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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2:24:42

종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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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성후(定陵成侯)
종요 | 鍾繇
파일:종요.jpg
작위 정릉후(定陵侯)
출생 151년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 장사현(長社縣)
사망 230년 (향년 79세)
시호(成)
최종직위 태부(太傅)
성씨(鍾)
(繇)
원상(元常)
증조부 종호(鍾皓)
아내 장창포(張昌蒲)
재임 조위의 태위
223년 8월 11일~226년 12월

[clearfix]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며 는 원상(元常)으로 예주 영천군 장사현 출생.

영천에서 유명한 명사인 종호[1]의 증손자. 동생은 종연, 아들은 종육, 종회[2]. 아내는 장창포. 외조카는 곽원. 본래 후한에서 상서복야(尙書僕射)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후에 조조와 제휴해 위나라 건국 후에는 3대를 섬겼다. 조조보다 4살이나 많았으며 조조의 초창기 기반이 된 이른바 영천 호족의 일원으로서 순욱, 순유, 진군, 곽가, 두습 등의 쟁쟁한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영천 출신이고 순욱과 곽가, 진군 등 모사들과 비교되어 책사나 명사(名士)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편이나, 실제로는 조조의 서북 평정 이전까지 마등 등의 서량 군벌로부터 관중(關中)과 장안을 굳건히 지킨 잔뼈가 굵은 군사령관이었다.

2. 정사 삼국지

어린 시절에 낙양에 갔다가 관상 보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말하기를 "후에 크게 될 인물이지만 물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근데 그런 말을 한지 10리도 못 가서 진짜로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다. 종요와 같이 있던 그의 재당숙 종유는 '이놈 진짜 크게 되겠는데?' 하고 생각하고 그의 공부 비용이나 생활비를 전부 대주어 학문에 힘을 쓰도록 하였다.

후에 종요는 음수(陰脩)에게 천거받아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각곽사가 한참 분탕질을 벌이고 있었다. 때마침 조조가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자 뜬금없이 배알이 꼴린 이 두 명이 조조의 사자를 잡아서 가둘 생각을 했다. 이때 종요가 나서서 그러지 말라고 해서 말리게 되었다. 종요는 그들을 설득함으로써 조조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게끔 했고 조조는 순욱에게 종요의 칭찬을 여러번 들은데다 이런 일이 생기자, 종요를 상당히 좋아하게 되었다. 이각, 곽사의 분탕질은 갈수록 절정에 다다르고, 황제 일행은 궁궐을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크게 공을 세운 사람이 종요였다.[3]

조조가 황제를 모시게 되고, 이번에는 마등한수가 으르렁 대면서 싸우자 조조는 그 불똥이 튈까 염려하였는데 이를 순욱에게 상담하자 종요를 추천하였고, 조조는 종요에게 관중의 군벌들을 관리하라고 명을 내리게 된다. 종요는 장안으로 가 마등과 한수에게 편지를 보내 싸우는 걸 말린다. 종요는 그들을 잘 구슬려서 돌려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들을 중앙에 들여보내 벼슬살이를 하도록 설득한다.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인질을 보내도록 한 셈이다.

그 후 조조는 원소와 대치하며 관도대전을 벌이게 되는데, 종요는 말을 2천필이나 조조에게 지원해준다. 그러자 조조는 소하에 비견하여 상황이 아주 급할 때에 맞추어 말을 보내 주어서 대단히 고맙다. 관중의 오른쪽이 평정되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걱정거리가 없어진것은 그대의 공으로 지난날 소하는 관중을 지키면서 한고조 유방에게 군량미와 군사를 충분히 공급해 준 바 있는데 그대 또한 마찬가지라며 종요를 높이 칭찬하였다.[4] 남흉노선우 호주천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걸 진압하던 중, 원상이 임명한 종요의 외조카(!) 곽원이 하동으로 오자 그 세력이 몹시 강해졌다. 모두 하동을 버리고 달아나자고 말하는 중 오직 종요만이 싸우자고 주장하였다. 이 곽원을, 장기마등을 설득해 마초가 군사를 끌고 와 전부 때려 부수었다. 자세한 내용은 곽원 항목 참조. 그 후 위고, 장성, 장염 등의 반란을 진압하던 종요는 사람들이 많이 사라진 낙양 주변으로 여러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개발하여 폐허가 된 낙양일대를 재건한다. 조조가 관중정벌에 나설 때 가장 큰 힘이 된 게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위나라가 건국되자 종요는 대리(大理)라는 직위에 임명되었다가 상국 벼슬에 이른다. 그러다가 위풍의 반란이 발생하고 위풍을 추천했던 종요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집에서 놀게 된다. 이후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고 정위(廷尉)가 되는데 중 2,000석의 고위직으로 요즘으로 치면 법무부 장관쯤 되는 자리다. 이후 태위에 올랐다. 가후가 사망한 후 그 자리에 올랐는데 위풍의 난으로 한번 실각했지만 그거 하나로 훅가기엔 워낙 거물이었기에 조비 즉위 후 복귀했었고, 가후가 죽고난 뒤 종요가 태위에 오르면서 '태위 종요/사공 화흠/사도 왕랑' 이라는, 조비~조예 즉위 초를 상징하는 삼공라인이 완성된다. 조비가 어찌나 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이들의 뒤를 이을만한 인물들이 나오기 힘들 거라고 찬탄했을 정도였으며 조비는 종요를 일컬어 '모든 관료들의 모범'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가후 사망 이전에 대사마인 조인이 죽어 공석이 되었기 때문에, 가후 때와는 달리 지휘권은 쪼개지지 않고 온전히 손에 들어왔을 테지만, 이 시기에는 별로 중요한 군사적 움직임이 없었다. 제갈량의 북벌은 227년부터 시작되는데, 이에 앞서 226년 12월 군부가 재편되니 종요가 태위로서 활약한 모습은 볼 수 없다.

조예 때에 이르러도 종요는 황제를 보필했는데, 황제의 스승에 해당하는 최고 명예직인 태부(太傅)가 된다. 그런데 종요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병에 걸려 건강이 좋지 않았고 나이가 많아 일어나기가 힘든지라 화흠과 더불어 수레를 타고 조회에 참가하는 게 허락되었다. 요화, 여대, 내민 등과 더불어 삼국시대에 장수한 인물 중에 하나다. 종요는 75세에 27세인 장창포와의 사이에서 종회를 낳을 정도로 건강했다.[5][6] 그래서 웬만한 삼국지 매니아들도 종요가 후한의 명신이자 조조의 측근, 해서체를 확립한 업적은 간과하는 경우가 많지만, 75세에 종회를 본 것만큼은 앞의 사실들 보다도 훨씬 많이 회자되고 유명하게 되었다.

《위씨춘추》는 종요 말년의 노망에 가까운 행적 한 가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가 종회의 생모인 장창포를 총애해 원래 정실인 손씨와 이혼했을 때, 이것을 도덕적으로 못마땅하게 여긴 무선황후 변씨조비를 통해 저지하려 했다. 조비가 이혼한 아내와 재결합하라고 명하자 종요는 화가 나서 짐독으로 자살하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였고, 초(椒)를 한꺼번에 먹어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러한 생떼를 본 조비는 뜻을 꺾었다.[7][8]

야사이지만 《육씨이림》[9]과 《세설신어》에서도 종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종요가 비교적 젊었던 시절에 건강이 나빠져서 몇 달 동안이나 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연유를 물었는데 종요는 그것은 매일 밤마다 나타나는 아름다운 귀부인과 동침을 하여 그리 된 것이라 하자 이를 들은 그 사람이 종요에게 말하길, 그 여자는 필경 귀신일 것이니 퇴치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밤 종요가 도끼로 귀부인의 다리를 베자 귀부인이 도망갔고, 다음날 아침 그 핏자국을 따라 쫓아갔더니 웬 큰 무덤이 있었고 '그 관 속에 다름아닌 마치 살아 있는 것만 같은 그 귀부인의 시신이 들어있었다'라는 호러틱한 이야기다.

<진군전>에 따르면 진군과 함께 시대를 앞서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도 왕랑에게 까여 실행되진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차라리 사형시켜 주는 게 감사할 따름으로 사형 대신 코와 발뒤꿈치를 절단하는 형벌을 주장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형벌로 인해 신체가 훼손된 경우 죽음보다 더한 수치로 봤기 때문이다.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태평어람》 권464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엄한은 《춘추공양春秋公羊》에 밝았는데, 종요鍾繇는 《공양公羊》을 싫어하고 《좌씨左氏(=춘추좌씨전)》를 좋아했다. (종요는) 《좌씨》를 태관太官(=궁중의 요리를 담당한 관직)에, 《공양》을 떡장수에 비유하였다. 그래서 자주 엄한과 논쟁하였는데, 종요는 기민하여 논지를 잘 폈으나 엄한은 어눌하여 막상 아무 말도 못하였다.

조조군 명군사였던 순유와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 이 때문에 순유가 죽을 때, 자기 식솔들의 살림을 종요에게 맡긴다고 하였으며, 자신의 경험을 담은 병법, 전략책을 넘겼지만 아쉽게도 해당 서적은 분실되었다고 한다. <주건평전>에 따르면 순유와 친하던 종요가 순유가 죽은 후 그의 집안을 정리하며 아무를 비롯한 순유의 첩들을 시집보냈다.

문선(文選)에 기록된 조비의 편지에 따르면, 종요는 조비에게 귀중품을 강탈당한 적이 있다. 대략 세자에서 위왕 시기 쯤 종요가 평소 차고다니는 옥결(옥으로 만든 허리에 차는 고리)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조비가 기뻐하며 조식을 시켜 옥결을 빼앗아왔다. 옥결이 담긴 상자를 받으며 '오장이 다 떨리고 두근거린다'는 오글거리는 표현까지 했을만큼 좋아하면서 '진소왕이 화씨지벽을 본 것 같은 기쁨이 있으나 인상여 같이 계책으로 화씨지벽을 탈취한 속임수는 없다.'는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공(종요)의 아름다운 하사가 후하니 감히 공경스럽게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며 마치 종요가 자발적으로 진상한 것처럼 뻔뻔히 굴었다고 한다.

좀 재미있는 면모가 있는 인물인데 천수를 모두 누리고 죽기 일보직전에 득남한 정력가이다. 무려 70살 넘은 나이에 종회를 봤다. 그 탓에 종회가 6살때 종요는 세상을 떠나서 종회는 졸지에 아버지 없이 인생을 살게 되었다.

3. 삼국지연의

장안을 지키면서 서량 군벌들의 다툼을 조정하거나 곽원을 격파한 일, 혹은 이후에 문관으로서 뛰어난 면들이 거의 다 삭제되고, 마초가 장안을 공격할 때 가공동생인 종진이 전사하고 장안성을 통째로 빼앗기는 역할로만 나온다. 대표적인 연의의 피해자.

다만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하후무조진이 연달아 패배하자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실각 상태에 있던 사마의를 천거한다. 결과적으로 사마의가 촉군을 막아내긴 했지만 훗날에 권력을 찬탈했고, 종요의 아들인 종회가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소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살해당한 것을 생각하면 좀 미묘하다.

4.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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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역사와 달리 서예사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으로, 지금 우리가 정자체로 알고 있는 해서체(楷書體)를 확립한 사람이다.

그가 쓴 선시표(宣示表)가 해서체의 정본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10] 글씨를 보면 지금의 해서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표문은 황실 창고에 보관되어 오다, 8왕의 난 때 행방이 묘연해졌지만 이후 동진이 건국되면서 보관하고 있던 관리가 진상하면서 행방이 밝혀졌다. 해서첩 중에 가장 오래된 본으로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복각한 부본들만 남아있지만 왕희지는 당대에 실물을 보고 해행(楷行)을 비롯한 자신의 자체를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종요가 살던 삼국시대에는 해서라는 말이 없었고, 종요의 글씨도 해서와 예서의 과도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서예계에서 해서의 시조는 종요로 본다. '해서를 종요가 창시했다'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예서에서 해서로 서체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해서의 형태를 확립한 인물이라고 보는 쪽이 옳을 듯.

왕희지의 스승인 위부인이 종요의 필법을 본받았으며, 왕희지 자신도 종요를 존경했다고 한다. 왕희지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행·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하여 서예의 지위를 확립한 서성(書聖)이라 불리는 흠좀무한 사람. 이런 흠좀무한 사람이 존경했던 인물이라고 한다면 종요가 가지는 서예계에서의 위치는 두말 할 것이 없을 것이다.

여담으로 종요와 비슷한 케이스가 채옹이다.

천자문에도 나오는 인물. 더 나아가 천자문의 저자라는 설도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천자문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은 후대의 인물인 주흥사. 지금 남아있는 천자문도 주흥사의 것이라고 한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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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鍾皓, 생몰년도는 87 ~ 155년으로 자는 계명(季明). 임려의 장에 제수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며, 같은 영천 출신인 순숙(荀淑), 한소(韓韶), 진식(陳寔)도 유명했다.[2] 종요는 75세에 종회를 본 것으로도 유명하나 종육과 종회의 자를 볼때 종육은 종요의 3남, 종회는 종요의 4남일 가능성이 높다. 이로 보아 종요는 기록에 남지 않은 장남과 차남이 있었으며, 이들은 종회 입장에서 30살에서 50살 이상 차이나는 형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단 종육도 종회보다 최소 10살 이상 연상이다.[3] 원굉의《후한기》에 기록된 호송에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진 명단은 위장군 동승, 보국장군 복완, 시중 정충丁沖, 충집, 상서복야 종요, 상서 정부郭溥, 어사중승 동분董芬, 팽성상 유애劉艾, 빙익馮翊 (태수) 한빈韓斌, 동군태수 양중楊衆, 의랑 나소羅邵, 복덕伏德, 조유趙蕤 다. 이각에 잡혀 죽은 사성교위 저준沮儁은 추증하여 홍농태수로 삼았고 의랑議郎 후기侯祈, 상서尚書 풍석馮碩, 시중侍中 대숭臺崇을 꾸짖어 벌을 내렸다.[4] 배송지는 <종요전>에서는 분명 종요가 말 2천필을 조조에게 보내줬다고 하는데 <무제기>에는 문추랑 싸울때 조조가 보유한게 6백필이라고 하니 종요가 보내준 2000필의 말 어디로 갔냐고 기록의 과장성을 비판했지만 문추와의 전투는 관도대전의 서전격 전투였고 종요가 말을 보내준 것은 조조와 원소가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보낸것이니 문추 전사 이후 종요가 말을 보냈다고 하면 모순없이 해결된다.[5] 현대에도 70대 노인이 자식을 얻으면 뉴스에 나올 정도인데 평균 수명이 훨씬 짧았던 이 시대에 70대의 득남이라면 어떤 반응들이 나왔을지 짐작이 간다.[6] 또한 75세면 종요의 증조부 종호가 종요를 봤을 때의 나이보다 9살이나 많다. 종요 스스로도 기록에 안 남았을 뿐이지 종회를 보기 이전에 손자나 증손자를 이미 봤을 가능성도 작지 않다.[7] 장창포는 199년생이므로 둘의 나이차는 48세나 된다. 혼외자로 논란이 있었던 김용건(1946년생)이 2021년 아들이 출생 했었을 때가 74세 였고, 교제했던 여성(1985년생)이 35세로 39세의 나이차도 많은데 그보다도 9년 정도 더해진 차이다. 물론 손씨가 장창포의 태아를 독살하려고도 했을 만큼 질투가 심하긴 했지만 집안 문제인 만큼 대중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때나 지금이나 고위 공무원이 손녀뻘 첩 때문에 국가수반의 뜻도 거스르며 정실을 내쫓는다고 하면 누가 좋아할까 싶다.[8] 여담이지만 삼국지 13에서 등록무장으로 199년생 장창포를 생성하고 종요의 부인으로 지정하려고 하면 종요가 배우자 목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게임 시스템상 40세 이상 나이차가 나는 결혼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창포는 삼국지 14에서 정식으로 데뷔한다.[9] 삼국지 배주에 인용된 책.[10] 내용은 특별한 게 없다. 일반적인 표문으로 남방의 손권을 견제하여 잘 대처해야 된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