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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22:42:44

야마가타 아리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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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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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무라야마 도미이치 하시모토 류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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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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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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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3대
사이고 주도
4대
오야마 이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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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대
오야마 이와오
5·8대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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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 이와오
5·8대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9-12대
가쓰라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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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마 겐타로
15-17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15-17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18대
이시모토 신로쿠
19대
우에하라 유사쿠
20-21대
기고시 야스쓰나
22대
구스노세 유키히코
23대
오카 이치노스케
24-25대
오시마 겐이치
26·30대
다나카 기이치
27-29대
야마나시 한조
27-29대
야마나시 한조
26·30대
다나카 기이치
31-33·35대
우가키 가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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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카와 요시노리
31-33·35대
우가키 가즈시게
36대
미나미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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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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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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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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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5·5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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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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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9대
하타 슌로쿠
50-52대
도조 히데키
폐지
44-45·53대
스기야마 하지메
54대
아나미 고레치카
56-57대
시모무라 사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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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내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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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제4대 제5대 제6대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제7대 제8대 제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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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내무대신 (1885년~1947년)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2·14대
사이고 주도
3대
시나가와 야지로
4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6대
고노 도가마
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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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노무랴 야스시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11대
가바야마 스케노리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2·14대
사이고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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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에마쓰 겐초
16대
우츠미 다다가쓰
17대
고다마 겐타로
18대
가쓰라 다로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20대
기요우라 게이고
21·23·25대
하라 다카시
22대
히라타 도스케
21·23·25대
하라 다카시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21·23·25대
하라 다카시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29대
이치키 기토쿠로
30·34대
고토 신페이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2대
도코나미 다케지로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0·34대
고토 신페이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6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37대
하마구치 오사치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모치즈키 게이스케
141대
아다치 겐조
42대
나카하시 토쿠고로
43대
이누카이 쓰요시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45대
야마모토 다쓰오
46대
고토 후미오
47대
우시오 시게노스케
48대
가와라다 가키치
49대
바바 에이이치
50대
스에쓰구 노부마사
51대
기도 고이치
52대
오하라 나오시
53대
코다마 히데오
54대
야스이 에이지
55대
히라누마 기이치로
56대
다나베 하루미치
57대
도조 히데키
58대
우자와 미치오
59대
안도 기사부로
60대
오다치 시게오
61대
아베 겐키
62대
야마자키 이와오
63대
호리키리 젠지로
64대
미쓰치 주조
65대
오무라 세이이치
66대
우에하라 에쓰지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67대
기무라 고자에몬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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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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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사이고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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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토 히로부미 다카토 오키 이토 히로부미 다카토 오키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구로다 기요타카 사이온지 긴모치 이토 히로부미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요우라 게이고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아라타 하마오 호즈미 노부시게 구라토미 유자부로 이치키 기토쿠로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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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제22대 제23대
히라누마 기이치로 스즈키 간타로 시미즈 도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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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부경 (1869~1870)
초대
오기마치 산조 사네나루
사법경 (1871~1885)
초대
에토 신페이
2·4대
오키 다카토
3대
다나카 후지마로
2·4대
오키 다카토
5대
야마다 아키요시
사법대신 (1885~1947)
초대
야마다 아키요시
2대
다나카 후지마로
3대
고노 도가마
4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5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6대
기요우라 게이고
7대
소네 아라스케
8대
오히가시 기테츠
9대
기요우라 게이고
10대
가네코 겐타로
11대
기요우라 게이고
12대
하타노 요시나오
13대
마츠다 마사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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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다카토미
15대
오카베 나가모토
16대
마츠다 마사히사
17대
마츠무로 이타츠
18대
마츠다 마사히사
19대
오쿠다 요시히토
20대
오자키 유키오
21대
마츠무로 이타츠
22대
하라 다카시
23대
오키 엔키치
24대
오카노 게지로
25대
덴 겐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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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누마 기이치로
27대
스즈키 기사부로
28대
요코타 센노스케
임시대리
다카하시 고레키요
29대
오가와 히키치
30대
에기 다스쿠
31대
하라 요시미치
32대
와타나베 치후유
33대
스즈키 기사부로
34대
가와무라 다케지
35대
코야마 마쓰키치
36대
오하라 나오시
37대
하야시 라이자부로
38대
시오노 스에히코
38대
시오노 스에히코
39대
미야기 쵸오고로
40대
기무라 쇼오타츠
41대
가자미 아키라
42대
야나가와 헤이스케
43대
고노에 후미마로
44대
이와무라 미치요
45대
마쓰자카 히로마사
46대
이와타 츄우죠
47대
기무라 도쿠타로
48대
마쓰자카 히로마사
법무총재 (1948~1952)
1·2대
마쓰자카 히로마사
3·4대
우에다 슌키치
5대
오오하시 타케오
6대
기무라 도쿠타로
법무대신 (1952~)
초대
기무라 도쿠타로
2·3대
이누카이 다케루
4대
가토 류오고로
5대
오히라 나오시
6·7대
하나무라 시로
8대
마키노 료죠
9·10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11대
가라사와 도시키
12대
아이치 기이치
13대
이노 히로야
14대
코지마 데츠조
15대
우에키 고시로
16대
나카가키 구니오
17·18대
가야 오키노리
19·20대
다카하시 히토시
21대
이시이 미쓰지로
22·23대
다나카 이사지
24대
아카마 분조
25대
사이고 기치노스케
26대
고바야시 다케지
27대
아키타 다이스케
28대
우에키 고시로
29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30대
코이 유이치
31대
다나카 이사지
32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33대
하마노 세이고
34대
이나바 오사무
35대
후쿠다 하지메
36대
세토야마 미쓰오
37대
후루이 요시미
38대
쿠라이시 타다오
39대
오쿠노 세이스케
40대
사카타 미치타
41대
하타노 아키라
42대
스미에이 사쿠
43대
시마자키 히토시
44대
스즈키 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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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카나메
46대
하야시다 유키오
47대
하세가와 다카시
48대
다카쓰지 마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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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가와 가즈오
50대
고토 마사오
51대
하세가와 신
52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53대
사토 메구무
54대
다하라 다카시
55대
고토다 마사하루
56대
미카즈미 아키라
57대
나가노 시게토
58대
나카이 히로시
59대
마에다 이사오
60대
타자와 토모하루
61대
미야자와 히로시
62대
나가오 리츠코
63대
마츠우라 이사오
64대
시모이나바 고키치
65대
나카무라 쇼자부로
66대
진노우치 다카오
67·68대
우스이 히데오
69대
야스오카 오키하루
70대
고무라 마사히코
71대
모리야마 마유미
72·73대
노자와 다이조
74·75대
노오노 치에코
76대
스기우라 세이켄
77대
나가세 진엔
78·79대
하토야마 구니오
80대
야스오카 오키하루
81대
모리 에이스케
82·83대
치바 케이코
84대
야나기다 미노루
85대
센고쿠 요시토
86대
에다 사쓰키
87대
히라오카 히데오
88대
오가와 도시오
89·91대
다키 마코토
90대
다나카 케이슈
89·91대
다키 마코토
92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93대
마쓰시마 미도리
94·95·98·99·103대
가미카와 요코
96대
이와키 미쓰히데
97대
가네다 가쓰토시
94·95·98·99·103대
가미카와 요코
100대
야마시타 다카시
101대
가와이 가쓰유키
102대
모리 마사코
94·95·98·99·103대
가미카와 요코
104·105대
후루카와 요시히사
106대
하나시 야스히로
107대
사이토 겐
108대
고이즈미 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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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수
大元帥
[[메이지 덴노|
파일:일본 황실.svg1871년
메이지 덴노]]
[[다이쇼 덴노|
파일:일본 황실.svg1912년
다이쇼 덴노]]
[[쇼와 덴노|
파일:일본 황실.svg1926년
쇼와 덴노]]
육군원수
陸軍元帥
1872년
사이고 다카모리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
원수 육군대장
元帥陸軍大將
1898년
고마츠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1898년
야마가타 아리토모
1899년
오야마 이와오
1915년
하세가와 요시미치
1916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9년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1929년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
1932년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1943년
스기야마 하지메
파일:해상자위대기.svg
원수 해군대장
元帥海軍大將
1898년
사이고 주도
1913년
도고 헤이하치로
1922년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
1923년
가토 도모사부로
1932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
1943년
나가노 오사미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조슈 3존
{{{#!wiki style="margin:0 -10px -5px;min-height:1.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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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
'''일본 제국 제3·9대 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
'''
파일:Yamagata_Aritomo.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38년 6월 14일
나가토국 아부군 가와지마촌
(現 야마구치현 하기시)
사망 1922년 2월 1일 (향년 83세)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
재임기간 제3대 내각총리대신
1889년 12월 24일 ~ 1891년 4월 30일
제9대 내각총리대신
1898년 11월 8일 ~ 1900년 10월 19일
서명
파일:야마가타 아리토모 서명.pn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통칭 고스케(小助) →
교스케(狂介) →
고스케(小輔) →
교스케(狂助) →
교스케(狂輔)
아명 다쓰노스케(辰之助)
가명 하기와라 시카노스케(萩原鹿之助)
배우자 야마가타 도모코
작위 공작
학력 쇼카손주쿠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약력 병부대보[1]
제1·2대 육군경[2]
참의
제9대 내무경 및 내무대신[3]
제4대 사법대신
제3·9대 내각총리대신
제5·9·11대 추밀원 의장
귀족원 의원
원로
군사 경력
복무 일본제국 육군
1868년 ~ 1905년
최종 계급 원수
주요 보직 근위도독
참모본부장[4]
감군[5]
제1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참전 보신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yamagata가몬.jpg
야마가타 가몬

일본의 제3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長州) 3존으로 불리는 인물이며 뛰어난 군사행정가로 신생 일본 육군을 독일식의 근대 육군으로 변모시켜 일본 군부의 조상,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타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奇兵隊) 창설에 참여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유신 후, 사이고 주도와 함께 유럽 유학을 떠나 각국의 군사 제도를 시찰한다. 육군대보(陸軍大輔)로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협력을 얻어 징병제의 도입과 육군성과 해군성의 설치 등 군제 개혁에 종사한다.

일본 의회제도 체제 아래 최초의 총리.[6] 서양의 군사제도를 받아들이는데 힘을 쏟았으며, 1894년 청일전쟁조선에 주둔하는 제1군사령관, 1898년 원수가 되었다. 1903∼1909년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번갈아 추밀원 의장직을 맡았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공작 작위를 받았다.

2. 생애

파일:340px-Yamagata_Aritomo2.jpg 파일:external/www.japanesehistory.de/1900%20Yamagata%20Aritomo%20Postcard.jpg
리즈시절[7] . 추밀원 의장 시절.

조선 강점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바는 없으나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의 뒤에는 야마가타가 있었으며,[8] 후일 일본 군부와 정계 양측에 걸쳐 자신의 파벌[9][10]을 거대하게 구축하여 메이지다이쇼 연간의 일본 정치판을 막후에서 장악하여 뒤흔들었다.

근대 일본의 근대화 계획을 수립하였고, 독일로부터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을 도입하였다. 주권선은 일본의 주권이 행사되는 선으로 일본 본토와 오가사와라 제도, 오키나와이고 이익선은 주권선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선으로 한반도대만, 사할린 등이었다. 조선대만을 병합한 이후에는 조선대만이 주권선으로 편입되고 이익선은 만주필리핀으로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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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취임 후.[11]

일본의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군국주의로 몰고 간 중심 인물로 볼 수 있다. 천황의 충량한 신민들아, 나라에 절대적으로 충성하여라라고 요약할 수 있는 군인칙유[12](1882년)와 교육칙어[13](1890년)는 형식상 메이지 덴노의 이름으로 선포하였으나 그 배후에는 야마가타의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교육칙어는 야마가타 자신이 이끌던 1차 내각에서 칙령으로 반포된 것으로, 당시 자유주의 정치운동을 봉쇄하려는 목적에 따라 탄생한 것이었다. 메이지 덴노의 이름으로 발표된 조칙이지만, 천황 절대주의를 신봉하던 야마가타가 정당제를 비롯한 서양식 입헌정치를 일본에 적용하는 것을 결사반대하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실상 야마가타의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2차 야마가타 내각 때인 1900년에는 치안경찰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청일전쟁 이후 조성된 호황기에 따른 노동쟁의의 증가세와 반정부적 기조를 억제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후 치안유지법이란 형태로 진화해 일본사회주의 세력을 작살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와 동시에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또한 칙령에 따라 제정되었는데, 이는 내각을 구성하는 2명의 군부대신, 즉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에는 민간인이 아니라 현역 육/해군 대/중장만 임명될 수 있도록 한정한 것이다. 이는 군사행정의 특수성에 따라 민간참여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는 점과 군부대신의 권한에 일반 업무와 함께 군령사항이 포함되는 것이라는 야마가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인데, 이로 인해 일본 내각은 군부의 이해관계에 끌려다니는 꼴을 면하지 못했다. 새로 조직된 내각이 마음에 안 들면 군부는 군부대신 후보를 내지 않았다. 당연히 빈 자리가 남아있는 내각은 정상적으로 출범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군부의 요구사항이 충족된 후에야 군부대신이 임명되어 내각이 업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14] 그리고 이 패턴이 패전 전까지 거의 무한 반복된다.(…) 결국 전시에는 아예 군인 총리가 육군대신, 내무대신, 외무대신, 문부대신, 상공대신을 죄다 겸직하는 상태가 패전 직전까지 이어졌다.

입헌정우회라는 정당 비슷한 것을 만든 것 외에는 평생 파벌을 만들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이토 히로부미와는 달리, '조슈벌'로 불리는 파벌의 영수로서 활동했다.[15] 당장에야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추천한 인물들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가쓰라 다로같이 능력은 되는 인물들이라 넘어갔고, 하세가와 요시미치, 우가키 가즈시게까지도 봐줄만은 했다. 하지만 다나카 기이치 시절까지만 해도 총리, 육상 등을 재직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던 조슈벌은 다나카의 후계자로 꼽히던 우가키가 우가키 군축으로 군부의 미움을 사 총리가 되는데 실패하면서 권력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야마가타가 배척했던 비조슈벌 출신의 소장파 장교들이 새로운 메인스트림으로 성장하면서 이들의 배척을 받아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 비조슈벌 소장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다름아닌 도조 히데키.

평소 공금횡령을 하는데 1인자였다. 한마디로 내 돈은 내 돈이고 국가의 돈도 내 돈. 그래서 65만엔(현재 가치로 100억엔) 상당의 육군성 공금을 횡령해서 야마시로야 와스케(山城屋和助, 1836~1872)라는 같은 조슈 출신이자 기병대 부하였던 어용 상인에게 투자하라고 대출했다가, 상인이 싹 날려먹으니 책임지라고 협박해서 이 상인이 공금횡령을 사죄하며 자살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바로 야마가타를 첫번째로 옷 벗게 만든 야마시로야 사건(山城屋事件)[16]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의 정치비리 사건이었다.

야마가타가 정치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 것은 뜻밖에도 히로히토 황태자의 신붓감 문제 때문이었다. 야마가타가 지지한 화족 규수 이치죠 도키코(一条朝子)[17]가 아니라, 반대파인 사츠마 파가 지지하는 방계 황족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 나가코 여왕사쓰마 번 제12대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의 외손녀[18]이기에, 사쓰마 파에서 나가코를 황태자비로 밀었던 것이다.

그러자 야마가타는 1920년에 나가코 여왕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에 색맹이 있었다는 기사가 나온 것을 근거로, 나가코 여왕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19]에게 "황실을 위해 약혼을 취소하라!" 요구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그런 기사가 나온 것부터가 야마가타의 책략으로 본 일본 국민들은 나가코 여왕을 동정, 야마가타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했다고 한다.[20] 결국 야마가타는 이 소동이 일단락되자 공직에서 사퇴, 은둔에 들어갔다[21]

이 때의 일은 가히 일본 전체가 야마가타에게 맞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야마가타가 파혼을 계기로 자신의 측근들을 궁내성에 들여보내 황궁을 장악하려 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덴노의 존엄을 침범함에 분노한 국수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메이지 일본 특유의 다원주의적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엘리트들까지 죄다 들고 일어났다. 하라 다카시의 입헌정우회를 제외한 모든 의회 세력, 구니요시 왕을 필두로 한 사쓰마 번벌 세력, 기타 잇키를 비롯한 국수주의자들이 강력히 반발했다. 게다가 요미우리 신문은 사설을 통해 야마가타를 통렬히 비난했고 흑룡회 등 무력집단은 야마가타와 하라에게 살해 협박까지 가할 정도... 때문에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인물이 국적(...) 소리까지 들을 지경이 되자 야마가타는 진이 빠져 이 일을 포기한 것이다. [22]

참고로 야마가타는 이보다 몇년 전에 있었던, 영친왕의 신붓감 후보 선정 건에도 관여했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때문에 이방자의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왕이 "야마가타를 혼내주겠다!!" 하며 분노했다고 한다.

군벌과 군국주의의 화신의 보여지는 이면에는 냉정한 판단력과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보유한 인물이기도 하였다.[23] 일본이란 나라가 가지고 있던 국력의 한계를 파악하고 미국, 영국과 대립하여서는 안된다는걸 잘 알던 야마가타는 고다마 겐타로,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비롯한 육군의 후배들이 남만주를 넘어 만주 전체를 경영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자[24] 라이벌인 이토 히로부미와 합세하여 이를 제지하기도 하였다.

3. 대중매체에서

4. 기타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년)는 근대 일본의 정계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쌍벽을 이루던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송하촌숙에서 같이 공부하던 사이인데 훗날 정적이 되었다. 이토가 온건파라면 야마가타는 강경파다. 1890년 제국의회가 설립된 후 첫 수상이 되었다. 그는 개원연설에서 유명한 ‘주권선, 이익선’ 발언을 했다. 일본의 주권선은 일본열도이나 이익선은 한반도라는 취지로 한반도에 대한 군사개입을 정당화하는 생각이었다. 그는 청일전쟁에서는 스스로 야전사령관이 되어 조선과 만주에서 직접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 후인 1898년 그는 두 번째로 수상이 되어 내각을 담당했다.
그의 지지기반은 군부와 관료그룹이었다. 메이지유신 직후 사무라이들의 강경한 반대를 물리치고 징병제를 실시한 이래 그는 군부의 대부였다. 야마가타는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과 의회제를 도입하고 이윽고 정당정치를 인정하려는 데에 불만이 컸다. 러일전쟁에서도 러일협상을 주장하는 이토에 맞서 그는 강경론을 주장했다. 결국 그의 영향력하에 있던 가쓰라 타로 내각은 1902년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와 대결자세를 강화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그는 참모총장으로 전쟁을 전체적으로 지휘했다.
늘 대외강경 노선을 걷던 야마가타는 한국병합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토 한국통감이 보호국화에서 병합으로 나아가는 걸 주저하고 있을 때 그와 가쓰라 내각은 한국병합을 향한 움직임을 강화해나갔다. 이토도 결국 거기에 동의했다. 우리가 한국병합을 생각할 때는 이토 히로부미뿐 아니라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그 휘하의 가쓰라 타로 내각을 연구해야 할 이유다. - 박훈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야스히코 요시카즈안중근이토 히로부미보다 이 자를 처단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다니구치 지로도련님의 시대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인데, 사실 일본 좌익, 자유주의자들 관점에선 안중근이 차라리 야마가타를 처단했으면 좋았을거라고 말할 이유가 있다.

한국인 입장에선 비교도 안되게 더 유명할 수 밖에 없지만, 이토는 19세기 후반 특유의 근대 일본제국주의적 의미에선 자유주의적 성향도 꽤 있었고, 유연한 성향을 보였다. 반면 야마가타는 대외정책 뿐만 아니라 당장 근현대 일본 사람들 자신들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사회적 군국주의, 전체주의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국내 정치,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 사회구조의 형성에 있어서 근현대 일본인들은 야마가타의 영향력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느낄수 있었고 때문에 좌익, 자유주의나 그에 준하는 성향의 일본 사람들 입장에선 이토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더욱 악랄해 보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1] 해당 직책 역임 당시 후술할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의 정치비리 야마시로야 사건이 터졌고, 야마가타는 첫번째 실각을 당했다.[2] 육군대신의 전신. 여담으로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직급이 바로 육군경이다.[3] 내각제 시행으로 내무경이 내무대신으로 바뀔 때 유임했다.[4] 육군참모총장의 전신[5] 육군교육총감의 전신[6] 첫 중의원 선거가 1890년 시행되었다.[7] 만화 바람의 검심에서 묘사되는 모습은 이 사진에서 가져온 듯 하다.[8] 1896년(고종 33) 6월 9일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서 외상 로바노프(Lobanov)와 일본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특사가 한국과 관련하여 로마노프-야마가타 비밀조약을 체결하였다.[9]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시기 전쟁을 막장으로 끌고가던 일본 육군 파벌의 뿌리이자 군국주의의 세력 그 자체[10] 유신3걸로 불리던 기도 다카요시는 얼마뒤 사망했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 내에서의 정책적인 분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으며, 남은 오쿠보 도시미치도 얼마 못 가서 사망하였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보의 후계자 위치에, 야마가타는 사이고로 대표되던 사쓰마 파벌이 약화된 시기에 조슈파벌의 대표로서 일본 육군의 수장 위치에 자리잡았다. 2명이 권력을 장악하고 난 뒤에 서구식 체제를 따라서 총리직제를 도입하였으니 이들의 권력장악 기간은 상상을 초월했다.[11] 태극 모양의 훈장이 보이는데 대한제국에서 1908년에 수여한 대훈위금척대수장으로 보인다. 이토 히로부미도 이 훈장을 받은 바 있다.[12] 군인에게 내리시는 칙유[13] 교육에 관한 칙어[14] 사실상 육군과 해군 고위장성들이 정권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를 무기로 군부는 민간 정치인들을 압도하면서 군비확장과 대외적 군사행동(전쟁) 등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무제한적으로 관철시켰다.[15] 이토는 앞에서 나온 것처럼 오쿠보 사망 이후 문관파의 수장이였다. 모든 문관들의 수장을 자처하는 자가 무슨 파벌을 만들겠는가. 이에 비하여 메이지 유신의 두 무력집단이던 조슈 파벌과 사쓰마 파벌이 일본군으로 편성되었기에 야마가타는 조슈 파벌의 수장이여야 했다. 그럼에도 사이고와 사쓰마 파벌의 일부가 서남전쟁에서 제거되면서 무장파를 대표하였다.[16] 이 무렵,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근위도독으로 근위병을 총괄하는 위치였으나, 근위병 내부의 사츠마계 군인은 조슈의 야마가타를 불복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거기에 야마시로야 사건을 계기로 육군성 회계감독 타네다 마사아키가 비밀리에 조사를 시작해 상당한 육군성 공금이 대출되어 있었던 것이 발각되고, 키리노 도시아키 등 사츠마계 육군의 강한 추궁이 있었다.[17] 화족 이치죠 사네테루(一条實輝) 공작의 3녀. 황태자비에서 탈락한 후, 방계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요시(伏見宮薄儀) 왕에게 시집갔다.[18] 나가코 여왕의 어머니 치카코(俔子) 왕비는, 시마즈 타다요시와 측실 야마자키 스마코(山崎壽滿子)의 8녀이다.[19] 독립운동가 조명하 열사의 의거로 죽었다.[20] 그나마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고 군인 출신이어서 다행이었지, 하라 다카시는 이 사건에서 야마가타를 도와주었다가 하찮은 민간인이 천황가의 혼인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결국 암살당했다.[21] 사실, 궁중모중대사건의 진행과정은 본문의 기술보다 훨씬 복잡하다. 나가코 여왕색맹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것은 야마가타가 아니라 사이온지 긴모치였다. 야마가타는 사이온지가 개인 면담에서 나가코 여왕의 색맹 가능성을 제기하자 비로소 반대에 나섰다. 그 이전에 야마가타는, 도키코의 어머니 호소카와 에츠코(細川悅子)가 조슈번 모리 가문 출신이었는데도 황태자비 선정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고. 심지어 시마즈 가문과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 자신조차, 의혹 초기 단계에서는 '황실의 번영을 위해서 약혼을 취소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의견이었다고 한다. 사태가 커진 것은, 야마가타라면 무조건 싫어했던 사다코 황후가, 야마가타가 뒤늦게 색맹 가능성을 제기하자 이것을 황실에 대한 무례로 간주하고 정면으로 반발하면서부터였다.[22] 최고참 원로가 추진하고 사이온지 긴모치 등 타 원로진이 뒷받침한 파혼 계획이 거국적 반발에 부딪쳐 실패한 이 사건에서 원로(일본)제도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평도 있다.[23] 하라 다카시는 야마가타가 살아 있는 한, 미일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24] 그리고 고다마, 데라우치 등의 조슈벌 후배들 조차 중국을 식민지화하는건 허황된 일이라고 여겼는데 데라우치는 나중에는 만주경영도 그저 일본인이 만주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면 족하다고 생각하였다.[25] 마침 직전의 소동이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진 경찰관들을 때려눕히는 것이었다[26] 실제로 키리노 도시아키 등 사쓰마 출신들이 강하게 추궁했다는 기록이 반영되어 키리노가 칼빼들고 집무실에 쳐들어간다[27] 니시다 토시유키는 후쿠시마현(구 아이즈번) 출신인데,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고향 야마구치현(구 조슈번)과는 지역관계가 현재까지도 매우 험악하다.[28] <세고돈>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역을 맡았으며, 그 외에 사나다마루에서 나오에 카네츠구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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