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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09:03:29

무시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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虫プロダクション
무시 프로덕션 (통칭 '무시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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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전성기에서 몰락까지2.2. 전설적인 멤버들2.3. 지나치게 자유로운 회사2.4. 파산 후
3. 대표작4. 무시 프로덕션의 계보 회사5. 참고 자료

1. 개요

1962~1973년까지 존재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당시에 경쟁하던 회사로는 토에이 애니메이션, 철인 28호로 유명한 TCJ, 타츠노코 프로덕션, 도쿄 무비, 즈이요 엔터프라이즈였다. 창업주는 데즈카 오사무.

2. 역사

2.1. 전성기에서 몰락까지

데즈카 오사무가 당시 농촌이던 도쿄도 네리마구 후지미다이의 땅을 사서 1960년 8월에 사저를 신축하고, 그 남은 공터에 임시적으로 작은 콘크리트 창고 건물을 짓고 애니메이션 제작 실험실로 이용했다. 일부러 도쿄의 중심부에서 멀리 벗어난 변두리 네리마구로 이사를 온 이유는 토에이 동화가 네리마구에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만화 블랙잭 창작비화 ~데즈카 오사무의 일터로부터~에 건물의 건축 과정(1, 2, 3)이 나오는데, 데즈카는 땅을 살 때부터 본인이 살 집을 땅의 한쪽 구석에 지었고, 나머지 8할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지을 면적으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1962년 4월에 무시 프로덕션 제1스튜디오를 완공한다.

이윽고, 스태프로 토에이 동화 출신 사카모토 유사쿠와 오토기 프로덕션[1] 출신 야마모토 에이이치를 합류시켰다. 이 셋은 1962년 실험작품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를 만들어 제1회 오후지 노부로상 등을 받았고, 1963년 일본 최초 주간 연재 20분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을 제작하면서 일본 TV프로그램에 주간 TVA 제작 붐을 일으켰고, 업계 최초로 해외 진출을 했다. 주로 밀림의 왕자 레오, 리본의 기사, 도로로와 햐키마루 등 데즈카 만화를 애니화했다. 타 만화가 작품을 원작으로 제작한 것 중 가장 유명한 건 내일의 죠이다. 작품의 성공으로 스태프 수도 조금씩 늘어 1964년 230명, 1966년 400명이 됐다.
신생 제작사라 데즈카 오사무가 직접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급료의 2배를 주겠다. 라는 조건으로 사람들을 스카우트하고 다녔다고 한다.[2] 그래서 직원들 상당수가 자동차를 끌고 다닐 수가 있었고 데자키 오사무아라키 신고처럼 만화가를 포기하고 애니메이터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 그리고 종종 저임금에 시달리던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애니메이터가 이 회사 작품을 몰래 그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3] 그럼에도 한국 및 일본에서는 애니메이터를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회사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를 뒤흔드는 새로운 시도도 했는데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이 그림 그리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잡일을 봐주는 제작진행, 부족한 작화를 성우 연기로 커버하기 위해 성우의 연기를 지도하는 '음향 감독' 직책 등이 무시 프로덕션에서 정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데즈카의 인기 만화 원작이라는 소재가 고갈되고, 데즈카 사장의 독단적 제작방식과 라이벌 회사와의 경쟁, 지나친 인건비, 인력난 등으로 제작비와 인건비의 빚이 쌓이자 1966년 기준 4백 명에 이르던 종업원이 이듬해를 기점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사카모토 유사쿠 등 초기 멤버들이 회사를 떠났고, 1968년에 데즈카 사장이 데즈카 프로덕션이라는 독자 회사를 세우고 1971년에 무시 프로덕션의 사장직을 사임하면서 주로 데즈카와 관계없는 애니들을 제작해 오다가 1973년 8월 관계사 무시프로덕션상사가 파산됐고, 말기에는 은행으로부터 차입을 못 받아 방송사들의 발주까지 끊겨 11월에 최종 도산했다.

남은 직원들은 신에이 동화의 전신격인 A 프로덕션으로 모였다. 이 회사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에서 쫓겨난 사람들도 불러 모았는데 연출을 중시하는 무시 프로덕션 출신과 작화를 중시하는 토에이 출신들의 스타일 차이, 서로가 서로 때문에 직장을 잃었다는 원망 때문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으며 얼마 안 가서 해체되었다.

그리고 남은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가 훗날 다시 뭉치는데 이 회사들이 선라이즈, 매드하우스이다. 박력있는 액션과 풍부한 움직임의 작화를 좋아하는 멤버는 선라이즈로, 정적인 연출과 아름다운 화면을 중시하는 멤버는 매드하우스로 들어갔다.

2.2. 전설적인 멤버들


이들의 면면을 보면 데즈카 오사무의 인재를 보는 안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야스히코 요시카즈처럼 학생운동 경력이 있어 취업이 거의 불가능했던 인물까지 받아줄 정도로 재능만 보고 뽑았다. 야스히코의 말로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은 도쿄 예술 대학 정도는 나와야 정직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엘리트 회사였지만 무시 프로덕션은 학력 하나도 안 보고 오직 능력만 보고 뽑았다고 한다. 사내 분위기도 연공서열 없이 능력있는 사람이 고속승진하고, 능력있는 사람 말을 무조건 따르는 능력 위주였다고 한다. 그래서 생판 신인이었던 토미노 요시유키데자키 오사무가 20대의 나이에 감독까지 맡을 수 있었다.

몇 명은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직원들을 헤드헌팅했다. 당시 데즈카 오사무는 토에이의 회사 정문 앞에 수시로 나와 실력있는 애니메이터와 연출가에게 "토에이의 봉급의 2배를 줄 테니까 우리 회사로 와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토에이에서는 영업 방해라고 화냈다고 하며 토에이에서 무시 프로덕션으로 가는 애니메이터는 배신자라고 해서 퇴직금도 주지 않는 등 견제를 했다고 한다. 이에 대응해 데즈카는 퇴직금에 해당하는 금액까지 이적료에 포함시켜서 제시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건 이 사람들은 무시 프로가 망하고 나서야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코즈마 신사쿠는 무시 프로덕션이 만든 애니 중에 괜찮은 것도 있지만 이 정도의 환경에서 그거 밖에 못 만든 데즈카 씨는 능력이 부족한 거라고 하기도 했다.

2.3. 지나치게 자유로운 회사

사고를 쳐도 사람을 자르지 않고 계속 고용하며 돈을 줬다고 한다. 이는 경영과 인사를 담당하던 사장 카와바타 에이이치(川畑栄一)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생긴 문제였다고 한다. 타카하시 료스케에 따르면 자신이 1년 동안 제대로 일을 안 했음에도 회사에서 자르지 않았다고 한다. #

선라이즈 출신 프로듀서 우에다 마스오는 무시 프로덕션이 훌륭한 멤버를 데리고도 작품 질이 낮았던 것에 대해서 아이러니하게도 데즈카 오사무가 직원에게 고정급을 너무 많이 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일을 대충해도 고정으로 월급이 고액이 나오니 무시 프로덕션의 직원들은 토에이 애니메이션, 타츠노코 프로덕션의 일도 받아가며 돈을 2배로 챙겼다고 한다. 영화나 게임과 달리 애니메이션은 이렇게 몰래 일해도 잘 들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집에 가서 다른 회사 일을 밤새 봐주고는 무시 프로에 출근하면 매일 잠만 잤다고 한다. 타카하시 료스케도 이런 짓을 했으며 한 번 몰래 타츠노코 프로덕션일을 봐주러 갔더니 무시 프로 직원이 잔뜩 있어서 놀랐었다고 한다. # 타카하시 료스케는 슬럼프가 와서 한 1년 동안 아무 일도 안 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봉급이 나와서 자신은 좋았으나 "이 회사 이대로 괜찮은가?"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지경이니 직원이 300명이 있는데도 애니메이션 1편이 펑크가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시 프로덕션 멤버들은 무시 프로덕션이 망하고 선라이즈를 창업할 때 애니메이터에게 고정급은 주지 말고 전부 프리랜서로 하고 성과제로 봉급을 지급하자고 정하는데 동의했다고 한다. # 선라이즈 프로듀서 야마우라 에이지도 동일한 견해를 밝혔다. 야마우라 에이지는 좋은 대우에 오히려 나태해지는 무시 프로덕션의 직원들을 보며 인간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선라이즈는 철저한 실적제를 도입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도제식으로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식으로 흘러갈 때가 많은데 이 회사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유는 데즈카 오사무가 창작이란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을 보고 연구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아무에게도 창작법을 안 가르쳐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시 프로덕션 출신 인물들은 눈동냥, 귀동냥으로 스스로 배웠다는 이야기가 많으며 무시 프로덕션 시절의 스승을 잘 언급하지 않는다. [4] 반면 토에이 애니메이션은 도제식이었다고 한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데즈카 오사무가 사장인데도 사원 눈치를 보고 철완 아톰 스케줄을 망쳤다고 출입 금지를 당하는 일이 있을 정도로 어이없는 회사였다고 한다. 그 정도로 자유로운 회사였고 데즈카는 자신의 원작을 멋대로 변경해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 회사는 회사가 아니었고 데즈카가 '작가'의 모임으로 만든 곳이 아니었을까 한다고.

스기이 기사부로는 "데즈카 오사무가 애니메이션으론 별로 한 게 없다고 애니메이션 쪽에서는 상을 안 주는데 무시 프로덕션의 자유로움이 인재를 키워냈다." 라면서 "데즈카 오사무도 충분히 애니메이션 공로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라고 주장했다.

오시이 마모루누노카와 유지에게 "무시 프로덕션은 데즈카 오사무가 사비를 탕진해가며 유지했던 크리에이터의 낙원이었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고 한다. 그래서 누노카와는 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이런 회사는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2.4. 파산 후

1979년에 구 무시프로덕션 노조원들이 사명을 물려받고, 신 무시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주로 예전 무시 프로덕션의 저작권 관리 및 아동 대상의 소규모 상영회를 위한 교육용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회사가 되었다. 가장 유명한 대표작은 어린 소녀의 태평양 전쟁 체험담을 그린 <うしろの正面だあれ>

본사는 도쿄도 네리마구 후지미다이 2쵸메 30-5에 있다.

2021년 기준 애니메이션 제작업은 더이상 하지 않고 저작권 관리만 한다.

3. 대표작

제작 시간순

4. 무시 프로덕션의 계보 회사

5. 참고 자료



[1] 신문만화 <후쿠쨩> 작가 요코야마 유이치가 세운 애니메이션 제작사. 당시 스태프 수는 20~30명으로 토에이의 1/10 규모였다.[2] 너무 대놓고 뻔뻔스럽게 토에이 동화 퇴근길에 회사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회사로 오라고 스카웃 제의를 해서, 토에이 동화가 곤란해 하며 적어도 퇴사한 후에 6개월 정도는 지난 후에 모셔가는 것은 어떠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3] 오오츠카 야스오, 오쿠야마 레이코 등의 애니메이터가 토에이에 비밀로 하고 이 회사 작품에 참가한 적이 있다.[4] 토미노 요시유키 같은 경우는 몇 명을 스승으로 언급하지만 무시 프로덕션이 망하고 만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