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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9 20:51:28

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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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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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통령장 약장.png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color: #fede58"
{{{#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B005-C002-0632-01_L1.jpg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width=20%> 강기동 ||<width=20%> 구춘선 ||<width=20%> 권동진 ||<width=20%> 권병덕 || 김경천 ||
}}}}}}}}} ||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wiki style="margin: 0 -10px;"
{{{#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aaa
권동진 권병덕 길선주 김병조 김완규 김창준 나용환 나인협 박동완 박희도(日) 백용성
박준승 손병희 신석구 신홍식 양전백 양한묵 오세창 오화영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일 이종훈 이필주 임예환 정춘수(日) 최린(日) 최성모 한용운 홍기조 홍병기
※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련 인물은 (日)로 표기.
}}}}}}}}}}}}}}}

파일:독립협회 검은색 글자.svg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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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회장
<rowcolor=#87ceed> 초대
안경수
제2대
이완용
제3대
서재필
제4대
윤치호
간부
위원장 이완용 고문 서재필
위원
김가진 남궁억 박정양 송헌빈
안창호 오세창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1] 취소선 쳐진 인물은 독립협회에서 제명된 인물을 의미한다.
}}}}}}}}} ||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파일:오세창.jpg
출생 1864년 8월 6일
한성부 중부 정선방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
사망 1953년 4월 16일 (향년 88세)
경상북도 대구시 대봉동
(現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묘소 망우역사문화공원
본관 해주 오씨
중명(重明)
위창(葦滄)
부모 아버지 오경석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종교 천도교
1. 개요2. 생애3. 여담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서예가, 언론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64년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 45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 역관을 지낸 중인 가문이고, 그의 아버지는 개화기 인물로 유명한 오경석이다.

1879년, 16세의 나이로 식년시 역과에 급제하여 한학 역관이 되었다가#, 1886년 박문국 주사로서 한성순보 기자를 겸임하였다.
1902년 천도교에 귀의한 그는 천도교의 기관지인 만세보를 창간했다. 이후 1906년에는 만세보의 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또한 1902년에는 개화당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다. 이때 일본에 의해 구속되어 3년형을 언도 받는다.

1918년에는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근현대 문예인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제자로 간송 전형필이 있으며, 전형필에게 한국의 전통 문화 유산을 보는 안목을 키워주었다. 전형필과 함께 문화재들을 구입, 보존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아버지 오경석이 수집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많은 책도 편찬하였는데,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회화를 모은 근역화휘, 서예와 필적 등을 모은 근역서휘근묵, 금석문을 모은 근역석묵, 인장을 모은 근역인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사근역서화징 등이 있다.
그는 또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전서, 예서, 초서에 능하고 조각도 하였으며, 상형문자의 영향을 받아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위창체, 오세창체)를 창안하는 등 한국 현대 서예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대구로 피난갔으며, 그곳에서 죽게 된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복장에 추서된다.

3. 여담

4. 관련 문서


[1] 고종 1년에 출생했으며 아버지가 개화 사상가 1세대에 해당되는 인물인지라 김옥균 등의 개화파 2세대와도 가깝게 지냈으며, 만년에는 6.25 전쟁까지 경험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휴전 직전에 고향인 서울(당시 한성부)이 아닌, 피난지 대구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