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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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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개념 시법 경칭 피휘
호칭 종류 묘호 시호 존호 연호 능호 ()
제호 왕호 봉호 궁호 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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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방식3. 한국사4. 일본사5. 기타

1. 개요

시호(, posthumous name)는 유교 문화권에서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임금으로부터 받은 이름. 혹은 전대 군주가 죽은 다음에 후대 군주가 선대에 올리는 호칭이다.

2. 방식

죽은 이의 삶이나 업적을 평가하고 기리기 위한 호칭이다.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므로 시호에 사용되는 글자에는 엄격한 의미가 정해져 있다. 시호를 받은 사람은 이미 죽었으므로, 고인드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터부시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지간히 생전에 막장 암군, 폭군이 아니었으면 좋은 의미의 글자로 만드는 편이다. 이러한 시호 글자의 의미에 대해서는 시법을 참조.

폭군이거나 신하들에게 재위 중에 폐위된 군주에게는 시법을 적용하지 않고 '폐()' 자를 넣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삼국시대 의 폐제 조방조모, 남북조시대 송(육조)의 전폐제, 후폐제 발해폐왕 대원의 등. 한편으로는 신하가 받는 시호 중에서 좋은 건 '충()', '무()', '문()' 등이 있었다. 반대로 오질, 왕개는 하도 막장이다 보니 '추()'[1]라는 시호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두 글자로 구성되기에 동양 군주의 시호는 보통 ××왕 또는 ××제(××황제)가 되며, 신료는 그 봉작에 맞춰 ××공, ××후가 된다. 다만 ××왕이라고 해서 모두 시호는 아니다. 시호가 사용되기 이전의 왕이나 멸망한 국가의 마지막 군주는 대부분 시호를 붙여줄 사람이 없어서 시호가 없이 이름 + 왕의 형태로 서술되기 때문인데, 고구려의 보장왕이나 백제 의자왕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삼국시대 초기에는 시호 제도가 없어 백제온조왕부터 삼근왕 때까지, 신라지증왕 때까지 이름 + 왕을 그대로 썼다.

군주나 군주의 정실부인은 처음부터 글자를 많이 넣거나 후대에 추가되어서 최종적으로 시호가 엄청 길어질 때가 있는데, 행사를 할 때가 아니고서야 약칭을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시호는 고대에는 짧다가 시대가 갈수록 온갖 글자를 덧붙여 장황하게 길어지는 현상을 보인다. 길어지는 기준은 중국은 당나라, 한국은 당나라의 사례를 따른 고려시대부터다.

중국사의 군주들 역시 시호가 3~4글자였다가 당나라 이후부터 길어진다. 이처럼 길어지게 된 이유는 대에 측천무후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존호(재위 중인 군주의 호칭)를 거창하게 지었고, 이것이 전통으로 남아 당현종 대에서도 그러했는데, 이후 짧았던 옛 조상들의 시호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였던 후손들이 이전 황제들의 시호에도 온갖 미사여구를 덕지덕지 붙여버렸기 때문이다.

한국사에선 신라 중대 이전까지 삼국시대에는 왕의 본명을 존호에 사용하기도 하고 불교식 표현을 사용하는 등 정립된 시법 체계가 없었다가 신라 중대 이후 태종 무열대왕,(太宗武烈大王. 당시 금석문경주 태종무열왕릉비 기준), 열조 원성대왕(烈祖元聖大王. 당시 금석문숭복사 비문 기준)처럼 시법을 준수해 두 글자를 지어 올리는 'xx대왕'의 형태로 간결하게 정립되었다.

그러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굉장히 길어졌다. 예를 들어 고려 태조의 시호는 '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應運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이며, 조선 태조는 더 길어져서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라고 했다. 다른 예로 조선 고종은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한국사에서는 당나라와 동시대인 신라에서는 기존대로 가다가 새로 세운 나라인 고려부터는 2성 6부제 등 당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이런 점도 받아들인 것이다.

중국한국, 베트남에서는 양()자를 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황제라는 호칭이 생긴 이후 이 '양'은 최악의 폭군에게 붙이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좋지 않은 시호로는 영()과 여()가 있다. '영'은 최악의 암군이란 뜻이고, '여'는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단 뜻이다. '양'자가 들어간 군주에는 수나라의 양제가 있으며 영자가 들어간 군주로는 초나라의 영왕, 진나라의 영공, 정나라정영공, 후한영제 등이 있다. '여'자가 들어간 군주에는 주나라의 여왕이 있다.

3. 한국사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시호를 사용했다. 시호를 가장 먼저 사용한 국가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초대 왕인 동명성왕이 시호를 받은 것을 보면 일찍부터 시호 제도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장지명+왕호'(고국천왕, 동천왕,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등) 혹은 '업적이나 특징+왕호'(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명왕 등) 조합으로 시호를 지었다.

광개토대왕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장지명과 업적과 특징을 섞어서 올렸음이 확인된다. 광개토대왕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인데, 이는 수도 언덕 위(國岡上)에 장사지낸, 땅을 널리 개척한(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이라는 의미이다. 고구려왕의 시호 전체가 전해지는 경우가 광개토대왕을 제외하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고구려 왕들이 대개 이러한 방식으로 시호를 받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가야수로왕이 수릉(首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삼근왕까지 이름+왕호 조합을 사용하다가 동성왕부터 시호가 붙는 임금이 나왔다.

신라법흥왕이 아버지에게 지증(智證)이란 시호를 올린 것이 최초의 시호 기록이다. 원래는 별도의 시호를 올리지 않고, '이름+왕호' 조합을 썼으나 이 지증왕의 대부터 국왕의 칭호를 왕(王)으로 고정하고 2글자의 시호를 올리는 것이 법제화되었다. 하지만 진덕여왕까지의 신라군주가 생전에도 그 칭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금석문이나 중국 기록을 통해 확인되고 있어, 실질적으로는 태종 무열왕을 최초로 시호를 받은 임금으로 본다.

신라가 935년 고려에 귀순하면서 멸망한 뒤 시호 제도는 그대로 고려로 이어졌으며, 고려에서 신하들에게도 시호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시호는 왕, 왕족, 공신, 명신에게 내려지는 명예 칭호로 자리매김했다.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 세력이 주축이 되어 건국된 조선시대에 이르러 시호는 더욱 세밀해지고 체계화되었다. 조선시대의 시호에는 종래의 시호 제도와는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폭정을 일삼다가 폐위된 왕에게 폐(廢)라는 글자를 내리는 대신 왕위에 오르기 전의 신분인 군()의 작호로 호칭하는 것이었다. 이 작호로 격하된 조선의 왕은 6대 노산군, 10대 연산군, 15대 광해군의 3명이다. 그나마 노산군은 19대 숙종 24년(1698년)에 다시 왕으로 복위되고 단종(端宗)으로 추시되면서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으므로 이후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작호로 불린 왕은 연산군과 광해군 두 사람만 남았다.

물론 시호상으로 폐(廢)라는 글자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이후 임금들의 세대에서 폐주(廢主)라고 불리었다. 말 그대로 폐위된 군주라는 의미이다. 고려·조선시대에 와서는 간신이나 권신에게는 악시(惡諡)를 내려서 일족에게 경계의 의미로 삼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아깝다 하여 시호를 내리지 않을 때도 많았다.

고려시대에는 한국 역사상 가장 안 좋은 의미의 시호를 받아본 사람이 있긴 했다. 바로 황무공(荒繆公) 이인임. 荒은 휑할 강(槺)의 통자, 繆는 그릇될 류(謬)의 통자라서 강유공으로 읽을 수도 있다. 황무(荒繆)는 "국사를 농단하고 백성을 핍박했다"는 의미로 그의 권력 남용을 비난하는 시호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인임이 죽고 조민수가 이인임의 시호를 결정해 내려주자고 조정에 건의를 했지만 시호 제정을 담당하는 전의부 관리들이 모두 발뺌을 하는지라, 전의부령 공부(孔俯, ? ~ 1416)가 독단적으로 시호를 황무로 결정해서 올려버렸다.

이인임의 처조카 하륜과 같은 집안이었던 이숭인이 시호를 정해 올린 공부를 욕했는데, 공부는 농담이었다고 받아쳐서 시호를 내리는 문제는 유야무야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이인임에게는 아무런 시호도 내려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륜은 이인임 사후 친명파인 이성계의 편으로 들어가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되었고, 이후 이방원참모 역할을 맡아 공을 세워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뒤에는 영의정부사까지 올라 권세를 누리다가 죽었다. 제대로 된 시호인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까지 받았다. 문충공은 최고의 시호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국왕들의 시호에는 '효'가 많이 들어갔다. 이는 한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중국 황제들과 같다. 반면, 한국계 왕조에서 자주적으로 올린 시호와 달리, 몽골(원나라), 명나라, 여진(청나라)에서 내린 시호에는 '충', '공'이 많이 들어갔다.

조선시대 인조(仁祖,1623~1649)가 병자호란(丙子胡亂,1636~1637)에서 패배하며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이후의 조선 왕들은 청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으나 이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조선 측 기록에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로부터 인조는 장목왕(莊穆王), 효종은 충선왕(忠宣王), 현종(顯宗)은 장각왕(莊恪王), 숙종(肅宗)은 희순왕(僖順王), 경종(景宗)은 각공왕(恪恭王), 영조(英祖)는 장순왕(莊順王), 정조(正祖)는 공선왕(恭宣王), 순조(純祖)는 선각왕(宣恪王), 익종(翼宗)은 강목왕(康穆王), 헌종(憲宗)은 장숙왕(莊肅王), 철종(哲宗)은 충경왕(忠敬王)의 시호를 받았다.

경술국치 3일 전인 융희 4년(1910) 8월 26일순종이 이간(李揀) 등 57명에게 시호를 수여한 것이 한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군주에 의한 공식 시호 부여이다. 그리고 대한제국 멸망 후,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왕직 장관 민영기(閔泳綺, 1858 ~ 1927)가 순종의 시호 망단자로 문온(文溫), 무녕(武寧), 돈인(敦仁), 성경(誠敬)을 올리자 후계자인 영친왕이 그대로 하라고 정한 시호 문온무녕돈인성경(文溫武寧敦仁誠敬)이 한국사에 기록된 마지막 공식 시호 부여이다.

한일합방 직전의 대한제국은 유난히 시호 수여가 많은데, 이는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이 주도하였다. 실학자인 박지원, 정약용 등도 이 때 시호를 받았다. 이완용은 시호 수여와 함께 당시까지 공식적으론 죄인이었던 인사들을 신원해주는 작업도 동시에 행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 세상을 떠난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이구의 시호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주관하여 정한 사시(私諡)에 해당한다. 다만 순정효황후의 시호는 사시이기는 하지만, 신위가 종묘에 부묘될 때 조선의 전통에 따라 옥책을 제작해 봉안한 마지막 사례였다.

조선왕조 시호 부여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4. 일본사

일본은 시호를 내리는 방법이 체계화되지 않았다. 최초의 관찬사서라고 불리는 일본서기고사기에 등장하는 천황의 시·존호는 일본 고유의 방식인 와시(和諡)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칸시(漢諡)가 혼재되어 있다.

와시는 화풍시호의 줄임말로 국풍시호(国風諡号)라고도 하는데 신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헤이안 시대 전기까지 사용되다 54대 닌묘 덴노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칸시, 즉 한풍시호는 말 그대로 한나라(중국)의 시호라는 뜻인데 유교적 시법을 적용하여 올리는 시호로 나라 시대에 이르러 정착했다. 나라 시대 이전 선대 천황들의 시호는 문신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 722 ~ 785)[2]가 지어올린 것이라 전한다.

일본의 시법에선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악시(惡諡)는 적용하지 않았으며, 방계로 제위를 계승한 천황은 시호에 빛 광()자를 사용했는데 이는 방계로써 한나라 황실을 부흥한 광무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를 전후해서부터는 능이 위치한 지명이나[3] 해당 천황의 치세 중 대표적인 연호[4]를 따서 천황을 지칭하기도 했다.

가령 58대 고코 덴노장지명에서 유래한 고마쓰노미카도(小松帝), 고타무라노미카도(後田邑帝)나 치세 중 연호[5]인 닌나(仁和)에서 따와 닌나노미카도(仁和帝)로도 불렸다.

이런 방법은 본래 일종의 ‘별칭’개념이었으나 헤이안 시대 중반기에 이르러 율령제가 형해화되고 인세이가 관례화되면서, 58대 고코 덴노를 마지막으로 추시가 중단된 칸시를 대체하게 되는데 이를 추호(追号) 또는 원호(院号)라고 한다. 시호가 망자에 대한 평가의 의미가 담긴 것에 비해 추호는 단순히 망자를 특정하는 기능만 지니는데 구체적인 명명 유형은 하단과 같다.
다만 헤이안 시대 이후로 시호의 사용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닌데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천황에 대해선 그 원령을 위로하려 O의 칸시를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경우는 스토쿠인[9], 안토쿠 덴노, 겐토쿠인[10], 준토쿠인[11], 총 4가지에 불과하다. 96대 고다이고 덴노는 사후 북조측에서 겐토쿠(元德)의 시호를 올리는 방안을 고려했으나 실행하지 않았다.
추호는 보통 OO인(院)의 형식으로 올려졌는데, 천황 외의 사람도 사후에 이러한 형식으로 추시될 수 있었다. 가령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후 안고쿠인(安国院)의 계명으로 일컬어졌다. 국학존황양이 사상이 대두한 에도 시대에 이르러선 나카이 다케야마와 도쿠가와 나리야키 등에게 어떻게 천황의 추호랑 일반인의 추호랑 형식이 같을 수 있나며 비판받았다.

이러한 여론에 힘입어 시호(칸시)는 에도 시대 후기인 119대 고카쿠 덴노대에 이르러 부활한다. 기존의 OO인으로 올려지던 형식도 OO덴노의 형식으로 바뀌었다.

메이지 덴노가 즉위한 후 메이지 유신을 선포하면서 한 천황의 치세당 하나의 연호만을 쓰는 일세일원제를 확립했다.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자 연호인 메이지(明治)가 시호 대신 추시되었으며, 이후의 천황에게도 같은 방식을 적용했다. 다이쇼 덴노대에는 고카쿠 덴노 이전의 OO인과 이후의 OO덴노의 형태로 혼재되어 있던 시호도 OO덴노의 형태로 통일됐다.

가장 최근에 추시를 받은 천황은 1989년 1월 7일에 사망한 124대 천황 히로히토(裕仁)로, 추시된 시호는 역시 생전에 사용한 연호 쇼와였다. 그의 뒤를 이어 125대 천황 아키히토(明仁)와 126대 천황 나루히토(徳仁)가 즉위했는데, 관례상 아키히토와 나루히토 사망 시에 추시될 시호는 헤이세이, 레이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도쿠가와 고산케의 하나인 미토 도쿠가와 가문은 유교를 숭상하는 기풍이 강해 역대 당주들에게 중국 춘추시대 제후들처럼 X공() 시호를 붙였다. 초대 당주인 도쿠가와 요리후사의 시호는 위공(威公)이고 2대 당주인 도쿠가와 미츠쿠니의 시호는 의공(義公)이다. 일본어 위키를 보면 화족제도가 폐지된 이후 사망한 당주에게도 시호를 붙인 걸로 보아, 가문 내에서 자체적으로 붙인 사시(私諡)로 보인다.

류큐 왕국중국 대륙과 교류했지만 시호 제도 자체가 없었다. 본명을 그대로 써 예를 들어 "쇼(성씨)+켄(이름)+왕(尚賢王)"이라 불렀다.

5. 기타

묘호와는 다르다. 둘다 죽은 뒤에 붙는다는 것은 같으나, 원칙적으로 그 사람에게 붙는 명칭은 시호이고, 묘호는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측천무후 이후 시호가 점차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시호를 호칭으로 쓰기 부적절해지자 대신 당나라 이후부터는 묘호가 군주의 호칭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실상 당대 이후 황제들의 시호는 인지도가 거의 없다.

그런데 시호든 묘호든 둘 다 생전에 붙는 이름이 아니다. 물론 존호는 생전에 직접 지어다 바치는 것이지만 이것도 시호 못지 않게 길 때가 대부분이라서 문제. 생전에 적당한 호칭을 만들 필요가 생겨났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일세일원제'를 도입하여 군주의 집권기와 연호의 시기를 맞춰 해당 연호로 군주를 호칭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위의 설명에서 보듯이, 생존해 있는 임금은 시호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지칭하여 시호로 부르거나 신하들이 시호로 부를 수가 없었다. 즉, 삼국지를 다룬 작품에서 헌제가 스스로를 '헌제'라고 지칭한다면 명백한 고증 오류이다.

시호가 정해지기 전, 즉 죽거나 합법적으로 퇴위하기 전 재위하고 있는 임금을 제3자가 가리킬 땐 '지금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금상(今上)이라는 말을 썼다. 대비나 상왕처럼 족보상으로는 왕보다 높은 사람들은 주상(主上)을 사용했고, 왕이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땐 여(余)나 과인(寡人)을 주로 사용했다. 사기의 무제본기의 원제가 금상본기인데 무제 생전에 책을 썼기 때문에 무제가 아니라 금상이라고 한 것이다.

역사상 가장 긴 시호는 대월(베트남)의 찐끼엠에게 붙은 232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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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까지 범위를 넓혀봐도 이 정도로 긴 시호는 없다. 중국에서 가장 긴 시호를 받은 금룡대왕이 40자를 조금 넘길 뿐이다.

황후의 시호는 청나라의 경우 효(孝)+시호 1글자+남편인 황제의 시호 (끝 글자)+황후, 이렇게 5글자였다. 가령 서태후로 잘 알려진 효흠현황후는 남편 함풍제의 시호가 현황제였다. 대한제국은 5글자였던 건 같지만 명나라 초기와 비슷하게, 앞에 '효'를 일괄적으로 붙이지 않고 시호가 2글자였다.(예: 명성태황후, 순정효황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남편인 천황의 시호가 따로 없으니만큼 '시호 2글자 + 황후'로 구성된다.

가장 긴 왕후의 시호는 조선 문조의 아내 신정왕후가 받았는데, 이쪽은 59자에 달한다.
효유헌성선경정인 자혜홍덕순화문광
(孝裕獻聖宣敬正仁 慈惠弘德純化文光)
원성숙렬명수협천 융목수령희강현정
(元成肅烈明粹協天 隆穆壽寧禧康顯定)
휘안흠륜홍경태운 창복희상의모예헌
(徽安欽倫洪慶泰運 昌福熙祥懿謨睿憲)
돈장계지경훈철범 신정익황후
(敦章啓祉景勳哲範 神貞翼皇后)
이는 방계 혈통으로 즉위한 고종이 칭제할 때 정통성 확보를 위해, 양부모의 시호를 엄청나게 올려준 것임을 감안하고 봐야 한다.


[1] 바로 추하다 할때 그 '추' 자다.[2] 제38대 덴지 덴노의 고손자이며, 훗날 천황으로 즉위한 것으로 인정된 제39대 고분 덴노(오토모 황자)의 손자이다.[3] 흥미롭게도 이는 고구려의 존시법과 같은 형식이다.[4] 일본은 다이카 개신 이래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5] 이 시기 일본은 일세일원제를 시행하지 않았다. 다만 고코 덴노는 재위 중 닌나 연호만 사용했다. 연호/일본 항목 참조.[6] 헤이제이 덴노의 추호 헤이제이(平城)은 헤이조쿄(平城京)를 의미하는데 이는 나라(奈良)의 이칭이다. 즉 추호와 별칭이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7] 여성 덴노로, 8세기 아스카 시대의 여성 덴노였던 43대 겐메이 덴노(元明天皇)와 그의 딸 44대 겐쇼 덴노(元正天皇)의 시호에서 따왔다.[8] 결사팔대인 7대 고레이 덴노(孝靈天皇)와 그의 아들 8대 고겐 덴노(孝元天皇)의 시호에서 따왔다.[9] 사누키인(讚岐院)에서 변경[10] 오키인(隱岐院)에서 변경. 이후 손자인 88대 고사가 덴노가 즉위하면서 고토바인으로 변경.[11] 사도인(佐渡院)에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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