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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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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창시2.2. 2대 교주 최시형의 교단 정비2.3. 동학농민혁명2.4. 동학농민혁명 이후
3. 동학의 분파
3.1. 친일 교단들
4. 기타5. 관련 문서

1. 개요



1860년 수운 최제우가 창시한 사상. 천도교를 비롯한 여러 민족 종교의 모태(母胎)이다.

최제우는 조선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어 사대해 왔던 중국이 서방의 영국에게 패한 것에 국제정세가 바뀌고 있는것을 알았다. 게다가 말기 조선의 여러 사회적 모순을 기존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만으로 헤쳐나가기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1] 바야흐로 격동기 조선에서, 구 시대의 사대주의적 외래 학문인 유교(북학)도 아니고, 한때 융성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와서는 숭유억불 정책 속에 쇠퇴한 불교(남학)도 아니며, 서방 선교사를 통해 들어와 침략전쟁을 대표했던 그리스도교(서학)도 아닌, 새시대[2]를 위한 개혁과 새로운 학문의 필요성, 한민족 고유의 신앙을 통한 정신적 결집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절실함 속에서 지극히 사람 중심의 학문이 만들어졌으며, 이를 서학과 반대되는 학문이라 하여 '동학'이라 명명했다.[3][4]

2. 역사

2.1. 창시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경주 최씨로, 어릴 때 이름은 복술(福述)·제선(濟宣)이었으며 후일 어리석은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자신의 의지의 표현으로 제우(濟愚)라고 개명하였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 집안으로 아버지 최옥은 벼슬을 하지 못해 가세가 기운 데다가 그의 어머니 곡산 한씨와 아버지와의 결혼이 재가였기에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어머니는 그가 10살 때 사망한다. 13세 때 울산 출신 박씨와 결혼했으나 17세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셔 결국 처가인 울산으로 옮겨간다.

울산으로 옮겨간 후 1855년 을묘년 어느 날 한 승려가 찾아와 자신은 금강산에서 왔는데 백일 동안 치성을 드리던 중 이상한 책 한 권을 얻게 되었는데 해석할 사람을 찾아 다니던 중이라며 그 책을 최제우에게 전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것을 을묘천서사건이라고 한다. 이러한 신비체험으로 최제우는 1859년 다시 구미 용담으로 돌아와 입구에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라 써서 붙이고 세상과 담을 쌓고 수도에 매진한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비서를 기독교성경 혹은 <천주실의>라고 주장하나, 주류 학계와 천도교 측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사상적인 부분에서도 기독교와 동학은 차이가 분명하며, 당시 이미 널리 알려진 기독교계 서적을 굳이 비서로 왜곡할 이유가 없고 최제우는 울산으로 옮겨가기 전 3년간 전국을 유람하며 갖가지 세상 경험을 하며 자신의 사상을 형성했기 때문이다.[5] 이후 부분은 천도교 문서 참조.

남학 계열에서는 그가 수도 생활을 할 때, 조선 후기의 도사인 연담 이운규의 제자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최제우, 김일부(김항)[6], 김광화(김치인)[7]와 동문 출신, 혹은 동문수학한 사이라는 것이며 시천주 주문 또한 이운규에게서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셋의 연령 차이가 있고, 행적 역시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이 설은 부정되고 있다. 셋 모두 후천개벽을 자신들의 중심 사상으로 놓았던 점은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서학에 대항하는 동쪽의 학문이라는 동학을 창시하였고,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을 외치고,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동학이 서서히 퍼져나가자 조정에서는 민심을 현혹시킨다고하여 최제우와 그의 추종자들을 압송하여 1864년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시켰다.

2.2. 2대 교주 최시형의 교단 정비

최제우의 순교 이후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지하에 숨어다니면서 동학의 포교에 힘썼다. 특히 동경대전 등 경전을 간행하면서 동학의 교단을 정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최시형의 시기에 포접제라는 제도도 새롭게 구축되었다. 그래서 동학은 최제우의 순교 이후에도 세력을 확장해나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교조 신원을 내세우면서 서서히 농촌 사회에도 파고드는 모습들을 보여줬다.

특히 1871년 일어났던 이필제의 난은 동학의 성격이 서서히 사회 개혁적인 모습도 띠게 된다는 점을 암시하며 추후에 일어나게 되는 동학농민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비록 이필제의 난은 진압당했으나 동학은 역시 더 세력이 커지면서 1880년대에 이르면 삼남 일대를 장악하게 되고,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최제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1892년 삼례에서 첫 대규모 집회가 열렸고,[8] 1893년에는 광화문에서 복합 상소를 하였다. 그리고 펼쳐진 보은 집회에서 척왜양창의를 내세우며 반봉건ㆍ반외세의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편 이때부터 동학에서는 북접과 남접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북접은 최시형을 위시한 동학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는 온건파 세력들이 이끌었으며, 남접은 전봉준 등 동학에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진 급진파 세력들이 이끌었다.

2.3. 동학농민혁명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으로 고부 민란이 발발하고, 안핵사 이용태의 강경 진압으로 고부 민란은 전라도를 휩쓰는 대반란으로 번진다. 남접의 접주들인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등이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농민군을 지휘하였고 농민군은 황토현과 황룡천에서 관군을 연거푸 격파하여 끝내 호남의 중심인 전주부성을 무혈점령하였다. 다급해진 조정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지만 일본군까지 들어오자 태도를 바꿔 동학농민군과 협상에 나섰고, 농민군은 전주 화약을 맺어 일단 해산한다.

하지만 조정의 개혁이 미적지근하자 참을 수 없었던 농민들을 각지에서 집강소를 설치하여 종래의 관청을 밀어내고 폐정개혁을 시도했다.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봉준과 만나 집강소를 공인하였고 전라도는 사실상 농민군의 지배 하에 놓인다. 그런데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청일전쟁이 연이어 터지면서 농민들의 분노가 고조되었고 농민군 지도자들을 다시 한 번 봉기한다.

최시형은 이미 이필제의 난 때 한 번 데인 경험도 있었고 남접의 봉기를 동학교단의 위계질서를 뒤흔드는 행위라고 판단하여 북접 조직들의 봉기 참가를 불허하는 등 남접에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지만 1차 봉기의 성공과 외세의 개입으로 더 이상 남접을 적대할 수 없었다. 결국 최시형은 손병희를 북접 통령에 임명하여 봉기에 합세한다. 농민군은 논산에서 집결하여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선출하고 서울로 향하지만,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대패하면서 기세가 꺾인다. 전봉준은 퇴각하면서 논산, 원평, 태인에서 결전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배했고, 홀로 청주 방면으로 진격한 김개남도 청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전봉준과 합류하여 같이 도망쳤다. 태인 전투에서 패배한 뒤 농민군은 자진 해산했고 농민군 지도자들은 관군과 일본군에 붙잡혀 사형당했다.

2.4.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살아남은 북접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숨어다니면서 동학을 포교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는 영학당이니 남학당이니 활빈당이니 하는 무장 조직에 많이 투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8년 최시형이 사형당하고, 1901년 살아남은 핵심 지도부가 죄다 관군에 체포당하자 손병희는 일본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의 도움하에 국내의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여, 손병희는 이용구를 국내로 파견하여 진보회를 만들게 하였고, 비록 진보회는 여전히 탄압당했지만,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을 도왔던 점이 인정되어 일진회의 압박을 받고 대한제국 정부는 결국 동학에 대한 포교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진보회는 일진회에 통합되었다.

하지만 일진회가 을사 조약에 대해 찬성했던 점이 계기가 되어서 교주 손병희와 이용구 사이가 벌어지게 되면서 손병희는 1905년 12월 동학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꾸고, 이용구와 일진회를 천도교에서 제명시킨다. 이후 이용구와 일진회는 시천교를 만들게 된다.

3. 동학의 분파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설립한 이후, 동학 신도가 늘어나고 근대 시대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동학도 여러 분파가 생겼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다들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동학은 창시자 최수운 - 최시형 - 손병희로 이어지는 교주 계승 관계가 확실하여, 천도교 외 교파들은 방계교단으로 분류된다.참조

3.1. 친일 교단들

4. 기타

2021년 코로나19 이후 시장 불안정성으로 인한 외국인 투자자의 매도세가 지속되자, 개인투자자들이 한국거래소 상장 국내기업 주식을 집중적으로 매수하는 것을 '동학개미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5. 관련 문서




[1] 요순지치도 공맹지덕도 부족언(요순 임금의 통치도 공자맹자의 가르침도 이 난세를 타파하기에 부족하다.) 라고 말했다.[2] 당시 조선은 역사적 변환기에 놓여있었다. 이렇게 한시대에서 새로운 시대로 바뀌는 상황을 후천개벽이라 한다.[3] 또한 최제우의 <논학문>에서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라고 하여 이름을 동학이라 하였다.[4] 흔히 동학 하면 바로 천도교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으나, 엄격히 말하면 천도교는 동학의 가장 직계 분파다. 이외의 군소분파들이 존재한다.[5] 당시는 기독교는 물론이고 천주실의가 동아시아 전체에 알려진 상황이었고, (일반인을 위한 한글 번역본과 그 필사본도 있다.*) 청의 <천학초징 / 천학재징>, 일본의 <벽사관견록>, 한국의 <서학변>, <천학문답> 등 천주실의와 기독교를 비판하는 서적까지 나올 정도로 널리 퍼진 지 오래였다. 즉 천주실의는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책이었던 것이다.[6] 남학의 분파인 정역(正易)의 창시자. 유교 중심적이다.[7] 남학의 다른 분파인 광화계의 창시자. 불교, 특히 미륵 신앙 중심적이다.[8] 당시 삼례는 조선 시대의 간선 도로인 한성해남, 제주를 잇는 제주로와 한성과 통영을 잇는 통영로의 분기점이자 찰방역인 삼례역이 있었을 정도로 지리적으로 중요한 장소로, 현대로 따지면 익산역 광장에서 집회를 연 것이다.[9] 동학 쪽 문헌에는 최수운이 처형당할 때 폭풍이 부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수운교 공식 홈피에는 최수운이 몸을 피해 이상룡으로 위장했다고 주장한다. 네이버 백과에는 수운의 혼이 강림했다고 주장한다고 나온다. 당연하지만 어느 쪽이건 다른 교단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10] 창시자 최제우의 사상과도 좀 차이를 보인다.[11] 참조 링크.[12] 참고로 위의 동학 분파 중, 청림 혹은 남접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천도교와 별개로 행동하는 분파들은 하나같이 청림이라는 인물을 내세우면서, 정작 그 청림의 본명에 대해서는 다 말이 다르다. 주된 청림의 본명으로만 김시종, 김낙춘, 정시종의 셋이나 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청림 선생. 이렇게 된 것은 최수운이 최해월을 후계자로 정하면서 해월의 직함이 '북접주인'(혹은 북접(대)도주, 북접법현 등의 표현도 사용. 어느 용어든 북접이란 말이 들어간다.)이 되자, 후에 동학 내 분파 / 급진파들이 스스로 남접이라 이름짓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접이란 말은 1879년대에 만들어진 동학 초기 기록부터 나오지만, 남접이란 말은 1894년 이후부터 등장하고, 그마저도 대부분 동학에 적대적이었던 관군이나 토벌군의 문헌 자료에서 주로 등장한다.[15][13] 사병을 조직해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했다.[14] 최시형의 수제자 중 하나였으나 손병희와의 갈등으로 시천교에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