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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12 11:53:27

츠키오카 사다오

1. 개요2. 참가 작품3. 작화, 연출 샘플

1. 개요

月岡貞夫
일본애니메이터, 애니메이션 감독. 교수. 니가타현 니가타시 키타구 출신이자 1938년 5월 15일 생. ([age(1938-05-15)]세)

모리 야스지, 오오츠카 야스오와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 초창기의 천재라 불렸던 인물 중 한 명이지만 TV 애니메이션의 제작 시스템과 상업 애니메이션을 싫어해서 짧은 단편 작품을 제작하는 개인 제작자의 길을 걸었으며 제자를 육성하는 교육자로 더 유명한 인물이다.

친가가 영화관을 경영하고 있었고 어릴 때부터 필름을 직접 볼 기회가 있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필름을 보며 그림을 이렇게 그리면 움직임이 완성되는구나 라는 이치를 깨달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데즈카 오사무를 존경해 그에게 편지를 보내며 교류를 나눴고 고등학교 때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어시로 들어간다. 데즈카는 그의 실력을 매우 높게 봤고 토에이 동화에서 만드는 애니메이션 영화 서유기의 제작에 자신이 참가하지 못하자 츠키오카와 이시노모리 쇼타로를 보내 설정과 같은 밑작업을 돕게 했다. 그러나 애니메이팅에 대한 지식이 있었던 츠키오카는 작화에도 손을 댔다. [1] 그는 이것만 하고 데즈카의 어시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토에이에서 당신은 애니메이터의 재능이 더 뛰어나니 계속 남아달라고 해서 데즈카를 떠나 토에이에 입사하기로 결심한다. 서유기에서는 동화로 크레딧되어 있었으나 애니메이팅 실력이 뛰어나 바로 원화로 승격되어 원화를 그렸다고 한다. 토에이에서는 오오츠카 야스오와 함께 천재로 불렸다 한다.

훗날 인터뷰에서 토에이 동화는 일을 배우기에는 정말 좋은 환경으로 좋은 학교였다고 말했다. 여러 작화반에는 각각 반장과 팀원이 있었는데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는데, 다른 팀이 일하는 것을 구경하러 가도 나이가 많은 탓도 있어서 거절당하지 않아서 자주 작화작업을 훔쳐보러 돌아다녔다고 한다. 훔쳐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에서는 오오츠카 야스오와 함께 스사노오오로치를 퇴치하는 장면을 그렸으며 이 작화는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 남을 작화로 꼽힌다. 작화보루 세리카와 유고는 "데즈카 오사무 씨가 츠키오카는 애니메이션을 하기 위해 태어난 천재라고 했지만 아니다. 그는 애니메이션 속에서 현실로 온 사람이다." 라며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작화를 했다고 한다.

여기서 토에이의 신뢰를 얻은 츠키오카는 24세에 자신이 직접 기획한 토에이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작품 '늑대소년 켄'을 만들게 된다. 당시 토에이는 감독 시스템이 정립되지 않았으나 그는 작품의 연출과 작화에 크게 관여하며 실질적인 감독 노릇을 했다. 츠키오카는 데즈카 오사무를 통해 만화 연출을 배웠고 [2] 오로치 퇴치의 감독 세리카와 유고에게 애니메이션과 영화 연출을 배웠기 때문에 연출을 잘했다. 츠키오카는 이 작품에서 연출과 작화를 동시에 해내고 동화까지 그려내는 열의를 보였다. 이 작품은 당시 TV애니메이션으로서는 놀라운 질을 보여주며 시청률 28% 이상을 기록하며 인기몰이를 했다. 그러나 1주에 1회를 만들어야 하는 TV 애니메이션의 환경에서 혼자 모든 걸 맡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각 화에 연출가를 따로 두는 현대 TV 애니메이션의 시스템을 도입했고 혼자 작품을 통제하고 싶었던 츠키오카 사다오는 스태프와 갈등을 겪다가 방영 중간에 화가 나서 토에이를 그만두게 된다. 4화까지는 츠키오카 혼자서 연출도 하고 콘티도 그리고 원화도 작화도 했다. 그래서 늑대소년 켄 팬들은 츠키오카가 담당한 부분만 작품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퇴사 후에는 다시 데즈카 오사무에게 돌아가 무시 프로덕션에서 W3, 오공의 대모험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하고 이탈. 애니메이션 제작사 나크의 창설에 참가했다. 이후로는 자신이 모든 걸 통제하는 단편 예술 애니메이션, CM, TV프로그램 오프닝을 주로 만들었다.

1978년에는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의 설립에 맞춰 신입 애니메이터를 가르치는 교사로 투입되었다. 원래는 도쿄무비의 사장인 후지오카 유타가가 자신과 친한 오오츠카 야스오에게 신입사원 교육을 먼저 부탁했는데, 오오츠카가 미래소년 코난을 하고 있어서, 대신 츠카오카가 신입사원 선발부터 교육을 맡게 되었다.
문제는 도쿄무비가 토에이 동화와 무시 프로덕션 출신끼라 파벌 싸움을 해서 진통을 겪었던 터라, 경력직 애니메이터를 뽑지 말고 신입 사원을 뽑자라고 해서 아예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는 사람들을 뽑았더니 당시 텔레콤의 직원들은 대부분이 젊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츠키오카는 제자들에게 "우리는 새로운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말들 거다. 테레비 아니메나 기존 영화를 보고 독이 물들면 안된다." 라고 세뇌 교육 가르쳐놔서 헛바람이 들었고 TV 애니메이션 루팡 3세 일을 시키자 매우 대충해서 오오츠카 야스오가 수정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방송이 불가능한 에피소드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말 들어보면 애당초 다들 그림 실력이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TV 애니메이션 애니메이터를 업신여기는 등 인성에도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오오츠카는 결국 이들의 정신머리를 고치고자 다시 재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오오츠카 야스오는 츠키오카 사다오가 제자들에게 애니메이팅을 잘 가르친 건 사실이고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했을 뿐이니 그는 잘못이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여하튼 오오츠카는 츠키오가 때문에 몸 고생 마음 고생을 한 것은 사실이다.

1980년대에는 당시 일본에 얼마 없던 CG전문회사 테크노 퀘스트라는 회사[3]에 고문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이후로는 여러 교육기관을 거치며 제자를 육성했고 제자로는 카타부치 스나오, 사토 준이치, 안도 마사시, 야노 히로유키가 있다. 말년에는 중국에 스카웃되어 중국에서도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

굉장히 엄격한 인물이었지만 인성은 좋았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이 많아 토에이, 무시 프로덕션 출신 연출가, 애니메이터와 오랜 시간 인맥을 유지했다. 다만 오오츠카 말대로 고집이 강하고 다소 독불장군 같은 면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작업을 혼자 하는 1인 예술 애니메이터가 되었다.

드라마 나츠조라에 나오는 캐릭터 '사루와타리'는 츠키오카 사다오를 모델로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악역 칼리오스트로 남작의 모델도 츠키오카 사다오라는 설이 있다. #

작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로도 유명했는데 코즈마 신사쿠는 츠키오카 사다오는 일본 애니메이터 중 가장 작화를 빨리하는 사람이며 전설적인 영역이라고 한다. # 코즈마 신사쿠가 가장 존경하는 애니메이터이기도 하다.

작화할 때 디자인을 무시하고 자기 스타일대로 그리는 편이다. 마루야마 마사오 프로듀서는 "캐릭터 디자인을 무시하고 그려도 좋은 작화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최초의 일본 애니메이터는 츠키오카 사다오이다. 그 다음이 카나다 요시노리. 그 다음이 오오히라 신야." 라고 평했다.

2. 참가 작품

츠키오카 사다오 작화 모음 작화보루 제공

3. 작화, 연출 샘플

작화 모음
담배와 재
각본, 연출, 동화 츠키오카 사다오
어이 하니마루 OP
제작 츠키오카 사다오


[1] 이때 그가 손오공의 눈동자를 4개를 그려서 다른 동료들이 무슨 작화를 이렇게 그리냐고 했는데 이걸 다른 그림 사이에 끼워서 움직여보라고 하자 완벽한 움직임이 나와서 다들 놀랐다고 한다. 카나다 요시노리마츠모토 노리오 같은 기법을 쓴 셈이다.[2] 콘티는 만화 작법과 유사하기 때문에 만화 연출법이 상당히 도움이 되며 만화가 출신 연출가가 많다.[3] 실은 이 회사, 게임회사 타이토의 자회사였다. 그래서 게임 개발도 했는데 패미컴 RPG 졸작중 하나로 꼽히는 원조 서유기 슈퍼 멍키 대모험이 이 회사에서 만든 작품.[4] 데즈카 오사무 만화 원작.[5] 유아 교육용 프로그램 '엄마와 함께'에 나온 애니메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