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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22:32:43

야스히코 요시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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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견과 함께 억지웃음 얼짱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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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캐 으히히히히

1. 개요2. 생애3. 작품 특징
3.1. 애니메이션
3.1.1. 작화3.1.2. 연출
3.2. 만화
4. 경력5. 수상 경력6. 작품
6.1. 애니메이션
6.1.1. 감독 작품6.1.2. 참가 작품
6.2. 만화
7. 연출, 작화 샘플8. 관련 인물9. 기타

1. 개요

安彦良和
(1947년 12월 9일~ ) ([age(1947-12-09)]세)

일본애니메이터,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 소설가, 애니메이션 감독. 우주전함 야마토의 연출 [1], 기동전사 건담의 작화로 유명하다.

홋카이도 엔가루정 출신으로, 대학 재학 시절에는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제적 처분당한 이력을 가진,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운동권', 일본식으로 얘기하자면 '전공투' 출신 인물. 하지만 제적 이후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무시 프로덕션의 구인 광고를 보고, 어린 시절 가졌던 만화가의 꿈을 되살려 업계에 뛰어들었다.

2. 생애

박하를 재배하던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땐 형이 산 소학 잡지를 읽으면서 만화에 흥미를 가져 10살 때 '오다 노부나가'에서 나온 카와나카지마 전투 장면을 노트에 연필로 그리기도 했고, 친구들부터로도 많은 만화를 빌려서 읽었고 직접 공책의 남은 페이지에 만화를 그리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역사 만화를 그리겠다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2] 또한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강의책의 기법들을 모방해 만화를 그려 모험왕에 투고한 적도 있었다.

중학교로 들어갈 무렵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반년 간 입원했으며[3] 1963년엔 형이 대학 진학에 실패해 가업을 잇지 못하게 되자, 형제들과 같이 누나가 사는 곳에 몇 달간 잠시 머물기도 했다. 이전부터 본인이 웅변대회에서 드러낸 연설력과 동아리 행사 사회자 등의 학생회 활동으로 쌓은 명성이 작용해, 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으로 뽑힌 적도 있었다. 훗날엔 당시 아는 친구가 민청 활동을 하던 중이라 영향을 받아 정치성향을 결정했다고 언급했으며,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같은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꿈을 접고 교사가 되기로 하고 졸업 후 가나자와대학, 히로사키대학 등에 원서를 넣어 합격한 히로사키대학의 서양사학과로 입학했다.

재학 중에 민청의 활동에 참여했지만 형식적이고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해 얼마 못가 관두고, 1968년 베트남 전쟁 반대 모임 결성 관련 강연 기획 등으로 평화주의 학생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즉 제1세계의 전형적인 68세대였던 셈. [4] 이듬해(1969년) 9월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 본부를 전학공투회의가 점거한 지 3주가 지나서 기동대에 의해 봉쇄가 풀렸는데, 보름간 학교에 있었던 것 때문에 여러 죄목이 적용되어 경찰에 체포당했다. 이후 다니던 대학에서 제적 처분을 받고, 풀려난 뒤엔 도쿄에 있던 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사식으로 근무했으나 일이 맘에 들지 않아 석달 만에 그만둔다. 취업이 곤란해져 이 무렵 신문에 게재된 무시 프로덕션 구인 광고를 보고 어릴 때의 꿈인 만화가를 떠올려 응모해, 면접에서 대학 노트에 그렸던 만화를 보여줘 합격하여 무시 프로덕션 양성소 2기생으로 입사했다. 무시 프로덕션의 사장이 자신이 존경하던 데즈카 오사무였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무시 프로덕션에 들어간 건 우연이라고 한다.

입사 3년 뒤 무시 프로덕션이 파산한 뒤론 프리랜서로 오피스 아카데미, 소에이샤에서 활동했었고, 그 무렵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선호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 "애니메이션 같은 애들이 보는 매체에 메세지를 담아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리가 없다." 라는 생각이 들어 직업에 환멸감을 느끼기도 했었으나 니시자키 요시노부가 "애니메이션은 애들만 보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라고 설득하여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안녕히 우주전함 야마토 사랑의 전사들》 제작 이후 일절 야마토와 관련된 제작 과정에서 손을 떼려했으나 니시자키 요시노부의 강한 만류와 반대로 이루지 못해 우주전함 야마토 2 등 TV판의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기동전사 건담》의 캐릭터 디자인 및 작화감독을 맡았는데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의 연출 작업과 아리온 만화 연재와 스케줄이 겹쳐 중노동을 하다 도중에 과로로 쓰러져 5개월이나 입원해 후기 분량의 작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를 아쉬워한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 3부작을 만들기로 했고 극장판 3부작은 야스히코가 수정하지 못한 작화를 야스히코가 직접 수정하고 새로 그려 자신의 작화로 완성시켰다. 기동전사 건담은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대표작이 되었으나 야스히코는 첫 작품 이후의 건담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기동전사 Z건담, 기동전사 건담 F91, 기동전사 건담 UC은 캐릭터 디자인은 해주었지만 작화는 하지 않았다. 야스히코가 연출과 작화까지 손댄 작품은 전부 퍼스트 건담의 파생작이다.

1979년엔 《아리온》을 발표해 만화가로 데뷔하였으며, 아니메쥬에 연재했던 한 에세이에서 당시 논란이 있던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극장판 《FUTURE WAR 198X년》[5]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그 뒤 극장판크러셔 죠》로 감독으로 데뷔해 이름을 알렸다. [6] 야스히코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은 뛰어난 작화로 고정 팬이 좀 있었으나 비너스 전기가 흥행에 실패하고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잃어 애니메이션을 접고 1989년 《나무지》를 연재함으로써 만화가로 전업하기로 한다.

2001년에는 야마우라 에이지의 권유로 기동전사 건담을 야스히코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만화 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을 연재했다. 2006년엔 고베 예술공과 대학의 미디어 표현학과 교수로 재임하기도 했었다. 2012년 3월과 2013년 말엔 홋카이도 신문 석간, 주니치 신문, 도쿄신문 석간 등지에서 《내 속의 역사》, 《이 길》을 연재했다.

이듬해 5월 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의 일부분을 애니화한 기동전사 건담 THE ORIGIN의 총감독을 맡으면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복귀하였다. 이어서 내놓은 기동전사 건담 쿠쿠루스 도안의 섬으로 애니메이션 감독은 은퇴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다만 개봉 이후 후루야 토오루가 "야스히코 씨의 건담에서 아무로를 한 번 더 하고 싶다." 라고 했고 작품에 대한 반응도 괜찮아서 복귀할까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후루야가 리메이크 해달라는 부분이 있다면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 다만 후루야가 불륜 낙태 사건으로 나락을 가버렸으므로 직접 한다면 해도 후루야가 해달라는 부분은 안 할 것으로 보인다.

3. 작품 특징

3.1. 애니메이션

3.1.1. 작화

애니메이션 업계에 종사할 당시에는 표정이 풍부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펜선의 작화로, 업계에서도 최고로 꼽을 정도의 실력을 자랑했다. 타카하시 료스케에 따르면 무시 프로덕션 시절 작화로 1군 멤버였다고 한다. 특히 표정과 미형 캐릭터, 연기 묘사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으며 당시 애니메이션 잡지에선 거의 5년 동안 최고의 애니메이터 독자 투표 1위를 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여성팬이 굉장히 많기로 유명했으며 그에게 그림을 배우러 들어온 제자들도 상당 수가 여성이었다. [7]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표현하는 표정과 연기 묘사를 잘 해서 원화나 작화감독으로서는 초일류였지만 액션이나 움직임에 있어서는 좀 뚝뚝 끊어지는 편. 기동전사 건담에서 건담의 움직임이 어색하다는 지적이 자주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8] 키타쿠보 히로유키는 "애니메이터로서의 실력만 따지면 야스히코 씨는 오오츠카 야스오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연기력만 본다면 오오츠카 야스오와 미야자키 하야오도 능가했으며 모리 야스지와 동급이다." 라고 평했다. #

또한 그의 필모에서 메카닉 디자인 참여가 엿보이듯 인물 디자인 못지 않게 메카닉 작화와 디자인도 매우 잘한다. 초전자로보 컴배틀러 V가 제작될 때 포피에서 도착한 조악한 디자인의 완구를 보고 탄식하던 나가하마 다다오가 야스히코에게 리파인을 요청했는데, 나가하마가 깜짝 놀랄만큼 미려한 디자인의 로봇으로 탈바꿈시켰다. 나가하마는 그의 메카닉 디자인 능력이 인물 디자인 능력에 묻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해서 아쉬웠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로봇만화 그리기에 매우 적합한 인물이다.

심지어 폭발, 물 같은 이펙트 작화까지 직접 한다. 마스다 히로후미는 자신의 이펙트 작화는 야스히코를 따라하는 것이라고 한다. 동물 작화도 했었고 못 그리는 것이 없다고 봐도 좋다.

작화의 타이밍[9]도 잘 잡는데 마스다 히로후미는 야스히코가 이걸 너무나도 잘 해서 "스톱 워치라도 쓰시는 겁니까?" 라고 물었는데 야스히코는 "전부 감으로 한다." 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우주전함 야마토》같은 선이 굵은 작품에서, 《바람과 나무의 시》같은 여성 취향 작품까지 다루는 작품의 폭도 다양했다.니시자키 요시노부,나가하마 다다오,토미노 요시유키는 그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다. 특히 토미노는 야스히코를 최고의 애니메이터라고 평한다. 무시 프로덕션에서 일할 때 "굉장한 신입이 들어왔다." 라는 소리를 듣고 야스히코의 스케치 북을 봤는데 그때부터 야스히코는 천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림으로 하는 감정 표현력이 다른 애니메이터와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 하나의 장면을 그려내면 여러 감정이 동시에 전해지는 실력이라고 한다. 2000년대부터는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그림체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하는 야스다 아키라, 요시다 켄이치 두 사람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기용할 정도로 그의 작화를 좋아한다. 온다 나오유키기동전사 Z건담 A New Translation을 할 때 토미노에게 "너는 왜 야스히코처럼 못 그리는 거냐?" 라는 갈굼을 받고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토미노 말로는 살다보면 야스히코 정도의 애니메이터를 또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야스히코 말고는 없더라고 한다.

심지어 미야자키 하야오아마노 요시타카조차 그의 그림을 흉내낸 적이 있을 정도이다. 오토모 카츠히로도 야스히코는 그림을 정말 잘 그린다고 평하기도 했다. 오토모는 야스히코를 직접 찾아가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나가노 마모루거신 고그 때 그와 같이 일하면서 디자인과 작화 실력이 크게 올라갔다며 감사한 분이라고 했다.

작화감독을 하던 시절에는, 애니메이터들이 작업한 분량을 나중에 수정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레이아웃으로 거의 스케치 다 된 수준의 그림을 넘겨주고 원화를 그리게 했을 정도였다.

파일:야스히코허리.jpg

야스히코 허리, 야스히코 서기 로 불리는 유명한 자세가 있는데 캐릭터가 직립해있는 자세를 그릴 때 자연스럽게 그리지 않고 일부러 허리가 앞쪽으로 튀어나오면서 S자 형태를 이루게 그린다. 위 사진의 아무로 레이처럼 일부 캐릭터들은 여기에 더해 무릎이 앞으로 꺾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면 뭔가 자세가 부자연스럽지만 특이한 매력이 느껴져 애니,만화 업계의 다른 사람들도 따라 그리게 되었다. 죠죠서기의 시조라 여겨지기도 한다. 작붕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야스히코가 멋있으라고 일부러 그러는 것임을 스스로 밝혔으므로 작붕이 아니다.

다리를 그리는 여러 기법을 창시했으며, 다리를 매우 잘 그린다. 야스히코가 디자인한 캐릭터는 남성, 여성 모두 허벅지가 강조되는 특징이 있다. 아리온 같은 경우는 팬들에게 허벅지 만화라 불리기도 했다.

그가 직접 가르친 작화 제자는 이타노 이치로, 타카하시 쿠미코, 카미무라 사치코, 오오하시 요시미츠가 있으며 자신과 비슷하게 그린다며 신임하는 애니메이터로는 카나야마 아키히로, 도키테 츠카사, 이나노 요시노부, 코토부키 츠카사(ことぶきつかさ)가 있다. [10]

더티페어, 크러셔 죠 때 같이 일한 타카치호 하루카 말로는 야스히코는 이런 특별한 실력인데도 자신의 그림은 특별한 게 없으며 아무나 따라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어이가 없다고 한다. 야스히코가 "미키모토 하루히코를 봐라. 내 그림 잘 따라하잖아." 라고 하는데 타카치호 생각으론 그건 미키모토가 괴물인 거라고. #

3.1.2. 연출

이후 80년대에는 야스히코 본인이 그림만 그리는 걸 넘어 자신의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욕구가 강해지면서 애니메이터보다는 총감독 겸 작화감독으로서 활동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거신 고그. 그가 감독을 한 작품은 본인이 콘티를 레이아웃 수준으로 다 깔아주고 직접 작화수정도 해서 작화는 매우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연출이나 스토리 배분에서 문제가 있어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야스히코 그린 만화나 연출,감독을 담당한 작품을 보면 그림은 정말 잘 그리는데 같은 표정이나 구도가 너무 반복되거나 스토리와 무관계하게 작화만 과시하는 것 같은 무의미한 장면이 들어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야스히코도 이때 예산과 스폰서라는 것에 묶일 수 밖에 없는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에 크게 절망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후에는 만화가로 전직하게 된다.

그래도 연출가로서의 실력이 아주 없다고 볼 수는 없는데 신인 시절부터 지시대로 그림만 그리는 것보다는 창작에 흥미가 있어서 콘티를 종종 그렸다고 한다. 그가 최초로 콘티를 그린 것은 '제로 테스터'로 알려져 있으나 본인 말로는 그것보다 훨씬 전인 무시 프로덕션 시절부터 콘티를 했다고 한다. 주로 칸다 타케유키의 콘티를 예쁜 그림으로 클린업 해주는 작업을 많이 했다고 한다. # 그러나 그 당시에는 콘티와 연출을 동시에 하지 않고 콘티만 그리는 사람은 쳐주지 않는 분위기라 크레딧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의 경우 첫 작품부터 우주전함 야마토 새로운 여행까지 야스히코가 대부분의 콘티를 작성하였다. 이거 한다고 토미노의 무적초인 점보트3무적강인 다이탄3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을 정도. 야마토 시리즈에선 야스히코 연출의 평이 좋다. 아무래도 니시자키 요시노부가 전부 자기가 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아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초전자로보 컴배틀러 V에서도 주로 연출로 활동했는데 평이 괜찮았다. 다만 그 이후로는 연출이 많이 퇴보한 바가 없지 않은데 옆에서 말려주고 조언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애니메이션 연출은 해독이 어려운 연출을 하는 토미노 요시유키와 반대로 이해하기 쉬운 연출을 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미노는 이후로도 잘 나가고 자신의 작품은 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 그래서인지 만화로 옮긴 뒤로는 어려운 연출도 사용하게 되었다.

크리에이터로서 완벽주의자고 고집이 상당히 세서 감독이나 연출을 할 때 스태프와 불화가 생겼다는 일화가 많다. 제로 테스터에서는 콘티를 맡았는데 스즈키 요시타케의 각본대로 작성하지 않고 마음대로 각본을 변형시켜 콘티를 작성해 스즈키에게 크게 혼나서 타카하시 료스케가 겨우 겨우 화해시킨 적도 있고, 코가와 토모노리 경험담에 따르면 안녕히 우주전함 야마토 사랑의 전사들에서도 콘티가 마음대로 수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작화와 연출은 충분히 A급이었지만 여러 사람과 동시에 작업해야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는 다소 적성에 안 맞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출가로서의 단점은 전개 속도, 즉 템포가 느리다. 야스히코는 캐릭터의 감정 변화를 여러 행동과 섬세한 표정 변화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연출을 장면마다 끊임없이 계속 연출해 전개 속도가 매우 느려진다. 연기와 연출에 중점을 두고 애니메이션을 감상한다면 야스히코의 출중한 감정 표현력을 보면서 재밌게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스토리 진행에 중점을 두고 본다면 굉장히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경향은 다른 감독 밑에서 콘티와 연출을 한 작품에선 잘 드러나지 않지만 야스히코가 직접 감독을 한 작품에서는 공통적으로 크게 나타난다. 야스히코는 이러한 자신의 연출 경향은 타카하타 이사오의 연출의 영향이라고 한다. 다만 타카하타는 연기력에 중점을 둔 감독이긴 해도 템포까지 느리게 잡는 감독은 아니므로 이건 야스히코 본인의 단점이다. 이는 야스히코가 타카하타 작품 중에서도 유독 전개가 느렸던 엄마찾아 삼만리를 좋아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다소 호불호가 갈리는 애니메이션 연출과는 반대로 야스히코가 그린 만화들은 시간의 경과 없이 컷 단위로 스피디하게 흘러가, 지루하다는 느낌은 커녕 오히려 야스히코의 연출력이 가진 장점이 극대화되어 상당히 몰입하여 감상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특히 야스히코가 그린 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 만화책을 보고 난 후에 야스히코가 감독한 기동전사 건담 THE ORIGIN 애니메이션을 감상할 때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애니메이션 연출보단 만화 연출이 더 적성에 맞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야스히코가 가르친 연출 제자는 오오하시 요시미츠, 카시마 노리오가 있다.

3.2. 만화

애니메이터 시절부터 아리온과 같은 만화를 동시에 연재하던 야스히코는 비너스 전기가 실패한 뒤로 사실상 만화가로 전업한다. 자신은 만화의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비너스 전기의 실패 이후 자신은 오히려 애니메이션이 안 맞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만화가에 전념하기로 한다. 만화가는 분업 체제인 애니메이션과 달리 각본과 연출과 작화를 동시에 해야해서 애니메이션을 하던 사람이 만화를 그리면 고생을 하게 되는데 야스히코는 이 두 가지를 전부 잘 했고 학식도 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바로 적응했다.

만화가 활동 초기엔 창작 만화를 그렸으나 역사 만화를 주로 그리게 되었다. 원래부터 역사에 관심이 깊었고, 자신은 스토리를 짜는 능력이 부족한데 역사 만화를 그리면 현실을 참고해서 그릴 수 있으므로 역사 만화를 그린다고 한다. 픽션은 결국 현실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만화가가 된 이후에도 완벽주의와 고집은 여전해서 그의 작업 스타일은 어시스턴트를 두지 않고 모든 작업을 혼자서 진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특히 동양화풍 느낌을 물씬 주는 붓터치와 함께 원고 한 페이지의 모든 명암을 그라데이션 톤 딱 한 장으로 붙여서 표현해내는 기법은 혀를 내두를 정도. 특히 무지갯빛 트로츠키는 마치 수묵화의 농담처럼 그려내는데, 무지개빛 트로츠키에서는 주인공의 심상 + 만주 벌판의 광활함 + 작화적 연출 기법의 세 가지 요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사실 이는 그의 엄청난 작업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기법으로 봐도 무방하다. 드래곤볼에서 토리야마 아키라가 초사이어인의 머리를 먹칠을 안 해도 되는 금발로 표현한 것처럼. 이처럼 상당한 작업량을 혼자서 처리하기 때문에 《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의 작업 당시 그의 건강상태를 우려한 출판사 담당자가 처음으로 어시스턴트를 붙여주었다고.[11] 2012년에는 나이가 63세인데도 불구하고, 컴퓨터 그래픽도 조금씩 도입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12]

또 다른 작화적 특징으로는 디자인한 캐릭터의 상당수가 M자 이마라는 것. 중년들은 대부분 M자 탈모에 시달리고 있으며 어린 청년이나 마틸다 아쟌, 키시리아 자비 같은 여성 캐릭터들도 이마가 M자인 경우가 많다. 거기다 야스히코 본인도 M자 탈모에 시달렸다. 반대로 원형 탈모가 있는 사람은 자주 나오지 않는다. 또한 말년으로 갈수록 캐릭터들의 목 둘레가 굵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외에도 《현시연》이라든가 《강철의 라인배럴》, 《81 다이버》 등, 자신보다 어린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훌륭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며, 《현시연》의 경우는 작품 내에 등장하는 동인지에도 참가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81 다이버》에는 자신의 그림으로 잠깐 출연한다. 너의 이름은.을 비롯해서 최신작도 다 챙겨보고 있다고 한다. 안노 히데아키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하는 등 후배들에게는 평가가 후하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건담 관련 작품에 대해서는 "건담을 망치고 있다." 라고 할 정도로 굉장히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13]

2014년 신동아 인터뷰에서는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보다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쓰라 다로를 죽였어야 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발언은 일제의 만행을 변호한 것이 아니라 '죽일 경우 이런 인간을 죽여야 더 효율적이다'는 의미이다.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하얼빈에 안중근의 동상을 만들고, 그의 사상인 동양평화론반드시 새겨놓아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좋은 쪽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일본의 보통국가화는 우경화와는 엄연히 다르다.[14] 더구나 이 작가는 평화헌법 개헌을 반대하는 기사를 기고한 적도 있었다. 또한 2015년 7월 16일에 안보법안이 날치기로 통과되자, 이를 비판하는 의견을 스포니치(스포츠 닛폰 뉴스) 인터뷰에서 밝혔다. 건담 디 오리진에서는 2차대전을 일으킨 일본에 대하여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배했으며 마치 지온이나 똑같다며 극중 인물의 대사를 빌려 제대로 깠다.

작가 자신의 근대사 관련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아시아주의[15], 쑨원의 사상(특히 오족공화)이 되겠다. 여기서 오족공화란 아시아주의와 연결점이 있고, 손문 본인도 아시아주의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작가 자신은 근대사에 대해 숙고하며, 아시아 각국의 연대를 깊이 강조하고 있으며, 바로 그 부분을 가장 아쉬워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청일전쟁을 언급하며, '일본을 온 아시아 지역에 대한 가해자로 타락시킨, 의롭지 못한 전쟁'이라며 비판했다.

한편 오족공화는 훗날 만주국에서 건국이념으로 써먹고, 깃발 역시도 오족공화를 나타내는데, 《무지갯빛 트로츠키》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만주국을 "오족협화의[16] 깃발을 내세우면서, 왜 깃발이 가르치는 사상에는 따르지 않냐?"고 비판한다. 또한 《왕도의 개》에서도 아시아주의적 주제를 그렸으며, 아시아주의자인 김옥균, 카츠 카이슈, 손문을 매우 긍정적으로 그렸다.

한편 '왕도'라는 말을 즐겨 쓰고 맹자 사상을 자주 인용하는 것으로 봐서, 맹자 사상 역시도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왕도의 개》는 아예 작품 곳곳에서 맹자의 구절을 인용하고, 맹자 사상과 아시아주의를 연결시켰다. 이런 아시아주의자인 만큼 일본 우익들과 전혀 반대의 방향이긴 하지만 한국의 폐쇄적인 민족주의, 순혈주의국가주의 또한 비판의 대상으로 본다고 추정된다. 왕도의 개에서 전봉준과 주인공 카노와의 대화도 전봉준을 대륙형 의인으로 묘사하긴 하지만 그는 초목과 같은, 민족 국가 내에서 민족적 이상에 따라야 인류적 발전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카노는 이에 맞서 자신이 동학군을 지원하려고 하는건 일본의 국익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적인 전봉준에 대한 지원이라며 보편적인 휴머니즘을 주장하고, 다른 작품인 무지갯빛 트로츠키에서 주인공이 속했던 사문동의 게릴라 세력이 해체되면서 사문동군 내의 조선인들의 리더격인 박기백은 조선인끼리, 한족은 한족끼리, 몽골인은 몽골인들끼리 독립, 혁명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주인공인 움보르트는 이를 부정하고, 허상이란걸 알면서도 겉으로나마 존재하는 만주국의 오족공화적 이념을 순수하게 설파하려고 한다. 피해자 민족의 민족주의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하는 측면은 있어도 한국의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의식하지 않고는 두 작품을 연달아 이런 주제를 조선인 캐릭터의 입을 빌려서 부각시켰을 거라 생각되지 않는다. 해당 장면에서 박기백이 조선인들끼리만 독립운동하시겠다고 따라가는 집단이 김일성 일파인 것만 봐도 우연의 일치나 단순한 연출이라 보기 힘들다.

마르크스주의도 오늘날에 다시금 돌아봐야 할 정신이라고 하며 잊지 말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2017년 8월, 당시의 애니메이션과 건담에 대해 소감을 나타냈다. 건담의 창시자가 느끼는 요즘 애니의 의문
요즘 애니는 점차 게임에 지배되고 있지. 스토리의 게임화라는 말을 하려고 해. 게임의 경우 플레이어는 절대자지. 세계는 플레이어 중심으로 돌아. 죽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 플레이어는 점점 올라가고, 더 높은 스테이지에 올라 마지막엔 신에게 다가가지. 미녀도 보물도 전부다 얻고서. 그건 내가 이해한 『건담의 세계』랑은 정 반대야.
불행히도 요즘 건담도 게임화되고 있다고 봐. 건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게임화한 다른 건담이 보급되고 있어. 겨우 애송이가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투로 전쟁을 말하고, 세계를 바꾸겠다고 우기지. 바꿀 수 있어? 세상은 마물이야.

이렇듯 이데올로기와 이념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이 있는 작가이나 지나치게 이념에 사로잡혀있다는 지적도 있다. 폭력 사건도 일으킨 전공투를 정의로운 집단처럼 정당화시키려고 하고, 폭력을 써서라도 혁명을 해야한다는 자신의 과격한 신념을 자꾸 작품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엔 좌익 사상을 가진 작가는 많지만 야스히코는 그중에서도 과격파에 속하기 때문에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편이다.

건담 에이스 2009년 9월호에서 토미노 요시유키는 "야스히코 씨는 나보다 어리면서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야스히코 씨는 위험하다." 라고 평하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발언은 선을 넘을 것이 우려된다는 뜻으로 말하는 걱정이지[17] 토미노는 오히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신이 야스히코에게 많은 걸 배웠다고 할 정도로 그의 의견이나 지식에 상당히 동조하는 편이다. 한국에서는 토미노가 전공투에 극좌파라는 루머가 오랜 시간 돌았는데 아마 야스히코의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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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기동전사 건담으로 인연이 있는 성우 후루카와 토시오가 진행하는 인터뷰에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위에 언급된 문항들만 읽으면 굉장히 진지하고 정치적인 것만 추구하는 진중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사적으로는 유머러스함도 충분히 갖추고 있고[18] 야한 것도 상당히 좋아한다. 특히 애니메이터 시절엔 여자 캐릭터를 그리는 장면만 유독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서 이 사람이 담당한 애니메이션은 여자 캐릭터들의 작화가 당대 작품들보다 뛰어나고, 여캐들의 인기도 높았다. 사쿠라노 마리판치라 붐을 일으킨 것도 이 사람이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바꿔버린 전설의 양대 샤워신인 난바라 치즈루세일러 마스의 샤워신을 그린 것도 이 사람과 토미노 요시유키다. 야애니의 아버지 과거에 연재한 만화도 섹스 어필씬은 꼭 들어간다. 단지 말년에 그린 작품인 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과 역사극에서는 자제했을 뿐이다. 팬들은 애정을 담아서 변태 영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토미노 요시유키는 "그는 변태가 분명한데 자신이 변태라는 자각이 없다. 숨기지 말고 보X가 좋다고 당당하게 외치란 말이야!" 라고 하기도 했다. #
오랜 시간 그를 만난 후배들 사이에서 "야스히코 선생님은 콘티도 안 그리고, 밑그림도 안 치고, 기본적인 테두리 참고 선도 안 치고 바로 작화를 한다." 라는 소리가 들었는데 2021년 NHK 방송의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공부 neo' (浦沢直樹の漫勉neo) 9화 야스히코 요시카즈 편에서 사실로 밝혀졌다. 야스히코는 애니메이터 시절의 버릇이 남은 것이라며 "애니메이터는 속도가 중요하므로 밑그림을 쳐서는 안 된다. 그 시간에 한 장이라도 더 그려야 한다." 라고 주장하나 이 다큐를 본 타나카 마사요시 같은 후배들은 "그건 야스히코 씨만 되는 겁니다." 라는 반응을 보였다. [19] 무시 프로덕션 동기 카와지리 요시아키 말로는 이게 수행을 쌓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니고 야스히코는 신인 시절부터 밑그림을 안 치고 그렸다고 한다. # 다만 애니메이션 원화가 아닌 만화를 그릴 때는 붓 작화를 선호해서 연필선 그림 위에 붓으로 한 번 더 선을 친다.

4. 경력

그가 참여한 작품들 중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는 《용자 라이딘》, 《초전자로보 컴배틀러 V》,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 《거신 고그》, 《아리온》 등이 있으며, 비단 캐릭터 디자이너나 작화감독으로서만이 아니라, 콘티 면에서도 업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자신의 작품이 원작인 영화 《비너스 전기》의 흥행 실패 이후 우울증이 와서 애니메이터 활동을 접고 전업 만화가로 전향한다. 다만 그가 애니메이터를 그만둔 결정적인 이유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시끌별 녀석들 (1981)》을 보고 넘사벽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기동전사 건담 THE ORIGIN으로 감독에 복귀했다.

만화가로 전업한 이후, 역사에 대한 깊은 조예를 바탕으로 주로 시대극 만화를 집필하였으며, 일본 만화가들이 거의 다루지 않는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기도 한다. 이에 어떤 평론가는 '일본 제일의 아카데믹한 만화가'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 중에는 일본 근현대사의 어두운 면, 특히 일본 우익의 행적을 조롱하고 강력하게 비판하는 작품이 다수 존재한다.[20] 특히 유명한 것은 일본관동군 만주국 부대에 소속된 장교의 이야기를 다룬 《무지갯빛 트로츠키(虹色のトロツキー)》.[21] 국내에서도 해적판으로 간행된 적이 있으며, 2013년 11월에 대원씨아이가 정식 출간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 2012년 6월에 국내에서 대원씨아이가 정식 번역판을 출간한 《왕도의 개(王道の狗)》에서는 김옥균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고 있으며, 여기 나오는 전봉준도 꽤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이 작품의 반향이 상당했던지, 동아일보에서 아예 이 사람을 상대로 독점인터뷰까지 했다. 참고로 김옥균은 망가쟈판 동인지에 수록된 《아버지》라는 그의 작품에서는 아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외에도 네로 황제, 알렉산드로스 대왕, 예수 그리스도, 잔 다르크 등 많은 역사적인 인물들을 다룬 만화를 그렸으며, [22] 《네오 데빌맨》의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2012년부터 러일전쟁 바로 직전의 근대 일본과 고대 일본의 역사를 함께 다룬 역사만화 《하늘의 혈맥(天の血脈)》을 애프터눈에 연재중이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건담 에이스에서 연재하던 《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을 완결, 이후 아마쿠사 시로시마바라의 난을 다룬《여도몽담(麗島夢譚)》이란 시대물을 마무리 지었다.

2018년 11월부터 월간 애프터눈에서 '이누이와 타츠미 -자바이칼 전기-'의 연재를 시작했다. 작가 자신이 마지막 만화 연재라고 공언했다. 배경은 적백내전기의 시베리아 내전이라고 한다.

5. 수상 경력

역대 성운상 시상식
파일:seiunprize.jpg
아트 부문
제11회
(1980년)
제12회
(1981년)
제13회
(1982년)
오라이 노리요시 야스히코 요시카즈 나가오카 슈세이

6. 작품

6.1. 애니메이션

6.1.1. 감독 작품

6.1.2. 참가 작품

6.2. 만화

7. 연출, 작화 샘플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캐릭터 작화, 메카닉 작화, 이펙트 작화를 전부 혼자 다 한다. 로봇도 폭발도 직접 그렸다.
야스히코가 직접 작화를 안 하고 연출만 해도 작화는 비슷하게 나오는데 그건 야스히코가 연출 콘티이런 퀄로 그리기 때문이다.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
작화감독 야스히코 요시카즈
크러셔 죠 PV
콘티, 연출, 작화감독 야스히코 요시카즈
거신 고그 OP
콘티, 연출, 작화감독 야스히코 요시카즈
비너스 전기 PV
감독, 콘티 야스히코 요시카즈 / 작화감독 카미무라 사치코
미술감독 코바야시 시치로
기동전사 건담 THE ORIGIN PV
총감독, 콘티 야스히코 요시카즈 / 총작화감독 니시무라 히로유키
기동전사 건담 쿠쿠루스 도안의 섬 PV
감독, 콘티 야스히코 요시카즈 / 연출 임가희 / 총 작화감독 타무라 아츠시

8. 관련 인물

9. 기타



[1] 야마토의 전투 신과 메카닉 연출은 이시구로 노보루. 인물과 드라마 연출은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공헌이 크다.[2] 이에 부친은 그림을 이웃들에게 보여주는 등 무척 기뻐했지만, 모친은 그런 시시한 걸 하고 있을 바엔 집안일을 하라고 했을 만큼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3]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4] 실제론 형식적인 당시 학생 운동권의 연설, 시위를 꺼려 직접 학우들한테 설명하는 방법으로 활동했으며, 이듬해 1월 일어난 도쿄대학야스다 강당 점거 사건에 참여한 친구가 체포되었으나 교통비가 미치지 못할 만큼 자금이 부족해 도쿄로 가지 못했다고 한다.[5] 《가공스런 미래전쟁》이란 제목으로, MBC에서 90년 초반 명절특선으로 더빙 방영한 바 있다.[6] 원작자인 타카치호 하루카와는 서로 친한 사이여서 부탁을 거절하진 못했으나, 나중에 굳이 극장판 제작을 하고 싶진 않았다고 말했다.[7] 지금이야 로봇 애니메이션이 아저씨의 전유물이지만 예전엔 여자도 많이 보았다. 야스히코가 참여한 용자 라이딘, 기동전사 건담도 방영 당시에는 여자 팬이 더 많았다. 건담의 남성 인기는 나중에 재방송과 입소문, 건프라의 발매로 나중에 촉발된 것이다.[8] 건담 자체가 움직임보다는 원화의 질, 로봇보단 인물 작화를 중시한 작품이라 액션을 잘 그리는 애니메이터들은 별로 투입되지 않았다.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에서 건담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장면들은 야스히코가 아니고 이타노 이치로 작화이다. 물론 그것도 야스히코가 다 그림체에 맞게 수정하긴 했다.[9] 동화의 양을 조절해서 느낌과 템포를 조절하는 작업.[10]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디 오리진에서 코토부키 츠카사를 직접 지명해서 참가를 요청했고 코토부키는 "저는 선생님과 화풍이 다른데 왜 부르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야스히코는 "자네는 나와 비슷한 뭔가를 가지고 있고 내가 그리고 싶었지만 그리지 못했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자네라면 가능하다." 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실제로 코토부키는 디 오리진에서 야스히코와 큰 차이가 없는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를 보여주며 큰 활약을 보였다. 코토부키도 야스히코처럼 다리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는데 아마 그래서 비슷한 걸 추구한다는 걸 알아챈 것으로 보인다.[11] 그런데 《디 오리진》 23권의 권말부록으로 실린 인터뷰에 의하면, 그마저도 야스히코 본인의 아들 한 명이었다. 아들 역시 애니메이터 출신.[12] 다만 스스로에게 안 맞는다고 다시 아날로그 작업 방식으로 돌아왔다.[13] 퍼스트 건담과 후쿠이 하루토시가 쓴 턴에이 소설판을 제외하면 모두 실망했다고 한다. 퍼스트 외에는 친분이 각별한 토미노 조차도 예외로 두지 않고 비판한다.[14] 작가曰, 일본인이 아베를 지지하는 것은 군사대국으로의 회귀보다는 왜곡된 소국주의, 군대 없는 부국이 얼마나 불완전했는지에 대한 반동이라고 생각한다.[15] 대동아공영권 같은 불쏘시개가 된 주장의 변질되기 전의, 순수한 의미로서의 아시아주의이다. 사실 안중근도 이 사상의 지지자였고, 이 때문에 작가는 안중근의 사상을 좋아한다.[16] 오족공화와 사실상 같은 말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오족이 구체적으로 어떤 민족을 뜻하는지는 만주국의 민족구성에 맞게 어레인지 되었다.[17] 야스히코가 사람들이 뉴타입을 이념으로 오해하고 이용할 수 있으니 수정해야 한다고 하자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너무 확대해석 아닌가" 라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18] 그가 그린 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에서도 등장인물들이 얼빠진 표정을 짓거나 무거운 분위기를 덜어내는 코믹한 장면들을 자주 삽입했다.[19] 야스히코만 하는 건 아니다. 쿠보 츠구유키마츠모토 노리오도 이렇게 그린다. 하지만 셋 다 천재이므로 보통 사람은 함부로 따라할 수 없을 것이다.[20] 그렇다고 해서 극좌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 운동권 출신이기 때문에 운동권의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지적하기도 한다. 《왕도의 개》의 오오이 켄타로 같은 캐릭터 묘사가 그 예.[21] 자신의 이 작품을 언급하면서,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논의가 일어나기엔 현 일본 정치레벨이 너무 낮다고 비판한 사설을 2007년 02월 11일에 발표했다. 개헌론도 까고, 고이즈미 준이치로도 까고, 관동군도 까고, 일본운동권도 까고….(#)[22] 이 작품들 중 네로와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은 아무로 레이와 비슷하다.[23] 고그는 4화에서 처음 싸운다.[24] 상영 전 스페셜 영상에서 출연해서 본인이 건담을 영상으로 만드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언급했다. #스페셜영상(국가제한), #루리웹[25] 콘티가 700장인데 거의 다 야스히코가 그렸다고 한다. 나머지는 임가희 부감독이 담당.[26] 일부 작화는 본인이 직접 수정했고 아이들이 다 모여서 식사하는 장면은 그릴 수 있는 실력의 애니메이터가 없어 직접 했다고 한다. 식사 장면 외에 자신이 그리거나 수정한 부분이 있는데 참가 애니메이터들의 명예를 위해 밝힐 생각이 없고 크레딧도 안 했다고 한다.[27] 34화는 일부만 작화 감독. 크레딧은 없다.[28] 다만 나카무라 카즈오이타노 이치로가 그린 일부 괜찮은 작화는 무수정으로 남겨놨다.[29] 구판은 총3권, 신판은 상/하권으로 총 2권[30] 야스히코 외에도, 이시노모리 쇼타로, 미즈키 시게루, 요코야마 미츠테루, 타케미야 케이코 등 거장들이 참여한 시리즈[31] 아키히토 상황의 이종사촌이다.[스포] 마지막에는 화형도 당할 뻔하지만, 기적이 일어나서 목숨을 건지고, 살아서 잔 다르크의 복권 재판까지 보게 된다.[33] 2003년 발매된 완전판은 1권[스포2] 요슈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로마군이 요슈아에게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사망을 확인하는 절차를 생략했고, 바라빠아리마태아의 요셉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다. 예수가 가매장된 석굴에서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슬퍼하면서도, 부활의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예수의 시신을 빼돌리고, 뒤이어 석굴을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는 부활해서 사라졌으니, 그의 부활을 베드로에게 알리라고 하며 작품이 끝난다. 유대교에서도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추종자들이 시신을 훔쳤다 믿는다고 한다.[스포3] 결말에서 게르만족 출신의 검투사 노예가 네로를 도주시키고 스스로 네로로 변장하고 자살한다.[스포4] 정확히는 생존이 아니라...[37] 돈도 제대로 안 주고 부려먹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지만 니시자키 덕에 애니메이션 일을 계속할 수 있었고, 열정이 있던 사람이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한다.[38] 다만 작화만 존경하며 야스히코가 연출한 감독 작품은 재미와 로망이 없어서 싫어한다고 한다.[39]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그림체를 바탕으로 더 요염하게 발전시킨 디자인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야스히코도 자신과 굉장히 똑같은 그림을 그린다며 제자로 키우려고 했는데 인연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40] 다만 작화만 존경하며 거신 고그 이외의 야스히코 연출 작품은 재미가 없다고 한다.[41] 선라이즈에는 전직 스트리트 파이터에 괴력의 호걸이라는 타카하시 료스케가 있는데 그 타카하시를 이겼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