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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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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 최림 · 고유 · 손례 · 왕관 | 신비 ,신헌영, · 양부 ,왕이, · 고당륭 ,잔잠, | 만총 · 전예 · 견초 · 곽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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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 호질 ,호위, · 왕창 · 왕기 | 왕릉 ,선고 영호우, · 관구검 ,문흠, · 제갈탄 ,당자, · 등애 ,주태, · 종회 ,장창포 왕필, | ||||||
29권 「방기전(方技傳)」 | |||||||
화타 · 두기(夔) ,마균, · 주건평 · 주선 · 관로 | |||||||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 |||||||
오환 · 선비 ,가비능, · 부여 ·고구려 · 왜 · 읍루 · 예맥 · 동옥저 · 마한 · 진한 · 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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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b><colcolor=#fff> 난릉성후(蘭陵成侯) 王朗 | 왕랑 | |
시호 | <colbgcolor=#FFFFFF,#191919> 성후(成侯) |
작위 | 안릉정후(安陵亭侯) → 악평향후(樂平鄕侯) → 난릉후(蘭陵侯) |
최종직위 | 사공(司空) |
성씨 | 왕(王) |
휘 | 랑(朗) / 엄(嚴) |
자 | 경흥(景興) |
생몰기간 | 167년 ~ 228년 11월[1] |
고향 | 서주(徐州) 동해군(東海郡) 담현(淡縣) |
재임기간 | 조위의 사공 |
220년 2월 16일 ~ 226년 12월 | |
조위의 사도 | |
226년 12월 ~ 228년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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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지방관이자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관으로 자는 경흥(景興). 출신지는 서주 동해군 담현으로 본명은 왕엄(王嚴).그의 아들은 유학자로 유명했던 왕숙이며, 그의 손녀는 사마소의 부인인 왕원희다. 그리고 사마소와 왕원희 사이에서 태어난 사마염은 왕랑의 외증손자다. 아내로는 양씨.[2]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경전에 통달하여 낭중과 치구의 장으로 임명받았다. 양사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양사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버리고 복상의 예를 취했으며, 후에 효렴으로 천거받고 공부로 초빙받았을 때도 응하지 않았다.서주자사 도겸이 그를 무재로 천거했으나 장안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여 도겸의 치중으로 있었다. 이때 조욱과 함께 천자에게 왕명을 받들겠다는 표를 올리도록 권했고, 조욱을 통해 표를 올렸다. 도겸은 안동장군, 조욱은 광릉태수, 왕랑은 회계태수로 임명받았고,[3] 이때 사촌형의 모반으로 처형받을 위기에 처한 허정도 보호한다.
그렇게 해서 회계를 다스리던 도중 손책이 장강을 넘어 침입했다. 부친상을 당한 공조 우번이 상복을 벗어가면서까지 손책을 피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한 왕실의 관리이니 지켜야하기 때문에 고릉을 방비하며 손책군을 상대로 선전하였다. 그러나 손책이 손정의 계책에 따라 사독을 습격하자 주흔과 함께 그를 막으러 갔다 패배하였다. 이때 표류하여 동야까지 밀려갔다. 우번이 동부 후관의 장 상승을 설득해 겨우 성 안에 들어가나,[4] 그곳마저도 손책이 군대를 보내니 상승과 왕랑의 군대는 대패한다. 손책은 왕랑의 유학적 명성을 생각하여 그저 문책만 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그 뒤로 유랑하며 빈곤한 생활을 했고, 아침에 저녁먹을 것이 없어 걱정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친척과 친구를 포용하며 위로하고 모든 행동을 도의에 기초하여 하니 왕랑의 이름은 더욱 높아지고, 이에 조조는 그를 초빙한다. 하지만 곡아에서 출발한 왕랑은 또 표류하여 몇 년이나 고생한 끝에야 도착해 간의대부, 참사공순사로 임명받는다.
2.2. 조조 휘하
213년, 위나라가 서자 군좨주, 위군태수를 하고 소부태상대리로 승진한다. 나라의 일을 처리하는데 관용이 있었고 의문이 있는 죄질에는 가볍게 대하며 법을 합당하게 집행하고 옥을 잘 다스려 세인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조조가 육형 회복에 관한 논의를 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육형을 회복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종요는 사형에 관한 조항을 가볍게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되면 월형이 늘어나게 되니, 이는 불구자를 일으켜서 내시로 삼고, 시체를 살려서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로 오형은 과율에 기록된 것입니다. 사형을 감하는 것을 일등의 법으로 삼게 되면서 죽이지 않고 감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시행되었습니다만, 도끼 모양을 한 형구로 육형을 가한 후에 죄에 따라서 처벌을 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전시대에 어진 사람은 육형의 참혹함을 차마 보지 못해 폐지하고 사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을 하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수 백 년이나 지났습니다. 지금 다시 시행을 하게 되면, 많은 백성들의 눈에 감형에 대한 조항이 오히려 제대로 인식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육형에 대한 소문은 이미 도적들에게나 널리 퍼져 있는 것이지, 옛날 사람들로부터 초래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종요가 사죄를 감해주고자 하는 것은 사형을 감하여 머리카락을 깎는 곤형이나 발을 바르는 월형으로 대신하자는 주장입니다. 죄를 감해주자는 의견을 싫어하는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범죄가 증가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繇' 欲 輕減 大辟之條 以增益 刖刑之數 此 卽 起偃爲豎 化屍爲人矣. 然 臣之愚 猶有未合微異之意. 夫 五刑之屬 著在科律 自有減 死一等之法 不死 卽爲減. 施行已久 不待 遠假斧 鑿於彼肉刑 然後 有罪次也. 前世仁者 不忍 肉刑之慘酷 是以廢而不用. 不用已來 歷年數百. 今復行之 恐 所減之文 未彰於 萬民之目 而 肉刑之問 已宣於寇讎之耳 非所以來遠人也. 今 可按 '繇' 所欲 輕之死罪 使減死之髠·刖. 嫌其輕者 可倍其居作之歲數.)
『삼국지 Vol. 13』
『삼국지 Vol. 13』
이 말을 듣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왕랑이 맞다고 여겼으나, 위 무제는 아직 촉과 오를 못 평정했으므로 다시 불문에 붙였다.(議者 百餘人 與'朗' 同者多, 帝 以吳·蜀未平 且寢.)
2.3. 조비 휘하
220년에 어사대부, 안릉정후로 임명받으며 조비에게 백성을 양육하고 형벌을 살필 것을 권유하였다. 얼마 뒤 조비에게 황제 하기를 권해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사공, 악평향후로 봉해졌다. 이때는 조비의 사냥이 너무 잦다며 상소를 올린다. 222년에 이릉대전이 일어나자 조비가 왕랑에게 지금 적을 공격해도 되냐고 묻자 그는 승패가 갈린 다음에 공격할 것을 권한다. 조비가 사다새가 영지지로 모여든 것을 계기로 인재추천을 받자 왕랑은 양표를 추천하고 병을 핑계로 물러나려고 하였지만 조비가 맡은 일을 계속 넘겼다. 손권이 아들 손등을 중앙에 보내는 것을 거부하자 조비는 군사를 일으켰는데 왕랑은 이를 말렸지만 조비는 결국 장강 앞에서 그냥 돌아오고 만다.223년에 진군, 허지, 제갈장 등과 함께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칭신하여 번국을 칭하라고 하였으나 제갈량은 끝내 답장을 보내지 않고 그저 '정의(正議)'라는 글을 지었다.
2.4. 조예 휘하
226년, 조비가 죽었을 때 조진, 진군과 함께 조예에게 장의를 전송할 때 더우니 나가지 말 것을 건의하나 조예는 듣지 않는다. 조예가 즉위하자 난릉후에 올랐으며 식읍은 1천2백 호였다. 또 모절을 갖고 옥책을 받들어 문소황후 견씨의 능에 제사지낸다. 이때 상소문을 올려 백성들을 굽어 살피기를 권하며 사도로 전임한다. 사도를 한 뒤 왕기를 초빙했으나 왕릉이 보내지 않자 편지를 써서 이기적인 행동이라며 주를 탄핵한다.228년 11월에 사망한다.
3. 삼국지연의
15회에서 손책의 쾌진격에 희생양으로 등장한다. 엄백호와 한데 묶여서 친구가 돼 버렸다. 거기다가 무력 보정까지 얻어서 왕랑이 직접 태사자와 칼을 휘두르며 일기토를 벌이는 장면까지 나온다.[5]손책에게 패배한 뒤에는 한참 동안 등장하지 않다가[6] 조예가 즉위한 뒤 제갈량의 사마의 모함 작전에 넘어가 화흠과 함께 사마의를 열심히 까서 파직당하게 만든다. 이로써 안심한 제갈량이 북벌을 단행하자 조진을 천거하며 그의 군사가 되어 같이 출병한다.[7] 제갈량을 회유하러 몸소 나섰으나 93회에서 제갈량이 준엄하게 반박하자 열받은 나머지 말에서 떨어져 죽는다. 덕분에 적은 비중인데도 불구하고 제갈량과 태사자라는 최상위권 실력자들을 상대로 일기토 및 설전을 둘 다 해본 극히 적은 인물들 중 하나가 되었다.[8] 실제로 목숨이 위험한 일기토에서는 생존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안전한 설전에서 죽었다.
다음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 9권에 있는 제갈량과 왕랑의 설전 부분으로, 일부분을 약간 각색했다.
왕랑이 말을 몰고 앞으로 나섰다. 공명이 수레 위에서 손을 맞잡아 예를 갖추자 왕랑도 말 위에서 몸을 굽혀 답례한 후 입을 열었다. "공의 크신 이름을 들은 지 오래로 만나뵙지 못하다가 이제야 뒤늦게나마 뵙게 되니 참으로 다행이외다. 공께서는 이미 하늘의 뜻을 알고 시무에 밝으신 몸이거늘, 어찌하여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키셨소?" 공명이 대답한다.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역적을 치려 함에 어찌하여 명분이 없다 하시오?" "천수는 변하는 것이고 제위 또한 바뀌는 것이오. 덕 있는 사람에게 돌아감이 자연의 이치일지니 지난날 환제, 영제 이래로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천하가 어지러워짐에, 초평, 건안 때에 이르러서는 동탁이 반역을 일삼고 이각과 곽사가 포악하게 굴었으며, 원술이 수춘 땅에서 황제를 참칭하기에 이르렀소. 또한 원소는 업 땅에서 스스로를 영웅이라 하며, 유표가 형주를 점령하고, 여포가 서주를 집어 삼키는 등 그야말로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간웅들이 활개치는 바람에 사직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소이다. 그때 우리 태조 무황제 폐하께서는 천하의 간사한 무리들을 소탕하시고 사해를 석권하시어, 만백성이 공경하고 천하 사람들이 그 덕을 우러러보니 이는 권세로써 취함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늘의 뜻에 따르신 것이오. 우리 세조 문황제께서는 문무에 통달하시어 대통을 이어받으셨으니 이는 하늘의 뜻에 따르고 사람의 마음에 합당한지라, 요가 순에게 제위를 물려준 옛법을 본받아 중원에 자리잡고 만방을 다스리니, 이야말로 천심에 응함이며 인의에 따름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지금 귀공은 큰 재주와 큰 뜻을 품고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하면서 어찌하여 천리를 거역하고 인정을 배반하는 일을 행하신단 말씀이오? 공께서는 '하늘에 순종하는 자는 창성하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는 옛말을 들어보지 못하셨소? 지금 우리 대위는 갑옷 입은 병사가 1백만에 훌륭한 용장이 1천명에 달하외다. 그런데 어찌 썩은 풀더미 속의 한낱 반딧불로 감히 하늘의 밝은 달빛과 견주려 하시오? 귀공이 지금이라도 창을 거꾸로 잡고 갑옷을 벗어 항복한다면 제후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나라와 백성이 안락하리니 이보다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소이까?" 다 듣고 나서 공명이 한바탕 크게 웃고는 입을 연다. "네놈이 한나라의 원로 대신이라 하여 무슨 고견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그 말이 참으로 비루하기 짝이 없구나. 이제 내가 말할 게 있으니, 모든 군사들은 조용히 들으라. 지난날 환제, 영제 때에 한실의 법통이 흐려지니 환관의 무리가 재앙을 일으켜 나라가 어지럽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천하가 소란하였다. 또한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동탁과 이각, 곽사 등이 연이어 일어나 황제를 핍박하고 백성들에게 잔악하게 굴었도다. 이는 조정에 썩은 나무토막 같은 관리들만 있고 조정에서는 금수만도 못한 것들이 녹을 받아먹으며, 이리 같은 심사와 개 같은 행실을 하는 무리들이 뒤를 이어 정사를 좌지우지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정권을 잡은 탓에 사직은 폐허가 되고 억조창생이 도탄에 빠지게 된 것이다. 내 너의 소행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느니라. 너는 대대로 동해 가까이 살다가 효렴으로 벼슬길에 들었으니 마땅히 천자를 받들고 국사를 도와 한나라를 평안케 하여 유씨를 일으켜야 마땅하거늘, 너는 오히려 역적을 도와 찬탈을 도모했을 뿐이로다. 그 죄가 깊고 무거워 천지가 용납지 않으며 천하 사람들이 네 고기를 씹어먹기를 원한다. 신하가 되었으면 그저 몸을 숨기고 머리를 숙여 구차히 목숨이나 이어갈 일이지 어찌 감히 황제의 군사 앞에 나타나 망령되이 천수를 논하는 것이냐? 다행히 하늘의 밝은 뜻으로 한실이 끊기지 않았으니 이는 소열황제께옵서 서천에서 한나라의 대통을 이었기 때문이다. 내 이제 새로운 황제폐하의 뜻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려하거늘, 이 머리 흰 아첨꾼 필부, 수염 푸른 늙은 도적놈아! 네놈도 머지않아 그 수명이 다할 것이거늘 무슨 낯짝으로 구천에 계신 스물네 분 천자를 뵙겠느냐? 늙은 도적놈은 속히 물러가고, 즉시 역적의 무리를 내보내 나와 승부를 겨루게 하라!" 공명의 말을 듣고 있던 왕랑은 그만 기가 치솟고 숨이 턱 막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
말 그대로 연의의 피해자. 왕랑에게 이런 굴욕적인 대우와 비참한 죽음을 안겨준 것은 아무래도 왕랑 본인이 조위의 중신이었으며 그의 후예들 역시 사마씨의 진나라 측근에서 여전히 현달하며 부귀영화를 누렸고, 결정적으로 실제로 서신을 제갈량에게 보내 얌전히 위나라에 투항하라고 권한 것을 작가가 괘씸하다고 여긴 것일 수도 있다.
4. 기타
장소와 허정 등과 친했으며, 조방의 대에 왕랑이 지은 역전을 관리 등용 수험 과목으로 결정한다.『세설신어』에는 화흠을 추앙한 일화와 배를 탔을 때의 일화가 있는데, 화흠 항목에 있는 배를 탔을 때의 일화는 이하와 같다.
왕랑은 화흠을 추앙해 화흠이 1년 중 12월에 만물을 모아서 신을 찾아 배향하는 사제일에 자식과 조카를 모아놓고 연회를 열자 이를 따라했으며, 훗날 어떤 사람이 장화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자 왕랑이 따라한 것은 모두 껍데기에 불과하니 그렇게 할수록 화흠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고 했다. |
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왕랑/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허정이 편지를 보낸 것 중에 왕숙을 얻을 때 나이가 29살이라고 적혀있다. 중국식 세는 나이를 적용하면 왕숙이 태어난 195년에 왕랑이 29세였다면 왕랑은 167년생인 것이 된다.[2] 외증손자이기도 한 사마염이 왕원희 사후 양씨에게 식읍을 내렸다고 하는 걸 보아 왕랑의 가족들 중 가장 오래 살았던 모양이다. 참고로 왕원희는 왕랑이 죽은지 40년이 지난 후에 죽었으니 남편인 왕랑이 61세라는 저 시대 기준으로 단명하지 않은 나이임에도 40년이나 더 산 것이다. 남편보다 한참 어리게 치더라도 아들 왕숙이 195년생이기 때문에 무려 90대까지 살았다고 볼 수 있다.[3] 이때 왕랑의 나이는 고작 20대였다.[4] 이때 우번은 노모를 모셔야한다며 회계로 돌려보낸다.[5] 그래서인지 한중합작 특촬물 레전드히어로 삼국전에서 레전드히어로로 등장한다. 그것도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우길을 제외한 레전드히어로 전원이 무관인 것을 감안한다면 무력보정을 제대로 받은 셈이다.[6] 공백기가 30년이나 넘는 탓에 독자들은 '손책에게 썰린 왕랑'과 '제갈량한테 말로 썰려 빡쳐서 죽어버린 왕랑'이 같은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위나라로 들어간 탓에 존재감은 없어지고, 그냥 중신 1로 전락했다.[7] 이 때 그의 나이가 75세라는 언급이 나와 연의에서는 153년에 태어난 것으로 설정되었지만, 실제로는 그의 나이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다만 아들 왕숙 관련 기록에서 그의 나이를 간접적으로 유추할수 있는 정보가 있는데 167년생이니 이때 61살이였다.[8] 다만 연의에서 설전은 대부분 제갈량이 중심이기에 제갈량과 설전한 것은 특이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