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魏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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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8b><tablebgcolor=#00008b> ||
}}}}}}}}}}}} ||夏侯楙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자는 자림(子林). 하후돈의 차남, 청하공주의 남편. 예주 패국 초현 사람.《정사 삼국지》, 《위략》, 《삼국지연의》 등 사서 및 창작물 사이에 캐릭터 차이가 전혀 없는 몇 안되는 인물로, 2차 창작의 역사 왜곡 문제에서 가장 자유로운 인물 중 하나. 물론 모든 매체를 막론하고 하후무(楙)도 하후무(武)도 아닌 하후무(無)에 걸맞은 무능력한 상사를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위나라의 대표적인 졸장이다.
2. 정사 삼국지
조조의 딸인 청하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었다.[1]하후무가 조조의 사위가 된 것도 순전히 하후무와 친했던 조비의 추천 덕분이었다. 조조는 원래 추남에 사팔뜨기였지만 재주가 널리 알려져 있던 정의를 청하공주의 남편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아들 조비는 여자들은 외모를 중요시하는데 정의는 사팔뜨기라서 안 된다며 대신 하후무를 추천했다. 그렇게 하후무는 청하공주와 결혼해 조조의 사위가 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조조는 정의를 만나보고는 사팔뜨기가 아니라 장님이었더라도 정의를 사위로 삼았어야 했다며 탄식했다.[2] 이 사건 때문에 하후무는 무능하지만 조비의 추천을 받을만큼 미남일 가능성도 있다는 떡밥이 존재한다. 사실 옛부터 신언서판으로 대표되는 외모지상주의는 횡행했고, 조비는 미남이라는 이유로 유달리 맹달을 총애하는 등 유달리 남자 외모를 따진 걸로 유명하다. 그러나 하후무의 외모가 뛰어났다면 당대 기록에 하후무는 미남이었다는 언급이 하나쯤은 남아있어야 하는데[3] 그런 기록이 전무하고, 애초에 비교대상이었던 정의가 추남인 걸로 유명한 인물이다보니 조비가 하후무를 추천한 건 '못생긴 정의보다 멀쩡하게 생긴 하후무가 그나마 낫지 않겠냐'는 뉘앙스에서 나온 발언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즉 그냥 멀쩡하게 생겼을 뿐 미남까지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
다만 현실적으로 위나라 최고의 권력가 중 하나인 하후돈의 아들이란 점이 작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조조 딸 시집보내는데 얼굴만 보고 결정했을 리고 없고, 조조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장 믿고 가장 높은 벼슬을 준 신하인 하후돈과 혼담을 통해 관계를 굳건히 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능력도 인성도 개판인 하후무를 조비가 총애한 것 역시 그 뒷배경을 노리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4]
220년 장인 조조가 죽고 처남인 조비가 위왕을 계승한 뒤 같은 해에 황제 자리까지 차지하자 하후무도 황제의 인척 지위를 통해 안서장군이 되었고 거기다 하후연의 뒤를 이어 관중도독까지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능력에 한계를 보여주었으며, "하후무는 성정이 무략(武略)이 없고 치생(治生)을 좋아했다."는 구절이 정사에 적혀 있다. 제갈량의 1차 북벌 중에 조예가 장안으로 순시했는데 하후무를 고발하는 이가 있어 소환되어 상서로 임명되었다.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최고위 장군이 고발당한 것이다. 서쪽에 있을 때 여러 명의 기생과 첩을 거느려 아내 청하공주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하후무의 여러 아우들[5]도 형을 닮았는지 생활에 절도가 없었는데, 그 도가 하후무가 보기에도 지나쳤는지 혹은 동족혐오의 발현인지 하후무로부터 여러 차례 꾸중을 들었다. 이 때문에 아우들은 하후무가 법으로 다스릴까 두려워 공모해서 형을 비방하고 조예에게 상주해서, 하후무는 모함을 뒤집어 쓰고 수도로 소환되어 죽을 뻔했으나 장수교위 단묵 덕분에 오해가 풀려 진상을 파악해 하후무의 두 아우가 꾸민 일임이 밝혀졌다.
<위연전>에서는 위연이 자오곡 계책을 언급하며 하후무를 적이 공격해오면 싸워보지도 않고 바로 도망갈 겁쟁이로 평가한다. 자오곡 계책은 위나라의 사서인 《위략》에 나오는 기록이므로 하후무에 대한 이 평가는 위나라 입장에서의 평가도 있지만 위연의 자오곡 대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하후무에 대한 위연의 평가일지도 모른다.
3. 삼국지연의
정사에서의 하후무는 제갈량의 1차 북벌 중 고발당해 장군직을 내려놓아 제갈량과 싸울 기회조차 없었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에게 당하는 상대로 각색되었다.[6]연의에서는 설정이 은근히 복잡한데, 하후연의 아들이었으나 하후돈의 양아들이 되었으며[7], 친아버지인 하후연이 정군산에서 죽은 것을 불쌍히 여긴 조조가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부마가 되었다고 나온다. 자는 자휴(子休)[8]로 나오고 성격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급하면서 무서운 깍쟁이로 안서진동장군, 시중, 상서, 부마도위를 지내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가져 신분은 높으나, 실상은 그 신분에 비해 능력은 쥐뿔도 없다. 제갈량이 북벌을 감행해 위를 침공하자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제갈량과 선봉을 맡은 조운을 무서워하며 전전긍긍해 할때 혼자 일어나서 큰 목소리로 제갈량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오, 그런데 어찌 그를 이리 무서워한단 말이오!라고 비분강개하여 일어나서 외치는 간지 넘치는 등장신이 있다. 물론 연의에서 거의 신에 필적하는 것처럼 보이는 제갈량도 결국은 신이 아닌 인간이라 ,수명 문제 때문에 골골대거나, 사마의를 경계한다든지,[9] 가정 전투를 마속 따위에게 맡기는 등 실수를 하긴 했고, 학소에게 패배하거나, (연의 한정이지만)강유에게 계책이 간파당하기도 했으니 맞는 말이고, 적과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장수나 신하들이 지레 겁을 먹고 벌벌 떨기만 하고, 아무도 나서서 촉군과 싸울 생각을 안하고 있던 판이었다. 이러면 적국인 촉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건 물론, 전장에서 그들을 상대해야 하는 위나라 병사들의 사기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것이고, 이 상태로 촉과 전투에 돌입해도 장수가 겁을 먹고 있으니 단체로 모랄빵 상태가 되거나 최악의 경우엔 단체로 탈영을 하거나, 촉에 투항하는 일까지 벌어질수도 있으며, 정말 일이 그지경까지 흘러가면 전투에서 제대로 이길 수 없는 건 당연지사니, 하후무가 저렇게 외치는 것은 어쨌든 훌륭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하후무가 어느 정도 능력 있는 사람이었으면 "오오 무간지 오오" 소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육도삼략을 마스터하신 하후무 님이 이런 소릴 하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멋있는 행동이 아니고 능력도 없으면서 허세 부리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후무는 자신이 지휘관이 되어 제갈량을 막겠다고 나섰다. 이에 사도 왕랑이 하후무는 경험이 없어서 안 된다고 반대 했으나, "뭣이? 그대는 지금 내 재능과 능력을 시기하여 내가 공을 세울 기회조차 빼앗아서 적을 이롭게 해줄 참이요?"라며 되도 않는 고집과 어거지를 부린다.
연의에서 왕랑에게 "나는 어릴 적부터 병법을 터득하여 육도와 삼략에 통달하였다"고 자뻑하는 대사가 있다. 이 때문에 한술 더 떠서『하후무=육도삼략』이라는 등식을 제공하기도 했으며 그를 까는 사람들은 언제나 "육도삼략을 마스터하신 하후무 님"이라고 마구 깐다. 아예 하후무 항목에 육도삼략 마스터 라는 리다이렉트가 있을 정도. 이후 제갈량에게 포로로 잡히고 결국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는 그의 이후 행적과 비교해 볼 때 이 발언 자체는 독자들로 하여금 폭소를 유발한다. 참고로 육도삼략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므로 하후무가 저 대사를 칠 때는 존재하지도 않았거나, 잘 쳐 봐야 이제 갓 나온 따끈따끈한 새 책이라는 고증오류가 있다(...). 고로 육도삼략에 통달했다는 대사는 연의의 창작이다.
이런 고집으로 결국 지휘관으로 발탁되어 촉군을 막고자 출전한다. 출전하기 전에 제갈량을 사로잡지 않고는 맹세코 돌아와 천자를 뵙지 않겠다고 했다. 참고로 하후무가 출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촉의 장수들은 "가소롭구나, 실전 경험도 없는 귀족이 대체 뭘 하겠다고..." 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결국 제갈량에게 연이어 패해 포로가 되었고, 이후 제갈량이 강유를 얻기 위한 계책에 쓰이는 역할로 풀려났다. 석방되고 나서도 주제를 모르고 다시 제갈량에 대항하다가 또다시 패했고, 허겁지겁 강족의 땅으로 도망갔다. 이에 촉의 제장들이 위의 부마인 하후무를 놓아준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자 제갈량은 "내가 하후무를 놓아준 것은 오리 새끼 한 마리를 놓아준 것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강유를 얻은 것은 봉황을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말해 졸지에 오리 새끼 취급을 받는 굴욕까지 겪었다.
이후 등장하지 않고 나중에 제갈량의 여섯 번째 북벌 때 사마의가 하후패 형제를 선봉으로 세울 것을 조예에게 말할 때 잠시 언급되는데, 조예는 하후무가 나섰다가 대패하고 강족의 땅으로 쫒겨난 뒤 부끄러워 돌아오지 않고 있다면서 하후패 형제도 하후무와 같은 형제가 아닌가라고 하자 사마의가 자신 있게 하후패 형제를 두둔한다. 하후무는 출전하기 전에 제갈량을 사로잡지 않고는 맹세코 돌아와 천자를 뵙지 않겠다고 했고 작중 그 말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0][11]
간지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등장씬, 제갈량을 잡지 못하면 천자를 뵙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그 약속을 철통같이 지키는 모습, 육도삼략을 통달했다는 캐치 프레이즈까지 겸비한 미친 존재감에 저래놓고 충격적일 정도로 무능하다는 이 유니크한 캐릭터성 덕에 동오의 덕왕 엄백호와 더불어 삼국지 팬덤에서 인지도가 상당히 높다.
다만 위의 내용 중 일부는 2차 창작의 내용 등이 무분별하게 섞인 것도 있다. 원작 기준으로 일부 차이점을 말하자면
- 자진해서 나서겠다고 할 때 제갈량도 인간에 불과하다 운운하는 장면이 없다. 단지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강조하였을 뿐이다.
- 그 유명한 육도삼략 마스터 드립도 없다. 단지 아버지한테서 도략을 배우고 병법을 통달하였다고 했을 뿐이다. 도략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육도삼략이고[12], 육도삼략도 결국 병법이 맞긴 하지만 일반명사를 고유명사로 바꾸었으니 임팩트가 더 강할 수 밖에 없다.[13]
- 왕랑을 비난하는 내용이 위와는 다른데, 자신을 시기했다고 하는 내용은 없고 단지 제갈량과 내통했냐며 비난했을 뿐이다. 물론 진지하게 왕랑이 배신자라고 생각한 건 아닐테고, 왜 적을 높게 평가해서 우리편 기를 죽이냐 정도의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촉의 장수들이 하후무를 비웃었다는 내용도 없다. 위연이 하후무를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무능할 것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는데 이게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해외축구 갤러리에서는 하후무의 연의에서의 행적을 그대로 가져와 어떤 축구감독을 비꼬는 별명으로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하후무리뉴다.[14]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하후무/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단, 당시에는 '부마'라고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 부마의 풀네임인 '부마도위(駙馬都尉)'는 황제가 행차할 때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황제가 어느 마차를 탔는지 알지 못하도록 예비마차를 관리하는 직책인데 이는 후에 삼국을 통일한 서진의 무제 사마염이 부마도위에 자신의 사위를 직접 임명하면서부터 관습적으로 '부마=사위'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사마염 이전에는 부마는 사위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2] 다만, 이렇게 말한 것 치고 조조는 정의를 중용하지 않았다. 헌제 앞에서는 유종을 칭찬했으면서도 손권과 유수구에서 싸울 때 유종을 이복형 유기와 함께 개돼지 같다고 싸잡아 비하한 조조의 평소 언행을 고려해 볼 때, 저 탄식은 느닷없이 혼담이 깨진 정의를 달래주는 립서비스이거나 '내 딸을 하후무 같은 놈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아니었다.'는 아버지로서 후회를 돌려 말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3] 외모가 뛰어나서 기록에까지 남은 사례로는 제갈량, 맹달, 원소, 원상, 손책, 주유, 유표, 하안, 하후현, 제갈탄 등등 찾아보면 꽤 많다. 심지어 조조의 가장 큰 라이벌이라 정사 삼국지에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원소조차 미남으로 묘사하고 있는 마당에, 아무리 무능해도 조조의 사위인 하후무가 미남이었다면 관련 기록이 누락됐을 가능성은 적다.[4] 하후돈은 연의 이미지와 달리 군사적 재능은 평범했지만 인품, 충성도와 행정적인 측면에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대장군이란 높은 직위를 받고, 조조의 침실에 들 수 있을 정도. 사적인 공간에 출입이 가능했단 건 거의 형제처럼 가까웠다는 의미다. 유비 휘하에서 이게 가능한 인물은 오직 조운 혼자였다. 조조 개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고 하후돈과 하후연 형제는 조조 평생 첫 부하로 조조가 미성년자일 때부터 이미 조조를 따르던 형제들이었다. 이건 정말 상징성이 엄청난 것이다. 조조가 변씨를 만나기 전부터 이 2형제는 이미 조조의 부하들이었다. 여러모로 조조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인물이다. 장남이 아니라곤 하나 이런 하후돈의 아들이라면 끌어들이고 싶을 만하다.[5] 하후자강(夏侯子江)과 하후자장(夏侯子藏)이라는 두 사람이 기록에 남아 있다. 자강과 자장은 자(字)이고, 둘 다 본명은 불명이다.[6] 정사에서 위연이 자오곡 계책을 얘기하면서 하후무를 언급한 것에 착안한 듯하다.[7] 이건 나관중이 참고했을 자치통감부터가 문제였던거 같다.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이 살피길 '자치통감에서 "정서장군(征西將軍) 하후연의 자식 하후무가, 태조의 딸 청하공주에게 장가들었다."라고 썼으나, 잘못 쓴 것이다. 하후무는 하후돈의 자식으로, 하후연의 자식이 아니다. 아마도 "하후연의 지위를 이어 관중(關中)을 모두 거느리게 했다."라 쓰여서 잘못 쓰게 된 것이다.' 라고 했다. 나관중은 절충책으로 하후연이 친아버지고 하후돈이 양부라고 설정한거 같다.[8] 림(林)을 휴(休)로 잘못 본 것 같다.[9] 사실 최대한 좋게 평가해줬을 때 경계고 실상 연의에서 사마의는 제갈량보다 아래로 나오며 늘상 제갈량에게 깨지는 게 일상이라 나중에 가면 지략으로는 제갈량을 어쩌지 못해 수비로만 일관하는 처지가 된다. 그나마 사마의니까 이 정도라도 한 것이고 다른사람들은 제갈량에게 명함도 못 내민다는 느낌이 강하다.[10] 물론 이는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 두려워서일 가능성이 크다.[11] 게다가 하후패 형제는 하후무와는 비교가 미안할 정도로 능력치가 월등한 편에 속한다. 차남 하후패와 사남인 하후위는 무예가 뛰어나고, 육남인 하후혜와 칠남인 하후화는 지력, 정치력이 높다.[12] 그렇다고 도략이 단순히 육도삼략의 준말인 건 아니다. 후세에서는 병법 정도의 의미로 일반명사화 되었다.[13] 물론 육도삼략이 삼국지 시대 이후에 나온 병서라 그렇지, 아무리 무능한 하후무라고 해도 명색이 조위 내 명문가인 하후씨 집안의 자제였으니만큼 기본적으로 병법 등을 배웠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문제는 병법을 단순히 이론적으로 뗀 것과는 별개로, 실전에서 그 병법을 활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고, 게다가 하후무 본인이 이렇다 할 무훈을 세운 전적이 거의 없었으니 당연히 그를 머뜩잖게 보는 여론은 변함이 없었을 것은 자명한 것이다.[14] 물론 실제로 이 둘을 비교하기는 민망한 게, 무리뉴는 과거 2000~2010년도 시절 때만에는 "스페셜 원"이라는 칭호까지 붙을 만큼 뛰어난 명감독이었고, 특히 2010년 대에는 인테르에서 트레블까지 이루어 내는 뛰어난 업적을 이루어냈다. 전적은 일절 눈 씻고 찾아봐도 전혀 없는 하후무와는 천지차이인 셈이다. 단지 시대가 흐르면서 무리뉴의 전술은 점차 구식적이면서 큰 변화가 없었기에 흐름에 뒤쳐진 전술로 치부되었기에 저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