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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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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세 전투
興勢之戰
시기 244년 3월 ~ 244년 5월
장소 낙곡,[1] 흥세산[2]
원인 조상의 공명심
교전 조위 촉한
황제 황제 조방 황제 유선
지휘관 대장군 조상
정서장군 하후현
대장군 비의
진북장군 왕평
장수 양위
이승
등양
곽회
사마소
하후패
유민
등지
마충
두기
왕림[3]
병력 최소 6만~10만 이상 3만 명 + @[4]
피해 사상자 다수 발생
군수물자 대량 망실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촉한의 대승, 위군의 퇴각
영향 조상의 권위 추락.
조위, 20년간 방어로 일관.
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의의 집권

1. 개요
1.1. 명칭에 대해
2. 배경3. 전개
3.1. 위군의 출병3.2. 촉군의 대응3.3. 위군의 고전과 후퇴
4. 결과
4.1. 조위4.2. 촉한
5. 기타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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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244년 조상이 이끄는 군이 의 한중을 공격하여 벌어진 전투. 이 전투 이후 벌어진 고평릉 사변과 그에 따른 정치적 혼란으로 위는 20년 동안 촉의 공격을 방어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일부에서는 '대전'이라고까지 부를 정도로 중요한 전투이나 삼국지연의에서는 다뤄지지 않는다.[5]

전투의 정식 명칭은 다음과 같다.

1.1. 명칭에 대해

한 때 흥세 전투는 한국 인터넷에서 2012년 말경에 리그베다 위키의 서술로 왜곡된 "낙곡대전"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한국 인터넷에서만 사용되었던 명칭이다.

역사서 기준으로도 낙곡대전이 아닌 흥세 전투라고 부르는 게 맞는데, 정사 삼국지에는 흥세의 역(興勢之役)으로 기록되었다.
흥세 전투에 이르러 왕평이 조상을 막은 것도 다 이 제도를 계승했다.
興勢之役,王平捍拒曹爽,皆承此制。
삼국지 촉서 강유전

현대 학계 기준으로도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6]과는 달리, 흥세 전투는 영향력이 부족해서 대전으로 불리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럼에도 한때 저기에 낙곡대전을 집어넣어 4대 대전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흥세 전투가 조상의 실각, 사마씨 집권, 나아가 서진의 건국을 가능케 한 전투라는 것이 그 이유. 하지만 한중 공방전, 형주 공방전, 석정 전투 등 흥세 전투보다 규모나 영향력, 혹은 유명세 등에서 훨씬 더한 전투가 많았으며 흥세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판세를 뒤집지 못했고 정치적으로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정도에 불과했기에 삼국의 정세를 뒤흔든 대전과 같은 선상에 두는 건 무리이다.

원래 2012년까지는 한국의 삼국지 팬덤도 흥세 전투를 외국처럼 "흥세 전투" 혹은 "흥세산 전투"라고 불렀다. 하지만 2012년 말에 삼국지 갤러리에서 안 좋은 의미로 유명한 유저가 리그베다 위키를 통해 갑자기 낙곡대전이라는 제목으로 문서를 생성해서 해당 명칭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여기에 왕평에 대한 재평가[7]가 이루어지면서 오해가 바로잡히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더 스케일이 커져 아예 대전 취급까지 받게 되다보니 유독 한국에서만 낙곡대전이라는 명칭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8]

2. 배경

2.1. 조위

위명제 조예는 239년에 죽으면서 조상사마의에게 차기 황제인 조방의 보좌를 부탁했다. 조방의 출신 성분이 확실치 않은데다가[9] 나이도 어려 위 황실의 상황은 불안정했다. 더군다나 조상은 처음에는 겸손한 태도를 취했으나,[10]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했고 사마의를 최고위직이지만 실권은 없는 태부로 임명하여 그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상은 어디까지나 낙하산에 불과했으며, 위나라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은 제갈량의 북벌을 막은 사마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조상 본인은 물론이고, 그의 심복인 등양, 이승 등은 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2.2. 촉한

234년 군정 양면의 최고 책임자였던 재상 제갈량의 사망 후 촉한은 각종 내우를 겪었지만, 제갈량의 후임인 대사마 장완이 이를 잘 수습했다. 이후 장완은 수로를 이용한 대규모 북벌을 기획하기도 했으나 본인의 지병으로 인해 흐지부지되었고, 그로 인해 촉한의 공세는 상당히 둔화되었다.

3. 전개

3.1. 위군의 출병

조상이 출병을 결정한 데는 두 가지 정치적 원인과 한 가지 군사적 동기가 있었다. 첫 번째 정치적 원인은 조상의 약한 군부 내 입지였다. 심복들은 을 성공적으로 공략하면 조상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이라고 봤고, 조상도 이에 동의했다. 다른 정치적 동기는 제갈량 사후 촉의 하락한 위상이었다. 이전부터 조상은 사마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걸핏하면 촉을 치려고 했다.[11] 군사적 원인은 바로 한중에 주둔하던 촉군의 규모가 불과 3만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한중에 주둔하는 촉군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조상은 싸우면 거의 이긴다고 오판하고 말았다.

사마의는 두 번이나 한중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며 출전을 만류했지만,[12] 조상은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였다. 결국 244년에 조상은 정서장군 하후현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촉한 정벌군을 편성했다. 왕평전과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상은 10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 한중을 침공했다. 조상전에 따르면 장안에서 징집한 관중군이 6-7만이었다고 하니, 대촉전에서 잔뼈가 굵은 곽회의 병사는 3-4만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후현, 곽회, 하후패,[13] 사마소[14] 외에 자신의 측근도 종군하게 했다.

조상은 군을 둘로 나누어, 주공은 하후현이 이끄는 본대가 담당하고 곽회의 군에게는 조공을 맡겼다. 기본 전략은 본대와 다수의 이민족 보급부대가 당락도[15]로 진격하고, 곽회는 기산도로 진격해 두 방향에서 한중을 압박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곽회가 선봉이긴 했으나 이후 곽회는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었던 반면 조상 본대는 그렇지 못했거니와, 곽회는 옹주자사였으니 옹주군을 동원해 그쪽 방향으로 치고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3.2. 촉군의 대응

당시 한중의 지휘관은 진북장군 겸 감군이었던 왕평이었다. 제장들은 한중 수비군의 규모가 3만도 되지 않았기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군 10만이 쳐들어온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대부분의 장수는 적을 깊숙이 끌어들여 한중의 양 날개인 한성, 낙성과 천험의 요새인 양평관에서 막으면서 한중의 중심도시 남정에서 장완이 주둔하고 있는 부릉의 지원군을 기다리자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왕평은 고지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위군을 막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호군 유민(장완의 사촌동생)을 낙곡의 길목인 흥세산으로 보내 100리에 걸쳐 군기를 꽂아놓는 허장성세를 지시하고, 본인은 낙곡의 출구에 위치한 황금성에 정예군 1천과 함께 주둔했다.

왕평의 전략이 적중하여 위군 본대의 진격은 크게 둔화되었다. 수적으로 크게 밀리는 악조건 아래에서도 촉군의 방비는 철통과도 같아 위군의 공격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왕평은 밤을 틈타 소수의 병력으로 야습을 시도하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위군을 몰아붙였고, 위군 본대의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갔다.

조상이 촉한 토벌에 나서자 옹주자사인 곽회는 군사들을 지휘하여 선봉이 되었다고 하는데, 직위가 직위인 만큼 옹주군을 이끌고 한중에서 진령산맥을 넘는 길 중 가장 평탄하고 넓은 기산도로 3-4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진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기서 촉군과 곽회군이 대규모로 맞붙었다는 기사는 없는데, 하후현이 이끌고 있는 본대가 촉의 방어선을 무너뜨리지 못하면 곽회군이 촉의 방어선을 돌파한다 해도 적지에서 고립될 수 있었다(가정 전투에서 산 위에 진을 친 마속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런 이유로 곽회는 본대가 낙곡을 뜷었다는 소식이 올 때까지는 상황을 관망하기로 하고 진영을 짜고 기다린 것으로 보인다.

3.3. 위군의 고전과 후퇴

5월에 들어 위군은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심각한 보급 문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조상은 위에 복속되어 있던 강족저족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하도록 명했는데, 한중의 지리적 험난함은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험악하여 희생자가 속출했다. 자치통감과 조상전을 인용하자면, "군량 수송 중에 소, 말, 노새가 죽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울부짖는 백성이 길을 가득 메웠다."[16]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조상의 진영에서는 퇴각 문제를 두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여 참모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양위는 조상에게 형세를 설명하고, 빨리 퇴각하지 않으면 패할 것이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등양과 이승은 이를 반대하여 양위와 다투었고, 분노한 양위는 등양과 이승은 장차 나랏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니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한편 곽회는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퇴각했다. 덕분에 곽회가 이끄는 군대는 크게 패하지 않았으며, 때문에 곽회는 부절(권위를 상징하는 증표)까지 수여받았다.

결국 보다 못한 사마의는 하후현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마의는 과거 조조도 장로 정벌과 한중 공방전 때문에 두 번 한중을 공략했지만 엄청난 손실을 겪었고 현재는 촉한군이 흥세라는 험악한 지형을 먼저 점거했으므로 진격은 커녕 후퇴에도 엄청난 손실을 겪을 것이니 빨리 후퇴하라고 재촉했다.

사마의의 편지를 받은 하후현은 이를 조상에게 알렸지만, 위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비의의 대규모 지원군이 한중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조상은 퇴각을 지시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위군은 굶주리고 지쳤으며, 비의는 촉군만이 아는 샛길을 이용해 낙곡의 심령, 아령, 분수령을 점거하여 길목을 모조리 차단해 위군을 고립시켰다. 조상은 필사적으로 싸워 퇴각로를 뚫고 도망갔지만 위군은 실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고, 특히 수송대는 대부분 죽거나 실종되어 이민족들이 위를 원망했다.

4. 결과

4.1. 조위

이 패전으로 조위는 상당한 군사적 손실을 입었다. 《자치통감》은 "잃고 죽은 자가 많았고 관중이 텅 비었다"고 서술했으며, 《한진춘추》에 따르면 "동관 오른편으로는 인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조공에 나선 곽회의 군대는 몰라도 조상의 본대는 수뇌부조차 간신히 도망갔을 정도니 피해가 컸을 것이고, 대놓고 거의 전멸했다는 수송대와 치중대의 피해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주요 장수는 단 한 명도 전사하지 않았고, 다른 대전에서는 특정 세력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문구가 있는데 비해 흥세 전투에 관한 서술은 비교적 가벼운(?) 표현이 쓰이기는 했다. 하지만 만 단위의 병력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죽은 것도 사실이기에, 위나라는 이후 약 20년 동안 촉한의 공격에 대해 수세로만 일관했다.

정치적으로는 더욱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바로 흥세 전투가 위나라 멸망의 불씨를 당겼기 때문이다. 조상은 자신이 계획하고 실행한 원정이 참극으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하지 않은채 전횡을 일삼았다. 때문에 조상은 군부에서의 입지를 다지기는 커녕 영향력을 잃었고, 이는 고평릉 사변과 조위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흥세 전투만 아니었다면 조상의 실각은 늦어졌을 것이고, 사마의는 그동안 장성한 조방[17]을 꼭두각시로 만들기는 커녕 신하로 남아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고평릉 사변의 성공은 조위 최고의 대영웅 사마의의 권위에 달려 있었는데, 사마의가 죽었다면 그러한 정변 자체가 없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18]

나아가 흥세 전투는 위나라가 이민족을 대대적으로 동원한 최후의 전투이자, 한족의 이민족 견제 약화가 가속화된 시점이다. 삼국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특이하리만큼 이민족을 잘 관리한 시대였다. 하지만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여 서방과 남방을 견제한 촉한과는 달리, 위나라는 거의 무력에 의존하여 북방을 통제했다. 조조가 오환족을 토벌하여 답돈을 참수하고, 남흉노를 복속시킨 성과가 좋은 예다. 따라서 이민족들은 위나라에 대한 인식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흥세 전투로 인한 막대한 인명 손실은 이민족의 이탈을 부채질했다. 사실 위나라의 이민족 관리는 진작에 허술해지고 있었다. 문제 조비의 재위 기간 동안 수도를 옮기는 바람에, 조조가 토벌하고 하북에 재정착시킨 이민족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후반에는 공손연의 난을 비롯한 하북 지역의 반란이 이민족의 침입을 허용했다. 따라서 서진이 멸망할 때까지 이민족에 대한 통제는 느슨해져만 갔다. 서진 시기 독발수기능의 난은 이러한 배경을 지녔다.

한편 이 흥세 전투는 한국사와도 간접적으로나마 관련이 있다. 조상 정권은 이렇게 낙곡에서 대판 말아먹은 후에 정권 유지를 위해 고구려마한을 건드리게 되었다. 고구려는 위나라 입장에서 봤을 때 본디 낙랑군의 관할이었던 동예와 옥저를 지배하고 있었고, 마한은 대방군과 황해도 남부 및 경기 북부 일대를 놓고 세력권 및 무역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었기에 이 방면에서 위나라는 어떤 식으로든 현안을 중원 제국 입장에서 관철시킬 필요가 있었다. 해서 고구려와는 비류수 전투, 마한과는 기리영 전투를 벌였는데 두 번 다 위나라가 이겨서 하락세였던 분위기는 다소나마 반전하게 된다. 비류수 전투에서는 동천왕의 전술적인 판단 미스를 틈타 예상치 못한 압승을 거둬 동예와 옥저 관할권을 고구려에게서 빼앗아 꽤 오랫동안 거의 마비 상태였던 위나라-진한간 직교역 경로를 반쯤 뚫어 이후 마한에게 국력을 투사할 여유를 만들어냈다. 반면 기리영 전투에서는 마한이 고구려보다 약체였음에도 위나라측이 너무 마한을 얕본 나머지 결과 자체는 거의 양패구상이었으나 어쨌든 목지국과 신분활국에게 큰 타격을 주는 데 성공했고, 위나라-진한간 직교역 경로를 완전히 복원하는 건 물론 황해도, 강원도, 경기 북부를 놓고 마한과 갈등을 벌이던 지역 모두를 위나라 관할로 하는데 성공했다.[19]

4.2. 촉한

대승을 거둔 촉한은 정치적인 연유로 공세에 나서지 않았다. 지병에 시달리던 장완이 246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비의가 권력을 승계했고, 비의는 북벌에 소극적이었기에 흥세산 전투의 결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253년에 비의가 암살당하고 강유가 북벌의 총책임자가 될 때까지 위와 촉한 사이에 이와 같은 대규모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장완 사후 강유의 주장대로 강족과 연계해 북벌을 시작했어야 한다는 의견[20]이 자주 나오지만, 장완 사후의 촉한은 여러 모로 북벌에 나서기 힘든 상황이었다.[21] 장완 사후 비의가 1인자로 입지를 다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비의 자신은 자신이나 주변인은 제갈량보다 역량이 부족했다고 봤다. 나아가 외교가였던 비의는 동맹국인 오나라의 당시 혼란상 때문에 경솔하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상술했듯이 위나라가 크게 손해를 보긴 했지만 대전만큼의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기에, 안팎으로 혼란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함부로 대군을 일으켰다가는 오히려 촉한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비수대전에서 승리한 동진이 영토를 넓힌 예시를 들며 아쉽다는 관점도 있지만, 비수대전 당시 동진은 촉한과 손오의 영토를 아우르고 있었다. 때문에 국력이 훨씬 뒤떨어지는 촉한의 북벌이 성공할 확률은 낮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손오와의 연계도 할 수 없었던 게, 이궁지쟁을 한창 겪고 있을 시기였으므로 제대로 된 협공 가능성은 없다시피했다.[22]

5. 기타 창작물에서

촉한이 위를 상대로 거둔 대승인데다 삼국지 후반부 흐름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예 사망과 조상 집권 후 곧바로 고평릉 사변으로 넘어간다. 내용이 통째로 생략된 이유는 나관중 본인만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연의는 제갈량 사후를 그다지 자세히 다루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23] 대체적으로 사마의를 제외하곤 조상, 곽회, 왕평, 비의 등 연의 기준 낯선 인물들이 주로 활약하는 장면이라는 점이 흥세산 전투가 다뤄지지 않은 이유로 추측된다.

비슷한 이유로 84부작 삼국지삼국 등 드라마에서도 생략되었다. 삼국의 경우는 마지막 화에 와서야 조방이 등장하는 등 사마의를 최후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버리기 때문에 뭔가 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내용들이 들어가서는 안 되니 고평릉 사변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결말을 내레이션 처리라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나마 대군사 사마의에서 묘사되기는 했지만, 이 역시 조상 일파가 정적의 약점을 잡기 위해 불가능한 전쟁임을 알면서도 이들의 눈을 속이고자 거짓으로 벌인 전쟁이라는 식으로 상당히 왜곡되어서 묘사되었다.

5.1.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6에서 독자 세력이 된 진의 스토리 모드에서 '촉 토벌전'이라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조작무장은 사마소. 대장군 조상이 등애와 사마소의 진언을 무시하고 병량고 습격을 지시했다가 야습, 복병, 화계종합선물세트에 당해서 엉망이 된 위군을 수습하여 퇴각하는 것이 목표. 상냥한 왕원희와 함께라면 두렵지 않아

진삼국무쌍7에서는 '흥세산 전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지휘관은 여전히 조상. 플레이어블 무장은 사마의가 보낸 사마사, 사마소, 가충, 장춘화. 당연하지만 사마 가문 사람들 모두 조상이 능력 없는 장군이고 지금 생각 중인 작전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전투 시작전부터 불만이 쌓여 있는 상태로 나온다. 특히 장춘화와 가충은 그 성격상 정말 작정하고 조상을 깐다(…).

걱정 그대로 시작하자마자 조상은 닥돌하다가 촉군의 계략에 걸려서 본진이 털리고 화계에 당하면서 위군은 대패, 퇴각하기로 결정하고 짐덩어리 조상을 호위해서 탈출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승리 목표다. 탈출지점에 갈 때까지 쉴새없이 나타나서 공격하는 촉군의 장수들은 덤. 장춘화나 가충으로 진행하면 탈출지점까지 가는 와중에도 조상을 까댄다(…).

진삼국무쌍6진삼국무쌍7에서 흥세산 전투정 그대로 시작하자마자 조상은 닥돌하다가 촉군의 계략에 걸려서 본진이 털리고 화계에 당하면서 위군은 대패, 퇴각하기로 결정하고 짐덩어리 조상을 호위해서 탈출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승리 목표다. 탈출지점에 갈 때까지 쉴새없이 나타나서 공격하는 촉군의 장수들은 덤. 장춘화나 가충으로 진행하면 탈출지점까지 가는 와중에도 조상을 까댄다(…).

진삼국무쌍6진삼국무쌍7에서 흥세산 전투에서 조상을 격파한 왕평은 조상이 지시한 기습 지역인 군량고를 지키고 패배한 위군을 추격할 때 탈출 경로로 도착하기 직전에 강유가 퇴로를 끊는 것이 아닌 마대가 가로막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마대가 총대장으로 설정되며, 마대를 격파해야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된다.

5.2. 삼국전투기

웹툰 작가 최훈의 웹툰 삼국전투기에서는 당시 엔하, 나무위키를 통해 널리 퍼진 왜곡된 명칭인 '낙곡 전투'라는 제목과 함께 다루어졌다.

조상 일당이 자신들의 지지율이 좀처럼 오르지 않자 전쟁 한번 크게 이기면 된다며 한중의 병력이 3만 밖에 안된다는 정보를 입수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마의가 원정 계획을 두고 '바보짓이다'라고 일축하지만 하후현을 정서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결국 출전하고 만다. 여기에 사마소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사마소가 친구따라 참전했다고 보고하는 사마사에게 조상 일당의 원정을 술잔에 술을 부어서 구멍을 뚫으려는 것으로 비유하며 당장은 촉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사마사는 부친의 술잔을 벽에 집어던져 박살내버린다 사마의는 촉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잔을 뚫을 수 있는 송곳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평했다. 이에 사마사는 그냥 깨버리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20년 뒤 실제로 잔을 뜷는 송곳잔 깨뜨리기가 나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3가지 루트[24]로 위군이 오는 것을 확인한 한중에서는 대책논의를 하고 여기서 두기는 왕평에게 남정에서 농성을 하자고 하지만 왕평은 지리 특성상 농성을 했다간 위군을 평지로 오게 두는 것이고 평지를 장악당하면 반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이용해 지형을 끼고 산에서 영격하기로 한다. 그런데 촉군 서열 3위임에도 문맹이라는 이유로 휘하 장수들이 왕평의 말을 안듣자 왕평은 자기 호군인 유민에게 낙곡 출구인 흥세산을 점거하고 버티라고 지시한다.

한편 적의 방어선이 있는 고지를 공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는 내레이션과 함께그 와중에 적진의 고지에서 진을 치다 망한 마속을 깠다 조상군은 공격은 고사하고 험난한 낙곡을 오르느라 조상은 물론 병사들, 온갖 군수물자를 나르던 셰르파백성들까지 모두 죽을 고생을 해서 흥세산 앞까지 올라오지만 흥세산은 이미 유민이 점거한 상태였다. 유민은 최소병력으로 깃발만 세우고 있었지만, 가뜩이나 힘들게 올라온 조상군은 전의를 상실한다. 실전경험이 없는 하후현이 절망하고 있을 동안 사마의는 경험의 문제라며 실전 경험이 없으니 촉의 험난한 지형을 알지 못하면서 요행이나 바라며 무턱대고 원정을 나선 조상 일행을 비웃는다. 그러자 옆에서 사마사가 곽회는 경험 많은 장수니 어떻게든 되지 않냐고 묻지만, 사마의는 곽회는 오랜 촉과의 전투로 아직 촉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고 곽회는 그 예측대로 군사를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곽회는 기산도로 가다가 강유가 이끄는 촉군을 보자 병력이 많은 낙곡이 뚫려야 전세가 움직인다고 판단하며 버티기 상태로 들어가고, 그것만으로도 강유를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하후패의 군대는 자오도를 통해 먼저 한중에 들어오긴 했지만, 나오자마자 왕평에게 지면서 도로 쫓겨나고 만다. 이후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에도 하후현이 미련을 못버리고 있는 사이 사마의가 곧 촉의 지원군이 올 테니 퇴로가 막히면 몰살당하니까 빨리 퇴각하라는 서신을 보낸다. 복병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비의의 원군이 도착하여 화살비+바위+추락사+군량 고갈 크리를 당한 위군은 물론 셰르파마냥 부려 먹히던 관서의 백성들과 이민족들까지 떼죽음을 당한다.

잘못된 판단은 그 대단한 위인들도 몇 번씩 저지른다는 내레이션과 그 실수를 한 지점까지가 본전이고 그 실수로부터 얼마나 빨리 돌아오느냐로 실수의 폭이 결정된다는 조조의 말과 함께 하후현의 실패를 지적한다. 비참한 꼴로 돌아온 조상 일행과 촉의 장완이 병으로 오늘 내일하는 상황을 마지막으로 흥세산 전투는 종료된다.

5.3. 조조전 온라인

사마의전(하)편에서 등장하고 조상이 자신도 군공을 세워 사마의의 병권을 빼앗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나오며, 조상은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를 인질로 삼기 위해 사마소도 데려간다. 곽회가 낙곡에서 진지를 설치하자 조상이 왜 전진하지 않냐고 하자 적군의 매복을 우려해 설치했다고 하지만 조상은 적의 원군이 오기 전에 승부를 봐야한다면서 싸우는 것을 강요한다.

곽회는 자신의 막사로 군막으로 돌아가 조상의 판단에 분노하고 사마소가 곽회에게 그저 대장군(조상)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면서 조상이 사마의의 병권을 빼앗기 위해 이런 일을 일으킨 것을 설명한다.

곽회와 사마소는 매복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선봉대가 되어 흥세로 진군하며, 선봉대가 매복된 군사가 나타나자 이를 상대하다가 더 이상 깊게 들어가면 안된다고 여겨 곽회와 사마소는 물러나기로 한다.

그러나 왕평의 지시로 서쪽에 있던 매복군과 동쪽에서 나타난 비의의 군사로 인해 후방에 있던 조상과 하후현이 포위되었으며, 조상은 서쪽의 북쪽으로 도망친다. 조상이 서쪽의 매복군을 뚫고 달아나자 비의가 북쪽에 있는 매복군을 시켜 조상을 공격하며, 조상은 목숨을 건지고 겨우 달아난다.

5.4. 대군사 사마의

조상 일파에서 첩자를 통해 사마의가 사병을 기르고 있는 것을 간파하며, 사마의가 사병을 양성해 모반을 일으켰다는 증거를 확실히 잡아 사마의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원정을 나선 것으로 나오고 해당 전투는 나오지 않고 전투 상황을 이용한 정치 암투만 등장한다.

사마소가 전농중랑장을 하면서 농사나 짓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하안은 사마소가 야심이 큰 것을 알고 일부러 조상이 이끄는 원정군에 사마소를 하후현 휘하에 배속되도록 천거한다. 사마사가 사마소에게 출정하기 직전에 사마의의 사병 30명을 사마소 휘하에 붙여준다. 조상은 하후현, 곽회, 등양 등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고 사마소에게는 3천의 병력으로 흥세에 주둔해 상황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조상이 군사들에게 몰래 지시해 촉군으로 위장해 사마소의 군영을 공격했으며, 사마소가 이를 물리치고 함께 있던 이승이 추격하려 하자 사마소는 이를 멈추게 한다. 조상은 자신이 보낸 자객들이 사마소의 가노로 온 자들에게 쉽게 죽는 것을 알고 사마의의 사병임을 짐작한다. 사마소의 가노로 온 자들 중 한 명을 생포해 심문했지만 정체에 대해 발설하지 않았다고 하며, 사마소는 사마의의 사병임을 간파하면서도 비밀을 지키기 위해 조상을 욕한 가노를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조상 일파에 포로로 잡힌 1명, 연노에 맞아 죽은 1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병 28명을 모조리 죽인다.

한편 조상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철수하려고 해서 하후현이 화를 내자 조상은 하후현에게 이미 촉이 방비를 철저히 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공격을 하지 않고 퇴각하려는 것이며, 자신이 하후현보다 상관인 대장군임을 강조하며 경고한다. 그리고 하후현에게 조상이 생포한 사병을 보여주면서 사마의가 사병을 양성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하며 하후현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였지만, 조상의 심증만이 있을 뿐 물증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하후현은 그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고, 결국 조상 일파가 사마씨의 사병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건진 채로 낙양에 복귀함으로써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에서의 흥세 전투는 조상 일파가 정적의 약점을 잡기 위해 불가능한 전쟁임을 알면서도 이들의 눈을 속이고자 거짓으로 벌인 전쟁으로 표현된 셈.


[1] 지금의 섬서성 주지현 서남.[2] 지금의 섬서성 성고현 이북.[3] 왕평의 오기라는 설이 있다.[4] 비의가 이끌고 온 원군이다.[5] 이는 제갈량 사후 삼국지연의 내용이 대폭 줄어드는 것이 가장 큰데, 문제는 이로 인해 사마의가 집권하게 되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 전투가 없었거나 촉한이 졌다면 사마의는 영영 기회를 잃고 위의 신하로 남았을 것이다.[6] 삼국지에 등장하는 전투 중 이 삼대 전투만 한자 문화권에서 대전이라고 불렸다.[7] 물론 왕평은 원래부터 연의 정사 할 거 없이 훌륭한 장군이었기 때문에 아예 평가가 반전된 정도는 아니다. 다만 당시에는 마속에게 바른 말 하다가 제갈량한테 칭찬 받은 인물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8] 이를 비꼬면서 일각에서는 역시 위나라가 궤멸적 피해를 입었고 사마의의 입지가 강해지게 된 계기인 석정 전투석정대전이라 부르기도 한다.[9] 조예의 슬하에는 4남 2녀가 있었으나 모두 요절했다.[10] 모든 일을 사마의와 함께 논의하여 처리했고, 사마의를 마치 아버지처럼 섬겼을 정도였다고 한다.[11] 사실 조상 혼자 촉을 만만한 상대로 본 것은 아니었다. 유비 사망 직후 왕랑, 진군, 화흠, 제갈장 등 위나라 대신들은 제갈량에게 항복하여 위의 신하가 되라는 서신을 보냈다.[12] 당시 촉한에는 제갈량을 제외한 촉한사영 전원이 살아 있었고, 왕평강유 도 건재하던 시기였다. 즉 유비, 제갈량이라는 거물들의 부재와는 별개로 국가는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실제로 대사마 장완이 와병 중이었음에도 대장군 비의가 중앙군을 이끌고 위군을 격파했고, 시중 동윤은 성도에서 황제 유선을 보좌했다.[13] 장안에서 자오도로 나아가는 본군의 선봉이 되어 싸웠다고 하는데, 이건 230년에 벌어진 전투로 보이고, 이후에 토촉호군이 되어 원정군에 소속되면서 서쪽으로 갔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흥세 전투에 참전한 것은 확실하다.[14] 하후현의 휘하에서 부장으로 종군했다.[15] 자오도는 비가 와서 조진도 실패한 길인 데다가, 한고제 유방이 이런 길로 쫓겨나느니 항우와 싸우다 죽겠다며 울분을 터트릴 정도로 험한 길이었다. 당락도보다 더 험난한 길이 자오도이다.[16] 제갈량, 조엄 같은 쟁쟁한 인재들마저 한중 수송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유일하게 한중 수송에 대해 긍정적인 말이 적혀 있는 것은 두기뿐으로, 5천 명을 보냈으나 한 명도 탈주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7] 고평릉 사변 당시 조방은 19살로, 고명대신의 입김에서 벗어날 시기였다.[18] 때문에 차라리 위나라가 이겼더라면 서진과 오호십육국의 참상도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그건 누구도 알 수는 없고 인과 관계도 대단히 희박하다. 애초에 위나라가 이겼다는 가정도 의미가 없는 것이, 사마의가 예측한 것처럼 이 전투에서 위군의 승리 확률 자체가 매우 희박했다.[19] 육군본부 발간 《한국군사사》 제1권 참조. 다만 압승을 당한 고구려는 이후 불과 십수 년 안에 나라를 어느 정도 추스른 반면 그래도 양패구상에 가까운 결과를 이끌어낸 마한 측은 신분활국이 완전히 망해버리고 목지국도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던 나머지 휘하 거수에 불과했던 백제국의 고이왕에게 하극상을 당해 무너져내렸을 정도로 상당히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텐데 이는 고구려와 마한의 국력 차이가 원인이다. 사회 체제, 인구, 경제력, 군사력 모든 부분에서 마한이 고구려보다 상당히 약체였기 때문이다. 고구려한테 압승했으니 마한 정도면 가뿐히 제압할 수 있었을 거라 봤던 조상 정권의 오판이 물론 후세인이 보기엔 분명한 판단 미스지만 당대인 입장에서 봤을 때 그렇게 오해할 개연성은 충분했다.[20] 일례로 중국의 근대사학자인 여사면은 촉한의 멸망은 적극적으로 북벌을 추진하지 않은 장완과 비의의 책임이 크다며 강유를 옹호한 적이 있다.[21] 북벌회의론 때문에 그랬다는 시각도 있지만, 훗날 비의가 오나라까지 끌어들인 대규모 북벌을 준비할 때는 반발이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부족하다.[22] 흥세 전투가 마무리된 시기가 244년 5월인데, 오나라의 군권 제1인자인 육손이 승상에 임명된 것이 244년이고, 파면당한 시기가 245년 2월이며, 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육손 이후 군권 제1인자가 된 주연의 흥세산 전투 연도인 244년 이후 출전 기록이 246년임을 볼 때(또한, 마무의 반란을 진압한 시기가 245년 7월임을 또한 감안하자면) 당시 손오의 협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근거 또한 충분하다. 오나라가 정말 혼란한 시기가 아니었다는 분석도 있으나 군권 1인자였던데다가 오나라의 2인자였던 육손이 손권에게 정치적인 숙청을 당하는 과정에 있었음은 분명하니 촉나라가 기대할 수 있는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23] 현대에 와서야 삼국지 후반부의 내용을 흥미롭게 다룬 창작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나관중 이전부터 삼국에 대한 내용이 민간에서 인기를 끌던 내용은 언제나 유비조조, 그리고 제갈량에게 맞춰져 있었고, 모든 주요 인물이 퇴장하고 그 당시 독자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을 나관중이 과감히 잘라낸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이 흐름은 현대 창작물에도 여전히 적용된다.[24] 저 3곳 외에도 그나마 짧은 야곡으로 가는 잔도가 있었지만 위연이 태워버린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