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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22:14:14

안도 마사시

안도 마사시
[ruby(安藤, ruby=あんどう)][ruby(雅司, ruby=まさし)] | Masashi Ando
파일:안도 마사시.pn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출생 1969년 1월 17일 ([age(1969-01-17)]세)
히로시마현[1]
국적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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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니혼대학 예술학부 (졸업)
직업 애니메이션 감독, 애니메이션 연출가, 애니메이터
소속 프리랜서

1. 개요2. 이력3. 특징4. 인맥5. 참여 작품6. 작화 샘플

[clearfix]

1. 개요

안도 군은 사스가였어.
安藤君は流石だったね
오시이 마모루[2]

일본의 애니메이터, 애니메이션 감독, 애니메이션 연출가.

극장판 작품 전문 애니메이터로 1~2년을 들여 집중해 참여하기 때문에 참여 작품은 많지 않으나 참가 작품의 작화는 모두 높은 평을 받았다.

2. 이력

어릴 적부터 도라에몽을 좋아해서 후지코 후지오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후지코 후지오가 만화의 신으로 섬기는 데즈카 오사무가 어떤 사람인가 찾아보다가 블랙 잭(만화)를 알게 되었다. 그림 그리기는 어릴 적부터 좋아했고 독학으로 배웠으며, 중학생 때는 농구부, 고등학생 시절은 미술부 활동은 안하고 귀택부(동아리 활동 안하고 집으로 돌아가는)였다. 본인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라고 말했다.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으면, 만화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만화가라고 대답을 했지만, 스토리를 창작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꼭 반드시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애니메이션 업계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1984년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고 나서였다. 10대 때 잡지 아니메쥬에 나우시카나 라퓨타의 일러스트를 투고해서 게재가 된 적이 있다.

니혼대학에 진학하게 된 이유는 영화학과에 애니메이션 수업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 집안이 보수적이라서 애니메이션 전문학교보다는 4년제 니혼대학 예술학부에 다닌다고 하면 남들이 그래도 알아주고 더 인정받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니혼 대학 재학 중의 스승은 츠키오카 사다오라고 한다.

니혼대학 예술학부를 재학중인 1989년에 입사시험에 합격해서, 6개월 뒤인 1990년에 연수생 2기생으로 스튜디오 지브리에 입사했다. 입사 동기로는 요시다 켄이치가 있다.

연수생 시절에는 먼저 동화(나카와리), 클린업, 걷기, 뛰기 등의 기본적인 것을 배웠고, 주 1회 과제로 정해진 테마에 맞는 그림을 보지 않고 기억력만으로 그려서 제출하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 그림을 검사하는 것이 있었는데, 모두들 미야자키 하야오를 존경해서 입사한 사람들이라, 그에게서 싫은 소리를 들을까 무서웠다고 한다.

신인 시절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그 재능을 인정받고, 단편 온 유어 마크에서 처음으로 작화감독을 맡았고, 26살의 젊은 나이에 모노노케 히메의 작화감독(공동)을 담당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감독 제의를 받았지만, 미야자키 각본과 그림콘티는 리얼리즘 지향의 자신의 작품관과는 달라서 감독을 할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다.[3] 대신 작화감독의 전권을 위임받아, 이전까지의 미야자키 스타일의 여주인공 묘사에서 탈피하여 현실적이고 리얼한 모습을 그리려고 했으나, 갈수록 미야자키가 예정에는 없던 레이아웃 수정과 원화 수정까지 지시하며 태클과 간섭이 들어와서[4], 여주인공 치히로의 성격변화 묘사와 행동 감정표현 묘사가 예전의 미야자키 스타일로 되돌아가버리는 것에 위화감과 실망감을 느꼈지만, 작화감독임에도[5] 동화 체크까지 직접하고 동화를 직접 그려서 추가하면서,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작품을 완성시켰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들면서 극도의 과로와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다고 한다. 안도는 제작종료 후의 인터뷰에서, 최종적으로 작품과 거리를 두게 되었던 점, 전체적으로는 미야자키 작품의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점, 당초 자신이 생각했던 작품이 실현되지 못한 점을 말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끝으로 지브리를 퇴사했다.
스즈키 토시오가 밝힌 제작 비화 ▼
||작화는 「모노노케 히메」에 이어서 안도에게 맡겼다. 전작인 「모노노케 히메」에서 미야는 당시 25세였던 그를 작화감독(공동)으로 발탁했다. 극장용 장편에다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라니. 20대의 젊은이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안도는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해냈다.
그런데 「모노노케 히메」의 제작이 끝난 뒤, 안도는 나를 찾아와서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지쳤기 때문이 아니었다. 미야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이 자신의 이상과 너무 달라 다른 곳에 가서 자신의 방식을 시도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프로듀서로서 그만한 실력자를 잃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붙잡기 위해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모노노케 히메」 때는 연기를 미야가 정하고 안도는 선의 통일과 캐릭터 정리만을 맡았다. 하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연기도 그의 방식대로 하라고 인정한 것이다. 안도는 대단한 각오를 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작화 작업에 들어갔다.
한편 미야도 환갑을 코앞에 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원화담당자가 올린 컷을 매일 밤 12시까지 수정했다. 하지만 안도는 겨우 서른이 아닌가. 체력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안도는 미야가 집에 간 뒤에도 밤을 꼬박 새우며 아침까지 작업을 했다.
안도라는 애니메이터는 ‘재미’보다 ‘정확도’를 우선하는 타입이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임팩트를 주기 위해 정확한 데생을 희생하는 일이 종종 있다. 미야 감독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키를 바꾸기도 하고 원근법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미야 그림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안도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정확하게 그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미야의 지시를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방식대로 ‘정확한’ 애니메이션을 적용해나갔다.
완성된 러시 프린트를 보면 미야도 안도가 어떻게 작업하고 있는지 알아차린다. 그래도 처음에는 마음속의 분노를 참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점차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노년에 접어든 베테랑 감독과 젊은 애니메이터의 치열한 싸움이다. 프로듀서로서는 마음이 조마조마하면서도 검호의 명승부를 보는 듯한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치열하게 싸운 결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매 장면은 손에 땀을 쥘 만큼 박력이 넘치게 되었다.
미야는 이때 자신의 노쇠함을 실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도도 타격이 없지는 않았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스스로에게 극한의 스트레스를 부과한 결과, 작화를 마쳤을 때는 머리칼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끝까지 해냈다는 만족감과 함께 그는 지브리를 떠났다." (정작 안도 마사시는 인터뷰에서 불만을 드러냈는데 스즈키 토시오는 안도가 만족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이후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는 곤 사토시 감독에게 인정받아 그의 작품 도쿄 갓파더즈(2003)에 참가했다. 곤 사토시는 도쿄 갓파더즈의 안도의 작화를 보고 만족해 캐릭터 디자인을 하지 않겠냐고 부탁했고 안도 마사시가 시안을 주니 당신은 천재라면서 이후 작품인 망상대리인파프리카에서는 안도 마사시에게 캐릭터 디자인·작화감독을 맡겼다. 안도는 곤 사토시는 자신과 가장 잘 맞는 감독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리얼함을 추구한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를 채용하고 보기 좋게 연출해주는 감독은 곤 사토시뿐이라며 미야자키보다 잘 맞았다고 한다.

2013년,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 원화로 참가, 오랜만에 지브리 작품으로 돌아왔다.

2014년, 스즈키 토시오의 의향으로, 추억의 마니작화감독을 맡았다.
스즈키 토시오가 밝힌 추억의 마니 제작 비화 ▼
||그리하여 스태프 구성이나 제작 현장 관리, 홍보에 이르기까지 프로듀서가 할 일은 전부 니시무라에게 맡기기로 했다. 단, 작품의 핵심인 작화감독과 미술감독만은 내가 정하기로 했다.
일단 작화감독에는 안도 마사시를 기용했다. 안도는 원래 지브리에서 키운 애니메이터이고, 「모노노케 히메」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작화감독으로 크게 활약한 사람이다. 그 이후 지브리를 떠나 여러 현장을 돌아다녔는데, 그때 「가구야공주 이야기」의 스태프로서 다시 지브리 스튜디오에 다니고 있었다.
작화감독으로서의 능력은 더할 나위가 없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마로보다 선배라는 점이다. 나는 마로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았다.
“안도는 어떤가?”
“안도 선배가 맡아준다면 마음 든든합니다.”
그런 다음에 안도에게 물어보았더니, 바로 원작을 읽어보고 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한 가지 희망사항이 있다고 한다. 자신이 이해한 다음에 그림을 그리고 싶으니까 시나리오이나 그림 콘티에도 관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로와 협의해보겠다고 하고 일단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중략)
그런데 이 영화에서 내가 GM으로 물러난 것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미묘한 문제다. 올라오는 그림 콘티를 보았더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방향이 조금 달랐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나리오 제1고에 비해 눈에 띄게 대사가 늘어난 것이다. 깜짝 놀라 니시무라 요시아키(추억의 마니의 프로듀서)에게 “왜 이렇게 대사가 늘어났지?”라고 물었더니, 안도의 제안으로 원작을 더 많이 반영하는 쪽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안도는 캐릭터의 연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는 ‘정확하게 그리는 것’에 집착하는 타입의 애니메이터다. 데생과 움직임도, 연기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면이 이번에는 그림만이 아니라 스토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화에서 사건을 그릴 때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그림을 보면서 따라가면 어쩐지 알 수 있다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대사로 확실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방식이다. 마로와 안도 사이에서 그런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안 그래도 감독과 애니메이터의 관계는 어려운 법이다. 미야와 안도가 같이 일할 때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공기까지 얼어붙게 만들곤 했다.||


2016년, 너의 이름은.의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감독을 맡았다 (메인 캐릭터 디자인은 타나카 마사요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너의 이름은.의 성공은 작화팀의 덕분이라고 밝혔다. 그전까지 신카이 감독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캐릭터의 섬세한 표정과 연기를 선보였다는 평가다.

일본 역대 방화 흥행 수입 1위인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을 제외하고, 2위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3위인 너의 이름은., 4위인 모노노케 히메에서 작화감독을 했다.

2020년, 우에하시 나호코(上橋菜穂子)의 베스트셀러 판타지 소설 <사슴의 왕(鹿の王> 을 애니화한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영화의 캐릭터디자인·작화감독,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공동 감독을 맡아 연출에 도전한다. 본인 말에 따르면 미야지 마사유키가 감독이고 자신은 작화감독인데 작화를 하면서 "이 작품은 이런 연출로 수정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제안과 아이디어를 계속 내니 "이렇게 관여한 것이 많으니 너도 감독으로 크레딧 해주겠다." 라고 해서 감독으로 크레딧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연출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굉장히 힘들었으며 역시 자신은 작화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감정을 풀고 2023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참가했는데 그가 참가하겠다고 하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뭐 안도가 돌아왔다고?!" 하고 기뻐서 뛰어나가 인사하고 어려운 작화를 맡기며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 카타부치 스나오의 신작에 작화감독으로 참가할 예정이다.

50살 즈음에 늦둥이 자식을 얻게 되었는데, 인생에 큰 변화가 생겼다면서 이제까지 어린이가 보는 작품을 그려왔는데, 진짜로 친자식이 생기니까 어린이를 위한 작품이 무엇인지 대해 더욱 실감이 났다고 말했다.

3. 특징

모든 것을 잘 그리는 슈퍼 애니메이터로 유명하다.

지브리의 선배 콘도 요시후미를 존경해서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캐릭터의 얼굴 표정을 묘사할 때 주름을 넣는 것도 콘도의 영향. 『近藤喜文の仕事―動画で表現できること―(콘도 요시후미의 일 - 동화로 표현할 수 있는 것)』(2000년) 이라는 콘도 사후에 출판된 책의 책임편집자를 맡았다.

콘도 외에는 스기노 아키오, 키세 카즈치카를 존경한다고 한다. 친구 겸 제자 요시다 켄이치 말로는 "내가 야스히코 요시카즈 스타일이라면 안도는 스기노 아키오 스타일이다." 라고 하기도 했다.

만화가 타카노 후미코(高野文子)의 팬이다. 센과 치히로의 작화감독을 할 때 적은 선으로 인간의 리얼한 라인을 그리는 타카노 후미코 스타일을 작품에 집어넣으려고 시도를 했다고 한다.

4. 인맥

같이 일하는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 곤 사토시가 있다.

같이 일하는 프로듀서는 마츠시타 케이코Production I.G가 있다. 지브리 퇴사 후에는 대부분 이 프로듀서 작품만 하는 편.

같이 일하는 애니메이터는 이노우에 토시유키, 이노우에 에이(井上 鋭)가 있다.

제자 겸 친구는 요시다 켄이치가 있다. 나이는 동갑이고 지브리의 입사 동기다. 요시다 말로는 동년배라 친해져서 서로의 작업물을 공유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5. 참여 작품

6. 작화 샘플

망상대리인 OP
콘티, 연출 곤 사토시 / 작화감독 안도 마사시
파프리카
감독, 콘티 곤 사토시 / 작화감독 안도 마사시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
감독, 콘티 오키우라 히로유키 / 작화감독 안도 마사시
추억의 마니
감독, 콘티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 작화감독 안도 마사시
너의 이름은.
감독, 콘티 신카이 마코토 / 작화감독공동 안도 마사시
본편 영상 대부분의 작화 감독은 안도 마사시이다.
사슴의 왕
감독공동, 콘티공동, 작화감독단독 안도 마사시

그 외 원화 작화는 작화보루의 포스트 참조


[1] 후쿠야마시의 북쪽 지역이라고 한다.[2] 이노센스 DVD 오디오 코멘터리에서 안도의 작화 부분(엔딩 직전 바토가 맡겼던 자신의 반려견 바셋 하운드를 데려올려고 동료인 토구사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을 보면서. 애견인(愛犬人) 오시이는 여기서 바셋 하운드의 특성과 느낌이 나온다고 칭찬.[3] 이때 미야자키가 하라는 감독 제안은 안도 마사시에게 연출을 전부 맡기는 게 아니고 귀를 기울이면 때처럼 각본과 콘티는 미야자키가 다 할 테니까 작화와 현장 감독만 대신 해달라는 소리였다.[4] 미야자키가 지시하는 연출 의도와 안도의 지시가 달라서 작화 스태프들이 곤란해 했다고 한다. 이건 순전히 전권을 맡긴다고 해놓고 약속을 어긴 미야자키의 잘못이다.[5] 작화감독은 원래 원화까지만 체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