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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북벌

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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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諸葛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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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황
2.1. 촉 내부: 이릉대전의 패배로 인한 손실과 내부의 반란2.2. 촉 외부: 촉의 약화로 인한 위와 오의 충돌
3. 진행
3.1. 1차 북벌(228년)3.2. 2차 북벌(228~229년) - 진창성 공성전3.3. 3차 북벌(229년)
3.3.1. 손권의 칭제와 제갈량의 선택
3.4. 번외편: 위의 반격(제갈량의 3.5차 북벌)
3.4.1. 연의
3.5. 4차 북벌(231년)3.6. 3년간의 전간기3.7. 5차 북벌(234년)
4. 제갈량의 북벌 당시의 대결에 대한 평가
4.1. 1차 북벌(228년)4.2. 2, 3, 4차 북벌(228~231년)4.3. 5차 북벌(234년) 이후
5. 북벌의 전략적 목적6. 기타
6.1. 북벌에 참전한 사람6.2. 한고조와의 비교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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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힘을 다하여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멈추겠다
(鞠躬盡瘁, 死而後已).[1]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 제갈량이 6년간 주도한 위나라에 대한 공격이자, 소설 삼국지연의 후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건이다.

보통 삼국지 관련 매체는 웬만하면 북벌의 종결인 추풍오장원까지만 진행하고 마무리를 짓기 때문에 이 뒤에 남아있는 수십 년의 내용은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삼국지연의 본편은 제갈량 사후도 다루긴 하지만 내용이 매우 부실하기 때문에 대충 얼버무렸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후한황건적의 난(184년)부터 서진삼국통일(280년)까지의 이야기 중 제갈량의 사망(234년)은 시간상으로는 거의 중간에 놓이지만, 연의에서 다루는 제갈량 사후의 분량은 전체 분량의 1/8 ~ 1/10 정도이기 때문이다.[2]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비 사후 제갈량은 그의 유지를 이어[3]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 번의 북벌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했고,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오장원에서 쓰러졌다. 흔히 '육출기산(六出祁山)'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다섯 차례의 출병이 있었으며 기산 방면으로 출병한 건 2번(1차, 4차)이 전부다. 육출기산이 된 이유는 3차와 4차 사이에 창작 기산 전투가 추가되었고 2, 3, 5차 북벌도 전부 기산에 한 번 이상 진출한 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2, 3, 5차의 경우 기산 방면이 아니라 관중과 사천 지방 사이의 평지로 진출했다.

결국 제갈량의 북벌은 일부 성과는 얻었지만 궁극적 목적인 북벌은 실패했으며, 이후 북벌정책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비의 시대를 거친 후 강유가 유지를 이어받아 재차 11차례의 북벌을 시도하게 되나 이들도 모두 실패하고 결국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2. 정황

2.1. 촉 내부: 이릉대전의 패배로 인한 손실과 내부의 반란

촉은 건국하자마자 이릉대전에서의 대패, 건국 군주 유비의 사망, 그리고 이릉대전으로 인한 영토/인재/병력/재정의 막대한 손실, 내부에서의 반란[4][5]이라는 엄청난 동시다발적 악재에 맞닥뜨리게 된다.

제갈량은 촉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려 시도하였다. 이회나 마충, 장익, 장억 등을 등용해 내부 반란을 일단락짓고 불만 있는 세력들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정벌에도 불구하고 남중은 안정되지 않았고 특히 월수군은 제갈량이 내정한 태수인 공록이 제갈량의 남정 당시 사망하고[6], 이후로 태수가 임지에 부임조차 하지 못하여 군이 명칭만 남을 정도로 불안정하였다.[7] 통치 영역의 이민족을 적극적으로 식민화하여 국력을 강화한 손권과 달리 제갈량은 정복지에 관료와 군대를 두지 않고 간접 지배만을 확립한 후 회군하여 북벌에 매진하는 길을 택했다. 제갈량은 처음부터 적극적인 식민화를 염두에 두지 않았거나, 혹은 이에 투자될 시간과 비용의 낭비를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직접 통치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원정과 이회 임명을 통해 구축한 간접통치망은 징세와 물자 획득에 사용되었고, 이렇게 남만에서 얻은 자원들은 이후 북벌에 투자되었다.

한편 유비 사후 군권은 영안에 주둔한 중도호 통내외군사인 이엄이 가지고 있었고, 영안에는 다시 유비의 패잔병과 조운의 구원병이 주둔하였다. 유비는 죽으면서 이엄에게 전체 군권을 맡겼다. 제갈량은 남중정벌을 기획하며 조운을 중호군, 정남장군으로 올렸고 조운을 대동하며 남중을 평정했으며, 이 과정에서 본래 유비가 주지 않았던 군권까지 전부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제갈량은 북벌에 나서면서 조운을 데려가고 이엄은 강주에 배치해 북벌군에 물자를 보급하는 임무를 맡긴다. 이엄이 있던 영안에는 호군 진도를 남겨서 이엄에게 통솔하도록 했다. 강주는 유비 생전 그의 최측근인 장비와 조운이 맡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쪽으로 영안, 북쪽으로는 성도, 한수(가맹), 부, 한중까지 이를 수 있는 중요 지점으로 제갈량 역시 중요시 여긴 후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엄을 믿고 배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은 원래 맹달의 배신을 통해 상용이라는 전략적 거점을 선취하며 북벌을 시작할 계획이었지만 이는 맹달의 우유부단함과 사마의의 과감한 기동으로 인해 좌절되고 만다. 제갈량은 형주를 잃은 다음 상용을 최우선으로 얻어야 할 곳으로 봤다. 북벌과 북형주를 공략하기 위해선 이곳이 최선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촉이 상용을 먹는다면 위는 장안(혹은 옹양주)으로 오는 촉군과 상용을 통해 낙양으로 오는 촉군을 동시에 막아야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아니면 상용에 위군의 전력을 더 묶어 놔서 옹양주 평정이 더 편안해질 수도 있고. 맹달 문서로.

법정전에서 이미 한중을 점령하기 전부터 옹,양주 겸병 전략을 펴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2.2. 촉 외부: 촉의 약화로 인한 위와 오의 충돌

유비가 이릉에서 패한 222년부터 제갈량이 북벌을 시작하는 227년까지는 위나라와 오나라는 박터지게 싸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위략에 따르면 당시 위나라에서는 유비가 죽은 후 더 이상 익주에는 인재가 없다고 여겼고 실제로 몇 년 동안 국경 지대가 잠잠했기 때문에 촉에 대한 방비를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또 위나라가 전선이 엄청 넓고,[8] 전후복구가 안 된 곳이 많다 보니 지배력이 약한 농서 지역에 가용 병력이 그렇게 여유가 있진 않았고 따라서 방비도 허술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과장이다. 위나라에선 아예 제갈량이 출병하여 남정(南鄭)[9]에 머물 때 의논하는 자들이 대병을 일으켜 토벌해야 한다고 했고 조예의 뜻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손자(孫資)가 조조도 남정에서 위기를 겪었다며 남정으로 진군해서 제갈량을 토벌한다면 길이 험해 정병의 조달과 군량 운반, 남방 4개 주에서 수적에 대한 방비를 위해 무릇 15-6만의 군사가 필요할 것이고, 막상 닥치면 그 외에 또다시 군을 일으켜야 할 것이며 천하를 소란스럽게 동요시키면서 막대한 비용을 쓰게 되고 (남정을 점거한다 하더라도) 지키는 싸움은 그 노력이 3배가 더 들 것이라 하여 그만두었다.

위나라는 그 대신 제갈량의 북벌에 대한 대비를 시작하는데, 병력으로 대장을 나누어 보내 여러 험요지를 지키게 하면 그 위세로도 족히 변경을 진정시켜 장병들은 편히 쉬고 백성이 무사할 수 있다고 한 손자의 말대로 장안 방면 총사령관에 조진을 임명하였다. 또한 양주자사로 사마의의 군사였던 서막을 임명했다. 서막은 막 제갈량이 기산을 공격할 때 부임했다고 한다.

3. 진행

3.1. 1차 북벌(228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가정 전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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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1차 북벌
諸葛亮-第一次北伐
시기 228년
장소 옹양주(雍涼州)일대
원인 위 황제 조비의 죽음과 한실부흥에 대한 촉한의 의지
교전 촉한(蜀漢) 위(魏)
황제 황제 유선 황제 조예
지휘관 제갈량(승상[10]) 조진(대장군)
장수 마속(면죽현령·성도현령·월수태수·참군)
조운(중호군·진동장군)
위연(독전부·영 승상사마·양주자사)
오의(관중도독)
왕평(아문장·비장군)
고상(우장군[11])
등지(중감군·양무장군)
이막(건위태수·승상참군·안한장군)
상랑(보병교위·승상장사)
장합(우장군[12])
곽회(옹주자사)
서막(양주자사·사지절·영호강교위)
유초
마옹(장사)
금성태수[13]
마준(천수태수)
양서(공조)
윤상(주부)
양건(주기)
강유(상계연)
병력 호왈 20만[14] 5만 이상
피해 불명 불명
결과 천수군 서현의 인구 천여 가구 촉한으로 이주, 1차 북벌 실패
강유의 촉한 귀순, 마속 처형
영향 촉한이 가졌던 기습의 이점 상실, 대촉방면에 대한 위나라의 방비 강화
226년에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가 즉위해 위의 분위기가 안정되지 않자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려 북벌을 개시했고, 천수, 안정, 남안 3군을 일시적으로 점령했지만, 북벌의 핵심 방어 지역이라 할 수 있는 가정에서 패했고 천수, 안정, 남안도 잃고 철수했다.
[clearfix]

3.2. 2차 북벌(228~229년) - 진창성 공성전

제갈량의 2차 북벌
諸葛亮-第二次北伐
시기 228년 가을 ~ 229년 봄
장소 익주(益州) 무도군(武都郡) 고도현(故道縣)
산관(散關), 진창(陳倉)
원인 석정 전투의 여파로 관중의 방비 약화
교전 촉한(蜀漢) 위(魏)
황제 황제 유선 황제 조예
지휘관 제갈량(우장군·행 승상사) 조진(대장군)
장수 - 학소(잡호장군)
왕생
장합(우장군[15])
비요
왕쌍
병력 수만 진창성 수비군 1,000명[16]
3만[17]+@[18]
피해 불명 불명
결과 진창성 공략 실패, 촉한의 퇴각
영향 강동으로 집중하려던 위나라의 군사력 분산, 3차 북벌과의 연계

파일:external/36.media.tumblr.com/tumblr_nje3uirFqS1sm83a2o2_540.jpg

1차 북벌의 실패 이후, 위는 오를 공격했으나 석정 전투에서 대사마 조휴의 위군이 오나라에게 패배하면서 제갈량은 다시 한번 기회를 잡았다. 이 당시 위나라는 조휴/사마의/가규 등으로 오를 정벌하려 했었는데, 조예는 장합에게 관중의 군대를 이끌고 형주로 가 사마의의 지휘를 받게 했다. 제갈량은 손권이 조휴를 격파하니 위군이 동쪽으로 내려가 관중이 허약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리하여 관중의 압박이 사라지자 제갈량은 2차 출병을 개시한다. 하지만 2차 북벌은 제갈량이 노리고 있었던 북벌이라기보다는 석정 전투의 결과를 보고 1차 북벌의 여력을 투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228년 가을, 제갈량은 제2차 북벌을 감행한다. 조진이 예상하기론 제갈량의 전략적 목적은 관중을 얻는 것이었는데, 한중과 관중 사이의 교통의 요지인 진창이 그의 목적이었다고 판단했다. 이곳은 동한 광무제 때, 공손술의 수하 정언이 군을 이끌고 한나라 장군 풍도와 싸웠던 곳인데 노선은 한중 → 산관 → 진창길이었다. 여기서 산관은 나중에 남북조 시대나 남송 시대 때 남쪽에 자리잡은 왕조가 촉 지역의 북쪽 경계선으로 삼은 대산관을 말한다. 한진춘추에서는 11월에 산관에서 싸움이 있었다고 명백히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제갈량은 진창에 도착한 12월에 산관을 함락하고 진창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위나라의 대장군인 조진은 제갈량이 기산에서 패했기 때문에 재침한다면 틀림없이 다른 경로를 통해서 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미 228년 봄에 학소에게 진창에 성을 쌓게 했다.

228년 11월 제갈량은 후출사표를 올리고 이후 산관(散關)의 싸움이 있었다. 228년 12월, 제갈량은 산관을 통과하고 진창에 도달한 제갈량의 북벌군은 진창성의 1천여 명과 마주하게 된다.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은 동쪽으로부터 구원군이 급히 도착할 수 없다 생각해, 진창성을 뚫으려 했다. 하지만 진창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인 학소는 그 자신이 유능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진창성을 쌓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에 제갈량은 학소를 항복시켜 싸움 없이 진창을 점거하려 했다. 그는 석비채(石鼻寨)라 불리는 영채를 건설하여 진창성과 대치하는 한편 학소의 고향 친구인 근상을 세객으로 삼아 학소를 설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소는 배신한 장수의 집안을 적몰시키는 것이 위나라의 법률임을 내세워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근상이 다시금 학소의 마음을 돌리려 애를 썼지만, 다시 찾아온 그에게 학소는 활시위를 당기며 "나는 경을 알고 있으나 이 화살은 경을 알지 못한다"고 선고함으로써 대화의 여지는 없음을 명백히 했다. 마침내 근상을 통한 회유가 실패로 돌아가자 제갈량은 곧장 공성에 나섰고 쉴새없이 20일간 그 당시 사용할수 있는 모든 공성기술-운제, 충차, 정란, 참호 메꾸기, 성벽 기어오르기, 땅 파기-을 동원해 진창성에 공격을 퍼부었으나 학소의 농성에 막히고 만다.

제갈량이 진창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조진은 비요를 파견했고, 조예도 장합을 불러 수도와 황궁을 지키는 남북군(南北軍) 3만을 딸려 보냈다.[19] 장합은 제갈량이 학소의 농성에 막힐 것이라 예상하고, 조예가 '장군이 더디게 도착하면 제갈량이 진창을 점령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장합은 제갈량이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부족해 오랫동안 공격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제갈량은 도주했을 것이고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볼 때 제갈량의 군량은 10일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이라고 대답했다.[20] 이렇게 말했어도 장합은 진창을 서둘러 구하기 위해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진격했고 남정에 도착하자 결국 장합이 예견한 대로 제갈량은 철수한다. 왕쌍이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오자 제갈량은 바로 반격하여 참했다.

진창성 공성전의 기간은 20일 정도고 3차 북벌이 바로 이듬해 1월에 이뤄진 걸 보아 단순히 진창 공략이 목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진창 함락 여부는 관계없이 위군의 시선을 진창에 몰려있게 한 뒤 무도, 음평을 공략했다는 것. 실제로도 성공했기에 신빙성이 있는 주장이다. 진창 공방전이 본격적인 북벌의 장이 아니었음은 당시 촉군의 군량 사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촉군은 진창 전투 경과 불과 20일이 지났을 뿐인데 군량이 부족하여 퇴각했다고 기록은 말한다. 당시 촉한에 큰 기근이 있었다거나 식량 사정이 갑작스럽게 나빠질 만한 이상 징후는 포착되지 않는다. 실제로 진창 공방전 이후 바로 벌어진 229년 초의 무도, 음평 공략전 당시의 촉군은 이렇다 할 장애 없이 너끈하게 군사행동을 소화해냈다.

그렇다면 진창 공방전 당시 촉군의 '20일치 군량'은 단순히 촉군의 제반 사정이 좋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갈량의 계산 아래 적재된 소모 비용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만약 제갈량이 당시의 출병을 동년 초의 전역과 비등한 수준으로 확산시키려 했다면 행군과 전투 과정을 합쳐 한두 달이 될까 말까 한 군량만을 가지고 실행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228년 말 당시 제갈량의 기획은 그의 대전략적 목표인 옹양주 공략과는 전혀 달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제갈량은 위나라의 주력군이 동쪽으로 가자 출병을 단행했다. 현지 사령관이었던 조휴는 몇달 전만 해도 촉한을 견제하던 사마의장합까지 강동을 향해 몰려간 것이다. 제갈량은 이것을 순수하게 좋은 기회가 왔다고만 여길 수는 없었다. 위군이 전력을 집중해 강동을 공격했다가 동맹 세력인 오나라의 군사력이 흔들리기라도 하면, 그에 따른 악영향은 고스란히 촉한으로 돌아올 것이 아닌가? 때문에 제갈량은 촉군이 손해를 보지 않을 만큼의 제한을 두면서도 위군의 주의를 관중으로 환기시킬 만큼의 견제가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공세에서 제갈량은 오나라에 쏠린 군세를 관중으로 견제할 목적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당시 제갈량이 강동에 있던 형 제갈근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갈량은 진창 진출의 실제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수양소곡(綏陽小谷)은 산세가 험하고 물줄기가 얼기설기 흐르고 있어 행군하기에 어려운 곳이지만, 지난날 순찰병들은 이 요긴한 길을 통해 가고 오고 하면서 드나들었습니다. 지금 전군(前軍)으로 하여금 나무를 베고 이 길을 닦아 이로서 진창으로 향할수 있습니다. 이러면 족히 적군의 세력을 잇달아 끌어당겨 둘 수 있으므로, 저들이 군사를 나누어 동쪽으로 행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제갈량집[21]

수양소곡은 진창 정남쪽(포야도 위쪽)에 위치해 있는 골짜기로 제갈량은 여기를 통해 진창을 정찰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곳을 정비함으로서 진창을 견제할 수 있었다. 위의 중국역대전쟁사 지도에도 나오지만 1차 북벌 당시 기곡에서 포야도로 나온 조운과 등지가 진창과 미를 동시에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아마 이때쯤 정비된 것으로 보이며 2차 북벌 때는 진창고도로 가 산관을 함락함과 동시에 이곳으로 군사를 진군시켜 진창을 공격하는 데 사용한 모양이다. 여기에 서남쪽 산관과 연결된 진창도는 무도, 음평으로도 통한다. 따라서 제갈량은 우선 강동으로 쏠릴 위나라의 군사력을 억제하고 진창으로 위군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옹, 양주를 공략하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고 관중이 우선 순위인 것처럼 속여[22] 위군의 시선을 돌리겠다는 복합적인 의도로 진창을 향한 진군을 결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과연 조예는 강동 정벌에 동원했던 장합을 급히 소환하고는 남북군을 그의 지휘에 맡겨 진창을 구원케 했으니, 목표했던 의도대로 된 셈이다.

물론 적에게 실제적인 위협을 느끼게 해야 하고 진창을 차지하는 것도 촉한에게 전략적 이점[23]을 주니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심정으로 공략을 진행했을 것이다. 실제로 제갈량은 동쪽으로부터 구원군이 급히 도착할 수 없다 생각하자, 아예 진창성을 뚫으려 했기도 했다.

제갈량의 2차 북벌은 삼국지 제갈량전 주석 한진춘추에는 11월에 산관의 싸움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고 삼국지 위서 명제기에는 228년 12월에 산관을 넘어와 진창을 공격하고 있었다고 써있는 반면에, 조진전에는 다음해(229년) 봄이라고 기술되어 있다.[24]

3.3. 3차 북벌(229년)

제갈량의 3차 북벌
諸葛亮-第三次北伐
시기 229년 봄
장소 익주(益州) 무도군(武都郡), 음평군(陰平郡)
원인 북벌 및 익주 방어를 위한 요충지 확보를 위한 촉한의 공세
장합의 남북군 회군, 학소의 병사
교전 촉한(蜀漢) 위(魏)
황제 황제 유선 황제 조예
지휘관 제갈량(우장군·행 승상사) 곽회(옹주자사·건위장군)
장수 진식(호군)
-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촉한의 무도군, 음평군 점령
영향 추후 북벌을 위한 보급로 확보 및 대위전선 방어 강화, 제갈량 승상 복귀
어쩌면 제갈량의 북벌 중 가장 큰 이득을 보았던 북벌이다. 229년 봄[25], 제갈량은 진식을 보내어 음평과 무도 2군을 접수하게 한다. 진창 공방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나, 앞서 진창성의 방어전을 지휘한 학소는 수도에 올라갔다가 병사했고, 장합은 장합대로 남북군을 오랫동안 수도에서 비워둘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 이미 회군하고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곽회가 진식을 공격하려 했으나 진식에 뒤이어 퇴각했던 제갈량의 군대까지 건위(建威)로 진출하여 위군을 압박하자 전황은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결국 곽회가 퇴환(退還)[26]하여 2군이 평정되었다.

장기전을 보면 한중공방전 이후 조조가 사민 정책으로 무도 일대의 저족 5만 명을 천수, 부풍 일대로 이주시켰는데 후한 시절에도 무도군 인구는 8만에 불과했는데 이 시기에 5만을 빼냈다는 건 아예 텅텅 빈 상태. 양부전에 의하면 백성들만 이주시킨 것이 아니라 군청까지 옮겨버렸으므로, 결국 관민이 모두 빠져나갔다는 얘기다. 따라서 무도, 음평의 점령은 인구적으로 커다란 수확이 있었다고 보긴 힘들고, 지리적인 측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가정 전투의 허물은 마속에게서 비롯된 것이나, 그대는 이를 자신의 허물로 돌려 스스로 심히 폄하하고 몸을 굽히니 그대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그 청을 들어주었다. 지난해에 왕사를 빛내 왕쌍을 참수하고, 올해도 정벌하여 곽회를 도망케 했다. 저족과 강족을 위무하고 두 군을 회복했으며 위엄은 흉포한 무리를 제압하니, 그 공훈이 현연(顯然)하도다.

지금 바야흐로 천하가 소란스럽고 원악(元惡)이 아직 효수되지 않았는데, 그대는 대임을 맡은 나라의 기둥이니 오래도록 스스로 겸손하는 것은 공업을 크게 세우는 길이 못 된다. 이제 다시 그대를 승상으로 삼으니 사양하지 말라.

제갈량전의 후주 조서에서는 2, 3차 북벌을 두고 '저, 강을 위무했다.' 고 평하는데, 실제로 무제기의 장로 정벌 파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제갈량이 거쳐간 산관-진창도는 물론, 무도와 음평은 본디 저족의 터전[27]이었고, 특히 음평은 양주와 접하는데, 양주는 강족의 보금자리였다. 여기서 장기와 양부가 두 차례에 걸쳐서 옮겨간 저족들은 어디 멀리 간 것이 아니라 모두 부풍-천수의 경내 혹은 경계 지역에 살았고, 무도는 다름아닌 천수와 직통으로 접한 지역이다. 따라서 무도가 촉에 넘어갈 경우, 자연히 천수 경내에 잔존하던 저족들이 영향을 받기 쉽고, 이는 실제로 1차 북벌에서 출격 한번에 천수, 안정은 물론 관중 지역까지 한꺼번에 준동한 점, 그리고 4차 북벌에서 장합이 기산의 민심을 우려한 기록으로 모두 증명되고 있다. 더 나아가 강유의 대에 이르게 되면, 음평을 통해 농서, 남안, 금성의 강족을 이용해 함께 북벌을 시도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제갈량의 대에서도 위연과 오의가 음평의 강중(姜中)을 통해 양계(농서), 남안을 기습하여 4차 북벌의 사전 작업을 해놓은 기록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28]

무엇보다도 위가 중간 지대인 무도와 음평을 내주면 천수와 농서가 촉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는 반면, 위가 이 지역들을 점령하고 있을 경우 굳이 답중이나 건위를 경유할 필요 없이 바로 하변을 통한 한중 진공 + 교두를 통한 검각 진공이 가능하다는 차이가 있다. 263년의 제3차 촉정에서도 강유가 진언한 것은 바로 음평의 교두 방어책이었고, 유선의 판단 미스로 그 대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군은 한달간 음평에 묶여 있었다. 게다가 무도는 북벌군의 배후인 진창도가 위치하는 지역으로서,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경우엔 1차 북벌처럼 위진이 제안한 촉군의 후방 보급로 기습이 가능하지만, 이를 상실할 경우 그게 불가능해지며, 실제로 촉군이 무도를 점령한 229년 이후 전개된 그 어떤 북벌에서도 위군은 촉군의 후방 보급로를 공격할 수 없었다.

즉, 진식의 무도 공격 때 옹주자사 곽회가 기민하게 대처한 것도, 조진이 자극을 받아 촉정을 기획한 것도 상기한 위험성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1차 북벌 당시 촉군이 무도를 씹고 진공할 수 있었던 것은 위략의 서술처럼 그게 기습이었기 때문일 뿐, 3차 북벌에서 진식이 무도를 침공하자 곽회는 이를 즉각 요격했으며, 제갈량이 오기 전까지 형세는 결정되지 않았고 그 이상의 진군도 불가능했다.

2차, 3차를 이어서 보면 조운 정도의 역량이 되는 군을 나누어 통솔할 사람이 없거나 군대가 모자라거나 등의 이유로 진창을 공격하고(진창도 점령), 무도/음평을 뽑아오고(진창도, 기산도, 더 서쪽에서 오는 길목) 다시 상규 공략(4차)를 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의 북벌의 큰 줄기는 1차-4차-5차의 3번의 북벌이고, 4차를 위해서 2/3차를 했다고 보는 것이다.

소결하자면 3차 북벌의 무도-음평 점령의 의의는 이민족에 대한 공작 용이 + 공격/방어 루트 확보 + 보급선의 안정적 확보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대외적인 성과뿐 아니라 촉 내부적으로도 의미가 있어 무도, 음평의 평정과 왕쌍의 사살을 명분으로 제갈량이 다시 승상직에 복귀한다.

3.3.1. 손권의 칭제와 제갈량의 선택

동년 4월 13일, 오왕 손권이 마침내 칭제를 단행했다. 이미 두 사람의 황제가 나와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며 격렬히 대립하고 있는 형국인데, 이제 또 다른 후발주자까지 등장하면서 같은 시대에 무려 세 명의 황제가 병립한다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국호를 오(吳), 연호를 황룡(黃龍)으로 정한 손권은 대사면령을 내리고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아 천자의 격식을 갖췄다. 조정과 동궁의 인사를 마무리한 손권은 촉한에 사람을 보내 자신의 칭제를 알리도록 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소식을 받은 촉한에서는 논란이 발생했다. 정통 왕조이자 한실 그 자체를 표방하는 그들로서는 손권의 칭제를 곱게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손권과 교류하는 것은 무익하고 명체(名體-명의, 명분)도 불순하므로 의당 정의를 밝혀야 한다고 했다.

제갈량도 분명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명분론으로 볼 때 촉한이 손권의 칭제를 용인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당장의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았고, 위나라라는 막강한 적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오나라까지 적을 돌릴 수 없었다. 위와 오의 합작을 통해 이뤄졌던 형주 상실 및 관우의 사망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 전례도 있는 만큼 관건은 오나라가 위가 아닌 촉한과 손을 잡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오나라도 촉한도 단독으로 위군과 맞서기에는 난점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기에서 촉한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일지는 명백했다.

마침내 제갈량은 손권의 칭제를 묵인하겠다는 논지의 견해를 발표했다. <절맹호의絶盟好議>라 불리는 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손권은 참역(僭逆)의 마음을 가진 지 오래 되었으나, 국가가 그들을 추궁하여 틈을 내지 않은 것은 기각(掎角)의 도움을 얻기위해서 였습니다. 지금 만약 공개적으로 절교한다면 우리를 원수로 생각하는 마음이 필시 깊어질 것이니, 응당 군사를 옮겨 동쪽에 주둔시켜야 할 것이고 그들과 더불어 힘을 겨루어 그 땅을 병탄한 후에야 비로소 중원을 토벌할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들은 아직 현명한 사람들이 많고 장군과 재상들이 화목하므로 하루아침에 평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군사를 주둔케 하고 서로 대치한 채 앉아서 늙기를 기다리다가는 북적(北賊, 위나라)으로 하여금 계책을 얻어내게 만드니 상책이 아닙니다, 옛날 효문제(孝文帝)께서는 흉노족에게 자신을 낮추는 말씀을 하셨고, 돌아가신 선제께서도 오에 후한 조건으로 동맹을 맺었는데 이는 모두 임시로 변통하는 것이며 먼 훗날의 이익을 깊이 생각한 것이니, 필부들이 분노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손권의 이익이 (천하가) 솥발처럼 나눠진 형세에 있으므로 우리와 능히 협력할 수 없을 것이며, 그의 뜻이 이미 채워졌으니 강둑으로 올라가려는(북쪽 위나라를 공격하려는) 뜻이 없다고들 합니다. 이 말들이 모두 옳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손권은 그가 가진 지혜와 힘이 대등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강을 한계선으로 하여 스스로를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권이 장강을 넘지 못하는 것은 위의 도적들이 한수를 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역량에 여유가 있으면서도 이득을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대군이 가서 (위나라를) 토벌할 때 저들이 쓸 만한 상책은 응당 땅을 갈라 나누어 가지면서 훗날을 도모하는 것일 테고, 하책을 쓴다면 응당 백성을 노략질하고 경계 지역을 넓히며 안에서 무력으로 시위할 뿐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저들이 움직이지 않고 화의를 추구한다면 우리가 북쪽을 정벌하면서도 동쪽에 대한 근심거리를 없앨 수 있으며, 하남의 무리도 (오나라를 막느라) 모두 서쪽으로 나오지는 못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이득이 됨은 충분합니다. 손권이 참역한 죄를 아직은 드러내놓고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촉한의 군사력이 위나라와 싸우기에도 힘들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오나라까지 적으로 돌렸다간 부담이 과해진다. 동쪽 전선에 투입할 군사를 최소화하고 관서에 투입될 위나라의 전력을 견제 분산하려 한다면 촉한은 오나라의 손을 잡아야 했다. 군사나 정치 문제에서도 그렇거니와,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제갈량은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였다. 그 역시 다른 누구보다도 촉한이 한나라의 정통 후계자로서 명분이 있음을 주장하고 싶었겠지만, 삼국 중 제일 약소한 촉한의 현실은 그 명분을 충족할 수 있을 만큼 순조롭지 못했으니 촉한의 대의명분이 상처를 입더라도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후일의 계한보신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촉한은 제갈량이 죽은 후에도, 촉이 멸망할 때까지 자신들이 한나라 그 자체라는 명분은 버리지 못했으며 위나라를 멸망시켜야 할 숙적으로 보았다. 제갈량이 절맹호의에서 나타냈듯이 그것은 위를 멸하고 훗날의 오나라와의 관계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후일 사마씨가 촉한을 정벌함으로서 진나라를 세우는 논리로 이용되었으며 나아가 동진이 촉한정통론으로 이용하게 된다.
어쨌거나 제갈량에게는 실제로 그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던 것이었다. 제갈량은 절맹호의를 쓰며 손오와의 외교 관계에 있어 최대한 명분과 실리의 조화를 추구하여, 국교를 성공적으로 수립했다. 만약 제갈량이 국격을 지키고자 손권의 칭제에 거부를 표하고 동맹을 파기했다면, 이후 촉한은 부족한 군사력으로 북쪽과 동쪽 양대 전선을 모두 부담하는 지극히 어려운 형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제갈량의 판단이 당시 그가 고를 수 있었던 선택지 중에서 현실적으로 촉한에게 있어서 최선의 것이었음은 명백하다.

위위(衛尉)로 승진한 촉한의 신하 진진은 오나라로 가 손권을 만났다. 그는 손권의 칭제를 축하하고 오나라와의 동맹을 재확인하기 위해 파견된 외교관이었다. 이후 제갈량은 형 제갈근에게 편지를 써서 진진에 대한 본인의 인물평을 보내주었다.
효기(孝起, 진진의 자)의 충성스럽고 순실한 성격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독실해집니다. 그가 동쪽과 서쪽(오와 촉한)의 관계를 칭찬하며 양국이 함께 평화를 지켜 즐겁게 만든 것은 귀중한 공헌이라고 할 만합니다.

실제로 진진은 중대한 시기에 선발된 외교관으로서 자신이 짊어진 책무가 무겁다는 것을 자각하고 한 치의 실수도 범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모양이다. 진진전에서는 그가 오나라에 입국하기에 앞서 현지인들에게 먼저 보낸 편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자신이 혹 알지 못하는 오나라의 제도나 예법을 어길 수도 있으니 자신이 올바르게 처신할 수 있도록 가르쳐달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후 진진은 손권을 만나 그와 맹약을 나누고 두 나라의 동맹 관계가 굳건함을 확인했다.

이때 두 사람은 위나라를 정복한 뒤의 영토 분할까지 세세하게 계산하고 협의했다. 오나라는 예주, 청주, 서주, 유주를 가지며, 촉한은 연주, 기주, 병주, 양주를 가진다. 또한 사예는 함곡관을 경계로 양분하는 것으로 논의는 마무리됐다.
오와 촉한 모두 이 문제에 대단히 진지해서, 손권은 연주가 촉한에 속하게 됐다는 이유로 주연의 연주목 직위를 해제했으며 촉한은 촉한대로 일부 왕호(王號)를 수정했다. 외교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는 만큼 신중하게 일을 처리한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중화에 존재하는 세 사람의 황제 중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외교 관계를 구축하기까지 했다. 중국 역사 전체를 살펴봐도 이례적이고 독특한 일이었다.

이는 삼국 중에서도 압도적인 영토와 인력을 보유하고 있던 위나라가 상대적 약소국인 오와 촉한에게 있어 공통된 적으로 인식되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전에 등지가 손권에게 단언했듯이 천하는 둘로 나눌수 없고 언젠가 오와 촉한은 둘로 나뉘어진 천하를 두고 정통성을 경쟁하며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어야 할 운명이었다. 어쨌거나 이러한 형세를 어떻게 이용하는 것이 자국에게 이로운 길인지, 제갈량은 효율적인 전략안을 구상하고 마련하는 데 고심해야 했다.

3.4. 번외편: 위의 반격(제갈량의 3.5차 북벌)

자오의 역
子午之役
시기 230년
장소 진령산맥 일대[29]&
남안군(南安郡); 강중(羌中) 양계(陽溪)
원인 촉한의 무도, 음평 점령에 따른 군사 위기 고조
교전 위(魏) 촉한(蜀漢)
황제 황제 조예 황제 유선
지휘관 조진(대사마) 제갈량(승상[30])
장수 사마의(대장군·대도독·가황월)
장합(정서거기장군)
하후패(편장군)
곽회(옹주자사·건위장군)
비요
위연(진북장군·독전부·영 승상사마·양주자사)
오의(관중도독)
이엄(전장군·가절)[31]
병력 불명 이엄의 병력 2만을 포함한 대군
피해 식량 고갈 및 상당한 피해 불명
결과 위나라군의 패배 및 퇴각
영향 촉한의 북벌 전선 후방 안정
어쩌면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인 사마의와 제갈량의 맞대결이라고 볼 수 있다.

230년, 제갈량의 공격이 계속되자 위의 대사마 조진은 촉을 먼저 공격하여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작전을 입안했고, 대군을 동원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 당시 조진은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죽은 조휴를 대신해 대사마 자리에 오른 상태였고, 검을 차고 전각을 오를 수 있는 특혜(劍履上殿)와 입조할 때 이름을 불리지 않을 특혜(入朝不趨)까지 겸한, 명실공히 위나라 군부의 1인자였다. 장수로서의 역량과 군권 최고위직의 위치를 모두 갖춘 숙장의 건의는 조정의 분위기를 바꿀 만한 힘이 있었다.

제갈량은 양동 작전을 펼쳐 곽회를 물리치고 무도와 음평을 점령하여 촉군이 관중과 농서 양쪽으로 향하는 보급로를 확보했다. 이미 1차 북벌 당시 조운등지를 이용한 제갈량의 의병지계(疑兵之計)에 당한 탓에 촉군의 본대를 기산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는 조진이 이러한 사태를 묵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촉한을 공격하기 위한 위군의 출정이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대사마 조진, 대장군 사마의, 정서거기장군(征西車騎將軍) 장합 등 위나라가 보유한 당대 최고의 지휘관들이 모두 동원될 예정이었다.

한편, 촉한은 곧 원정을 올 위군에 대비한 방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제갈량은 해가 바뀌기 전에 이미 군대를 남쪽으로 물리고 면양(沔陽)과 성고(成固) 일대에 축성 작업을 벌여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을 쌓아뒀는데, 이는 몇 년 전 조진이 학소를 시켜 진창성을 보수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적의 침공을 상정하고 대비한 행동에 해당할 것이다. 1차 북벌과 진창 공방전까지는 그렇다 쳐도, 228년 말~229년 초의 전역에서 무도와 음평을 빼앗기고도 위군이 계속 수비 태세를 고집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제갈량은 예측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중을 기준으로 볼 때 면양의 한성은 북서쪽에, 성고의 낙성은 북동쪽에 있다. 이에 맞춰 위나라 원정군의 배치 또한 조진의 건의대로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관중에서 한중으로 가는 길목의 경우, 야곡을 통해 남진하면 면양과 만나고 자오곡을 통해 남진하면 성고와 만난다. 다만 북형주에서 한중으로 출진하는 사마의의 경우 한수(漢水)의 수로를 통해 북상하게 되는데, 조진전에서는 "사마의는 한수를 거슬러 올라와 남정(南鄭)에서 합류하기로" 계획됐다고 말한다. 이 경우 실질적으로 조진과 사마의가 합류하게 될 장소로는 낙성 인근이 유력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갈량은 위군이 한중으로 들어오는 유력한 길목 대부분을 차단한 셈이 된다. 한성과 낙성이 축성된 시기로 보아 조진이 원정을 강행했다는 것은 설령 전쟁이 요새를 사이에 둔 공방전의 양상으로 흘러가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거나, 혹은 한중 일대에 펼쳐진 촉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세 갈래로 갈라진 위군은 일제히 진격을 시작했다. 어떤 장수가 어떤 루트를 맡았는지는 기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사마의가 상용의 길목을 통해 한수를 따라 북상한 것은 일치하지만 야곡과 자오곡을 경유한 장수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진전에서는 조진이 자오곡을 통해 남하했다고 하는데, 후주전에서는 조진이 야곡으로 내려왔으며 자오곡을 통해 남하한 장수는 장합이었다고 한다. 자치통감에선 그냥 누구는 자오곡, 누구는 야곡으로 내려왔다고 정리해 버렸다.

어쨌거나 위의 대군이 일제히 한중을 향해 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자 촉군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제갈량은 성고와 성고 인근의 적판(赤坂)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격퇴 준비를 갖췄으며, 한중 주둔군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여겼는지 강주에 있던 이엄까지 소환했다. 강주의 군무는 아들 이풍을 도독으로 승진시켜 대리케 한 후, 이엄 본인은 2만 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한중으로 올라오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촉한으로서는 전력에 준하는 병력으로 전쟁에 임한 셈이다.

이 전쟁은 촉한에게 큰 위기였지만, 동시에 큰 기회이기도 했다. 멀고 험난한 길을 원정 오느라 지친 위군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앞으로의 북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손자진군이 이 전투 전에 조조마저 힘들어 했던 곳이라며 각기 조예와 조진의 원정 시도를 만류한 근거에서도 드러나듯, 익주의 지세란 다른 사람도 아닌 조조조차 고전케 했던 곳이 아닌가. 위기를 동반한 기회라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다.

동년 9월, 위군은 힘겹긴 해도 그럭저럭 큰 장애 없이 한중을 향해 잘 행군하고 있었다. 수륙 양면으로 진군하던 사마의는 순조롭게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서성으로 진입해 조진과 한중에서 만나기 기다렸다.[32] 헌데 남하하는 위군에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위군은 관중과 무위(武威) 양쪽 지역에서 출발하여[33] 자오곡과 야곡을 통해 내려오고 있었는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무려 한 달에 걸쳐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잔도가 끊어지고 말았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로가 끊겨버린 난감한 사태에 부딪혀 조진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보통은 이때 위나라가 그냥 물러난 것으로 해석되나 실제로는 전투가 있었다. 하후연하후패의 기록에 따르면 황초 연간에 하후패가 편장군이 되었고 230년 가을에 조진과 사마의, 장합이 한중으로 쳐 들어온 자오의 역에서 참전했는데 이때 하후패는 선봉이 되어, 흥세의 위에 당도해, 전곡에 영채를 안돈했으며 촉한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병사를 내어 공격했고 하후패는 녹각 사이에서 몸소 싸웠고, 구원에 힘입어 풀려났다는 기록이 하후연전 하후패의 기록에 있다. 한중의 책임자는 정서 장군이고 당시의 정서 장군은 강유였으므로 강유는 주요 방어군의 일원으로서 하후패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름에 장마가 쏟아져 잔도가 끊기고 보급에 문제가 발생하자 조진, 장합, 사마의의 군대는 별 소득 없이 철수한다. 정사 왕기전에서 왕기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자오의 역에서, 병사가 수백 리를 행군하여 긴 비를 만나, 교각이 파괴되고, 뒤의 군량은 썩어, 전군이 핍절했다'고 하며 위나라가 본 손해로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싸움으로 인해 식량이 고갈된 상황에서 싸움을 통한 위나라군의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일 왕기가 이 전투를 두고 제갈탄의 난 당시 문흠이 죽은 것과 동급으로 언급하고 있는 만큼 위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해, 그러니까 이 전역 직후에 제갈량은 위연을 강중으로 진출시켜 양계에서 곽회를 대파하여 후방을 안정시킨다. 228년 조휴가 사망한 이래 위 군부의 1인자는 조진이었으나 이 전투 이후 231년 조진마저 사망하면서 드디어 사마의가 부상한다.

3.4.1. 연의

연의에선 위군의 공격이 개시된 직후 제갈량이 장의와 왕평에게 1천의 병력으로 위군을 막으라고 하자, 두 사람은 겨우 그 병력으론 도저히 싸울 수 없다며 차라리 자신들을 죽여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제갈량은 천문을 통해 곧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견하며 적은 병력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두 사람을 달랜다. 한편 사마의 역시 큰 비가 내릴 것을 예견하고 진격을 멈추고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해 위군은 옛 진창성에 주둔했다가 큰 비를 만나서 피해를 입는다. 모두 극적 묘사를 위해 추가된 부분.

조진이 철수를 결정한 후 바로 4차 북벌이 진행되었다. 조진과 사마의의 내기, 진식 처형 등의 에피소드가 들어갔지만 당연히 이는 모두 허구. 그리고 이 때문에 실제 4, 5차 북벌은 연의에선 5, 6차 북벌로 바뀌었다.

또한 연의에선 이 시점에서 제갈량이 갑자기 퇴각하게 된다. 구안이라는 자가 군량미를 제대로 운송하지 않고 태만하게 일해서 제갈량이 태형으로 다스리자, 구안은 이에 원한을 품고 위나라로 도망갔고, 사마의는 이를 이용해서 제갈량이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을 촉에 퍼뜨렸다. 유선과 촉의 관료들은 이 소문 때문에 제갈량을 성도로 소환한 것.

그리고 제갈량은 후퇴할 때 춘추전국시대의 병법가인 손빈의 작전을 역이용해서 아궁이 등 병사들이 식사를 한 흔적을 점차 늘려가는 일명 우후지법[34]을 이용하여 퇴각한다. 추격하던 사마의는 '이상하다. 촉군의 병력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제갈량이 뭔가 계략을 꾸미는 듯 하니 더 이상의 추격은 위험하다'라고 판단하고 철수했다.

이 구안 이야기는 아래에 언급할 이엄의 실각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3.5. 4차 북벌(2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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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4차 북벌
諸葛亮-第四次北伐
시기 231년 3월 ~ 6월
장소 옹주(雍州) 천수군(天水郡) 상규현(上邽縣);
서현(西縣)일대의 기산(祁山), 노성鹵城), 목문(木門)
원인 본격적인 북벌 재개
교전 촉한(蜀漢) 위(魏)
지원세력 선비족 -
황제 황제 유선 황제 조예
지휘관 제갈량(승상[35]) 사마의(도독옹량주이주제군사)
지원군 지휘관 가비능(대인) -
장수 위연(전군사·정서대장군)
오반(후장군)
고상(독전부·우장군[36])
왕평(무당감)
마충(승상참군)
장합(정서거기장군·사지절)
비요(후장군)
곽회(양주자사·건위장군)
대릉(정촉호군[37])
우금(후장군[38])
가허
위평
견초(우문중랑장·안문태수)[39]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불명 3,000명 이상 전사
결과 군량 문제로 촉군 퇴각
영향 촉한 이엄의 실각, 조위 명장 장합 전사[40]

231년 2월에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했다가 상규에서 위군과 대치하다가 기산으로 퇴각했고, 추격하는 위군을 노성에서 물리쳤으나, 익주에서 5월부터 큰비가 내려 군량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한 보급 문제로 철수했다.

3.6. 3년간의 전간기

232년 봄, 제갈량은 백성들과 병사를 쉬게 하고 농업을 장려했다. 또한 병사를 조련하고, 병법을 가르쳤으며 목우유마를 만들었다. 다음해, 제갈량은 야곡의 저각(곡식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다)을 고치고 병량을 야곡구로 운송했다.

한편 위나라의 경우 233년에 북방에서 가비능의 반란이 있었고, 공손연은 칼을 갈고 있었다, 또 234년 초에 전염병이 돌아 상황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진서 선제기에 따르면 231년 제갈량이 퇴각한 이후 군사 두습, 독군 설제가 모두 말하길, 내년에(232년) 보리가 익으면 제갈량이 필시 침범할 것인데 농우(隴右, 농서)에 곡식이 없으니 의당 겨울 동안에 미리 옮겨놓아야 한다고 했다. 사마의는 그가 기산을 두번 공격하다가 돌아갔고 진창을 한번 공격하여 꺾이고 돌아갔으니 공성보단 야전을 바랄 것이고 제갈량은 늘 군량이 부족한 것을 한스러워 했으니 돌아가서는 필시 곡식을 비축할 것이라 3년 정도 곡식을 축적한 후 농동보단 농서로 나올 것이라 예측했다. 이에 표를 올려 기주(冀州)의 농부(農夫)를 옮겨 상규(上邽)를 경작하게 하고 경조(京兆), 천수(天水), 남안(南安)의 감야(監冶, 대장장이 감독)를 흥성하게 했다.

또한 사마의는 233년, 성국거(成國渠)를 뚫고 임진피(臨晉陂)를 쌓아 수천 경의 농지에 물을 댔다. 사마의가 진나라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개수로인 성국거를 진창에서 견수까지 확장시켰던 것인데 진서 식화지에 따르면 임진피는 주변 황무지 3천 경의 물을 댈 수 있었다고 하고 성국거는 오장원과 무공에 가까운 미현에 있었는데 이후 제갈량의 북벌에 대비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진서 식화지에 따르면 사마의가 가평(嘉平) 4년, 관중에 기근이 들자 사마의가 표를 올려 기주농민 5천 명을 상규에 이주시켜 밭을 갈게 하고 경조, 천수, 남안의 염지(소금호수)를 흥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제는 가평 4년은 252년으로 이미 사마의가 죽은 다음해라는 것. 게다가 상규로 기주의 농민을 이주시키는 계획은 사마의가 아니라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에 따르면 그의 동생 사마부의 계책이었다. 그리고 선제기는 사마의가 시킨 게 감야(監冶)라고 나오는데 식화지는 염지(鹽池)를 흥하게 했다고 나온다. 말이 서로 안 맞는데 일단 연호에서부터 크게 삑사리를 낸 식화지보면 선제기의 기록이 맞는듯 하다.

또,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사마부 열전)에 따르면 매번 제갈량이 관중을 침입했는데 변방의 병력들은 제갈량을 능히 당해내지 못했고 또 관중에 침공한 적과 우연히 마주치자 곡식과 비단이 부족했다고 한다. 또 사마부는 중군을 이끌고 일이 되어 가는 가장 중요(重要)한 기틀에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마부는 마땅히 보병과 기병 2만을 엄선하여 두 부대로 나누어 적(賊, 촉한)들을 토벌하기 위해 갖추었다. 또 기주로부터 농정(農丁) 5천을 보내어 상규(上邽)를 진을 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관중의) 장정들에게 가을과 겨울에 전진(戰陣)하는 법을 배우고, 봄과 여름에는 밭과 뽕나무를 일구도록 하였다. 말미암아 이에 관중(關中)의 군국(軍國)에 여분이 있게 되었으며, 적들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라는 기록처럼 관중 부흥책을 실시한다.

선제기에서는 기주의 농부를 상규로 옮긴 게 사마의로 나오고 안평헌왕부열전에서는 사마부로 나오는데 선제기는 사마의가 '제갈량은 농서로는 안 올 것'이라고 말해놓고 정작 농서인 상규에 농부들을 배치하고 대비케 하는 모순을 저질렀으니 사마부 열전 쪽이 더 맞는 듯하다. 상규의 농민 이주는 안평헌왕부열전에 따르면 제갈량의 잦은 침입으로 변방의 군사들이 이기지 못하자 제시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제갈량의 북벌을 막으려는 시도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여담으로 진서에 나오는 사마형제의 제갈량의 북벌에 대한 대비는 자치통감에서 모두 짤렸다. 하여간 사마형제가 놀고 있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3.7. 5차 북벌(2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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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5차 북벌
諸葛亮-第五次北伐
시기 234년
장소 옹주(雍州) 부풍군(扶風郡)[41] 무공현(武功縣) 오장원(五丈原)
원인 촉한 승상 제갈량의 국력을 기울인 북벌
교전 촉한(蜀漢) 위(魏)
황제 황제 유선 황제 조예
지휘관 제갈량(승상[42])[43] 사마의(도독옹량주이주제군사)
장수 위연(전군사·정서대장군)
강유(정남장군)
비의(사마)
양의(장사·수군장군)
장익(전군도독·부풍태수)
맹염(보한장군·호보감)
마대(평북장군)
곽회(옹주자사·양무장군)
진랑(정촉호군)
호준
병력 약 100,000명 최소 30,000명 이상[44]
피해 불명 불명
결과 제갈량의 사망으로 인한 촉한의 퇴각
영향 촉한의 북벌 공세 잠점 중단. 촉한 군부의 양익 위연과 양의의 실각

234년에 제갈량이 약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오장원으로 진출해 위군과 대치했으며, 위군이 위수를 넘어와서 공격하자 이를 물리쳤다. 제갈량이 북원, 양수 등을 노려 위군을 노리려고 했으나, 곽회가 막으면서 실패했고 양 군이 대치하다가 제갈량의 사망으로 인해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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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갈량의 북벌 당시의 대결에 대한 평가

4.1. 1차 북벌(228년)

당초, 국가(위)에서는 촉에 오직 유비만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비가 죽고 여러 해 동안 조용했으므로 아무런 방비가 없었다. 그러다 돌연 제갈량이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자, 조야(朝野, 조정과 바깥)에서 몹시 두려워하고, 농우, 기산에서 특히 심했으니 이 때문에 삼군이 제갈량에게 항복했다.
위략에서
남안, 천수, 안정 세 군이 위를 배반하고 제갈량에 호응하니 관중이 진동했다.
제갈량전에서
이렇게 되자, 조정의 신하들은 무슨 계책을 세워야할지 아무도 몰랐으나, 명제가 말하기를 “제갈량은 산을 거점으로 굳게 지키다가 지금은 스스로 왔으니, 이는 병서에서 말하듯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술과 합치되오. 하물며 제갈량은 삼군을 탐하여 전진할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니, 이제 이때를 이용한다면 그를 쳐부수는 것은 필연적이오.” 라고 했다.
위서에서
제갈량은 (중략)살을 잘라 내고 뼈를 상하게 하면서도 스스로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하니, 이는 우물 안에서 용병하고 소발굽 위에서 노니는 격이었다.
위략에서 조예가

4.2. 2, 3, 4차 북벌(228~231년)

명제가 장합에게 물었다, “장군이 더디게 도착하면 제갈량이 이미 진창을 차지해 버리진 않았겠소?” 장합은 제갈량이 현군(縣軍-외떨어진 군사)으로 군량이 부족해 오랫동안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제갈량은 이미 달아났을 것입니다.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볼 때 제갈량의 군량은 10일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장합이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진격해 남정(南鄭)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퇴각했다.
장합전에서
지난해에 왕사를 빛내 왕쌍을 참수하고 올해도 정벌하여 곽회를 둔주(遁走-도주)케 했다. 저, 강을 항복시켜 모으고 2군을 회복했으며, 위엄은 흉포한 무리를 제압하고 공훈은 현연하도다.
제갈량전에서 후주 유선이
위 명제가 말했다, “서방의 일이 중대하니 그대(사마의)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 한 자가 없소.”
한진춘추, 선제기에서
당초 제갈량이 출군했을 때 의논하는 자들이 이르길, 제갈량군에 치중이 없어 군량이 필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니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어서 군사들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상규 주변의 보리를 미리 베어 적의 식량을 없애자고 했는데 황제가 이를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그 앞뒤로 군사를 보내어 사마의의 군을 늘려주었고 또한 보리를 지키도록 명했다.
위서에서
장합이 군사를 나눠 옹, 미에 주둔시키려 하자 사마의가 말했다, “전군(前軍)이 홀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는 것은, 바로 초의 3군이 경포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었소.”
한진춘추, 선제기에서
제갈량은 생각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니 필시 영채를 안돈하여 스스로 방비를 굳게 한 뒤에야 보리를 수확할 것이오.
선제기에서, 사마의가
전진할 뿐 감히 적을 핍박하지 못하는 것은 의당 해서는 안 될 일로,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한진춘추에서, 장합이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사마의가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한진춘추에서, 가허/위평이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장합은 그들을 추격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제(帝)는 장합을 애석해하고 조정 회의에서 탄식하며 말했다.

명제가 말하길,

"촉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장합은 죽었소. 장차 이와 같음을 어떻게 하오!"
위략에서 조예가
매번 제갈량이 관중(關中)을 침략하였는데, 변방의 병력들은 적을 능히 당해내질 못하자 (사마부가) 중군(中軍)을 이끌고 급히 도달했는데,번번이 사기(事機)에 미치지 아니하였다. 마땅히 보병과 기병 2만을 엄선하여 두 부대로 나누어 적(賊, 촉한)들을 토벌하기 위해 갖추었다. 또 관중(關中)에 적들이 침공하자 우연히 마주하였는데, 곡식과 비단이 부족하여, 기주(冀州)로부터 농정(農丁) 5천을 보내어 상규에 진을 치도록 하였다.
안평헌왕부열전에서

4.3. 5차 북벌(234년) 이후

제갈량은 기산으로 두 번 출병하고 진창을 한 번 공격했다 꺾이고 돌아갔소. 설령 그가 뒤에 출병하더라도 다시 공성하지는 않고 응당 야전을 바랄 것이며, 필시 농동에서일 것이고 농서는 아닐 것이오. 제갈량은 늘 군량이 부족한 것을 한스러워 했으니 돌아가서는 필시 곡식을 비축할 것이라 내가 헤아려보건대 3년 안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선제기에서, 사마의가
제갈량이 만약 용감한 자라면 응당 무공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할 것이오. 만약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에 오른다면 제군이 무사할 것이오.
위씨춘추, 선제기에서, 사마의가
제갈량은 뜻이 크나 기회를 살피지 못하고, 꾀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용병을 좋아하나 임기응변이 없으니, 비록 10만 군사를 이끈다 한들 내 계획 속으로 빠져들 뿐이라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선제기에서, 사마의가
만일 제갈량이 위수를 넘어서 고원으로 올라와 병사들을 북산에 이어서 농으로 가는 길을 끊어버리고, 백성이나 오랑캐를 동요시킨다면, 이것은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곽회전에서
대신들은 대장군 사마선왕이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 군사와 대치하고 있어 승리가 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명제에게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장안으로 가서 사마선왕을 후원해 줄 것을 건의하자, 명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손권이 도주했다면 제갈량의 배짱은 이미 무너졌을 것이고, 대장군(사마의)은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근심할 필요가 없소.”
명제기에서, 조예가
군이 퇴각하자 선왕(宣王-사마의)이 그의 영루(營壘)와 처소(處所)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제갈량전, 선제기에서
선왕이 퇴각하니 백성들은 속어를 지어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 라고 했다.
한진춘추, 선제기에서
공명은 파, 촉 땅에서 일어나 1주의 선비에 의지하니 대국에 비하면 그 전사, 관민이 9분의 1 정도에 불과했으나, 오나라에 예물을 바치면서도 위나라와 맞서고, 밭 갈고 싸우며 대오를 갖춰 형법이 엄정, 가지런하고, 보졸 수만을 거느리고 기산으로 장구하니, 개연히 하수, 낙수에서 말에게 물 먹일 뜻이 있었다. (그러나)중달은 천하에 열 배의 땅에 의거하여 겸병지중을 거느리고도, 견고한 성을 점거하고 정예를 끼고는 적을 사로잡을 뜻이 없고 스스로 보존하는데 힘쓸 뿐 공명이 스스로 오고 가게 만들었다.
묵기에서, 오나라 대홍려 장엄이
제갈량(諸葛亮)은 중인(重人)이나 촉병(蜀兵)을 자주 사용하였으니 이는 소국(小國) 약민(弱民)이 오래 존속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원자에서 서진의 학자 원준

사마의가 북벌군과 대적하는 위군의 총지휘를 맡은 이래,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 내용은 위에 명기되어있듯 싸움 자체가 별로 없어서 꽤나 싱거워 보인다. 하지만 대치하는 와중의 심리전을 잘 알고 본다면 꽤나 긴장감이 넘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촉은 모든 국력이 북벌에 투입되고 있었기에 북벌은 곧 나라의 사활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1차 북벌까진 꽤 여유롭던 조예는 4차 북벌 즈음하여 태도가 급변해 사마의가 아니면 서방의 일을 맡길 사람이 없다고 평할 정도로 제갈량의 북벌을 위협적으로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당장 어린 나이에 전쟁 지휘도 훌륭히 할 정도로 명석하고 각잡혔던 조예가, 제갈량 사후 급속도로 풀어지고 망가지기 시작하는데 연속되던 촉한의 북벌이 위나라 황제 조예에게는 상당히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상황이었음을 방증한다. 특히 제갈량의 1차 북벌 기습 전격전과 마지막 북벌인 오장원으로 치고 들어와 우주 방어는 위나라에 상당히 큰 위기였다. 이는, 조진, 장합, 사마의 등 현장 지휘관들도 마찬가지로서, 조진의 경우 계속되는 북벌에 무리한 촉정을 감행했으나 큰 비로 인해 돌아올 수 밖에 없었으며, 장합 역시 촉군을 내버려 둘 경우 일어날 기산의 민심 준동을 걱정했고, 사마의는 촉군을 선봉만으로 대적할 상대가 아님을 일찌감치 꿰뚫고 있었다. 더군다나 4차 북벌에선 사마의를 비난하며 만장일치로 합전을 주장하던 위나라 장수들 역시, 본대가 대패당한 뒤론 사마의의 견벽거수 방침에 별다른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으며, 아예 황제인 조예부터가 견벽거수 하나를 고수하도록 칙령을 내린 것도 모자라 신비를 감독관으로 파견했을 정도. 그러나 북벌이 위협적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북벌의 결과물 자체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다곤 하지만 결국 제갈량의 촉군은 옹주는 커녕 정작 중요한 교두보인 기산, 상규조차 얻지 못했다. 이 때문에 두고두고 까일 만한 소지를 남기게 된 것. 그래서 예전부터 제갈량을 존경했던 선비들은 '성패를 가지고 영웅을 논하지 말라'라고 하기도 했다.

다만, 촉의 국력은 매우 취약했다. 이릉 대전 이후로 촉은 상당수의 군사와 군부 쪽 인재를 잃었고 제갈량은 군을 이끌고 상용을 탈취하는 게 아니라 맹달을 회유하여 상용을 탈취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미리 눈치챈 사마의는 맹달이 우유부단하게 멍때리고 있는 사이에 속전속결로 상용을 점령하고, 촉의 양방향 진군을 처음부터 봉쇄했다.

또한 몇 차례 접전을 통해 제갈량과 맞서 본 사마의의 입장에서는 만만하지 않은 제갈량을 상대로 속전속결로 결판을 내는 것은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지구전으로 갔다. 맹달을 토벌할 때나 요동정벌 간 보여준 사마의의 특기가 과감한 용병과 병귀신속의 정석과도 같은 속도전임을 감안하면 그가 야전에서 제갈량과 맞붙는 것을 얼마나 꺼렸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제갈량은 국력이 약한 촉군을 이끌고 북벌을 행할 때마다 주변 지역이나 민중의 호응을 얻고 군량을 현지 조달 내지는 주둔 지역 장악[45]으로 위군을 농락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의 수명 앞에서는 무력했고, 그의 사망으로 북벌은 당분간 중단되기에 이른다.

결국 제갈량의 북벌은 위의 수세 우위주의 전략에 옹, 양주 겸병이라는 목표 달성에는 실패한다. 그러나 제갈량의 북벌 덕택에 촉은 무도와 음평의 두 요충지를 장악, 위에서 촉으로 들어오는 공격 루트를 단순화시키고 북벌루트를 좀 더 용이하게 만들 수 있었다.

5. 북벌의 전략적 목적

북벌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밝힌 옛 도읍, 즉 장안과 낙양의 회복. 또 다른 하나는 사마소가 언급한 옹, 양주의 장악이 그것이다. 그리고 제갈량의 궁극적인 목적이 중원을 도모하여 위나라를 병합하는 것이었다고 배송지는 말하고 있다.

제갈량이 삼고초려 당시, 유비에게 제시했던 융중대에 따르면 제갈량의 전략적 도안은
하지만 이 계획에 가장 중요했던 형주는 관우의 사망과 함께 물 건너 가버리게 되고, 이 덕분에 유비는 이릉 대전에서 촉한의 주요인재와 병력 등을 죄다 말아먹는 역대급 병크를 저질러 버린다. 거기다 맹달이 다스리는 상용마저 조위에 투항하고[46], 이릉 전투로 오와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제갈량이 생각했던 위나라 공략의 모든 전제 조건이 무너지게 된다.[47] 이에 제갈량은 오와의 관계 개선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맹달의 회유를 시도한다. 비록 형주는 완전히 촉한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상용만 되찾아도 상용을 통해서 양방향 압박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와의 관계를 개선하는데는 성공했어도, 정작 맹달이 우유부단하여 촉에 투항하기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사마의에게 걸려 속전속결로 패망하고 만다. 결국, 두 방향으로 위를 압박해 진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려던 제갈량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상용을 놓치면서 제갈량의 북벌이 한중 북부 방면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었고[48][49] 위도 그쪽을 중심으로 수비를 하게 됐는데 체급 차이가 큰 촉이 공격 루트마저 한정되어 버린것이다.

그리하여 시행한 제갈량의 북벌의 최우선적인 전략적 목적은 관중농서를 얻는 것이었다. 정사에 수록된 사마소의 언급에 따르면 제갈량의 북벌 목적은 농서의 서쪽을 자르기 위함이었다 한다. 이 지역들을 얻는다면 촉은 위처럼 기병 육성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고대에 기병은 오늘날 전차에 비유될 수 있는 고급 병종인데다가, 위는 수만의 정예기병을 중심으로 대촉 전담인 정촉군(정촉호군)을 편성하고 북벌 때마다 활용했다. 팔진도를 제갈량이 고안한 것도 기병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목적이니 제갈량도 확실한 기병 육성을 할 여건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농서는 이 기병을 육성하는데 탁월한 지역이었다.

물론 최종 목적은 후한의 국토 회복으로 볼 수도 있다. 촉은 유비 이래 한실의 부흥, 정확히 말하면 전한이 멸망하고 후한이 태어났듯, 후한 다음의 새로운 한의 탄생이 목적인 사상을 정치적 이념으로 삼고 있었고, 비록 많은 이들이 한실은 끝났다고 보고 있었으나, 4백여 년 이상의 통치로 인해 한실 그 자체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선비들은 다수 존재했다. 제갈량도 그중의 하나였으며, 조운을 비롯한 다수 무장과 유비가 입촉할 때까지 그를 따랐던 인재 대부분이 바로 이 대의명분을 받들었던 이들이었다. 거기다 조위 내에서도 순욱처럼 한실을 지지했던 세력들이 존재했다.

촉의 한나라 부흥의 방침은 유비가 죽은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 이념은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3군이 단숨에 촉에 호응하고 이후 관중의 민심이 촉에 쏠리는 등의 반응으로 어느 정도 구체화된다. 제갈량의 북벌 당시는 한나라가 멸망한지 얼마 안 되던 시점이었으므로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자기 세대에 한나라를 이었다는 정통성을 이용해서 확실한 기반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으며 위나라를 점령할 수는 없어도 옹주와 양주를 점령해서 힘의 균형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위의 국력이 압도적이라도, 간신히 복구한, 가장 생산력이 좋으면서, 후한 말 전란의 여파가 가장 오래간 옹, 양이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균형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거기에 관중은 발전한 지역이었고 장안만 해도 충분히 교역의 중심 지역인 동시에 옛 한나라의 수도라는 정치적 입지까지 더해줄 수 있었다. 물론 관중과 장안은 그 때까지도 삼보의 난으로 인해 입은 피해가 채 복구되지 않았지만, 관중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 자체는 여전했다.

그래서 촉한은 이 지역 주민들, 이민족들과 경제, 사회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이 지역을 얻으면 한나라의 옛 중심지인 관중+파촉 지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경제, 인적 자원의 시너지를 얻을 수 있으며 진출과 물자 보급이 용이해지고 파촉에서부터 지속적인 무기 개발과 새로운 진법의 도입으로 위나라와 맞서는 게 가능했던 촉군에 군마 등 군수 물자를 지급해 전투력을 더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또 지리적인 이점도 있다. 동쪽은 장안 인근 관문을 통해 방어가 쉽고 반대로 조위는 방어선 길이가 늘어난다. 관중과 익주의 생산력으로 동관을 틀어막는다면 훨씬 적은 병력으로 나라의 유지만큼은 너무나 쉬워진다. 여기에 옹주 양주의 물산과 인구를 확실히 손에 넣고 서쪽으로는 외부 세력과 교역할 수 있는 교역로가 열린다. 위나라가 소유한 중요 요지를 타격하고 2개 주를 위나라에서 갈라 촉에 소속시키는 것 이상의 시너지가 가능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정세야 그때 그때 변하는 것이니 버티다가 실제 관중을 근거지로 했던 다른 나라들처럼 천하를 통일할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전국시대진나라가 그러했고, 초한대전한나라도 그러했으며, 위진남북조시대북주와 북주를 계승한 수나라 역시 그러했다. 즉, 옹양주 겸병 그 자체가 촉한의 천하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했다면 촉한이 잡을 수 있는 기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셈인 것이다.

또 당시 양주 지방은 마초 및 양주 군벌들과 조조 세력의 전투가 214년까지 이어지면서 215년 이후에야 위의 행정 구역으로 들어왔다. 이후에도 반란이 이어져 당시 옹주자사였던 장기가 애를 먹었으나 그래도 겨우겨우 대충 반란은 안정시켰고. 이후 222년 옹주자사 대리로 부임한 곽회가 강인들을 흡수하면서 나름 행정력을 갖춰가게 되었다. 하지만 위나라는 오랜 내부의 전란으로 내부의 국력도 상당히 저하되어 있으며 촉한이 북벌을 진행할 때마다 내부 반란+이민족들의 이탈 같은 문제가 수시로 발생하여 단일한 국력으로 집중하기 어려웠다. 위가 이전 후한 시기 9주의 국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모르되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아직 국력을 수습하지 못하고 내분이 일어날 때를 노려 위가 완전히 행정력을 장악하지 못한 지역을 차지해 국력을 증진시키려는 제갈량의 계책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실제로 제갈량의 융중대 조건은 국력을 키우는 상태에서 위에 내분이 있을 때 치고 올라가자는게 기본적인 전략이기도 했는데, 기본적으로 위를 치기 위해선 위가 어느 정도 분열된 것을 상정했다는 것인 만큼 당초 계획이 상당히 무너진 상황에서도 위나라의 분열과 행정력 장악 부족 상황에선 시도해 볼 만했다. 이 당시 촉한의 입장에서는 북벌이 더 늦어지다가 곽회가 이 지역에 완전히 행정력을 미치고 촉 위 경계를 확정할 정도의 방어력을 갖춘다면 진짜 완전히 익주에 갇히게 되어 중과부적이 된다. 익주가 아무리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라 해도 힘에서 절대적인 격차가 난다면 100% 지킨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위가 가만히 있다면 몰라도 위 역시 목적은 다른 곳에 진공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다. 원자(袁子)에서도 제갈량의 북벌은 소국의 입장에서 가만히 있으면 국력 차이로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위의 국력은 너무 막강해서 잠자코 있다가는 점점 차이가 벌어져서 언젠가는 위의 침공으로 멸망할 미래밖에 없으므로,[50] 가만히 있기보단 좋든싫든 북벌로 명운을 걸어볼 필요가 있었다. 촉은 중앙 집권과 관료제의 정비가 잘 되어 있어서 효율적으로 국력을 운용했기 때문에 그나마 위나라와 정면대결을 할 건덕지라도 나왔지, 위가 제대로 내부를 수습하고 국력을 효율적으로 끌러 올린다면 촉의 열세는 필연이었다.

여기에 질적 우위까지도 위나라의 편이다. 당시 시점에서 촉, 오의 영토는 개발이 덜 된 지역이라 교육 같은 부분의 인프라가 위나라에 비해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위나라의 영토에는 여러 명문가와 호족들의 기반이 있기도 했다. 게다가 남방의 기후, 습도 등으로 촉, 오의 많은 인재들은 병으로 요절했던 반면, 위나라의 인재들은 정말로 오래오래 앉았다. 유비가 전국을 누비면서 긁어모았던 인재들은 하나 둘씩 노환 혹은 부적응으로 죽어가고, 여기에 이릉대전으로 상당수가 전사했거나 위나라에 투항했으니 인재 사정은 장기전으로 갈수록 촉한에 불리하게 된다.

조위와 서진이 조예 이후로 고평릉 사변, 조모 시해, 팔왕의 난, 5호 16국 시대가 차례로 일어나는 막장 테크를 타긴 하지만, 위나라는 이 막대한 페널티를 달고도 촉과 오보다 국력이 강했다. 강유의 북벌 시대까지 이어보면 사마의, 사마부 형제의 관서 진흥책이 성과를 보고 곽회가 계속 관중 지역의 행정력을 확대함으로써 강유가 매우 고전하는 장면들이 연이어 나오는데, 강유의 북벌 시기조차 위는 안정된 상황이 아니었다. 사마씨로 인한 정치 혼란, 그리고 이에 따른 수춘 3반란, 강유, 왕사 등의 농서의 강저족 회유 등이 있어 그래도 북벌을 해 볼만한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제갈량 죽을 때 까지는 조예가 제정신이었으니 저 막장 사태를 예견했을 리도 없는 제갈량의 경우엔 견제할 필요성을 더 크게 느꼈을 테고.

하지만 북벌은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고 촉과 위의 국력 차는 제갈량 이후에도 계속 벌어지게 되어 촉은 위에게 멸망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장기적으로 북벌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안하면 죽는 환경이라 죽으나 사나 북벌을 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또 위나라 역시 제갈량 사후 촉한이 침공하지 않자 오히려 대군을 이용해 한중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위나라 역시 언제든지 촉한이 그냥 가만히 있을 경우 막강한 물량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촉한의 북벌은 양국간 주 전장을 촉한 외부인 옹, 양주로 두는 일종의 예방전쟁적인 성격도 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6. 기타

6.1. 북벌에 참전한 사람

6.1.1. 촉한

6.1.2. 조위

6.2. 한고조와의 비교

기본적으로 제갈량의 북벌은 한 고조의 선례를 따른것으로 초한 쟁패 시절 한신을 얻고 북벌을 한 한 고조의 행적과, 삼국 시대 위나라에 대한 제갈량의 북벌은 언뜻 비슷해보여서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경우도 왕왕 있으나 실제론 이 두 북벌은 기본적인 상황에서부터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함양을 정복한 항우는 곧바로 공과에 따라 자신을 따른 세력들을 중원 각지의 제후로 임명하는 18 제후왕 분봉을 시행하는데 한 고조는 파촉 지방을 다스리는 한왕으로 임명된다. 이에 한 고조는 낙담했고, 수하 장병들 중에는 도망가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엄청난 오지로 들어가는 듯 하지만. 파-촉의 군주가 되고 유방이 정한 도읍지는 남정(南鄭)인데 바로 한중 지역이다. 남정의 위치를 지도에서 살펴보면 알겠지만, 훗날의 성도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한 고조는 자기 생전에 훗날 익주 중심부가 되는 쓰촨 성 지역은 아예 가 본 적도 없다. 어디까지나 익주 외곽이 되는 한중, 섬서 성 지역에 머물렀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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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정'은 한중에 위치해 있어서 훗날 제갈량의 북벌에서는 '북벌을 시작하는 최전방 군사 기지' 역할을 한다.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리고 군수 물자와 병력을 잔뜩 끌고 남정까지 온 다음 거기서 짐을 풀고 기지를 만들고 장수들과 향후 움직임을 논의하는 상황으로, 삼국시대 때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후방인 수도 성도에서 멀리 떨어진, 전방 지역이었는데, 수백 년 전의 한 고조에게 그 변경은 '왕이 사는 수도'였다. 때문에 당장의 군사 작전은 똑같이 남정에서 시작한다 한들, 여러모로 그 양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삼국시대 기준에서 보면 '파촉으로 통하는 입구'에 지나지 않는 한중의 남정이, 초한 쟁패 시기에서는 정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오지 중의 오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유방은 엄청 화가 난 나머지 전력에서 상대조차 되지 않음에도 이판사판으로 싸워보려고까지 하다가 소하의 설득으로 그만두었다. 남정으로 보내는 쪽이나, 남정으로 가는 쪽이나 남정을 '사람으로서 갈 수 없는 곳'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는 이야기[53]. 만약 이런 초한 쟁패 시대에 유방보고 "너 성도 지역으로 가라"라고 했으면, 유방은 정말로 바로 전투를 벌였을지도 모른다. 그야 경상도 왕으로 만들어준다해놓고 울릉도 왕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럴수밖에 그만큼 당대의 익주 지역이 외진 곳으로 여겨졌다는 것. 물론 촉 지방에 아예 문명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화양국지나 기타 기록에도 보이듯이 촉 지방에는 아주 오래된 문명 국가가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느냐면, 삼성퇴 문명을 비롯해 독자적 청동기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고, 목야 대전 때 숟가락을 얹었다든가, 상나라 시절 갑골문에도 '촉을 쳐야 하는가'라는 점을 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으며 춘추전국시대에도 이 촉 지방의 나라가 초나라를 친적도 있고, 진나라와 싸우기도 했던 역사가 있었다.

다만 한참 기세를 올리던 진나라에서 '서쪽과 중원, 어느 쪽을 먼저 쳐야 할까'하는 논의를 하던 중, 진나라의 재상 장의가 '이런 곳과 전쟁을 하는 건 중원에서의 왕업에서 멀어지는 일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이에 반대하여 '촉을 쳐서 그 이익을 취한 다음 중원을 공격하는 게 좋다'라고 주장한 사마착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으니 그래도 오지 중 오지라는 인식이 강했다. 후일 이 지역에 도강언이 세워지고 진나라의 배후지로서 기능했을 때조차도 이곳은 오지로 여겨졌는데 당장 여불위의 자손들이 이주 당한 곳도 후일 익주의 남중 지역으로, 삼국 시대 때 촉한의 관헌 여개가 여불위의 자손이다.

실제 유방이 파촉 깊숙한 곳은 고사하고 남정에 머무른 시기만 해도 길게 잡아봐야 3~4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18 제후왕 분봉을 해서 각지의 왕들을 봉한 시기는 BC 206년 2월. 유방이 파촉에 입성한 것은 4월. 그리고 진창 고도를 통해 군사를 이끌고 옹왕 장한을 쳤던 것은 BC 206년 8월,[54] 유방이 분봉 조치를 받아, 과거의 그 험한 길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해) 남정까지 터벅터벅 가서 도착하고, 최소한의 기반이라도 마련하는 데 한달 정도를 잡고, 전투 준비를 전투 시작 한 달 전 무렵에는 대략 끝내놓았다고 보면, 여유있는 준비 기간은 BC 206년 3~7월 정도, 즉 겨우 4개월 정도인데, 이것도 도착하고 한숨 놓은 뒤 곧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고 타이트하게 잡았을 때이다. 실제로는 매일매일 수많은 제장들이 도망가고 군대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기록도 있었으니, 실제로 뭔가 준비가 된건 한신이 대장군이 되고 나서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즉, 한신을 등용하고 바로 곧장 치고 나선거나 다름이 없는 것. 한신은 "천하가 평화로워진 다음에 싸움을 건다면 백성들은 항우가 아니라 우리를 원망할 것이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우리 쪽 사람들의 예봉 또한 꺾이게 된다."며 즉시 동진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를 유방이 받아들인다.

물론 현지의 기반을 이용하기 위해 아예 아무것도 안한건 아닌데 자치통감 한기를 보면
'이에 한왕은 크게 기뻐하고 스스로 한신을 얻은 것이 늦었다고 여기고, 드디어 한신의 계책을 듣고서 제장들이 공격할 부서를 정하였는데, 소하를 남겨두어 파와 촉의 조세를 거두어 군사에 양식을 공급하게 했다.'

라는 언급이 있어, 소하가 해당 작업에 착수하긴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방이 자신에게 협조한 판순만 일곱 씨족에 대해 일체의 세금을 면제시켰고, 나머지도 겨우 1인당 40전을 냈다는 언급을 보면 그리 빡빡하게 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들에게 불만을 사서 뒤가 불안해지는 상황도 위험했을테고. 촉 지방에 항구적인 거점-국가를 건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반세기 가깝게 싸운 제갈량의 촉나라와는 달리 한 고조는 그 촉나라의 '입구'에 지나지 않는 남정 부근에서 잠깐 몇개월 머물렀을 뿐이다. 제갈량의 북벌이 촉의 인적 자원과 물리적 자원을 꼼꼼히 챙기고 끌어들이고 체계적으로 싸운 전투라면, 유방의 경우는 '왕부터 졸병에 이르기까지 전부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미칠 듯한 사람들'이 우당탕탕 한번에 끝내버린 셈.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방은 파촉 지방에서부터 떨치고 나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잠깐 거기 구경 좀 하다가' 다시 '되돌아' 온 것에 가깝다.[55] 그 와중에 협상을 통해 판순만의 이민족을 얻을 수도 있었고, 한신의 계책을 따라 옛 길을 이용해서 진군한 것도 있었고 여하간에 꽤 쉽게 여러 지역을 돌파했고, '진창'에서 장한을 상대로 한번 대승을 거두면서 그대로 돌파 할 수 있었다.

제갈량의 북벌과 비교해보도록 하자.

1차 북벌 당시 제갈량이 진창을 거치지 않고 기곡 방면으로 군사를 보내자 위나라는 지체없이 조진을 파견해 바로 저지에 나섰다. 진창 방면으로 가진 않았지만 촉군이 진창 정도 위치로 북상하기도 전에 위나라 쪽에서 빠르게 저지에 나서는 셈. 물론 관서에 대비를 안했다고 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대비면에서 차이가 있던 셈이다. 이 점이 진창까지는 아무런 감시 없이 별 어렵지 않게 진군했던 유방의 북상과는 다르다. 물론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에선 기곡 방면 진군은 속임수였고 우회군이 주공이었지만.

아예 진창 방면으로 똑같이 진군했다가 학소의 수비에 막혔던 제갈량의 2차 북벌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하다. 이번엔 진창까지 향하는 촉군을 위군이 중간에서 요격 시도를 하진 않았지만, 이 당시 위나라는 첫 북벌에서 기곡 방면에서 촉나라가 저지되었으니 '다음에는 진창으로 올 것이다'라는 판단 아래 이미 진창성의 수비를 강화하여 준비가 된 상태였고, 그런 준비를 바탕으로 버티는 와중에 왕쌍 등이 이끄는 중앙군이 지원 병력으로 속속 도착하자 제갈량은 퇴각한다. 물론 이 진창 공격 자체도 '무도/음평 공격의 사전 준비 작업 + 오나라에 가해지는 장합의 관중군의 공격'을 진창으로 돌리는 페이크였지만 이미 진창에서 위나라가 준비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유방의 북벌 당시에는 이렇다. 앞서 말했듯 남정에 자리 잡은 지 불과 3~4개월 정도 만에 곧바로 움직인 유방의 돌발적인 움직임에 고도를 이용한 루트 때문에 별 대비도 안 되어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진창까지의 이동 경로를 내주고, 장한은 진창에서 맞서 싸웠으나 대패. 유방이 남정에 자리 잡은지 3~4개월도 안 되었다는 소리는, 마찬가지로 장한 역시 삼진에 자리를 잡은지 3~4개월 정도밖에 안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막 왕으로 부임하여 주변 정리를 하기에도 정신없는 시기이다. 진창의 방비 따위를 학소만큼 제대로 했을 리가 없었고[56] 초군이 진나라를 불태우고 진왕 자영을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부린지라 그들이 세운 왕인 장한, 사마흔, 동예는 현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관중의 민심은 이 삼진의 왕을 덜 지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유방이 자신들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할 정도로 기운 상태였다. 이는 이후 유방이 초나라와의 전면전 때 관중 지역의 인원과 물자를 무리할 정도로 동원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관중의 민심이 유방을 지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또 이 학소의 수비 당시에도 학소가 제갈량을 직접 격퇴했다기보다는 버티면서 시간을 끌고 그 사이 지원병이 도착하자 제갈량이 물러났다고 한다면, 유방을 상대하는 초나라의 경우는 마침 제나라를 평정하기 위해 떠나 지원군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초군 입장에서는 기동 거리가 거의 중원 동서 끝에서 끝 정도였던 셈.

만약 '한중'만이라도 초나라의 세력권으로 남아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면 유방의 행보는 크게 제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한중을 제어한다는 것은 남정에서의 모든 군사적 움직임도 한중에서 제어한다 것이다. 유방이 군사적 행보를 시작한다면 한중 자체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넘어가버리겠지만, 그 과정에서의 불온한 행보는 곧바로 장한에게 보고되었을 테고 장한은 이를 바탕으로 좀 더 제대로된 준비가 가능했을 것이다. 유비가 한중을 전진기로로 삼고 한중이야말로 익주의 목줄이라고 한 연유도 이와 비슷한 셈이다. 그렇다고 장한이 유방을 저지해낼 수 있는가 장담할 순 없지만, 최소한 시간은 더 끌 수 있다. 그러는 사이에 동예, 사마흔 등 다른 삼진의 세력과 연계를 꿰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버티면 초군이 제나라에서의 싸움을 끝내고 올 수도 있었을 터, 유방은 진나라를 평정하며 질척거리는 싸움을 계속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한중은, 장량에게 뇌물을 받은 항백의 설득 덕에 아주 시원하게 유방에게 '그냥' 덤으로 넘어갔다.

다만 제나라 전역과 관중과의 거리가 멀어서 장한이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은 항우가 관중 지역에 남는다면 자연히 초나라 측은 항우의 보호 없이 제나라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는 의미이며, 항우가 의도했을리야 없으나 항우가 떠난 직후에 대기근이 관중을 휩쓸었기 때문에 관중 지역의 전략적 가치는 인적 자원 공급 측면을 제외하면 한동안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태가 되기도 했다. 항우의 입장에서는 신안대학살까지 벌였던 마당에 관중 땅에 남는다는 건 이러니저러니 해도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었고, 당장은 오히려 이 결정에 행운이 따라줬다고 볼 수도 있었던 것.

제갈량의 북벌 당시 촉과 위의 싸움은 각국의 '국력 싸움' 양상이었다면, 이 당시 유방의 북벌은 '제후들의 세력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나라가 초나라를 무찌르며 북벌한 게 아니라, '제후 한왕 유방'이 '제후 삼진왕 장한 및 사마흔 동예'와 싸웠던 것이다. 비록 남정에 봉해지는 와중에 유방의 군사 일부를 해산시키는 불상사가 있었으나, 유방은 당초 중원의 제후들 중 항우에 이은 2번째로 가장 큰 세력이었다. 오히려 힘으로는 어지간한 제후들은 전부 찍어누를 위치였던 것. 유방의 군단을 해산시켜 3만 명만 남겼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 3만 외에도 유방을 따르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정도로 그는 이미 영향력 있는 제후였다. 거기다 운좋게도 파 지방의 이민족 판순만의 지원군도 받을 수 있었다.

일단 제대로 방비도 되어 있지 않은 진창으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 막 옹왕이 되어 자기 세력을 제대로 만들지도 못한 장한과 일대일 싸움에서 크게 밀릴 이유도 없다. 진창에서 유방을 막아 세웠던 옹왕 장한은 본시 진나라군을 자기 세력으로 가지고 있던 장수였다. 그런데 그 병력은 거록 대전에서 왕리가 대패하며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장수들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병력도 신안대학살로 소멸했다. 장한은 자신이 본시 가지고 있던 세력은 모조리 날려버렸고, 왕으로 봉했다 한들 장한에게 주어진 3~4개월 남짓한 시간으로는 유방을 능가하는 세력을 재구성할순 없었다. 원래부터 인심을 얻지도 못하고 시간도 없어 진나라 사람들에게 협조를 구하기 어려워진 장한으로서는 자신의 세력을 크게 키우기는 커녕 왕으로 막 즉위하여 주변 정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3~4개월은 버거웠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또 '삼진'이라고 하지만, 기록으로 보면 유방과 적극적으로 싸운 사람은 오직 장한뿐이었다. 사마흔동예는 장한이 계속 패퇴하는 동안 제대로 협조를 하지도 못했고, 장한이 모조리 패퇴당한 다음에야 유방의 침공을 받고 바로 항복했다. 이들 역시 근본은 장한과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통일 중국에 대한 소속감이 없고, 초나라인으로서 초나라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인 항우가 인식하는 국경 라인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고, 이에 따라서 유방의 북벌 또한 위나라와 제갈량의 그것과 비슷해보여도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유방에게 제갈량의 북벌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건 관중 돌파가 아니라 형양 너머의 땅으로 진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 국경선 공방전은 그전과는 전혀 다른 처절한 과정을 치러야 했다.

7. 관련 문서



[1] 후출사표에 제갈량이 올린 표현 중 아주 유명한 부분이다.[2] 그나마도 이궁의 변이나 고평릉 사변, 강유의 북벌같이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있기에 그정도라도 다뤄진 것이다.[3] 나라 이름을 한나라로 한 이유가 바로 찬탈당한 헌제의 유지를 잇기 위해서다. 그러니 북벌은 나라의 존립 이유. 촉이라고 부르는 건 후세의 사람들이 편의상 부르는 거고 실제 명칭은 한이다. 물론 당시 사람들도 원래 한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촉한이나 계한 등 다른 이름을 썼지만.[4] 기본적으로 촉한은 유비, 관우라는 인물이 건국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 둘이 사망한 상태라면 내부에서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5] 맹획과 고정의 난이 대표적이다.[6] 계한보신찬[7] 촉서 장억전. 장억은 이후 월수를 재정복한다.[8] 남으로는 오나라를 상대해야 하고 다른 방면으로는 이민족들을 상대해야 했다. 북쪽에는 훗날 오호십육국 시대를 열게되는 흉노, 선비 등의 유목민이, 농서 지역에는 강족이, 요동에는 공손씨 정권이, 그 배후에는 고구려가 자리잡고 있었다.[9] 한중 태수의 치소가 있는 곳이다.[10] 정확히는 승상·녹상서사·가절·영 사례교위·익주목·개부치사[11] 다만, 이는 4차 북벌 이후에 확인되는 사항으로, 1차 북벌 당시에는 더 낮은 직책이었을 수도 있다.[12] 좌장군의 오기라는 말도 있다.[13] 이름불명[14] 제갈량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당시 촉한이 실제로 저정도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멸망시점 장부에 적힌 총병력이 10만이고 야전군은 3~5만 선에서 형성된다. 그래도 대군임은 확실하다.[15] 좌장군의 오기라고도 한다.[16] 사실상 실제 전력[17] 장합이 인손한 중앙군인 남북군[18] 조진이 파견한 비요의 군세[19] 당시 관중의 군대를 오나라 정벌을 위해 차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남북군을 보내야 했다.[20] 이를 보아 제갈량이 형 제갈근에게 언급했던 진창성 공성전의 진짜 목표인 형주의 위군압박을 해소시킨다는 목적을 장합은 간파했었던 듯 싶다.[21] 수경주 권17 《위수(渭水)》에서 인용.[22] 실제로 조진은 그렇게 생각했다.[23] 진창도를 통해 한중으로부터 안정적으로 보급을 받으면서 장안에서 오는 위의 공세를 막을 수 있고 나아가 진창의 일부 부대는 기산을 통해 올라가는 촉의 군대와 합류하여 량주를 공략할 수도 있다.[24] 즉 12월이 거의 다 끝날 때쯤에 넘어와 20일이 지나는 동안 공성하는 동안 해를 넘겨 1월 봄이 되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25] 시기상으로 2차 북벌 직후다. 두 가지 군사 활동이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삼덕은 2 ~ 4차 북벌, 위의 촉 공격 시도를 큰 틀에서 하나로 묶어서 본다.[26] 제갈량전 후주의 조서에선 둔주(遁走)케 했다고 표현한다.[27] 과거 오란이 음평으로 퇴각했을 때, 그의 목을 베어바친 자가 바로 음평의 저족 강단이었다.[28] 이 당시 진서 사마부전의 기록을 보면, 계속된 제갈량의 침공으로 군량이 부족했다고 기록하는데, 등애전엔 농서와 남안을 두고 '강족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위연과 오의의 기습 목적을 군량 탈취로 보는 시각도 있다.[29] 자오곡, 흥세, 야곡[30] 정확히는 승상·녹상서사·가절·영 사례교위·익주목·개부치사[31] 대오전선 병력을 이끌고 한중으로 북상[32] 진서 선제기는 사마의가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구인(朐䏰)에 도착하고 신풍현(新豐縣)을 함락했다. 군(軍)이 단구(丹口)에 주둔하다 비를 만나 회군했다.'라고 쓰고 있는데 문제는 저 구인이라는 곳이 한중이 아니라 파동군 구인현이고 신풍현은 경조의 신풍현밖에 없다. 지명이 틀린게 커서 그냥 차라리 자치통감 말대로 서성에서 거슬러 올라갔다라고 쓴 거 만도 못하게 되었다.[33] 호삼성은 무위가 촉한을 공격하기 위한 거점으로 보기에는 너무 멀다는 이유로 이것이 무도(武都) 내지는 건위(建威)의 오기가 아닐까 하는 견해를 제기한 바 있다.[34] 옛날 우후라는 사람이 퇴각할 때 아궁이를 늘려서 피해 없이 군사를 물린 사례.[35] 정확히는 승상·녹상서사·가절·영 사례교위·익주목·개부치사[36] 4차 북벌 이후의 관직이라서 그보다 더 낮았을 수도 있다.[37] 오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가 진서라서...[38] 다만, 당시 비요가 후장군이었으므로 관직이 달랐을 것이다.[39] 병주에 주둔하다가 가비능을 견제하기 위해 출진[40] 조위의 숙장이자 대촉전선의 거물인 장합의 전사는 향후 대촉전선을 사마의가 장악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다[41] 진나라 대에는 시평군(始平郡)[42] 정확히는 승상·녹상서사·가절·영 사례교위·익주목·개부치사[43] 전사가 아닌 병사[44] 최초 사마의가 이끌던 기병 1만과 진랑의 군세 2만[45] 왕기의 이릉 점령 방법보다 먼저다.[46] 형주가 빼앗긴 것만큼 상용을 빼앗긴 것도 타격이 컸는데 이 상용의 경우 양양과 완으로 진출할 수도 있고 장안을 견제하는 것도 가능한 군사적 요충지였다.[47] 위에 조조의 사망이라는 변수는 생겼지만 이미 앞의 3가지가 무너진 상황이었고 유비는 이릉대전을 택했다.[48] 그나마 한중 북부가 기산과 야곡 두 군데로 나뉘어 있었기에 전력을 어느정도 분산시키는게 가능했고 그랬기에 제갈량이 북벌을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던 것이다.[49] 기산 루트는 천수, 안정쪽으로 진군이 가능했고 야곡 루트는 진창이나 오장원으로 진군이 가능했다.[50] 제갈량의 조카이자 오나라의 군권 1인자인 제갈각도 숙부의 표문을 보면서 항상 비슷한 생각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51] 창작물에서는 촉 군부의 대부라 제갈량과 함께 책임을 졌다는 묘사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촉한 내에서의 제갈량의 위치는 조운이 비할바가 못된다. 1차 북벌 당시 각 전선의 책임자가 가정의 마속, 기산 및 북벌 총책임자 제갈량, 기곡의 조운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마속은 패전 자체보다 과정과 뒤처리에서 문제가 많았기에 처형당했고 제갈량은 총책임자로 북벌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조운도 기곡에서 패전했기에 벼슬이 깎인 것이다. 흔히 묘사되듯이 정말 스스로 벼슬을 깎았어도 조운 본인의 원칙 중시 성향을 보면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52] 반란이라고는 해도 관리들과의 마찰로 일어난 소요 수준이었다.[53] 다만 남정까지만 해도 어쨌건 중화인들이 사는 영토였고, 익주는 당시에는 중화인이 아닌 이민족들이 사는 땅이었다. 남정이라는 이름의 유래 자체도 서주 시절 옹주 지방에 분봉받았던 정나라가 서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같이 쑥대밭이 되었고, 이 유민들이 정착했던 곳이기에 붙은 것이다.[54] 한서 고제기에 따르면 5월로, 파촉으로 들어간지 겨우 한 달 후이다.[55]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항우에게 보여주기 위해 "저 지금 파촉왕 하고 있쪄염."하는 식. 물론 안 그랬으면 항우가 보낸 추격자들에게 당했을 테니까 어쩔 수 없었다.[56] 다만 옹주 변방도시 1정도 수준의 위상이었던 위나라 시기의 진창과는 달리, 당시의 진창은 진나라의 옛 수도로 어찌됐건 옹주 전체에서 알아주는 도시였으므로 기본적인 인프라 자체는 상대적으로 더 잘 깔려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옹주의 어원이 된 옹이 진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