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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녕

오서(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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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십이호신(江東十二虎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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甘寧/Gan Ning
감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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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毅武惠遺愛靈顯王神)
북송 송 태조:포국공(襃國公)
송 휘종:소의무혜유애령현왕
(昭毅武惠遺愛靈顯王)
최종직위 절충장군(折衝將軍)
성씨 (甘)
(寧)
흥패(興覇)
생몰기간 ?년 ~ 215년?[1]/219년?[2]
고향 익주(益州) 파군(巴郡) 임강현(臨江縣)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익주의 토호2.2. 익주를 떠나다2.3. 황조의 푸대접2.4. 손권에게 투항2.5. 남군 공방전2.6. 환성 전투2.7. 익양대치2.8. 2차 합비 공방전2.9. 유수구 전투2.10.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2.11. 죽음
3. 삼국지연의4. 나이5. 감녕전의 순서 문제6. 기타
6.1. 사후 추서
7.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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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 주로 형주강동에서 활약했던 것과는 달리 출신지는 파촉 지역이다.

2. 정사 삼국지

2.1. 익주의 토호

고향이 익주 파군인데 본디 감녕이 형주 남양 사람이지만 선조가 파군에서 빈객으로 지내 파군 사람이 되었다고 하며, 《화양국지》 <파지>에 따르면 감씨는 임강현의 대성 중 하나이다.

젊어서 파군에서 관리를 지내고 천거되어 촉군승[3]으로 임명되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본군으로 돌아갔다. 사람됨이 싸움을 잘하고 무리를 끌고 다니기 좋아했기에 동네 건달들을 모아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해적단을 만들어 인근에서 행패를 부렸다.

이때 감녕은 호화판으로 도배를 하고 살았는데, 땅에서 출입할 때는 수레와 기마병들이 길게 늘어서 정렬했고, 물에서는 배들이 늘어섰으며, 시종들을 비단으로 치장시켜 감녕이 가는 곳마다 빛이 날 정도였으며, 비단으로 돛을 만들어 배를 맸다가 떠날 때는 이걸 잘라버리는 기행을 벌였고, 비단으로 돛을 맨다고 해서 금범이란 말의 유래가 되었다.[4] 또한 물소 꼬리로 만든 깃발을 등에 지고, 손에는 활을 들고, 허리에는 항시 큰 구리방울을 달고 다녀 사람들은 감녕의 구리방울 소리만 들어도 몸을 사렸고, 관리들조차 감녕에게 영합해 서로 나눠먹었었고 그렇지 않은 관리는 온갖 보복을 받았다고 하며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배가 언급되는 것과 파군의 위치를 봤을 때 아마 형주와 익주를 잇는 물길을 장악해 익주의 주요 이권사업인 비단무역을 독점하고 왕 부럽지 않은 위세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이쯤되면 이미 조폭이라기보단 소규모 군벌 레벨로 봐야할 수준이다. 실제로 군벌에 가까운 힘이 있었으니까 반란에 주요 인물로 가담할 수가 있었던 거겠지만 말이다.

2.2. 익주를 떠나다

그렇게 촉 지방에서 두목 노릇을 20년[5] 동안 하며 보니 점차 성격도 누그러지고 제자백가의 책을 가까이하여 부하들을 데리고 형주로 가서 유표에게 의탁했다.

다만 <유언전>에 주석으로 달린 《영웅기》에 따르면 194년, 익주에서 유언이 죽고 아들인 유장이 집권하자 형주 별가 유합(劉闔)과 유장이 거느리던 심미, 누발, 감녕이 장안에서 이각이 임명한 익주자사 호모(扈瑁)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주하여 형주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의 이름 중에 감녕이 보이며, 또한 반란군 인사들의 면면에는 뜬금없이 형주 별가가 끼어있는데 이로 인해 감녕이 유표에게 달아나기 이전에 이미 유표가 감녕 등의 반란을 지원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감녕의 본전에서는 감녕이 형주로 간 것을 '위협하고 협박하는 것을 그만두고 제자백가의 책을 가까이하여'라고 어물쩡 넘어가고 있지만 이를 본다면 실제로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도망친 것이라는 쪽이 신빙성 있게 보인다.

2.3. 황조의 푸대접

하지만 막상 유표는 감녕을 그다지 중용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유표를 지켜본 감녕 역시 유표가 군사업무에 관련된 일을 전혀 모른다고 여겨 그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오나라를 따르려 했지만 강하태수 황조가 하구를 막고 있었기에 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황조에게 의탁했다고 한다.

어쨌든 황조에게 갔지만 황조 역시 바른말만 하는 감녕을 예우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났을 때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황조가 패하고 추격을 받아 위태로워지자, 감녕은 활을 쏘아 능조(능통의 아버지)를 죽여 황조를 구하는 공을 세웠지만 황조는 여전히 감녕을 처음과 같이 대했다고 한다. 이 공으로 황조의 부장 소비(蘇飛)가 감녕을 수차례 천거했으나 황조는 오히려 감녕을 견제하기 시작해 감녕의 빈객들[6]을 유혹해 흩어지게 하는 등 더욱 푸대접한다. 실의에 빠진 감녕은 황조를 떠나고 싶었지만 도망쳤다간 붙잡힐 것이 두려워 떠나지 못한 채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감녕의 마음을 알았던 소비는 황조에게 말해 감녕을 주(邾)의 현장으로 삼아 원하거든 다른 곳으로 가도록 했다. 그러니까 변방으로 파견을 보내줄 테니, 도망치든 남든 네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2.4. 손권에게 투항

소비가 준 기회 덕분에 감녕은 8백 명의 무리를 모아 그대로 손권에게 투항해 버린다.

하지만 역시 예전에 오나라 장수인 능조를 죽인 일이 있어서인지 바로 가지 못하자 여몽주유의 추천으로 손권 앞에 나아가게 된다. 감녕은 황조 등을 치자고 진언하자 손권은 승낙한다. 감녕은 장소의 만류마저도 소하의 예를 들며 물리친 후 황조를 공격해 강하의 악현과 사이현을 점령한 후에 당구에 머문다. 황조가 풍칙에게 죽은 후 손권이 황조의 수하였던 소비도 죽이려고 했는데 감녕은,
소비는 옛날 저에게 은혜를 베푼 자입니다. 저는 소비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전에 길가에서 죽어 장군 휘하에서 목숨을 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소비의 죄는 주륙을 당함이 마땅하지만, 특별히 장군께서 그의 머리를 저에게 주시길 원합니다.

라고 말하며 그를 살려줄 것을 청한다. 소비가 도망치면 어쩔 것이냐는 손권의 물음에는,
소비는 찢기는 화를 면하고 다시 살 수 있는 은혜를 받는다면 오히려 달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도망칠 생각을 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저의 머리를 대신 상자에 넣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손권이 결국 소비를 살려주었다고 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손권은 감녕에게 병권을 주고, 당구에 주둔하도록 했다.

2.5. 남군 공방전

이후에 감녕은 주유 밑에서 적벽대전에 참여했고 적벽대전이 끝나고 주유가 남군의 조인과 싸웠지만 아직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감녕은 이릉성을 탈취하지만 곧바로 조인이 보낸 몇 배나 되는 적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병사들이 모두들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감녕만은 태연자약하게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고사성어 담소자약의 유래, 감녕은 주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주유는 여몽의 계책을 써서 포위를 풀었다.

2.6. 환성 전투

후에 감녕은 환현 공격에 참가해 승성독(升城督)으로 임명됐다. 감녕은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 올라가 장사들의 선봉이 되어 결국은 주광(朱光)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았다. 전후 공로를 평가하니 여몽이 가장 컸고, 감녕이 그 다음이었으므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제수되었다.

2.7. 익양대치

손권이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탈취한 일로 노숙관우익양에서 대치하게 되었을 때 이를 수행했다. 당시 관우가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그중 정예 5천을 가려내어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겠다고 했다. 감녕은 당시 병사 3백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노숙에게 병사 5백을 요청하여 관우에게 대항하겠다고 말해 노숙이 가려 뽑은 병사 1천을 받아 그날 밤 가니 관우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 감녕은 관우가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며 건너면 반드시 사로잡는다고 자신했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결국 도강을 하지 못한 채 강 건너에 머무르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이를 관우뢰(關羽瀨)라고 부른다.[7] 수경 역주에서 이르길 현에 관우뢰(關羽濑)가 있으니, 소위 관후탄(關侯灘)으로, 남으로 감녕(甘甯)의 옛 보루와 마주했다. 관우가 밤에 감녕이 배치하는 소리를 듣고 이르길 "(이것은) 흥패(興霸)의 소리구나."라고 한 이후 감히 건너지 못했다.[8]

당시 관우의 용맹이 대단히 높게 평가받았음을 생각하면 감녕의 대담한 태도는 무척 인상적인 것이다. 한편 관우가 감녕의 이름을 알고있다는 점도 특이사항인데 남군 공방전 때 그의 활약을 어떻게든 봤거나 들어본 것이 아닌가 싶다. 감녕이 대담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치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미 손권군이 형남 3군을 점령하였고, 관우의 도하를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으니 관우가 바보가 아닌 이상 무모한 자살공격은 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여 아군의 사기를 올린 계산도 포함됐다고 여길 수 있다.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 양신, 하이 두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2.8. 2차 합비 공방전

215년, 감녕은 합비 공방전에 참가했는데, 마침 역병이 유행하여 군대는 모두 물러났고, 오직 수레 아래의 호사(虎士) 1천여 명과 여몽장흠능통과 감녕이 손권을 따라 소요진(逍遙津)[9] 북쪽에 있었다. 장료는 멀리서 이러한 모습을 관찰하고 즉시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급습하였다. 감녕은 뒤에서 적에게 화살을 쏘았으며, 능통 등은 직접 앞으로 나가 필사적으로 장료군과 싸웠다. 감녕은 군악대에게 무엇 때문에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 않느냐고 거세게 소리 질렀다. 그때 감녕은 웅장하고 강인했다고 한다. 손권은 특별히 감녕을 칭찬했다.

2.9. 유수구 전투

유수구 전투에서는 감녕이 단 100명의 군사로 야습을 성공시켜[10] 그나마 오나라의 자존심을 세워준 일화로 손권은
맹덕에겐 장료가 있지만, 나에겐 흥패(興覇)[11]가 있으니, 족히 서로 상대해볼 만하다!

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2.10.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감녕의 주방에서 일하는 어린이가 일찍이 허물이 있자 여몽에게로 달려가 투항했다.[12] 여몽은 감녕이 그 아이를 죽일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즉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후에 감녕이 예물을 갖고 여몽의 모친을 배알하고 직접 모친과 당에 오른 후에야 비로소 주방의 어린이를 감녕에게 돌려보냈다. 감녕은 여몽에게 그 아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잠시 후, 배로 돌아오자 그 아이를 뽕나무에 묶어놓고 직접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 일을 마친 후, 뱃사람들에게 명하여 배의 닻줄을 내리도록 하고, 옷을 벗고 배 안에 누웠다. 여몽은 매우 노여워하며 북을 쳐서 병사들을 모아 배로 가서 감녕을 공격하려고 했다. 감녕은 이 소식을 들었지만, 고의로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안 여몽의 모친이 '주군(손권)에게서 중대사를 떠맡은 네가 주군의 신하인 감녕을 너의 사사로운 노여움 때문에 죽게 한다면 설령 주군께서 힐문하지 않더라도 그 행동이 신하된 자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라며 여몽을 만류하였고, 여몽은 본디 지극한 효자였으므로 모친의 이 말을 듣고 곧 마음을 풀고는 감녕의 배로 가서 웃으며 감녕에게 '흥패(감녕의 자), 어머니께서 그대를 식사에 초대하셨으니 어서 올라오시오!'라며 화해를 청하였다. 감녕은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며 여몽에게 사과하고는 여몽과 그의 어머니와 함께 온종일 즐겁게 지냈다는 뒷이야기가 전한다.

마치 훈훈한 미담처럼 보이는 이 일화는 오의 군사 체계가 얼마나 형편 없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감녕 주방 소속의 어린이였다지만 소속을 따지며 스스로 탈출해 투항한다든지, 대놓고 상관인 여몽의 말을 개무시한다든지[13] 군사 대 군사로 맞붙으려 한다든지 손권 직속 휘하로 일원적으로 편제된 세력이 아닌 연합 체제 같은 오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정사의 〈감녕전〉에서 '감녕은 사납고 살생을 좋아했지만 호방하고 맑은 성정과 계략이 있었다'고 하는데, 확실히 호전적이고 야만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다.

2.11. 죽음

건강실록[14]에 따르면 215년 죽는데 그의 병사는 반장이 이끌게 된다. 다만 <반장전>에 따르면 관우 토벌 이후에 감녕의 군대를 인수 받았다고 하는데 (대략 219년), 그 4년 사이의 주인 없는 군대를 방치할 리 없기 때문에 모순되기도 한다.

감녕이 죽은 후, 손권은 매우 애통해했다. 아들 감괴(甘瑰)는 죄를 범하여 회계군으로 망명하였다가 그 역시 오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3. 삼국지연의

소비 덕분에 스스로 변방으로 밀려나 손권에게 투항하는 것까진 같은데, 황조와 싸울 때 정보에게 쫓겨나는 황조를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황조를 무시하고 죽인다.[15] 이는 자신이 오나라의 신하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덧붙여 자신의 투항을 방조했다가 손권에게 붙잡힌 소비가 감옥에서 몰래 사람을 보내 자신을 구해달라고 하자, "소비 덕분에 이렇게 투항하게 됐으니 그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소비를 풀어주면 도망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주군 덕분에 목숨을 건졌는데 어찌 도망치겠습니까. 그가 도망친다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며 소비를 석방시켜 보답하기도 했다.

적벽대전에선 황개고육지계를 말리느라 주유에게 간청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 때문에 몇몇 삼국지 게임에선 감녕이 오나라 진영에 없는 경우 적벽대전 이벤트가 활성화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고육지계를 말리는 것도 그렇고 어째 연의계열 창작물에선 감녕의 성격이 정사보다 온화하게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 얼떨결에 황개와 함께 주유에게 얻어맞고 나서 감택채중채화를 속이려는 걸 눈치채고 감택의 연기에 맞춰 같이 주유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연기를 하는 등 눈치빠르고 유들유들한 성향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황조 휘하에 있을 때 능조를 죽인 것 때문에 그 아들인 능통과의 사이가 한동안 껄끄러웠다. 거기다가 감녕이 계속 전공을 세우면서 손권의 칭찬을 받으니 능통이 더더욱 심기가 불편했다. 한 번은 조조군을 격파하고 승리의 연회를 열던 차에 "이렇게 좋은 자리에 춤이 없으면 쓰나."라며 능통이 먼저 칼춤으로 시비를 걸자 이에 자신도 칼춤으로 맞서며 서로 죽이려 했으나, 여몽이 끼어드는 척 방해하고 분위기를 엿듣고 얼른 찾아온 손권이 말린 덕분에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이에 감녕은 능력의 차이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인지, 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조조의 영채를 기습하는 무지막지한 전공을 세운다. 능통 역시 이에 자극받아 이튿날 악진과 싸울 것을 요청했는데 둘이 싸우던 중에 조휴가 능통의 말을 활로 쏴 넘어뜨려 위기에 처하자, 얼른 화살을 날려 악진을 낙마시켜 능통의 목숨을 구한다. 그럼에도 능통에게 굴욕과 열등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는지 잠자코 있었으나, 손권이 능통에게 "그대를 구해준 사람은 (내가 아니라) 감녕이다"라고 알려주자 감격하여 과거의 원한은 잊어버리고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다.[16]

이릉대전에서는 노환[17] 중에서 출전했다가 사마가의 화살을 머리에 맞아 도망가다가 나무 밑에서 죽었다.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감녕의 시신을 둘러싸고 울었다고 나온다. 그래서 감녕을 해당 지방의 수호신격으로 모시고 까마귀를 그의 심부름꾼으로 여겨, 그 지방에서는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까마귀들에게 먹이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4. 나이

그 맹렬한 무용에 거칠고 사치스러운 해적의 이미지를 더해 호쾌한 건달 청년쯤의 이미지로 묘사되지만 익주에서 관리를 지내다 사임하고 20년 동안 수적질을 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미 유표에게 임관하는 194년의 시점에서 40대 즈음의 나이였을 것이다.

단, 수적 두목 생활이 '20년'간 계속되었다는 표현에서 20년이라는 것은 정확히 20년이 아니라 대충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도 높으니까 몇 년 정도 더 적게 잡을 수는 있다.

또한 겨우 10대의 어린 나이에 군에서 천거되어 관리가 되었고 커리어를 엄청나게 빨리 시작했다는 가정도 할 수 있는데,[18] 사실 10대 소년이 장리로 천거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며, 현승도 아니라 군승, 그것도 꿰찬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어쨌든 가능성이 0은 아닌 이상, "나의 감녕은 이렇지 않아!"를 외치며 최대한 어리게 보려고 우긴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참고로 공손찬, 장료, 만총, 장기 등도 10대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저 20년이라는 표현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게 삼국지집해에서는 선후관계를 유장에게 반기를 들었다 도망친 후에 수적생활을 한 것으로 해석하여 2가 덧붙여진 거라 해설한다. 즉, 유장에게 반란→수적생활→유표에게 귀의 순으로 해설하고 있다. 이는 위에 언급된 영웅기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이것에 따르면 20년 수적생활 자체가 모순인 셈이다. 유언이 죽고 유장이 집권한 시기가 194년이니 이 기록을 신뢰한다면 수적생활을 한 것은 최대한 길어봐야 10년(194~203)이 안 된다.

호쾌한 청년 이미지가 익숙하긴 하지만 감녕의 나이를 어떻게든 최대한 어리게 잡으려고 해도 손교와 싸움난 일화를 보았을 때 적어도 손교보다는 1세대 위, 손교의 아버지뻘의 나이였을 것이다.[19] 하나 더하자면 훗날 동진에서 형주목에 진남대장군을 지낸 감탁이 그의 증손자인데 주로 어울렸던 인물인 주기나 고영은 주방과 고옹의 손자이다. 뭐 세대가 하나 빠르다고 해서 이런저런 변수가 있으니 그걸로 나이를 따지기는 무리일 수 있겠지만 감탁의 조부 감술이 감녕의 장자도 아니고 감탁도 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168년에 태어난 고옹이나 주방보다는 한 세대 위라고 봐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창작물에서는 나이가 별로 많지 않게 묘사되어 버린다. 절충안을 따지면 150년대 후반 ~ 160년대 초반에 출생했다고 보는게 좋을 듯.

연의에서는 222년 이릉대전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건강실록에 따르면 215년에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장전에 따르면 감녕의 병력을 받는 시기가 관우토벌 이후라서 확실히 215년에 죽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건강실록에서는 장굉의 사망이 229년으로 나오는 등 틀린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반장전을 따르면 대략 219년 즈음 사망했다고 볼 수 있다.

5. 감녕전의 순서 문제

적벽 이후부터 감녕전의 시간 순서는 아주 개판이다.

이 순서대로 나온다. 문제는 오주전(손권전)과 여몽전에 모두 환성 전투[20], 익양대치, 합비 공격[21] 이 순서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수구 전투에서 기습한 사건의 경우, 장료와 비교된다는 점에서 합비 공격 이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익양대치의 경우, 유비가 촉을 얻은 것이 214년 여름 이후이고, 조조가 한중을 공격한 시점이 빠르면 3월(공격 시작 시점), 늦어도 7월(장로 격파)라는 점에서 환성 전투와 합비 공격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정된 순서는 다음과 같다.

6. 기타

같은 오군의 능통과는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 원수로 여겨 껄끄럽게 지냈지만,[22] 연의에선 서로 창칼을 몇 년에 걸쳐서 나누고는 끝내 화해해서 호흡을 맞추게 된다.[23] 단 정사에선 둘이 끝내 화해했다는 기록은 없기에, 아마 서로 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손교와 관계는 손교가 술에 취해 발작해서 감녕과 싸웠다가 손권의 편지를 받고 손교와 감녕이 화해했다는 내용은 있다.

손권은 능통에게 원한관계를 잊고 잘 지내라고 일러두긴 했지만 붙여놓으면 언젠가 사고를 칠 것 같긴 했는지 둘의 주둔지를 멀리 떨어뜨려 놓는 식으로 웬만해서는 둘이 만날 일이 잘 없도록 했다.

감녕의 고향인 파군은 현재의 중경(重慶) 부근인데, 중경 만주구(萬州區)에 있는 감녕진(甘寧鎭)이 감녕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후손으로는 동진에서 안남장군 양주자사를 지낸 증손자 감탁(甘卓)이 있다.[24]

충북 청주시에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41호)에 새겨진 명문에 뜬금없이 감녕의 이름이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이 비단으로 유명한 사람이라서 "감녕의 비단 밧줄보다도 튼튼하다" 식으로 인용하고 있다.

6.1. 사후 추서

오의 장수 감녕을 소의무혜유애령현왕으로 추가로 봉했다.(吳 甘甯 昭毅武惠遺愛靈顯王)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鑒) 129권
13일. 부지의 소용묘에 이르러, 호주를 가지고 돼지를 희생으로 삼아 소의무혜유애령현왕신을 뵈었다. 신은 오대제때 절충장군 감흥패다. 흥패가 일찍이 서릉태수가 됐기에, 이 곳에서 제사를 받았다. 개보 중, 강남을 평정하고 나서, 강회의 신사의 봉작을 더해줘, 비로소 포국공에 봉했다. 선화 중, 왕으로 진작시켰다.[25]
육유의 입촉기(陸遊入蜀記) 4권

여담으로 관우처럼 후대에 신으로 떠받들렸다. 송나라 때 바람이 없어서 조운선이 출발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감녕이 때마침 바람을 불러왔다며 오왕신으로 봉작되기도 했고, 청나라 때 포송령의 요재지이에도 오왕신으로 등장한다. 다만 여러가지 제약[26] 때문에 관우 같은 전국구 신은 못 되고 지역신에 머물렀다. 감녕묘에 '오왕묘'라고 소동파가 현판도 썼다.

연의에서 까마귀가 그의 시신을 덮어줬다는 것 때문에 까마귀를 다스린다는 이미지가 있다. 까마귀로 변하게 한다던지 까마귀 부하들이 고기를 한 번에 낚아채서 먹는다던지...그외 중매를 서주거나 풍랑을 안정시켜주는 신으로도 섬겨졌다.

7.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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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매체에서 방울과 깃털장식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옛날에 수적질을 할 때 방울과 깃털장식을 했다는 말이 있고 연의에는 유수구에서 깃털을 단 다음 조조군에 기습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건강실록》을 따랐을 때의 사망년도. 그 이외 사서에서는 언제 죽었는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2] 정사 <반장전>에서의 내용을 토대로 추측되는 사망년도. 반장전의 서술 순서로는 관우토벌 후에 감녕의 군대를 받았다고 한다. 만일 215년에 사망했으면 4년 동안 주인 없는 군대를 방치할 리가 없기 때문에 의문점이 된다.[3] 승(丞)은 군을 다스리는 태수의 업무를 보좌하는 관직이다.[4] 비단으로 만든 돛은 어찌 보면 시대를 앞서간 졸리 로저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도 동양에서 먼저.[5]삼국지집해》에서는 저 햇수가 말이 안 된다고 부정한다. 그 외 자세한 부분은 아래의 감녕의 나이 문단으로 이동하면 된다.[6] 감녕은 본래 수적, 협객 출신이었으므로 사적으로 그를 따르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7] 이외에도 이 당시 즈음으로 노숙의 이름을 딴 제방인 '노숙제'도 만들어졌다.[8] 관우는 자부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9] 지금은 중국인민공화국 허페이시에 있는 대형 도시공원이다.[10] 이것을 217년의 일로 보면, 장료합비 전투에서 시도했던 기선제압 기습공격의 복수전의 성격에 가깝다.[11] 감녕의 자(字)[12] 위군, 촉군도 아니고 손권이라는 같은 주군을 모시는 휘하 무장들인데도 투항이라는 용어가 쓰인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13] 물론 무시했다기보다는 이렇게 하더라도 여몽이 자신을 어찌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저지른, 계산된 행동으로 보인다.[14] 삼국시대의 오나라 이래로 건강(건업)을 중심으로 한 강남 지방의 국가들의 연대학적 사서이다.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기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사 삼국지와 충돌되거나 모순되는 내용도 존재하고, 여기에서만 존재하는 기록은 교차검증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기도 하다.[15] 판본에 따라서는 뒤쫓아오던 정보가 죽이게 놔 두면 자신의 투항이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게 보일까봐 서둘렀다는 설명이 붙기도 한다.[16] 다만 사실 후술할 나이 논란을 보면 알겠지만 감녕은 능통의 아버지뻘 나이이다.[17] 이문열 삼국지에서는 이질에 걸려 설사를 흘리며 출진했다고 하지만, 원작에서는 노환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18] 약관 20세에 천거되는 것도 대단한 속성 코스다.[19] 둘의 싸움 뒤에 대략 212년 경에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손권이 손교를 질책하는 편지에서 곧 서른인데 철 좀 들어라는 식으로 훈계하는 것과 그 전에 감녕이 손교에게 불쾌감을 토로할 때, 항렬 차이를 운운하는 걸 보아 183년 이후 출생일 것으로 추측되는 손교보다는 한 세대 위의 나이로 보인다. 때문에 감녕의 출생년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160년대 중반이 한계치다. 사망 당시 최소 50세는 되었다는 소리다.[20] 오주전에 의하면 214년 5월이다.[21] 무제기(조조)에 의하면 215년 8월이다.[22] 능통이야 아버지의 원수이니 대놓고 감녕을 죽이네 마네 했고 감녕 역시 그가 언제 자신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밀지 몰라 계속 경계했다.[23] 자세한 것은 능통 문서로.[24] 증조부와는 캐릭터가 다른 인물로 내치, 문관형 인물이고 능력은 있는 대신 겁이 많고 우유부단한 면이 있었다. 동진정권에서 중용되었으나 그 우유부단함 때문에 왕돈의 난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자신도 암살당한다.[25] 원문: 富池 昭勇廟 壺酒犧牲 昭毅武惠遺愛靈顯王神 吳大帝 折衝將軍甘興霸 西陵太守 開寶 江淮 神祠 襃國公 宣和[26] 관우는 일평생 한 주군만 섬겼기에 위정자들이 좋아했고 평소 춘추를 탐독하며 충의를 지표로 삼았기에 지식인들도 좋아했으며 출신성분이 불분명한 평민 출신이면서 강자 앞에 당당하고 약자에게 너그러워 백성들도 좋아했지만, 감녕은 여러 주군을 섬겼고 학문적 소양은 알려진 바도 없으며 상관 여몽의 말조차 개무시할 정도로 성품이 무지막지하고 강자에게 강하면서 약자에겐 더 강했기 때문에 위정자, 지식인, 백성 모두에게 점수를 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