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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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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b><colcolor=#fff> 풍민왕(豐愍王)
曹昻 | 조앙
시호 (悼) → 민(愍)
작호 풍왕(豐王)
(曹)
이름 (昻)
자수(子脩)
부모 부친 조조, 생모 유부인
양모 정부인
출신 예주(預州) 패국(沛國) 초현(譙縣)
생몰 177년 이전 ~ 197년
1. 개요2. 생애3. 사후4. 평가5.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삼국시대 위나라의 개조 군웅 조조의 장남으로 는 자수(子脩).

조조의 측실 유부인 소생으로 조삭, 청하공주동복남매다. 양모는 정부인. 예주 패국 초현 사람.

2. 생애

생모 유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조조의 정실이었던 정부인이 대신 그를 거두어 키웠다. 정부인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모자지간의 사이는 친어머니와 친아들처럼 매우 돈독했다.

출생년도는 알 수 없으나 20세에 효렴으로 천거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죽기 전에 20세 이상의 나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197년에 조조는 자신의 세력권 바로 아래 지역인 장제조카 장수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껴, 대군을 이끌고 장수를 압박하여 결국 장수의 항복을 받아낸 후 그의 근거지인 완성에 무혈입성한다. 하지만 호색한조조가 장수의 삼촌 장제의 미망인데려와 품고 지내자 장수가 한을 품었는데 이를 보고 조조가 먼저 장수를 공격하여 제거하려는 병크를 터트리고 이에 장수가 모사 가후의 책략을 받아들여 군기가 해이해진 조조군을 기습한다.

불의의 기습으로 조조는 오른팔에 화살을 맞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는데, 조앙은 아버지에게 말을 넘겨주고 자신은 뒤에 남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세어》에 의하면 이미 부상을 입고 말을 탈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말을 바쳐 아버지를 살렸다고 한다[1]. 이때 조조를 곁에서 호위하던 전위와 조조의 조카 조안민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3. 사후

조앙이 죽자 그를 친자식처럼 길렀던 양모 정부인은 조조를 영원히 떠나버렸다. 정부인은 "내 아들을 죽여놓고 왜 살아 돌아왔냐,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조조를 원망하며 통곡했고, 이에 조조는 부인을 친정으로 보내 버렸다가 나중에야 찾아가서 재결합을 청하며 싹싹 빌었다. 그러나 정부인은 눈길 한 번 안 주고 외면했다고 하며, 끝내 조조를 용서하지도 그에게 돌아가지도 않았다.

<장수전>에 주석으로 딸린 《위략》의 기록에 따르면, 장수가 조조에게 투항한 후 조비는 잔치를 열 때마다 장수를 초대해 "내 형을 죽여놓고 무슨 면목으로 나를 쳐다보는가?"하며 추궁했다. 이런 일이 수차례 반복되자 견디지 못한 장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수전 본전에는 단순히 오환을 정벌하러 가다가 사망했다고 나오며 자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자살이 아니더라도 심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원정에 나섰다 병을 얻어 사망했을 수도 있다.

장수의 아들 장천은 후일 위풍반란에 연루되어 조비에게 처형당했는데 위풍의 난은 기록이 워낙 부족해서 장천이 정말 반란에 가담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상기한 위략의 기록과 연결지어 장수로는 부족해 그 아들까지 죽인 게 아닌가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람도 있다. 그럴 듯 하기는 한게 조비가 쪼잔함과 사이코기질로 유명한데다가 형 조앙에 대한 애정을 꽤나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략에서 조비가 장수를 괴롭히고도 제재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없으니 조조가 장수의 투항을 받아주고 관직까지 줬지만 실상은 그 역시 장수를 아니꼽게 여겨서 조비의 행동을 묵인했을 확률이 높다. 당장 아버지가 죽었다고 무고한 백성을 무참히 학살한 조조가 과연 장자와 조카, 그리고 아끼는 부하를 죽게 한 장수를 정말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용서하고 환대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서 환대하는 '척'을 했고, 조비가 개인적인 복수심 이외에도 이렇게 직접 나서기 힘든 아버지를 대신해 총대를 멨다고 볼 수도 있다.

조비황초 2년(221년)에 조앙을 풍도공(豐悼公)으로 추봉하고 황초 4년(224)에 작위으로 올렸으며 조예태화(太和) 3년(229)에 시호를 민(愍)으로 바꿔 내렸다. 그래서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 조앙의 열전 제목은 <풍민왕앙전(豐愍王䀚傳)>이다. 悼(슬퍼할, 애도할 도) 나 愍(딱할 민) 모두 애도와 동정의 의미를 내포한 시호다.[2]

후사는 번안공 조균의 아들 조완(曹琬)이 양자가 되어 풍왕(豐王)을 습작(襲爵)했다. 조완이 훙서(薨逝)하고 시호로 공(恭)을 받잡고 풍공왕의 아들 조렴(曹廉)이 습작했다.

4. 평가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조앙과 조안민의 죽음보다 전위의 죽음을 더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여 아들보다 훌륭한 장군의 죽음을 더 애석해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앙과 조안민의 죽음 또한 조조를 비롯한 조씨 일가에게는 평생에 씻지 못할 회한으로 남았다. 《위서》에 의하면 임종을 기다리던 조조는 다른 일은 마음에 걸릴 것이 없지만 정씨의 일만은 후회된다며, 그 서주 대학살조차 평생 후회한 적 없었던 조조가 죽어서 조앙을 볼 면목이 없다고 "만약에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내 아들 조앙이 '내 어머니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할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속으로는 자신의 과오로 혈육이자 후계자를 잃은 것에 대한 후회를 평생 하면서 겉으로는 그것을 숨김과 동시에 '자신의 혈육보다 부하를 더 중요시' 하는 퍼포먼스를 보임으로써 부하 장수들의 충성심을 자극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국내에 삼국지가 삼국지연의 중심으로만 알려져 있을 당시만 하더라도 전위에 가려져서 친족의 죽음보다 인재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조의 능력주의를 나타내거나, 혹은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버렸음에도 주목받지 못한 비운의 캐릭터 정도였다. 허나 이후 국내의 삼국지 팬이 많아지고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발해지면서 여러 관련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되고, 조앙이라는 인물에 대한 분석, 토론이 활기를 띠면서 "만약 조앙이 살았다면?" 이라는 IF는 조조에 대한 비판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전위의 죽음은 비장한 임팩트 때문에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일개 호위대장의 죽음에 불과하다. 반면 조앙의 죽음은 조조의 (사실상) 적장자[3]이자 후계자가 창창한 나이에 후사도 없이 비명횡사한 실로 중대한 참사였다. 게다가 조앙 사후 후계자 후보로 물망에 오른 조비, 조창, 조식은 자질 이전에 극복할 수 없는 정통성 문제가 있었다. 능력의 유무를 따지기 이전에 정통성에서만큼은 조앙이 다른 이복형제들보다 훨씬 나았다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고, 그런 그를 고작 유부녀에 대한 색욕 때문에 허무하게 잃은 건, 아버지로서의 정을 제쳐두고 철저하게 손익 계산만 따져보더라도 백 번 천 번을 후회할 뻘짓이 맞았다.

실제로 조앙의 죽음은 조조의 후계 문제 그리고 위나라의 역사를 완전히 꼬아놨다. 흔히 후계자 문제를 제대로 마무리 못했다 피를 본 군웅으로 원소가 꼽히지만, 50대 초반에 죽은 원소와 달리 조조는 60대 들어설 때까지 후계자를 못 정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조조가 원소보다 더욱 심했다. 이런 점에서 조앙이 가진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포인트는 바로 위나라의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이라는 점이다. 이 부족한 정통성 문제는 동생과의 경쟁을 거쳐 즉위 3년전에야 공인된 조비, 조비 사망 직전에야 태자로 책봉된 조예, 아예 출신이 불분명한 조방까지 조씨 모든 황제들이 공유하는 취약점이었다. 조모조환이야 사마씨가 꼭두각시 노릇 시키려고 옹립한 괴뢰 황제라 말할 것도 없다.

우선 이는 조조 사후 차기 후계자의 계승에서 어마어마한 안정성을 부여해주는데, 일단 실제로 일어난 후계 선정 과정을 살펴보면 '어차피 조비의 정통성이 강한 것도 아닌데 조식이 안 될 것도 없지 않느냐'가 조씨의 후계 문제의 시작점이었다.[4] 그런데 조앙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후계자 문제는 애초부터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적장자라는 정통성이 있는데다가, 나이부터가 다른 아우들과 10살 이상 차이가 난다. 즉 조비, 조창, 조식 등이 세력 내에서 이제 좀 활동을 시작할 때 쯤이면 이미 조앙의 기반은 충분히 단단히 다져지고도 남을 시간이다. 게다가 그의 양모 정씨가 정실부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을 테니, 조앙 본인만이 유일한 적자이며 조비 이하 변부인 소생 자식들은 하나같이 서자, 그것도 비천한 기생 출신 첩실 소생의 서자로 남아 있게 되므로 정통성 측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때문에 조비 본인도 만약 조앙이 살아있었다면 당연히 (지금 자기가 앉아있는) 황제의 자리에 앉았을 것이라고 인정했다.[5] 이는 물론 어느정도 립서비스성 목적이 있겠지만, 실제로 현실이 그러하다. 조앙이 살아남아있었다면 조조가 무능해지거나 조앙이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조조의 다른 자식들은 뒷공작은 할 수 있을지언정 후계자의 자리를 넘보는 행동을 공적으로는 감히 행할 수가 없게 된다.

보여주지 못한 능력에 의문부호가 붙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군주의 후계 문제에 있어 정통성이 확고하면 개인의 능력은 다음 문제이다. 당장 조비만 하더라도 조식이 술버릇으로 인한 행실 문제로 점수가 깎이면서 장자인 조비가 무난하게 뽑히게 되었는데 정작 그 조비도 행실 쪽으로는 영 좋지 않은 소리 듣는 양반이다. 결국 양쪽 다 인성 부분에서 점수 깎인 상황이고 능력적으로는 조식이 더 인정받음에도 불구하고 조비는 장자라는 명분 하나로 후계자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정통성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후계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조앙은 조조가 일개 지방군벌일 때 낙점된 후계자라 살아남기만 했다면 20년 넘게 후계자로 있으며 수업을 받고 공적을 쌓았을테니 권위와 기반이 무척 튼튼했을 것이고 이러한 튼튼한 기반은 실제 역사와 다르게 조조 사후 세력의 정치 안정성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능력적인 부분에서도 비록 조앙의 능력에 대한 기술은 없다지만, 조조의 2세들과 3세들의 대다수의 능력이 뛰어났음은 수도 없이 많이 알 수 있는데다가 조조가 초창기 군벌일 때부터 군에 종사한 점에서 조앙 또한 뛰어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능력은 갖추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문인으로서의 재능만이 많이 알려진 조식이지만 그도 대국적인 측면에서 나라의 정세를 분석한 적이 있고, 그대로 맞아 떨어진 일화가 남겨져 있을 정도. 가깝지만 왕위에 정통성이 약한 왕족들을 나라의 인재로 잘 활용하여 성공한 경우는 바로 다음 시대인 서진사마주사마준, 월남 진 왕조진흥도, 고려의천 등 적지 않으며 특히 친족 중심의 정치를 보여준 조위에서는 널렸다. 조인, 조홍, 하후돈, 하후연, 조진, 조휴, 하후상, 하후유 등. 까놓고 말해 황권에 위협이 되어서 중용받지 못한 조창조식이 저 목록에 끼어 들어갔으면 국익에 도움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 조앙의 대국적 통찰 능력과 내부 정치 능력이 영 못미덥다면 손권에게 주유, 장소가 있었듯이, 유선에게 제갈량이 있었듯이, 그 너르고 너른 인재 네트워크 중에서 믿을만한 보좌관을 미리 준비하면 될 일이다. 말하였듯 조앙이 살아만 있다면 실제 역사상 후계자 계승 작업은 수십 년을 넘게 된다. 조조 입장에서 이 정도 준비는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다. 실제로도 조조는 자기 자식들을 보좌할 인재들을 옆에 붙여두고 그들을 관리했었기 때문에, 조앙이 살아만 있었다면 분명 그에 걸맞는 보좌진들을 준비했을 것이다. 당장 조식이 대국적으로 뛰어난 식견을 보여준 일화가 있고 전쟁에 있어서는 조창이 뛰어난 사령관이었으며 조앙이 살아있었다면 이들은 서자의 위치였을 것이니 조비와는 다르게 이들을 안심하고 쓸 수 있게 된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만약 조앙이 살아있었다면 정실부인인 정부인의 아들 대접받던 조앙은 나이도 한참 어린데다가 측실의 아들들에 불과한 이복동생들을 굳이 경계할 이유도 훨씬 적었을 것이며, 반대로 조비도 애초에 형제 문제로 골머리를 썩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조앙이라면 군재가 뛰어난 조창이나 (술 문제가 있긴 하지만) 뛰어난 인재였던 조식[6], 머리 하나는 좋았던 조비를 앞세울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조예를 비롯한 그 자손들도 중용받았을지 모른다. 즉 아버지인 조조가 자신의 혈족인 조씨-하후씨 가문의 인재들을 신뢰하고 요직을 맡겨 세력을 안정적으로 꾸린 것 처럼, 조앙 또한 조비-조창-조식이 보여주었던 그 재능들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으며 혈족이 아닌 신하들에게는 많은 양보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결국 너무나도 확고한 지도자로써의 지위 덕에 조조세력의 뛰어난 인재풀을 그대로 활용하기 쉬워지게 되며, 최종적으로는 고평릉 사변을 피하는 나비효과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7]

하지만 현실은 조앙이 죽고 조비 - 조식 간의 후계자 싸움이 되었으며, 이런 점 때문에 조비는 동생들을 극도로 경계했고, 아버지가 죽자 경계심에 동복 동생들을 한직에 보내거나 심지어 이 때문에 조창을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나돌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또한 조비나 조예 때까지는 든든한 친족들 (조휴, 조진 등 2세대 친황 세력)이 있었으나 이후 능력있는 친족들이 점점 적어지면서[8] 조상같은 부패무능한 황족이 전권을 쥐었다가 사마씨에게 정권을 뺏겨 진 왕조에게 찬탈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게다가 조비는 제위 오르기 3년 전인 217년에야 장자라는 명분으로 후계자로 낙점받은 탓에 권위가 부족해 호족들에게 많은 양보를 해 환심을 사 지지를 얻어야 했고, 반대로 호족을 견제해 줄 만한 세력인 황족은 조비에게 있어서는 언제든지 지도자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경계 대상이었다. 때문에 위 왕조 치하에서 직계 황족들은 영 대접을 받지 못했으며, 황족을 먼저 견제하느라 결과적으로 호족으로부터 황실을 보위할 방어막을 얕게 만들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조앙의 인격적, 능력적 기량이 얼마나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막장 인성으로 악명이 자자한 조비보다는 문제가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9] 특히 아버지를 위해 말을 양보하고 적진에서 죽음을 맞이한 효심이라면 일단 조비보다 인성이 더러울 확률은 지극히 적으며, 조앙이 왕위에 올랐다면 헌제에게 선양을 강요한 조비와는 달리 한나라의 충신으로 남거나 선양을 받았어도 잘 다스리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곤 한다. 더 나아가 조비 역시 완성 전투에 10살 때 종군했다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정사의 기록을 보면, 어린 시절 겪은 형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로 인한 PTSD로 성격이 삐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조앙이 만약 끝까지 살았더라면 조비가 지금처럼 냉혹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조앙 본인의 군주로써의 능력과는 별개로 후계자 정통성이라는 조위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완벽히 커버할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정통성을 떠나서 보아도 조비의 능력적, 인성적 평가가 썩 좋지만은 않은 점에서 조앙은 개인적으로도 조비의 압도적 상위호환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조앙이 조조의 뒤를 이었다면 조위 왕조의 여명도 더 장기간 이어졌을 확률이 크다. 이 때문에 최근 들어 과대평가된 조조를 비판할 때 이런 정통성 높은 후계자를 과부랑 오입질 한 번 해먹겠다고 허무하게 죽게 만들었다며 조조의 아킬레스건으로서 주로 언급된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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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과정에서 조조는 본인이 말에 탑승한 뒤 어서 (조앙) 너도 빨리 타라고 하였지만, 조앙은 같이 타면 같이 목숨을 잃는다면서 거절한 뒤 조조만 빨리 도망가게 했고, 본인은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2] 한국사에서는 사도세자공민왕이 각각 '도'와 '민'이 들어간 시호를 받았다.[3] 조앙도 서자였지만 정실 부인이던 정부인이 아들이 없어 사실상 양자로 들어갔으며, 정부인이 친자식처럼 아꼈으므로 정부인이 건재한 이상 조조 진영에서 적자 취급을 받았다.[4] 조비의 소년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아버지의 위세만 믿고 방약무인해 아버지인 조조의 정치적 입장을 다분히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충동적인 성향이 강한데 이런 성품의 문제는 나이가 들어서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반면에 동생들인 조창과 조식은 각기 특출난 무재와 문재를 선보여 조조의 총애를 받았다. 오히려 기록을 살피면 조조의 입장에서는 조비를 걸림돌 정도로 여기는 듯한 일화가 많고 조비를 옹호하는 신료들은 하나같이 장유유서와 후계구도의 안정을 어필했지 조비의 재능이나 장점을 언급한 적이 없다.[5] 다만 이는 먼저 죽은 형을 예우함으로써 조비 자신도 겸양과 정통성을 잘 안다고 강조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조선세조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주제에 형 문종 사후에 쭉 문종을 찬양하고 문종이 오래 살았으면 자기도 쿠데타 안 일으켰을거란 식으로 말하고 다녔다. 사실 양쪽 다 반절은 진심일 수 있다. 조비는 조앙에 대한 애정을 다른 방식으로도 드러낸 적이 있어서 조식과 경쟁할 때와는 다르게 심적 부담을 더 크게 느꼈을 수 있고, 조앙의 정통성이 강력하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도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 세조도 문종 사후에야 뒷통수를 쳤지, 생전에는 자기 형님이 제갈량과도 비할 수 없이 뛰어나다고 아부할 정도로 철저하게 숙이고 지냈고 속마음은 어떨지언정 겉보기에는 우애가 좋았다. 단종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위험천만한 군사정변을 시도해볼 생각이라도 가능했던 것이지 문종이 오래 살아 단종의 권력도 안정적으로 확보된다면 세조는 쿠데타를 꿈도 꾸지 못 했을 가능성이 높다. 계유정난도 황표정사를 계기로 고명대신으로 대표되는 구세력과 집현전 학사로 대표되는 신진세력이 대립하는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성공한 정난이었다. 단종이 성인이 되어 고명대신들이 감히 왕권을 침해하지 못했더라면 단종의 친위 세력은 굳건했을 것이고 세조는 쿠데타를 감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계유정난 시기 수양대군의 세력은 권람한명회를 포함한 시정잡배 수십 명 수준이었다.[6] 애시당초 제왕이 될 것이 아니면 술 문제는 웬만하면 아예 문제시되지도 않거나 끽해야 작은 개인적 흠 정도로 넘어갈 문제이다.[7] 다만 고평릉 사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어디까지나 조비 조예가 오래 못살았던게 가장 큰 이유라서 조앙이 일찍 병으로 죽었다면 고평릉 사변이 일어났을 수 있으며 애초에 조비 조예가 오래 살았다면 사마씨는 제대로 된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8] 사실 이건 진짜로 조예 대에 들어서서 거물급 황족들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조예 본인의 의심 성향도 한몫한다.[9] 조비는 본인의 옹졸함 때문에 황실의 큰 어른인 조홍에게 모욕을 주고 죽이려 했으며 조진을 곤란하게 하거나, 하후연의 조카이자 자신의 절친인 하후상에게도 본인의 인성질로 어이없이 죽게했다. 하후상의 아들인 하후현이 조위 마지막 충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꽤나 유능한 인물인 하후상이 일찍 죽은 것만 해도 큰 손해이며, 이 정도 위치의 인물이 살아있었다면 사마의에게 그렇게까지 큰 권한을 주는 일이 없었을 수도 있다. 즉 조비는 능력을 떠나 황제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조위에 손해를 끼친 적이 있다. 또한 조비가 부인 문소황후를 죽게했다는 것에 조예가 충격을 받고 기행을 시작했다는 추측도 있는만큼, 조비의 인성은 하후상 케이스 외에도 여러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