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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삼국지)

조위의 사공(司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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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명제기(明帝紀)」 4권 「삼소제기(三少帝紀)」
조예 ,학소 진랑 맹타, 조방 ,장특, · 조모 · 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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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후비전(后妃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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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사우
사마의 진군 오질 주삭

陳羣
진군
파일:진군.jpg
<colbgcolor=#00008b> 시호 정후(靖侯)
작위 창무정후(昌武亭侯) → 영향후(潁鄕侯) → 영음후(潁陰侯)
최종직위 사공(司空)
성씨 (陳)
(羣)
장문(長文)
조부 진식(陳寔)
아버지 진기(陳紀)
숙부 진심(陳諶)
장인 순욱(荀彧)
생몰기간 ?년 ~ 236년
고향 예주(豫州) 영천군(穎川郡) 허현(許縣)
사공 재임기간 226년 12월 ~ 236년 12월 24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유비 휘하에서2.3. 조조 휘하에서2.4. 조비 휘하에서2.5. 조예 휘하에서
3. 업적
3.1. 구품관인법3.2. 위율 제정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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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며 는 장문(長文)으로 예주 영천군 허현(허창) 사람.

대학자 진식의 손자, 진기의 아들, 진심의 조카, 순욱의 사위, 진태의 아버지.

2. 생애

2.1. 초기 생애

대대로 청류파로 이름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진군이 어렸을 때, 조부인 진식은 항상 그의 재능을 특별하게 생각하고는 종족의 장로들에게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진원방(진기)의 아들 진장문(진군)과 진원방의 동생 진계방(진심)의 아들 진효선(진충)이,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덕이 더 훌륭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말이 나지 않아서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판정을 내려주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진식은 "형이 낫다고 하기도 어렵고 동생이 낫다고 하기도 어렵구나."라고 대답한 데서 난형난제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노나라 사람 공융은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오만했다. 나이는 진기와 진군의 중간이라서 먼저 진기와 교우를 맺었고 후에 진군과 사귀었고 진기를 위해 절까지 하자 이로부터 진군의 명성도 올라갔다.

2.2. 유비 휘하에서

처음에는 예주자사로 있던 유비에게 앞서 출사했었다.[1] 별가 자리에서 일했는데, 194년서주 도겸이 죽어 서주가 혼란해지자 유비가 서주를 아우르려 할 때 "원술은 아직도 세력이 강대하므로 지금 동쪽으로 간다면 반드시 그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또 여포가 만일 장군의 뒤를 습격한다면, 장군은 설령 서주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일은 반드시 성공할 수 없습니다."라고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에 정말로 여포가 쳐들어와 유비는 진군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달아났다. 진군은 아버지와 함께 야인으로 물러나 피난살이를 했으며, 문재로 천거되어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2.3. 조조 휘하에서

198년조조가 여포를 멸하자 조조의 밑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왕모와 주규를 천거했을 때 진군은 ​이들이 악하다고 반대했지만 조조는 진군의 말을 듣지 않고 이들을 등용했다. 후에 왕모와 주규는 잘못을 저질러 처형되었고 조조는 진군에게 사과했다.

진군은 진교와 대건을 조조에게 천거했는데, 진교는 명신이 되어 상서령까지 올랐고, 대건은 오나라 사람이 모반하자 충의를 다하여 위험 속에서 죽었다. 당시 사람들은 진군이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214년에 어사중승의 자리까지 올랐다.

조조가 육형(肉刑)[2]을 부활시키려고 하였을 때, 부적절한 사형을 줄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종요와 함께 찬성했다. 그러나, 왕랑 등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곽가전에 따르면 진군은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대단히 엄정하였는데 조조의 최측근 모사인 곽가의 행실이 바르지 못한 것을 지적하여 여러차례 고발했다. 조조는 곽가를 감싸주었지만, 진군의 엄정함도 높이 평가했다.

유이는 동생이 위풍과 반역을 도모한 것에 연루되어 사형당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진군이 조조에게 청하자 조조는 유이를 사면해주고 유이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유이가 진군에게 감사해하자 진군은
"대체로 형벌에 대한 논의는 국가를 위한 것이지 사사로운 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것은 성명한 군주의 의향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내가 어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2.4. 조비 휘하에서

조비가 태자가 되었을 때, 진군을 매우 존경하여 예의바르게 대했고 항상 감탄하며
"나에게 안회가 있은 후부터 문인들은 날마다 나를 가까이 하는구나."
라고 말했다.

조조가 죽고 조비조위를 세울 때에도 전심으로 협력해 조비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220년에는 구품관인법을 제정하였으며 상서령의 자리에 진군대장군[3]의 자리까지 올라, 손권과 싸울 때는 수군을 지휘하는 직책에 있었다. 조비가 탁고하는 자리에서 조진 그리고 사마의 등과 함께 뒷일을 부탁 받았다.

2.5. 조예 휘하에서

조예의 대에도 중신으로 대우받아 사공의 자리까지 올랐다.

조진이 황제에게 표를 올려 촉을 토벌해야 한다고 몇 차례 진언하고 사곡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가려고 했다. 진군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았고 사곡의 지세가 험난하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예는 진군의 의견을 들었다.

이번엔 조진이 표를 올려 자오도로부터 촉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진군이 다시 표를 올려 시행하기가 불편하다고 말하고, 아울러 군사를 다루는 계책을 말했다. 조예는 조서를 내려 진군의 건의를 조진에게 주었고, 조진은 그의 건의에 따라 시행했다. 마침 며칠 간 장마가 내렸고, 진군은 조서를 내려 조진에게 돌아오도록 해야만 된다고 주장했으며, 조예는 진군의 의견을 따랐다.

조예의 딸 조숙이 병으로 죽자 시호를 평원의공주로 추증했다. 진군은 조예에게 여덟 살 이하의 어린애가 죽었을 뿐인데 어찌 한 달이나 장례를 치르면서 조정의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고 아침 저녁으로 통곡하게 하냐고 상소를 올렸다. 조예는 듣지 않았다.

조예가 궁궐을 건축하여 백성들이 힘들어하자 진군이 궁궐공사에 대해서 상소를 올렸다. 진군은 우임금도 요순을 계승했지만 검소했다. 지금은 전란이 있은 이후로 백성들은 지극히 적어 한나라 문제와 경제때와 비교하면, 그 당시의 큰 한 군에 불과하다. 게다가 변방에는 일이 있어서 장수와 병사들은 수고로운데, 만일 수재나 한재의 근심이 있게 된다면 국가는 커다란 걱정이 있게 될 것이고 아울러 오와 촉이 아직 멸망되지 않았으므로 사직은 불안한데 궁궐 짓는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옛날 유비가 성도에서 백수까지 역사를 만들어 많은 인력을 소모한걸 보고 위무제가 백성을 피곤하게 하는 짓이라고 비판했는데 똑같은 짓[4]하지 마시라고 했다.

조예가 왕자(王者)의 궁전은 응당 (오나라와 촉나라를 멸망시키는 것과) 더불어 진행해야 한다. 적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다만 역을 면하고 지키기만 해야지 어찌 다시 요역을 일으키겠는가? 그러므로 이는 그대의 직무이자 소하의 큰 계략이다[5]라고 반박했지만 진군이 그것과는 경우가 다르다고 하며 '옛날 한고조는 단지 항우와 천하를 다투었는데, 항우는 멸망하고 궁실은 타버렸기 때문에 소하가 무고와 태창을 만들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며, 이런 것들은 모두 긴급히 필요한 것들이었지만, 한고조는 그것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지금 두 적(촉한, 손오)은 평정되지 않았으니, 진실로 옛날과 똑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중략)'이라고 또 반박하자 조예는 궁전의 건축을 감소시켰다.

이 시기 부하(傅嘏)가 진군의 추천으로 관직에 오른다. 부하가 209년생이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까지 인재 보는 안목이 탁월했던 것.

236년에 세상을 떠나자, 조예는 그의 공덕을 추모하고, 식읍을 분할하여 한 아들을 열후로 봉했다.

위서에 따르면 진군이 황제에게 상소할 때마다 그 초고를 없애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군이 그렇게 간언하는지 모르고 진군은 침묵만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진군 사후, 정시 연간(240년 ~ 249년)에 신하들이 올린 상서 중에서 명작(?)들을 뽑아서 공개했는데, 이때서야 신하들이 진군의 간언 내용을 볼 수 있었고, 모두들 경탄해 했다고 한다.

3. 업적

중국사를 전체적으로 봤을 때 크게 의미를 찾기 힘든 위진시대에서 중국 도교의 한 시조(始祖)이자 원류로서 도교에서 지금도 신으로 모셔지는 장로, 한나라 이후 분열된 북중국을 통일하고 중국 대륙의 기틀을 닦은 삼국지 최고의 영웅 조조, 북베트남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쳐 베트남 역사에서 위인으로 여겨지는 사섭 등과 함께 역사적 의의를 갖는 인물이다.

3.1. 구품관인법

진군이 중국 제도사에 남긴 중요한 업적으로 220년 위 성립과 함께 제정한 구품관인법이 있는데 구품중정제라고도 한다. 제 아무리 삼국지가 '교과서의 몇 줄 분량을 열 권 분량으로 늘린 것'이라지만 이건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중요하다. 게임 삼국지에서 관직을 구품관에서 일품관 이런 식으로 구별한 것은 바로 이 구품관인법을 반영한 것을 들 수 있는데, 그간 호족의 추천이나 채용관의 의사가 개입되기 쉬웠던 인재 등용 절차를 체계적으로 정비한 것으로 각 지방에 중정관을 설치해(중정) 사관 희망자의 재능과 덕행을 심사하여 9등급(구품)으로 나눠 내신서를 작성하고 매긴 등급보다 몇 단계 낮춰 초임시키는 형식을 골자로 삼고 있다.

본래 목적은 객관적으로 개인차에 따른 인재를 선발하려는 것이었지만 갈수록 변질되어 세력 있는 자가 높은 등급, 그렇지 못한 자가 낮은 등급으로 고정되고 높은 등급에 임용될 목적으로 돈을 푸는 등 매관매직의 폐단을 재차 초래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남북조시대에 가장 융성했으며, 중정을 통한 관리 선발 제도는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뒤 과거 제도로 대체되었으나 관품제도는 남아서 청나라 말기까지 실행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관리의 품계를 정 1품부터 종 9품까지 나눈 것이 진군의 영향이다.

3.2. 위율 제정

조비 시대 한율을 대체하여 위나라의 법률인 위율을 제정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하지만 진수는 위율 제정에 대해서 제대로 서술하지 않아 고대 중국 법률을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서진, 수당시대를 다룬 기록에서는 진군이 위율을 제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6]

이 위율 제정은 현대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한대의 "원시율령"체제에서 벗어난 율령이자 형법과 행정법이 분리된 서진 태시율령(268년)로 이어진다고 평가받는다.[7] 그외에도 최근 동북아역사재단 발간 "고구려사 통사"에서는 집안고구려비 내용 분석을 통해 고구려가 계수한 율령이 위율이였을 가능성도 분석하고 있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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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군의 아들 진태가 훗날 번번이 강유의 북벌의 발목을 잡는 미래를 생각하면 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출사를 유비 진영에서 하고, 조위의 명목적 창립자인 조비를 태자 시절부터 측근으로 보좌해 조위사우의 일원까지 되고, 같은 조위사우에는 사마의가 있었다. 삼국시대의 두 나라의 황제와 최후의 승자인 서진의 지도자들과 모두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특이한 인물이다.[2] 신체를 손상시키는 형벌이다.[3] 한자가 다르지만 한국 한정으로 직위와 이름이 같은 보기 드문 케이스다.[4] 유비가 왕을 칭한 후, 궁전과 관사를 짓고, 성도에서 백수까지 모두 4백곳에 관사 우정을 짓고, 대신들도 가만히 있지 않아서 백성들이 힘들어 했다.[5] 호삼성은 '이 일은 소하가 미양궁을 건설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주석들 달았다.[6] 출처 = 고대 중국의 매커니즘.[7] 출처 = 백제율령에 미친 중국왕조의 영향,최동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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