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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7 21:08:53

오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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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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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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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장면, 이인
제2대
오화영
제3대
김두한
}}} ||
파일:오화영.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9년 4월 5일
황해도 평산도호부 금암면 일리
(現 황해북도 평산군 한포리)
사망 1960년 9월 2일 (향년 81세)
평양시 남산병원
묘소 애국렬사릉[2]
본관 고창 오씨[3]
국사(菊史)
부모 아버지 오석조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2
종교 동학개신교 (감리회)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3.1 운동2.3. 목회활동 및 민족운동2.4. 해방, 그 후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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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고, 1990년에 북한의 조국통일상을 추서 받았다.

파일:external/www.iusm.co.kr/661305_259103_1825.jpg
1949년 건국대학교 정치대학 설립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

2. 생애

2.1. 초년기

1879년 4월 5일 황해도 평산도호부 금암면 일리(현 황해북도 평산군 한포리)에서 오석조(吳錫祚)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이후 천도교에 가담했으며,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에 가담해 활동하다 만주로 망명했다고 하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또한 1904년부터 1908년 사이에 상업과 농업에 종사했다고 하나 이 역시 불확실하다.

1906년 만주에서 돌아온 그는 미국 남감리회의 레브 W.G 크렘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개종 동기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훗날 민족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걸 볼 때 조선 민족을 구원할 길은 기독교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1909년 남감리회 소속 전도사로서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개성 서구역교회에서 1909년부터 1911년까지 목회 활동을 전개했고, 뒤이어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에 부임해 1913년까지 맡았으며, 1913년 9월 원산 상리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1914년 8월 23일에는 김영학, 최태곤 등과 함께 앳킨스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감리교인물사전>에 따르면, 그는 원산 상리교회 전도사 시절 원산여선교회 창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최초의 원산여선교회는 앨리스콥 성경학원에서 발족되었는데 흔히 보혜(普惠)여자성경학원 혹은 원산여자성경학원으로 불렸다. 이 성경학원은 전도부인과 여성 지도자들을 많이 양성하였으며 이후 원산여선교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당시 원산여선교회의 사업을 주관하고 있던 노이즈( Noyes)는 이 시기 오화영이 매달 봉급의 20분의 1을 전도부인 1명에게 보조해줬다고 한다.

1917년 서울 도렴동 종교교회로 부임한 오화영은 이듬해 10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고 1918년에는 감리교 목사들의 사관학교 격인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던 1919년, 그는 3.1 운동에 가담한다.

2.2. 3.1 운동

1919년 2월 16일, 오화영이 시무하고 있던 종교교회에서 설교한 정춘수는 그날 밤 오화영의 집에 머물렀다. 그때 그는 당시 YMCA 간사로 있던 박희도에게 들은 말이라며, 천도교 측에서 모종의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오화영에게 밝혔다. 당시 오화영은 신문을 통해 파리 강화 회의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접하고 조선 독립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즉각 정춘수와 함께 박희도를 찾아가 사실을 확인한 뒤 2월 20일 밤 박희도의 집에서 이승훈, 신홍식, 오기선(吳基善), 정춘수 등과 만나 천도교단과 연합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그는 개성 지역을 담당하기로 했다. 또한 그는 신석구에게 동참을 권했고, 신석구는 27일에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해줬다.

2월 21일, 오화영은 함태영, 이승훈, 현순, 박희도, 신홍식, 오기선, 안세환 등과 함께 이갑성의 집에 모여 천도교 측과의 연합 문제를 다시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오화영이 개성을 맡고 이갑성이 경상도를 맡기로 했으며, 일본 정부 등에 제출할 청원서는 함태영이 책임지고 준비하고 현순은 상해로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통지를 하기로 합의했다. 다음날, 그는 약속한 대로 개성으로 가서 개성 남부예배당에서 김지환, 오세진, 이경중, 최중순, 이강래 등을 만나 서울의 거사 준비 소식을 알려주고 동참을 호소했다. 또한 23일에는 보통학교 교사 이만주와 미국인 교장 이영덕에게도 서울의 소식을 전해줬고, 남성병원에서 친동생 오은영(吳殷英)을 만나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나의 집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서울로 돌아온 오화영은 2월 25일 박희도로부터 거사일이 3월 4일에서 3월 1일로 변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26일에는 함태영,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이필주, 안세환, 최성모 등과 만나 일본에 보낼 기독교 대표로 안세환을 선출했다. 이후 이들은 한강 인도교에서 만났다가 주위 사람들이 많아서 인근 일식집으로 옮겨 얘기를 나눴다. 27일, 이필주의 집에 이승훈 등 10명이 모여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 초고를 살펴봤고, 28일 밤에는 재동의 손병희의 집에 모여 최종 점검을 했다. 이갑성이 이 자리에서 학생 등 많은 사람이 탑동공원에 모이다 보면 소요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모두가 이에 동의하면서 거사장소를 탑동공원에서 명월관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오화영은 민족대표들과 함께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선언식이 끝난 후 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서 파견된 순사들에게 체포되어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끌려갔다. 그는 3월 1일 경무총감부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취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합병한 지 10년이 지난 오늘날 생각해보면 이전보다 발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민족은 도저히 일본사람과 동화할 수 없는 형편이고 또한 조선은 상당한 역사가 있으므로 독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합병은 강제적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이제 독립을 위한 선언서를 작성하여 배포한 것이다."

이에 형사가 "그대들은 독립을 시켜달라는 청원에 대하여 만일 이 일이 성립된다든지 안 된다든지 하면 어찌 할 것인가?"라고 묻자, 오화영은 "불성립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하자는 것은 정하지 않았으나 된다고 하면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모든 일을 결정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또한 3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취조를 받을 때 "이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기회가 있다면 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후 재판에 회부된 그는 5월 1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피고는 이 운동이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줄로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한일합병의 취지가 조선이 독립될 때까지 합병하는 것이지 영구히 합병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번 민족자결의 제창이 있자 조선독립을 일본이 허락할 줄로 알았다."

이에 검사가 물었다.
"민족자결은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 관계없는 조선과 같은 지역에는 문제의 범위 밖인 줄 알지 못하는가?"

오화영이 답했다.
"민족자결은 전 세계 민족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파리)강화회의 5대 강국의 하나로서 열국과 교섭하고 있으므로 민족자결이라는 문제가 제창되고 있는 이 때 일본이 조선을 독립시킴으로써 타국에 대하여 정의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편 오화영은 허헌(許憲) 변호사의 문제제기로 '공소 불수리' 논란이 일자 피고석에서 일어나 재판장을 향해 '지금까지 재판장이 심문하는 방법을 보건대 피고들에게 이 사건이 생긴 근본원인은 물어보지도 않고 재판장 생각에 피고들이 죄가 될 만한 점만 물어보고 정 물어볼 것은 물을 줄도 모른다'며 강하게 힐난하기도 했다. 그 후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오화영에게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2년 5월 5일 이갑성과 함께 만기출옥했다.그는 이튿날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일찍이 교역자 생활을 여러 해 하였으나 이번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같이 영적 감응(感應)을 얻은 일은 없었다. 밖에서는 우리 민족의 전도(前途)에 대해 매우 비관하였으나 감옥에 들어간 후에는 조선 사람도 앞으로는 살 수가 있다는 생각이 났다. 조선인에게 제일 급한 것은 교육이니 우리 모두 그 방면으로 힘을 써서 배우고자 하되 학교가 없는 현상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

2.3. 목회활동 및 민족운동

오화영은 출옥 후 수표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고, 1922년 9월에 종교교회 목사로 이전했다. 1925년 9월에는 개성 북부교회로 옮겼다가 2년 뒤인 1927년 9월에 수표교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이곳에서 1년간 목회 활동을 한 후 YMCA 종교부 간사가 되었다. 한편, 그는 1926년 10월 말에 열린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창립총회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27년 2월 15일에 개최된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간사 35명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 이어 서무부장 및 경성지회 검사위원에 선임되었다. 또 1929년 6월에 창립된 기독신우회의 평의원으로 참여해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를 확대하는 일에 힘을 보탰고, 1932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 고문으로 활동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오화영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요한, 의사 이용설, 목사 박연서 등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사후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 일이 경찰에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며칠간 취조를 받아야 했고, 이후 당국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930년 9월 수표교 교회에서 사임했다. 하지만 그는 1931년 다시 수표교 교회 목사로 파송되어 1년간 시무한 뒤 상동교회, 연화봉 교회를 각각 1년간 맡았으며, 1935년에 수표교 교회 담임목사로 재파송되었다가 1937년 중부연회에서 퇴회(退會)하여 수표교 교회 본처목사(本處牧師)[4]가 되었다.

이 무렵, 오화영은 흥업구락부에 참여했지만 그다지 왕성한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7년 가을 일제가 흥업구락부의 지부인 청구구락부 관계자들을 독립운동 지원 혐의로 체포하면서 그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이듬해 5월, 그는 흥업구락부 간부회원 6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대다수 인사들은 전향서를 쓰고 풀려난 뒤 친일로 돌아섰지만, 그는 끝까지 전향서를 쓰기를 거부했으며 신사참배도 거부하고 은거했다.

2.4. 해방, 그 후

8.15 해방 후, 오화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들을 환영하기 위해 구성된 한국지사 영접위원회에 참여해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건국준비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선민족당을 결성해 당수로 추대되었다. 또한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지자 반탁 운동에 앞장섰으며, 미군정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독립전취(戰取)전국대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47년 2월 27일 자유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다.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지금의 각 당이 각각 독자(獨自)의 입장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통일단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기독교에서 천도교로 혹은 불교에서 학생에게로 '우리는 죽음으로 독립을 찾기 위하여 운동을 합치자'고 대표를 보내면 즉시 서로 양해 성립되어 서로 부여잡고 얼싸안았다. 다같이 죽음으로 독립을 찾자는 생각에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랴마는 지금을 그때보다 결심의 도가 약하다 할 수 없다. 우리의 독립운동을 직접 총칼로 위협할 압력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독립을 전취(戰取)키 위해서 죽음으로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3.1 그때와 같은 충동과 결심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다시 한 번 환기해야만 될 것이다.

오화영은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해 온건 좌파와 온건 우파의 결합을 도모했으며, 1948년 4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으로 가서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북한 인사들과 협상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후 유석창 박사와 의기투합하여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대학관을 세워 이사·관장을 지냈으며, 1949년에는 조선정치대학 학장이 되었다. 1949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10인협의회에서 선출된 민족통일본부 협의원에 지명되었으며,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음 달인 6월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납북되었다.

그는 납북 후인 1956년 7월 2일에서 3일까지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해 최고위원 3인 중 1인, 상무위원 11인 중 1인,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한동안 그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가 2002년 통일신보 보도를 통해 그가 1960년 9월 2일 평양시 남산병원에서 사망해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화영은 납북 인사였기 때문에 한동안 대한민국에서 금기 대상으로 치부되었고, 독립유공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다가 1989년에서야 비로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으며,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또한 고창 오씨 대종회는 2014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산자락에 오화영 추모비를 세웠다.

3. 둘러보기

파일:구 서울특별시 휘장(백색).svg 서울특별시 제2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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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운동 당시 이명은 오하영(吳夏英), 오화영(吳華泳).[2]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도 위패가 따로 봉안되어 있다.[3] #[4] 휴직 중에 있는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