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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6 23:40:56

콘도 요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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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경우 톱 크래프트에서 제작했으나 미야자키가 저작권을 가지기로 하고 제작한 작품이고 미야자키가 지브리에 저작권 관리를 위탁해 스튜디오 홈페이지 작품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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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력3. 특징4. 이야깃거리5. 작품 리스트

1. 개요

파일:Kondo_Yoshifumi.jpg
近藤喜文 (こんどう よしふみ)
1950년 3월 30일 ~ 1998년 1월 21일 (향년 47세)

일본의 애니메이터, 애니메이션 감독, 니가타현 고센시 출신.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주로 일했지만 지브리 일이 없을 때는 닛폰 애니메이션에도 왕래하며 작업했다.

지병으로 기흉이 있었고 몸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결국 요절하고 말았다.

2. 이력

1970년대 중반부터 미야자키 하야오타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에서 작화팀에서 활약했다. 유일한 감독작은 1995년 귀를 기울이면.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흥미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부에 소속했다. 1968년 3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상경해서 동경에 있는 도쿄디자인컬리지라는 학원의 애니메이션과에 입학한다. 처음에는 만화가가 되고 싶어서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문하생이 되었다가 위화감을 느끼고 나왔다, 같은 해 알바개념으로 학원에서 초청 강사로 강의를 하고있던 오오츠카 야스오에게 소개를 부탁해서 오오츠카 야스오가 A 프로덕션을 소개해 줘서 10월 1일 입사했다. 오오츠카는 콘도에 대해 잘 모르면서 추천해줬는데, 나중에 A 프로덕션의 제작팀장이 "어디서 그런 인재를 구했냐? 앞으로도 그런 인재가 있으면 꼭 소개해 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거인의 별에서 동화맨으로 시작했는데, 두각을 나타내고는 1년 만에 원화맨으로 승격했다. 19살 때의 일이다. 그러다 A 프로덕션에서 만든 루팡 3세 시리즈에 동화와 원화로 참가하면서 이때 연출을 맡은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콤비와 인연을 맺었다. 그들은 업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고 그는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을 감명깊게 본 적이 있었다.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1974년에는 회사 동료와 결혼. 1976년에는 일본 공산당에 당원으로 가입해서 거주지의 주민운동에 힘썼다. 1977년에는 장남이 태어났다.

1978년에 신에이 동화를 퇴사하고, 이후 타카하타와 미야자키 콤비와 행동을 같이 했다. 닛폰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서 미래소년 코난, 빨강머리 앤(캐릭터 디자이너와 작화감독. 29살)을,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에서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명탐정 홈즈의 원화를 그렸다.
명탐정 홈즈에서 모리아티 교수의 두 명의 부하는 콘도와 그의 동료 토모나가 카즈히데 콤비를 미야자키 하야오가 관찰하고 캐릭터화한 것이다. 그 캐릭터와 비슷하게 수줍음이 많고, 말수가 적은 성격이었다. 작화 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지원한 오른팔 왼팔 역할을 하는 원투 펀치적 존재였다.

미야쟈키와 타카하타가 떠난 텔레콤에 남아 리틀 네모파일럿 필름(1984)을 토모나가 카즈히데와 공동으로 연출했다.

1985년에 텔레콤을 퇴사하고 프리랜서가 된다. 같은 해 6월에서 8월까지 폐기흉(자연기흉)으로 입원 생활을 했다.

1987년, 스튜디오 지브리로 이적. 반딧불이의 무덤, 마녀 배달부 키키, 추억은 방울방울, 모노노케 히메에서 작화감독을 담당, 다른 작품에서는 원화맨으로 참여했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정사원 제도를 도입해서 정식으로 입사한 것은 1989년 9월이었다.

표현력이 정말 뛰어나서 타카하타 이사오는 그를 칭찬했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에겐 "넌 문제가 있어." 라면서 늘 지적하고 리테이크를 먹여댔으며 칭찬도 안 했기 때문에 미야자키는 콘도에게 강한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2]

반딧불이의 무덤이웃집 토토로가 동시에 제작 시에, 미야자키와 타카하타는 콘도를 서로 자신의 팀에 데려가기 위해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야자키는 다른 스태프는 괜찮으니 콘도만큼은 데려가야겠다고 우겼다. 아이들의 걸음걸이나 몸짓 등의 리얼한 표현은 자신보다 콘도가 더 잘 그린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결국 직접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타카하타가 "近ちゃんが描かなきゃ作らない(콘쨩(콘도 요시후미의 애칭)이 그리지 않으면 안 만든다.)"고 우겨서 그를 양보했다.
스즈키 토시오가 밝힌 제작비화 ▼
||두 편을 동시에 만든다는 것은 스튜디오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기치조지에 있는 지브리 스튜디오 근처에 스튜디오를 하나 더 빌렸다. 누가 어떤 스튜디오를 사용할지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미야는 원래 새로운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장 고민한 부분은 스태프였다. “두 편 동시 상영 스타트!”라고 말한 그날, 지금까지 일하던 주요 스태프들을 모두 미야가 확보해놓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그는 굉장한 사람이다.
그때 곤 짱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작화감독 콘도 요시후미를 미야와 다카하타가 서로 데려가려는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 무렵 미야는 하야시 아키코(林 明子)[3]라는 그림책 작가가 그린 『첫 심부름』이란 작품을 보고 감동한 상태였다. 그 책에는 네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등장하는데, 그 나이대 아이들은 대개 똑바로 서서 걷지 못하고, 반드시 몸을 앞으로 숙이든지 뒤쪽으로 젖혀서 걷게 마련이다.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한 사람이 하야시 아키코였다. 그림쟁이인 미야는 그런 점을 재빨리 발견하고, 그곳에 움직임을 붙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리얼리즘을 가장 잘 표현할 사람이 누구일까? 그때 찾아낸 사람이 콘도 요시후미였다. 당시 콘도는 지브리 사람이 아니라서 미야는 그를 설득하러 갔다.
한편 콘도를 원하는 것은 다카하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곤 짱이 좋아.”
원하는 사람이 미야와 겹친다. 조정을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나는 누가 콘도와 작업을 하는 편이 좋을지 몰라서 일부러 그를 만나지 않았다. 어설픈 마음으로 만나면 오히려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이때 재미있었던 것이 미야와 다카하타의 행동이다. 미야는 뻔질나게 콘도를 찾아가 열심히 설득했다. 반면에 다카하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야 씨는 콘도 씨를 설득하러 갔는데, 다카하타 씨는 가지 않아도 됩니까?”
내가 그렇게 말해도 “그건 프로듀서 쪽에서 정할 일이야”라고 대꾸할 뿐이었다.[4] 미야가 다른 사람을 추천해도, 다카하타는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카하타를 만나 직접 물어보았다.
“콘도 씨가 맡아주지 않으면 「반딧불이의 묘」는 어떻게 됩니까?”
“그럼 만들 수 없겠지.”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됐는데, 이제 와서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결단을 내린 것은 그때였다. 미야는 자신이 직접 그리면 된다……. 나는 콘도를 찾아가 솔직하게 물었다.
“솔직히 어느 작품을 하고 싶나요?”
“양쪽 모두 하고 싶습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주십시오.”
“저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스즈키 씨가 정해주시면 그걸 따르겠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원망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반딧불이의 묘」를 만들어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 길로 미야를 만나러 갔다.
감이 좋은 미야는 내가 가자마자 사태를 알아차리고 화를 내며 토해내듯 말했다.
“난 그만두겠어! 건초염이라고 하면서 내일부터 입원할 거야. 곤 짱을 빼앗겼다는 둥 분해서 일을 못할 거라는 둥 뒷담화는 딱 질색이야. 내가 입원하면 「반딧불이의 묘」도 만들 수 없겠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럴 때 나는 당황하지 않고 화내고 싶은 만큼 화내게 내버려둔다. 그러고는 미야가 집에 가겠다고 말할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준다. 편집자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작가가 화를 낼 때도 직성이 풀릴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8시쯤에 미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곤 짱을 마구 패줬어.”
깜짝 놀라 자세히 물어보니 꿈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미야는 이윽고 “이제 마음이 풀렸으니까 작품을 만들겠네”라고 말했다. 그것이 「이웃집 토토로」의 시작이었다.||


1995년 작 귀를 기울이면은 미야자키가 콘도에게 그동안 작화감독으로 오른팔 역할을 하며 도와준 은혜를 갚기 위해, 전부터 연출을 하고 싶다던 콘도에게 감독직을 맡기기로 한 약속을 지킨 작품이었는데, 각본과 그림콘티를 그린 미야자키 특유의 간섭이 심해서 만드는 내내 서로 의견 충돌이 잦았다. 귀를 기울이면 원작만화대로 남자 주인공을 화가 지망생으로 그리고 싶어하는 콘도에게 바이올린 제작자를 지망하게 한 것도 미야자키였고, 여주인공이 치마를 감싸며 다소곳이 앉는 장면에도 팬티가 보여도 되니까 확 주저 앉아야한다고 참견을 한 것도 미야자키였다. 훗날 콘도가 사망했을 때, 미야자키는 자신의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태도가 콘도의 죽음을 재촉했다며 자책하기도 했으며, 이후 다른 감독들과 작업할 때에는 가급적이면 심한 간섭은 자제하게 되었다고 한다.하지만 이후에도 하야오의 간섭 때문에 일어난 마찰로 안도 마사시와 호소다 마모루가 지브리를 떠난다...[5][6]

타카하타와 미야자키의 후계자로 촉망받는 인재였으나 모노노케 히메의 작화감독을 마치고 차기 연출 감독 작품이 기대되는 가운데 1998년 1월 21일 대동맥 박리로 사망했다. 몸에 무리가 가게 일을 많이 해서 갑자기 숨진 과로사였다. 훗날 부인이 말하기로는 병원에 실려가고 입원 수속도 밟기 전에 사망한 급사였다고 한다. 그는 이즈음 차기작으로는 하이타니 겐지로하늘의 눈동자 같은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 인터넷은 타카하타와 미야자키 두 감독중에 누가 콘도 요시후미를 죽였느냐는 테마로 글이 올라와 있기도 하다. 반딧불이의 무덤을 마치고 한 쪽 를 적출하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콘도가 스즈키 토시오에게 추억은 방울방울 때에 타카하타가 리얼리티 묘사에 너무 집착해서 까다롭고 육체적으로도 힘든 작업량을 요구해서 "高畑さんは僕を殺そうとした 高畑さんのことを考えると、いまだに体が震える(타카하타상은 나를 죽이려고 했다 타카하타상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린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증언이 있고, 귀를 기울이면 때에는 미야자키 하야오한테 연출 면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고 큰소리로 혼나고 서로 의견 충돌을 일으켜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폐기흉으로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훗날 "내가 끝을 내버린 것(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自分が終わりを渡してしまったようなもの」)"라고 말을 했다. 콘도의 장례식에서 화장장에서 베테랑 애니메이터가 "近ちゃんを殺したのは、パクさん(高畑の愛称)よね(콘 쨩를 죽인 것은 파쿠상(타카하타)이죠?"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그 말을 들은 타카하타는 말없이 한참 후에 고개를 끄덕거렸다고 한다.

장례식에서 타카하타의 뒷순서로 조사(弔詞) 를 낭독한 미야자키는 "왜 타카하타 작품 따위에 참가했느냐 내 작품에만 참가해야 했다."고 고인을 질책하면서 그를 잃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표했다.

콘도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처럼 지브리에 미야자키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는 상황은 오지 않았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지브리 팬들이 많은데 사실 생년월일을 보면 알겠지만 미야자키와 9살 차이로 후계자는 맞지만 '차세대'라고 하기는 어려운 나이였다. 어쨌든 콘도의 사망으로 인해 미야자키는 어쩔수 없이 모노노케 히메 제작 후 은퇴하겠다고 한 것을 번복하고[7] 복귀했는데 복귀한 후 만든 작품이 바로 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물론 그것과 별개로 콘도같은 출중한 애니메이터가 사망한 것은 당연히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이다.

한국에서는 콘도 요시후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지브리의 후계자 자리가 사라지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쩔 수 없이 다시 감독직으로 복귀했다는 식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전후사정을 따지고 살펴보면, 1997년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체력적인 한계를 느껴서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은퇴선언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감독직은 이제 더 이상 안한다는 거였고, 애니메이션은 계속 만들 생각이었다. 귀를 기울이면처럼 자신이 각본과 그림 콘티를 쓰고 감독직은 따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 감독직으로 염두에 둔 인물이 스튜디오 지브리의 젊은 유망주 31살의 안도 마사시였다. 하지만, 안도 마사시가 감독직을 맡기를 거부해서[8] 그렇다면 이건 내가 할 수밖에 없네라고 다시 감독을 하고 만든 것이 센과 치히로였다. 콘도 요시후미의 죽음은 1998년 1월의 일로 그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1997년에 이미 감독직은 안도 마사시에게 맡길 생각을 했고, 안도 마사시가 감독직을 거부해서, 본인이 다시 센과 치히로의 감독을 맡은 거라. 사실관계만 따지자면 콘도 요시후미의 죽음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독직 복귀는 거의 관련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참고로 미야자키는 2010년대에 요네바야시 히로마사를 감독으로 두고 기획과 각본은 자기가 하는 식으로 활동하기도 했다.[9]

3. 특징

현실의 풍경과 사람을 극도로 자세히 관찰해서 실현하는 리얼리즘 지향 작화 스타일로 유명하다. 만화적인 과장된 표현이나 화려한 특수효과를 되도록이면 배제하고,[10] 작품 속의 시간이나 공간을 왜곡하지 않는 편이다. 또한 캐릭터의 표정을 그릴 때 광대뼈와 주름을 그려넣어 리얼한 표정을 연출한다. 예전부터 종종 했었는데 추억은 방울방울이 특히 이런 게 많이 나온다.[11] 보통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선 개그 만화가 아니고서야 노인도 아닌 캐릭터에게 주름을 그려넣는 건 잘못하면 그림을 망치므로 금기시된다. 그러나 콘도는 어린이라도 미소녀라도 예외가 없다. 이것 때문에 예쁜 그림만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덮어놓고 저평가 당하기도 하는 애니메이터이다. 하지만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다양한 표정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에 캐릭터의 연기력을 중시하는 거장 연출가와 애니메이터들은 그의 작화를 최고라고 극찬한다. 이런 스타일을 지향하는 후배 안도 마사시는 콘도를 존경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콘도와 안도 마사시 외에 일본에서 콘도 요시후미 식 표정 작화를 하는 애니메이터는 타케우치 테츠야, 타나카 히로노리 등 극히 일부이며 그나마도 수정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후배 엔도 마사아키 말로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콘도에 대해 "내가 못 그리는 작화를 그려내는 사람이다."라면서 극찬했다고 한다. 타카하타 이사오와 콘도를 서로 쓰겠다고 싸우기도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콘도에게 후임을 맡기려고 했다는 것 때문에 연출력이 대단한 감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콘도의 연출력은 미야자키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연출을 한 작품이 별로 없다. 콘도는 어디까지나 뛰어난 애니메이터였고 연출력보다는 표현력과 관리력이 높은 인물이었다. 사실 미야자키가 그에게 감독을 맡기려고 구상한 건 콘도에게 작품의 연출을 다 맡기는 게 아니고 본인이 콘티를 하고 그걸 콘도가 현장에서 관리, 작화 수정하면서 작품을 완성시키는 구상이었다. 귀를 기울이면도 사실 미야자키가 콘티 짜준 작품이다. 콘도도 연출에 관여를 하긴 해서 감독으로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사실상 부감독이었고 미야자키는 그런 사람을 원했다는 것이다.[12]

일단 연출력은 있었다고 한다. 미야자키도 스즈키도 콘도는 머리가 좋고 관찰력이 있으니까 연출을 배우면 잘할 것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토모나가 카즈히데와 함께 리틀 네모의 파일럿 필름의 감독을 하기도 했는데[13] 오오츠카 야스오가 극찬하기도 했다. 살아만 있었다면 미야자키의 밑에서 연출을 하면서 감을 잡고 나중엔 자신의 작품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콘도가 제대로 감독과 콘티까지 다 했을 때 좋은 작품이 나왔다면 그의 연출력을 검증할 기회가 있었겠으나 아쉽게도 사망해서 그런 작품이 없다.

생전 본인이 감독을 한다면 색연필로 그린 것 같은 애니메이션을 해보고 싶다고 했고 귀를 기울이면도 그렇게 만들 예정이었으나 여러가지 문제로 그만두었고[14] 그건 타카하타 이사오가 하게 되었다.

4. 이야깃거리

요네바야시 히로마사가 연수생 시절, 그에게 애니메이션의 기초와 작화를 가르친 것도 콘도였다. 지브리 유튜브

타나카 아츠코, 타무라 아츠시도 콘도 요시후미의 제자다.

정치적 성향은 타카하타 이사오처럼 일본공산당 지지자로, 1976년에 입당한 당원이었다. 타카하타 감독과 함께 중국을 무대로 일본의 전쟁책임을 고발하려는 작품을 제작하려고도 했지만 천안문 사건의 여파로 취소되었다고 한다.

5. 작품 리스트

나무위키에서 검색하기 쉽게 대표작만 링크한다. 풀 리스트는 일본 작화위키 참조


[1] 1979년작 빨강머리 앤 때는 타카하타 감독이 작화감독인 콘도를 의지하고 편애하는 것을 보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어?라며 질투를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는 15화까지 참가하고 도중에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감독직을 자청하고 "앤은 싫다. 나머지를 부탁한다."며 떠나버렸다.[2] 타카하타 감독이 그를 편애한 이유 중의 하나는 빨강머리의 앤의 어린 시절의 4.5등신(두부(머리통)는 다 자랐는데 몸은 덜 자란 가분수 비율)의 어린이를 애니메이션으로 그 몸짓과 움직임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일본에 드물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콘도 요시후미의 그림을 검색하면 그가 그린 많은 어린이 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3] 마녀 배달부 키키의 초판본의 삽화를 그렸다.[4] 참고로 이 무렵 스즈키 토시오는 아니메쥬 편집부 소속으로, 두 작품의 프로듀서는 하라 토오루였다.[5] 이 이후에는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직접 기획울 해 미야자키답지않게 완전히 타 감독에게 맡겨보는 엄청난 시도를 했고 성공적이었으나 결국 모기업에 의해 제2의 후계자나 다름없던 모리타 히로유키마저 내쫓겨 결국 후계자를 찾지 못한 스튜디오 지브리는 지브리의 자랑거리였던 정규직 제도와 월급제를 스스로 전면 폐지해버리고 제작팀마저도 해체해버린 후 회사주식 상당부분을 닛폰 테레비에 매각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유포테이블, J.C.STAFF, A-1 픽쳐스, 샤프트, 프로덕션 I.G와 같은 제작사에 밀려 쇠퇴함을 보여주고 있고 애니메이션 스탭은 사실상 미야자키 고로, 스즈키 토시오, 미야자키 하야오 등을 포함한 소수만이 남아 사실상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개인 제작사가 되었다.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가 후계자를 찾겠다고는 했지만 후계자를 이대로는 못찾아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한 이후에는 미야자키 고로만이 남아 3D로 전환함과 동시에 2D 애니를 완전히 접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15년에야 간섭이 멈췄지만 그 직후 제작팀이 해체된 만큼 지브리에 들어오고 싶은 감독은 없을 게 뻔하다.[6] 또한 공교롭게도 콘도 요시후미와 모리타 히로유키는 모리타 감독이 맡은 영화 고양이의 보은이 귀를 기울이면의 극중극이라는 설정이 있는 만큼 둘 다 같은 원작자의 작품을 맡았다는 점이 연관점이 있으며 후계자로 예측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7] 이 때문에 콘도 요시후미가 살아있었다면 정말 미야자키가 은퇴했을 수도 있다는 설이 있지만, 미야자키는 이후로도 은퇴 선언을 여러번 번복한데다 2023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제작이후 오히려 나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라고 할정도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으면 견디질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은 얘기다.[8] 이후 세월이 지나 2021년 사슴의 왕으로 공동 감독으로 데뷔한다.[9] 미야자키 하야오가 후계자를 안 키웠다는 것도 낭설에 지나지 않고 미야자키는 예전부터 제자를 꾸준히 키우고 있었다. 단지 스폰서가 미야자키가 아니면 돈을 안 주겠다고 투자를 거부하거나, 지브리 스타일에서 벗어난 작품을 만들고자 회사를 나가는 등 여러 차질이 있어서 뜻대로 안 됐을 뿐이다.[10] 반대로 미야자키 작품에서 과장된 연출은 주로 토모나가 카즈히데가 맡았다.[11] 추억은 방울방울 제작할 때 이런 게 많았던 건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지시였다. 콘도도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한다. 출처: 스즈키 토시오의 지브리의 천재들. - 하지만 그것은 기술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애니메이션에서 광대뼈를 나타내는 선을 그리면 주름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콘도는 다카하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다카하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나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이 선을 그려야 합니까? 꼭 하라고 한다면 할 테니까 프로듀서가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카하타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콘도는 합리적인 사람이라서 내 지시를 받아들여주었다.[12] 안도 마사시요네바야시 히로마사에게도 그런 일을 시키려고 했다. 이들은 연출력이 어느 정도 있다는 걸 증명하긴 했지만 역시 미야자키 정도는 아니다.[13] 본편은 참가하지 않았다. 제작 중엔 참가하고 있었지만 1987년 제작이 정상화 됐을 땐 콘도는 이미 텔레콤을 떠난 뒤였다.[14] 나중에 타카하타가 비슷한 걸 만들었지만 할 수 있는 애니메이터도 별로 없었고 선의 통일감을 내는 작업이 까다로워 제작비가 폭등했다. 이런 이유로 색연필 애니메이션은 잘 제작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 역사로 봐도 색연필 작화를 많이 쓴 작품은 나무를 심은 사람 같은 일부 해외 애니메이션 정도고 일본 애니메이션은 카와모리 쇼지이하토브 환상~KENJI의 봄, 타카하타 이사오이웃집 야마다군, 가구야 공주 이야기 정도 밖에 없다. 아마도 그게 원인이었을 것이다.