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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7:10:40

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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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仁
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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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충후(忠侯)
작위 도정후(都亭侯) → 안평정후(安平亭侯) → 진후(陳侯)
최종직위 대사마(大司馬)
성씨(曹)
(仁)
자효(子孝)
조부 조포(曹褒)[1]
아버지 조치(曹熾)[2]
생몰기간 음력:168년 ~ 223년 3월 19일
양력:168년 ~ 223년 5월 6일
고향 예주(豫州) 패국(沛國) 초현(譙縣)[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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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조조)
별부사마(別部司馬) 행 여봉교위(行 厲鋒校尉)
광양태수(廣陽太守) 겸 의랑(議郞)
행 정남장군(行 征南將軍)
행 안서장군(行 安西將軍)
행 효기장군(行 驍騎將軍)
행 정남장군(行 征南將軍) 겸 가절(假節)
정남장군(征南將軍)
조위(조비) 거기장군(車騎將軍) 겸 도독형양익주제군사(都督荊揚益州諸軍事)
대장군(大將軍)
대사마(大司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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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는 자효(子孝). 조조의 종제[4], 조순의 형으로 예주 패국 초현 사람.

2. 정사 삼국지

2.1. 조조 휘하

2.1.1. 초기 경력

<조순전>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조순은 나이 14세 때 부친을 여의고 동복 형인 조인과 따로 살았다.

어려서 활쏘기, 말타기, 사냥을 좋아했다. 그 뒤 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자 조인 또한 은밀히 소년들을 모아 천여 명을 얻어 회수, 사수 사이에서 활약하다 마침내 조조를 수종해 별부사마 행(行) 여봉교위가 되었다.

조조가 원술을 격파할 때 조인은 자못 많은 적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1.2. 서주 정벌

서주 정벌에 종군하여 조인은 늘 기병을 지휘하며 군의 선봉이 되었다. 따로 도겸의 장수 여유를 공격해 격파하고, 돌아와 팽성에서 대군과 합쳐 도겸군을 대파했다. 비, 화, 즉묵, 개양 공격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別將)을 보내 여러 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2.1.3. 복양 전투

조조가 여포를 정벌하니 조인은 따로 구양을 공격해 함락하고 여포의 장수 유하(劉何)를 사로잡았다.

2.1.4. 삼보의 난

조조가 황건적을 평정하고 천자를 영접해 허현(허도)에 도읍하매 조인이 수차례 공을 세우니 광양태수로 임명되었다. 조조는 조인의 용맹과 지략을 높게 여겼으므로 태수로서 군(郡)에 두지 않고 의랑으로 기병을 지휘하게 했다.

2.1.5. 양 전투

조조가 장수를 정벌하니 조인은 따로 주변 현들을 돌며 남녀 3천여 명을 붙잡았다. 조조군이 돌아오며 장수에게 추격당했는데 군이 불리하여 사졸들이 사기를 잃자 조인이 장병들을 격려해 심히 분발케 하니 태조(조조)가 이를 장하게 여겼고 마침내 장수를 격파했다.

2.1.6. 관도대전

<우금전>에 따르면 우금은 별도로 사환, 조인과 함께 사견에서 수고를 공격해 깨뜨리고 그를 참수했다.

<선주전>에 따르면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자 여남황건적 유벽 등이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에 호응했다. 원소는 유비를 보내 군을 이끌고 유벽 등과 함께 허도 아래를 공략하게 했다.

조조는 원소와 더불어 관도에서 서로 오랫동안 대치했는데, 원소가 유비를 보내 예주 여남군 은강현 등 여러 현을 돌며 많은 무리를 일으켜 호응하게 했다. 허현 남쪽에서 관원과 백성들이 안정되지 못하자 조조가 이를 근심했다. 조인이 말했다.
남방 사람들은 대군이 원소와 대치하느라 눈앞이 급박하므로 구원해줄 수 없으리라 여기는 터에 유비가 당도하니 배반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유비가 새로 원소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어 그들을 능히 부릴 수 없을 것이니 공격하면 무찌를 수 있습니다.
조조가 그 말을 옳게 여기고는 조인에게 기병을 거느리고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조인은 이를 패주시키고 모반한 현을 모두 다시 수습하고 돌아왔다.

원소가 별장(別將) 한순을 보내 서쪽 길을 노략질하고 끊게 하자 조인이 계락산에서 한순을 공격해 대파했다. 이로 말미암아 원소는 감히 다시는 군사를 나누어 출군하지 못했다. 다시 사환 등과 함께 원소의 군량 운반 수레를 노략질하고 그 양곡을 불태웠다.

2.1.7. 하북 평정

<무제기>에 따르면 고간은 조조가 오환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는, 주(州)를 들어 모반하여 상당태수를 붙잡고, 군사를 일으켜 호관구(壺關口)를 지켰다.

하북이 평정된 후 호관을 포위하는 데 종군했다. 조조가 명을 내렸다.여러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했다. 조인이 조조에게 말했다.
지금 공께서 반드시 죽일 것이라 말씀하시니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굳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지금 적의 견고한 성 아래에 머물면서 공격해 포로들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조조가 이를 따르니 성이 항복했다. 이에 조인의 앞뒤 공을 기록해 도정후에 봉했다.

2.1.8. 형주 정벌

형주 평정에 종군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조조는 그대로 북쪽으로 돌아가고, 조인과 서황에게는 강릉을, 악진에게는 양양을 지키도록 했다.

2.1.9. 남군 공방전

조인은 행(行) 정남장군으로 임명되어 강릉에 남아 주둔하며 오장 주유를 막았다. 주유는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고 선봉 수천 명이 처음으로 당도했다. 조인은 성에 올라 이를 보고 3백 명을 뽑고는, 부곡장 우금(牛金)을 보내 거꾸로 싸움을 걸게 했다. 적이 많고 우금의 군사가 적었으므로 마침내 포위되었다.

장사(長史) 진교가 함께 성 위에 있었는데 우금 등이 거의 몰살되려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안색을 잃었다. 조인이 의기로 매우 분노해 좌우에 일러 말을 가져오게 하니 진교 등이 함께 조인을 말리며 말했다.
적의 군사가 흥성하니 당해낼 수 없습니다. 설령 수백 명을 버린다 한들 큰 손해가 아닌데 어찌 장군께서 몸소 가려 하십니까!
조인이 응낙하지 않고 마침내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고는 휘하의 장사 수십 기를 거느리고 성을 나섰다. 적과 백여 보 떨어진 곳의 해자에 접근했다. 진교 등은 조인이 응당 해자 가에 머물며 우금을 돕는 형세를 취할 것이라 여겼으나 조인은 해자를 뛰어넘어 곧바로 전진해 적의 포위망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고 이에 우금 등이 풀려날 수 있었다. 남은 군사들이 모두 빠져나오지 못했으므로 조인이 다시 돌아가 돌진해 우금의 군사를 벗어나게 하고 여러 명을 잃었으나 적이 이내 물러났다.

진교 등은 당초 조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두려워했는데 조인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자 감탄하며 말했다.
"장군은 실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십니다!"
전군이 그 용맹에 감복했다. 조조가 더욱 장하게 여겨 안평정후로 옮겨 봉했다.

<이통전>에 따르면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 놓았다.

<서황전>에 따르면 서황은 또한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에서 주유를 쳤다.

<감녕전>에 따르면 감녕은 먼저 곧장 이릉으로 진군하여 취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가서 그 성을 얻었으며, 들어가서는 고수했다. 그 당시 수하에는 수백 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새로 얻어서 1천 명을 채웠다. 조인은 곧 5, 6천 명을 시켜 감녕을 포위하도록 했다. 감녕은 며칠간의 계속된 공격을 받았으며, 적은 높은 누각을 세우고 성 안으로 비가 내리는 듯이 화살을 쏘았다.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오직 감녕만은 태연자약하게 담소했다.

<주유전>에 따르면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사용하여 능통을 남겨 그 뒤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결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대단히 심했으므로 곧 바로 돌아왔다. 후에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인은 이 때문에 후퇴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209년, 주유와 조인이 서로 대치한 지 1년이 넘어,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조인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통전>에 따르면 이통은 부대를 인솔하여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포위권으로 진입하여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 조인의 군사를 구출했는데, 무용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2.1.10. 관중 평정

조조가 마초토벌하며 조인을 행(行) 안서장군으로 삼아 제장을 지휘해 동관을 막게 하고 위남에서 마초를 격파했다.

2.1.11. 유수구 전투

<무제기>에 따르면 216년 ~ 217년 3월, 왕(위왕, 즉 조조)이 군을 이끌고 돌아오며 하후돈, 조인, 장료 등을 남겨 거소에 주둔하게 했다.

2.1.12. 형주 진수

소백(蘇伯), 전은(田銀)이 모반하자 조인은 행(行) 효기장군으로 임명되어 7군을 지휘해 전은 등을 토벌하고 이를 격파했다. 다시 조인을 행(行) 정남장군, 가절로 삼았고 에 주둔하며 형주를 진수하게 했다.

<허저전>에 따르면 조인이 형주에서 조조를 보러 왔는데, 조조가 아직 나오지 않았으므로 조인은 들어간 후 허저궁전 밖에서 만났다. 조인이 허저를 불러들여 곧 말을 하려는데, 허저가 말했다.
왕(조조)께서 곧 나오십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와 어전으로 들어갔으므로, 조인은 마음속으로 그를 원망했다. 어떤 사람이 허저를 질책하며 말했다.
정남장군(조인)은 조공(조조)의 종족이고 조정의 중신인데, 낮추어 존경하며 그대를 불렀거늘 당신은 무엇 때문에 거부했소?
허저가 말했다.
그는 비록 친족의 중신이지만, 결국은 외번(제후)입니다. 저는 조정 신하의 일원이므로 일이 있으면 여러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방으로 들어가 속삭이겠습니까?

조인은 어릴 때 바른 품행을 닦지 않았으나 장성해 장수가 되자 엄격하게 정돈하고 법령을 받들어 늘 법령을 좌우에 두고 이를 살펴 사무를 처리했다. 언릉후 조창이 북쪽으로 오환을 정벌할 때 조비동궁(태자궁)에 있었는데 서신을 써서 조창을 훈계해 말했다.
장수가 되어 법을 받드는 것은 응당 정남(조인)과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2.1.13. 번성 공방전

219년, 후음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주변 의 무리 수천 명을 초략하자 조인이 제군을 이끌고 후음을 공파하여 참수했다. <무제기>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인은 완을 도륙했다. 조인전에 따르면 이후 번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정남장군에 임명되었다.

<온회전>에 따르면 온회관우를 경계하면서 지금 강물은 불어나는데 조자효(조인)가 너무 깊게 들어가 고립되어 대비를 못하고 있다고 위험하다며 홍수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관우가 수몰로 적을 격파하는 것을 계획하고 치고 올라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과연 관우가 번을 공격하고 이때 한수가 범람하여 우금 등 7군이 모두 물에 잠기고 우금이 관우에게 항복했다. 조인은 인마(人馬) 수천으로 성을 지켰는데 성에서 물에 잠기지 않고 남은 부분이 수 판(板)에 불과했다. 관우가 배를 타고 성으로 와서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안팎이 단절되었고 양식이 떨어지려 하고 구원병은 도착하지 않았다. 조인이 장사들을 격려하고 필사의 각오를 보이자 장사들이 감복하여 모두 하나가 되었다.

<만총전>에 따르면 번성은 물에 잠겨 자주 붕괴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안색을 잃었다. 어떤 사람이 조인에게 말했다.
지금의 위험은 우리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관우의 포위진이 합쳐지지 않는 틈을 타서 가벼운 배를 타고 밤에 달아나십시오. 비록 성을 잃을지라도 생명은 보존할 수 있습니다.
만총이 말했다.
산으로부터 흐르는 물은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관우가 파견한 다른 군대는 이미 겹현 아래에 주둔해 있으며, 허성 남쪽 지역의 백성들은 불안해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관우가 지금 즉시 진격하지 않는 까닭은 우리 군대가 그들의 뒤를 끊을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도주한다면 황하 이남 지역은 다시는 국가(명목적으로는 한나라후한을 지칭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즉 위나라)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조인이 알겠다고 말했다.

서황의 구원군이 도착하고 물 또한 점차 줄어들었다.

<조엄전>에 따르면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고, 남아 있던 구원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서황이 이끄는 병사로는 포위망을 뚫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장수들은 서황이 급히 구조하지 않고 있다고 질책을 했다. 조엄이 장수들에게 말했다.
우리쪽 병사는 단독이며 너무 적고, 조인은 따로 떨어져 있어 힘을 합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첩자를 보내 조인에게 통지하여 밖에 구원병이 왔음을 알게하여 면려하는 것만 못합니다. 북쪽의 지원군은 열흘을 넘기지 않고 도착할 것이며, 성 또한 굳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장수들은 모두 좋아하였으며, 곧 땅속으로 길을 파고, 화살을 날려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몇 차례 소식을 연락하였다.

서황이 밖에서 관우를 공격해 조인은 포위를 허물고 벗어날 수 있었고 관우는 퇴주했다.

<조엄전>에 따르면 관우의 군사가 물러난 후, 촉나라(촉한)의 배가 면수를 점거하여 양양은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손권이 관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퇴각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 조인은 장수들을 모아서 상의했는데, 모두 이렇게 말했다.
지금 관우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쫓아가면 반드시 체포할 수 있습니다.
조엄이 말했다.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습격하려고 했지만, 관우가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 군대가 양쪽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타서 공격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관우는 달아났지만, 또 그가 손권의 심복이 될 걱정거리는 여전히 있습니다. 만일 추격한다면, 손권은 관우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재앙을 일으킬 것입니다.
조인은 그래서 전투태세를 풀었다. 조조는 관우가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이 추격할 것을 걱정하여 과연 긴급히 조인에게 칙령을 보냈다. 그것은 조엄의 계책과 같았다.

《수경주》에 따르면 번성의 서남쪽에는 조인의 《기수비(記水碑)》가 있는데 (후일) 두원개(두예)가 그 뒤에 오나라(손오) 정벌의 일을 기록하여 중간(重刊)하였다고 한다. 직접 번성에서 고생했던 조인은 꽤나 기념할만한 일로 여겼던 것 같다. 사족이지만 조인이 세웠다는 이 기수비는 241년 주연의 번성 공격에 의해 한 번 훼손됐을 가능성이 있는데 두예가 후일 수리하면서 자신의 공적을 적었을 가능성이 있다.

2.2. 조비 휘하

2.2.1. 위나라 군부의 제1인자

조조가 죽고 조비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조인을 거기장군, 도독형양익주제군사로 임명하고 진후로 올려 봉하고 식읍을 2천 늘리니 예전과 함께 모두 3,500호가 되었다. 조인의 부친 조치(曹熾)를 죽은 뒤에 추가하여 하사해 진목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지기 10가를 두었다.

<선제기>에 따르면 손권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군하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번, 양양에는 곡식이 없어 적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당시 조인이 양양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조인을 불러 완으로 돌아오게 하도록 청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손권은 이제 막 관우를 격파하여 지금은 그들이 스스로 우리와 결탁하려 할 때이니 필시 감히 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양양은 수륙의 요충이며 적을 막는 요해이니 이곳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결국 따르지 않았다. 조인이 마침내 두 성(번, 양양)을 불태운 후 버렸는데 손권은 과연 침범하지 않았고 조비가 이를 후회했다.

그 뒤 불러서 완으로 돌아와 주둔케 했다. 손권이 장수 진소를 보내 양양을 점거하자 조인에게 조서를 내려 이를 토벌케 했다. 조인은 서황과 함께 진소를 공파하고 양양으로 들어가서 장군 고천(高遷) 등을 시켜 한수 남쪽의 부화민(附化民)들을 한수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문제기>에 따르면 221년 여름 4월 거기장군 조인을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문제기에 따르면 221년 5월 정감(鄭甘)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조인을 파견하여 토벌하고 그를 참수시키도록 했다.

또 조서를 내려 예주 영천군 임영현으로 옮겨 주둔케 하고 대사마로 올렸다.[5] 다시 제군을 지휘해 오강(烏江)을 점거하고 돌아와 합비에 주둔했다.

2.2.2. 유수 전투

<오주전>에 따르면 222년 가을 9월, 위나라는 곧 조휴, 장료, 장패에게 동구까지 나가도록 명령하고, 조인에게는 유수까지 병사를 출동하도록 했으며,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에게는 남군을 포위하도록 했다.(조비의 1차 남정)

<주환전>에 따르면 222년, 위나라에서 대사마 조인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이 유수로 향했다. 조인은 주를 취하기 위해 우선 위나라가 동쪽으로 선계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거짓으로 알리려고 했다. 주환은 병사를 나누어 선계로 가도록 했다. 대우가 이미 출발한 후, 주환은 갑자기 조인이 유수로 진군하려고 하며 70리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주환은 사자를 파견해 선계로 향해 가는 병사들을 좇아 돌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선계의 병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조인이 신속하게 도착했다. 그 당시 주환 수하의 병사와 그가 통솔하는 부대로 남아있는 자는 5천 명이었다. 장수들은 불안해하며 각기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주환은 그들을 깨우쳐 말했다.
현재 적군의 장수에게는 지혜도 없고 용감하지도 않으며, 사졸들은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며 천 리를 걸어왔으므로 병사와 말은 피곤한 상태이오. 나와 각 부대가 높은 성을 차지하고 남쪽으로는 대강에 임하고, 북쪽으로는 산과 구릉을 등지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병사들은 수비쪽에서 공격쪽을 제압하는 백전백승의 형세인 것이오. 조비가 직접 왔을지라도 오히려 걱정할 것이 못되거늘, 하물며 조인 등임에랴!
주환은 그래서 깃발을 쓰러트리고 북을 울리지 않은 채 외부에 허약함을 나타내 조인을 유인하여 이르도록 했다. 조인은 과연 그의 아들 조태를 파견해 유수성을 공격하도록 했으며, 장군 상조를 나누어 파견하여 제갈건왕쌍 등을 지휘하여 유선을 타고 따로 중주를 습격하도록 했다. 중주는 부대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조인 자신은 1만 명을 인솔해 탁고에 머물렀고, 조태 등은 후방에서 막도록 했다.

<장제전>에 따르면 조인이 유수의 중주를 공격하려고 하자, 장제가 말했다.
적병은 서쪽 해안을 점거하고 배를 상류에 나란히 진열시키고 있는데, 우리 병사들은 주중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지옥 속으로 들어가고, 위험과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조인은 장제의 말에 따르지 않았고, 과연 패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223년 3월, 조인은 장군 상조 등을 파견하여 병사 5천을 이끌고 유선을 타고, 새벽에 유수 중앙의 사주를 건너도록 했다. 조인의 아들 조태는 군사를 이끌고 급히 주환을 공격했다. 주환은 병사로 방어하면서 장군 엄규 등을 파견하여 상조 등을 격파시키도록 했다.

<주환전>에 따르면 주환 부대의 병사들은 유선을 공격하여 취했고, 때로는 별도로 상조 등을 공격했다. 주환 등은 직접 조태에게 항거해 조태의 군영을 불태워 퇴각하도록 했다. 그래서 상조를 죽이고 왕쌍을 사로잡아 무창으로 보냈다. 이 싸움에서 머리를 베이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는 1천여 명이나 됐다.

2.2.3. 죽음

<문제기>에 따르면 223년 3월 19일, 대사마 조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위서 기준으로 조인의 이때 나이는 향년 55세였다.[6]

부자에서의 평가로는 조인의 용맹은 맹분, 하육도 이보다 더하지 못하고 장료가 그 다음이라 극찬하였다.

시호를 내려 충후(忠侯)라 했다. 아들 조태가 후사를 이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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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국지연의

유비가 신야로 들어간 이후부터는 매번 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오나라와 합비에서 전투를 벌일 때 나름대로 오군을 상대로 선전하는 등 활약이 없지는 않으나 정사를 기준으로 본다면 조인의 행적은 상당히 과소평가 된 모습이다.

연의에서는 예형이 조조의 부하들을 싸잡아 놀릴 때 "조자효는 요전태수라고 부르는게 낫겠다."라고 했는데 '돈에 환장한 태수'라는 뜻이니 이것도 결코 좋은 별칭은 아니었다. 정사에서 실제로 인색하고 치부를 했던 인간은 조자렴, 즉 조홍이었다. 수전노 오명을 뒤집어쓴 꼴이니 조인 본인에게는 무척 억울할 것이다.

조인은 조조의 구원군을 기다리라는 이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야현유비를 공격한다. 그러나 서서의 계책에 당해 '팔문금쇄진'이 개발살나고 번성까지 함락당하는 굴욕을 당한다. 단 이 신야 전투는 창작이다.[7]

남군 공방전에서는 직접 큰 칼을 휘두르며 오군을 공략해 패퇴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또 주유에게 독화살을 날려 맞춰서 주유의 죽음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그냥 주유에게 농락당해 남군을 내주는 영 좋지 않은 포지션.

번성 공방전에서는 결국 끈기 있게 성을 지켜내어 관우의 패망에 일조하는 식으로 역사적 내용도 어느정도 반영하고 있다.

오죽하면 위까에 촉빠인 나관중이 유비 세력을 탈탈 터는 조인이 보기 싫어 너프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이다.[8]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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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천태수를 지내었다.[2] 시중, 장수교위를 지내었다. 후에 추증되어 진목후(陳穆侯)가 된다[3]안후이성 보저우시[4] 흔히 사촌이라고들 하지만 할아버지가 다른 이상 사촌이라 불릴 수는 없다. 조등의 형이라는 인물이 영천태수를 지냈다는데 조인의 할아버지인 조포도 영천태수를 지냈기에 둘이 동일인물이라면 조조와 조인은 육촌 관계가 되는 것이다.[5] 태위가 명예직에 불과한 상황에서 조위의 실질적인 군부 1인자가 된 것이다.[6] 이때 기준으로 치면 제법 천수를 누린 셈이다.[7] 본래 번성은 유표의 거성인 양양에 한수를 사이에 두고 딱 붙어있는 성이다. 그러니 신야보다도 남쪽에 위치하고 길도 하나 밖에 없어 우회도 불가능하기에 유표 생전에 조인이 번성을 점거한 적이 없다. 한마디로 연의의 내용만 보면 서서가 번성을 점거한 것을 극찬하기 전에 유비가 도대체 경비를 어떻게 했길래 조인이 번성을 점거했는지부터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다.[8]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나관중은 오히려 조조를 상당히 띄워서 팬이 생기게 만든 최초의 인물이다. 대표적으로 왕윤에게 칠성보도를 받아 동탁을 암살하려고 했다가 튄건 정사 어디에도 없는 나관중의 창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