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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지명/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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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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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60년교주지도.jpg
1. 개요2. 남해군(南海郡)3. 창오군(蒼梧郡)4. 울림군(鬱林郡)
4.1. 계림군(桂林郡)
5. 합포군(合浦郡)
5.1. 영포군(寧浦郡)
6. 고량군(高涼郡)
6.1. 고흥군(高興郡)
7. 주애군(朱崖郡)8. 교지군(交趾郡)
8.1. 신창군(新昌郡)8.2. 무평군(武平郡)
9. 구진군(九眞郡)
9.1. 구덕군(九德郡)
10. 일남군(日南郡)11. 같이보기

1. 개요

기원전 107년에 처음 자사를 설치할 때, 이 방면을 맡는 자사의 감찰 구역이 교지군 방향에 있었기에 교지자사부(交阯刺史部)로 명명했다. 지금의 광둥성·광시 좡족 자치구·하이난성 일대와 베트남 북반부에 해당한다. 196년에 교지자사 주부가 이민족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교지태수 사섭은 자기 동생들을 합포태수·구진태수·남해태수로 임명하여 교지자사부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조조는 주부의 후임으로 장진을 파견했고, 201년에는 그를 교주목으로 승진시켰는데, 이때부터 교지자사부가 교주(交州)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장진은 교주목으로 승진할 무렵에 부하에게 피살당했다. 이를 교주를 병탄할 기회로 여긴 유표뇌공을 교주자사로 오거를 창오태수로 임명해 교주로의 진출을 시도했는데, 오거는 창오군을 장악하자 뇌공을 형주로 쫓아내 독립했다. 이때 조조는 사섭을 수남중랑장(綏南中郎將)으로 임명해 교주 지역에서의 군사통제 권한을 부여했다.

210년에 유비의 형주 장악을 인정한 손권보즐을 교주자사로 임명해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사섭과 오거는 일단 손권에게 종속했으나, 오거는 손권에게 협력적이지 않았고, 태수로써 자립을 유지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보즐이 오거를 제거하여 교주는 손권의 통제에 들어오게 되었다. 213년에 조조가 구주를 회복한다는 구실로 교주를 폐지하고, 교주 소속의 군들을 각각 형주와 익주로 분할하였는데, 이미 교주는 손권의 영역이 되어있었기에 실질적인 효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226년에 사섭이 죽자, 당시 교주자사 여대는 사섭 일가의 영향력이 강한 합포군·교지군·구진군·일남군 4군을 교주에 남기고 나머지를 광주(廣州)로 분할하는 구상을 하여 광주자사(廣州刺史)를 자처했는데 손권이 이를 받아들였고, 이에 격분한 사섭 일가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그들이 제거되었기에, 굳이 광주를 분할할 필요가 없어져 그 조치를 취소했다.

교지태수 손서등구의 연이은 폭정으로 263년에 여흥이 봉기를 일으키자, 교지군·구진군·일남군이 이에 호응하여 위나라로 투항하고, 위나라에서는 곽익을 보내 여흥을 도왔다. 이에 이듬해 오나라에서는 과거 광주 분할안을 실행하는 한편, 위나라로 투항한 3군과 합포군·주애군을 교주로 편성하고 265년에는 유준을 교주자사로 임명하여 268년에 교주 탈환을 시도했으나, 곽익이 이를 막아내고 유준 또한 전사했다. 오나라에서 3군을 탈환한 것은 곽익이 죽은 뒤인 271년의 일이었다. 3군을 되찾은 271년에 새로운 현들을 다수 설치했는데, 이는 오나라의 다른 지방 출신 관원들을 다수 파견하여 이 지역의 원주민들인 월족 계통의 이민족들과 한족 토착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라 여겨진다.

279년 곽마가 광주 계림군에서 반란을 일으켜 인근의 광주 남해군·창오군·시흥군 일대까지 점령했다. 오나라는 이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이때 서진의 공격을 받아 280년에 멸망했다.

2. 남해군(南海郡)

진(秦)나라가 남해군을 설치해 이 일대를 개척하려 했는데, 이때 남해군의 용천현령으로 조타라는 인물이 임명되었다. 호해가 즉위한 뒤 진나라가 무너져가자, 조타는 남해군 일대에서 할거해 남월왕을 자칭하여 남월을 건국했다. 한무제가 기원전 111년에 남월을 멸망시키고 다시 남해군을 설치했다. 213년에 조정의 승상 조조가 명목상으로는 한나라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교주를 폐지하여 명목상으로는 형주에 소속되었으나, 이미 이 시점에는 손권이 교주를 장악한 때라 실현되지는 않았다.
소속 진(秦)→남월→[한]교지자사부→[264]광주→[서진]광주
치소 번우현
설치 [삼국]평이현
전출 [265]중숙현→시흥군
폐지 [서진]게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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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 번우현, 용천현, 게양현, 박라현, 남해현(南海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남해군(6현 19,613호 94,253구): 번우현, 박라현, 중숙현, 용천현, 사회현, 게양현
게양현→남해정현(南海亭縣)
후한 남해군(7성 71,477호 250,282구): 번우현, 박라현, 중숙현, 용천현, 사회현, 게양현, 증성현
서진 남해군(6현 9,500호): 번우현, 사회현, 증성현, 박라현, 용천현, 평이현 }}}}}}}}}

3. 창오군(蒼梧郡)

진(秦)나라가 창오군을 설치한 적이 있는데, 당시의 창오군은 한나라 때 영릉군·계양군 남부에 있었다. 진나라가 멸망한 이후 창오군이 사라졌는데, 전한 때인 기원전 111년에 남월이 멸망한 뒤에 그 영토를 나눠 옛 창오군의 이름을 따온 새로운 군이 설치되었다. 213년에 조조가 교주를 폐지하여 관념상으로는 형주에 소속되었으나, 이미 이 시점에는 손권이 교주를 장악한 때라 실현되지는 않았다.
소속 남월→[한]교지자사부→[264]광주→[서진]광주
치소 광신현
분합 [226]형주 임하군: 임하현·사목현·풍승현·봉양현·부천현
전입 [228]합포군 임윤현
설치 [삼국]신녕현·풍성현·건릉현, [280?]원계현·도라현·무성현
전출 [265]여포현→시안군
출신 광신현: 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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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창오군(10현 24,379호 146,160구): 광신현, 사목현, 고요현, 봉양현, 임하현, 단계현, 풍승현, 부천현, 여포현, 맹릉현
창오군신광군(新廣郡), 광신현→광신정현(廣信亭縣), 임하현→대하현(大賀縣), 맹릉현→맹륙현(猛陸縣)
후한 창오군(11성 111,395호 466,975구): 광신현, 사목현, 고요현, 봉양현, 임하현, 단계현, 풍승현, 부천현, 여포현, 맹릉현, 장평현
서진 창오군(12현 7,700호): 광신현, 단계현, 고요현, 건릉현, 영신현[2], 맹릉현, 장평현, 농성현, 원계현, 임윤현, 도라현, 무성현 }}}}}}}}}

4. 울림군(鬱林郡)

진(秦)나라가 설치한 계림군(桂林郡)이었으나, 진나라가 멸망한 이후 사라졌다. 전한 때인 기원전 111년에 남월이 멸망한 뒤에 그 영토를 나눠 옛 계림군 지역에 울림군을 설치했고, 이후 교지자사부에 소속시켰다. 213년에 조조가 교주를 폐지하여 관념상으로는 익주에 소속되었으나, 이미 이 시점에는 손권이 교주를 장악한 때라 실현되지는 않았다.
지명 [진]계림군, [-111]울림군
소속 진(秦)→남월→[한]교지자사부→[264]광주→[서진]광주
치소 포산현→[서진]울평현
계림군: 담중현
분합 [274]계림군: 담중현·중류현·영방현·무안현
전입 [280]계림군 무희현
설치 [274]계림군 무풍현·속평현·군등현, [삼국]음평현·장평현·신읍현·건시현·회안현·무안현, [280?]계림군 용강현(재설치)·양평현·협양현(용강현 분할)
폐지 [271?]계림현·회안현, [274?]정주현, [삼국]광울현·임진현·증식현
출신 포산현: 육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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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군: 포산현, 사회현, 주려현, 중류현, 노읍현(勞邑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울림군(12현 12,415호 71,162구): 포산현, 안광현, 아림현, 광울현, 중류현, 계림현, 담중현, 임진현, 정주현, 증식현, 영방현, 옹계현
울림군울평군(郁平郡), 담중현→중담현(中潭縣), 임진현→감진현(監塵縣)
후한 울림군(11성): 포산현, 안광현, 아림현, 광울현, 중류현, 계림현, 담중현, 임진현, 정주현, 증식현, 영방현
서진 울림군(9현 6,000호): 포산현, 아림현, 신읍현, 진평현, 건시현, 울평현, 영방현, 무희현, 안광현
계림군(8현 2,000호): 담중현, 무풍현, 속평현, 양평현[3], 용강현, 협양현, 무성현중류현[4], 군등현 }}}}}}}}}

4.1. 계림군(桂林郡)

274년에 울림군을 분할해 계림군을 설치하고, 같은 해 무풍현·속평현·군등현을 설치했다. 의외로 삼국시대가 종식되는 원인이 된 지역인데, 279년에 이곳에서 곽마가 반란을 일으켜 인근의 남해군·창오군·시흥군으로 번졌고 광주자사가 임지에서 쫓겨나는 사태까지 발생하여, 결국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손호도준도황을 보냈으나, 그 직후 서진의 공격을 받아 280년에 오나라가 멸망해 버렸다. 오나라가 멸망한 이후 서진이 무풍현을 분할해 상안현을 설치하면서 상안현을 시안군에 소속시켰다.

5. 합포군(合浦郡)

260년 당시에는 주관군(珠官郡)이었으나, 이는 228~264년 동안 한정적으로 쓰인 지명이라 혼동의 우려가 있으므로, 문단 제목은 합포군으로 하였다. 진(秦)나라 때 상군(象郡)이 설치된 적이 있으나, 진나라가 멸망하자 사라졌다. 전한 때인 기원전 111년에 남월이 멸망한 뒤에 그 영토를 나눠 합포군을 설치했다. 213년에 조조가 교주를 폐지하여 관념상으로는 익주에 소속되었으나, 이미 이 시점에는 손권이 교주를 장악한 때라 실현되지는 않았다. 242년에 주관군이 분할되어 주애군이 설치되었는데, 오나라가 멸망한 이후 서진이 주애군을 폐지하고 서문현을 합포군으로 환원했다.
지명 [진]상군, [-111]합포군→[228]주관군→[264]합포군
소속 진(秦)→남월→[한]교지자사부→[서진]교주
치소 합포현
영포군: [218]평산현→[서진]영포현
분합 [168]고흥군→[197]합포군에 합병→[220]고량군: 고량현
[242]주애군→[280]합포군에 합병: 서문현
[218]영포군→[260]합포북부도위→[280]합포속국도위→[286]광주 영포군
설치 [218]영포군 영포현·평산현, [226]주관현, [260]북부도위부 연도현, [271]남평현·독질현, [280]탕창현 및 속국도위부 오안현·간양현
전출 [228]임윤현→창오군
폐지 [280?]주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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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군: 임진현, 상림현(象林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합포군(5현 15,398호 78,980구): 서문현, 고량현, 합포현, 임윤현, 주려현
합포군환합군(桓合郡), 합포현→환정현(桓亭縣), 임윤현→대윤현(大允縣)
후한 합포군(5성 23,121호 86,617구): 합포현, 서문현, 고량현, 임윤현, 주애현주려현[5]
서진 합포군(6현 2,000호): 합포현, 남평현, 탕창현, 서문현, 독질현, 주관현
영포군(5현 1,220호): 영포현, 흥도현[6], 오안현, 창평현간양현[7], 평산현 }}}}}}}}}

5.1. 영포군(寧浦郡)

218년에 설치된 군으로, 시기상 손권이 옛 고량군과 울림군 영역에 새로운 현들을 설치하면서 만든 것으로 보이며, 260년에 합포군에 북부도위(北部都尉)가 설치되었는데, 영포군에 소속되었던 현들을 관할하게 한 것을 보면 이 시점에 영포군이 폐지되어 합포북부도위부(合浦北部都尉部)로 재편된 것으로 판단된다. 오나라 멸망 이후 서진이 북부도위를 속국도위로 대체했고, 286년에 합포속국도위부를 영포군으로 승격하여 광주에 소속시켰다.

6. 고량군(高涼郡)

원래 167년에 설치된 고흥군(高興郡)이었는데, 188년에 고량군으로 개명했다. 197년에 폐지되어 합포군에 합병되었는데, 이 시점에 합포군을 장악한 사섭 형제들이 한 일로 짐작된다. 교주를 장악한 손권이 220년에 다시 고량군을 설치했는데, 아마도 이 해에 사섭이 합포태수로 임명한 사일이 죽어, 후임 합포태수와 함께 다시 고량태수를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서진이 280년 이후에 고흥군을 다시 고량군에 합병시켰다.
지명 [167]고흥군→[188]고량군, [220]고량군
소속 진(秦)→[한]교지자사부→[197]합포군에 합병, [220]교주→[264]광주→[서진]광주
치소 [167]고량현, [220]은평현→[서진]안녕현
고흥군: 광화현
분합 [220]서부도위→[264?]고흥군→[서진]고량군에 합병
전입 [220]고량현
설치 [220]은평현·안녕현, [264?]고흥군 광화현·해녕현·화평현·막양현·서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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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고량군(3현 2,000호): 안녕현, 고량현, 사평현
고흥군(5현 1,200호): 광화현, 해안현, 화평현, 막양현[8], 서평현 }}}}}}}}}
218년에 영포군을 설치했을 때 그 일부 지역이 원래 고량군이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원래의 고량군은 합포군 북부와 동부 지역인 고량현·임윤현·주려현 등을 관할하던 군으로 보이지만 자세한 연혁을 알 수 없다.

6.1. 고흥군(高興郡)

220년에 옛 교주목 장진의 장수였던 전박(錢博)이 투항하자 교주자사 여대의 천거로 손권이 전박을 고량서부도위(高涼西部都尉)로 임명하였다. 이후 손호가 고흥군을 설치하였는데 그 시점은 명확하지 않으며, 고량서부도위부를 승격한 것으로 판단된다. 원래 현이 운영되지 않은 지역이었고, 이 시기에 교주 3군이 위나라에 투항한 상태였음을 감안하면, 손호가 즉위한 264년 무렵에 교주 3군의 탈환을 준비하는 목적으로 새로 현을 설치하면서 고흥군으로 승격한 것으로 추측된다. 오나라가 멸망한 이후 한동안 유지되다가, 결국 폐지되어 고량군에 합병되었다.

7. 주애군(朱崖郡)

현재의 하이난섬은 고대에 주애주(朱崖洲)로 불렸는데, 이곳에 처음으로 군·현을 설치하려던 사람은 한무제였다. 기원전 110년에 주애군과 담이군(儋耳郡)을 주애주에 설치했지만 잘 운영되지 못하여 기원전 82년에 담이군을 폐지하여 주애군에 합병시켰고, 기원전 46년에는 주애군마저 폐지되어, 전한의 하이난 개척은 실패로 돌아갔다. 후한 때 광무제가 담이군을 다시 설치했다고 하나, 명제가 67년에 담이(儋耳)가 내부해와서 동윤(僮尹)을 담이태수로 임명했다가 교지자사로 되돌렸다는 것을 봐선, 실제로 담이군이 설치되었거나 유지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40년 무렵의 군·현 목록으로 분석되는 『속한서』 군국지에는 합포군에 주애현이 기재되어 있으나, 이는 주려현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242년에는 장군 섭우육개에게 주애주를 개척하러 보냈는데, 이때 육개의 관직이 담이태수(儋耳太守)였다고 한다. 두 사람이 어느정도 성과를 냈는지, 이후 섭우는 단양태수로 전보되었고 육개 또한 건무교위로 전보되었는데, 이를 보면 담이태수는 실제 담이군이 있었기에 임명한 것이라기보다는 원정대의 지휘관 자격으로 임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진서』 지리지에는 이 해에 주애군이 설치되었다고 전하고 있어 이때부터 주애주를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손권은 이전에도 위온제갈직을 보내 현재의 타이완섬에 해당하는 이주(夷洲)와 전설상의 섬인 단주(澶洲)를 찾게 하여 주민들을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렸던 적이 있기에, 주애주 개척의 목적이 주애주를 영역화하여 통치하려던 것이라기보다는, 주애주의 원주민들을 잡아 와 인구를 늘리려던 것이 주목적이라 여겨지고 있다. 오나라가 멸망한 이후 서진이 주애군을 폐지하였다.
소속 [전한]교지자사부→[-46]폐지, [242]교주→[280]폐지
치소 [전한]주애현, [242]서문현
담이군: [전한]담이현
전입 [242]주관군 서문현
설치 [242]주애현?
폐지 [280]주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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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주애군(기원전 46년 폐지): 주애현·담도현·구중현·자패현·임진현·대모현·산남현
담이군(기원전 82년 폐지): 담이현·지래현·구룡현·낙라현·안로현·영풍현·순조현 }}}}}}}}}
주애군에는 몇 개의 현이 운영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보통 레이저우(雷州)반도 끝자락에 있던 서문현에 주애군의 치소가 있던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간혹 주관현이 주애군에 설치된 현이라던가, 주려현이 주애군에 복치되었다는 등의 의견이 있는데, 주관현은 주관군(합포군)에 설치된 군이지 주애군에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주려현 또한 그 위치를 살펴봤을 때 주애군과는 무관할 것으로 여겨진다. 오나라가 주애주에 섭우와 육개 등을 보냈을 때 주애현을 다시 복구하여 주애군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8. 교지군(交趾郡)

남월어우락을 정복하고 차지한 영토로, 전한이 기원전 111년에 남월을 멸망시키고 교지군을 설치했다. 지금의 베트남 북부에 해당한다. 후한 말 군웅할거 시기에 교지태수로 있던 사섭이 196년 주변의 군들에 자기 형제들을 태수로 임명해 보내 그 일대에서 할거했으나, 210년에 손권에게 종속되었다. 213년에 조조가 교주를 폐지하여 관념상으로는 형주에 소속되었으나, 이미 이 시점에는 손권이 교주를 장악한 때라 실현되지는 않았다. 263년에 여흥의 봉기에 가담해 위나라로 투항하여, 서진 때인 271년까지 서진의 영역으로 유지되었다. 여담으로 교지군은 베트남 지역을 가리키던 말레이어 Kuzhi의 어원이 되었는데,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인들이 Kuzhi를 코친으로 부르다가 인도의 코친과 구분하기 위해 베트남의 코친에는 차이나를 덧붙여 '코친차이나'라고 하였다. 코친차이나는 19세기 프랑스령 베트남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소속 어우락→남월→[한]교지자사부→[서진]교주
치소 [전한]이루현→[후한]용편현
신창군: 미령현
무평군: 봉계현→[서진]무녕현
분합 [271]신창군: 미령현
[271]무평군: 봉계현
설치 [271]무녕현·교흥현·무안현·해평현 및 신창군 가녕현·오정현·봉산현·임서현·서도현 및 무평군 평도현·무흥현·진산현·근녕현·안무현·부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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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교지군(10현 92,440호 746,237구): 이루현, 안정현, 구루현, 미령현, 곡양현, 북대현, 계서현, 서우현, 용편현, 주연현
후한 교지군(12성): 용편현, 이루현, 안정현, 구루현, 미령현, 곡양현, 북대현, 계서현, 서어현, 주연현, 봉계현, 망해현
서진 교지군(14현 12,000호): 용편현, 구루현, 망해현, 이루현, 서우현, 무녕현, 주연현, 곡양현, 교흥현, 북대현, 계서현, 정안현[9], 남정현, 해평현
신창군(6현 3,000호): 미령현, 가녕현, 오정현, 봉산현, 임서현, 서도현
무평군(7현 5,000호): 평도현[10], 무흥현, 진산현, 근녕현, 안무현, 부안현, 봉계현 }}}}}}}}}

8.1. 신창군(新昌郡)

271년에 오나라가 교지군을 수복하면서 교지군 미령현을 분할해 설치했다.

8.2. 무평군(武平郡)

271년에 오나라가 교지군을 수복하면서 교지군 봉계현을 분할해 설치했다.

9. 구진군(九眞郡)

남월어우락을 정복하고 차지한 영토로, 전한이 기원전 111년에 남월을 멸망시키고 구진군을 설치했다. 오늘날 베트남 북부에 해당한다. 213년에 조조가 교주를 폐지하여 관념상으로는 형주에 소속되었으나, 이미 이 시점에는 손권이 교주를 장악한 때라 실현되지는 않았다. 263년에 여흥의 봉기에 가담해 위나라로 투항하여, 서진 때인 271년까지 서진의 영역으로 유지되었다. 오나라가 구진군을 수복한 이후 구진속국도위부를 설치했다가, 278년에 이를 일남군과 합쳐 구덕군으로 승격시켰다.
소속 어우락→남월→[한]교지자사부→[서진]교주
치소 서포현
구진군: [271]함환현→[278]구덕현
분합 [271]속국도위→[278]구덕군: 함환현
설치 [271]건초현·상락현·부락현 및 속국도위부 구덕현·양성현·부금현·곡서현·도효현·월상현, [280?]진오현·송원현 및 구덕군 남릉현·포양현, [서진]고안현·영이현·군안현 및 구덕군 서안현
폐지 [삼국]무공현, [서진]무편현·도롱현 및 구덕군 월상현
출신 남월: 조국달·조구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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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구진군(7현 35,743호 166,013구): 서포현, 거풍현, 도롱현, 여발현, 함환현, 무절현, 무편현
서포현→환성현(驩成縣), 무편현→구진정현(九眞亭縣)
후한 구진군(5성 46,513호 219,894구): 서포현, 거풍현, 함환현, 무공현, 무편현
서진 구진군(7현 3,000호): 서포현, 이풍현, 진오현, 건초현, 상락현, 부락현, 송원현
구덕군(8현 0호): 구덕현, 함환현, 남릉현, 양원현[11], 부금현, 곡서현, 포양현, 도효현 }}}}}}}}}

9.1. 구덕군(九德郡)

271년에 오나라가 구진군을 수복하면서 구진군 함환현에 속국도위(屬國都尉)를 설치하고, 새로 구덕현·양성현·부금현·곡서현·도효현·월상현을 설치하여 함환현과 함께 구진속국도위부(九眞屬國都尉部)로 편성했다. 278년에 구진속국도위부와 일남군을 합병하여 구덕군을 설치하고, 구덕현에 구덕군의 치소를 두었다. 오나라 멸망 이후, 서진이 다시 일남군을 설치하고 월상현을 폐지했으며 남릉현·포양현·서안현을 설치했다.

10. 일남군(日南郡)

남월어우락을 정복하고 차지한 영토로, 전한이 기원전 111년에 남월을 멸망시키고 일남군을 설치했으며, 이후 교지자사부에 소속시켰다. 192년에 우련(區連)이란 인물이 상림현을 점거하고 왕을 자칭하여 한자로는 임읍(林邑)이라고 표기되는 참파를 건국했다. 213년에 조조가 교주를 폐지하여 관념상으로는 형주에 소속되었으나, 이미 이 시점에는 손권이 교주를 장악한 때라 실현되지는 않았다. 248년에는 참파의 공격을 받아 서권현까지 함락당했는데, 같은 해에 오나라가 서권현을 다시 수복하고 옛 노용현이 있던 곳에 속국도위(屬國都尉)를 설치했다. 아마도 노용현은 248년 이전에 이미 임읍국에 점령당해 폐현된 상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278년에 구진속국도위와 합병되어 구덕군이 되었고, 일남속국도위는 구덕군 관할이 되었다. 오나라 멸망 이후 서진이 일남속국도위부를 승격시켜 일남군을 설치했다.
소속 어우락→남월→[한]교지자사부→[278]구덕군에 합병, [280]교주
치소 [전한]서권현→[248]주오현, [280]노용현
분합 [192]참파 독립: 상림현
[248]일남속국도위
설치 [280?]노용현(재설치)·상림현, [서진]수령현·무로현
폐지 [248?]노용현
출신 상림현: 우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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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일남군(5현 15,460호 69,485구): 주오현, 비경현, 노용현, 서권현, 상림현
서권현→일남정현(日南亭縣)
후한 일남군(5성 18,263호 100,676구): 서권현, 주오현, 노용현, 상림현, 비경현
서진 일남군(5현 600호): 상림현, 노용현, 주오현, 서권현, 비경현 }}}}}}}}}
오늘날 베트남 중부지방으로, 한나라 영역 중에서는 최남단에 위치했다. 후한 때에는 수도인 낙양에서 13,400리 거리로 가장 먼 지역으로 인식되었고, 이 지역으로의 유배는 단순히 죽이지만 않을 뿐인(...) 최악의 형벌이었다. 그야말로 후한판 삼수갑산으로, 특히 낙양과는 기후대부터 다른 지역임을 감안하면 당시에도 외지 사람이 이곳의 환경에 적응하거나 풍토병에 견딘다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지(...) 유배지가 이곳으로 정해지면 장례식을 먼저 치르고 출발했다고 한다. 공손찬이 후한 말에 요서태수 유기를 따르다가, 유기가 어떤 일에 연좌되어 파면되자 그를 수행하며 수발을 들었고, 유기가 일남군으로 유배되는 것이 정해졌음에도 그를 따라갔다가 도중에 유기가 사면받아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 일로 인해 명성을 얻어 효렴으로 천거되어 요동속국도위의 장사가 된 일화가 있다. 삼국지 매체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는 편이나, 토탈 워: 삼국에선 DLC를 통해 일남군까지 구현되었는데, 황개라는 인물의 거점으로 나온다. 물론 이 황개는 손권의 장수 황개가 아니라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으로 당시에 일남태수를 맡고 있던 다른 사람이다.

11. 같이보기

파일:실제 지도 후한 13주.png

[1] 사섭 형제들이 한 일로 짐작된다.[2] 『진서』 지리지에는 이전 이름인 '신녕현'으로 표기되었다.[3] 『진서』 지리지에는 양평현(洋平縣)이 羊平縣으로 오기(誤記)되었다.[4] 『진서』 지리지에는 창오군 무성현을 울림군 소속으로도 중복 표기하고 중류현을 누락시켰다.[5] 『속한서』 군국지에 기재된 주애현(朱崖縣)은 주려현(朱盧縣)의 오기로 판단된다.[6] 『진서』 지리지에는 이전 이름인 '영도현'으로 표기되었다.[7] 『진서』 지리지에는 영포현과 창평현이 기재되었는데, 서진이 영포현을 창평현으로 개명하였으므로 이는 중복해 기재한 것이다. 송나라가 간양현(簡陽縣)을 간양현(澗陽縣)으로 고친 점으로 보아, 간양현이 누락되고 창평현이 기재된 것으로 보인다.[8] 『진서』 지리지에는 황양현(黃陽縣)으로 오기되었다.[9] 『진서』 지리지에는 전한 이전 이름인 '안정현'으로 표기되었다.[10] 『진서』 지리지에는 무녕현(武寧縣)으로 오기되었다.[11] 『진서』 지리지에는 양수현(陽遂縣)으로 오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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