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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지명/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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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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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60년형주지도.png
1. 개요2. 소속 형주자사부, 일명 영주
2.1. 남양군(南陽郡)
2.1.1. 육양군(淯陽郡)2.1.2. 의양군(義陽郡)
2.2. 남향군(南鄕郡)2.3. 양양군(襄陽郡)
2.3.1. 양양남부도위부(襄陽南部都尉部)
2.4. 강하군(江夏郡)
2.4.1. 강하남부도위부(江夏南部都尉部)
2.5. 위흥군(魏興郡)
2.5.1. 석군(錫郡)
2.6. 상용군(上庸郡)2.7. 신성군(新城郡)
3. 소속 형주목
3.1. 남군(南郡)3.2. 강하군(江夏郡)
3.2.1. 무창군(武昌郡)
3.3. 의도군(宜都郡)3.4. 건평군(建平郡)3.5. 무릉군(武陵郡)
3.5.1. 천문군(天門郡)
3.6. 장사군(長沙郡)
3.6.1. 한창군(漢昌郡)
3.7. 형양군(衡陽郡)3.8. 상동군(湘東郡)3.9. 영릉군(零陵郡)
3.9.1. 영양군(營陽郡)3.9.2. 시안군(始安郡)3.9.3. 소릉군(昭陵郡)
3.10. 계양군(桂陽郡)
3.10.1. 시흥군(始興郡)
3.11. 임하군(臨賀郡)
4. 같이보기

1. 개요


기원전 107년에 처음 자사를 설치할 때, 이 방면을 맡는 자사의 감찰 구역이 원래 예주 이남의 남부 지방을 가리키던 지방 이름인 형주(荊州)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형주자사부가 되었다. 사실 형주는 초나라를 형만(荊蠻)으로 멸칭하면서 발생한 이름이다. 현재의 후난성후베이성 전역 및 허난성 남부 지역에 해당한다.

후한 때 형주자사의 치소는 무릉군 한수현에 있었는데, 190년에 유표가 형주자사가 되었을 당시 부임할 수 없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형주 상황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으로, 189년에 장사태수 손견이 형주자사 왕예를 살해했고, 원술은 손견을 사주해 남양태수 장자를 죽여 남양군을 점거하였으며, 호족들의 사병들을 가리키는 '종적(宗賊)'들이 각지에서 할거하고 있었다. 결국 유표는 초나라 때 북진수(北津戍)로 불리던 곳에 새로운 성을 건설하여 남군 양양현을 이전해 오고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다. 채모괴월 같은 양양 호족들의 협력을 얻어 형주 각지에서 할거하던 호족들을 살해하여 각 군·현을 장악하고, 반동탁연합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원술을 인정했다. 이후 원술이 원소와 대립하자 유표는 원소에게 협력했는데, 이에 원술이 손견을 보내 최대의 위기를 맞았으나, 손견을 기습하여 전사시켰다. 193년 무렵에 형주목으로 승격하고 원술도 남양군에서 완전히 쫓아내어, 명실상부한 형주 전역의 통치자가 되었고 형주 안에서는 황제와 같은 행세를 했다. 유표는 삼보(三輔)에서 밀려난 장제-장수 세력을 남양군 일대에 배치해 조조의 남하에 대비하였으나, 동쪽으로는 손견의 아들인 손책이 양주(揚州) 강동 일대를 장악하면서 손견의 복수를 명목으로 유표와 적대했고, 남쪽으로는 장사태수 장선이 영릉군·계양군까지 끌어들여 유표에게 반기를 들었기에, 형주 이외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3군을 제압한 뒤에는 교주목 장진이 죽은 틈을 타서 뇌공을 교주자사로 임명해 교주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자신이 임명한 창오태수 오거가 독립하여 실패했다.

유표는 오거에게 교주로의 진출을 저지당한 뒤로는 세력 확장을 시도하지 못했다. 관도대전 이후부터 기존에 유표를 지원해오던 양양 호족들은 형주에서의 할거를 중단하고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유표에게 요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표는 조조와 적대하는 유비를 받아들여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시킴으로 조조와의 대치를 이어갔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이들의 반발을 억누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208년에 손권이 강하태수 황조를 살해하고 강하군·장사군·남군의 동부지역을 점거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해 유표가 죽자, 유종이 채모 등의 추대를 받아 형주자사를 승계하면서 곧바로 조조에게 투항했고,[1] 이를 기회로 여긴 조조는 곧바로 형주로 남하했다.

그러나 같은 해 적벽대전으로 조조의 남하는 저지되었고, 유비손권의 연합군은 그대로 남군을 공격하여 209년에 남군을 지키던 조인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남군을 점령하자 손권은 멋대로 주유를 남군태수에 임명했다. 이때 유비는 유표의 장남인 유기를 유표의 후계자로 추대하고, 공안에 새로운 형주목의 치소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유기가 죽자 유기의 후계자로써 형주목을 자칭했으며, 형주 현지에서도 유비에 호응했는지 유비는 순식간에 형주 남부의 4군을 장악하였다. 형주를 차지하려던 손권과 주유에겐 달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세력은 충돌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때 유비가 직접 단도현의 경성으로 손권을 직접 찾아가 손권을 거기장군 겸 서주목으로 추대하고, 손권은 자기 여동생을 유비와 혼인시켜 유비를 감시하게 했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아마도 이 시점에 유비가 스스로 '형주대여론'을 손권에게 직접 제시하면서, 손권에게서 형주 지역의 태수로 임명되어 활동하는 주유와 황개 등의 퇴거를 요구하고, 토로장군에 불과하여 부하들을 장군으로 임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손권에게 거기장군 추대를 제안하는 정치적 이득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 손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주유가 완강하게 이를 반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주유가 죽자 강하태수 정보가 남군태수 직을 이었는데, 그 직후에 손권이 결국 유비의 '형주대여론'을 수용했는지, 결국 정보를 다시 강하태수로 임명한 것이 확인된다.

210년을 기준으로 형주 분할 상황을 정리하면, 조조가 남양군·남향군·장릉군·양양군을, 유비가 남군·의도군·장사군·계양군·무릉군·영릉군과 강하군 일부를 차지했으며, 손권이 황조를 죽이고 차지했던 지역은 손권의 영역으로 남았다. 손권이 차지한 장사군·남군 지역에는 한창군이 설치되어 노숙이 주둔했으며, 강하군에는 정보가 주둔했다. 강하군은 대체로 동·서로 유비와 손권이 양분한 가운데, 황조가 죽은 시점에 장강 이북의 강하군 동북부는 조조에게 투항하여 양주 기춘군으로 분할되었다.

이후 손권은 교주로 관심을 돌려 211년에 오거를 멸망시켜 교주를 장악했고, 오거와 교분이 있었던 유비는 이를 묵인했다. 214년에 손권은 합비에서 패전하여 예주와 서주 방면으로의 진출이 저지당하자, 당시 익주를 차지한 유비에게 '형주대여론'을 명분으로 형주를 돌려달라는 요구를 했고, 유비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손권이 실력을 행사해 유비의 영역을 침공하여, 장사군 익양에서 대치했다. 그 와중에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자, 유비는 더 이상의 대치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손권과 협상에 들어갔고, 결국 두 세력은 215년에 유비가 남군·무릉군·영릉군·의도군을 손권이 장사군·계양군·강하군·한창군을 갖는 것으로 형주 분할에 합의했다.

그러나 손권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고, 219년에 관우가 북상하여 번성을 포위하고 있었을 때 여몽을 보내 유비의 형주 4군을 기습하여 점령했다. 유비는 이에 즉시 대응하지 못하다가 221년에 황제에 오른 뒤에 곧바로 손권에게 보복을 개시했으나, 이릉대전에서 참패를 겪어 형주 수복에 실패했다. 이로써 형주는 적벽대전 이후 3분할 되었다가, 이릉대전 이후 위나라와 오나라가 양분하여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223년 무렵 위나라의 강하태수 문빙이 강하군 서북부를 점령하여 강하군이 다시 분할되었다. 260년을 기준으로 위나라는 남양군·남향군·양양군·강하군과 원래 익주 소속이던 위흥군·상용군·신성군을 관할했으며, 오나라는 남군·의도군·건평군·강하군·무릉군·장사군·형양군·상동군·영릉군·계양군·임하군을 관할했다.

2. 소속 형주자사부, 일명 영주

219년에 조조는 손권을 공식적인 형주목으로 인정했는데, 이듬해 조조가 죽자 그 뒤를 이은 조비가 선양을 받고 손권을 오왕에 책봉하면서 손권의 종속을 확실히 하고자 했다. 조비는 손등을 낙양으로 보내올 것을 요구하는 한편, 222년 5월에는 손권이 차지하고 있는 양주(揚州)와 형주 영역을 형주로 재편하고 위나라 영역 내의 형주 북부지역을 형주에서 분리하여 영주(郢州)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손권은 오왕 책봉은 받아들이면서 손등을 보내지 않았고, 이에 조비는 손권이 종속할 의사가 없음을 확신하여 같은 해 10월에 손권의 책봉을 취소하고 형주목 지위를 부정하면서 형주 재편 조치를 환원하여 영주를 다시 형주로 고쳤다. 한편 220년에 맹달이 투항하자 익주의 서성군·상용군·방릉군을 공략했는데, 이때 상용군과 방릉군을 통합해 신성군으로 만들고 모두 형주에 소속시켰다.

263년에 촉한이 멸망하자 오나라는 건평군을 통해 익주를 점거하려고 했으나, 나헌이 이를 격파하였다. 오히려 이 여파로 무릉군 4현이 위나라로 투항하여, 나헌이 무릉태수 겸 파동감군으로 임명되었다. 269년에는 나헌이 북상해 건평군의 무현·건시현을 점령하여 건평도위를 설치했고, 275년에 건평도위부를 건평군으로 승격시켰다. 서진이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형주를 다시 통합하였는데, 이때 분할되어 있던 강하군·무릉군·건평군도 함께 재통합 되었다.

2.1. 남양군(南陽郡)

진(秦)나라가 기원전 272년에 처음 설치했다. 190년 무렵에 유표가 남양군을 분할해 장릉군을 설치했다. 이 시점에는 원술이 남양군을 차지하고 있었다가 193년 무렵에 철수했고, 비슷한 시기에 삼보에서 밀려난 장제가 남양군 지역을 장악했는데, 유표는 이들을 쫓아내지 않고 남양군 점거를 묵인했다. 장제 세력을 물려받은 장수는 200년에 조조에게 투항했다.

후한 말에 신야현 북쪽에 위치한 육양현에서 둔전이 시행되어 남양전농(南陽典農)이 운영되었다. 한편 관도대전 이후에 유비는 유표에게 귀순했는데, 유표는 유비를 신야현에 주둔시키며 조조의 남하에 대비했다. 남양전농은 장수가 조조에 투항한 뒤에 운영될 수 있었을 것이며, 관도대전 이후 남양군 대치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유표와 조조는 각각 유비와 남양전농관을 대치시켜 신야현을 경계로 남양군을 남북으로 양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향군의 전신이 된 전농관 또한 비슷한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208년에 유표 사후 조조가 형주를 장악하자, 남양전농을 다시 남양태수로 환원했고 남향군 지역의 전농부 또한 남향군으로 승격한 것으로 추측된다.
지명 [-272]남양군→[200]남양국(南陽國)→[200]남양군→[277]남양국
소속 진(秦)→[전한]형주자사부→[9]보충신향→[23]형주자사부→[서진]형주
치소 완현
남양전농: 육양현
장릉군: [190?]장릉현, [서진]신야현
분합 [200?]남양전농→[208?]폐지: 육양현·완현·관군현·섭현·서악현·치현·노양현·주현·도양현·박망현·무음현·비양현·극양현·열양현·양현·안중현
[190?]장릉군→[222]장릉국→[222]의양국→[222]의양군→[253]남양군에 합병→[265]의양국 재설치: 장릉현·평지현·수현·부양현·양향현 및 강하군 평춘현·맹현?
[208]남향군: 남향현·음현·찬현·축양현·무당현·순양국·단수현·석현
전입 [237]양양군 약현→의양군, [253]의양군 수현·부양현·양향현
설치 [222?]의양국 의양현·평림현, [서진]궐서현
폐지 [삼국]성도현·부양현·양향현, [서진]호양현·안중현
전출 [208]장릉군 맹현→강하군?, [253]의양군 평춘현→강하군 및 의양군 약현→양양군, [서진]신야현·등현·조양현·채양현·극양현·양현→의양국
출신 신야현: 유선, 등지, 내민
완현: 하진, 문빙
극양현: 등애
안중현: 종예
현 미상: 황충, 누규
봉작 유빙: 남양왕(200)
조거: 장릉왕(222)→의양왕(222)
사마망: 의양왕(265~)
사마간: 남양왕(277~)
손화: 남양왕(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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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현: 완현, 섭현, 등현, 채양현, 찬현, 비양현, 낙성현, 노양현, 박망현, 음현, 호양현, 주현, 양현, 석현, 수현, 신야현, 역현, 평지현, 치현, 양성현, 신도현, 산도현, 단수현, 축양현, 신음현(新陰縣·연혁 미상), 남릉현(南陵縣·연혁 미상), 부현(復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남양군(36현 359,316호 1,942,051구): 완현(47,547호), 주현, 두연현, 찬국, 육양현, 박산국, 열양현, 음현, 도양현, 치현, 산도현, 채양현, 신야현, 축양현, 극양현, 무당현, 무음현, 서악현, 양현, 역현, 안중국, 관군현, 비양현, 평지현, 수현, 섭현, 등현, 조양현, 노양현, 용릉국, 신도국, 호양현, 홍양국, 낙성국, 박망국, 부양국
남양군→보충신향 전수군(前隊郡), 완현→남양현(南陽縣), 두연현→윤연현(閏衍縣), 찬국→남경현(南庚縣), 열양현→전정현(前亭縣), 도양현→양성현(陽城縣), 축양현→의화현(宜禾縣), 양현→농양현(農穰縣), 평지현→평선현(平善縣), 조양현→여신현(厲信縣), 신도국→신림현(新林縣), 홍양국→홍유현(紅兪縣), 박망국→의락현(宜樂縣)
후한 남양군(37성 528,551호 2,439,618구): 완현, 관군읍, 섭현, 신야현, 장릉현, 서악현, 치현, 노양현, 주현, 도양현, 박망현, 무음읍, 비양현, 부양국, 평지현, 극양현, 호양읍, 수현, 육양읍, 열양현, 음현, 찬현, 등현, 산도국, 역국, 양현, 조양현, 채양국, 안중국, 축양국, 무당현, 순양국, 성도현, 양향현, 남향현, 단수현, 석현
서진 남양국(14현 24,400호): 완현, 서악현, 치현, 노양현, 주현, 육양현, 박망현, 도양현, 섭현, 무음현, 비양현, 열양현, 관군현, 역현
의양군(12현 19,000호): 신야현, 양현, 등현, 채양현, 수현, 안창현, 극양현, 궐서현, 평지현, 의양현, 평림현, 조양현 }}}}}}}}}

2.1.1. 육양군(淯陽郡)

둔전제 시절 남양전농(南陽典農)이 임명되어 육양현에 치소를 두고 있었는데, 이것이 중랑장인지 교위였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정식명칭은 남양전농중랑장부나 남양전농교위부였겠지만, 당시에 남양전농을 설치하고 육양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둔전제가 폐지된 264년에 실제로 군(郡)으로 독립하지 못한 것을 보면, 264년 이전에 전농관이 폐지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며, 육양현 이외에 어떤 현들이 소속되었는지 알 수 없다. 조조장수의 항복을 받은 뒤에 완현 주변의 남양군 북부를 장악하고 있었을 때 운영되고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따른다면, 관도대전 이후 조조는 유표와 육양현-신야현을 경계로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던 것으로 볼 수 있어, 육양현 이외에 완현·관군현·섭현·서악현·치현·노양현·주현·도양현·박망현·무음현·비양현·극양현·열양현·양현·안중현 등이 남양전농관 소속이었으며, 유표 사후에 다시 남양태수로 전환된 것으로 추측된다.

2.1.2. 의양군(義陽郡)

원래 유표가 190년 무렵 남양군 장릉현·평지현·수현·부양현·양향현 및 강하군 평춘현·맹현?을 분할해 설치한 장릉군(章陵郡)이었다. 괴월황역이 장릉태수를 지냈다. 208년에 문빙이 강하태수가 되면서 맹현이 환원된 것으로 추측된다. 222년에 장릉왕 조거의 식읍이 되어 장릉국(章陵國)으로 개편되었으나 의양왕으로 개봉(改封)되면서 의양국(義陽國)으로 개명되었다가, 또다시 팽성왕으로 전봉(轉封)되어 의양군이 되었다. 253년 무렵 의양군을 폐지하여 남양군에 합병했다. 265년에 의양왕 사마망이 책봉되면서 의양국이 다시 설치되었는데, 이때는 안창현·평림현·평지현·의양현 만 소속되었다. 이후 점차 현이 늘어나서 태강 연간에는 12현 규모가 되었다.

2.2. 남향군(南鄕郡)

208년에 조조가 남양군을 분할해 설치했다. 삼국이 통일된 이후인 289년에 순양왕의 식읍이 되어 순양국(順陽國)으로 개편되었다.
지명 [208]남향군→[289]순양국
소속 [208]형주자사부→[서진]형주
치소 남향현
전입 [208]남양군 남향현·음현·찬현·축양현·무당현·순양국·단수현·석현
설치 [서진]범양현
봉작 사마창(司馬暢): 순양왕(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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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순양군(8현 20,100호): 찬현, 순양현, 남향현, 단수현, 무당현, 음현, 축양현, 석현 }}}}}}}}}

2.3. 양양군(襄陽郡)

190년에 형주자사로 부임한 유표가 형주자사의 치소를 설치하면서 발전한 곳이나,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장악한 뒤 남군과 남양군 일부를 분할해 설치했다. 223년 무렵에 조비가 강릉현을 포위했을 때 남군 임저현·정양현을 점령하여 양양군에 소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237년에 남부도위를 설치했다. 나중에 정양현은 다시 오나라에 점령되었는데, 241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소속 [208]형주자사부→[서진]형주
치소 양양현
남부도위: (미상)
분합 [237]남부도위: 기현·의성현·임저현·정양현
전입 [208]남군 양양현·중로현·의성현·기현·약현 및 남양군 산도현, [223?]남군 임저현·정양현, [258?]의양군 약현
전출 [237]약현→의양군, [241?]남부도위부 정양현→남군, [280]약현→남군
설치 [280]상황현(임저현 분할), [서진]우현
출신 양양현: 방통, 양의
중로현: 괴월·괴량·괴기 등 괴씨 일족, 요화
의성현: 마량·마속, 상랑·상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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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양양군(8현 22,700호): 의성현, 중로현, 임저현, 기현, 양양현, 산도현, 등성(鄧城)상황현[3], 우현 }}}}}}}}}

2.3.1. 양양남부도위부(襄陽南部都尉部)

237년에 남부도위를 설치하여 기현·의성현·임저현·정양현을 관할하게 했다. 이중 임저현은 관우가 체포된 시점까지 유비-손권의 영역이었으며, 정양현은 임저현보다 더 남쪽에 위치했는데, 아마도 조비의 남정 중에 점령하여 양양군에 편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정양현은 서진 때 양양군으로 남지 않았던 것을 보면, 241년 제갈근이 조중(柤中)을 점령했을 무렵에 다시 오나라의 영역이 된 것으로 보인다. 양양남부도위는 서진 때는 운영되지 않았다.

2.4. 강하군(江夏郡)

원래 진(秦)나라의 형산군(衡山郡)이었는데, 전한 때인 기원전 121년 무렵에 강하군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면수(沔水)가 화용(華容)부터 하수(夏水)로 불리게 되는데, 이 군에서 현재의 장강을 가리키는 이름인 강수(江水)에 합류하기에, 이름을 '강하'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190년 무렵에 유표황조를 강하태수로 임명했는데, 황조는 극월성(郤月城)을 세우고 그곳에 강하군과 사이현의 치소를 옮겼다. 199년에 손책주유를 강하태수로 임명했는데 사실 당시에는 임지가 없는 대립태수였으나, 이 무렵부터 손책과 손권이 유표를 집요하게 공격하였기에 황조가 사실상 유표 세력의 동부를 담당하는 군소 군벌처럼 여겨지게 된다. 손권이 208년에 황조를 살해하면서 사이현·악현·하치현·서릉현 일대를 점령하고, 정보를 강하태수로 임명했다. 같은 시점에 유표유기를 강하태수로 임명했으므로 강하군은 양분되었으며, 손권이 점령하지 못한 강하군 동북부의 기춘국·주현 2현은 조조에게 투항하여 양주(揚州) 기춘군이 되었다.

유종이 항복하자 조조문빙을 강하태수로 임명했으나, 당시 강하태수 유기는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았기에 문빙은 사실상 대립태수였다. 후한 때 강하군은 여남군 인근에 맹현·평춘현·서양현·대현을 월경지로 두고 있었는데, 맹현·평춘현은 190년 무렵에 장릉군에 소속된 것으로 보이고, 서양현·대현은 218년 이전에 예주 익양군으로 이속된 점으로 보아 이미 208년 이전부터 익양군의 전신인 전농관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도 문빙이 강하태수로 임명되면서 맹현이 문빙의 임지로 환원된 것으로 판단된다. 조비의 남정을 통해 문빙이 223년 무렵 면구(沔口) 인근의 석범(石梵)에 주둔할 때 강하군 북부 일대인 안륙현·남신시현·석범현을 점령해 임지를 회복하게 되었기에, 이때부터 강하군이 실질적으로 다시 분할된 것으로 여겨진다. 251년에 안륙현 경내에 상창성(上昶城)을 축성하여 그곳을 강하태수의 치소로 삼았다.
지명 [진]형산군(衡山郡)→[-121]강하군→[79]평춘국(平春國)→[79]강하군
소속 진(秦)→[한]형주자사부→[서진]형주
치소 [진]주현→[전한]서릉현→[190?]사이현→[208]경릉현, [208]맹현→[251]안륙현 상창성
분합 [208]강하군(유기)→[215]손권 세력에 합병: 안륙현·남신시현·경릉현·운두현
[208]강하군(손권)→[280]무창군: 사이현·악현·하치현·서릉현
[208]양주 기춘군: 기춘국·주현
[227]남부도위→[251?]폐지: 안륙현·남신시현·석양현
전입 [208]장릉군 맹현?, [223?]안륙현·남신시현·석범현, [253]의양군 평춘현, [280]경릉현·운두현
전출 [190?]평춘현·맹현?→장릉군, [218]서양현·대현→예주 익양군
출신 안륙현: 황완
맹현: 비의
평춘현: 이통
경릉현: 유언·유모·유장 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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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군: 주현, 서릉현, 악현, 기사현, 익양현 이외 미상
전한 강하군(14현 56,744호 219,218구): 서릉현, 경릉현, 서양현, 양현, 주현, 대현, 악현, 안륙현, 사선현, 기춘현, 맹현, 운두현, 하치현, 종무국
서릉현→강양현(江陽縣), 경릉현→수평현(守平縣), 양현→양비현(襄非縣), 하치현→윤광현(閏光縣), 종무국→당리현(當利縣)
후한 강하군(14성 58,434호 265,464구): 서릉현, 서양현, 대국, 맹현, 경릉국, 운두현, 사이현, 주현, 하치현, 기춘국, 악현, 평춘국, 남신시국, 안륙현
서진 강하군(7현 24,000호): 안륙현, 운두현, 곡릉현, 평춘현, 맹현, 경릉현, 남신시현 }}}}}}}}}

2.4.1. 강하남부도위부(江夏南部都尉部)

227년에 남부도위를 설치하였는데, 전년도에 손권이 석양현을 포위했었기에 그에 대한 후속 조치로 보인다. 223년 무렵 조비의 남정 중에 점령한 3현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251년에 안륙현에 상창성이 축성되어 강하태수가 이 일대에 직접 주둔하게 되면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2.5. 위흥군(魏興郡)

원래 익주의 한중군의 일부로, 조조장로의 항복을 받은 뒤에 한중군을 분할해 서성군(西城郡)을 설치하고 상용현·석현을 상용도위의 관할로 두었으나, 한중 공방전 도중에 유비가 차지했다. 220년에 맹달이 위나라로 투항하자 서성군·상용군·방릉군을 모두 신성군으로 통합하고자 했는데, 서성태수 신의가 투항했기에 서성군은 위흥군으로 개명하는 데 그치고 상용군과 방릉군만 신성군으로 통합되었으며, 위흥군과 신성군을 형주에 소속시켰다. 253년에 상용군을 합병했는데, 259년에 다시 상용군을 설치했다. 267년에 석현의 일부가 상락군으로 이속했다.
지명 [215]서성군→[220]위흥군
소속 [215]익주→[220]형주→[서진]형주
치소 [215]서성현→[220]서성현 순구(洵口)→[263]서성현→[서진]흥진현
석군: 석현
분합 [237]석군 합병: 석현·평양현
전입 [215]한중군 서성현·안양현, [253]상용군 위양현
설치 [220?]위양현, [서진]순양현·장리현·운향현
전출 [237]위양현→상용군, [266]풍향(석현 분할)→사례교위부 상락군
폐지 [서진]위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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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석군(錫郡)

228년에 신성군에서 분할되어 설치된 군으로, 이 해 무렵에 평양현을 설치했다. 230년에 상용군을 병합하였으나, 237년에 석현과 평양현이 위흥군으로 이속되면서 다시 상용군으로 개명되었다.

2.6. 상용군(上庸郡)

원래 익주의 한중군의 일부로, 215년 조조장로의 항복을 받은 뒤에 한중군을 분할해 서성군을 설치했는데, 이때 상용현·석현 지역을 상용도위부(上庸都尉部)로 분리하여 관할하게 했다. 219년에 한중 공방전에서 유비가 승리하자 상용태수 신탐이 유비에게 항복했는데, 이를 통해 이 시점에는 이미 상용군으로 승격된 것으로 확인된다. 220년에 맹달이 투항한 것을 계기로 위나라에서 침공을 개시하여 이 일대를 담당하던 유봉을 쫓아냈는데, 이때 상용군·방릉군을 통합해 신성군을 설치하고 형주에 소속시켰다. 228년에 맹달이 다시 촉한에 투항하려 했다가 제거당하면서, 신성군을 분할해 새로 상용군과 석군을 설치했다. 230년에 상용군을 석군에 병합했는데, 237년에 원래의 석군 지역을 위흥군으로 이속시키면서 상용군으로 고쳤다. 253년에 위흥군에 합병되었다가, 259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지명 [215]상용도위부→[219?]상용군
소속 [215]익주 신성군→[219?]익주→[220]신성군에 합병, [228]형주→[230]석군에 합병, [237]형주→[253]위흥군에 합병, [259]형주
치소 상용현
전입 [215]한중군 상용현·석현, [237]위흥군 위양현, [258]신성군 북무현
설치 [215?]안부현, [삼국]무릉현·건시현·광창현, [서진]상렴현
폐지 [281]용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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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신성군(新城郡)

원래 익주의 한중군의 일부로, 215년에 조조장로의 항복을 받은 뒤에 한중군을 분할했을 때 방릉군(房陵郡)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방릉현을 어떻게 조치했는지는 살펴볼 수 없는 점으로 보아 당시 방릉군 설치 기록이 누락되었거나 이 시점에 이미 방릉군이 형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괴량·괴월의 일족이자 제갈량의 자형인 괴기가 방릉태수를 지냈는데, 219년에 유비가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한천 지방 전역을 차지했을 당시 맹달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220년에 맹달이 위나라로 투항해 이 일대를 담당하던 유봉을 쫓아내면서 위나라의 영역이 되었는데, 이때 상용군·방릉군을 통합해 신성군을 설치하고 형주에 소속시켰다. 228년에 맹달이 다시 촉한에 투항하려 했다가 제거당하자, 신성군을 분할해 새로 상용군과 석군을 설치했는데, 대체로 기존의 방릉군 지역이 신성군에 남게 되었다.
지명 [215?]방릉군→[220]신성군
소속 진(秦)→[한]형주자사부→[서진]형주
치소 [215?]방릉현→[220]상용현→[228]방릉현
분합 [228]석군→[237]위흥군에 합병: 석현·평양현
[228]상용군→[230]석군에 합병→[237]상용군: 상용현·안부현
전입 [220]상용군 상용현·석현·안부현
설치 [222?]북무현, [228]평양현, [삼국]시향현·창위현
전출 [258]북무현→상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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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속 형주목

219년에 손권은 유비의 형주 영역을 차지한 뒤에 익주까지 공략할 생각으로 형주 공안에 있던 유장을 익주목으로 임명하고 의도군의 자귀현과 무현을 고릉군으로 삼아 자귀현에 주둔시켰는데, 고릉군은 당시 익주 파동군의 이름이었다. 222년에 유비와 화해하자 이를 폐지했다. 260년엔 과거 고릉군을 설치했던 지역에 의도군을 설치했는데, 263년에 촉한이 멸망하자 오나라는 건평군을 통해 익주를 점거하려고 했으나 나헌에게 격퇴당했고, 오히려 이 여파로 무릉군 4현이 위나라로 투항하여 무릉군이 분할되었다. 269년에는 위나라의 무릉태수 나헌이 북상해 건평군의 무현·건시현을 점령하여 건평군도 분할되었다.

3.1. 남군(南郡)

진(秦)나라가 기원전 278년에 초나라의 수도인 영(郢)을 점령하고 설치했다. 208년에 손권이 잔릉현을 점령하고, 조조가 남군을 분할해 새로 양양군과 임강군을 설치했으며, 적벽대전 이후 유비가 무릉군 잔릉현·작당현을 점령한 뒤 이를 남군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209년에 주유조인을 쫓아내고 강릉현을 점령하자 손권에게 남군태수로 임명되었는데, 주유가 죽은 뒤에 손권은 유비와 형주 분할에 합의하여 남군·의도군 지역에서 철수하였고, 기존에 점령했던 주릉현은 한창군으로 편입했다. 조비의 남정 중에 임저현·정양현이 점령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2현은 이때 양양군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양현은 다시 오나라의 영역이 되어 남군으로 환원되었는데, 241년에 제갈근이 조중(柤中)을 점령했을 무렵의 일로 추측된다. 오나라 멸망 이후 서진이 남군을 분할해 남평군(南平郡)을 새로 설치했다.
지명 [진]남군→[79]강릉국(江陵國)→[85]남군
소속 진(秦)→[한]형주자사부→[서진]형주
치소 강릉현
남평군: [서진]강안현
분합 [208]양양군: 양양현·중로현·의성현·기현·약현
[208]임강군: 이도·이릉현·한산현·무현·자귀현
[280]남평군: 잔릉현·작당현
전입 [208]무릉군 잔릉현·작당현, [241?]양양군 남부도위부 정양현, [280]양양군 약현
설치 [208]정양현, [222]감리현, [280]주릉현(재설치)·감리현(재설치)·석수현 및 남평군 안남현·강안현(잔릉현 분할)
전출 [208]주릉현→한창군, [223?]임저현·정양현→양양군
폐지 [삼국]감리현
출신 지강현: 동화, 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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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 강릉현, 안륙현, 지강현, 당양현, 사이현, 영현, 언현, 이도, 임저현, 이릉현, 주릉현, 경릉현, 약현, 기현, 소현(銷縣·연혁 미상), 좌운몽현(左雲夢縣·연혁 미상), 우운몽현(右雲夢縣·연혁 미상), 이로현(伊廬縣·연혁 미상), 역읍현(酈邑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남군(18현 125,579호 718,540구): 강릉현, 임저현, 이릉현, 화용현, 의성현, 영현, 기현, 당양현, 중로현, 지강현, 양양현, 편현, 자귀현, 이도, 주릉현, 약현, 무현, 고성현
남군남순군(南順郡), 강릉현→강륙현(江陸縣), 이릉현→거리현(居利縣), 영현→영정현(郢亭縣), 양양현→상양현(相陽縣), 편현→남순현(南順縣), 이도→강남현(江南縣), 주릉현→강하현(江夏縣), 고성현→언정현(言程縣)
후한 남군(17성 162,570호 747,604구): 강릉현, 무현, 자귀현, 중로국, 편현, 당양현, 화용국, 양양현, 기국, 의성국, 약국, 임저국, 지강국, 이도, 이릉현, 주릉현, 한산현
서진 남군(11현 55,000호): 강릉현, 편현, 당양현, 화용현, 약현, 지강현, 정양현, 주릉현, 감리현, 송자현[7], 석수현
남평군(4현 7,000호): 작당현, 잔릉현, 안남현[8], 강안현 }}}}}}}}}

3.2. 강하군(江夏郡)

199년에 손책주유를 강하태수로 임명한 적이 있는데, 당시 강하군은 유표가 임명한 강하태수 황조가 재임 중이었기에 주유는 임지가 없는 대립태수였다. 208년에 손권이 황조를 죽이고 사이현·악현·하치현·서릉현 일대를 점령하여 강하군이 분할되었다. 유표는 황조의 후임으로 아들 유기를 중하구(中夏口)로 보냈는데, 이는 경릉현의 별칭으로 판단된다. 유기의 강하군 지역은 이후 유비에게 인계되었으나, 215년에 유비가 손권과 형주 분할에 합의하면서 손권의 영역이 되었다. 221년에 강하군을 분할해 무창군을 설치했다. 조비의 남정이 시작된 222년 무렵에 위나라가 임명한 강하태수 문빙이 하구(夏口) 일대까지 내려와 석범에 주둔했는데, 이때 석양현(석범?)·안륙현·남신시현이 위나라에 점령된 것으로 보인다. 229년에 무창군이 폐지되어 강하군에 합병되었다. 오나라 멸망 이후 무창군으로 개명되어 이어졌다.
지명 [208]강하군→[280]무창군
소속 [208]형주→[서진]형주
치소 [208]사이현 노산성(魯山城)→[229]무창현
서릉군(무창군): 양신현?→[221]무창현
분합 [214]서릉군→[221]무창군에 합병: 하치현·양신현
[221]무창군→[229]강하군에 합병: 무창현·사이현 및 양주 예장군 시상현 및 양주 여강군 심양현
전입 [208]사이현·악현·하치현·서릉현, [215]안륙현·남신시현·경릉현·운두현, [280]양주 기춘군 고릉현
설치 [210]양신현, [221?]석범현(사이현 분할?) 및 무창군 안풍현, [280]서릉현(재설치)·사양현·사이현(재설치)·악현, [서진]섭양현
전출 [222?]석범현·안륙현·남신시현→강하군(위), [229]무창군 심양현·안풍현→양주 기춘군, [280]경릉현·운두현→강하군 및 서릉현→예주 익양군
폐지 [256]사이현, [삼국]서릉현, [서진]하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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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무창군(7현 14,800호): 무창현, 시상현, 양신현, 사이현, 사양현, 악현, 고릉현[9] }}}}}}}}}
손권이 임명한 강하태수는 줄곧 황조가 설치했던 사이현에 치소를 두고 있었는데, 무창군이 설치되어 사이현이 이속되었을 때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강하태수가 임지를 벗어나 무창군에 주둔하고 있었을 리는 없으므로, 아마도 무창군이 설치되었을 때 사이현이 장강을 기준으로 분할되어, 장강 이동 지역에 새로 설치된 사이현이 무창군으로 편입된 것이고, 장강 이서 지역은 강하군 소속의 석범현이 되어, 강하태수의 치소는 석범현 구역에 소속된 것이라 판단된다. 석범현은 222년 무렵에 위나라의 문빙이 주둔하여 점령되었는데, 이때 강하태수의 치소인 노산성은 점령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석범현은 강하군의 치소와 다른 곳에 현 치소를 두고 있었고 그곳이 위나라 때 석양현의 전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229년까지 노산성 지역이 형식상 석범현으로 유지되었고, 무창군이 폐지되면서 다시 사이현에 합병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3.2.1. 무창군(武昌郡)

214년에 손권이 양신현·하치현을 분할해 서릉군(西陵郡)을 설치하여 감녕을 태수로 임명했었다. 이후 221년에 손권이 무창군을 설치했을 때 서릉군 소속의 현이 모두 포함된 것을 보면, 이미 서릉군은 그 이전에 폐지되었거나 무창군을 설치하면서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강하군 소속인 무창현·하치현·양신현·사이현 이외에 양주(揚州) 예장군 시상현 및 양주 여강군 심양현이 소속되었으며, 무창군이 운영되던 중 안풍현이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손권은 229년에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무창현을 수도로 사용했는데, 황제로 즉위한 뒤에 건업성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무창군을 폐지하여 다시 강하군에 합병시켰고, 심양현·안풍현은 양주 기춘군으로 이속했다.

3.3. 의도군(宜都郡)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장악한 뒤 남군을 분할해 설치한 임강군(臨江郡)인데, 210년에 유비가 임강군을 장악한 뒤에 의도군으로 개명했다. 219년에 손권이 유비를 배신하여 형주를 뺏은 뒤에, 익주까지 차지할 생각으로 형주 공안에 있던 유장을 익주목으로 임명하고 무현·자귀현을 고릉군으로 삼아 자귀현에 주둔시켰으나, 222년에 유비와 화해하자 이를 폐지하여 환원했다. 260년에 다시 2현을 분할해 건평군을 설치했다.
지명 [208]임강군→[210]의도군
소속 [208]형주→[서진]형주
치소 이도
분합 [219]고릉군→[222]의도군에 합병→[260]건평군: 무현·자귀현
전입 [208]남군 이도·이릉현·한산현·무현·자귀현, [219]익주 고릉군 무현
설치 [209]북정현
전출 [216]무현·북정현→익주 고릉군
봉작 보천: 의도공(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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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의도군(3현 8,700호): 이릉현, 이도, 한산현 }}}}}}}}}

3.4. 건평군(建平郡)

진(秦)나라가 이 일대에 있던 초나라의 검중군(黔中郡)을 점령하여 무검군(巫黔郡)을 설치한 적이 있었는데, 뒤에 이를 폐지하여 남군에 합병했다. 219년에 손권이 유비를 배신하여 형주를 뺏은 뒤에, 원래 의도군 소속이던 익주 고릉군 무현까지 점령하였는데, 무현에 자귀현을 덧붙여 고릉군으로 편성하고 형주 공안에 있던 유장을 익주목으로 임명해 자귀현에 주둔시켰으나, 222년에 유비와 화해하자 이를 폐지하여 의도군에 합병했다. 260년에 다시 2현을 분할해 건평군을 설치했는데, 아마도 이 군은 촉한의 멸망을 예상하고 신속히 익주로 진입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촉한 멸망 이후 영안현을 지키던 나헌보협을 격파하고 연이어 육항을 저지했기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오히려 269년에 서진의 무릉태수 나헌이 무현·건시현을 점령했고, 건평도위(建平都尉)를 설치해 점령한 2현과 양주(梁州) 파동군의 북정현·태창현을 소속시켰다. 275년에 건평도위부를 건평군으로 승격시켜, 건평군이 서진과 오나라에 양분되었다. 오나라 멸망 이후 서진의 건평군과 통합되고 형주에 소속되었다.
지명 검중군→[진]무검군, [219]고릉군, [260]건평군
소속 초(楚)→진(秦), [219]익주→[222]의도군에 합병, [260]형주→[서진]형주
치소 [219]자귀현, [260]무현→[269]자귀현, [280]무현
분합 [269]무릉군(서진) 건평도위→[275]건평군(서진)→[280]건평군 통합: 무현·건시현 및 양주 파동군 북정현·태창현
전입 [219]무현·자귀현, [280]무현·건시현·북정현·태창현
설치 [260]흥산현, [269?]건평도위부 사거현, [삼국]신릉현·건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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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검군: 무현, 자귀현, 원릉현(沅陵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서진 건평군(8현 13,200호): 무현, 북정현, 태창현, 신릉현, 흥산현, 건시현, 자귀현, 사거현 }}}}}}}}}

3.5. 무릉군(武陵郡)

기록상으론 기원전 202년에 검중군(黔中郡)을 고쳐 무릉군으로 개명했다고 전하나, 진(秦)나라 때 검중군이 운영되었던 것이 확인되지 않고, 전한 때 무릉군에 소속되었던 현들은 간독에는 동정군(洞庭郡)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후한 때에는 한수현에 형주자사가 주둔했으나, 189년에 형주자사 왕예가 피살당하면서 이듬해 유표가 그 후임이 되었는데, 무릉군으로 부임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는지 유표는 치소를 양양현으로 변경했다. 263년에 무릉군을 분할해 천문군을 설치했다.

264년에 무릉군 4현이 위나라로 투항하여 무릉군이 분할되었고, 나헌이 무릉태수로 임명되었다. 이때 위나라로 투항한 무릉군 지역은 이후 269년에 나헌이 건평군 일부를 점령했을 때 침공로로 활용되었고, 『송서』에 따르면 오나라가 멸망할 당시에도 무릉군 면양현과 겸양현이 서진의 침공로 중 하나로 이용되었다. 두 현은 유수(酉水) 유역에 있던 현으로 비정되는 만큼, 아마도 나머지 두 현은 유양현과 천릉현에 해당한다고 추정된다.
지명 [진]동정군→[전한]무릉군
소속 진(秦)→[한]형주자사부→[서진]형주
치소 [진]임원현→[전한]의릉현→[후한]임원현
천문군: 영양현
분합 [263]천문군: 영양현·충현·누중현
[264]무릉군(위)→[280]무릉군 통합: 겸양현·면양현·유양현·천릉현
설치 [삼국]무양현·용양현(오수현 분할)·면양현·겸양현·누중현, [280?]천문군 풍양현
전출 [208]잔릉현·작당현→남군
폐지 [서진]신양현·면양현
출신 임원현: 요립
한수현: 반준
무릉만: 사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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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군: 임원현, 천릉현, 유양현, 영양현, 잔릉현, 색현, 무양현, 신양현, 양릉현(陽陵縣·연혁 미상), 경릉현(竟陵縣·연혁 미상), 예양현(醴陽縣·연혁 미상), 문전현(門淺縣·연혁 미상), 상연현(上衍縣·연혁 미상), 신무릉현(新武陵縣·연혁 미상), 원양현(沅陽縣·연혁 미상), 곤양읍(昆陽邑·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무릉군(13현 34,177호 185,758구): 색현, 잔릉현, 임원현, 원릉현, 담성현, 무양현, 천릉현, 신양현, 유양현, 의릉현, 한산현, 영양현, 충현
무릉군건평군(建平郡), 잔릉현→잔륙현(孱陸縣), 임원현→감원현(監元縣), 원릉현→원륙현(沅陸縣), 천릉현→천륙현(遷陸縣), 신양현→회정현(會亭縣), 의릉현→건평현(建平縣)
후한 무릉군(12성 46,672호 250,913구): 임원현, 한수현, 잔릉현, 영양현, 충현, 원릉현, 신양현, 유양현, 천릉현, 담성현, 원남현, 작당현
서진 무릉군(10현 14,000호): 임원현, 용양현, 한수현, 원릉현, 겸양현, 유양현, 담성현, 원남현, 천릉현, 무양현
천문군(5현 3,100호): 영양현, 누중현, 충현[10], 임례현, 풍양현 }}}}}}}}}
손권황개를 무릉태수로 임명한 적이 있는데, 그 시기상으로 볼 때 황개는 김선의 대립태수였으며, 김선은 유비에게 항복했으므로 실제 임지를 갖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210년에 손권이 남군태수 정보를 다시 강하태수로 전임시키고 부하들을 정식 장군직을 수여하기 시작했을 때, 황개가 전임되거나 정식 장군에 임명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황개는 그 이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무릉만이 촉한에 협력해 손권에게 대항하기도 했고, 무릉만의 왕 사마가가 『삼국지연의』에서도 등장하기에 특별히 언급이 잦은 편이다. 사마가가 무릉만의 왕이라 하여, 그가 특별히 '무릉만'이라는 독립 세력을 이끄는 군주는 아니었다. 진나라와 한나라는 각지에 있는 이민족 수장들을 그 세력의 규모에 따라 읍장(邑長)·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솔중왕(率眾王) 등에 책봉하였는데, 사마가는 솔중왕에 책봉되는 수준의 큰 세력을 이뤘던 것일 뿐이다. 후한 때는 파군만(巴郡蠻)·남군만(南郡蠻)·장사만(長沙蠻)·영릉만(零陽蠻) 등 남방지역의 이민족들을 그들이 사는 지역에 위치한 군(郡)의 이름을 따와 통칭했는데, 무릉만 또한 단순히 무릉군 일대에 사는 다양한 이민족들을 통칭한 것에 불과하다. 무릉만은 오계만(五溪蠻)으로도 불렸는데, 무릉군은 권역이 다른 군들에 비해 월등히 넓었기에 무릉군을 관통하는 원수(沅水)의 지류 이름을 따와 5개 권역으로 나눠 부른 것으로, 웅계만(雄溪蠻)[11]·만계만(樠溪蠻)[12]·무계만(無溪蠻)[13]·유계만(酉溪蠻)·신계만(辰溪蠻)으로 구분했다. 마찬가지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특정한 단일 세력을 이루고 있거나 종족 정체성에 근거하여 이들을 구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각 지류 유역에 따라 권역을 나눠 부른 것에 불과했다.

지나치기 쉬운 생각이나, 군현제의 원류였던 진나라는 그 근거지인 관중 지방부터 저족으로 불리는 토착 정주민족이 원주민으로 살던 곳이었고, 강족처럼 유목민족 계통도 다수 있었다. 군현제가 처음 형성될 때부터 이런 이민족들을 별도로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현(縣)과 동급의 행정구역인 도(道)를 제정하여 운영했을 정도다. 흔히 군·현을 설치하는 것이 특정한 정치세력을 멸망시키고 그 영역을 확보하여 이루어진다고 여겨지나, 그런 일은 고조선이나 남월처럼 본격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던 정치세력의 영역이었던 곳에 해당하는 사례일 뿐이고, 대체로 한무제 때까지 새로운 영역에 만들어지는 군·현은 확보되지 않은 영역에 일단 군·현의 경계를 설정하고 사람들을 이주시켜 와 실제 현을 설치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원주민들인 이민족들의 저항이 거세어 정상적인 치안을 유지할 수 없으면 그 지역을 포기했고, 계획했던 현들이 완성되지 못하여 군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군을 폐지하고 이미 개척이 완료된 현은 인근의 다른 군으로 합병시켰다. 무릉군의 전신인 동정군도 진나라 때 그렇게 탄생한 군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중 천릉현이 설치된 초창기에 작성된 간독이 대량으로 발굴되어 이런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3.5.1. 천문군(天門郡)

263년에 무릉군을 분할해 설치했다.

3.6. 장사군(長沙郡)

진(秦)나라가 설치했다고 전하지만 간독에는 장사군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다. 진나라 때 장사군이 없었다고 보는 측에서는 후일의 장사군은 동정군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202년에 오예가 장사왕으로 책봉되면서 장사국(長沙國)이 되었다. 208년에 손권이 한창현·하준현·나현·유양현을 점령하여 210년에 이 지역을 분할해 한창군을 설치했는데, 229년에 폐지되어 다시 장사군에 합병되었다. 257년에 서부도위부가 승격해 형양군이 설치되고 동부도위부가 승격해 상동군이 설치되었다.
지명 [진]장사군→[-202]장사국→[-157]장사군→[-155]장사국→[10?]장사군→[23]장사국→[37]장사군
소속 진(秦)→[한]형주자사부→[서진]형주
치소 임상현
한창군: 한창현
분합 [210]한창군→[229]장사군에 합병: 한창현·하준현·나현·유양현 및 남군 주릉현
[삼국]서부도위→[257]형양군: 상남현·연도·익양현·임증현
[삼국]동부도위→[257]상동군: 영현·다릉현·용릉현?
설치 [147]한창현, [196]유양현·임증현, [223]포기현, [삼국]건녕현, [서진]파릉현
전출 [168]소릉현→영릉군, [267]안성현→양주 안성군
폐지 [229?]한창군 주릉현
출신 임상현: 환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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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군: 임상현, 익양현, 하준현, 애현, 예릉현, 나현 이외 미상
전한 장사국(13현 43,470호 235,825구): 임상현, 나현, 연도, 익양현, 하준현, 유현, 영현, 승양현, 상남현, 소릉현, 도릉현, 용릉현, 안성현
장사군전만군(塡蠻郡), 임상현→무목현(撫睦縣), 하준현→윤준현(閏雋縣), 도릉현→성향현(聲鄕縣), 안성현→사성현(思成縣)
후한 장사군(13성 255,854호 1,059,372구): 임상현, 유현, 다릉현, 안성현, 영현, 상남국, 연도, 소릉현, 익양현, 하준현, 나현, 예릉현, 용릉현
서진 장사군(10현 33,000호): 임상현, 유현, 하준현, 예릉현, 유양현, 건녕현, 오창현, 나현, 포기현, 파릉현 }}}}}}}}}

3.6.1. 한창군(漢昌郡)

208년에 손권이 점령한 장사군 한창현·하준현·나현·유양현과 남군 주릉현에 해당하며, 210년에 유비의 형주 점유를 인정하면서 적벽대전 이전에 점령했던 지역에는 자신이 임명한 태수들을 보냈는데, 이때 장사군·남군 지역에는 한창군이 설치되고 노숙이 한창태수로 임명되었다. 229년에 한창군을 폐지하여 장사군으로 합병되었는데, 주릉현은 이때 폐지된 것으로 보이며 서진 때 남군 소속으로 다시 설치되었다.

3.7. 형양군(衡陽郡)

정확히 언제부터 장사군에 서부도위(西部都尉)가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손권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257년에 장사서부도위부를 승격시켜 형양군을 설치했다.
소속 [257]형주→[서진]형주
치소 상남현
전입 [257]장사군 상남현·연도·익양현·임증현 및 영릉군 상향현·중안현·증양현
설치 [257]상서현·형양현, [삼국]신양현
전출 [280]임증현→상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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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형양군(9현 23,000호): 상향현, 중안현, 상남현, 상서현, 증양현, 형산현, 연도, 신강현, 익양현 }}}}}}}}}

3.8. 상동군(湘東郡)

정확히 언제부터 장사군에 동부도위(東部都尉)가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손권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257년에 장사동부도위부를 승격시켜 상동군을 설치했다.
소속 [257]형주→[서진]형주
치소 영현
전입 [257]장사군 영현·다릉현·용릉현? 및 계양군 음산현, [280]형양군 임증현
설치 [257]이양현·신녕현(뇌양현 분할), [삼국]신평현(뇌양현 분할)
폐지 [삼국]용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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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상동군(7현 19,500호): 영현, 다릉현, 임증현, 이양현, 음산현, 신평현, 신녕현 }}}}}}}}}

3.9. 영릉군(零陵郡)

진(秦)나라가 창오군(蒼梧郡)을 설치한 적이 있었는데, 대체로 한나라 때의 영릉군·계양군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진나라가 멸망한 이후 사라졌다. 이후 전한 때인 기원전 111년에 무릉군을 분할해 영릉군을 설치했다. 영릉군을 분할해 265년에 영양군과 광주 시안군이 설치되었고 266년에 소릉군이 설치되었는데, 이 가운데 영양군은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으나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지 못하고 폐지되어 다시 영릉군에 합병되었다.
지명 [진]창오군, [-111]영릉군
소속 진(秦), [한]형주자사부→[서진]형주
치소 천릉현
영양군: 영포현
분합 [265]영양군→[삼국]영릉군에 합병: 영포현·영도(營道)·영도(泠道)·용릉현
[삼국]남부도위→[265]광주 시안군: 시안현 및 광주 창오군 여포현
[삼국]북부도위→[266]소릉군→[280]소릉군(邵陵郡): 소릉현·도량현·부이현·소양현
전입 [168]소릉현→영릉군
설치 [222]고평현·용릉현, [265]관양현 및 시안군 시양현·평락현·상안현(尙安縣)·영풍현(여포현 분할), [266]소릉군 신성현, [삼국]기양현(천릉현 분할)·영창현, [280?]응양현 및 시안군 상안현(常安縣·광주 계림군 무풍현 분할) 및 소릉군 건흥현, [서진]소릉군 무강현
전출 [257]상향현·중안현·증양현→형양군
출신 천릉현: 황개
상향현: 장완
증양현: 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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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오군: 영포현, 남평현, 영도, 용릉현, 조양현, 관양현, 계양현, 흘도, 유현, 영릉현, 침현, 뇌양현, 창오현(蒼梧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영릉군(10현 21,092호 139,378구): 영릉현, 영도(營道), 시안현, 부이현, 영포현, 도량국, 영도(泠道), 천릉국, 조양현, 종무현
영릉군구의군(九疑郡), 영도(營道)→구의정현(九疑亭縣), 영도(泠道)→영릉현(泠陵縣), 천릉국→단윤현(漙閏縣), 조양현→도치현(洮治縣), 종무현→종환현(鍾桓縣)
후한 영릉군(13성 212,284호 1,001,578구): 천릉현, 영릉현, 영도(營道), 영포현, 영도(泠道), 조양현, 도량현, 부이국, 시안국, 중안국, 상향현, 소양국, 증양국
서진 영릉군(11현 25,100호): 천릉현, 기양현, 영릉현, 영포현, 조양현, 영창현, 관양현, 영도(營道), 용릉현, 영도(泠道), 응양현
시안군(7현 6,000호): 시안현, 시양현, 평락현, 여포현, 상안현, 희평현, 영풍현
소릉군(6현 12,000호): 소릉현, 도량현, 부이현, 건흥현, 소양현, 고평현, 신성현[14] }}}}}}}}}

3.9.1. 영양군(營陽郡)

265년에 영릉군을 분할해 설치한 군으로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지 못하고 폐지되었는데, 그 시점이 명확하지 않다.

3.9.2. 시안군(始安郡)

정확히 언제부터 영릉군에 남부도위(南部都尉)가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손권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265년에 영릉남부도위부를 승격시켜 시안군을 설치하고 광주에 소속시켰으며, 광주 창오군 여포현이 이속했다.

3.9.3. 소릉군(昭陵郡)

정확히 언제부터 영릉군에 북부도위(北部都尉)가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손권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266년에 영릉북부도위부를 승격시켜 소릉군을 설치했다. 오나라 멸망 이후 사마소의 이름을 피휘하여 소릉군(邵陵郡)으로 개명했다.

3.10. 계양군(桂陽郡)

문헌상으로는 전한 초기인 기원전 205년에 설치했다고 전한다. 265년에 남부도위가 승격되어 시흥군이 설치되고 광주에 소속되었다.
소속 [한]형주자사부→[서진]형주
치소 침현
시흥군: 곡강현
분합 [삼국]남부도위→[265]광주 시흥군: 곡강현·계양현·함광현·정양현 및 남해군 중숙현
설치 [265]광주 시흥군 시흥현, [서진]광주 시흥군 양산현
전출 [257]음산현→상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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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계양군(11현 28,119호 156,488구): 침현, 임무현, 변현, 남평현, 뇌양현, 계양현, 양산국, 곡강현, 함광현, 정양현, 음산국
계양군남평군(南平郡), 침현→선풍현(宣風縣), 임무현→대무현(大武縣), 편현→편병현(便屛縣), 뇌양현→남평정현(南平亭縣), 곡강현→제로현(除虜縣), 정양현→기무현(基武縣)
후한 계양군(11성 135,029호 501,403구): 침현, 변현, 뇌양현, 음산현, 남평현, 임무현, 계양현, 함광현, 정양현, 곡강현, 한녕현
서진 계양군(6현 11,300호): 침현, 뇌양현, 편현, 임무현, 진녕현, 남평현
시흥군(7현 5,000호): 곡강현, 계양현, 시흥현, 함광현, 정양현, 중숙현, 양산현 }}}}}}}}}

3.10.1. 시흥군(始興郡)

정확히 언제부터 계양군에 남부도위(南部都尉)가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손권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265년에 계양남부도위부를 승격시켜 시흥군을 설치하고 광주에 소속시켰으며, 광주 남해군 중숙현이 이속했다.

3.11. 임하군(臨賀郡)

226년에 교주 창오군을 분할해 설치된 군으로 형주에 소속되었다. 오나라 멸망 이후 광주에 소속되었다.
소속 교주→[226]형주→[서진]광주
치소 임하현
전입 [226]교주 창오군 임하현·사목현·풍승현·봉양현·부천현
설치 [266]건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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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임하군(6현 2,500호): 임하현, 사목현, 풍승현, 봉양현, 흥안현, 부천현 }}}}}}}}}

4. 같이보기

파일:실제 지도 후한 13주.png

[1] 왕찬에 따르면 유표가 죽기 전에 유비를 후임 형주목으로 추대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은 당사자인 유비는 평생 알지 못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 사건은 유표의 세력이 유비에게 넘어가는 것을 우려한 양양 호족들이 유종을 추대해 황급히 조조에 투항해버린 원인이 된 것 같다.[2] 형주자사 유표가 양양현을 거점으로 삼았다가, 208년 적벽대전 이후 완현에 형주자사의 치소를 두었는데, 형주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화된 243년 무렵에 왕창은 오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형주자사의 치소를 신야현으로 보다 전진해 배치했다.[3] 『진서』 지리지에 양양군 소속 현으로 등성이 기재되었으나 이는 의양국 등현의 별명이므로 양양군 소속일 수 없다. 반면 280년에 설치된 상황현이 누락되었다.[4] 『진서』 지리지에는 진흥현(晉興縣)으로 오기되었다.[5] 209년 유비가 형주목을 자칭했을 때 치소로 삼은 곳은 공안이었고, 219년에 손권이 형주목 직위를 차지한 시점에도 그대로 이어져, 공안은 한동안 손권 세력의 거점으로 쓰였다. 222년 육손을 강릉후로 책봉하면서 형주목으로 임명했을 때 형주목의 치소도 육손의 임지인 남군 강릉현으로 이전한 것으로 판단된다.[6] 어느 시점에 영양군을 폐지했는데,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다.[7] 『진서』 지리지에는 예주 안풍군 송자현을 남군 소속으로도 중복하여 표기했다.[8] 『진서』 지리지에는 남안현(南安縣)으로 오기되었다.[9] 양주 기춘군 안풍현은 고릉현(高陵縣)으로 개명되어 형주 무창군에 소속되었는데, 『진서』 지리지에는 관릉현(官陵縣)으로 오기되었다.[10] 서진 때 충현을 임례현으로 개명했는데, 『진서』 지리지에는 충현과 임례현을 병기하였다.[11] 무계만(巫溪蠻)으로 불리기도 했다.[12] 낭계만(朗溪蠻)으로 불리기도 했다.[13] 무계만(武溪蠻)으로 불리기도 했다.[14] 『진서』 지리지에는 신성현이 누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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