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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16:37:15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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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이인인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친일파에 대한 내용은 이완용(187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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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1]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7><tablewidth=100%><#bc002d><tablebgcolor=#fff,#1f2023> 정미칠적 ||

||<-8><tablewidth=100%><#bc002d><tablebgcolor=#fff,#1f2023> 경술국적 ||
[1] 박제순 대신 체결에 적극적이었던 이하영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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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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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리대신
(1894~1895)
조선 내각총리대신
(1895~1896)
초대

김홍집
초대

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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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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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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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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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의정
(1897~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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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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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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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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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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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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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의정대신
(1905~1907)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1907~1910)
제20대

민영규
제21대

조병호
제22대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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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제22대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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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정양
제2대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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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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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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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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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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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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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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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직
제10대

조병호
제11대

이도재
제12대

김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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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구
제14대

신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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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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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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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대

이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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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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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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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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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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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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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재
제6대

민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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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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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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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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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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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rowcolor=#87ceed> 초대
안경수
제2대
이완용
제3대
서재필
제4대
윤치호
간부
위원장 이완용 고문 서재필
위원
김가진 남궁억 박정양 송헌빈
안창호 오세창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1] 취소선 쳐진 인물은 독립협회에서 제명된 인물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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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조선 총독부 정무총감)
초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제2대

미즈노
렌타로
제3대

아리요시
주이치
제4대

시모오카
주지
제5대

유아사
구라헤이
제6대

이케가미
시로
제7대

코다마
히데오
제8대

이마이다
기요노리
제9대

오노
로쿠이치로
제10대

다나카
다케오
제11대

엔도
류사쿠
부의장
초대

김윤식
제2대

이완용
제3대

박영효
제4대

민병석
제5대

윤덕영
제6대

이진호
제7대

박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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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colbgcolor=#fff,#1f2023> 고영희 권중현 민상호 박제순 송병준
이근상 이근택 이완용 이재곤 이지용
이하영 임선준 장석주 조중응 조희연
조민희 한창수
찬의
강경희 권봉수 김만수 김사묵 김영한
남규희 민상호 박경양 박승봉 박제빈
박중양 염중모 유맹 유정수 윤치오
이건춘 이겸제 이재정 이준상 정인흥
조영희 조희문 한창수 홍승목 홍종억
부찬의
고원식 구희서 권태환 김교성 김낙헌
김명규 김명수 김준용 김필희 김한규
김한목 나수연 민건식 민원식 박제환
박희양 서상훈 서회보 성하국 송지헌
송헌빈 신우선 신태유 어윤적 엄태영
오재풍 오제영 윤치오 이도익 이만규
이봉로 이원용 이항직 정동식 정병조
정진홍 조병건 조재영 조제환 조원성
최상돈 한동이 허진 홍우철 홍운표
홍재하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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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고희경 권중현 민병석 민영기 박영효
송병준 이하영 윤덕영 이윤용
부찬의
김현수
칙임 참의
김영진 김영한 김한목 남규희 민상호
민영찬 민형식 박승봉 박이양 박기양
박상준 박승봉 박의병 박제빈 박중양
백인기 상호 서상훈 신석린 신응희
어윤적 엄준원 염중모 유맹 유성준
유정수 유혁로 이건춘 이겸제 정진홍
조민희 조진태 조영희 조희문 한상룡
한진창
주임 참의
강병옥 고원훈 권태환 김갑순 김교성
김기태 김명규 김명준 김상설 김상섭
김연상 김영무 김정태 김준용 김창한
김필희 김현수 나수연 노창안 박경석
민건식 민영은 박기동 박기순 박봉주
박이양 박제환 박종렬 박흥규 박희양
방인혁 서병조 선우순 송종헌 송지헌
신석우 신태유 신창휴 심준택 심환진
안병길 양재홍 오재풍 오태환 원덕상
유기호 유빈겸 유익환 유흥세 윤치소
이강원 이근우 이기승 이도익 이동우
이만규 이병렬 이병학 이택규 이택현
이항직 이흥재 이희덕 장대익 장도
장상철 장응상 장직상 장인원 전석영
정동식 정란교 정병조 정순현 정재학
정태균 정호봉 조병건 천장욱 최석하
피성호 한영원 한상봉 한창동 허명훈
홍성연 현은
참의
구연수 김윤정 김춘희 김한목 김희작
남규희 민병석 박기순 원응상 윤갑병
윤정현 장헌식 정건유 현기봉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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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민병석 윤덕영 이윤용
칙임 참의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서규 김영진
김윤정 남궁영 민상호 박두영 박상준
박영철 박용구 박중양 서상훈 신석린
어담 엄준원 염중모 유정수 유진순
유혁로 윤갑병 이겸제 이범익 이진호
장헌식 정교원 조경하 조성근 조희문
주영환 최린 한규복 한상룡 한진창
홍종국
주임 참의
강동희 강번 고일청 김경진 김기수
김기홍 김도현 김두찬 김병규 김사연
김상설 김상형 김상회 김신석 김영택
김정석 김정호 김종흡 김진수 김창수
김한규 김한목 김한승 남백우 노영환
문종구 민병덕 박기석 박종렬 박보양
박봉진 박철희 박희옥 방의석 방태영
서병조 서병주 석명선 선우순 성원경
손재하 손조봉 송지헌 신희련 안종철
오세호 오태환 원덕상 유승흠 유태설
이경식 이교식 이근수 이근우 이기찬
이기승 이동우 이명구 이방협 이승우
이병렬 이선호 이은우 이종섭 이충건
이진호 이택규 이희덕 이희적 인창환
장대익 장석원 장직상 장헌근 정관조
정란교 정대현 정석모 정석용 정해붕
조병상 주영환 지희열 최남선 최양호
최연국 최윤 최윤주 최준집 최지환
최창조 하준석 한영원 현준호 현헌
홍치업 황종국
참의
강필성 김병원 김성규 김제하 박상준
어윤적 유만겸 유성준 진희규 홍정철
}}}}}}}}}
[ 1940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1000><bgcolor=#062861><-5> 고문 ||
김윤정 박중양 윤치호 이범익 이진호
한상룡
칙임 참의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사연 김연수
김영배 김영진 김우영 김윤정 김태석
김화준 박두영 박상준 서상훈 신석린
안종철 원덕상 유만겸 유진순 이겸제
이경식 이계한 이병길 이원보 장직상
장헌식 정교원 정란교 정연기 진학문
최린 한규복
주임 참의
강이황 권중식 김경진 김동준 김병욱
김부원 김사연 김신석 김원근 김재환
김태집 노준영 민재기 박지근 박창하
박필병 방의석 서병조 손창식 송문화
신현구 양재창 원병희 위정학 이경식
이기찬 이승우 이신용 이영찬 이익화
이종덕 임창수 장용관 장윤식 장준영
장직상 전덕룡 조병상 조상옥 차남진
최윤 최승렬 최정묵 최준집 한익교
한정석 현준호 황종국
참의
김하섭 문명기 이승구
||
†. 재직 중 사망.
}}}}}}}}}}}}}}}}}} ||
제2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대한제국 제22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李完用[1] | Ye Wan-yong
파일:이완용.jpg
출생 <colbgcolor=#FFF,#1f2023> 1858년 7월 17일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2]
사망 1926년 2월 11일[3] (향년 67세)
경기도 경성부 옥인동[4][5]
묘소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본관 우봉 이씨 (牛峰 李氏)[6]
경덕(敬德)
일당(一堂)
재임기간 제22대 내각총리대신
1907년 6월 24일 ~ 1910년 8월 29일[7]
제2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1912년 8월 9일 ~ 1926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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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부모 아버지 이석준 (생부)[8] · 이호준(李鎬俊) (양부)
어머니 신씨 (생모) · 민씨 (양모)
형제자매 이윤용
배우자 양주 조씨
자녀 장남 이승구(李升九)[9]
차남 이항구
손자 이병길[10]
종교 불교[11]
소속 단체
[[독립협회|
파일:독립협회 검은색 글자.svg
]] (제명)[12]
작위 조선귀족 후작
약력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조선귀족 백작, 중추원 고문
조선귀족 후작, 중추원 부의장
비고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친일인명사전 등재
}}}}}}}}}
파일:이완용 67세.jpg
노년의 이완용
파일:20190419_56_10157.png
1907년 이완용 내각 출범 기념 사진. 가운데 아이는 영친왕. 영친왕 바로 왼쪽 뒤에 있는 인물이 이완용이다.

1. 개요2. 생애3. 평가4. 가족5. 여담
5.1. 재산과 호의호식
6. 관련 어록7. 대중매체에서
7.1. 영화7.2. 연극7.3. 드라마7.4. 게임7.5. 만화7.6. 소설
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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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관료이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일본 제국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린 후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춘생문 사건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이후에 독립협회에 합류했지만 친러파였다는 이유로 제명당했고, 양부인 이호준이 사망하는 등의 악재가 겹치자 몇년간 은둔해 있었다. 1904년 복귀해 친일파로 전향했다. 친일파로서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체결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으며,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유일하게 모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후대에도 친일파, 매국노의 대명사격으로 일컬어지곤 한다.[13]

공식적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이가 완용'. 사실 이완용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쓰던 동시대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한국명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완용/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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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관료로서의 능력은 출중하나, 그것을 매국에 악용해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완용은 생전에도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판단이 명확했으며 처세술에 능한, 흔히 말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이완용과 비슷한 시기에 같이 매국 행위를 해 조선귀족 직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후 처신을 잘못하거나 재산 관리에 실패하여 일제강점기 중에 몰락하거나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았다. 매국도 능력이 없으면 못 한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를 매국 행위와 개인의 이득을 위해 타인에게 크나큰 피해를 가하는 일에 사용했으니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것.

관료로서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지만, 의외로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가 광무개혁 중반에는 부친상 때문에 등용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나, 초반에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대신직이 아닌 관찰사직에 머물렀다. 당시 대신직에는 서자였던 김가진도 등용되었는데, (적어도 신분적으로는) 이완용이 안 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관찰사로서의 문제 해결 능력은 높이 평가 할 수 있다.[14] 이러한 능력을 가진 다른 관료는 윤영렬 정도로 볼 수 있다.[15]

을사조약 체결, 고종의 강제 퇴위 주도,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 체결 등 악질적인 친일 행각으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라 하면 바로 이완용이 연상될 정도로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 그가 사망한 지 [age(1926-02-11)]년이 된 현재까지도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고 있다.[16]

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관점에 따라서 이완용보다 더 악질이라 볼 수 있는 송병준[17], 윤덕영 같은 경우도 이 정도로 악명을 지속적으로 얻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악랄한 매국노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의 후손들도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까지 한 다음 외국으로 도망가는 악행을 저질러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현대에 와서조차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나머지 넷은 몰라도 이완용 만큼은 대부분 알고 있으며,[18] 북한의 김일성과 함께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자 한민족의 반역자로 평가받고 있다.[19]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은 거의 서양 국가에서 누군가를 유다 이스카리옷,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모욕으로 통한다. 이완용의 유명세 때문에 이완용을 제외한 을사오적들은 이름 정도만 알려져 있고,[20] 비을사오적 매국노들은 여러 자극적인 에피소드들을 남긴 송병준, 윤덕영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국권 피탈에 관여하지 않은 민영휘보다도 인지도가 떨어지는 상황이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우페이푸량스이를 비판할 때 모욕적 표현으로 쓰는 사례가 있었다.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
호러스 뉴턴 알렌
이완용은 처세술에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이었다. 이완용과 교류했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은 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머리가 잘 돌아가고 영민하지만, 영혼이 없는 것 같은 기계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다만 의외로 검소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21]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22]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 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래서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23]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은 생전에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한문이라면 눈 감고도 한시 몇 편 줄줄 쓸 만큼 통달했을 사대부 입장에선 어지간한 단어는 다 한자어인지라 문법 몇 개만 익히면 되는 일본어는 전혀 배우지 않고, 완전 이질적인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배워 익힌 걸 감안하면 굳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영어는 처음엔 육영공원에서 배웠지만, 서툴러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는 큰 활약을 못했다. 하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중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들보다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테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거나 통역사와 함께 다녔으며,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과 했다. 여건이 충분함에도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아서 그가 공직에 있을 때 아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토나 테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1906년 학부대신[24] 재임 시절 공교육에 일본어 수업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수업시수가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일본에서는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4. 가족

본인의 평판이 워낙 나빴던 탓에, 그의 아들 이승구[25]가 26세로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을 해서 아들이 자살한 것이라는 조롱성 루머가 돌았다. 이 내용은 매천야록에도 기재되어 있어서 흔히 이 에피소드를 사실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본래부터 몸이 허약해서 을사조약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에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해당 기사.

양부에게는 효자였다고 한다. 공무로 바빴음에도 10리가 넘는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며 양아버지 이호준을 문안하였고, 양 이복형[26]인 의붓형 이윤용이 서자였음에도 서로 우애가 돈독했다고. 가문 시조묘를 찾아 복원하기도 했다.

5. 여담

파일:낙서.jpg
파일:Yamagata_Aritomo.jpg* 이 사진이 이완용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이 사진의 인물은 일본의 제3·9대 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이완용의 사진이 아니다.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332912494.png
이완용의 친필.

5.1. 재산과 호의호식

파일:external/t1.daumcdn.net/20160807164403694gdad.jpg 파일:external/t1.daumcdn.net/20160807164403839gbwr.jpg
옥인동의 이완용 자택(1909년) 출처 이완용 사망 당시의 자택 모습 출처[55]
검약한 습관이 있었다지만, 그런 습관과는 별개로 자신과 자신 일가의 치부에 상당히 열심이었다.[56] 이런 이완용만큼이나 친일 행위로 많은 재산을 치부한 사람들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휘[57]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 뿐이였다. 민영휘는 원래 친청파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됐으며,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재산이 많은 조선인은 윤덕영이였고 이완용이 2번째였다.

친일인명사전에서 확인된 바로는 이완용의 재산은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 원 가량 된다고 한다. 이완용은 해방 직전에 땅들을 다 팔아서 현금화했다고 한다. 당시 이완용이 소유한 땅은 여의도의 8배 면적이었다.

이완용이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400억~450억 원이 넘는데, 이는 또한 병탄 전의 자기 일가의 재산에 비해 3배나 늘어난 것이다. 최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고 난리법석을 부리는 것도 이처럼 막대한 재산 때문이리라. 물론 몇몇 개념있는 일부 후손들은 자신의 성을 바꿔가면서까지 이런 땅 찾는 행태에 반대하기도 했다.

게다가 호의호식하던 이완용 일가는 당시에는 굉장한 사치품이던 자동차도 타고 다녔다. 그 시절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고종과 순종에게 아첨을 하기 위해 자신이 타고 다닐 차와 조선 왕실용 어차를 들여왔는데[58] 고종과 순종과 왕실을 위한 어차로는 캐딜락다임러[59]오버랜드[60]를 들여왔고 데라우치 자신은 위슬리[61] 차를 타고 다녔으며 그 외에 이완용과 송병준을 포함한 고관대작들도 뷰익이나 포드쉐보레 등등의 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포드나 쉐보레 등은 현재는 그냥 그저 그런 수입차/국내 생산 차량이지만, 이 당시 자동차가 귀할 시절에는 조선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요 고급품이었다. 기록 사진으로 당시 고관들이 탔던 고급 자동차들이 덕수궁 석조전 앞에 세워진 장면들도 있다.

자동차와 관련해서는 이완용 생전인 1912년에 그의 아들 이항구가 술에 취한 채로 사위 홍운표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던 어린아이의 다리를 부러지게 해 놓고는 배상은커녕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이것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며 큰 공분을 산 일이 있었다.[62]참고

사실 이완용은 재산이 물려받은 금액이나 은사금으로 받은 금액은 미미하였고[63] 거의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를 통해 벌어들인 것이었다. 당시 이완용은 경기도전라도 일대에 여의도의 7.7배 정도 면적의 땅을 보유했으며참고 집을 여러 번 옮긴 부동산 투기의 선구자. 이 중 훗날 국가에서 귀속시킨 것이 10,900m2(3천 평 남짓)인데, 이는 그의 땅의 0.05% 정도다. 몰수원칙상 그가 받은 은사금과 이자를 고려한 금액만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1992년 소송을 걸어 되찾았고, 증손자 이윤형[64]은 소송으로 되찾은 땅을 최대한 빨리 팔아버린 뒤 캐나다로 이민갔다. # 땅을 돌려줬다는 이유라는 게 민족정기보다 민사법이 더 앞선다는 논지였다.[65] 이후 이윤형은 2002년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은둔 생활을 하다가 2005년 5월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고는 전국 각지에 분포한 이완용 명의의 토지를 찾아다니며 소송을 지속해왔는데, 2006년 4월 시사저널 보도에 따르면 이윤형이 증조부의 재산을 찾고자 하는 이유는 '재단을 하나 만들어서 조금이나마 증조부님 명예도 회복해드리고 싶고 국가적으로 좋은 일에 쓰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 다만 이 보도가 나간 후 항의가 빗발친 나머지 재단을 설립할 의욕이 끊겼다고 하고, 이후 근황은 불명.[66] # 한편 이윤형의 아들은 2005년 11월 기준으로 단칸방에서 살아갈 정도로 완전히 몰락한 상황이었다고 전해진다. #[67]

6. 관련 어록

구문공신 이완용은 사후 세계 염라국에 들어갔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된다.[68]
1926년 2월 13일 동아일보, 이완용 사망에 대한 기사.#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부등켰던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아야지.
1926년 2월 13일[69] 동아일보 1면에 실린 기사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우리는 미국 같은 부강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해야지,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폴란드 같은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70]
1896년 7월, 독립협회 강연 중. 그러나 정작 한국을 남의 나라의 노예로 만들었다.
해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때는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이완용이 일장기에 써 넣은 글, 송태조 조광윤에게 바치는 영일시를 인용해 일본을 찬양한 구절
이토 히로부미: 甘雨初來霑萬人(감우초래점만인)
단비가 처음 내려 만사람을 적셔주고
모리 타이라이: 咸寧殿上露華新(함녕전상로화신)
함녕전 위에 이슬 빛이 새로워지니
소네 아라스케: 扶桑槿域何論態(부상근역하론태)
부상[71]근역[72]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이완용: 兩地一家天下春(양지일가천하춘)
두 땅이 한집을 이루니 천하가 봄이로다
190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열린 연회에서 한일합방의 주역들인 통감 이토 히로부미, 궁내대신 모리 타이라이,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기승전결 한 줄씩 돌아가며 지은 합작시[73] 한일합방 사이퍼
아아,[74] 조선 동포여. 세상 말에 죽음 중에서 삶을 구한다는 말이 있더니 지금에 조선인민은 삶 중에 죽음을 구하니 이 어찌된 일이오. 얼핏 알아듣기 용이하도록 일언을 진하노니 제군은 잠깐 정신을 수습하고 잘 듣기를 바라노라.
(중략)
독립운동이라는 선동이 허설許說이라 망동이라 하는데 대하여는 각 유지인사의 천언만어가 끊이지 않아도 일향자각치 못하니 근자에 여余(=이완용)가 다시 말해도 제군의 귀에 들어가지 아니할 줄 스스로 의심하여 췌언(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거니와
(중략)
처음에 무지몰각한 아동배가 선동하고 그 후에 각 지방에서 역시 소문을 듣고 치안을 방해하는지라 당국에서 즉시에 엄중이 진압하려면 피해가 없겠냐마는 몰각자 부류를 돌아가게 하고 관대한 수단을 사용하여 일차 유고諭告와 이차 유고가 내려와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기자기질其子其姪(어린 것들)이 여전히 몰각한 행동이 있어 일차 효유하고 효유에 따르지 않으면 다음으로 그것을 책責하니 책한 후에 따르지 않으면 필경에 달지초지撻之楚之(매를 들어 때린다)는 어린 것들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어린 것들을 선도코자 함이요, 둘째, 다른 어린 것들에게 오염치 못하게 함이라.
이차 유고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아니라 관청을 침범하여 난폭한 행동을 하니 당국에서 엄중이 조치함은 부득이한 것이니라. 근일에 모모처에서 듣기로는 많은 인민이 죽고 다쳤다하니 그 죽고 다친 인민 중에는 혹 주창한 자도 있겠지마는 그 다수는 부창부수한 자로 여余는 믿고 있노라. 농사 때가 임박하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한 즉 안락이 있을 것이요, 망동을 따라하면 즉 죽고 다침이 목전에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삶 중에 죽음을 구함이 아닌가. 자신이 삶 중에 죽음을 구할 뿐아니라 망동함으로 인하여 그 부근에서 횡액으로 죽고 다침에 이르는 자가 많이 있으니 이 무슨 일인가. 눈뜨고 못 볼 일이오, 귀로도 듣지 못 할 일이로다.
(이하 생략)
1919년 4월 3.1 운동 당시 발표문.#

7. 대중매체에서

행적의 질이 매우 나쁜 인물이다 보니 대중매체에서도 매우 안 좋은 꼴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7.1. 영화

7.2. 연극

7.3. 드라마

7.4. 게임

7.5. 만화

7.6. 소설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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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제순 대신 체결에 적극적이었던 이하영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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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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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이상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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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씨개명으로 등록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完用). 성인 '이(李)'를 리노이에(李家)로 바꾸었다. 또 이름인 '완용(完用)'을 일본 한자음으로 읽었다.[2]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558. 원주민의 구증을 토대로 밝혀진 주소다. 이 지역에 판교신도시가 지어졌는데, 이 와중에 이완용 생가 터가 아파트랑 학교파묻혔다. 집 터에는 중학교가 들어선다는 내용으로 보아 백현마을8단지아파트와 신백현중학교 사이로 추정된다. 과거 푯돌을 세우려고 추진하기도 했다. 2023년에 실제로 푯돌을 세웠다가 며칠만에 다시 철거했다.[3] 13시 20분[4]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5] 1909년 이재명 의사의 암살 미수 이후 폐에 상처를 입어 매년 겨울철만 되면 폐렴천식 등으로 고통스러워 했다. 1926년에는 호전되는 듯이 보여 1월 12일 총독부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서 다소 무리를 했었고 부축을 받으면서 귀가했다. 이후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1926년 2월 11일 이완용은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차남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폐렴으로 인해 사망했다.[6] 우봉 이씨 23세손 ○용(○用) 항렬. 본래 참판공파(參判公派)였으나 감찰공파(監察公派) 집안으로 양자를 갔다. 2002년판 우봉이씨세보 중에 인권(仁卷, 1권) 821(八二一)쪽에 이름이 있다.[7] 임기 중 이재명의 암살시도로 부상을 입게 되었다. 당시 내부대신이었던 박제순이 임시로 내각총리대신을 맡게 되었고, 이완용은 치료를 받은 후 다시 내각총리대신으로 복귀했다.[8] 이명은 이호석(李鎬奭)[9] 계몽운동에 참가했고, 경술국치 이전에 사망하였다.[10] 이항구의 아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반민족행위자에 할아버지 이완용, 아버지 이항구와 함께 3대가 모두 선정되었다.[11] 불교옹호회 고문을 역임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12] 1898년 7월 11일 제명되었다.[13] 대부분 을사오적이 누군지 물어보면 다른 인물들은 몰라도 직접 국새를 가져다 찍은 박제순과 이완용은 아는 경우가 많다.[14] 1898년 부안군 줄포면에 해일이 들이닥쳐서 수많은 이재민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는데, 이 당시 이완용은 전북 관찰사로서 직접 부안을 방문해 참상 현장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하도록 지시하는 등 수습과 구호 사업에 힘썼다. 이에 군수와 주민들은 이완용의 구호 사업을 기리기 위해 휼민선정비(恤民善政碑)라는 이름의 공덕비를 세웠다. 그러나 현재 이 공덕비를 놓고 "보존하자 vs 없애버리자" 등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다.[15] 윤영렬은 안성군수로 재직 중에 마장수라는 도적떼를 토벌하고, 만주에서 경기도까지 남하한 만주족 마적단을 소탕했다. 그리고 흉년과 질병이라는 난감한 상황 속에서 이전의 군수들이 해결하지 못 한 역둔토(驛屯土)의 밀린 세금을 거두어 납부하는 한편, 안성군 호포(戶布)의 절반을 탕감받고, "의병들이 관청 서류를 모두 불에 태워 밀린 세금의 납부가 어렵다."고 하소연해서 세금 탕감을 받아내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줬다. 지나친 명성을 부담스러워한 윤영렬은 안성군 주민들에게 자신의 선정비를 세우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주민들은 오히려 선정비를 4개나 세웠다.[16] 구글매국노 이미지 검색을 하면 대부분의 사진이 이완용 관련사진일 정도이다(...). (캡쳐 이미지)[17]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어전 회의에서 고종 황제의 면전에 대고 "덴노께 사죄해야 한다.", "자결을 하라!"는 등의 망발을 퍼부었으며 이후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 황제가 즉위하여 이완용 내각이 들어선 후엔 농상공부대신 ·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 ·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행적만 보면 이완용과 맞먹는 수준의 매국노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이완용만 못한데, 왜냐하면 그 독한 친일파 종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의 악질이라 일제 입장에서도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웠던 작자여서 은근슬쩍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본래 신분도 천해서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라 말 그대로 똥오줌 못 가리고 양아치 짓을 서슴지 않고 다녔고, 그래서 꼴에 먹물 좀 먹었다고 말귀는 알아듣고 최소한의 눈치가 있는 이완용이 더 부리기 쉬워 이 쪽을 더 이용해 먹었다. 더구나 이쪽은 무려 강화도 조약 때부터 친일이였기에 더욱 지독한 셈이다.[18] 특히 이지용과 박제순의 경우(다만 박제순은 을사조약 한정.) 어느정도 정상짐착의 여지가 존재하여, 그들의 후손들은 이완용의 후손들처럼 폐를 끼치는 일이 별로 없거나 오히려 그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는 정반대다.[19] 그도 그럴 것이, 이완용은 '국권피탈 3조약에 모두 찬성한 것을 넘어 체결에 직접적으로 참여 + 강제병합 후에도 일제의 학정에 아이디어를 제공 + 35년(을사조약 직후까지 포함한 40년) 동안 동포들을 지옥에 집어넣었음 + 그럼에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죗값과 비교하면 매우 편하게 죽음' 때문에 영원히 한국인들의 지탄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20] 그나마 박제순이 어느 정도 악명이 있긴 하다.[21]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린다는 표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22] 아무나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임금을 비롯한 중전, 대비급의 인물들이나 할 수 있었고, 실제 선조 때 서인 정철의 경우, 후궁이 이런 짓을 한다고 대놓고 깠다가 역관광당한 예가 있다.[23] 이런 문화는 일본에도 존재해서 덴노의 점심 저녁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식사가 차려졌다고 한다. 특히 메이지덴노는 점심 때 양식을 즐겨서 시종들이 가장 기대하는 시간이었다고.[24] 오늘날의 교육부 장관에 비유할 수 있다.[25] 협성회 등 구한말 계몽운동에 참여했으나 1905년 26세에 사망했다.[26] 이완용의 양아버지 이호준의 아들.[27] 출처: 변은진. (2011). 일제 전시파시즘기(1937~45) 조선민중의 '불온낙서' 연구. Han'guk Munhwa (Seoul, Korea), (55), 309-344.[28] 정확히 말하면 성균관 대사성.[29] 다만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있다.[30] 이는 최근 인터넷 상에서 악질적으로 창궐하는 전라도 관련 지역드립에 이용되기도 한다. 실제 이완용은 경기도 출신이지만, 한국의 풍토상 유독 수도권 지역에는 지역드립에 관대한 이중잣대적인 경향이 있다 보니 이 쪽은 지역비하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다.[31] 애초에 경주 이씨인 이병철은 우봉 이씨인 이완용과 본관부터가 다르다. 이병철이 삼성 경영진들을 상대로 '전라도 사람은 뽑지 말며 뽑더라도 요직에 앉히지 말라' 운운했다는 썰. 당연히 사실무근인 루머에 불과하며, 당장 현재 삼성의 요직에도 전라도 출신들이 적지 않다.[32] 비슷하게 노재봉 전 국무총리도 아버지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이라는 루머가 돌았다. 다만 민복기 전 대법원장의 아버지가 경술국적 민병석인 것은 사실이다.[33] 그나마도 이완용이 입양되기 전 생가 기준으로 하면 이완용은 참판공파(參判公派)인데다가 이병도와 이완용 간의 촌수는 36촌 지간으로 더욱 멀어지게 된다.[34] 흔히 말하는 사돈의 팔촌이 예의상으로 따지는 친척 관계 중 가장 먼데 그보다도 훨씬 먼 사이다.[35] 예를 들어 박물관에 멀쩡히 전시 중이던 이완용의 관뚜껑을 태워없앤다든지. 이장할 때 나왔던 부장품 중 하나였다.[36] 물론 우페이푸 역시 그저 당대의 평범한 군벌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그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과의 협력을 거부했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에서도 최소한 항일 의식만큼은 있었던 것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평가를 내리기는 한다.[37] 북송시대 대신으로 금나라 병사가 개봉을 포위하자 화전을 주장하고 강왕과 함께 금나라로 인질로 갔다가 장초국 괴뢰황제로 세워진 인물이다. 참고. 보면 알겠지만 나라를 주도적으로 팔아먹은 이완용과 나란히 놓기엔 애매한 부분이 제법 있는 인물이며, 황제가 되려는 것을 거부했다가 금나라가 도시의 사람들 죽인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된 것 인데다, 그마저도 도중에 도망쳤다.[38] 당대 중국에서 일본 관련해서 조선 문제가 어떻게 되는지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지기도 했었지만.[39]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純宗孝皇帝純明孝皇后祔廟主監儀軌)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3일자 '四人抄啓別單書入之意敢稟答曰知道' 4인을 초계하여 별단으로 들이니 품의에 대해 답하시기를 알았다.[40] 역시 일제강점기 때의 악질 친일파 중 하나이다.[41]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9일 '下敎曰忠文公金炳始忠肅公李耕稙姑爲保留內 閣總理大臣李完用添書以入' 하교하기를, 충문공 김병시, 충숙공 이경직을 보류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추가 기재하여 넣으라.[42] 종묘숙직일지(宗廟宿直日誌) 1940년 3월 11일, 12일, 13일 기사[43] 하지만 당연히 그런 이름을 지어준 부모의 책임도 존재한다.[44] 이하영도 친일파지만, 그리 유명하거나 심하진 않아 현재에도 많이 쓰인다.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이 뒤바뀌어 여자에게 많이 쓰인다.[45] 그도 그럴것이 학창시절만 하더라도 이름 하나 때문에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될 우려가 크며 입시취업에서도 이름 하나 때문에 광탈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등 이름 잘못 지어서 인생이 완전히 망하게 된다.[46] 참고로 구한말은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매우 흔한 혼란의 시기였다.[47] 사실 중립적으로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찬성으로 간주된 경우도 있지만.[48] "이완용은 죽기 전에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단지 재산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유언이 있었다 하는데, 죽은 지 며칠 후인 16일 그의 유언에 의해 사회 사업 기부금으로 3만 원이 사이토 총독에게 전달되었다." - 역사비평(계간 22호, 1993년 가을)에 실린 임대식의 "이완용의 변신과정과 재산축적" 164쪽. 을 참조.[49] 이완용의 행적을 살펴보면 저런 유언을 남기고도 남은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사실 이완용은 죽을 때까지 일제의 앞잡이이자 사냥개로 살았다.[50] 그래서 "단, 나무위키 문서에 대한 훼손 및 조작 사건이 나무위키:편집지침/등재 기준10.1.1 단독문서를 위한 등재기준을 만족하는 경우, 훼손되거나 조작된 문서에 훼손 및 조작 사실을 명시하여 이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를 적용.[51] 예를들어 한미자유무역협정 관련등으로 친미=친일 주장 시.[52] 2008년에 문화재청이 직지사 대웅전을 보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이완용이 현판을 썼다는 이유로 논란이 된 바 있었다.[53] 쉽게 예시를 들자면 두메산골 사는 김 아무개의 잘 쓴 서예와 독립운동가 윤봉길의 대충 휘갈긴 낙서 중 어느 것이 더 값비쌀지 생각해보자.[54] 이완용과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경우 뤼순 감옥에서 남긴 글씨들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일단 경매에 나왔다 하면 대한민국 원화 기준 억 단위는 가볍게 찍는다. 김구의 글씨도 수천만 원이고 비교적 덜 유명한 신익희의 작품도 최소 수백만 원의 가격에 거래된다. 반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글씨는 고작 30~40만 원이다.[55] 당시엔 사치품이자 지위의 상징인 자동차들이 줄줄이 서 있는 것을 보아, 지위나 재산 등을 가늠할 수 있다.[56] 사실 오일 머니 같은 불로소득이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재산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검약은 곧 재산의 치부의 기본이다. 자수성가한 재벌 1세들 중에는 검약한 사람들이 많았다.[57] 휘문의숙 설립자.[58] 이때의 어차가 한국 최초의 어차는 아니다. 이미 몇 년 전 고종의 칭경예식을 위해 시범 용도로 왕실에 들여온 포드 A형 차량이 최초였는데 생긴 게 지금과 많이 다르기도 하고 초기의 자동차인지라 진동이나 소음이 심해 고종도 당시엔 한두 번만 타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프랑스 영사관에서 쓰던 르노 자동차를 왕실에서 들여 운행하기도 했다.[59] 현행 재규어의 고급브랜드. 2000년대 동그란 눈의 재규어 XJ때만 해도 8기통 모델 중 다임러라는 최고급 에디션이 남아있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모기업인 다임러 AG와는 관련이 없는 별개의 브랜드이며, 당시엔 벤츠 S600 급은 되는 최고급 차량이었다고.[60] 현행 크라이슬러에게 인수된 브랜드. 크라이슬러 지프 그랜드 체로키의 고급 스페셜 버전 중 하나도 이름이 오버랜드다.[61] Wolseley. 현재는 망한 영국 브랜드[62] 출처: <임금님의 첫 자동차>, 전영선 저[63] 한일 신협약 때 10만 원, 합병 때 15만 원의 은사금을 일본에게서 받았다.[64] 이병길의 아들로, 1970년대 초에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역임했는데 이 무렵에 이완용 명의였던 땅 30만 평을 당시 박정희 정부에 압류당한 바가 있다. 이후 1975년 공부를 위해 캐나다로 이민가 극동건설 캐나다 지사장을 역임하는 등 건설 분야에서 일했다고 한다.[65] 법률 불소급의 원칙.[66] 다만 이윤형도 토지 반환 소송에 대해 양심의 가책은 느꼈는지 "국민이 반대한다면 포기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67] 이와 비슷하게 송병준의 증손자 송준호(송병준 재산 찾기 소송을 벌인 송돈호의 이복형)도 폐인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한 요양시설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68] 이완용이 죽어서 염라국에 갔으니, 이승에서 한 짓을 빗대 저승에서도 염라국을 팔아먹을 것 같다는 뜻이다. 이완용의 기회주의적 행보를 고려하면, 심히 뼈 때리는 발언이다.[69] 이완용의 사망 2일 후.[70] 야속하게도 23년뒤인 1919년 폴란드는 독립을 이루었다.[71] 원래는 중국 전설에서 동쪽 바다에 있다는 나라를 뜻하며 일본을 의미하는 말로도 쓰였다.[72] 무궁화나무가 피는 땅이라는 뜻으로 조선을 뜻한다.[73]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이완용의 친필로 이 시문을 새긴 비석이 덕수궁 함녕전 후정(後庭)에 세워져 있었으나 해방 후 철거되었다. 시 내용은 함녕전시첩(咸寧殿試帖)에 실려 있다.[74] 嗚呼[75] 본명은 강인기.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용검 역,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진안대군 역,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중봉 조헌 역.[76] 게임 캐릭터와 플레이어 배우 모두 김민교.[77] 옆에는 같은 친일파인 심영이 누워서 절규하고 있다.[78] 고자가 되기 전에는 맞을 때마다 사과하더니 고자가 된 후에는 일본 순사들도 그를 적대한다. 하지만 출동만 하고 잡지는 못하고 권총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 애초에 지나가던 순사를 이유없이 때렸던 전과 달리 일단 도시 전체에서 난동을 부려 출동한 것이기 때문.[79] 자세히 보면 튕겨냐는게 탄두가 아니라 탄피다. 그것도 소총탄[80] 사족으로 여기에는 이지용도 등장한다.[81] 무려 각시탈로 변신한 상황인데도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