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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15 13:08:42

가정 전투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제갈량의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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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황3. 가정 전투 이전의 전황
3.1. 가정 전투
3.1.1. 가정의 위치3.1.2. 가정고진은 진짜 '가정'인가?3.1.3. 가정 전투의 진실
4. 공성계를 사용했다는 주장5. 창작물에서

1. 개요

서기 228년[1]제갈량1차 북벌 중 가정에서 군과 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본 문서에서는 1차 북벌 전체를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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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황

가정 전투
街亭之戰
시기 228년
장소 옹주(雍州) 한양군(漢陽郡)가정(街亭)
원인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핵심 요충지 가정을 두고 벌인 전투
교전 촉한(蜀漢) 위(魏)
황제 황제 유선 황제 조예
지휘관 마속(면죽현령·성도현령·월수태수·참군) 장합(우장군[2])
장수 왕평(아문장·비장군)
이성(장군)
장휴(장군)
황습(장군)
불명
병력 불명 5만?[3]
피해 왕평의 별군 1,000명을 제외하고 궤멸 불명
결과 촉한의 가정 방어 실패
영향 제갈량의 1차 북벌 실패, 군법에 따라 마속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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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정 전투 이전의 전황

226년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위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227년에 그 유명한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을 개시한다. 제갈량이 5년간 뼈빠지게 육성한 촉군의 규모는 생각 외로 상당했던 듯한데 후주전 주석 제갈량집에 실린 유선의 하조인 '벌위조'에서는 북벌군의 규모를 20만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한진춘추에도 제갈량이 언급하길 이 지역에서 촉군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각각 유선과 제갈량 본인의 언급인 데다 위략에도 당시 관중-농서 지방에는 촉군에 대한 방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력상 촉군이 우위에 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거기에 벌위조에서는 양주의 여러 국왕들이 군대를 파견해 도왔다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말한 국왕들이란 씨족장들로서 훗날까지 위나라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힌 촉한과 이 지역 이민족인 강족과의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곽회가 이후 촉의 북벌에 호응하던 농서의 강족들을 격파한 사례가 있다.

이어서 228년 봄,[4] 미리 촉군 전체가 기곡으로 진출한다는 헛소문을 낸 이후 조운이 별동대를 이끌고 기곡으로 진출한다. 조운이 장안 등 옹주의 동쪽을 노리는 움직임을 취하자 옹주군 중 주력을 이끌던 조진의 본대가 즉각 조예의 명을 받아 미현으로 출동 조운과 맞선다. 하지만 이는 위군의 조진군을 돌리려는 훼이크였다. 그 사이 제갈량의 본대는 반대편인 서쪽으로 돌아 기산을 통해 옹주의 서쪽으로 진출한 것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5] 천수, 안정, 남안 3군이 이에 호응하여 순식간에 촉군에게 넘어가고 말았고 양주의 농서군도 동요하여 태수 유초가 한 달 내에 위나라의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관리와 주민들이 항복한다고 해버린 상태였다. 이로 인해 조운에게 붙잡혀 있는 기곡의 조진 서쪽으로 남아 있는 위군의 세력은 상규에 주둔한 곽회, 그리고 양주(서량)에 주둔한 서막만 남게 되었다. 당시 제갈량의 전략은 이렇다.
  1. 조운이 기곡에서 조진의 주력을 유인
  2. 제갈량이 기산으로 우회해 옹주 서부의 거점들을 점령
  3. 옹주 동부에 있는 위군 전력을 협격하여 격파
  4. 본래 위나라의 지배력이 강하지 않았던 관서-관중 지역 전체를 병탄
  5. 최종적으로는 장안으로 진격[6][7]

중국역대전쟁사의 설명에 따르면 조운과 등지는 기곡에서 방어전을 펼쳤다는 식으로 언급되어있는데, 후일 조운이 '적안의 군수물자를 보관하다가 겨울 하사품으로 삼으라'고 말한 촉한 영토 내 적안이 기곡 북쪽에 있다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역대전쟁사에선 여기서 기곡의 설명으로 포야도 중 태백령의 서쪽 언덕 또는 고개에 있다고 나와 있다. 이는 포야도(남쪽 포중에서 출발하여 븍쪽 오장원으로 나오는 길을 말한다고 이해하면 된다)의 포중 정북쪽에 위치한다. 즉, 저 적안을 기준으로 북쪽 촉과 위의 경계선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적안 기준으로 관중 방향으로 기곡 전투가 있다고 보면 된다.

제갈량이 기산에서 가정을 점거하려 했던 이유는 위군의 증원군을 차단함으로써 현지 위군과의 대치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촉군과 위군이 제대로 맞닥뜨릴 수 있는 곳은 가정이 거의 유일하고 이 길목만 잘 지키면 그동안 제갈량의 본대가 옹, 양주를 확실히 점거할 수 있는 것. 여기에서 제갈량이 조운의 군대를 나눈 또 하나의 이유가 보이는데, 제갈량의 본대가 천수 등을 점령하는 사이 조진의 본대가 한중을 점거하는 뒷치기 상황을 예방하는 것이고 다른 이유는 조진의 본대가 미친 척하며 험한 산길을 통과해 천수로 향하는 변수를 모두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제갈량은 본인과 마속이 기산과 가정 소로를 막고 조운과 등지는 그 남쪽 루트를 막아 진창과 미성에 조진을 묶어둠으로써, 진창에서 기곡이나 야곡으로 내려와 기산 쪽의 무도군을 경유해 상규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제갈량 본진의 뒤를 치지 못하도록 방비함은 물론, 한중을 보호하는 완충 역할까지 떠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마속이 가정을 무사히 지켜내고 옹양주를 말끔히 평정하였다면 그 다음 순서는 진창과 미성이었을 것이다. 그 두 곳까지 빼앗길 경우 부풍군 바로 위쪽에 안정군이 위치하는 만큼 장안이 바로 코앞이어서 관동이 진동함은 물론, 위나라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제갈량이 천수로 가는 길이 기산도고 도로에서 군대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은 기산, 다음이 천수다. 게임처럼 그냥 길에다가 놔둔다고 군대가 있는 건 아니고 군대가 머무를 곳을 만들어야 하는데 1차가 기산이고 천수(상규)를 함락시키면 2차가 된다. 그 이후는 농서 쪽 서막 조지기부터 해서, 다지기를 해나갈 작정이었을 것이다.

또 제갈량은 가정이 장합을 상대로 버티고 있는 그 기간 동안에 기곡에서 조진과 맞서는 조운과 등지의 부대, 그리고 가정에서 장합과 대치하는 마속 군이 위군이 전투력을 유지하면서 천수에서 촉군과 대치하고 있는 위군과 합류하는 걸 방해하는 동안, 서쪽의 천수, 남안, 그리고 한 달 후에 합류할 농서 현지 3개 군의 호족과 강, 저 등의 이민족들이 모이고, 가정 북동쪽을 진수하고 있는 안정군이 버텨주는 사이 제갈량 본대 자체가 수비전에 대비하여 포진 및 상규 함락으로 기타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위군을 맞이해 싸워, 그때까지 점령한 지역을 비롯한 농우 일대, 양주까지 확고히 촉의 영토로 굳힐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위나라의 대응은 다음과 같았다. 조진은 조예의 명으로 야곡으로 나와서 조운이 미와 진창으로 치고 나오는 군사를 막았다. 그 사이 옹주가 촉한에 넘어가자 조예는 장합으로 하여금 5만의 보기 병력을 이끌고 가정을 지나 촉에 넘어간 3군, 특히 천수 일대에서 이 지역을 삼키려 하고 있는 제갈량을 격파할 것을 명령한다. 3군만을 탈환할 것이었으면 가정 위에 있는 안정군부터 공격해야 하나 장합은 가정을 통해 천수로 바로 진격하는 것을 우선했다, 천수에 있는 제갈량을 몰아내지 않고는 3군을 되찾을 수 없고 안정군은 제갈량에 호응한 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저길 공격하면 제갈량에게 시간을 주는 꼴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안정군 탈환은 마속이 격파되고 제갈량이 퇴각하고 조운이 후퇴한 다음에나 미현에 있던 조진이 실행한다. 또 위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창에서 바로 서남쪽 밑에 있는 산관으로 병력을 보내 촉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위진은 제갈량이 퇴각한 이후에나 장안에 도착했으므로 이 출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안에서 진창도, 기산도의 분기점까지 도달하는 게 제갈량이 기산도, 진창도 분기점에 도달하는 것보다 멀고 밑에서도 나오지만 당시 제갈량이 진창으로 통하는 남쪽 길인 수양소곡으로부터 이쪽 지역에 순찰병을 드나들게 했기 때문에 위진이 출발했다고 해도 제갈량이 3군(+농서군)을 정리하고 이를 눈치채고 방어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8]

어쨌거나 제갈량 또한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시간적/지리적으로 이곳을 선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마속에게 군대를 주어 장합을 저지하게 하고, 예비대로 열류성에 고상을 파견하여 대비를 단단히 한다. 그리고 이것이 제갈량의 결정적인 패착이 된다.

3.1. 가정 전투

파일:한중고도.jpg
한중에서 옹양주, 관중으로 나가는 고도들과 각 지점을 정리한 지도
파일:위수확대.jpg
천수에서 흐르는 위수 지역을 확대한 지도
파일:1차북벌.jpg
1차 북벌 당시 전황, 단 가정의 위치는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후술한다.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제갈량이 내린 명을 따르지 않고 군을 부적절하게 운영하였다고 하는데, 이 '부적절'의 정체는 불분명하다. 장합전에 따르면 그는 성을 점거하지 않고 산 위로 올라갔다고 한다. 선봉이었던 왕평이 여러 차례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정에 도착한 장합은 이를 보고 급수로를 끊은 후 들이쳐 마속을 궤멸시켰다. 열류성에서 가정을 백업하던 고상도 옹주 자사 곽회에게 진영이 격파당했고, 기산이 무너지자 기곡의 조운도 조진에게 패배하여 퇴각했다. 조진전에 따르면 조운의 의군을 상대로 미를 지키고 있던 조진이 마속이 가정에서 격파당한 후에 (조운과 대치하던 미에서) 안정 지역으로 움직여 월지성 등을 항복시켰다고 하므로 적어도 기곡 퇴각 시점은 가정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또, 조진전에는 그냥 마속 격파 이후 월지성으로 이동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 조운전을 보면 조진은 조운이 후퇴하자 곧바로 다른 쪽으로 이동한 게 아니라 조운군을 격멸하려는 자세를 취하나 조운은 잔도를 태우고 퇴각했다. 그 덕에 큰 피해는 입지 않았으나 강등되었고 조진은 자유로워져서 월지성까지 직접 출정하게된다.

또한 위서 서막전에 따르면 서막이 부임하자마자 보낸 금성태수에게 남안의 병력은 패배했다. 촉군은 4곳의 전장에서 모두 패했고, 마속군의 구원을 포기하고 패배를 좌시함으로서 북벌은 막을 내렸다.

어쨌거나 제갈량은 퇴각을 서둘렀다. 가정이 뚫리면 아직 점령도 다 하지 못한 천수에서 위군을 맞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미 선봉인 마속군이 대파당해 사기가 떨어진 상태로 장합이 이끄는 군과 마주해야 했다.

왕평전에서는 병사들이 산산히 흩어졌다고 하고 명제기, 장합전에도 모두 대파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정의 피해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곽충오사 중 곽충 4사엔 제갈량이 수천명을 약탈하고 강유를 사로잡아 촉인들이 축하했지만 제갈량이 정색하고 "널리 하늘 아래 한(漢)의 백성이 아닌 이가 없는데, 국가의 위력이 미치지 못해 백성들이 시랑(豺狼, 승냥이와 이리)의 주둥이에서 고통받도록 하고 있소. 한 사람이 죽어도 모두 나의 죄인데, 이 정도 일로 서로 축하한다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배송지에 따르면 제갈량이 퇴각하면서 서현[9]의 1천 가구를 뽑아(拔) 돌아왔음에도 이 손실을 보충하기엔 부족했고 제갈량이 이미 위를 병탄하려 함은 다 알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냐며 이 기록을 비판한다.[10] 다만 가정의 피해가 컸어도 그나마 수습이 가능했던 것은 왕평의 공이 컸는데 촉서 왕평전에 따르면 '군사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 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장합이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에 왕평은 천천히 여러 군영의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두고 장사들을 인솔하여 되돌아왔다.'라고 적혀있다. 기곡에서는 조운이 몸소 부대의 후미를 막았기 때문에 병력이나 물자의 손실은 패배에 비하면 적었다. 대체로 전투에서는 큰 이변이 없는 한 퇴각할 때의 피해가 가장 심각하며 또 공격받기에도 좋다.

3군의 호응을 받았으나 데려온 것은 점령했던 천수군 서현의 인구 천여 가구밖에 없었다. 큰 패배였기에 제갈량은 스스로 벼슬을 깎아 우장군으로 강등된다. 그리고 군법에 따라 마속을 참했다. 이 사건이 바로 사자성어인 읍참마속의 기원이 된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은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오자, 이후 병사와 장수의 수를 줄였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일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촉의 1차 북벌은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북벌이었으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만다. 결국 1차 북벌의 실패로 촉이 가졌던 기습의 이점은 사라지고 이후 제갈량은 매 북벌마다 위의 강력한 전략적 방어에 맞닥뜨린다.

이런 패배 중에도 제갈량에게는 강유라는 큰 인재를 얻는 소득[11]은 있었으나 아직 이 시점에서 강유의 위상은 옹주 3군에서 따라 온 여러 투항자들 가운데 제갈량에게 촉망받는 기대주 정도였다. 실제로 제갈량 사후의 직속 후계자 위치는 내정/군정 모두 장완이었고, 장완이 죽은 후 그 후임자는 비의였다. 그리고 비의가 253년 곽순에게 암살된 후 그의 후임자는 없었다. 내정에서는 그의 상서령직을 이어받은 진지가 있었지만, 그가 맡았던 대장군직은 256년까지 비게 된다. 강유가 대장군이 된 것은 256년, 적도 전투에서 왕경의 군사를 대파한 공으로 대장군이 된 것이다. 제갈량이 강유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계자인 장완 등에게 편지를 보내 훌륭한 인재라며 열심히 그를 칭찬해 항장인 강유가 촉한 정계에서 순조롭게 높은 위치에 편입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것은 강유를 당장 후계자로 삼는다는 것보다 장완 이후 촉한을 이끌만한 차세대 유망주 중 하나로 본 것에 가까울 것이다.[12]

3.1.1. 가정의 위치

파일:眞街亭.jpg
실제 가정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
이 동영상들은 일반 유튜버의 주장을 담은 것이지만 역시 해당지역을 답사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최진열 교수의 주장과 사실상 거의 같기 때문에 링크해둔다.
최 교수의 강의 동영상은 유료라서 나무위키에 올리기 부적절하여 대체하였다.
최 교수는 삼국지 본전의 손책전, 오주전(손권전) 시계열 오류와
제갈량의 오장원 전투 지명 비정 오류를 지적한 위진남북조시대 전문 동양사학자로,
최 교수의 가정 위치 비정을 유료로 살펴보고 싶다면 해당링크를 참고하라

오늘날에는 관중평원과 농서의 경계선인 육반산맥에 위치한 천수시 진안현 농성진(天水市 秦安县 陇城镇)이 옛 가정이라고 비정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특히 시진핑 중국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이 이곳을 가정이라고 인정한 덕분이 크다.[13] 그래서 오늘날의 농성진에는 '가정고전장'이라고 해서 시중쉰의 친필비석도 서 있다.[14] 본디 이 지역은 한나라 때부터 위진시대까지 약양군 가천정(略阳郡 街泉亭)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광무제외효의 전투, 오호십육국시대 독발오고 등이 싸운 옛 전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당나라 때까지는 이렇게만 알려져 있다가 가정 전투가 있은지 무려 500여년 이상 지난 801년에 당나라의 두우통전 저술을 완료하고 통전이 이곳을 마속이 진을 친 가정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곳이 옛 가정이라는 설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다른 기록을 살펴봤을때 이곳이 과연 그 가정인지는 논란거리이며 한국의 동양사학자 최진열도 이곳은 가정이 아니라고 연구에서 밝혔다. 또한 중국에서도 이곳이 실제 가정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많다는 지적이 연이어 제기되고 있다.

최진열 교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의 전장 상황을 비정해봤을때 기록상 제갈량은 상규와 위수를 넘어 북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상규에 옹주자사 곽회가 버티고 있고, 다른 곳에서도 촉군에 대한 저항이 있었으며, 천수군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는데 여길 넘어서 굳이 현대에도 시골인 이곳으로 마속을 보낼수가 없고 보낼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또 제갈량전 주석 원자의 기록에 따르면 제갈량 본대와 마속 본대는 불과 수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연의로 형성된 세간의 통념과 달리 제갈량이 가정에 직접 가 있었고 마속을 선봉에 보낸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가정은 제갈량 본대가 주로 머물렀던 위수 남쪽 기산 인근에 배정되어야 합당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후대에 가정의 비정을 잘못 해버리는 바람에 가정전투 전반의 전장상황 인식이 왜곡되었고 마치 제갈량이 북쪽으로 별군을 보낸것처럼 잘못 해석되어 연의 등에도 영향을 미쳤고, 대중이 인식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최 교수는 농성진 말고 다른 곳을 가정이라고 지목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 중국에서 농성진이 아니라 다른곳이라고 지목한 가정의 위치와 동일하며 현대에 농성진과 더불어 가정의 위치라고 지목되는 두 곳 중 하나다. 바로 위 가정 추정지역에 위치한 곳이자 고조우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지목한 가정의 위치인 천수시 맥적구 맥적진 가정촌(天水市 麦积区 麦积镇 街亭村)이 그곳이다. 이곳은 2012년 '중국전통마을'로 선정된 전형적인 중국 서부의 시골 마을인데 현대에도 아직 '가정(街亭)'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15] 맥적(麦积)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근방은 가정 전투보단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16]로 매우 유명한 관광지인데 실은 가정고진(街亭古镇)이라고도 불린 이곳에서 가정 전투가 있었다는 것이 중국에서 농성진이 가정임을 부정하는 측의 주장과 최 교수의 판단이다.

일단 최진열 교수가 검토한 원자의 기록에 따르면 가정전투에서는 제갈량의 본대가 마속을 선봉으로 세워 가정에 이르렀다.
"제갈량이 처음 농우로 출병했을 때 남안, 천수, 안정의 세 군(郡) 사람들이 배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습니다. 만약 제갈량이 급히 진격했다면 이 세 군은 중국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나 제갈량은 천천히 행군하며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관병(官兵-위나라 군)이 농에 올라 3군을 회복하고, 제갈량은 척촌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이 기회를 잃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촉병이 가볍고 날랜 군사로 좋은 장수가 적었고 제갈량이 처음 출병했을 때는 중국(中國-위나라)의 강약을 알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의심을 품고 모험하지 않았던 것이오. 게다가 대거 모인 자들이 가까운 공을 탐하지 않아 진격하지 않았소.”

그가 말했다,

"그가 의심했다는 것을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처음 나와 천천히 움직이고 둔영을 중복하고 그 뒤 항복한 뒤에도 진병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소. 제갈량은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으나(勇而能鬪) 세 군(郡)이 배반해도 속히 이에 응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의심했다는 징표요."

(중략)

"제갈량이 가정(街亭)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 리 떨어져 있었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관병과 서로 접전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이는 그가 용맹했다는 것이오.
제갈량전 주석 원자

원자에 따르면 우선 제갈량은 농서의 남안, 천수, 안정 3군이 배반할때 빠르게 진격해서 이곳들을 바로 차지하지 않았고 둔영을 계속 세우면서 천천히 움직이며 꾸물거릴 뿐, 나가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촉군의 주력이 가벼운 경무장 보병인데다가 촉나라 장수들의 군사적 재능이 위나라 장수들을 이길 수 있는 수준인지 의구심을 품어, 촉군이 위군을 이길수 있을지 걱정하고, 의심을 품고, 모험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거 모인 자들이 가까운 공을 탐하지 않아 진격하지 않았소.'라는 부분을 보면 비단 제갈량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촉군 전체에 약간 앞서서 공을 세우는걸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당시에 "제갈량이 신속하게 진격해 농서를 장악했더라면 위나라는 결국 농서를 빼앗겼을 것이다"는 평가는 원준에게 질문한 사람이건 원준이건 부정하지 않으므로 이런 평가는 이미 당대에 널리 퍼진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보면 당시 제갈량은 굉장히 안전주의적으로 움직이다가 패착을 맞은 거라고도 볼 수 있다. 원자에서 원준은 제갈량의 실책을 옹호하기 위해서 이미 당시부터 만연했던 제갈량에 대한 비판을 일종의 허수아비로 내세우며 반박하는데, 원준이 말한 '천천히 진군했다.','제갈량의 선봉은 본대에서 불과 수리 떨어져 있었다'라는 부분은 허수아비의 어거지 비판이 아니라 제갈량을 옹호하는 원준 본인이 엄연한 사실이라고 반박하는 서술에서 나온 증언이다. 다시 말하자면 원준은 제갈량을 억지로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사실을 말한게 아니라 제갈량을 옹호하기 위해 실제 사실을 말한것이며, 따라서 그가 제갈량을 비하할 목적으로 이런 증언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신빙성을 가진다.

다만 제갈량과 싸워봤던 사마의는 제갈량의 군사능력을 보고
"제갈량은 뜻이 크나 기회를 살피지 못하고, 꾀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용병을 좋아하나 임기응변이 없으니, 비록 10만 군사를 이끈다 한들 내 계획 속으로 빠져들 뿐이라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진서 선제기
라고 평가했는데 냉정하게 제갈량이 북벌에서 보여준 군사 운영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신속한 기동전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허허실실의 귀재였던 사마의가 보기엔 제갈량은 그냥 안전하게 진을 굳히고 싸우는데 치중해서, 정작 중요할때 기회를 노려 요지를 선점하지 못하며,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대담하게 진격하지 못하는 장수였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가도 가정에서 제갈량이 장합의 5만 군대를 이길수 있었다면 빨리 진군해서 3군을 차지하고 이곳을 백그라운드로 하여 싸우지 않았던 것을 만회할 수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원준이 제갈량이 싸움에 능했다고 실드치는 부분이지만 자세히 보면 제갈량 본인도 장합과의 교전에서 이기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제갈량전 본전에도 나오듯이 제갈량은 마속을 선봉으로 내세웠다.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왜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어겼고 장합에게 격파되었다. 문제는 당시 가정에 마속만 있었던게 아니라는거다. 제갈량 본인의 본대도 있었다. 원준이 증언했듯이 제갈량군 자체가 가정에 있었고 마속은 그 중 선두에 있는 부대를 이끌었을 뿐이어서 제갈량에 비해 몇 리 앞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들이닥친 장합군에게 제일 먼저 격파된 것일 뿐인 것이다.

최진열 교수는 원자의 촉군과 장합군의 교전을 토대로 마속의 군대가 대파되고 제갈량이 이를 구원하지 못하고 역시 기습을 당해 후퇴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즉 최진열 교수의 의견에 따르면 여기서 제갈량은 격파된 마속을 구원하지 못했고 제갈량 역시 장합을 이기지 못했다. 원준은 제갈량의 군대가 안정적이고 굳고 단단해서 후퇴할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결국 제갈량 본인조차도 장합의 군대와 싸워서 마속을 구하지도 못하고 그저 병력을 건져서 천천히 후퇴했을 뿐이라는 말을 좋게 말한거 뿐이다.

물론 패한 상황에서도 군대를 간수해서 무사히 한중에 돌아왔다는 부분에서 일반적인 패장들보다야 군사적 재능이 있다고 평가 할 수도 있겠지만 가정 전투에서 제갈량에게 긍정적인 평가는 거기까지이다. 애초에 촉나라에 좋은 장수가 없다고 고심했다면 촉군 주력 본대의 선봉에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추천한대로 마속 대신 숙장인 위연이나 오의를 넣었어야 했을텐데 그러지 않은 거 부터가 실수였다.[17]

다만 장합이 이후에 제갈량을 상대했을때 발언을 보면 "병법에 따르면 너무 상대를 궁지에 모는건 위험하다"라는 식으로 평가하고 있는것을 알 수 있는데 그래서 제갈량의 후퇴가 좋았다라는 부분만은 원준의 평가가 맞는 것일 수는 있고, 장합의 그런 평가의 원인은 이때의 경험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면 막아내기만 한다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보급 문제에 시달릴 제갈량과 굳이 싸워 피해를 볼 이유는 없다고 판단한 것일수도 있겠고. 실제로 장합이 가정에서 촉군을 격파한 후의 행보를 보면 반란을 일으킨 삼군의 반란군 쪽으로 이동해 이들을 소탕하면서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쨌거나 마량전에 달린 마속전에 마속이 격파된 후의 서술에
"제갈량은 진군하려 해도 나아갈 곳이 없어 군대를 퇴각시켜 한중으로 돌아왔다."
촉서 마량전
라고 쓴 것의 이유도 여기서 분명해진다. 선봉인 마속이 격파되어 병력이 산산히 흩어지고 제갈량 본인도 장합을 뚫지 못하니 큰 피해를 입은 촉군은 더 이상 진격이 불가능했다는 얘기인 것인것이다.

그러니까 가정전투의 진실은 장합이 촉군의 선봉 마속을 격파하고 제갈량이 위군을 이기지 못해 후퇴한 싸움으로 제갈량이 장합에게 정면으로 붙어 대패한 싸움인 것이다. 다만 이 중에서도 마속이 제갈량의 군령을 듣지 않고 싸우다가 패하고 도주했기 때문에 마속은 특히 처벌한거고 제갈량 본인도 장합과 싸우다가 패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도 강등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가정 전투는 제갈량군의 선봉 마속이 진을 잘못 잡아서 패하고 같이 있던 제갈량군 본대조차 선봉이 붕괴되는 와중에 선봉을 구하지 못하고 장합에게 패배한 전투고, 그냥 일방적으로 장합의 위군이 제갈량의 촉군을 격파하여 후퇴시킨 전투라는 게 최진열 교수의 판단이다.

다만 이곳이 가정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도 최진열 교수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는 것은 아니다. 가정에서 촉군 전반이 격파되었을때 제갈량의 부대가 안전하게 후퇴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마속이 격파되는 동안 제갈량이 마속 놔두고 먼저 철수해서 장합이 마속 처리하는 동안 후퇴했다는 입장도 있다. 제갈량 본대가 마속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원자의 서술대로라면 이 서술이 더 일리가 있다. 어쨌던 기본적인 큰 틀에서 촉군 전반이 가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만은 일치하는 부분이다.

또한 이런 가정 위치의 비정은 다른 사료의 증언으로도 잠작할 수 있다.
태수(太守)는 촉군(蜀軍)이 거의 당도하고 여러 현들이 (촉군에) 향응(響應,호응)한다는 말을 듣고는 (강)유 등에게 모두 딴 마음(→배반하려는 마음)이 있을 것이라 의심하였다. 이에 밤중에 달아나 상규(上邽)를 보전하였다. (강)유 등은 태수가 떠난 것을 알아채고 뒤쫓았으나 늦어서 성문(城門)에 도착하니 성문은 이미 닫혀있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강)유 등은 서로 이끌며 기(冀)로 돌아갔는데 기(冀)에서도 역시 (강)유를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강)유 등은 이에 함께 제갈량(諸葛亮)에게로 나아갔다. 때마침 마속(馬謖)이 가정(街亭)에서 패하자 (제갈)량이 서현(西縣)의 천여 가(家) 및 (강)유 등을 뽑아서 거느리고 (촉한으로) 돌아가니 이 때문에 (강)유는 마침내 모친과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촉서 강유
태화(太和) 연간에 제갈량(諸葛亮)이 농우(隴右)를 습격하자, 백성들이 동요했다. (중략) 곧 백성들이 성을 굳건히 지켰다. 곧 남안(南安)의 병사들이 촉병들과 함께 농서를 공격하려 했다. 유초가 적이 도달했다는 소리를 듣자, 곧 장사(長史) 마옹(馬顒)에게 성 앞에 나가 진을 지키게 하고는, 자신은 성루각으로 올라가, 촉나라 장수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위서 유초

우선 강유전의 기록에 따르면 천수군의 태수는 강유를 의심하여 강유를 버리고 상규현을 지켰으며, 이에 강유는 기현으로 가지만 기현에서도 강유를 받아주지 않았다. 촉에게 배반하려는 마음이 있는(의심되는) 강유를 상규현과 기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기현과 상규현은 촉군의 영역으로 볼 수 없고 제갈량이 점령 못한 곳이다.

또한, 강유가 제갈량에게 항복한 시기는 마속이 가정에서 격파당한 시기와 거의 동일하고, 제갈량이 후퇴할 때도 기산 인근에 있는 서현의 민가만을 약탈해갔으므로 마속이 가정에서 장합에게 패퇴하는 그 순간까지(=제갈량이 1차 북벌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상규현과 기현은 줄곧 촉에 대한 방비를 굳게하고 있었다고 봐야한다. 따라서 촉군이 상규현, 기현에 이르지 못했다면 당연하게도 우리가 원래 알던 위수 이북 산맥의 가정 위치 비정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상규현과 기현이 있는 천수군의 위수 물길을 뚫지 못했으니, 가정은 자연스럽게 위수 이남 어딘가로 추정하는 것이 올바르게 된다.

제갈량전 원자의 기록에서도 제갈량이 불과 수 리 바깥에 있는 마속을 구원하지 않았다 하는데, 만약 가정이 정말 북쪽 산맥 어딘가에 있었다면 제갈량의 본대 역시 상규현으로 진출이 되어있어야 정상이다. 다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갈량의 본대는 기산에 묶여있었고, 당연하게도 마속과 가정은 기산 근처 수 리 어딘가로 봐야하는 것이다. 유초전에 따르면 촉군이 남안군, 농서군에는 직접적인 공세를 가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 제갈량은 가정에서는 본인과 마속이 장합을 틀어막은 뒤 농서 진출을 우선시 했을 수도 있다. 다만 유초가 이를 막아냈고 곧 가정에서의 패배로 인해 촉군은 물러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가정의 위치를 재추론을 해보자면, 가정의 위치는 기산과 상규현, 기현을 잇는 길목, 혹은 위수 이남 거점 어딘가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따라서 관중농서의 통로인 보계와 천수 사이의 가정촌, 가정고진을 가정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군의 구원군을 요격하는데 실패한 가정에서의 패배로 촉군의 위수 장악 시도는 결국 좌절되었고, 제갈량 역시 상규로든 농서로든 더는 공세를 이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중국 측의 의견도 비슷하다. 중국에서 농성진은 결코 가정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하는 입장 측은 농성진이 있는 육반산맥 넘는 길들 설명하면서, 양 군의 식량 상황도 비교하며 "어떻게 마속이 위수 도하해가면서 보급로 끊기기 쉬운 약양 쪽에 가서 장합을 막을 수 있겠느냐, 가정을 위수 북쪽에 비정한 건 위수 남쪽에 길이 없다는 편견 때문이었는데 그 쪽에 불상(맥적산석굴)도 있고 진나라에서 만든 도로도 있다. 심지어 과거 장합하후연 밑에서 위수에 인접한 그 길 따라가서 마초군 잡은 적도 있다. 여기도 남산이랑 북산 있고 수로를 끊을 수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천수보계(옛 진창)을 잇는 중요 도로에 위치한 가정촌 가정고진이야 말로 진짜 가정이다."(해당글 출처)라고 주장하고 있다. 해당 기록은 위서 하후연전에 하후연이 장합을 시켜서 진창의 길로 들어가게 한 것을 뜻하는 것인데 이를 보면 장합이 굳이 돌아가는 농성진으로 갈 이유가 없이 위수 남안으로 쭉 이어지는 이쪽 길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쪽으로 빨리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마초 역시 이 당시 기산으로 진격하여 제갈량과 거의 같은 루트로 진군했고 장합과의 전투로 후일의 제갈량과 유사한 방식으로 후퇴해 버렸으니 이는 분명해진다.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와 기산(祁山)을 포위했다. 강서 등이 급히 구원을 요청했는데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기를 태조의 절도(節度)를 기다리자고 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공(=위공 조조)께서는 업에 계시니 왕복하는데 4천리 길이오. 회답에 따르려 하다가는 강서 등은 필시 패할 것이니 급히 공격해야 하오."

마침내 이를 실행해 장합에게 보기 5천을 주어 선두에 서서 진창(陳倉)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게 하고 하후연 자신은 군량을 감독하며 후미에 있었다. 장합이 위수 가에 도착하자 마초가 강족과 저족 수천 명을 이끌고 장합에 맞섰다. 싸우기도 전에 마초가 달아나니 장합은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두었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여러 현들이 이미 다 항복한 상태였다.
위서 하후연전

3.1.2. 가정고진은 진짜 '가정'인가?

다만 가정고진이 진짜 기산 전투 당시 가정인가는 논란이 많다. 무엇보다 '가정고진' 자체가 명나라 당시에 붙여진 지명이라는것이 가장 결정적인 문제. 이 가설에서는 현재의 제팅촌(街亭村)을 삼국시대의 가정으로 비정하는 의견으로, 청나라 때의 시진(市鎭)인 '가자구(街子口)'가 현존하고 있다. 가정고진이란 가자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제팅촌 현지에서는 명·청시대의 지명인 '가자(街子)'의 '子'자가 원래는 '亭'자를 의미한다는 해석을 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이 학설은 후대의 지명을 가지고 억지로 끌어온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다만 이런 문제제기 자체는 분명히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제갈량의 촉군은 이미 천수 서쪽의 위군을 비롯해 농서 3군의 위군 누구를 상대로도 우위를 잡은바가 없었고 농서 3군에 각지에 파견된 촉군은 위군에 격파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제갈량이 위수 북쪽 멀리까지 병력을 보낼만한 여력이 없었다. 또한 실제로 마속이 위수를 넘어서 별개의 분군을 이끌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정사 삼국지 본전에서 분명 마속은 제갈량의 '선봉'이라고 되어 있으며 따로 분군을 이끌고 본대와 멀리 이격했다는 서술은 어디에도 없다. 이는 원자의 서술에서 마속의 '선봉'이 제갈량의 본대와 불과 '수 리' 떨어져 있을뿐이라는 서술과 교차검증 된다. 즉 원자의 서술대로 선봉인 마속과 제갈량의 본대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 쪽 연구에서는 가정고진이 분명히 틀렸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현재 비정 위치인 룽청진이라고도 볼 수 없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상기한 설들 중, 감숙 진안현 동북쪽 농성진에 대한 설이 고전 문헌인 통전에 가장 일찍 등장하고, 논의한 학자도 많고, 지지하는 이들도 많았다. 『통전』, 『원화군현지』, 『태평환우기』 등 역사 문헌과 범문람, 왕중낙, 장전계 등 저명한 역사학자들, 『사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상무인서관 홍콩지사, 1931년), 『중국역사대사전·역사지리』(상해사서출판사, 1996년) 등 참고서들이 모두 농성진 설에 기울어져 있었지만,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현대 학자들은 가정 고지를 확정하면서 동시에 각 방면의 관계를 균형 있게 조정하고 논쟁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절충" 논의를 했다. 혹자들은 장량현 동남과 진안현 동북을 동일 지역으로 지정하여 "두 설은 비록 현 이름에 차이가 있지만, 방위에는 차이가 없다. 장량과 진안은 서로 인접해 있어, 장량 동남은 곧 진안 동북이다. 따라서 삼국시대 가정은 바로 오늘날의 농성진이다"라고 주장했다. 상기 논의들은 비록 방위와 지역을 조정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혼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절충" 방식은 단순히 각 설을 강제로 통합하려는 시도일 뿐, 엄밀한 학술적 고증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농성진(룽천진) 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따라서 룽천진이 거정의 위치라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고고학적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피상적인 추론에 불과했다. 따라서 중국 학자들이 최종적으로 내놓은 결론은 "가정은 천수시 동남쪽 근처에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고 가정 전투는 "기산을 공격하는 전투"의 일부이며, 가정은 기산과 매우 가깝거나 동일한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가정과 기산 사이의 거리는 《삼국지》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속과 제갈량 사이의 관계는 선봉과 총사령관, 선발대와 주력부대의 관계였으므로, 그 사이 거리는 멀지 않았을 것이다. 즉 《삼국지》의 관련 기록은 마속의 가정 전투가 제갈량의 기산을 공격하는 전투의 일부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3.1.3. 가정 전투의 진실

이렇게 보면 가정 전투의 문제는 매우 간단해진다. 장합과 마속의 가정 전투는 기산을 공격하는 제갈량군의 선봉인 마속이 장합의 위군과 기산 인근 가정에서 맞싸운 쟁탈전의 일부이며, 위나라가 "기산에서 출동"하는 제갈량에 대항하는 주요 전투였다는 것이다. 제갈량이 "기산을 공격"하려면 반드시 기산 인근인 가정을 점령해야 했고, 마속이 장합에게 패하여 가정을 잃음으로써 제갈량은 "더 이상 진격할 곳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위나라 군대가 마속과 가정에서 전투를 벌인 것은 곧 '가정에서 장합이 제갈량을 공격'한 것이며, 마속이 가정에서 패배한 것은 곧 제갈량이 '기산에서 장합에게 패배'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학자 주대위는 이에 대해 더욱 명확하게 설명했다. "그(제갈량)는 직접 주력 부대를 이끌고, 마속을 선봉으로 세워 기산을 공격하고 장합와 대치했다." 즉, 기산과 가정은 여기서 하나의 개념을 가리키며, 다만 기산은 큰 목표이고 가정은 구체적인 전투 지점이라는 것이다. 결국 삼국지 본전과 원자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마속은 선봉으로써 장합과 맞설때 장합의 대군에 맞서 일단 위나라 정예군 상대로 지형적 우위를 잡기 위해 가정 인근의 산에 올랐으나 제갈량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끝내 마속을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렇게 보면 왜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마속이 산에 올랐는지 그의 전술적 판단을 이해할 수 있다. 촉군은 제갈량 본인도 패전 이후 인정했듯이 숫자만 많았지 서막이 이끄는 량주 지방군 수준의 병력으로도 각지에서 패할 정도로 병력의 질이 매우 떨어지는 상황이었고 기산을 공격하는 제갈량 본대조차 그저 진지를 폈다 접었다 할 뿐이지 제대로 된 진군조차 하지 못하는 군대였다. 1차 북벌에서 이토록 전반적으로 질에서 앞서는 위군 상대로 촉군이 각지에서 패하는 상황임을 감안했을때, 마속이 위군보다 떨어지는 촉군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일단 위군 상대로 지형적 우위를 잡아 전술적으로 불리함을 타파하는 일이었을 것이며, 장합 상대로 지형상 우위를 잡고 조금만 버티면 불과 수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제갈량 본대가 곧바로 장합군을 통타할 수 있을 것으로 장기전에서나 문제가 되었을 수자원 공급 문제도 이런 상황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제갈량 본인이 높은 지형 위에서 버티면서 지원을 기다렸을 마속을 구원하지 않았고 결국 이러는 와중에 장합이 물길을 끊음으로서 마속의 이 전술적 시도가 좌절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즉 실제 역사의 마속은 삼국연의에서 묘사되는것 처럼 서책의 병법만 아는 헛똑똑이라서 산에 진을 친게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에서 최대한 버티기 위해 고육지책을 실행한 지휘관이었다. 그럼에도 마속을 구원하지 않아 패한 제갈량이 본인의 정치적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길 필요가 있었기에 패전의 책임을 떠넘겨받고 죽은 것이다. 마속의 부장들이 왕평을 제외하곤 모두 마속의 전술지침에 따른 것, 상랑장완, 이막이 마속을 살리려고 하고 그를 구명하려고 노력했던 것, 북벌에 참여한 촉군 장병들이 패전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지목받아 처형당하는 마속에게 분노하긴 커녕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 이유가 여기서 분명해 지는데, 마속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총사령관 제갈량의 패전을 뒤집어 쓰고 죽은 희생양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왕평과 마속이 전술적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인 이유도 각자 나름대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왕평은 후일 흥세산 전투에서 알 수 있듯이 주어진 상황에서 기책을 벌이지 않고 우직하게 기존의 작계를 고수하는 성향이었기에 제갈량의 절도를 그대로 지키려고 했던 반면, 마속은 단순히 제갈량의 절도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전반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촉군이 위군을 상대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어쨌거나 마속이 지형적 우위를 선점하면서 어떻게든 전세를 뒤집으려 할 때나 왕평이 어떻게든 패배한 촉군을 수습하기 위해 장합의 시선을 끌며 병력을 수습하려고 노력할때도 바로 근처에 있었을 제갈량은 결코 두 사람을 구원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촉군이 가정과 기산에서 위군에게 대패한 진짜 원인이다.

4. 공성계를 사용했다는 주장

촉지 제갈량전에 주석으로 달린 곽충삼사[18]에서는 제갈량이 양평관에서 공성계(空城計)를 썼다고 나와 있다. 사마의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양평관 인근에 도달했는데 이때 촉군의 주력 병력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러자 제갈량은 군사들이 함부로 진영을 나가지 않도록 하고 성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하듯 준비했다. 그러자 의심이 많은 사마의는 오히려 복병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병력을 후퇴시켰다. 이후 뒤늦게 안 사마의는 제갈량에게 당했다며 크게 후회했다. 두우가 저술한 통전 153권 시강(示強)편에도 이 일화가 실렸다.

이 공성계에 대해 배송지는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당시 사마의는 형주 도독으로 완성(宛城)을 진수하고 있었고, 제갈량과 충돌할 일이 없었다. 또한 곽충의 말대로라면 사마의는 당시 촉군의 규모 자체는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복병을 우려했다면 잠시 공격을 멈추고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정도로 족하지 곧바로 후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제갈량의 공성계 일화가 정사에 기록되긴 했어도 배송지는 거짓이라고 반박했고, 곽충삼사에서는 공성계를 실행한 시점이 1차 북벌을 실행한 직후로 나왔다.

5. 창작물에서

5.1. 삼국지연의

연의에서는 95회와 96회에 걸쳐 다루며, 군담소설인 만큼 극적 재미를 위해 이런저런 점들이 바뀌었다. 제갈량이 어느새 유비의 경고를 잊고 신뢰하는 마속에게 선봉을 맡긴 것이 대표적이다. 읍참마속 또한 마속이 책임의 무게를 통감하고 스스로 몸을 묶고 와서 죄를 청했는데도 법도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며 참수형을 명하면서도, 가족을 부탁한다는 마속의 마지막 부탁만큼은 들어주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바뀌었다. 처형하고 나서도 제갈량이 '선주(유비)의 말씀을 따랐어야 했다'면서 마속의 죽음이 아닌 유비의 믿음을 저버린 것에 대해 탄식하는 마무리는 덤이다.

덕분에 가정 전투에서 마속이 저지른 삽질이 희석되긴 했지만, 그래도 (연의에서 추측해 서술한) 마속의 전략을 읽다보면 왕평이 얼마나 답답하고 열이 뻗쳤을지 그대로 느껴진다. 아래는 김홍신 평역판 기준.
마속 : 허, 답답한 말씀. 길에 어떻게 영채를 세운단 말이오. 저 옆의 산은 둘레로 이어지는 산도 없고 나무도 무성하오. 이야말로 천혜의 요해[19]요. 저 산 위에 진을 치고 군사를 머무르게 하는 것이 좋겠소.
왕평 : 그것은 잘못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 길에다 진을 치고 나무를 베어 높이 울타리를 만들어 놓으면 비록 10만의 적군이 온다 해도 단 한 사람도 뚫고 지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요해지를 버리고 산 위에 진을 세웠다가 위군이 불시에 나타나 사방을 에워싸면 도저히 버텨내지 못합니다.
마속 : 공의 소견이 마치 여자와 같구려. 병법에도 '높은 데에 의지하여 아래를 보면 형세가 대를 쪼개는 것같이 쉽다(憑高視下,勢如破竹。)' 하였소. 위군이 온다면 나는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소!
왕평 : 나는 여러 차례 승상을 따라다니며 영채 세우시는 걸 보아 왔소. 승상께서는 이르는 곳마다 영채 세우는 까닭을 가르쳐 주셨소이다. 지금 이 산을 보니 바로 절지(絶地, 도망갈 곳이 없는 땅)입니다. 만약 위군이 와서 우리가 물을 길러 다니는 길만 끊어 놓는다 해도 우리 군사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마속 : 그대는 여러 소리 하지 마시오. 손자도 말하기를 '죽을 곳, 즉 사지에 든 후에야 산다(置之死地而後生)' 하였소. 만약 위군이 우리의 물길을 끊는다면 우리의 군사들은 목숨 걸고 싸울 것이오. 그렇게 되면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 낼 것이 아니겠소. 나는 일찍부터 병서에 통달하고 있어서 승상까지도 일이 있을 때마다 내게 물으시곤 하시었음을 그대도 알지 않소? 그런데 공은 어찌하여 내가 하는 걸 막으려 하시오.
(중략)
한편 본진으로 돌아온 사마의는 장수들에게 가정을 지키는 장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마량의 아우 마속입니다."
그 말에 사마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간혹 실수할 때가 있다는 말이 있지만,[20] 공명도 사람을 잘못 쓰는 일이 있군. 마속은 헛된 이름만 있을 뿐 용렬한 인물이다. 북 소리 한 번에 그를 깨뜨릴 수 있겠다."

병서에 통달했다고 큰소리 치다가 대패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이 연의에서의 하후무와도 비슷하다.[21] 심지어 앞서 한중 공방전 중 정군산 전투에서 법정이 사용한 계책인 '붉은 기를 휘두르면 내려가서 싸워라'도 그대로 나오지만 정군산 전투에서는 한중 공 위아래가 같이 적을 칠 수 있었던 반면, 여기서는 (따로 부대를 마련한 왕평을 제외하면) 거의 전군이 산 위에 있어서 오롯이 공격하기가 애매했고 그마저도 돌아가는 길이 오르막길인데다 식수가 끊겨서 사기가 바닥을 쳤다. 마속이 저렇게 주워섬기는 손자병법에 그 유명한 지피지기 백전불태가 있는 걸 감안하면 마속의 병법지상주의, 더 정확히는 병법을 핑계삼아 그릇된 판단을 고집하는 행태를 까려고 의도적으로 정군산 전투와 비슷하게 서술한 듯하다.

극적 재미를 위해 곽충의 주장을 차용해 제갈량의 1차 북벌에 사마의도 참전한 것으로 각색했으며, 가정의 패배 후 촉군이 한중으로 총퇴각하면서 물자와 백성들을 이동시키던 도중 제갈량이 있던 서성(천수, 남안, 안정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어난 일로 묘사한다. 여기서 제갈량이 성루에서 홀로 거문고를 연주하는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내용은 대충 곽충이 말한 공성계 일화와 비슷하게 나온다. 제갈량은 꾀를 써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루로 올라가 금을 연주했다. 의심이 많은 사마의는 매복이 있을 것이라 염려하고 퇴각한다. 다른 판본이나 2차 창작물 중에서는 이후 제갈량이 비운 성을 사마의가 점령하고, 그제서야 제갈량이 공성계를 썼음을 알아챈 뒤 '이번 싸움은 내가 이겼다. 하지만 지략에선 아직도 제갈량에 못미치는구나.....'라고 탄식하는 장면도 나온다.

5.2. 대군사 사마의

후편인 사마의 : 최후의 승자에서는 사마의가 주인공인 작품답게 단순히 제갈량에게 속아서 튄 게 아니라 제갈량이 현금을 타면서 조예가 의심이 심하고 종친은 능력자를 견제하는 상황인데 "나 여기서 죽고 촉 망하면 전쟁도 끝났는데 네가 돌아가서 무사할 것 같냐? 너야 이름을 남긴다 해도 니 아들들은 어쩔?"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이에 사마의가 아직은 촉을 멸망시킬 때가 아니라 판단해 복병 핑계를 대며 철수하는 것으로 각색했다. 조위 정권이 사마의에게 가한 수많은 견제와[22] 이에 대한 사마의의 뒤집기를 공성계와 버무린 재해석이라 하겠다.


[1] 촉 건흥 6년.[2] 좌장군의 오기라는 말도 있다.[3] 5만이라는 수치는 언급된다. 그러나 이 수치가 장합이 이끄는 군대만을 말하는지, 아니면 장합이 지휘권을 부여받은 농서방면 군 전체를 말하는지는 불분명하다.[4] 위서 명제기에 따르면 228년 정월. 맹달이 사살된 그 시점이다.[5] 타임라인을 생각해보면 맹달의 예에서처럼 사전작업이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6] 제갈량의 북벌은 천수와 안정을 발판삼아 진창 → 미 → 장안 으로 가는 계획으로 최소한 진창을 확보해야 북벌 성공이라 볼 수 있다. 진창의 위치를 보면 평야지대 + 강으로 둘러싸인 방어의 요충지이다. 또, 1차 북벌 성공해서 장안을 먹고 나면, 상용의 가치는 떨어진다. 굳이 한중에서 상용으로 진출할 필요없이, 장안에서 완을 먹어버리면 상용은 샌드위치가 된다. 또한 완을 촉이 공격하는 시도만해도 오나라는 자기들 이익을 위해 형주에서 북벌을 당연히 하게 된다. 장안 → 완 → 번성 vs 강릉 → 양양 → 번성 식으로 촉나라와 오나라의 양공을 위나라는 이겨내야 한다. 여기서 완을 공격하는 이유는 제갈량의 북벌에, 형주에서 양양 → 완을 치는 계획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며, 이를 다시 재현하고자 할 것이다. 또한 장안 → 낙양이 아니라 완을 친다면 허창과 낙양을 동시에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제갈량이 1차 북벌을 성공해서 장안까지 확보하면, 완을 함락시켜 형북에서의 세를 늘리고, 낙양과 허창을 동시에 견제했을 가능성이 크다.[7] 한편으로는 성공했으면 서북방선을 조위와 끊어버리고 서량강족과 유대관계를 가지며 기마보급과 함께 장안 북쪽으로 진격로를 잡을 수도 있는 좋은 거점이 마련되는 수였으니...장안 북쪽으로 돌아가면 병주 지나서 업성이 나온다.[8] 대군이라고 호칭될 정도니 적은 수의 병력은 아니었을 거고, 따라서 제갈량은 옹양주 각지에 병력을 파견함과 동시에 자신은 기산에 머물면서 한편으로는 눈앞의 천수를 공략하고 만에 하나 있을 보급로 습격에 대비한 것으로 보여진다. 산관에 위군이 넘어오면 제갈량은 뒤가 위급하다. 물론 넘어온 군대도 한중에서 오는 군대에 갇힐 수도 있어 난전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위에서 나오듯이 의군인 조운/등지군이 그래서 나뉜것(각각 진창과 미를 견제하기 위해, 유사시 한중을 통해 산관에서 오는 병력의 뒤를 끊기 위해)이라는 의견이 있다. 아마도 제갈량에게 있어 기산은 지리적으로, 무도, 음평과 천수, 기현, 그리고 별동대로 파견한 조운군 및 위의 조진군, 혹시나 내습할지도 모를 산관 쪽의 위군까지 모든 지역을 굽어보고 제어할 수 있는 머리(headquarters)에 해당되는 요지로 보인다. 제갈량이 기산으로 두 번이나 진출한 건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던 것이다.[9] 제갈량이 주둔한 기산과 서한수 일대의 바로 북쪽 인근이다.[10] 다만 이 일화는 제갈량에게 아부를 하려던 촉나라 사람들을 보고 제갈량이 엄중하게 아부를 막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11] 제갈량이 강유를 얻은 직후 그를 칭찬하는 편지를 장예장완에게 보낸 것만 봐도 제갈량 개인도 인재를 얻었다고 여긴 듯하다.[12] 강유의 투항 경위를 촉서 강유전과 위략을 교차 검증 및 절충하면 천수 지역이 촉에 투항 의사를 알릴 사자로 강유를 제갈량에게 보내 이후 일을 의논하려고 했으나 강유가 촉군에 도착한 이후 장합이 마속을 격파해 촉군을 몰아내자 천수는 항복 여론을 없던 걸로 하려고 꼬리자르기로 강유를 버려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 강유가 촉에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13] 시중쉰은 섬서성 출신이라 섬서와 감숙을 잇는 이 근방을 살펴보다가 현지 주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공산당 1세대 원로인데다가 현 중국 최고권력자인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한 일이라 앞으로도 중국 학계가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14] 게임에서도 중국 정부의 고관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이곳을 가정이라고 비정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삼국지 시리즈의 가정은 대체로 이 근방에 위치한다.[15] 독사방여기요에 따르면 현대의 농성진은 오호십육국시대의 전진후진의 전투가 있었던 곳에 불과하다.[16] '마이지산 석굴'이라고도 불리며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곳으로 윈강석굴, 막고굴, 룽먼 석굴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4대 석굴로 유명하다. 톈수이시(천수시) 문서 최상단에 위치한 석굴 사진이 바로 여기며 청나라 때까지의 지어진 수많은 석굴이 있어 톈수이시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손꼽힌다.[17] 반론 : 하지만 대안이 없었다. (기곡에서 등지와 함께 조위군 총사령관 조진을 유인 중인 조운이야 애초에 제외하고) 위연이나 오의를 투입하면 곽회서막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관서 전역을 평정해야 하는 훨씬 더 어려운 임무를 마속이 (설령 남은 한 명과 분담할지라도 어쨌든) 맡아야 한다. 차라리 가정에서 장합의 발목만 붙잡고 물고 늘어지면서 제갈량의 본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게 첫 출전으로서는 그나마 해볼만 했다.[18] 곽충이 언급한 세 번째 일(郭沖三事)이란 뜻으로, 정확히는 제갈량의 알려지지 않은 장점 다섯 가지 중 세 번째이다. 자세한 것은 곽충 문서 참고.[19] 要害. 요새의 오타가 아니라, '지세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을 뜻한다. 즉 '요충지'와 같은 뜻이다.[20] 막상 사마의도 이렇게 마속을 박살내놓고 후술할 공성계에 당해서 도망간다.[21] 정사에서의 하후무는 1차 북벌 중에 고발당해서 장군직을 내려놨기 때문에 제갈량과 싸울 일 자체가 없었다.[22] 다만 실제 역사에서 조위정권이 사마의에게 견제구를 날리기 시작한 건 조방 치세 초기 조상이 사마의를 견제할 마음을 품고부터이다. 이 드라마는 사마의의 고평릉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마의에게 지속적으로 견제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 조비-조예 치세에 사마씨 일족은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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