던 제갈량이지만 위연이 점차 북벌과정에서 다른 장수들을 능가할 정도로 공로를 세워 홀로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고 제갈량 역시 북벌과정에서 위연의 군재에 크게 의존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들어선 초기와는 달리 위연의 목소리가 높아져도 별 다른 제지를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당장 232년에 위연과 유염이 불화하자 제갈량이 유염을 질책하고 성도로 보냈는데 단순히 제갈량의 성정이 온화해서 그런게 아니라 이후에도 위연이 자신의 북벌에 정말로 필요한 존재였기에 내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는 양의와의 마찰에서 위연이 칼을 꺼내 양의를 위협하는 순간에도 제갈량이 위연을 폐하지 못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2.1.3. 최후

234년, 제5차 북벌 중 위독해진 제갈량은 장사 양의, 사마 비의, 호군 강유를 불러 자신이 죽고 난 뒤 철군할 것을 명했고, 위연에겐 후발을 맡도록 했다.[6] 제갈량은 위연이 명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바로 군을 출발하라고 말했고, 이 때문에 양의는 위연에게 비의를 보내 속마음을 떠보게 했다. 그런데 위연이 말하길;
"승상이 비록 죽었다고 하나 나는 건재하오. 승상부에 가까운 관속들은 곧바로 시신을 모시고 돌아가서 장례를 지내야 할 것이나, 나는 모름지기 제군을 이끌고 적을 공격해야 하오. 어찌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천하의 일을 그만두라 하시오? 더군다나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이기에 양의가 부륵[7]하는 바에 따라 뒤를 끊는 장수 노릇이나 하겠소!"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하며 군령을 거스르고 비의와 함께 떠날 부대와, 남아서 자신이 이끌 부대를 나눈 뒤, 비의에게 친필로 서명하게 해 제장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단순히 앙숙 양의를 따르기 싫다는 핑계를 넘어 아예 제갈량의 최종 군령을 거부하는 걸로 부족해 군 통수권을 이양받은 것도 아닌데 마치 이미 자기가 군 통수권자가 된 마냥 이리했다는 것은 혼자 김칫국 마시는 행위나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파멸에 스스로 발을 들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연히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알아차렸을 비의는 동의하는 척하면서
"마땅히 자네를 위하여 가서 양 장사(長史)를 설득하겠소. 장사는 문관이라 군사(軍事)에는 어두우니, 반드시 자네의 말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라 말하며 위연을 속인 뒤 빠져나와 말을 타고 떠났고, 뒤늦게 위연이 후회하여 뒤쫓았으나 잡을 수 없었다.

위연이 척후를 보내 엿보게 했는데 여러 군들이 차례대로 군사를 물리고 있었다. 이때 위연은 화를 이기지 못하여 직속부대를 이끌고 양의보다 먼저 남하했고, 촉으로 통하는 잔도를 불태워 끊어 버렸다. 과거 초한전쟁 시기 유방항우의 의심을 피하려면 잔도를 불태우라는 장량의 진언에 따라 실제로 불태운 적이 있는데, 비록 항우를 속이는데 성공했지만 아군 제장들 중에도 정말 꼼짝없이 익주에 고립되어버렸다고 믿고 절망하거나 아예 이탈자들이 속출하는 일이 벌어졌고, 유방 본인도 낙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수백년 후 촉한의 북벌 역시 이 잔도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위연 때문에 7~8만의 본대가 적지에 고립되고 만 것이다.[8]

그리고 위연과 양의는 서로 반역했다며 표를 올렸는데, 누구의 서신이 먼저 도착했는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하루 차이로 도착했다고 한다. 유선은 시중 동윤과 유부장사 장완에게 진위를 물었는데 둘 모두 양의를 보증하고 위연을 의심하였고, 장완이 수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모아 출정하였다.

촉군 본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잔도를 급조해 침착하게 나아갔는데, 위연이 먼저 도착해 남곡구를 점거하고 군을 보내 본대를 역격[9]했다. 이미 아군의 길을 막아 고립시킨 것만으로도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닌데 아예 공격까지 함으로서 더 이상은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스스로 몸을 던져버린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촉군 본대와 위연의 직속부대가 대치하게 되자 양의 등은 왕평을 앞에 세워 위연을 막았다. 왕평이 위연의 선봉대를 만나자 이렇게 외치며 꾸짖었다;
"공(公: 제갈량)이 돌아가셔서 그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거늘, 네놈들은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냐!"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그러자 위연의 사졸들이 잘못이 위연에게 있음을 알고 명을 받들지 않으니 곧 온 군이 모두 달아났다. 여예전에 보면, 제갈량이 죽고 달아났던 병사들이 군에 가기 싫어 호적과 이름을 위조하다가 여예가 시정하였는데, 위연이 이끌던 군세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을 생각하면 이 병사들일 가능성이 있다.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위연은 아들들과 함께 자신의 세력권인 한중으로 달아났는데 양의가 마대를 보내 추격하게 하고 이윽고 붙잡아 참수했다. 양의는 위연의 수급을 보자 일어서서 짓밟으며
"이 하찮은 종놈아! 이래도 못된 짓을 할 수 있겠느냐!"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하고, 나서서 삼족을 멸했다. 양의가 선을 넘는 행동을 했지만[10] 어쨌든 촉군은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2.2. 평가

延旣善養士卒, 勇猛過人, 又性矜高, 當時皆避下之. 唯楊儀不假借延, 延以爲至忿, 有如水火。
위연은 일찍이 사졸을 잘 길렀고, 다른 이들보다 용맹하였으나, 지나쳐 성품이 거만하고 뽐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하고 양보했다. 오직 양의만이 위연에게 가차없어, 위연이 분노하니 마치 물불 같았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亮深惜儀之才幹,憑魏延之驍勇,常恨二人之不平,不忍有所偏廢也。
제갈량은 양의의 재간을 깊이 아끼고, 위연의 효용에 기대니, 언제나 두 사람이 화목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며 어느 한 쪽을 폐하지 못하였다.[11]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魏延以勇略任, ⋯ 覽其擧措, 跡其規矩, 招禍取咎, 無不自己也。
위연은 용략으로 임하였고, ⋯ 이들 모두가 귀중하였다. 행동거지를 살펴 예법을 되짚어 보건대, 화를 부르고 허물을 취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하지 않은 것이 없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12]

2.2.1. 긍정적 평가

위연은 부곡의 낮은 신분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성공한 장군이 된 입지전적의 인물이고, 사졸을 잘 길렀다는 평을 보아 군대 양성에도 능하였다.[13] 또 230년에 오의와 함께 양계에서 곽회, 비요를 격파하고 231년에 고상, 오반과 사마의를 대파하였는데, 이 두 전투는 만만치 않은 적장임에도 거둔 제갈량 생전 최대의 전공이었다.

중국의 근대 사학자 여사면은 "위연의 북벌 의지는 비교적 굳건한 것이었다. 오로지 제갈량이 죽을 날만 바라보며, 전군을 철수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만약 제갈량이 죽고 위연이 병권을 장악했다면, 장완이나 비의 같은 사람은 따르지 않았을 것이나, 그 성패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위연의 죽음은 촉한의 일대 손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정사의 저자 진수는 위연이 위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한중으로 달아난 행보가 그가 반역자는 아니라고 여겼는지 유팽요이위양유전에서 아래와 같이 변호해줬다.
原延意不北降魏而南還者,但欲除殺儀等。平日諸將素不同,冀時論必當以代亮。本指如此。不便背叛。
원래 위연의 뜻은 북쪽 위나라에 투항하는 것이 아니고, 남쪽으로 돌아오되 다만 양의 무리를 죽이고자 할 뿐이었다. 평시 제장들의 뜻이 서로 같지 않았으므로, 시론[14]이 반드시 (자기가) 제갈량을 대신하여야 하길 바란 것이다. 본뜻이 이와 같았으니 배반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제갈량이 병들자 위연 등에게 말했다, “내가 죽은 뒤에 다만 삼가며 스스로 지킬 뿐 다시 (공격하러) 오지 말라.” 위연에게 자신의 사무를 섭행(攝行-대행)하도록 명하고 은밀히 상여를 지니고 떠나게 했다. 마침내 위연이 이를 숨겨 포구(褒口)에 도착하고 이내 발상했다. 제갈량의 장사 양의는 예전부터 위연과 불화했는데, 위연이 군사를 섭행(攝行)하게 되자 해를 입을까 두려워했다. 이에 부풀려서 말하길 위연이 군사를 들어 북쪽에 귀부하려 한다고 하고 마침내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했다. 위연은 본래 이런 마음이 없었으니 싸우지 않고 군이 패주했는데 이를 추격하여 위연을 죽였다.
위략[15]
정사 삼국지』와 『위략』 모두가 일관되게 위연의 뜻이 반란이 아니며 위국에 귀부할 생각도 없었다고 옹호해주고 있다.

더불어 『위략』에도 나와있듯 동정적인 여론이 셌던 것으로 보인다.[16] 군부 최고참이던 인물이 하루아침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몰락했다는 겉으로만 드러난 정보만으로는 적국에서 보아도 동정 여론이 생길 여지는 있다.

당장 위략의 기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위나라에서는 적국의 입장에서 위연 쯤 되는 관직상 사실상 촉나라 북벌군 2인자인 대장이 당연히 제갈량의 죽음 이후 제갈량을 대행해서 군사를 이끌고 후퇴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군 입장에서 제갈량의 발상이나 사무를 대행하는 자는 총사령 제갈량 다음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 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그래서 초반의 이런 판단들이 위략에 그대로 반영되어 위연이 군을 이끌다가 양의에게 역격을 맞았다는 정보가 생성되었을것이다. 실제로 위연 본인도 내가 지금 위치가 어느 위치인데 양의가 총 통솔군이 되어야 하느냐고 반문했고 이것은 타당한 지적이 맞았다.

제갈량은 양의, 비의, 강유만 몰래 불러서 자신이 죽고나서의 퇴각 지침을 알려줬는데 보통의 경우 이런 상황에선 군을 이끄는 2인자에서 통솔을 맡기는 반면, 제갈량의 사후 조치에는 위연에 대해선 이것이 배제되어 있으며, 제갈량이 세운 한중 승상 막부의 주요 중신들로만 퇴각 계획을 짜고, 위연에 대해선 퇴각하던지 위군과 싸우려 하던지 알아서 하도록 방치하라는, 자세히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를 내린다. 이는 즉 촉의 정예인 위연군이 후퇴를 거부하고 위군과의 무모한 싸움을 감행하다가 소모되어도 그냥 방치하라는 주문인데 이런 주문을 할 바에야 차라리 위략 기록대로 위연을 불러서 같이 퇴각 계획을 의논하고 그에게도 중책을 맡기는게 촉군 전체에 대한 '정상적이고 안전한'퇴각 방식일 것이다. 아무리 위연이 주변과 사이가 나빴다고 한들, 일단 위연 쯤 되는 인물과 정치 싸움은 촉군이 안전하게 퇴각하고 나서 해야 할, 우선은 전군의 안전한 퇴각이 원칙인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이렇게 위연을 정상적인 작계에서 배제해 버리니 위연이 무슨짓을 해도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 이후에 발생한 것도 당연하다. 물론 위연이 했다는 생각이 일부 부대는 자신과 남아서 싸워야 한다는, 마치 후대의 강유마냥 무조건 북벌이 먼저라는 식의 대전략관이라, 대체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느냐는 소리나 나올법한 흰소리이긴 해도, 오히려 그런 사고를 실제로 옮길수도 있는 인물이니까 더 제갈량이 정식 작게 안으로 위연을 설득해 제어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17]

이런 기저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제갈량이 본인 사후 한중 막부에서 자신을 대행하는 위치로 위연을 설정하면 이후 막부내의 자신 계파 승상부 인원들이 위연을 제어하지 못할것이라고 판단하여 퇴각의 중책을 맡기지 않은 것이라고 보는게 자연스럽다. 실제로 위연이 군부 내 2인자로써 자신을 제외하고 제갈량 및 승상부 인원들끼리 작당한 퇴각 계획에 반발해 본인이 군을 통솔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어쨌든 제갈량 사후 가장 최고위직인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라고 비의에게 합의점을 제시했을 때 비의는 위연을 속이고 도망가서 같은 일당인 양의, 강유와 함께 위연만 놔두고 일방적으로 철수해 버린다. 사실상 위연은 홀로 덩그러니 위군 앞에 죽으라고 방치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위연이 이런식으로 나오는 승상부 인원들에 대해서 이게 대체 무슨짓이냐고 항변할 권리는 있었던 것이다. 즉 잔도를 태우고 본대를 공격하는 위험한 행위로 위연의 분노가 표출된것은 분명 나라의 존망을 위태롭게 한다고 볼 여지가 있는 위험천만한 행동인것은 분명하되, 위연 입장에서도 노골적으로 퇴각 계획에 자신만 따돌리며 죽으라고 버리고 가는 어처구니 없는 작계를 행하는 행위에 대해서 제갈량 및 승상부 장사들이 본인을 먼저 팽하려고 했다고 항변할 여지는 충분했다. 즉 제갈량의 퇴각 계획은 위연의 반발이 안 나올수가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위연을 방치한다는 어이없는 퇴각 작계로 인해 촉의 정예이자 제갈량의 북벌 내내 혁혁한 공로를 세운 위연의 군대는 삽시간에 붕괴하여 촉군은 싸우지도 않고 주요 병력을 잃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이들이 나중에 뿔뿔히 흩어져 촉 내부에서 사회문제를 일으켜 여예 등이 수습하느냐고 고생하여야 했다. 또한 당장 촉군이 뿌린 남가새를 나막신으로 제거하면서까지 끈질기게 촉군을 추격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일단 촉군의 후방대비 태세가 만만치 않아서 적극적인 공세까진 하지 않았던 사마의가 위연과 양의의 충돌을 듣고 한중으로 진격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제갈량의 이런 잘못된 작계가 당시 촉군을 얼마나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제갈량의 죽음은 대외비였기에 왕평이 제갈량의 죽음을 위연군에게 공표하면서 위연군이 뭔가 자신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싸우다가 일이 수습되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촉군간의 격한 내전으로 사마의에게 크게 당할 수 있었던 것이고 흔히 말하는 사공명주생중달은 제갈량을 비웃는 말이 될 수도 있던 것이다. 즉 234년 촉군 퇴각 당시 위연과 양의의 마찰로 인한 촉군끼리의 충돌은 근본적으로 제갈량의 잘못된 퇴각작계에서 나온 어처구니 없는 손실이며 위연과 양의 말고도 당시 퇴각에 관여했던 촉군 수뇌부 전체에게도 크건 작건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런 유비의 마지막 코미나투스인 위연이 제갈량의 막부에게 따돌림 당한 끝에 살해당한 일은 근본적으로 한중 막부가 유비의 코미나투스 집단이 소멸되고 그 자리를 대체한 촉의 실질적인 권력 중추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한중 막부에서 좌천된 인물들이 원래는 중앙조정이었어야 할 성도로 '좌천'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유비 사후 제갈량이 북벌 과정에서 한중 남정현에 세운 한중 막부야 말로 촉의 진정한 조정이자 수도였던 셈이다.

2.2.2. 부정적 평가

위연은 성격 및 처세술에서 결함이 많았다. 일단 기본 성격부터 거만한지라 주변 사람들과 사이가 나빴다. 진수도 그가 반란할 뜻은 없었을거라고 변호해줬지만, 성격과 처신 문제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스스로 자초했다는 지적을 남겼으며, 그의 이런 면모는 제갈량과 비의, 위연 본인, 앙숙인 양의 등의 기록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양의와는 틈만 나면 서로 다퉈대서 제갈량은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공정하게 중립을 지키며 둘이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더불어 제갈량이 없을 때는 비의가 중재를 했고, 감척론이라는 글까지 지어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일렀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18] 물론 성격 및 인간관계만 나쁘고 군인으로서 역할을 제갈량 사후에도 충실히 했다면 경력과 위치를 감안했을 때 계속 중역을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의 최종 명령을 거부하고 동료 납치 구금 시도, 탈영, 거짓 상서로 국가 내부에 혼란 유도, 아군의 퇴로를 끊고 팀킬 시도 등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위연은 돌이킬 수 없게 선을 넘어버렸다. 당연하지만 이런 행보를 보인 시점에서 적국에 투항을 하지 않았다지만 상기된 행보를 통해 내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가 결코 충의지사라고는 할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다.[19]

그리고 '상식적'으로 위연에게 이양했다면, 위연 자신이 "나는 제군을 이끌고 도적들과 계속 싸울 것이다(我当自率领诸军击贼)" 라고 말했듯이 제갈량의 퇴각명령을 없었던 것으로 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연에게 애초에 이 일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며, 왕평의 말에 위연의 병사들이 알아서 해산한 것을 보면, 위연의 병사들 또한 위연의 행동이 올바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위연이 엄연히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분명하며 사정이 있다해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만큼, 위연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해도 퇴각로를 막고 아군을 공격한 것으로 결론적으로 반란자임에는 분명하다.[20] 그리고 진수도 "배신을 할 생각은 아니였고 양의를 제거하고자 할 뿐이였다(只是想要除掉杨仪及其手下等人)" 라고 평가함으로서, 아군을 공격한 것도 분노의 영향은 있었겠지만 "양의를 제거한다", 즉 단순히 열받아서 공격한 게 아닌 확실한 목적을 갖고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열받아서 아군을 공격한 것도 문제가 되는데, 나의 경쟁자를 죽이겠다는 불순한 목적을 갖고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의가 오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손권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이때 손권은 위연과 양의를 나란히 디스한 적이 있다.
양의와 위연은 소치는 목동이어서 일찍이 당시 해야할 일에 있어서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정도의 보탬을 주었지만(=즉 활동이 미비했다는 말) 그들에게 일을 맡겼으니 가볍게 취급할 수 없다. 만약 어느날에 제갈량이 없게 되면 반드시 화란이 일어날 것인데, 제군은 심란하기만 하여 이런 일에서 생기는 염려를 막을 줄도 모르는데 어찌 자손에게까지 끼칠 꾀를 내겠는가?
비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양의와 위연이 협조를 하지 못하는 것은 사사로운 분노로 인한것 뿐이고 경포나 한신처럼 황제를 어렵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강적을 소제하고 화하를 하나로 하는데 있어서 공로는 재주를 가지고 이룩하고, 업적은 재주로 말미암아서 넓어지는 것이니 만약 이 사람들을 버리고 맡기지 않는다면 그들의 후환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풍파를 막으려다가 거꾸로 배를 못 쓰게 하는 것과 같으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 손권이 '당장은 급해서 제갈량이 쓰고 있지만 둘 다 성격이 안 좋은데 제갈량마저 없어지면 분명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고 묻고, 비의는 '두 사람의 문제는 단순 성격 탓일 뿐 당장의 강적(위나라)을 상대하는데 도움이 되는데 어찌 안 쓰겠습니까' 라고 반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둘 다 맞는 말을 한 것인데, 당장은 저 둘의 재능이 중히 쓰이긴 했고, 제갈량이 없어지자 정말로 순식간에 둘 다 차례로 문제를 일으키며 피해를 입히고 자멸해버렸기 때문.[21] 사실 둘의 대체제는 있었으나, 그 둘보다 일찍 죽은 게 문제였다. 일례로 양의를 대신할 인재로는 마량이 있었는데, 하필 마량은 이릉대전에서 전사해버린 상황이었다. 그리고 위연의 경우는 조운이 있었으나, 조운은 나이가 너무 많은데다 저 시점에서는 이미 노환으로 사망해서 천수를 넘어가 버린 상황이었다.[22]

양희는 『계한보신찬』에서 "문장[23]은 강직하고 용맹하며, 어려움에 임하여 명령을 받아 외적을 막아 싸우고 국경을 지켰다. 그러나 협력하지도 않았고, 조화를 이루지도 않았으며, 절개를 잊고 반란의 뜻을 언급했다. 그래서 최후의 행동은 증오를 받았고, 최초의 공적은 아낌을 받았는데, 이것은 실로 그의 본성이었다."라고 언급했으며, 호삼성은 『자치통감』에 음주를 달면서 "위연이 비록 반역할 뜻을 갖고 있지는 않았어도 그에게 보정(輔政)을 맡겼다면 촉한의 멸망을 재촉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위연은 군인으로서 능력은 우수했을지언정 치명적인 성격적 단점이 원인이 되어 스스로 화를 자초한 장단점이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 인물이다. 위연의 기록이 적힌 유팽요이유위양전(劉彭廖李劉魏楊傳)에 포함된 인물들은 각자 역할 및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잘못된 처신이나 성격 문제 등으로 인해 화를 자초하여 죽거나 쓸쓸한 말로를 보낸 인물들을 엮어놓았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위연과 같은 이유로 최후를 맞이한 경우는 역사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니 조직활동은 개인의 능력과 지위만 아니라 인망도 중요하다는 사례 중 하나다.[24]

3. 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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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이 짤방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를 패러디한 위연
생김새는 관우와 비슷하게 나오는데 얼굴이 대춧빛, 신장이 9척으로 묘사된다. 성격이 오만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심지어 가정본에서는 대놓고 관우와 닮았다고 묘사하지만, 모종강본에서는 반란분자인 위연이 충의지사인 관우와 닮았다는 사실이 불쾌했는지 이러한 문구를 삭제하고 신장도 8척으로 너프(?)시켰다. 너프 시켜도 장신이다.

연의에서는 수혜자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피해자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평면적인 인물들과 차별화되는 이른바 반골의 상으로 인하여, 고전소설 답지않게 세심하게 복선을 깔고 묘사에 신경을 많이 쓴 입체적인 캐릭터다. 2세대 촉장들은 오호대장군과 그 후손들에 밀려 묻혀버린 케이스가 많은데, 조조를 활로 쏴서 이빨 몇 개를 부러뜨리고 낙마시킨 뒤 목을 베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휘하장수들의 반격으로 물러나는 장면도 있고, 일기토 전력도 꽤 화려한 버프를 받았다. 왕쌍을 베어버리는 등 전반적으로 보자면 굉장히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내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인물.

정사에서는 본래 유비의 부곡 출신이었다는 것과는 달리, 왠지 다른 진영에 있는데 뜬금없이 엄청난 유비빠 짓을 반복하면서 상당히 인상적인 등장을 반복한다. 바닥에 있던 자신을 사령관급까지 올려준 사람이 유비니 실제로 충성심이 대단하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의에서는 다른 진영에 있던 인물로 설정되었으니 무슨 유비의 패왕색에라도 홀린 것같은 묘한 묘사가 된 것. 이는 아마도 실제 정사에서도 위연 본인의 고향은 유비와 같은 유주가 아닌 원래부터 형주였기 때문에 이를 두고 처음부터 형주 방면 소속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그럴 듯 하게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25]

유표 사후 유비가 백성들을 이끌고 형주성 앞에 도달했을 때 유종군의 일원으로 첫 등장한다. 이때 채모와 싸우며 유비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하나 실패한다. 유비는 갈 길이 급하고 형주성을 놓고 싸우고 싶지 않아 장판파 쪽으로 도망가버리고, 위연은 유비를 따라가려고 하니 뒤쳐저벼렸고 반란을 일으킨 만큼 형주에 남을 수도 없어서, 남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선택한다.

여기서 장사태수 한현[26]의 수하로 있다가, 유비가 형남 4군 평정에 나서자 관우황충의 대결이 벌어진다. 성질 급한 한현이 황충을 오해하여 처형하려 하자 의로운 장군을 죽이려는 처사에 분개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한현을 죽이고[27] 유비에게 투항한다.

관우군이 겨우 500명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장사 함락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분명 위연이었다. 이렇게 환대를 받으며 유비 진영에 합류하는 듯 했는데, 별안간 제갈량에게 "반골의 상이 있다."며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다. 제갈량은 위연의 불충불의한 배신행각(형주에 대한), 그리고 관상을 보니 훗날 반드시 반역을 꾀할 상이니, 당장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비의 만류로 살아났다[28]. 이는 범증유비의 일화를 합친 것으로 보인다.[29]

아무튼 유비군의 일원이 되어서 입촉과 한중 공방전 때 공을 세우고 오호대장군 다음 가는 위치가 된다. 하지만 너무 공격적이고 전공 욕심이 강한 성격 탓에 냉포와 싸울 때 황충과 공을 놓고 살짝 마찰을 빚기도 했고, 가맹관 전투 때는 마대의 계략에 말려 부상을 입었다. 또 제갈량이 자오곡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걸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래도 후기의 필두 명장으로 대접받아 공적도 많이 세운다.

삼국지연의 가정본에 달린 주석에는 제갈량이 상방곡에서 계획적으로 위연도 사마의 부자와 함께 죽이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연히 나관중이 만든 이야기도 아니고 그저 누군가가 덧붙인 이야기에 불과하기에 모종강본에서는 당연히 그런 묘사를 무시했다.

그런데 병세가 부쩍 악화된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자신의 목숨을 연장시키려고 북두칠성에 기도를 하는 가운데, 위군이 습격해오자 장막에 들어오지 말라는 밖에서 굳게 지키고 있던 강유의 지시도 무시하고 헐레벌떡 들어갔다가 그만 주등을 쓰러뜨리면서 기도를 망쳐버린다. 제갈량은 의식이 실패했음을 알고 안타까움에 한탄하였고, 특히 수비를 맡던 강유가 가장 분기탱천해서 위연의 목을 베어버리려고 하나, 제갈량은 결국 위연이 들어온 것도 하늘의 뜻이었다며 위연을 용서해주는 대인배스런 모습을 보였다[30]. 제갈량 사후, 퇴각을 하다가 정사와 비슷하게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때 마대를 끌어들여서 일을 꾸민다.

최후도 굉장히 극적인데, 제갈량은 죽기 전 "위연이 모반하거든 열어보라!"며 지령이 담긴 주머니를 양의에게 남겼다. 양의는 반란을 일으킨 위연을 만나러 가서, 주머니에 든 지령대로 위연에게 "누가 나를 죽이겠는가?"라고 세 번만 말하면 군권을 위연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위연은 코웃음을 치며 "누가 감히 나를 죽이겠는가?"라고 소리치자, 제갈량의 밀명을 받고 위연의 부하인 척 위장잠입했던 마대"내가 너를 죽이겠다!"라며 득달같이 달려와서 목을 베어버렸다.

원래 반란을 일으킨 수장은 삼족을 멸해야 하나 유선은 역도인 위연의 과거 공을 보아 그를 장례지내주었는데, 급박한 상황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위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충절을 보아 사후 대접을 후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오나라 군주 손권도 정사와 동일하게 위연이 용맹하지만 마음은 바르지 못하다고 깐다.

여담으로 일기토로 사마의에게 패한 적이 있다. 물론 진짜 실력으로 패했다기보다는, 호로곡 전투 이전 사마의를 유인하려고 일부러 일기토를 건 뒤 달아난 것이지만, 연의상에선 문관의 이미지로 나온 사마의가 일기토에 직접 응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게다가 사마의는 후반부 촉나라 무력 원탑인 위연이 거짓패배해서 도망가자, 추호의 의심도 없이 추격하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마의는 자신의 무예에 자신이 있었던 걸까? 결국 결론은 이하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1. 위연은 일기토로 사마의를 해치울 자신이 없어서 제갈량의 계책을 집행했으며 위연이 사마의에게 패배해도 납득이 갈 정도로 사마의의 무력이 높았거다. 2. 사마의가 무력 허접인데 위연은 상바보라서 쉽게 사마의를 해치울 기회를 버렸고, 사마의도 상바보라서 너무 뻔한 유인책을 간파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자든 후자든 둘다 말이 안된다. 하여 현대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삼국지 매체에서 일기토 부분을 삭제한다. 현대에서 굳혀진 문관 사마의의 이미지도 크고, 창작임을 감안해도 사마의의 일기토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4. 기타

"승상께서 돌아가셨을 때 내가 군을 이끌고 위씨(魏氏)에 갔다면 내가 어찌 이리도 몰락했겠소! 스스로 꾸짖어 봤자 다시 미칠 수 없소이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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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 신둥현에 있는 위연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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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 있는 위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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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 있는 위연상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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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現) 하남성 남양시 퉁바이(桐柏)현[2] 부곡의 뜻이 노예, 노비를 포함하기 때문에 천민에서 출세하였다고 오해할 수 있으나,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남북조시대 이후이고 후한 시기 부곡은 사병을 뜻한다.[3] 직속상관이자 군 최고통수권자에게 사실상 겁쟁이라고 말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4] 훗날 곽회가 관중을 총괄하면서 촉한의 북벌을 아주 순조롭게 상대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 곽회를 격파한 위연의 군사적 역량은 상당했음을 가늠할 수 있다.[5] 이엄을 탄핵하는 표문에서 확인된다.[6] 한편 『위략』은 제갈량이 위연 등에게 "내가 죽은 뒤에 삼갈 뿐 다신 오지 말라." 하며 위연에게 자신의 사무와 장례를 은밀히 맡겼는데, 위연이 이를 숨겨 포구에서 발상했다. 이때 사이가 좋지 않은 양의가 위연이 위에 귀부하려 한다고 모함하며 자신의 군사로 공격하였고, 위연은 배반의 뜻이 없었으므로 싸우지 않고 패주했는데 양의가 위연을 뒤쫓아 죽였다고 전한다. 배송지는 이는 적국에서 전해 들은 말로 보이니, 본전과 논하여 살펴 알 수는 없다고 하였다. 다만 『자치통감』에서는 본전의 기록을 따랐다.[7] 部勒, 부서를 정하여 인원을 배치하거나 혹은 부대를 나누어 인원수를 갖춤. #[8] 기록으로 미루어 제갈량이 지휘하는 촉군 본대와 연계를 위해 따로 주둔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9] 逆擊, 자기 편을 치려고 향(向)하여 오는 군사(軍士)를 맞받아 침. #[10] 위연이 내란을 획책했다가 실패하여 그 자신과 자식들이 죽임을 당한 건 자업자득이지만 남은 삼족에 대한 처분은 국가에서 진행하고 결정할 일인데 양의가 독단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건 그가 자기가 제갈량의 정식 후계자니까 그래도 된다는 대단한 착각에서 나온 만행이다.[11] 화양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은 어느 하나를 편들지 않고 감척론(甘戚論)이라는 글까지 지어 두 사람을 깨우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12] 출처: 파성넷[13] 위연의 사졸들은 왕평의 꾸짖음으로 흩어진 일, 그리고 전술했듯 <여예전>에서 제갈량이 죽고 난 뒤 군이 달아난 일에서 2번 언급되는데, 따로 언급될 정도면 규모도 상당하고 꽤 정예 부대였던 것 같다.[14] 時論, 한 시대의 여론. #[15] 출처: 파성넷[16] 물론 배송지가 말했듯 어느 것이 사실인진 알 수 없다. 그러나 적국인 위나라에서는 이렇게 알려져 있었다는 말이다.[17] 한걸음 나아가서 위략의 말이 진실이라 애초에 위연 역시 무작정 위를 공격할 마음을 없었고 촉서 기록이야 말로 위연을 무식한 반역자 무부로 조작하려는 시도일 가능성도 있긴 하다. 성도에 있던 장완, 동윤 등의 제갈량의 최측근들 역시 본인들과 가까운 관계인 양의, 비의, 강유쪽에 반대되는 위연이야 말로 역적이라고 별 다른 근거없이 처음부터 단언하고 들었기 때문이다. 반대되는 자료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배송지의 의견도 실은 양측 가운데 어느것이 사실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얘기다.[18] 대표적으로 어느 날에는 양의와 말다툼이 격해지자 칼을 뽑아 겨눈 적도 있다. 둘의 당시 위치를 감안하면 제갈량이 주도한 회의에는 웬만하면 빠지지 않고 참여했을 테니 제갈량 앞에서 대놓고 이런 추태를 부렸다고 어렵지 않게 파악이 가능하다. 제갈량이 수틀린다고 동료에게 무기를 겨눈 위연이나 지지 않고 계속 개기며 어그로를 끌어대는 양의 중 누구도 자기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상급자와 동료들 앞에서도 틈만 나면 다투는 이들이 신하들 중 으뜸 자리에 올라서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았을 테니 취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맞아떨어졌다.[19] 한중으로 달아나려고 했다는 점도 어떻게든 그곳에 가 끝까지 물고늘어지겠다는 의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리고 위연이 한중에 도망치는데 성공했다면 사태는 더욱 커져서 이 상황을 알아차린 위나라가 개입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나올지도 몰랐다.[20] 그의 라이벌인 양의는 "위나라에 귀순했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입을 털어서 죽을 뻔했고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죽었다, 입만 털었는데도 잠재적 배신자 취급받고 죽었는데 실제로 원정군을 다 죽일뻔했고 아군을 공격했으니 말이 필요없다.[21] 이 대화에서 손권은 물론이고 비의도 그래도 능력은 있다고 말해줄지언정 인성 문제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 위연과 양의의 인성이 얼마나 형편없는지에 대해 뜻이 같다는 점이다.[22] 조운은 지휘관으로서 경력이 전무했지만, 관장마황이 모두 세상을 떠난 이후 홀로 남은 1세대 군부 최고참이자 모범적인 군인이었다. 때문에 그가 제갈량을 도와 중심을 잡아줬다면 제 아무리 위연과 양의라도 대놓고 내부에서 트롤링을 할 엄두를 못냈을 거다.[23] 文長, 위연의 자이다.[24] 위연과 대비된 인물이 바로 그의 상관이던 제갈량으로 그는 마음을 잘못 먹으면 아예 나라를 뒤집을만한 자리에 있었지만 2대를 섬기면서도 끝까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충성하면서도 늘 모범적으로 처신하여 사후에도 존경을 받았다.[25]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위연이 출생했을 시기의 한나라당고의 화 이후 나라 자체가 헬게이트였기 때문에 영토 내 거의 모든 지역에서 대량의 유랑민이 발생했고 어린 시절의 위연 또한 형주 출신 유랑민으로서 유비의 본적지인 유주까지 흘러갔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26] 한현은 인격이 몹시 개차반이어서 본인의 부하 장수들과 백성들에게 신뢰를 단단히 잃은 사람이었다.[27] 이 과정에서 황충은 이 장면이 몹시 끔찍했는지 눈을 가리고 본인의 자택으로 황급히 돌아가 버렸다.[28] 덤으로 이후 황충도 정식으로 유비의 부하가 된다.[29] 범증은 유방의 관상이 제왕의 상이라며 한사코 죽이려고 했고, 유비는 오왕(吳正)으로 임명될 때 난데없이 삼촌 유방한테서 "네가 반란의 상이라던데?"라는 얘기를 들어서 식겁하고 거듭 충성 맹세를 했다고 한다. 유비는 진짜로 반란했지만 말이다.[30] 제갈량 본인이 위연에 대해 반골이라면서 맘에 안 들어 했는데, 그런 사람을 용서해 준데서 보통 대인배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제갈량 본인도 맘 같아서는 본인의 일을 망쳐버린 위연에 대해 불같이 호통을 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위연은 이런 제갈량의 은혜에 보답은 커녕 제갈량 사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어버리면서 제갈량의 뒤통수를 제대로 쳐 버렸다는 것이다.[31] 화양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자신이 잘못된다면 장완이 뒤를 이을만한 재목이며, 양의는 성정이 편협하고 성급하다는 표를 은밀히 올렸다고 나와있다.[32] 또 비슷하게 원술이 세운 중나라 역시 중씨(仲氏)라고 불렸다.[33] 물론 유언의 내용은 거짓이고, 저 거짓 유언을 작성했다는 인물은 나중에 자신이 만들고 조작했다는 걸 실토하면서도, 위연 정도면 저런 유언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어울린다는 식으로 오히려 적반하장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